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서다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억울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백하린 씨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

여자의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쾌함이 묻어났다.

그 어떤 남자라고 하더라도 서다인의 말에 마음이 살살 녹을 것이다. 남하준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차가운 척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서다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

‘하준 씨가 데려다준다면 받아들이지, 뭐. 마침 돌아가서 이혼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말이야.”

서다인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일하게 남은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고는 남하준을 따라 방을 나서 식당에 아침 먹으러 갔다.

이른 아침 식당에는 오가는 직원들이 끊이질 않았다.

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도련님,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

남하준은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

인사를 건넨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기에 다 대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다인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모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이에요.”

서다인은 캠프에 있는 며칠 동안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중독 사건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서다인을 매우 좋아했다.

서다인은 식탁 앞에서 음식을 기다렸다.

남하준이 아침 두 세트를 챙기고는 하나를 서다인에게 건넨 후 식사를 시작했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만두피는 그대로 두고 그 안의 고기만 쏙 골라 먹는 서다인을 발견했다.

삶은 달걀도 흰자만 먹고 노른자는 건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소고기죽도 파를 전부 골라냈다.

남하준은 가슴이 왠지 모르게 움찔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나쁜 습관은 걔랑 정말 닮았네.”

서다인이 죽을 먹으면서 나지막이 물었다.

“누구랑요?”

“하린이 말이야.”

남하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눈치 없이 또 물었다.

“여자들은 다 이렇나 봐?”

서다인은 원래도 기분이 안 좋았는데 아침을 먹을 때까지도 백하린의 얘기를 들었으니 방금 먹은 아침이 돌멩이처럼 가슴을 꽉 막히게 해 더는 넘어가지 않았다.

서다인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배불러요, 그만 먹을래요.”

남하준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한 채 잔소리를 이어갔다.

“음식 낭비하지 말고.”

서다인은 가슴이 답답해 입술을 감쳐물었다. 한동안 참다가 화가 나 젓가락으로 만두를 푹 찍어 누르고는 내키지 않는데도 입 안에 쑤셔 넣었다.

그녀는 싫어하는 만두피와 달걀노른자를 억지로 삼키고 소고기죽도 다 들이켰다. 심지어 가장 싫어하는 파까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모두 입에 넣었다.

남하준은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왠지 모르게 귀엽게 보였다.

아침 식사가 끝난 후.

서다인은 남하준의 차에 올라탔다. 운전은 운전기사가 했고 남하준은 그저 가는 길에 동행했을 뿐이다.

안성에 도착하려면 적어도 6시간은 걸린다.

그동안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고, 휴게소에서 간식을 먹을 때만 간단하게 몇 마디의 대화를 나눴다.

몇 시간을 거쳐 그들은 드디어 안성시에 도착했다.

남하준이 먼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침묵을 깨뜨렸다.

“본가에 돌아갈 거야? 아니면 수원 별장으로 갈 거야?”

수원 별장은 주로 돈 많은 어르신들이 사는 고급 별장 구역이었다.

은경애는 치매를 앓고 있기에 남하준을 제외한 가족을 모두 잊었다. 그래서 본가에서 살기를 원하지 않았다.

서다인은 그동안 수원 별장에서 은경애 곁에 있으면서 3년 동안 그녀의 간병인으로 살아왔다.

남하준과 결혼한 후 은경애는 오롯이 그녀가 남하준과 같이 본가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녀에게 월급도 주지 않고 더는 수원 별장에 머물게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하준은 본가에 살지 않았다. 게다가 본가에는 대가족이 살고 있었기에 서다인은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그래서 친정에 돌아갔는데 그 사이 친오빠에게 속아 변경 지역에 팔려 간 것이다.

서다인이 한참 생각하고는 대답했다.

“동교삼거리로 가죠.”

남하준은 조금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친정에 돌아가려고?”

서다인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

남하준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어차피 캠프로 돌아가 업무를 처리해야 했기에 서다인이 어디에 머물지는 그녀가 좋아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두었다.

30분 후,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서다인은 한 가게 앞에서 차를 멈추라고 했다.

가게 안에 들어간 서다인은 신용카드를 긁어 큰 포대와 야구방망이를 하나 샀다.

그녀가 물건을 들고 돌아왔을 때 남하준은 눈썹을 치켜들며 의아함을 보였으나 별다른 얘기를 묻지 않았다.

다시 시동을 건 차는 계속 동교의 빈민가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