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하준은 연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서다인에게 이렇게 사나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서다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어떤 건달이 몸에 상처가 가득한 사내를 안고 오고는 남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보스, 저 사람 만만치 않아요. 홍구를 기절시키고 나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니까요.”곧이어 수십 명의 도박장 파이터들이 나타나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남하준을 빤히 쳐다봤다.이곳은 불법 지하 도박장이었기에 단골만 받았다. 남하준과 같은 낯선 얼굴이 보이면 그들은 잔뜩 경계했다.도박장 책임자가 분노의 목소리로 물었다.“내 부하를 기절시키고도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야?”서다인이 겁도 없이 남하준 앞에 서고는 도박장 책임자를 보며 말했다.“윤수 오빠, 이 사람 내 친구예요.”진윤수가 콧방귀를 뀌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너 들어와서 네 오빠 때린 것도 충분히 우리 도박장 질서를 어지럽혔어. 너 때문에 지금 장사를 하지 못하겠잖아. 그런데 이제 네 친구가 내 부하까지 때려?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서다인은 남하준이 도박장 수십 명의 건달들에게 폭행을 당할까 봐 책임자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미안해요, 윤수 오빠.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영업하는 데 방해하지 않고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서다인은 빠르게 남하준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하지만 건달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이대로 가려고? 내가 그렇게 쉽게 보낼 것 같아?”서다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남하준의 큰 손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남하준은 건달들을 신경도 안 썼지만 자신의 손을 잡은 서다인 때문에 잠깐 넋을 잃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꽉 잡은 두 손에 시선을 옮겼다. 희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분명 백하린의 손을 잡을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었는데 말이다.서다인이 비위를 맞추느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윤수 오빠, 어떻게 해야 우리를
수십 명의 건달이 동시에 무기를 들고는 남하준에게 돌진했다.식겁한 서다인은 당장이라도 남하준 앞에 서서 그 대신 몽둥이를 맞아주고 싶었다.하지만 남하준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빠르게 총을 꺼내고는 진윤수를 조준했다.순간 진윤수는 두려움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가만있어! 제발 가만있어!”총을 본 순간 그의 부하들은 잔뜩 겁을 먹어 이리저리 줄행랑을 쳤다.M국에서 권총을 가지고 있는 건 권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남하준을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서다인은 남하준이 총을 꺼낸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침착했던 게 다 이유가 있네. 총의 위력을 알고 있었구먼.’진윤수는 그에게 사죄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형님, 제가 눈이 멀었나 봅니다. 감히 형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저, 저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이때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남하준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는데 마침 10분이 지나 있었다.‘역시 우리 애들이 시간을 잘 지킨단 말이야.’남하준이 총을 거둬들였다.진윤수는 자기가 안전한 줄 알고 한시름을 놓고는 식은땀을 닦아냈다.하지만 이어서 양복 차림을 한 수십 명의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현장에 있던 건달들을 모두 제압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부하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깍듯이 사과했다.M국에서 이 정도의 인원을 이끌 수 있고, 또 도련님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군전 그룹의 대표인 남하준밖에 없었다.진윤수는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는 무릎을 철썩 꿇으며 남하준에게 용서를 빌었다.“도련님, 제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정말 잘못했습니다.”남하준은 남자의 애원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서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도박장을 봉쇄하고 이 사람들 모두 경찰에게 넘겨.”“네, 알겠습니다.”부하가 대답하고는 바로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하준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그는 서다인의 맑은 눈을 바라봤는데 진주알 같은 이슬이 눈가에 맺히면서 흘러내리려고 했다.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고, 또 신세를 한탄하는 그녀가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다.“왜 그래?”서다인이 그를 등지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몰래 눈물을 닦고는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말했다.“지금 저녁 시간이라 가족분들이 다 집에 있을 거예요. 이따가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하준 씨는 문 앞에 서서 듣고 있어요.”말을 마친 후 서다인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남하준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집에 들어갔다.별장 문을 열어 걸어 들어가자 집사 이수종이 보였다.이수종은 쉰 가까이 되는 나이에 침착하고 매끄러운 성격을 가졌다.그는 잠시 벙찐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안녕하세요. 마침 잘 돌아오셨어요. 이제 곧 저녁 식사가 시작되려 해요.”이수종이 서다인에게 선의를 베푼 것도 그저 집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이 집안의 사람들 모두 그녀를 미워했다.“감사합니다.”서다인이 예의를 갖추며 대답하고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럭셔리한 인테리어의 거실 중앙에는 2m 길이의 식탁이 있었는데 열댓 명의 식구가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서다인의 목소리가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순간 별장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열댓 명이 날카롭고도 차가운 시선으로 서다인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몸에 소름이 끼친 서다인은 머리털이 곤두섰고 긴장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형제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려고 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여보, 저 사람 누구야? 왜 두 분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불러?”“저 사람이 바로 수원 별장에서 할머니를 간병했던 간병인이야. 할머니를 얼마나 세뇌시켰는지 몰라. 하준이가 저 여자랑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며 윽박질러서 두 사람 결혼했잖아.
서다인은 남하준이 걸어 들어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남하준은 막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위가 높았다. 가족들마저 그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했는데 심지어 그의 부모님조차도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이때 남하준의 부모님이 감격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와 서다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남하준의 아버지인 남창민이 기쁜 얼굴로 물었다.“하준아, 오늘 웬일로 집에 왔어? 시간이 났던 거야?”그의 어머니인 허윤미도 얼굴에 기쁨이 묻어났다.“아들, 얼굴 보기 힘드네. 한 달 만인 것 같은데 야윈 건 아니지?”남하준은 잘생겼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차갑고 싸늘한 냉미남이었다.위압감 있는 분위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는 자신의 볼을 감싸안은 허윤미의 두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이번에 돌아온 김에 며칠 있다 가.”허윤미는 아들의 불쾌한 기분을 눈치챘다.남하준은 부모님의 말씀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거실 쪽을 바라보며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나 남하준의 아내가 누구의 입맛을 떨어지게 했고, 누구의 집을 더럽혔다고?”나 남하준의 아내?그 말을 들은 서다인은 흠칫했다.남하준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찌르면서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선사했다.그녀는 남하준이 자신 때문에 가족에게 화를 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동안 당했던 수모와 억울함은 남자의 이 한마디로 많이 해소되었다.거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긴장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또 남하준의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기분이 언짢아진 남창민은 아버지라는 신분에 기대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하준아, 다 네 형이랑 형수님들인데 예의를 좀 지키는 게 어때?”남하준은 분노의 시선을 남창민에게로 옮긴 후 조금은 차분하지만 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아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존중이에요. 저 사람들에게 그런 기본적인 매너가 있어요?”남창민은 얼굴색이 어두
차로 한 시간을 달려 두 사람은 뉴빌리지 정문에 도착했다.뉴빌리지는 M국에서 주요 거물들이 사는 별장 구역이었다.예를 들어, M국의 지도자, 장군, 의원, 과학자, 엔지니어, 우주 비행사, 또는 암암리에 보호하고 있는 핵심 인물 등등...남하준은 차를 세우고 서다인에게 말했다.“먼저 내려.”서다인은 어리둥절해서 웅장한 대문에 적힌 ‘뉴빌리지’를 보고서야 남하준이 자신을 일반인은 평생 들어갈 수 없는 곳에 데려왔다는 걸 깨달았다.그러자 그녀는 바짝 긴장하더니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려 남하준의 곁으로 다가가 섰다.이때, 보초를 서던 두 사병이 남하준이 건넨 증명서를 받아 보고는 공손히 인사했다.“도련님 오셨습니까.”남하준이 고개를 끄덕였다.사병은 첨단 스캐너를 꺼내 차량에 대한 안전 검사를 실시했다. 스캔을 마친 뒤 들어오라는 손짓을 취했다.“도련님, 안으로 들어가시죠!”남하준은 그 사병에게 말했다.“이 여자분은 앞으로 안에서 지낼 거니 등록해 주시죠.”서다인은 약간 당황하여 거절하려고 두 손을 흔들었다.“그럴 필요 없어요. 저는...”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사병이 기계를 들이밀며 말했다.“지문과 눈주름을 입력해 드릴 테니 앞으로 드나들기 편하실 겁니다.”서다인은 거절할 기회가 없었고 사병이 그녀를 도와 시스템에 정보를 입력했다.그녀는 어이없다는 듯 다시 남하준의 차에 올라탔고, 그의 차를 타고 뉴빌리지 안으로 들어섰다.가는 동안 서다인은 계속 마음이 불안했다.차량은 10분 정도 달려 2층짜리 단독주택인 남원으로 들어섰다.이곳에도 사병들이 대문을 지키고 있었다.거실에 들어선 서다인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이곳은 비록 남씨 가문의 저택만큼 호화롭고 사치스럽지는 않지만 인테리어가 꽤 웅장했다. 원래 텔레비전이 놓여 있어야 할 자리에는 뜻밖에도 전체 벽이 책장으로 가득했다.한눈에 봐도 수천 권의 다양한 종류의 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선비 냄새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서다인은 이곳의 인테리어가 꽤 마음에 들었
눈을 감고 심호흡하며 지금의 괴로움을 달래려고 노력했다.하지만 여전히 너무 아팠다!아파서 자신이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줄도 몰랐다....다음 날 아침.서다인은 일어나서 씻고 방을 나갔다.거실 소파에 몇몇 거물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그들은 국가 대사를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서다인의 등장으로 중단되고 말았다.모두들 신기한 눈으로 서다인을 보고 있었다.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예의 바르게 소개했다.“대통령님, 제 아내 서다인입니다.”M국의 수령은 아주 상냥한 50대 중년 남자로, 눈매가 곱고 웃음이 가득하여 보기에 아주 친절했다.남하준이 자신의 신분을 이렇게 대범하게 소개할 줄은 몰랐다. 어쩌면 대통령의 앞에서 숨기기 싫었을지도 모른다.그녀는 갑자기 긴장하더니 저도 모르게 경외감이 마음속에 가득 차서 다가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대통령님, 안녕하세요. 여러분 안녕하세요.”“안녕하세요.”M국의 대통령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서다인은 예상하지 못했는지 놀라서 즉시 두 손으로 상대방의 손을 잡았다.그는 어수룩하게 웃으며 말했다.“전에는 제 딸이 도대체 어디가 부족해서 우리 하준 장군의 눈에 들지 못했는지 궁금했는데, 오늘 사모님의 미모를 보니 제 딸은 확실히 달리네요.”남하준은 차가운 눈으로 서다인을 보았다.전부터 그도 서다인의 성형이 아주 잘 됐다고 생각했었다. 마치 자연미인처럼 보면 볼수록 예쁘고 우아함도 잃지 않았다.약간 우울한 분위기와 내면의 아름다움을 갖고 있어, 기품있는 재벌가의 아가씨처럼 연약하고, 강인하고, 수려하며 생기가 넘쳤다.너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라 의학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서다인은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겸손하게 말했다.“과찬이십니다. 저 같은 서민이 어찌 대통령님의 귀한 따님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몇몇 거물들은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서다인은 찻상 위에 ‘안개 찾기 프로젝트’라고 적힌 자료만 있고 차가 없는 것을 발견했다.남하준처럼 강직한 남자는 만나면 중요한
국방에 사용되는 경분자는 무기의 왕으로 손색이 없으며 이런 무기를 갖고 있으면 바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것이다.경분자와 초음파를 녹여 제련한 무기는 2시간이면 지구 반쪽을 덮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퍼져나가 통증 없이 순식간에 사람을 죽게 만든다.이에 전 세계 국가들에서 경분자의 연구 개발에 몰두했다.심지어 일부 국가에서는 1g의 경분자에 1조억을 제시하여 구매를 신청하기도 했다.거실이 조용해진 후, 서다인은 다기를 들고 나와 남하준이 열심히 ‘안개 찾기 프로젝트’를 읽고 있는 것을 보았다.그녀는 걸어가서 다기를 가볍게 놓고 낮은 탁자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님들에게 정성껏 차를 우렸다.핀셋을 들고 잔을 덥히고, 캔을 따고, 차를 씻고, 차를 우리고 따르기까지 질서 정연하고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은 우아하고 단정하며 여유로웠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차마 이 아름다움을 깨뜨릴 수 없었다.남하준의 시선도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떨어졌다.그녀는 두 손으로 차를 받들고 예의 바르게 말했다.“대통령님, 차 드시죠.”대통령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정교한 찻잔을 받더니 감격해서 말했다.“이건 우리의 우호국인 중국에서 보내온 고급 벽라춘인데 제가 막 남 장군에게도 한 캔 드렸어요. 이 차는 유명하지만 마시기에 좀 떫죠.”서다인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직도 떫은맛이 나는지 한번 마셔보시겠어요?”대통령은 한 모금 맛보더니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아주 좋은 차군요. 이제 보니 우리가 차를 우릴 줄 몰랐네요. 역시 사모님의 손재주가 좋으세요. 맛이 너무 좋군요.”다른 사람들도 즉시 차를 마시더니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서다인은 마지막 잔을 들어 남하준에게 건넸다.그는 자료를 내려놓고 차를 받아 입에 갖다 대자마자 가슴에 스며드는 향긋한 냄새를 맡았다.그리고는 한 모금 마셨다.차는 신선하고 맛이 깊고 달콤청신할 뿐만 아니라 입안에서 향긋하고 우아한 맛이 감돌아 뒷맛이 무궁무진했다.남하준은 이 좋은 차에 놀랐고, 서다인
서다인은 모기향을 들고 별장으로 향했다.“사모님.”그녀가 소리를 듣고 돌아섰다.양복 차림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공손히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양손으로 편지봉투 하나를 건넸다.“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이게 뭐죠?”“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공무가 있어서 조만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세요.”서다인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모기향을 남자에게 건네주고는 봉투에서 은행 카드를 꺼냈다.안에는 또 한 장의 쪽지가 있었는데, 강건하고 힘찬 글이 쓰여 있었다.[대문과 신용카드 비밀번호는 모두 151617. 중국으로 공무 집행 감. 귀국 날짜 미정.]서다인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카드를 내려다보면서 남하준의 물건을 이리저리 만졌다.그녀의 마음은 마치 몇십 근의 돌로 짓눌려 있는 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로웠다.그리움이기도 하고 서운함이기도 했다.서다인은 나지막이 물었다.“방금은 누가 저에게 파라솔을 씌워줬고 모기향도 켜준 거죠?”“도련님께서 제게 명령하신 겁니다.”서다인은 감동과 함께 잔잔한 아픔이 밀려왔다. 이런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남하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백하린은 대체 얼마나 행복할까?순간, 그녀는 백하린이 너무 부러웠다.그녀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덕을 쌓아도 다음 생에 남하준의 사랑과 바꿀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서다인은 사색에 잠겨 한숨을 내쉬었다. 모기향을 받아들고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남원에 사는 요 며칠 동안 서다인은 근 3년 동안 가장 조용하고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하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껏 책을 보고, 노래를 듣고, 늦잠을 자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하지만 이 아름다운 고요는 일주일 만에 돌아온 불청객에 의해 깨져버렸다.그녀가 남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안 백하린은 남하준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에 맞춰 급히 안
그래서 이 일은 남태준에게 매우 중요할 것이다.그의 사명이고 명예이고 책임이고 그의 전부일 것이다.지우는 남태준을 사랑하고 그의 일과 삶도 존중했다.남태준은 그녀의 팔을 잡고 힘껏 끌어당겼다.“내가 그 비실비실한 이혼남보다도 못하다는 거야?”지우는 중심을 잃고 그의 품에 안겨 방황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팔에서 전해지는 통증에 그녀는 서럽게 눈물을 흘렸고 턱은 떨리고 어쩔 줄 몰라 하며 그를 바라봤다.남태준은 그녀 눈 밑의 눈물을 바라보며 자신도 눈시울을 붉혔고 그의 슬픈 목소리는 가늘게 떨렸다.“만약 가능하다면 내가 다리도 못 쓰고 앞도 못 보던 때로 돌아가고 싶어. 네가 돈 때문에 나를 보살피기는 했지만 나 그때 정말 기쁘고 행복했어.”그때를 생각하면 지우 눈 밑의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다.그녀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당시의 남태준은 너무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다.그가 언제나 지금처럼 건강하기를 바랐다.“그때 너는 내가 눈이 안 보인다고 멋대로 행동했어.”남태준은 지난날을 회상하며 눈 밑에는 눈물이 흐르지만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가득했다.“네가 나를 도와 샤워하고 밥 먹여주고 우리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었지. 넌 청개구리처럼 내가 싫어하는 행동만 골라 했어.”“네가 아무리 완자 친구라지만 내 말 한마디면 엄마는 널 해고할 수 있었어. 하지만 난 널 떠나보내는 게 너무 아쉬웠어. 진흙탕이 된 내 마음을 넌 작은 작대기로 계속 저어주어 더 이상 평온하지 않고 매일 파도가 일렁였어.”“그러던 어느 날, 네가 갑자기 떠났어.”남태준은 눈물이 흘러넘쳐 흐느껴 울었다.“난 또다시 그 암흑 같은 삶으로 돌아갔어. 햇볕도 없고 활기도 없는 그 어두운 세계로.”“지우야. 네가 돈을 원한다면 난 만족시켜 줄 수 있어. 네가 사랑을 원한다면 난 온 마음을 다해 널 사랑할 거야. 네가 안정감을 원한다면 나 일선에서 떠나 사무직으로 물러날 수 있어.”남태준의 이글거리는 눈동자는 애틋했고 점점 더 간절해졌다.“제발 나 떠나지 말아줘.
지우는 남태준에 의해 강제로 집에 끌려들어 갔다.문이 잠기는 순간 지우는 좀 당황스러웠다.그녀는 화가 난 남자가 어떤 비이성적인 행동을 할지 몰라 계속 몸부림치며 떠나려고 했지만 연약한 여자의 몸으로 남자의 힘센 손에서 벗어나는 건 무리였다.남태준에 의해 거실로 끌려가 그대로 소파에 던져졌다.그녀는 긴장해서 움츠러들었고 방황하면서도 경계하는 눈빛으로 남태준을 쳐다보았다. 그가 미칠 듯이 달려들 것 같아 속으로 지레 겁을 먹고 있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이성적으로 그녀 곁에 앉아 쓸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두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매우 괴로워 보였다.밝은 거실은 두 사람의 가벼운 숨소리만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창밖은 캄캄했다.집안의 분위기가 점점 굳어졌고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지우는 남태준이 화가 나서 그녀와 단둘이 지낼 이유를 찾는 것이지 그녀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태준 씨, 나 놔주겠다고 했잖아요?”남태준은 얼굴을 가리고 깊게 숨을 내쉬더니 온몸에 냉기가 번져 형언할 수 없는 감상과 슬픔이 어렴풋이 배어 있었다.그는 소파 등에 기대어 옆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눈가에 쓸쓸한 감정이 가득했다.“지우야. 내가 헤어지겠다고 했지 널 포기한 적은 없어. 난 계속 노력하고 있었어.네가 나 좋아하도록, 네 가족이 나 좋아하도록.”지우는 고개를 숙이고 괴로워하며 말했다.“진짜 그럴 필요 없어요.”“우리 사이에는 그 어떤 갈등도 다툼도 제삼자도 없었어. 네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한 거 혹시 엄마 때문이야?”지우는 침묵했고 손가락을 꽉 쥐고 손톱을 뜯었다.“대답해줘.”남태준은 소파를 따라 천천히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다가갔다가 꾹 참았다.그에게는 이제 지우의 손을 잡을 명분이 없었다.매일같이 그리움에 시달리고, 미칠 듯이 그녀를 보고 싶고,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도 이젠 아무런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그저 모퉁이에 몰래 서서 먼발치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헤어지는 날은 녹슨 무딘 칼처럼,
“맞아. 하지만 이미 마음에 다른 남자를 품고 있어서 다른 사람이 들어올 자리가 없어. 미안해.”진준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말했다.“무슨 말인지 알겠어. 만약 네 마음에 있는 그 남자에게 기회가 없다면 차라리 그 기회를 나에게 주는 건 어때? 어쩌면 우리가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르잖아.”지우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진준호 역시 멈추고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말했다.“나 아주 아쉬워. 널 오랫동안 짝사랑했지만 졸업 시즌에 네게 고백하지 못한 거 계속 후회했어. 만약 지금 그 기회가 왔다면 놓치고 싶지 않아.”지우는 용감한 사람을 탄복했다“준호야, 나...”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하나의 그림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지우가 반응도 하기 전에 강력한 힘의 큰 손이 그녀의 팔을 꽉 잡고 힘껏 잡아당기더니 그녀를 자신의 따뜻하고 튼튼한 가슴으로 끌어당겼다.그녀가 경악하며 고개를 들자 남태준의 준수한 얼굴을 보고는 가슴이 떨렸다.지우가 낯선 남자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진준호는 다급하게 물었다.“당신 뭐야?”남태준의 거대한 체구에 진준호는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고 말로 으름장을 놓았다.“당장 지우 놔줘!”남태준은 싸늘한 눈빛에 노기를 띤 채 말했다.“미안하지만 내 여자친구에게 할 말이 있어 먼저 실례할게요.”여자친구?지우는 멍해졌고 진준호는 더욱 어리둥절했다.남태준이 지우를 끌고 떠나자 진준호가 급히 쫓아가 두 사람 앞을 막으며 물었다.“지우야. 너 솔로라며?”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또 가로젓고는 혼란스럽게 말했다.“나 솔로 맞아. 이 사람은 전 남자친구야.”그녀의 말에 남태준의 안색이 더욱 새파래졌다.“나 이 사람이랑 얘기 좀 할 테니까 너 먼저 가봐.”지우는 웃으며 진준호에게 손을 흔들었다.“잘 가.”진준호도 더 이상 지우를 빼앗을 이유가 없어 지우가 끌려가는 것을 못마땅해 하며 노려봤다.남태준은 지우를 차에 태워 그녀에게 안전벨트를 매주고는 시동을 걸고 떠났다.차량이 넓
지우는 입술을 깨물고 서러워하며 되물었다.“그럼 네가 다시는 목숨으로 나 협박하지 말라고 엄마 설득할 수 있어?”“아니 난 못해. 엄마는 너무 독해. 매번 빈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는 분이시잖아.”지성은 감탄하며 고개를 저었고 지우도 말을 하지 않았다.그녀는 사랑을 위해 어머니의 목숨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시간이 흐르면 언젠가 남태준을 잊고 가슴 아픈 사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칠 후 지성이 퇴원하자 지우의 생활도 정상으로 돌아왔다.매일 글쓰기에 바쁘고 어머니의 매점도 봐주고 가끔 밥도 하고 친구와 함께 나가 쇼핑을 하며 기분 전환을 했다.이날 송수빈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 가자고 했다.늘 외지에서 일했던 지우는 동창 모임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올해 그녀가 마침 고향에 있으니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동창들과 모이려고 했다.한 식당의 룸.큼지막한 원형 테이블에는 비슷한 또래의 남녀가 가득했는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도 있는 신혼이거나 미혼인 사람도 있었다.지우와 송수빈은 미혼이라 싱글남 친구들의 시선을 끌었는데 두 사람의 외모도 출중하고 몸매도 좋았다.모두들 웃고 떠들며 건배하며 장광설을 늘어놓고 있을 때, 한 친구가 갑자기 말했다.“준호가 지우를 오랫동안 짝사랑했잖아. 준호 녀석 지금 이혼했는데 설마 아직 지우를 못 잊은 거 아니야?”음식을 먹던 지우는 고개를 번쩍 들고 경악하며 말하는 남자를 쳐다보았다.반장이던 그는 지금 한 기업의 관리자였다.그는 술잔을 들고 일어나 지우를 향해 물었다.“지우야. 너 아직 싱글이라며. 아직 준호에게 기회가 있는 거냐?”지우는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 진준호를 바라보았다.부드러운 눈매를 가진 진준호는 어색한 듯 지우를 바라보며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이혼한 지 얼마 안 된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다.이공계 IT 남으로 수입도 높고 외모도 잘생겼고 성격도 온순했다.같은 마을 사람이라 부모끼리도 서로 잘 알고 있었다.지우는 난처해하며 미소 지었다.
이번에 지성은 말을 할 수 있었고 사유도 또렷했다.그들은 신분을 밝힌 후 지성의 몸 상태를 물었고 지성이 괜찮은 걸 확인하고는 조사를 시작했다.지성은 남태준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그가 누나의 전 남자친구라는 것을 알고 더욱 존경했다.지성이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누나가 육건우를 고소했기 때문에 제 빚은 소송이 끝나기 전까지 갚지 않아도 되거든요.”“하지만 육건우의 부하들이 저를 가만두지 않았어요. 그날 저를 뒷산으로 데려가 폭행했고 저는 그들을 따돌리고 필사적으로 도망쳤어요. 철조망이 가로막힌 곳까지 도망쳤는데 더 이상 도망갈 길이 없어서 아주 높은 나무에 올라가 철조망을 넘어 안에 있는 나무로 뛰어올랐어요.”“들어가고 나서 계속 출구를 찾았는데 못 찾았고 마스티프 몇 마리가 저를 쫓아왔어요.”“그래서 큰 스튜디오 몇 군데로 달려갔어요. 근데 안에 촬영 장비는 없고 오히려 양귀비꽃과 비슷한 식물이 많이 심겨 있더라고요.”“저는 깜짝 놀라 얼른 숨었어요.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요.”“그러다 어떤 창고에 숨었는데 그 안에서 마약을 정제하는 사람들이 저를 발견하고는 저를 죽일 듯이 때렸고 제 심장에 칼까지 꽂고 산기슭에 저를 던졌어요.”지성은 심장의 상처를 만졌다. 의사가 말하길 지성의 심장 위치가 다른 사람과 달라서 조금 빗나가 목숨을 부지했다고 했다.불행 중 다행이었다.남태준과 오신우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 표정이 굳어졌다.산꼭대기에 촬영기지를 설립하려면 소방 안전 검사와 경찰의 순찰도 필요하다.그런데도 안에서 미친 듯이 독을 심고 마약을 정제할 수 있다면 분명 백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그 백은 결코 직위가 낮지 않을 것이다.자백을 마친 지성이 긴장하며 물었다.“남 대장님, 만약 제가 죽지 않은 걸 알면 또 사람을 보내 저를 죽이러 올까요?”“그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아요.”남태준은 온화한 태도로 진지하게 말했다.“지성 씨 옆에 24시간 경호를 붙여 신변을 보호할게요.”“감사합니다.”지성이 예의
남태준은 쓸쓸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말했다.“저 아주머니 미워하지 않아요. 오히려 너무 이해하는걸요? 만약 제 딸이 마약 형사와 만난다고 하면 저도 반대했을 거예요.”진효연은 고개를 돌려 남태준을 바라보며 그가 진심으로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다. 만약 직업적인 문제가 아니라면 지우가 그에게 시집가는 건 커다란 복일 것이다.“지성이 병원비는...”진효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남태준이 이미 그녀의 뜻을 알고 급히 위로했다.“병원비는 급히 갚을 필요 없어요. 지성이가 깨어나서 나중에 돈을 벌면 천천히 갚으라고 하세요. 무기한으로요.”진효연은 가슴이 뭉클해 눈시울이 젖었고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손을 잡고는 울먹였다.“내가 정말 고마워요. 지성이를 대신해서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남태준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고 가슴이 내려앉았다.그에게 있어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며 지우를 도울 수 있다면 어떤 일이든 벗고 나설 것이다.진효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남 대장님만 괜찮으시다면 우리 지우 오빠로...”남태준의 얼굴빛이 순간 굳어지더니 바로 말을 끊었다.“아주머니. 그럴 필요 없어요. 헤어졌는데 어떻게 오빠 동생으로 지내요?”진효연은 난처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남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어떻게 메워야 할지 몰랐다.남태준은 마음이 답답했다.어떻게 그더러 지우의 오빠로 지내라고 할 수 있을까?그렇다면 앞으로 계속 연락하지만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되며 선을 넘지 말아야 한다.지우가 시집가는 걸 눈 뜨고 지켜보고 지우의 미래 남편을 매부라고 불러야 할까?남태준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바르게 말했다.“아주머니 저는 아직 일이 남아서 먼저 가볼게요. 무슨 일 있으면 제게 전화하세요.”“그래요. 어서 가봐요.”남태준은 목례를 하고 성큼성큼 떠났다.진효연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또 한바탕 한숨을 쉬었다.남태준이 마약 형사의 일을 그만두는 것도 아주 좋은 방법일 것 같았다
“저희는 아직 일이 좀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오신우가 예의 바르게 인사하자 지우가 고개를 끄덕였다.“네. 살펴 가세요.”지우는 오신우와 다른 형사 한 명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고는 마음을 추스르고 계속 ICU 병실로 향했다.그녀는 ICU 입구에 있는 벤치 앞에서 그녀의 어머니가 남태준과 나란히 앉아 있는 것을 보았는데 분위기가 상당히 화기애애했다.그녀는 완전히 멍해졌다.‘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지우가 생각해 보니 진효연은 남태준을 본 적이 없으니 그가 자신의 전 남자친구인 줄 모를 것이다.지우는 마음을 가다듬고 다가가며 예의 바르게 입을 열었다.“남 대장님 오셨어요?”남태준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보니 며칠 못 본 사이에 부쩍 초췌하고 말라 있었다.진효연도 멍하니 지우를 바라봤다.지우는 남태준과 거리감 있게 인사하고는 진효연에게 물었다.“엄마. 지성이 깼어요?”진효연이 유리창 안쪽 병실을 가리켰다.“깼는데 아직 활력 징후가 불안정해 ICU에서 나올 수 없대.”“지성이가 산에서 양귀비를 봤다고 했어요?”지우가 묻자 진효연은 주먹을 불끈 쥐고 악에 받쳐 말했다.“마약은 우리 일대에서 사라진 적이 없었어. 곳곳에 끝없이 이어진 언덕이 있고 몇 개의 큰 산을 넘으면 바로 이웃 나라 국경이잖아. 약쟁이들은 우리처럼 작은 지역을 좋아해. 외진 곳이라 아무도 그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말을 마친 진효연은 다시 남태준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그의 팔에 손을 얹었다.“남 대장님, 일하면서 꼭 몸조심하세요. 마약쟁이들은 사람을 죽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악마예요.”남태준이 따뜻하게 고개를 끄덕였다.“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꼭 조심할게요.”지우는 다시 한번 경악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니, 그녀의 어머니는 마약 형사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녀가 형사에게 시집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진효연은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지우에게 말했다.“여긴 별일 없으니 넌 매점에 가봐. 난 여기서 지성이 지켜보면서 남 대장님과 더
“전에 출연했던 작품 투자자였어요.”“당신들은 촬영이 끝났는데 왜 아직도 안 가는 거죠?”“새로운 작품 촬영 중인데요?”“육건우 뒤에 있는 보스와 아직도 연락할 수 있어요?”임다희는 차갑게 웃었다.“태준이한테 배웠어요? 마치 범인을 심문하는 듯한 말투네요.”“만약 남태준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도와주세요. 하마터면 그 사람을 죽일 뻔했던 배후를 잡아야죠.”“그건 그쪽이 말하지 않아도 그렇게 할 거예요.”“그럼 오늘 날 왜 찾아왔죠?”“그쪽이 태준이와 깨끗하게 끝났으면 해서요.”“어떻게 하면 깨끗하게 끝난 거죠?”지우가 물으니 임다희는 주머니에서 카드 한 장과 명함 한 장을 꺼냈다.“카드 안에 6천만 원 들어 있어요. 동생 병원비로 쓰세요. 그리고 이건 내 친구 명함이에요. 다른 도시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데 지우 씨가 그 회사에 출근해도 돼요. 조건이 나쁘지 않을 거예요.”알고 보니 그녀는 지우를 남태준에게 멀리 떨어지게 하려는 목적이었다.지우는 명함과 은행 카드를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내가 아직도 다희 씨에게 예의를 차리는 건 내가 소질이 있어서지 당신 같은 사람과 거래를 한다는 뜻은 아니에요. 당신은 여전히 내게 태준 씨를 팔아넘겨 죽일 뻔한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여자니까.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고 당신은 내가 가장 싫어하고 혐오하는 사람이야.”“태준 씨가 만약 당신을 사랑해서 다시 만나고 싶다면 난 그 사람 축복해. 나와 태준 씨는 이미 끝난 사이니까 이딴 짓 하지 마. 역겨우니까.”말을 마친 지우는 일어나 차갑게 인사했다.“당신 같은 사람이랑은 더 이상 할 말 없으니까 앞으로 다시는 만나지 말자. 당신의 그 더러운 손이 우리 가족에게 뻗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럼 이만.”지우가 몇 걸음 갔을 때 임다희가 뒤에서 외쳤다. “당신들 남동생 병원비를 전혀 감당할 수 없잖아? 내 돈을 받지 않겠다면 태준이 찾아가 돈을 빌리는 일도 없었으면 해. 이미 끝난 이상 더 이상 얽히지 말라고.”지우는 발걸음을 멈추더니
지우는 울지 않았고 울 수도 없었다.테이블 밑에 놓인 그녀의 손은 일찌감치 주먹을 불끈 쥔 채 눈 밑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고 화가 나서 눈앞의 징그러운 여자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다.‘이 여자는 지금 무슨 자격으로 우는 거지? 정말 미치겠네!’임다희는 휴지를 꺼내 계속 눈물을 닦았다. “나중에 난 무사히 귀국했지만 태준이는 이미 살아날 확률이 전혀 없을 정도로 혹사당했어요. 모두 태준이가 죽은 줄 알고 해변에 시신을 버렸어요.”지우는 눈시울을 붉히고 이를 갈며 물었다.“겨우 살아난 태준 씨가 가장 절망적이고 어둡던 시절에 당신은 어디 있었죠? 한 번도 보러 오지 않았잖아요? 대체 왜죠? 태준 씨가 장애를 얻어서?”임다희는 다급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글썽이며 지우를 보았다.“아니에요. 난 태준이 동생 때문에 감히 보러 가지 못했어요.”“남하준?”지우가 묻자 임다희는 고개를 끄덕이고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태준이가 사고 난 후로 우리나라 미사일이 바로 이웃 섬으로 날아가 순식간에 초토화됐어요. 국제적으로는 미사일이 빗나간 우발적인 사고라고 보도됐죠.”“하지만 난 그 섬이 태준이가 계속 조사해온 가장 큰 마약 굴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요. 섬 전체가 마약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있었거든요.”지우는 차갑게 웃고는 차를 마시고 숨을 가다듬고 말했다.“남하준이 그 일로 당신에게 복수할까 봐 감히 태준 씨를 보러 가지 못했다?”임다희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하지만 태준 씨는 당신을 언급하지도 않았어요. 그 일도 남하준이 직접 조사한 거고.”“그분 성격으로는 당신을 죽이고도 남았겠지만 태준 씨가 원하지 않았죠.”임다희는 눈물을 닦고 밝은 태도를 보였다.“그걸 난 이제야 알았고 그래서 지우 씨에게 태준이는 아직도 날 많이 사랑한다고 알려주고 싶었어요.”지우는 참다못해 차갑게 웃고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돌려 창밖의 대나무 숲을 바라보았다.그녀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임다희를 바라보았다. “당신 남태준 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