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마 이 여자의 조사에 대한 조사에 착오가 있었단 말인가?하지만 유주헌은 마치 보물을 발견한 듯 미소를 활짝 지어 보이고는 가슴이 벅찼는데도 예의를 지키며 물었다.“사모님, 혹시 화학을 전공하셨어요?”강물처럼 맑은 눈을 가진 서다인은 순간 머리가 하얘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모르겠어요, 기억이 없거든요.”“기억이 없다고요?”유주헌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보였다.“그럼 청유액이랑 레늄 원소는 어떻게 알고 있어요? 해독할 줄도 아시잖아요.”서다인이 한참 고민을 하다가 여유롭게 대답했다.“요리할 때는 소금을 넣어야 하듯이, 낚시할 때는 미끼를 던져야 하듯이, 이건 상식 아닌가요?”그녀의 말에 유주헌은 감탄을 금치 못하면서 숭배의 눈빛으로 서다인을 바라봤다.멀지 않은 곳에서 정호와 류청은 부하들과 함께 중독된 사람들에게 식용 알칼리수를 마시게 했다.얼마 있지 않아 사람들의 구토 증상과 복통이 사라졌다.머리가 아직 어지러웠지만 그래도 해독약의 효과는 대단했다.류청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예의를 갖추며 그에게 알칼리수를 건넸다.“도련님, 효과가 좋으니 하린 씨께 드리세요.”백하린이 어금니를 깨물었다. 그녀는 주목받는 서다인이 싫어 고집을 부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안 마셔요.”남하준이 미간을 구기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안 마셔?”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하준 오빠, 나 이런 거 안 마실래요. 서다인 언니는 중학교도 졸업 못했잖아요, 지식도 없는데 내가 어떻게 믿고 마시겠어요.”중학교도 졸업 못했다니, 그럼 초졸이란 말인가?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람들이 경멸이 깃든 눈빛으로 서다인을 훑어보기 시작했다.서다인은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속상하고 억울했지만 뭐라고 반박할 수도 없었기에 일부러 괜찮은 척하며 입을 열었다.“하린 씨, 차래지식을 먹지 않으려는 그 패기, 대단하시네요. 어떤 상황에서도 원칙을 지켜나가시길 바랄게요, 화이팅!”말을 마친 서다인이
깊은 밤.서다인은 샤워를 마친 후 햇살이 가득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잃어버린 휴대폰을 들고 뉴스를 확인했다.그녀를 납치한 김호영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사기 센터의 피해자들도 모두 구출되었다. 그리고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은 남하준의 부하들에게 잡혀 경찰에 인계되었다.그녀의 가방도 휴대폰도 모두 되찾았지만 아쉽게도 3년 동안 모은 돈은 모두 그녀의 친오빠가 빼돌렸다.지금의 그녀에게는 이 휴대폰 말고는 무일푼이다.기억을 잃은 후로 그녀는 은경애를 만났는데 은경애는 마치 원래 그녀를 알고 있던 것처럼 예뻐했고, 꼭 그녀를 곁에 두려고 했다.그렇게 서다인은 은경애 옆에서 3년 동안 간병인을 해 왔다.친구도 없고 불운과 재앙만 안겨주는 가족을 찾아갈 수도 없으니 생활고에 쪼들리는 지금 누구에게 돈을 빌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서다인이 생각을 거두고는 문 쪽을 바라봤는데 남하준의 튼실하고 넓은 어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지금 문을 닫고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서다인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에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푹 숙여 휴대폰으로 디지털책 아무거나 하나 열어 읽기 시작했다.남자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는데 그가 내디딘 걸음마다 서다인의 심장을 강타하고 있었고 긴장감은 갈수록 커졌다.남하준이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남하준은 베란다 난간을 등진 채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압감을 풍기는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와 눈을 마주치자 서다인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만 겨우 침착을 유지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왜 나를 그렇게 봐요?”남하준이 대답했다.“정말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잊었어?”“네.”서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남하준이 입술을 감쳐물고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또 물었다.“청유액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서다인의 머릿속에는 이 물질
서다인이 방 안의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요 며칠 하준 씨 책장에 있는 책은 전부 다 읽었어요.”남하준이 한 번 더 물었다.“정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겠어?”서다인이 고개를 숙였다.“네, 나 내일 아침 바로 갈 거예요. 앞으로 이곳에 올 기회는 더 없겠죠.”남하준은 더는 그녀를 설득하지 않았다.그녀의 곁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면서 외투 단추를 풀며 당부했다.“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마. 할머니께서 자극받으실까 봐 걱정돼.”휴대폰을 쥐고 있던 서다인의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괴로운 감정이 북받쳐왔다.“미안한데 하준 씨 책에서 어떤 여자애 사진을 봤어요. 그 뒤에 ‘내가 사랑하는 여자 백하린’이라고 쓰여 있더군요.”외투 단추를 풀던 남하준이 멈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진 듯 제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서다인은 가슴이 비수에 꽂힌 듯이 아팠다.말 못 할 고통에도 애써 괜찮은 척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하린 씨겠죠?”한참 뒤에야 남하준이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 외투를 벗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하린이를 많이 좋아했던 건 맞아. 하지만 하린이가 14살 때 외국 명문 학교에 합격했거든. 하린이가 출국한 뒤로 우리는 연락이 끊겼어. 10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났지. 심지어 하린이가 돌아온 첫해에도 두 사람 사이는 어색했어.”말을 마친 후 남하준은 곧장 욕실로 향하고는 문을 닫아 샤워하기 시작했다.그의 설명에도 서다인은 괴로운 마음이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내연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하준과 백예린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남하준은 분명 백하린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사랑도 감정도 없는 이 결혼에서 고통스럽게 버티지 않았을 것이다.찬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서다인의
남하준이 방을 떠난 후 긴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하고는 불을 켰다. 그리고 백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애교 섞인 백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몸도 마음도 피곤한 남하준이 나지막이 물었다.“뭐가 두려워?”백하린이 애교를 부렸다.“그냥 너무 무서워요, 그냥 와서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남하준이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밤 11시가 되어 단호하게 거절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가 너희 집 앞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보낼게. 두려워할 필요 없고 일찍 쉬어. 나 내일 아침 일찍이 다인이를 안성에 데려다줘야 해.”백하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렸다.“정호 씨가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준 오빠가 데려다줘요?”남하준이 테이블 앞에 앉고는 이마를 짚은 채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다인이는 지금 내 아내잖아.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백하린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서다인 언니는 몸이 더러우니까 절대 같이 자면 안 돼요.”남하준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미간을 구기고는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하린아, 그런 뒷담화를 하면 되겠어? 모든 사람에게는 존경받을 만한 과거가 있어.”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엉엉... 하준 오빠, 정말 서다인 언니랑 잔 거예요? 전에 서다인 언니가 성병에 걸렸었다던데. 오빠도 감염되면 어떻게 해요?”다른 사람이었다면 남하준은 진작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상대는 백하린, 그가 10년 넘게 짝사랑한 여자였다.남하준은 안타까운 마음에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하린아, 내가 다인이랑 자는지 안 자는지는 다인이를 향한 내 마음에 달렸겠지. 다인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당연히 다인이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거야. 딴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 뒷담화도 이제 더는 하지 마.”“그럼 하준 오빠는 나 그렇게 사랑하면서 왜 나랑 안 자려는 거예요?”백하린이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눈빛이 어두
서다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억울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하린 씨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여자의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쾌함이 묻어났다.그 어떤 남자라고 하더라도 서다인의 말에 마음이 살살 녹을 것이다. 남하준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차가운 척하며 대답했다.“괜찮아.”서다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준 씨가 데려다준다면 받아들이지, 뭐. 마침 돌아가서 이혼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말이야.”서다인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일하게 남은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고는 남하준을 따라 방을 나서 식당에 아침 먹으러 갔다.이른 아침 식당에는 오가는 직원들이 끊이질 않았다.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도련님,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남하준은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인사를 건넨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기에 다 대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모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서다인은 캠프에 있는 며칠 동안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중독 사건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서다인을 매우 좋아했다.서다인은 식탁 앞에서 음식을 기다렸다.남하준이 아침 두 세트를 챙기고는 하나를 서다인에게 건넨 후 식사를 시작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만두피는 그대로 두고 그 안의 고기만 쏙 골라 먹는 서다인을 발견했다.삶은 달걀도 흰자만 먹고 노른자는 건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소고기죽도 파를 전부 골라냈다.남하준은 가슴이 왠지 모르게 움찔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나쁜 습관은 걔랑 정말 닮았네.”서다인이 죽을 먹으면서 나지막이 물었다.“누구랑요?”“하린이 말이야.”남하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눈치 없이 또 물었다.“여자들은 다 이렇나 봐?”서다인은 원래도 기분이
차가 멈춰 서자마자 서다인이 남하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데려다줘서 고마워요.”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물건을 안아 든 채 문을 닫고는 허름한 단층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단층집 앞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건달이 앉아 있었다.남하준이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서다인이 향하고 있는 곳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두 건달은 주위를 경계하며 망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남하준은 운전기사더러 전화해 사람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두 건달은 서다인과 아는 사이인지 그녀를 쉽게 들여보냈지만 남하준은 아니었다.남하준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들어간 여자가 내 아내예요. 나 들어가게 해줘요.”건달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서지석의 동생이 그쪽 아내라고요? 그럼 내가 당신 아버지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어요.”남하준은 상대와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선을 먼저 넘은 건 그들이었다.그의 눈에 살기가 어리더니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들을 향해 매섭게 날렸다.그의 힘센 주먹이 상대의 뒷머리를 내려쳐 순식간에 건달 한 명을 기절시켰다.다른 건달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바로 몸에 지닌 칼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가 칼에 손이 닿기도 전에 남하준의 주먹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이어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남하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는 무심하게 손을 닦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긴 복도를 지나니 어두운 불빛의 도박장이 보였다.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고 매서운 연기가 자욱했다.구석에서 일어난 소동이 그의 주의를 일으켰다.남하준이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서다인은 사 온 큰 포대를 어떤 남자의 머리에 씌우고는 야구 방망이를 움켜쥔 채 남자의 팔다리를 세게 내리쳤다.남자는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당황한 나머지 머리에 씐 포대를 찢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비명을 금치 못했다.서다인은 어금니를 깨물며 온 힘을 다해
남하준은 연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서다인에게 이렇게 사나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서다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어떤 건달이 몸에 상처가 가득한 사내를 안고 오고는 남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보스, 저 사람 만만치 않아요. 홍구를 기절시키고 나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니까요.”곧이어 수십 명의 도박장 파이터들이 나타나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남하준을 빤히 쳐다봤다.이곳은 불법 지하 도박장이었기에 단골만 받았다. 남하준과 같은 낯선 얼굴이 보이면 그들은 잔뜩 경계했다.도박장 책임자가 분노의 목소리로 물었다.“내 부하를 기절시키고도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야?”서다인이 겁도 없이 남하준 앞에 서고는 도박장 책임자를 보며 말했다.“윤수 오빠, 이 사람 내 친구예요.”진윤수가 콧방귀를 뀌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너 들어와서 네 오빠 때린 것도 충분히 우리 도박장 질서를 어지럽혔어. 너 때문에 지금 장사를 하지 못하겠잖아. 그런데 이제 네 친구가 내 부하까지 때려?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서다인은 남하준이 도박장 수십 명의 건달들에게 폭행을 당할까 봐 책임자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미안해요, 윤수 오빠.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영업하는 데 방해하지 않고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서다인은 빠르게 남하준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하지만 건달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이대로 가려고? 내가 그렇게 쉽게 보낼 것 같아?”서다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남하준의 큰 손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남하준은 건달들을 신경도 안 썼지만 자신의 손을 잡은 서다인 때문에 잠깐 넋을 잃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꽉 잡은 두 손에 시선을 옮겼다. 희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분명 백하린의 손을 잡을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었는데 말이다.서다인이 비위를 맞추느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윤수 오빠, 어떻게 해야 우리를
수십 명의 건달이 동시에 무기를 들고는 남하준에게 돌진했다.식겁한 서다인은 당장이라도 남하준 앞에 서서 그 대신 몽둥이를 맞아주고 싶었다.하지만 남하준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빠르게 총을 꺼내고는 진윤수를 조준했다.순간 진윤수는 두려움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가만있어! 제발 가만있어!”총을 본 순간 그의 부하들은 잔뜩 겁을 먹어 이리저리 줄행랑을 쳤다.M국에서 권총을 가지고 있는 건 권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남하준을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서다인은 남하준이 총을 꺼낸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침착했던 게 다 이유가 있네. 총의 위력을 알고 있었구먼.’진윤수는 그에게 사죄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형님, 제가 눈이 멀었나 봅니다. 감히 형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저, 저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이때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남하준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는데 마침 10분이 지나 있었다.‘역시 우리 애들이 시간을 잘 지킨단 말이야.’남하준이 총을 거둬들였다.진윤수는 자기가 안전한 줄 알고 한시름을 놓고는 식은땀을 닦아냈다.하지만 이어서 양복 차림을 한 수십 명의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현장에 있던 건달들을 모두 제압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부하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깍듯이 사과했다.M국에서 이 정도의 인원을 이끌 수 있고, 또 도련님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군전 그룹의 대표인 남하준밖에 없었다.진윤수는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는 무릎을 철썩 꿇으며 남하준에게 용서를 빌었다.“도련님, 제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정말 잘못했습니다.”남하준은 남자의 애원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서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도박장을 봉쇄하고 이 사람들 모두 경찰에게 넘겨.”“네, 알겠습니다.”부하가 대답하고는 바로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안은 탄식했다.“서연이가 널 좋아하지 않는다면 일찍 포기해. 그렇다고 너무 자포자기해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와 결혼하지는 말고. 승아는 너와 안 어울린다고 생각해.”백건이 느릿느릿 말했다.“승아에게는 수단이 악랄한 고모가 있죠.”정안은 경악했다.“너도 알고 있었던 거야?”“네.”정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부했다.“그래. 난 이만 갈게.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점심에 금원에 와.”금원은 국가가 남하준에게 준 작은 별장이었고 금원 맞은편이 바로 유원, 유승아의 집이 있었다.“금원에는 왜요?”정안이 다정하게 웃으며 대답했다.“일찍 와서 누나 좀 도와줘.”말을 마친 정안은 돌아서서 백건의 방을 나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백건은 쓸쓸한 눈으로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익일 점심.남서연은 꽃무늬 원피스에 차양 트리밍 모자를 쓰고 손에 대나무 꽃바구니를 들고 있었다. 꽃바구니 안에는 온통 화초의 어린 모종들이 가득했다.그녀는 차에서 내려 기뻐하는 무지개 나비처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정원 쪽으로 걸어갔다.멀리 그녀는 정원 한가운데에 흰 셔츠를 입고 진흙탕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보았다.“작은 엄마!”가까이 다가선 남서연은 발걸음을 뚝 멈추었다. 소리가 목구멍에 걸리고 시선은 눈앞의 남자에 고정되어 멍해졌다.백건은 소리를 듣고 일어나 자신의 귀가 잘못 들린 줄 알고 돌아섰을 때,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여자를 보자 그도 멍해지며 굳어버렸다.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오랫동안 움직이지 못했다.남서연은 남자의 시선이 왠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자 당황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작은 엄마인 줄 알았어요. 묘목을 선물하려고 왔는데 내가...”“물 가지러 갔어.”백건은 처음에 정안이 왜 집안의 정원사를 놔두고 굳이 그를 집으로 불러들여 정원을 가꾸게 했는지 몰랐다.이제야 그는 이해했다.그는 손에 든 호미를 내려놓고 장갑을 벗고 두 걸음 앞으로 나가 남서연에게 손을 내밀었다.“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한 번 또 한 번.백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쓸쓸한 눈동자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아무도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정안의 소리로 바뀔 때까지.“건아. 나야.”정안은 비록 집에 있는 시간이 적지만 백건의 마음속에 누나는 따뜻하고 친절한 존재였다. 어머니에게서 얻을 수 없는 모든 정을 누나가 줬다.그는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 걸어가서 그림을 한 방향으로 돌려 다시 문을 열었다.문이 열리자 정안은 어두운 안색으로 눈 밑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백건을 보며 마음이 아팠다.“무슨 일이에요?”백건이 묻자 정안은 반달 웃음을 지으며 나지막이 물었다.“나 네 방에 들어가 좀 앉아도 돼?”백건은 몇 초 동안 망설이다가 문을 열었다.“들어와요.”정안이 안으로 들어서니 넓은 방은 조명이 밝았지만 단조롭고 썰렁했다.커다란 침대 하나, 한 줄로 늘어선 캐비닛, 소파 의자 하나, 마치 그의 성격처럼 매우 차가운 색조였다.그가 남서연을 짝사랑하는 것도 당연했다.남서연은 아주 밝고 따뜻한 여자로 모든 악을 치유할 수 있을 것 같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정안은 소파에 가서 앉아 주위를 둘러보니 거꾸로 바닥에 놓인 그림에 시선이 꽂혔다.그녀는 빙긋 웃으며 옆자리를 토닥였다.“건아, 너도 앉아.”백건은 그녀 옆에 앉아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정안은 백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젊고, 준수하고, 부자이고, 남서연보다 다섯 살 많았다. 성격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정직하고 착한 남자였고, 끈기와 책임감이 있어 어머니의 마귀 같은 가훈을 받으면서도 지금까지 버텼다.남서연이 그와 함께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백건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무슨 일이에요?”“다음 달 네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나와 하준 오빠 돌아왔어.”백건은 얼굴이 굳어지며 차갑게 말했다.“결혼식은 없어요.”“엄마는 이미 모든 지인에게 청첩장을 돌렸어.”백건은 잠자코 있자니 눈 밑의 냉기가 더욱 깊어졌다.“내 생각에 엄마는
서윤아는 화를 꾹 참고 또박또박 말했다.“넌 오랫동안 국경에서 일해서 건이가 얼마나 변태적인지 몰라. 서연이는 건이를 삼촌이라고 불러. 두 사람은 친척이야. 근데 건이는 어렸을 때부터 서연이를 몰래 좋아했어. 서연이의 고무줄, 물컵, 인형, 그리고 많은 잡다한 물건들을 훔치고 심지어 서연이가 버린 필통까지 주워 담으며 쓰던 볼펜 한 자루도 놓치지 않았어. 남씨 가문에 갈 때마다 서연이가 쓰던 물건들을 몰래 가지고 와서 숨겼어. 어느 집 남자가 일기를 쓰는데 그 안에 온통 한 소녀에 관한 이야기뿐이겠어? 서연의 물건을 훔칠 뿐만 아니라 숨어서 몰래 서연이를 훔쳐보고 미행하고, 그림책은 전부 서연이의 초상화뿐이야. 내가 정말... 방법이 없어서 여자친구를 사귀라고 강요했더니 승아와 둘이 짜고 나를 속였어. 건이를 외국으로 보낸 것도 어쩔 수 없었어. 내가...”정안은 화가 치밀어 말을 끊었다.“엄마, 왜 건이 일기를 훔쳐봤어요?”“다 건이를 위해서지.”서윤아는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정안은 아픈 머리를 만지며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중얼거렸다.“참 숨 막히는 모성애네요.”“내가 만약 일기를 훔쳐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저 자식 마음이 저렇게 깊은 줄 알았겠어? 내가 만약 그 변태적인 행동을 미리 막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을지 몰라.”정안은 어이없기 짝이 없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엄마, 건이는 다른 남자들과 달리 내성적이고 자기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해요. 한 여자 아이를 짝사랑하면 그 여자 물건을 훔치는 건 정상이죠. 미행한 건 어쩌면 보호하고 있었고 더 많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죠. 서연이가 목욕하는 걸 훔쳐본 것도 아니고 서연이 속옷을 훔친 것도 아닌데 왜 엄마는 그걸 변태라고 해요?”서윤아는 항상 보수적인 사상이 있어 정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서연이가 자기를 삼촌이라고 부르는데 두 사람 촌수가 어떤지 자기가 몰라? 이것도 변태가 아니면 꼭 도덕적으로 어긋나는 패륜을 저질러야 변태라고 할 수 있는 거니?”정안은 그녀
남서연은 깜짝 놀랐다.그녀는 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남자의 미색과 육체에 대한 탐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숨을 바칠 정도일까?백건이 그녀를 원한다니.그녀를 내연녀로 전락시키면 그녀의 집사람들에게 맞아 죽는 것이 이 남자는 두렵지 않을까?이 남자는 양심이라곤 없을까?남서연은 제대로 화가 났다.“이거 놔!”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풀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남서연은 아픈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그런 생각은 단념하세요. 승아 언니와 결혼해서 절대 언니를 저버리지 말고 잘 살아요. 다시는 그딴 생각 말고.”말을 마친 남서연은 화가 나서 자리를 뜨더니 옆의 큰 철문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그녀는 걸으면서 마음속으로 백건을 욕했다.‘백건, 이 개자식.’‘네게 여자친구만 없었어도, 약혼녀만 없었어도, 아내만 없었어도 난 승낙했을 거야.평생 너와 육체적 관계만 유지하며 명분이 서지 않는 비밀 연인이 되더라도 난 기꺼이 원했을 거야.’‘하지만 승아 언니는 너와 그렇게 오랫동안 만났고 다음 달이면 결혼하잖아? 근데 지금 와서 나를 건드려? 짐승만도 못한 쓰레기!’...백씨 가문 별장.백건이 피곤한 걸음으로 거실로 들어서자 도우미가 마중 나왔다.“큰 도련님 오셨어요?”백건은 침울한 기색이 역력하여 손에 들고 있던 양복 외투를 도우미의 손에 내동댕이치고 넥타이를 풀며 걸었다.거실을 지나갈 때 안에서 정안의 소리가 들렸다.“동생 돌아왔어?”정안이 외치자 백건은 소파에 있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그의 어머니와 누나였다.“저 돌아왔어요.”백건은 담담하게 인사하고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위층으로 올라갔다.“어디 갔다 와? 왜 이렇게 피곤해 보여?”정안이 묻자 서윤아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원망으로 가득 찼다. “수백억을 손해 봐도 미간 하나 찌푸리지 않는 녀석이야. 오직 그 여자만 네 동생을 저 몰골로 만들 수 있어.”“유승아를 말하는 거예요?”서윤아가 격분해서 말했다.“만약 승아였으
남서연은 당황했다.이 남자는 대체 무슨 뜻일까?남서연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며 눈가에 맺힌 눈물도 흘러내리지 않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백건은 그녀의 억울하고 멍한 표정을 보니 화가 났다.“내 말 알아들었어?”남서연은 놀라서 침을 꿀꺽 삼키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백건은 그녀가 알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남서연이 한마디 던졌다.“알아들었어요. 나 책임질 필요 없어요. 나도 당신 귀찮게 매달리지 않아요.”백건은 화가 나서 가슴팍이 아팠다. 그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더니 고개를 숙여 심장 깊숙한 곳의 통증을 완화했다.순간, 그는 냉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이제 네가 나를 책임져야겠어.”남서연은 화들짝 놀라서 어찌할 줄 모르며 물었다.“내가... 당신을 책임져요?”백건의 매력적인 목소리로 대답했다.“맞아.”남서연은 굳어버렸고 머리가 흐리멍덩했다.분명 먼저 잠자리를 원한 건 이 남자였다. 그녀가 거절하지 않았더라고 피동적인 입장이었고 과정은 너무 아팠다. 전혀 즐기지 못했으니 아무리 봐도 손해 본 쪽은 남서연이었다.그런데 이제 와서 그녀더러 책임을 지라니?무엇보다 이 남자에게는 약혼녀도 있는데 어떻게 책임지라는 걸까?설마 백건은 그녀와 잠자리를 갖는 관계를 유지하고 그녀더러 빛을 못 보는 내연녀가 되라는 걸까?그건 때려죽여도 원하지 않았다.당황한 남서연이 황급히 거절했다.“싫어요.”백건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맑고 예쁜 여자의 눈을 주시하며 눈에는 온통 슬픔으로 가득 찼으며 약간의 노기를 띠고 있었다.“남서연, 네가 나랑 잠자리에 든 순간, 네게 선택의 여지는 없었어.”남서연은 한 기류의 냉기가 발바닥에서 이마에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완전히 당황했다.백건은 애초부터 그녀를 구렁텅이에 빠뜨리려는 계획이었을까?탈락한 인턴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주고 해외 행사에도 데리고 가서 같은 방에 묵었다.알고 보니, 이는 그녀와 잠자리를 가지기 위함이었고 앞으로도 장기적으로 육체관계를 유지하는 숨겨진 연인으로 삼으려는 의
“손님 도착했습니다.”택시 기사는 차를 세우고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외쳤다.남서연은 사색에서 깨어나 황급히 눈물을 닦고 현금을 꺼내어 지불했다.“감사합니다.”남서연은 결제를 마치고 문을 열고 내렸다.문이 닫히자 택시가 천천히 떠났다.남서연은 고개를 들어 불빛이 환한 별장을 올려다보며 침울한 숨을 내쉬었고 고개를 떨구고 걸어갔다.그녀가 막 철문에 접근했을 때, 갑자기 한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의 뒤에서 쫓아오더니 번개처럼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그녀는 어느새 옆의 벽에 눌렸다.“악!”남서연이 짧은 비명을 지르며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어두운 그림자에 눌려 뜨거운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막아버렸다. 그녀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잔뜩 겁에 질린 채로 앞에 확대된 얼굴을 보았다. 어렴풋이 백건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발버둥 쳤다.“음!”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남자는 더욱 그녀를 짓눌러 숨도 쉴 수 없게 했고 그녀의 두 손목을 잡고 머리 위로 눌렀다. 그녀의 몸은 남자의 건장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촘촘히 짓눌려 있었다.남자의 키스는 마치 폭풍우가 습격하듯 사나웠다. 그녀의 입술과 혀를 아플 정도로 빨아들여 그녀는 산소 부족을 느꼈다. 당장 그녀를 잡아먹을 듯한 포악한 분위기와 광야적인 기세를 풍겼다.남서연은 사나워진 남자의 키스가 이렇게 무서운 줄은 몰랐다.마치 백건에게 잡아 먹힐 듯 했고 여태껏 느낀 적 없는 두려움이 몰려왔다.그녀는 키스로 인해 산소가 부족하고, 입술이 부풀어 올라 아프고, 몸은 눌려 숨이 막히고, 등에는 땀이 나고 온몸에 힘이 빠졌다.결국 너무 무서워서 눈물이 흘러 그녀의 하얀 뺨 위로 흘러내렸다.그녀의 몸은 떨리고 있었고 목구멍이 시큰거리며 눈물이 한 방울씩 떨어졌다.남자는 눈물의 짠맛을 맛보고 나서야 서서히 정신을 차리고 천천히 그녀의 입술을 떠났다. 고개를 숙이고 떨리는 그녀의 이마를 맞대고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깊고 검은 눈을 가늘게 뜨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서연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가볍게
육나리에게 지금 당장 일을 핑계로 여다혜를 불러내라고 했다.15분 후.여다혜는 부랴부랴 영화관을 나서며 투덜댔다.“젠장. 주말인데 웬 PPT를 급하게 만들라고 지랄이야. 내일 써야 한다면서 사람을들들 볶아? 그럼 미리 얘기라도 해주든가! 지금이 몇 시야? 젠장...”여다혜는 폭언을 퍼부으며 빠른 걸음으로 유승아의 곁을 지나쳐 영화관을 빠져나갔다.곧 대어를 낚을 수 있었다....두 시간 후, 남서연은 여민찬과 나란히 영화관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 밖으로 나갔다.“내가 데려다줄게요.”여민찬이 예의 바르게 입을 열자 남서연이 엷게 웃으며 거절했다.“괜찮아요. 혼자 택시 타고 가면 돼요.”“그건 위험하죠.”“정말 괜찮아요.”말을 마친 그녀는 갑자기 광장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심장 박자가 엇나가며 긴장된 표정으로 앞에 있는 차량을 바라보았다.고급 차량의 운전석에는 백건이 앉아 있었다. 그는 창문을 내리고 남서연과 그녀의 옆에 있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백건의 안색은 극도로 음산했으며 눈에는 분노가 가득하며 온몸에는 음울하고 무서운 냉기가 감돌고 있었다.남서연은 백건이 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몰랐다.그녀는 너무 당황하고 불안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난처하고 긴장하고 수치스러우며 손바닥에 땀이 났다. 감히 그와 마주 볼 용기가 없어 서서히 시선을 내리뜨렸다.그녀는 앞으로 어떻게 태연하게 백건과 유승아를 대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유승아가 안에서 나와 남서연의 옆을 지나다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잠깐 화장실 간 사이에 건이가 벌써 차를 몰고 왔네. 나 먼저 갈게 서연아.”남서연은 경직된 미소를 지으며 유승아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요. 언니.”“안녕.”말을 마친 그녀는 백건의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갔다.백건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네가 왜 앉아?”유승아는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했다.“고모가 일이 있어서 차를 몰고 갔어. 가는 길에 나 좀 태워다 줘.”기분이 최악인 백건은 차가운 말투로 명령했다.
남서연은 당황해서 황급히 설명했다. “아니에요. 동료 오빠예요. 방금 알았어요.”여민찬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했다.“안녕하세요.”유승아는 피식 웃더니 화제를 돌려 물었다.“영화 어느 타임이야?”“7시, 2번 홀이에요.”여민찬이 대답하자 유승아가 아쉬워했다.“아쉽네요. 우리는 6시 45분, 6번 홀인데.”남서연은 웃음을 짜내어 예의 바르게 대꾸했다.“그러게요. 아쉽네요.”그때 여다혜가 팝콘이랑 음료수를 들고 와서 여민찬에게 건네주고 유승아를 보았다.유승아는 그들이 확실히 세 사람인 걸 확인하고 급한 척 자리를 피했다.“내가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면 건이가 걱정할 거야. 나 이만 가볼게.”말을 마친 유승아는 돌아서서 떠났다.백건과 유승아가 함께 영화를 보러 왔다고?남서연은 그 자리에 멍하니 있으면서 마음이 차갑고 답답하고 괴로웠다.좋은 기분은 사라지고 잔잔한 감상이 밀려왔다.그녀는 슬픈 동시에 자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느꼈다.백건이 약혼녀와 같이 데이트하고 영화 보는 건 정상이 아닌가?외부인인 그녀가 왜 질투를 하고 슬퍼할까?그녀는 전혀 자격이 없었다.여다혜는 남서연의 기분을 눈치채지 못하고 그녀의 손을 잡아당겨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서연아, 가자. 10분 후면 시작이니까 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자.”여민찬이 물건을 들고 그녀들의 뒤를 따랐다.유승아는 영화관에 들어서자 고모 유미에게 콜라를 건네주고 자리에 앉았다. “방금 밖에서 남서연을 만났어요. 동료와 그 동료 오빠랑 셋이서 2번 홀에서 영화를 본대요.”유미는 열심히 영화를 보며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느릿느릿 말했다.“이럴 땐 백건에게 전화라도 해야 했던 거 아니야?”“왜요?”유미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바보야, 전에 네가 말했잖아. 백건이 남서연을 좋아한다고. 두 사람이 비록 친척이긴 하지만 혈연관계가 있는 건 아니야. 그럼 서연이가 너의 가장 큰 연적이라고. 모르겠어?”유승아는 유미의 뜻을 알아듣고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다이얼을 돌리며 영화
남서연은 하루 휴가를 냈고 주말이 다가왔다.그녀는 3일 동안 계속 방에 틀어박혀 외출하지 않았다. 식사 시간 외에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았다.잠자는 것 외에는 노래를 듣거나 아무 생각 없이 베란다 바깥 경치를 멍하니 바라보며 마음을 비웠다.그때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무기력하게 휴대전화를 집어 발신 번호를 보니 동료 여다혜에게서 온 전화였다.“여보세요. 다혜 씨.”남서연은 핸즈프리를 켜놓고 침대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고 나른하고 힘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서연아, 영화 보러 가자.”여다혜가 긴장해서 말했지만 남서연은 흥미가 돋지 않았다.“싫어요.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요.”“9시면 끝나. 나와. 내가 멋진 남자 소개해줄게.”남서연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이 얘기를 너무 많이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것 같았다. “또 다혜 씨 큰 오빠요?”“맞아. 너 계속 연애하고 싶다고 말했잖아? 22살인데 아직 연애도 못 해보고. 우리 큰 오빠 만나봐.”“우리 어울리지 않아요.”남서연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다혜 씨 큰오빠 아주 잘생긴 건 알지만 우린 안 맞아요.”가문 계급이 어울리지 않으면 그녀의 가족도 혼사를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하지만 여다혜는 그녀의 가정 형편은 모르고 항상 자신의 큰 오빠를 그녀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 했다.“만나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여다혜가 반문하자 남서연의 머릿속에는 백건이 다음 달에 결혼한다는 말이 스쳐 지나갔다.그녀는 또 무엇을 기대하고 있을까?그녀와 백건은 평생 불가능할 운명인데, 굳이 자신을 괴롭히면서 불가능한 남자에게 집착할 필요가 있을까?남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주소 보내줘요.”그러자 여다혜는 흥분해서 말했다.“좋아. 바로 보내줄 테니까 꼭 나와야 해.”남서연은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30분 후, 타임스퀘어 4층 영화관 입구.남서연은 멀리서부터 여다혜가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와 함께 서서 반갑게 손짓하는 것이 보였다.남서연은 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