한 노인은 눈이 벌겋게 충혈되고 눈가가 촉촉이 젖었다.사실 한 노인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한 노인은 이제 거의 여든에 가까운 고령으로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았다.하지만 류재훈과 다른 대종사들은 달랐다.대다수 대종사가 예순 언저리의 나이였고 앞으로도 살날이 많이 남아 있었다.만약 이곳에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는다면 정말 아쉬울 따름이었다.류재훈은 씩 웃으며 말했다.“한 어르신, 어르신이 목숨을 걸고 우리를 구하려고 하시는데 우리가 어찌 어르신 혼자 죽게 할 수 있겠습니까? 국안부에서는 그런 걸 가르치지 않았습니다.”“맞습니다, 국안부는 동포를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겁니다!”나머지 사람들도 힘차게 외쳤다.류재훈 일행의 말을 들은 한 노인의 눈에 뜨거운 눈물이 맺혔다.“좋아, 오늘 우리 모두 국안부를 위해, 대한민국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자. 이놈들에게 우리 대한민국 남자의 기개를 보여주자.”“목숨을 걸고 싸우자!”“목숨을 걸고 싸우자!”쿵!폭원단을 삼킨 여섯 사람의 실력이 순식간에 크게 상승했다.하늘을 뒤덮는 기세가 여섯 사람의 몸에서 폭발해 나왔다.“어리석기 짝이 없군. 너희들이 그 작은 약 하나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죽음을 각오한 여섯 사람을 보며 오다 신유는 눈에 경멸이 가득했다.두 세력 사이의 실력 차이는 그 작은 약 하나로 메울 수 있는 게 아니었다.뒤에서 지켜보던 고한수의 눈에는 경외감이 스쳤다.“이제야 알겠어. 왜 대한민국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지...”“됐어, 위선 떨지 마. 우린 이놈들 죽이러 온 거야, 어서 함께 덤비자.”오다 신유도 더 이상 무모하게 혼자서 류재훈 일행 여섯 명을 상대하려 하지 않고 다른 섬나라 무인들을 재촉했다.“다들 함께 달려들어 저놈들을 지옥으로 떨어뜨리자.”그 말과 함께 고한수를 비롯한 열한 명이 일제히 류재훈을 포함한 여섯 명을 향해 돌진했다.대한민국 대종사보다 수도 많고 실력도 우세한 섬나라 강자들을
다들 이미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고한수 쪽 역시 크게 이득을 보지는 못했다.아까의 격전에서 그들 중 네 명이 목숨을 잃었다.하지만 다행히 이 전투는 결판이 난 상황이었다.류재훈 일행은 더는 반격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아쉽군, 더 이상 나라를 위해 힘쓸 수 없다니.”한 노인은 한숨을 내쉬며 눈에 깊은 슬픔이 가득했다.류재훈 일행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에게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심지어 대다수 대한민국 사람은 류재훈 일행이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보이지 않는 배후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다.그러나 다들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난 것, 그리고 호국사로서 살았던 것을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지금 이 순간은 모두의 인생에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다.“다음 생이 있다면 다시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싶구나.”고한수는 깊은숨을 들이쉬며 말했다.“너희는 존경할 만한 상대야. 입장이 다르지만 않았다면 오늘 밤 너희와 함께 술을 나눴을 텐데, 안타깝구나...”“흥. 너희 섬나라는 우리 대한민국에 지울 수 없는 피의 빚이 있어. 대한민국 사람은 그 역사를 절대 잊지 않을 거야.”눈에 깊은 증오가 가득한 한 노인은 고한수 일행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며 대응했다.백 년 전 대한민국의 대재난 사건에서 섬나라는 수천만 대한민국 사람을 학살했다.기개가 있는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이토록 엄청난 죄악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죽여!”오다 신유가 차갑게 외쳤다.“너희가 우리 대한민국 땅에서 멋대로 날뛰는 걸 누가 허락했어?”바로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며 울려 퍼졌다.고한수 일행은 순간 움찔하며 목소리의 주인공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그곳에는 평범한 얼굴의 중년 남자가 손을 주머니에 넣고 서 있었다.그 남자의 옆에는 금빛 머리와 푸른 눈동자의 여자가 함께하고 있었는데, 여자의 눈부시게 섹시한 몸매를 본 섬나라 남성 몇몇 눈에 탐욕스러운 빛이 스쳤다.“얼씨구? 국안
바이올렛은 본래 고한수 일행이 진서준을 죽여 본인의 자유 되찾기를 기대하고 있었다.그런데 진서준이 바이올렛을 위협해 이 섬나라 무인들을 적으로 돌리게 할 줄은 몰랐다.바이올렛도 어쩔 수 없었다.진서준이 바이올렛의 몸에 이상한 표식을 심어 두었기 때문이다.그 표식이 있는 한, 바이올렛의 생사는 진서준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바이올렛의 주먹에는 붉은 선천강기가 감싸여 있었다.주먹이 고한수의 칼날에 부딪힐 때, 금속끼리 부딪치는 듯한 쟁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바이올렛의 강력한 주먹에 밀려 고한수는 연신 뒤로 물러났다.고한수의 검을 쥐고 있던 손아귀에서 피가 흐르고 검신에는 맨눈으로도 선명하게 보이는 균열이 생겼다.낯선 여자에게 밀려 연달아 후퇴하는 고한수를 보고 섬나라 무인들은 전부 충격에 빠졌다.한 노인과 류재훈 일행도 입을 떡 벌리고 믿기지 않는 눈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셋이 힘을 합쳐야 간신히 억제할 수 있는 고한수가 한낱 여자에게 밀리다니, 이건 너무도 놀라운 일이었다...고한수는 분노에 찬 외침과 함께 온 힘을 다해 검을 휘둘러 바이올렛을 반 발짝 물러나게 했다.그 틈을 타 고한수도 재빨리 후퇴했다.“너, 도대체 누구야?”고한수는 바이올렛을 보며 공포에 찬 눈으로 물었다.“이 여자는 내 하인이야.”진서준이 바이올렛 대신 느릿느릿 대답했다.자기가 진서준의 하인이라는 말에 바이올렛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하지만 반항할 수 없기에 바이올렛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뭐라고? 이 여자가 네 하인이라고?”하인이 이 정도라면 주인은 얼마나 강하단 말인가?고한수는 곧바로 진서준을 바라보며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넌 국안부 소속이 아닌 것 같은데?”“난 너희를 죽이러 온 사람이야. 그것만 알아두면 돼.”진서준은 가볍게 웃으며 여기 온 목적을 밝혔다.“말투를 보니까 너희는 섬나라에서 온 것 같은데, 고필두 그 녀석은 어디 갔어? 왜 안 보이지?”진서준이 고필두의 이름을 언급하자 고한수의 눈빛이 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지 사이로 검의 울림소리가 퍼져 나갔다.고씨 가문의 세 사람이 잡고 있던 검도 미세하게 떨리며 그 검의 부름에 응답하는 듯했다.“너희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직도 백 년 전처럼 억압받고 유린당하던 나라라고 생각해?”진서준은 손에 잡은 참선검을 옆으로 들며 차가운 눈빛을 내뿜었다.“용멸 계획이라고? 대한민국 천재를 모조리 죽이겠다고? 망상도 정도껏 해. 우리 대한민국 천재가 너희 같은 이족의 손에 살해될 것이라 생각해? 우리 대한민국 등뼈가 너희 손에 꺾일 수 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야.”진서준이 앞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쿵!주변의 물방울들이 하늘로 솟아올라 일곱 명의 섬나라 무인들을 가운데로 가둬버렸다.진서준의 몸에서 퍼져 나오는 엄청난 기세를 감지한 고한수와 오다 신유 일행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이 무인들이 전성기에 있었다면 진서준과 일전을 벌일 수 있었겠지만, 지금은 류재훈과 목숨을 걸고 싸운 직후라 체내 강기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지금 상태로 진서준과 싸운다면 승산은 삼 할도 되지 않을 것이다.“약을 써!”오다 신유가 격앙된 목소리로 외쳤다.다들 철저히 준비하고 왔기에 폭원단 같은 단약도 충분히 지참하고 있었다.오다 신유의 말에 모두가 단약을 꺼내 한 알씩 삼켰다.쿵쿵!단약을 복용한 고한수 일행의 기세는 진서준에게 밀리지 않았고 막상막하의 수준이었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서준은 이들을 바라보며 전혀 두려움 없이 평온한 눈빛을 유지했다.“그날 내가 네 아들을 한 칼에 베였듯, 오늘도 널 한 칼에 베여주마.”말이 끝나자 진서준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참선검을 거센 기세로 휘둘렀다.푸른 빛의 검광이 하늘에서 바다로 쏟아지는 폭포처럼 고한수 일행 일곱 명에게 쏟아졌다.칼날이 지나가는 곳마다 바닷물이 양쪽으로 들끓으며 깊이 백 미터에 달하는 해구가 형성되었다.푸른 칼날이 점점 길어지고 넓어져 마침내 천지와 맞닿을 정도로 커지자, 고한수는 움직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그 광경을 넋 놓고
류재훈 일행은 진서준이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보며 오랜 충격에서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이, 이분이 정말 사급 대종사 경지 김 검선이란 말인가? 어떻게 사급 대종사 경지로 고한수 같은 해외 강자들을 일격에 제압한 거지?”모두의 눈에는 놀라움이 흘러넘칠 정도로 가득 찼다.믿음직한 정보에 따르면 김평안의 실력은 사급 정점에 불과했고 오급에는 이르지 못했다.그러나 지금 김평안의 실력은 칠급 대종사급의 위력을 드러내고 있었다.이건 사급 대종사에 어울리지 않는 무시무시한 실력이었다.심지어 대한민국의 검존이라 불리는 조기강조차 이토록 놀라운 실력을 갖추지 못했을 것이다.“대한민국 인재가 끊이지 않으니 기쁜 일일세.”류재훈 옆의 노인이 말문을 열었다.“이는 우리 대한민국 무도가 쇠락하기는커녕 더욱 강대해졌다는 증거야. 해외 이족들이 우리 대한민국 무도를 꺾으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지.”류재훈 일행도 고개를 끄덕이며 노인의 말에 동의했다.“동남 지역은 이제 걱정 없겠지만 경성과 서북, 그리고 동북과 서남 방향의 상황은 아직 알 수가 없네...”이번 용멸 계획을 위해 초아국의 멸용 조직이 오랜 준비를 해온 만큼, 동남 방어선을 지켰다고 해서 대한민국의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았다.오히려 동남에서의 전투만 보아도 이번 전쟁이 얼마나 혹독할지 예감할 수 있었다.만약 진서준이 제때 도착해 구해주지 않았다면 류재훈과 같은 호국사들 모두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그렇게 되면 동남 지역의 천재들도 자연스레 해외 강자들에게 전부 살해당했을 것이다.“근데 에이미 가문의 바이올렛은 어떻게 김 검선의 하인이 된 거지?”누군가 호기심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아마 김 검선이 바이올렛을 이겼고 바이올렛이 죽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인이 된 걸 거야.”그 추측을 듣자 또 누군가가 혀를 끌끌 찼다.에이미 가문의 바이올렛은 서방 혈수사 중에서도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었다.불과 마흔일곱의 나이에 칠급 대종사에 오르고 지의방 랭킹에서 스물여섯 번째 자리에 있었다.대
바이올렛을 모르는 이들이야 어쩌겠냐만, 가문 내 사람들에게 알려지는 사실이 바이올렛은 내심 두려웠다.용란 귀족들은 자존심이 높고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그 귀족들의 눈에는 오직 귀족과 왕족만이 높은 지위에 자리 잡을 수 있고 평민들은 자기를 섬기기 위해 존재하는 천한 존재일 뿐이었다.만약 에이미 가문에게 바이올렛이 천민의 하인이 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녀는 틀림없이 처형당할 것이다.에이미 가문의 얼굴에 먹칠한 바이올렛을 그들이 가만둘 수 없을 것이다.진서준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대꾸했다.“아직도 네 신분을 제대로 파악 못 한 모양이구나. 지금 넌 내 포로야. 널 죽이는 건 내 한순간 결정이면 충분해.”바이올렛은 그 말에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너와 내 입장이 같을 것 같아? 네가 날 붙잡아 놓은 것도 다른 해외 세력의 침략 일정을 내게서 얻어내려고 그런 거 아니야? 다시 말하지만 우리 관계는 협력일 뿐이야!”진서준은 더 이상 이 여자와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기 싫어서 바이올렛을 지나쳐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이 벼락 맞아 죽을 놈!”닫힌 문을 바라보며 바이올렛은 지금이라도 뛰어 들어가 진서준과 밤새도록 결투를 벌이고 싶었다.하지만 이 생각은 머릿속으로만 가능한 일일 뿐, 실제로 행동으로 옮길 순 없었다.그렇게 했다간 바로 다음 순간, 바이올렛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만큼 생지옥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이다.방으로 돌아온 진서준은 내일 서북 지역으로 가기 위해 오늘 밤 충분히 쉬어두기로 했다.동남쪽 위기는 무사히 해결됐고 해외 세력의 다음 공격이 시작될 곳은 서북 사막이 될 예정이었다.진서준이 불을 끄고 취침하려던 순간,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전화 건 사람이 허사연이라는 걸 보고 진서준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혹시 집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하는 생각에 진서준은 급히 전화를 받았다.“사연아, 무슨 일이야? 집에 무슨 일 생겼어?!”진서준의 걱정이 섞인 다급한 질문을 듣자 허사연은 마음이 따뜻해졌다.“아니야, 여긴 아무
동북, 조씨 가문 저택에는 불빛이 가득했다.조기강과 조태희 두 사람은 거실에 앉아 국안부가 올린 게시물을 보고 있었다.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조태희는 조기강을 바라보며 말했다.“진서준과 김평안이라는 두 사람, 네 검존 명성을 완전히 가로챈 셈이구나.”조기강은 무덤덤한 표정만 지을 뿐, 전혀 화내지 않았다.“명성은 그저 허울일 뿐이야. 중요한 건 무엇을 이루었느냐지. 이 둘 중 한 명은 강남에서 악명이 자자한 두 악인을 처단했고 다른 한 명은 국안부의 대종사들을 구한 것도 모자라 섬나라 강자 7명을 단번에 베어 버렸어. 이 정도면 충분히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만해.”동생이 이렇게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자 조태희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조태희는 혹시나 조기강이 질투심에 사로잡혀 진서준이나 김평안과 겨루려 할까 봐 걱정했었다.만약 진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국안부는 분명 김평안과 진서준 편에 설 것이다.지금 조씨 가문의 위상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동북의 심씨 가문과 변씨 가문이 서서히 조씨 가문을 넘어설 기세였다.얼마 지나지 않아 동북은 세 가문이 세력을 나누는 삼국지 양상이 될지도 모른다.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조민영은 가문의 앞날을 위한 정치적 혼인의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하지만 내 검도 무디진 않았어.”조기강은 천천히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북쪽 변방에 외국 이족이 출몰한다 들었는데 내일 아침에 직접 가서 한번 살펴봐야겠어.”조태희는 그 말에 멈칫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좋은 생각이야. 검존의 실력이 그 둘에 뒤지지 않는다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좋은 기회야.”진서준과 김평안이 최근에 벌인 일들이 조기강의 자존심을 강력하게 자극한 모양이었다.조기강은 진서준과 김평안을 질투하는 건 아니었지만 자기 검존 봉호가 헛되이 주어진 것이 아님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했다.다음 날 아침, 조기강은 동북에서 북쪽 변방 초원으로 향했다.같은 시간, 진서준도 바이올렛을 데리고 서북의 안성에 도착했다
지금까지 진서준은 호국장 외에는 천의방에 오른 다른 강자를 본 적이 없었다.“나조차 신왕을 마주한다면 도망칠 수밖에 없을 거야. 그러니 네가 서북 상황에 관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바이올렛이 본인 안전을 위해 진서준을 설득했다.바이올렛은 사실 올림푸스의 신왕이 진서준을 제거하길 바랐다.하지만 올림푸스와 바이올렛의 조국 용란과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다.만약 신왕이 바이올렛에게도 적대감을 품는다면 상황은 상당히 복잡해질 것이다.바이올렛이 올림푸스 신전에 대해 이토록 상세하게 설명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바이올렛은 진서준이 이 정보를 듣고 포기하길 바랐고 자기를 데리고 같이 죽으러 가는 걸 원치 않았다.“천의방 강자라고? 오히려 흥미가 생기는군.”진서준이 덤덤하게 웃으며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듯했다.“김평안, 제정신이야?”바이올렛은 눈을 부릅뜨며 따졌다.“나조차도 신왕을 상대하기엔 버거울 정도야. 물론 너도 마찬가지일 거고.”사실 둘이 정면으로 싸운다면 진서준이 바이올렛을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그렇게 실력이 상당한 바이올렛조차 신왕을 보고 도망가야 할 판이니, 진서준이 나선다고 해도 무조건 이긴다는 보장은 없었다.“하지만 지금 넌 내 부하가 된 신세지.”진서준이 미소를 지으며 비꼬았다.“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협력 관계야.”바이올렛이 이를 악물고 반박했다.진서준은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발걸음을 옮겨 근처의 5성급 호텔로 향했다. 호텔에 들어서는 순간, 진서준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호텔 로비에 진서준이 잘 아는 사람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바로 유연비였다.유연비 옆에는 그녀와 약간 닮은 중년 남성이 함께 있었다.남자는 유연비의 아버지이자 서북 최고 가문인 유씨 가문 가주 유경풍이었다.서북을 주름잡는 유경풍은 이 순간, 동안 백발의 노인에게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추고 있었다.깍듯하게 인사하는 유경풍의 얼굴에는 오로지 경외심만이 가득했다.유경풍이 이렇게까지 존경심을 표하는 인물이라면 분명
“당연히 가능하죠. 그렇지 않았다면 제가 애초에 병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았겠죠.”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정말 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용존님.”그러자 진서준이 손을 내저으며 진지하게 말했다.“아직은 섣불리 고마워하지 마세요. 제가 치료하는 데에는 조건이 있습니다.”“무엇이든 말씀만 하십시오. 저 이용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기꺼이 돕겠습니다!”이용진이 자신 있게 가슴을 치며 말했다.“제가 약왕인 당신에게 부탁이 있다면 당연히 약재 때문이죠.”진서준은 차분하게 진서라의 체내 독소를 치료하기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약재를 설명했다.이용진은 그 얘기를 들은 뒤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용존님, 솔직하게 말할게요. 용존님이 언급하신 약재 중 혈령지는 제 약재 창고에 하나 있습니다. 하지만 나머지 세 가지 약재는 아쉽게도 제 창고에 없습니다.”“그것 하나만 있어도 충분합니다.”진서준은 크게 실망하진 않았다. 적어도 하나는 확보했으니 오늘 헛걸음을 한 게 아니었다.“얼마면 되겠습니까? 시세대로 구매하겠습니다.”이용진은 그 말을 듣고 자기 얼굴을 가볍게 툭툭 쳤다.“용존님, 가격을 말하는 건 제게 따귀를 날리는 겁니다. 용존님이 제 목숨을 구해주셨는데 제가 어떻게 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제 약재 창고에 나머지 세 가지 약재가 있었다면 전부 무료로 드렸을 겁니다.”이용진이 이렇게 호탕하게 나오자 진서준도 더는 사양하지 않았다.생명을 구해준 대가로 혈령지 하나를 받는 건 결코 과한 요구가 아니었다.“용존님, 급하지 않으시다면 식사를 마친 후 제가 약재 창고로 가서 혈령지를 가져오겠습니다.”이용진의 제안에 진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게 하죠.”“오늘 식사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곽 선생님, 어서 앉으시죠.”이용진은 웨이터를 불러 이곳의 대표 요리를 전부 주문했다.이 대표 요리들만 해도 가격이 2억을 넘겼다.일반인 한평생 월급을 한 끼 식사로 소비하는, 그야말로 호화로운 만찬이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음식이 차려졌
이용진은 평생 실력이 이 정도로 무시무시한 청년을 본 적이 없었다.자기를 지키는 두 호위가 반응할 틈조차 없이, 아니, 심지어 방어할 기회도 없이 한순간에 당하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곽윤상 역시 진서준이 갑자기 공격을 시도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해명할 기회가 생겼다.“약왕님, 이분은 바로 국안부 용존님이십니다.”곽윤상이 재빨리 이 틈을 이용해 설명했다.“뭐라고? 네가 바로 그 용존이라고?”이용진은 입을 떡 벌린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진서준을 바라보았다.용존이라는 이름은 이미 명주시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대다수 명주시 명문대가는 이 절세 천재를 돈으로라도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진서준을 끌어들이려는 이유는 단순했다. 진서준이 아직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이었기 때문이다.스무 살 남짓한 나이에 용존이라는 봉호를 받은 인물이니 앞으로 거의 30년이 지나면 대한민국 전역에서 진서준과 겨뤄볼 만한 상대가 있을 리 없었다.심지어 4대 은거 문파조차도 진서준에게 미치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보시다시피 용존이 틀림없습니다.”진서준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진서준이 처음부터 용존이라는 신분을 밝혔다면 이용진은 아마 믿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밖에 없었다.대한민국 전역에서 이 나이에 육급 절정의 대종사를 단숨에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진서준 외에는 없었기 때문이다.이용진은 이제야 이 청년이 이렇게 자신만만하고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할 수 있었던 이유를 깨달았다.“용존님, 방금 제가 무례했던 점은 널리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약왕 이용진은 몸을 약간 숙이며 진서준에게 진심으로 사과했고 조금 전의 거만했던 태도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용진은 곽윤상이 명주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고 질책했었다.그런데 3분도 안 돼 본인이 직접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고 있었다.이용진은 지금 누군가가 그에게 귀싸대기라도 날린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약왕님, 앉으세요.”진서준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용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놀라운 기색이 담긴 눈빛으로 진서준을 바라봤다.진서준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방금 당신이 한 얘기는 전부 알고 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신 체내에 숨은 질병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비 오는 날씨에 수련을 하다 보면 체내 강기를 돌릴 때 복부 아래쪽에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 통증은 심하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도 있겠지요. 설령 신경이 쓰여 의사를 보인다고 해도 보통 의사라면 문제를 발견하지 못할 겁니다. 병원에서 사용하는 정밀한 장비로도 알아내기 어렵겠죠.”진서준의 이 말에 이용진의 표정이 한순간 어두워졌다.진서준은 정확히 이용진의 몸 상태를 파악하고 있었다.지난 2년 동안, 비만 오면 이용진은 온몸이 불편해졌다.특히 강기를 돌릴 때면 복부 아래쪽에서 은은하게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처음에는 이용진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그러나 점점 이상하다고 느껴져 성약당의 장로까지 불러 진찰을 받았지만 아무런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다.그런데 진서준이 오늘 초면에 단번에 이 문제를 짚어내자 이용진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그걸 어떻게 알았어?”이용진이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이며 묻자 진서준은 태연히 대답했다.“당연히 당신 얼굴을 보고 알았죠.”“얼굴을 본다고 어떻게 알 수 있어?”이용진의 표정이 밝아졌다가 어두워졌고 눈에서 분노의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터무니없군. 성약당의 장로조차 알아내지 못한 문제를 네가 단번에 알아냈다고?”이용진은 탁자를 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가락으로 진서준을 가리키며 소리쳤다.“이봐 청년, 솔직하게 말해. 내 곁에 내통자를 심어 놓은 게 아니야?”명주시에서 이용진 같은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은 항상 최악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계해야 했다.다시 말해 억울한 사람 천 명을 죽이더라도 내통자 한 명도 놓치지 않는 태도가 생존의 비결이었다.그렇지 않으면 명주시 같은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어려웠다.이용진 곁의 두 대종사도 이
‘이 녀석 미쳤나?’방 안의 모든 사람이 같은 반응을 보였다.이용진이 누구인가? 바로 명주시에서 누구나 다 아는 약왕이었다.전국을 논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절반 이상의 귀한 약재는 약왕의 손을 거친다.이런 사람이 어떻게 병에 걸릴 수 있을까?더군다나 매일 약재를 다루는 약왕에게 병이 있다면 명의들이 못 알아챘을 리가 없었다.그러니 진서준이 이용진에게 병에 걸렸다고 말한 건 미친 소리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소리였다.“이봐, 넌 지금 무슨 헛소릴 지껄이는지 알고는 있나?”이용진의 얼굴은 어둠 그 자체였다.그는 이곳에서 꼬박 30분 넘게 기다렸다.그런데 자기를 이렇게 오래 기다리게 한 장본인이 고작 이런 애송이였고 오자마자 병이 있다며 모욕까지 했다.평소 인내심이 깊고 신사적이던 이용진도 이 순간만큼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이용진의 분노를 눈치채자 곽윤상은 얼굴이 창백해졌고 겁에 질려 진서준의 옷자락을 살짝 당겼다.하지만 진서준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태연히 이용진 맞은편에 앉아 스스로 차를 따라 마셨다.진서준의 이 태연한 모습에 이용진은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랐다.아무래도 이 청년은 약왕인 이용진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듯했다.“난 똑같은 말을 두 번 하지 않아요.”진서준은 차 한 모금을 마신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진서준의 말에 이용진 오른쪽에 앉아 있던 대종사가 비웃으며 말했다.“약왕님은 무공을 수십 년간 연마하셨고 이미 종사 경지에 도달한 무인이야. 병에 걸렸다면 네가 말하지 않아도 진작 발견되었을 거야. 허튼소리도 정도껏 해야지.”보통 종사 경지에 오른 무인은 병에 걸리는 일이 극히 드물었다.무인의 근육, 뼈, 혈액은 이미 평범한 인간을 초월했기에 체내 바이러스조차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종사 무인이 병에 걸릴 경우라면 대개 다음 세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난치병이거나 중독이거나 아니면 심각한 내상이 있을 경우였다.하지만 이용진은 이 세 가지 어디에도 해당하지 않았다.난치병은커녕, 누군가의 독에
“여기는 국제적인 대도시잖아요.”곽윤상도 감탄했다.호텔 입구에 도착하자 교내 미인 대회에 나가도 손색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 안내원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손님, 저희 호텔은 회원제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식사나 숙박을 원하시면 회원 자격이 필요합니다.”곽윤상은 군말 없이 금박으로 장식된 카드를 꺼냈다.여성 안내원은 카드를 꼼꼼히 확인한 뒤,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곽 선생님, 안으로 모시겠습니다.”“이미 예약을 해두었습니다. 꼭대기 층의 5번 방입니다.”곽윤상의 말에 여성 안내원이 대답했다.“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확인해 보겠습니다.”여성 안내원은 프런트로 가서 예약 사항을 확인한 뒤, 두 사람을 엘리베이터로 안내했다.꼭대기 층으로 가는 직행 엘리베이터는 총 네 대였고 속도는 어마어마했다.무려 300미터의 높이를 단 20초도 되지 않아 올라갔다.꼭대기 층에 도착하자 진서준은 눈앞의 광경에 말문이 막혔다.사방이 투명한 유리로 되어 있어 멀리 보이는 구름층과 자기와 나란히 있는 듯한 달빛이 시야에 들어와 하늘 속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진 마스터님, 여긴 어떠십니까?”곽윤상의 질문에 진서준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내가 가본 레스토랑 중 가장 호화로운 곳 중 하나로군요.”“그렇긴 하죠. 이 호텔은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곳입니다.”곽윤상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이 호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회원이어야 하는데 꼭대기 층에 오고 싶다면 일반 회원으로는 부족하고 최소한 골드 회원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골드 회원권을 발급받는 데만 200억이 필요합니다.”골드 회원권이 200억이나 한다는 말에 진서준이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럼 일반 회원은 얼마인가?”“10 억입니다.”곽윤상이 손가락으로 숫자를 표시하며 말했다.“그리고 이 돈은 카드에 적립되는 게 아니라 그냥 회원권 발급 비용일 뿐입니다.”그 말을 듣고 진서준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전국을 통틀어도 이런 가격을 자신 있게 책정하는 곳은 명주시의 호텔들뿐일
진서준과 곽윤상은 약속된 호텔을 향해 차를 몰았다.가는 길에 곽윤상이 말문을 열었다.“진 마스터님이 황씨 가문 따님을 데리고 떠난 직후, 경찰청과 군부 사람들이 모두 몰려왔습니다.”그 총격 사건에 관련된 총잡이들은 물론, 사건 현장과 가까웠던 사람들까지도 모두 경찰서로 끌려가 진술을 받았다.하지만 진서준이 사람을 구할 당시 주변엔 이미 아무도 없었기에 누가 황예은을 구했는지는 아무도 보지 못했다.“아마 아무런 단서도 찾지 못할 겁니다.”진서준이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저쪽에서 고용한 사람은 대부분 죽음의 수행자입니다. 이런 더러운 일을 처리하기 위해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자들이죠.”아까 진서준이 그 총잡이들을 처리하면서 그들이 이미 중독된 상태란 걸 알아챘다.그 독은 독성이 맹렬한 독이었고 섭취 후 12시간 안에 즉사하게 되어 있었다.이를 통해 배후의 진짜 범인은 상당히 잔혹한 수단을 사용하는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곽윤상은 진서준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명문대가로 불리는 가문들은 흔히 이런 죽음의 수행자들을 양성한다.이 죽음의 수행자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주인이 명령만 내리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이었다.“명주시에서 이런 죽음의 수행자를 양성할 능력이 있는 가문이 어느 가문인지 알아요?”진서준의 질문에 곽윤상은 멈칫하다가 되물었다.“진 마스터님은 이 사건을 조사하려는 겁니까? 황씨 가문 따님과 친구 사이신가요?”“친구는 아니지만 내가 조사 중인 다른 일이 오늘 밤 사건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큽니다.”진서준이 답했다.간첩 문제는 어느 정도 윤곽이 잡혀가고 있었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다.황씨 가문의 실권을 장악한 황예은이 확보한 자료 중에 진서준이 필요한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솔직히 말씀드리면 명주시에서 황씨 가문과 박씨 가문 외에도 이런 죽음의 수행자를 양성할 능력이 있는 가문이 열 곳은 넘습니다.”곽윤상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명주시 규모가 너무 크지는 않지만 이곳은 땅값이 금값입니
잠시 후, 황예은이 엎드린 채 갑자기 구토하기 시작했다.검은색의 악취 나는 물질들이 황예은의 입에서 흘러나와 바닥을 적셨다.하지만 진서준은 이 상황을 보며 여전히 긴장하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황예은이 이물질을 다 토해낸 후, 진서준은 그녀의 몸에서 침을 뽑아냈다.그러고는 입가의 검은 물질을 닦아내고 황예은을 소파에 똑바로 눕혔다.“실례할게요.”말을 마친 진서준의 두 손이 황예은의 쭉쭉빵빵한 몸 위를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진서준은 일부러 황예은이 의식이 없는 틈을 타 뭔가를 시도하려는 게 아니었다. 황예은이 중독된 시간이 길었기 때문에 침 치료만으로는 독을 완전히 제거할 수 없었고 탐운19수라는 특별한 마사지 기법을 병행해야 했기 때문이다.이 치료는 진서준에게도 고역이었다.의사 앞에서는 남자나 여자나 다 똑같다고는 하지만 사실 현실은 달랐다.특히 이렇게 절세 미녀인 황예은 앞에서라면 어느 남자 의사라도 마음을 다잡기가 어려웠다.그때 갑자기 대문이 벌컥 열렸다.올기가 서지은을 집 안으로 들어보내고 곽윤상은 문밖에서 대기하게 했다.거실에 들어온 서지은은 알몸으로 누워 있는 황예은과 그녀의 몸을 만지고 있는 진서준을 보고는 황급히 문을 닫았다.“서준아, 너... 너 어떻게 예은 언니가 기절한 틈을 타 성추행할 수 있어?”서지은은 화난 표정으로 빠르게 다가왔다.“그건 오해야. 난 지금 이 여자 체내 독을 제거하는 중이야.”진서준은 씁쓸하게 웃으며 상황을 설명했다.서지은은 아무 말 없이 진서준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바닥에 있는 이 검은 물질은 전부 독이야. 이 여자가 방금 토한 거거든.”진서준이 바닥을 가리키며 한마디 덧붙였다.서지은도 바닥에 가득한 물질에서 풍기는 악취를 맡았다.“다른 방법으로 치료할 순 없었어?”“나도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지만 이게 가장 빠른 방법이야. 이따가 곽 선생님과 함께 약왕을 만나러 가야 하거든. 그 사람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어.”진서준은 이 수단을 사용한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했다
도시의 도로를 가로지르며 검은 그림자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존재가 있었다.주변 사람들이 무엇인지 제대로 확인할 새도 없이, 그 그림자는 순식간에 사라졌다.진서준은 황예은을 등에 업고 5분도 채 되지 않아 자기와 서지은이 머무는 별장으로 돌아왔다.별장에 들어가자 진서준은 서둘러 불을 켜고 황예은을 소파에 눕혔다.이때 황예은은 아직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몸에 묻은 핏자국은 이미 바람에 말라 피비린내가 거의 다 사라졌다.황예은의 몸에는 몇 군데 총상 자국이 있었고 꽤나 참혹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주요 부위는 피해 가서 치명상은 아니었다.“넌 밖에 나가서 별장을 지켜.”진서준은 어깨에 앉아 있던 올기를 향해 말했다.올기는 순순히 밖으로 날아가 진서준을 위해 문을 지켰다.올기가 떠난 후, 진서준은 황예은의 몸에 남은 옷을 천천히 벗기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예술 작품처럼 완벽한 몸매가 진서준의 눈앞에 드러났다.비록 여자의 몸을 처음 본 건 아니었지만 진서준은 자연스럽게 동작을 멈춘 채 멍하니 서 있었다.핏자국이 없었다면 황예은의 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몸매만으로도 진서준의 피를 끓게 할 만큼 매혹적이었다.진서준은 마음을 다잡고 손바닥을 황예은의 몸에 놓았다.진서준 체내의 영기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이내 황예은의 온몸에 퍼져나갔다.치료가 거의 다 끝나자 진서준은 손을 살짝 떨었다.그러자 황예은 몸 안에 흩어진 영기가 터진 풍선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속 총알을 튕겨냈다.총알은 무려 다섯 개나 체내에 있었다.여자는 고사하고 건장한 남자라고 해도 총알 다섯 발을 맞고 살아남는 건 정말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체내의 총알이 빠져나간 후, 진서준은 바로 젖은 수건으로 황예은 몸에 묻은 피를 닦아냈다.몇 군데 피가 황예은의 허벅지 안쪽에 흘러내렸다.“이건 다 널 살리기 위한 거야...”진서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황예은의 피를 닦아내는 데만 해도 수건 세 개가 전부 붉은색으로 물들어 버렸다.황예은의 몸에
게다가 지금 황씨 가문이라는 거대한 그룹은 황예은이 전적으로 통제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에서 황예은이 죽으면 황씨 가문는 크게 요동치며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다.그때는 대한민국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큰 일이 될 수 있었다.진서준은 급히 황예은을 부축해 차에서 끌어냈고 영기를 그녀의 몸에 주입해 출혈로 인한 상처를 치유했다.“주인님, 제가 도와드릴까요?”올기가 급히 물었다.“괜찮아, 여긴 보는 눈이 많아 넌 그냥 조용히 있어.”진서준은 황예은을 안고 단 몇 걸음 만에 곽윤상의 차로 돌아갔다.진서준이 차 안으로 돌아오자 서지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를 바라봤다.하지만 진서준이 안고 있는 사람을 보자 서지은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예은 언니!”황예은이 온몸에 피를 흘리고 있는 걸 본 서지은은 얼굴이 급격히 창백해졌다.“서준아, 아까 공격받은 사람이 예은 언니였어?”진서준도 놀라며 되물었다.“너 이 여자 알아?”“명주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람입니다.”곽윤상이 대신 대답했다.“이 여자는 명주시 최고 재벌 황경영의 딸입니다. 지금 황씨 가문 실권도 이 여자가 꽉 쥐고 있고요.”보아하니 황예은은 명주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인 듯했다.“예은 언니와 난 같은 대학에 다녔고 언니는 내 선배였어. 우리는 학교에서 꽤 친하게 지냈어.”서지은은 진서준의 손을 꼭 잡으며 초조하게 말했다.“서준아, 제발 예은 언니를 살려줘.”“걱정 마, 이 여자를 죽게 두지 않을 거야.”진서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곽윤상에게 말했다.“곽 선생님, 오늘 약왕과의 만남은 취소해야 할 것 같아요. 이 여자를 치료하는 게 시급한 것 같아요.”“알겠습니다, 바로 약왕에게 연락할게요.”곽윤상은 곧바로 약왕에게 전화를 걸었다.약왕은 약속이 취소됐다는 소식을 듣자 불쾌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명주시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인 약왕은 누군가가 약속을 잡았다가 제멋대로 취소할 수 있는 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곽윤상, 난 당신 스승 체면을 봐서 만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