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인은 모기향을 들고 별장으로 향했다.“사모님.”그녀가 소리를 듣고 돌아섰다.양복 차림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공손히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양손으로 편지봉투 하나를 건넸다.“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이게 뭐죠?”“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공무가 있어서 조만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세요.”서다인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모기향을 남자에게 건네주고는 봉투에서 은행 카드를 꺼냈다.안에는 또 한 장의 쪽지가 있었는데, 강건하고 힘찬 글이 쓰여 있었다.[대문과 신용카드 비밀번호는 모두 151617. 중국으로 공무 집행 감. 귀국 날짜 미정.]서다인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카드를 내려다보면서 남하준의 물건을 이리저리 만졌다.그녀의 마음은 마치 몇십 근의 돌로 짓눌려 있는 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로웠다.그리움이기도 하고 서운함이기도 했다.서다인은 나지막이 물었다.“방금은 누가 저에게 파라솔을 씌워줬고 모기향도 켜준 거죠?”“도련님께서 제게 명령하신 겁니다.”서다인은 감동과 함께 잔잔한 아픔이 밀려왔다. 이런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남하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백하린은 대체 얼마나 행복할까?순간, 그녀는 백하린이 너무 부러웠다.그녀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덕을 쌓아도 다음 생에 남하준의 사랑과 바꿀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서다인은 사색에 잠겨 한숨을 내쉬었다. 모기향을 받아들고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남원에 사는 요 며칠 동안 서다인은 근 3년 동안 가장 조용하고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하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껏 책을 보고, 노래를 듣고, 늦잠을 자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하지만 이 아름다운 고요는 일주일 만에 돌아온 불청객에 의해 깨져버렸다.그녀가 남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안 백하린은 남하준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에 맞춰 급히 안
서다인은 속으로 움찔했다.‘뭘 하려는 거지?’백하린은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오빠 지금 돌아오는 길이야. 이 집은 윗분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대문 말고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불길한 예감이 서다인의 머릿속에 스쳤다. 백하린의 음산한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두피가 저렸다.곧이어 백하린은 미친 듯이 책장으로 돌진해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책을 뒤집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그리고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후려갈겨 선명한 손자국을 남겼다.서다인은 입을 떡 벌리고 여자의 갑작스러운 자해 행위에 놀라 어리둥절했다.그녀의 비열한 수단은 일찍이 경험했지만, 서다인을 모함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해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백하린을 애지중지하는 남하준은 어떻게 악명 높고 평판이 좋지 않은 서다인의 설명을 믿을 수 있을까?서다인은 아마 죽어도 이 누명을 씻을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백하린,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자해까지 하는 거예요? 정말 미쳤어요?”백하린은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다인에게 천천히 걸어갔다.이에 서다인은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당신의 이런 모습을 남하준이 알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백하린은 하찮은 듯 코웃음을 쳤다.“서다인, 남하준과 결혼하기 전에 잘 알아보지 그랬어? 남하준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오빠가 십수 년 동안 사랑한 죽마고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나에 대한 사랑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야.”“그리고 난 오빠 마음속에 늘 완벽하고 순수하고 선량한 이미지거든. 이것 또한 네가 예측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 날 그렇게 사랑하는 오빠가 나에 대해 의심할 것 같아?”서다인은 가슴이 시큰거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백하린은 뒤쫓아 나가더니 문 앞에서 서다인을 잡아당겼다.그때, 무장한 군용 전차 한 대가 밖에서 천천히 들어왔다.백하린은 그 차량을 힐끗 보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미안해요, 다인 언니. 저는 내연녀가 아니
그녀의 말에 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온몸에는 주위 공기를 얼릴 듯한 무서운 냉기가 감돌았다.서다인은 사실 이 남자를 화나게 하면 목숨을 잃을까 봐 무서웠다.하지만 그녀는 죽더라도 자신을 위해 변명할 기회를 얻어야 했다.남하준이 믿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마음속에 백하린의 무게는 변하지 않을 테니.남하준은 침묵했다.서다인의 연약한 눈동자 아래 꿋꿋한 강인함을 보았다.마치 사기 센터에서 그녀를 구했을 때, 도박장에서 그녀가 친오빠를 때릴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연약하지만 강인한 눈빛, 애써 눈물을 참으려 해도 눈물샘을 가누지 못하는 무기력함은 어린 시절 그 어떤 좌절에도 굴하지 않는 백하린과 너무 닮았다.남하준의 심장은 약간 두근거렸고 착각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했다.말을 마친 서다인은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손바닥 부상이 특히 눈에 띄었고, 남하준은 그제야 그녀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서다인은 자신의 짐 가방을 주워 들고 돌아서서 현관문으로 향했다. 두 걸음 걷던 그녀는 통증을 느끼고 허리를 굽혀 무릎의 상처를 살폈다.간단히 확인한 후 다시 몸을 쭉 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은 외롭고 씁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햇빛이 그녀에게 비쳐도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못하고 이따금 슬픔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백하린은 빨갛게 부은 볼을 감싸고는 안쓰럽게 흐느꼈다.“난 내연녀가 아니에요. 난 두 사람의 결혼을 깨뜨리지 않았다고요. 흑흑. 왜 날 때릴까요? 대체 왜?”백하린은 불쌍하게 울먹이며 집으로 들어갔다.남하준도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주웠다.하지만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백하린은 무조건 책을 분류 별로 정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쌓아 두었다.그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조용한 밤, 남원의 서재.남하준은 컴퓨터 앞에서 비디오 영상 하나를 전송했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M국 군
은경애는 서다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네 남편이 왔어.”서다인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은경애는 집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집 안에 있어.”서다인은 긴장해서 뒤를 돌아보았다.‘백하린의 복수를 하러 온 걸까? 아니면 나랑 이혼하러 온 걸까?’은경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네가 어제 여기서 하룻밤을 잤으니 네가 보고 싶어 데리러 왔나 보다!”서다인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고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할머니는 그들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모르고 금슬이 좋은 부부인 줄 알고 있었다.은경애는 서다인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남하준이 방에서 나왔다.은경애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하준아, 이리 와 보거라.”“할머니.”남하준은 다가가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검은색 캐주얼 차림의 그는 듬직하고 위엄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서다인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모순적인 것은 그가 밉고, 원망스럽고, 보고 싶지 않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남하준은 서다인이 할머니를 부축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늘어뜨리고는 줄곧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워낙 과묵하고 언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서다인의 다친 손바닥을 보았을 때, 미안한 마음이 저절로 피어났다.침울한 기류가 분위기를 다운시키자 남하준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그 상처 괜찮아?”은경애는 눈살을 찌푸리고 서다인의 다친 손을 잡아당겨 남자의 앞에 펼치고는 언짢게 말했다.“괜찮냐고? 봐봐, 여린 손바닥이 다 까졌어! 부주의로 넘어져 무릎을 다쳤고 손바닥에 찰과상을 입어 피가 났다더구나. 어제 내가 약을 발라줄 때 아주 펑펑 울었어. 나를 안고 아이처럼 두 시간 내내 울어서 눈도 퉁퉁 부었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실연당한 줄 알 거다!”서다인은 뻘쭘한 듯 할머니의 손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할머니,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러세요.”남하준은 부끄럽고
저녁 무렵.식탁에서 세 사람은 모두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남하준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오붓한 식사 시간을 깨뜨렸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더니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백하린이 영상통화를 걸어온 것이다.할머니와 서다인의 앞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기가 거북했다. 게다가 어제 서다인을 모함한 일도 미처 혼내지 못했다.남하준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고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시간 나면 전화할게.]메시지를 보낸 남하준은 휴대폰을 식탁 위에 놓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은경애는 남하준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요즘 바쁘냐?”“좀 바빠요.”“공적인 일로, 아니면 사적인 일로?”할머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중요한 전화 아니에요.”남하준이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영상통화가 다시 걸려왔다.서다인은 그것이 백하린의 전화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고 기분이 다운되어 조용히 식사했다.남하준은 서다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휴대폰을 집어 다시 끊어버렸다.두 번이나 때아닌 영상통화로 할머니와 서다인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던 남하준은 할머니에게 반찬을 집어 주고 또 서다인에게도 고기 한 점을 집어 주었다.서다인은 잠시 멍해졌다. 남자가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은 고기를 보면서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속으로 야호를 불렀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기뻐할 마음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집어 다른 접시에 놓았다.남하준은 눈살을 약간 찡그렸다. 서다인이 여전히 화가 났고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계속 목구멍에 걸려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백하린의 세 번째 전화가 걸려오자 이번에는 은경애가 재빨리 남하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영상통화를 받았다.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하준 오빠, 서다인 진짜 너무 해요. 왜 내 방에 있는 물건을 함부로 만지냐고요! 서랍도 엉망진창이고 몇천만 원짜리 목걸이도 사라졌어요. 서다인이 훔쳤을지도 몰라요!”은경애의 안
서다인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남하준을 위해 해명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그럼 방금 그 여자는 누구야?”할머니는 병세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되니 서다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남하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중복했다.“아직 어린애가 헛소리하는 것뿐이에요.”남하준은 멍해졌다. 서다인은 그렇게 큰 억울함과 모욕을 당하고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백하린이 말한 것처럼 남을 헐뜯고 해코지할 사람이 아니었다.은경애는 서다인의 위로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저녁을 먹은 후, 세 사람은 정자 밖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밤빛이 몽롱하고 고요한 정원에는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가득했다.향긋한 차까지 더해지니 더욱 평화롭고 아늑했다.은경애가 손자 내외와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인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어르신, 백하린 씨라고 하는 분이 어르신과 도련님을 뵙고자 합니다.”서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멍한 표정으로 계속 차를 마셨다.은경애가 물었다.“백하린?”“네. 도련님과 죽마고우이고, 도련님이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셨던 분이고, 어르신께서도 가장 아끼던 예비 손자며느리라고 하던데요?”남하준은 이 말을 듣고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할머니, 제가 처리하고 올게요.”은경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말했다.“넌 가만히 있어. 들어와서 똑바로 말해보라고 해.”남하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서다인은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할머니, 백하린 씨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 같으니 저는 먼저 방으로 가서...”은경애가 엄숙하게 말을 끊었다.“너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다인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이때 하인은 이미 백하린을 화원 정자로 데리고 왔다.그녀는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에 고가의 액세서리를 착용해 세련미를 뽐냈다.백하린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그녀는 유독 서다인을 투명인간 취
은경애는 화가 나서 몸을 약간 떨며 주먹을 불끈 쥐고 남하준에게 물었다.“하준아, 이 여자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렇지?”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덤덤하게 말했다.“할머니, 이 친구가 백하린이에요.”은경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얼굴이 붉어졌고,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는 서다인을 잡고 물었다.“완자야,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이고 있는 거지? 너야말로 내 손자며느리잖아!”서다인은 할머니의 불안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챘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전에는 할머니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할머니의 호의를 마음 편히 받아들였다.하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오해라는 걸 알았으니, 서다인은 무슨 자격으로 계속 남하준의 아내로서 할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서다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을 잃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꿋꿋하게 말했다.“할머니가 저를 계속 완자라고 부르셔서, 저는 제 얼굴이 동그랗고 또 늘 완자 머리를 해서 그렇게 부르시는 줄 알았어요. 할머니가 저를 전에 아끼던 예비 손자며느리로 착각하신 줄은 정말 몰랐어요.”은경애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서다인의 손을 꼭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난 착각하지 않았다. 네가 바로 완자야. 이미 잊은 거냐? 네가 어릴 때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핑크빛이 돌아 하준이가 너보고 완자 같다고 해서 계속 너를 완자라고 불렀잖아.”“하준이는 어릴 때부터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아꼈어. 하지만 넌 그때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그 마음을 전혀 몰랐지. 네가 유학을 떠나 우리와 연락이 끊긴 후로 하준이는 몇 년 동안 거의 혼이 나간 채로 지냈단다.”“그리고 네가 커서 귀국하면 어떻게든 너와 결혼하게 도와달라고 나한테 부탁했어. 다시는 너를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어. 내가 너희 둘 결혼을 얼마나 어렵게 성사시켰는데.”은경애는 말할수록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더욱 흐느꼈다.“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서다인은 할머니가 울자 심장이 불에 타
은경애는 백하린이 건넨 휴대폰을 바닥에 힘껏 내팽개쳤다.“안 봐.”그녀는 격앙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하준아, 얼른 말해다오. 이 할미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얼른 말해.”남하준은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꼭 잡아드리며 다정하게 위로했다.“할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인이가 완자인 것 같으면 그냥 그렇게 해요. 할머니 마음 편하신 대로 하면 돼요.”이때 백하린이 벌떡 일어나며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하준 오빠, 내가 바로 완자라고요. 오빠 언제까지 할머니 기분 맞춰드리려고 진실을 뒤바꿀 순 없어요. 이건 결국 할머니 본인만 속이는 셈이잖아요!”남하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외쳤다.“그 입 닥쳐.”그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백하린과 서다인 모두 화들짝 놀랐다. 백하린은 속상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흘렸다.은경애는 슬픈 마음을 추스르며 서다인을 바라봤는데 눈가에 애잔함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래, 맞아. 내가 다인이 완자라면 완자인 거야.”화난 백하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또다시 끼어들었다.“할머니, 제가 완자라고요. 하준 오빠가 사랑한 사람은 줄곧 저였어요. 다인 언니를 사랑한 적도 없는데 할머니 때문에 오빠가 무슨 죄에요. 오빠랑 언니는 조만간 이혼할 텐데 이렇게 고집부릴 이유가 뭐냐고요 대체?”백하린은 할머니의 기분 따위 전혀 안중에 없이 바로 인신공격을 해버렸다.남하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한없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왜 어른이 된 백하린은 이토록 악독하게 변한 걸까?해외 교육에 문제가 생긴 걸까?할머니는 백하린의 말을 듣더니 울화가 치밀어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그녀는 백하린에게 삿대질하며 물었다.“너... 방금 누가 고집을 피운다고 했어?”은경애는 평생 자애롭고 너그러운 인품으로 살아오셨는데 늙어서 어디 근본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것에게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반면 남우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는 이다은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그 이다은 말입니다.”그의 말에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침묵을 깨고 여중권이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겠군요.”여민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를 홍보팀에 들여온 것도 계획된 거였나요? 저를 직접 면접 본 것도 다 계획이었나요?”남우영은 부드럽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여민지 씨가 제 아내를 사칭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제 아내로 위장해 제 아내의 학위를 가로채고, 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옥에 갈 이유가 되니까요.”여민지는 온몸을 떨며 부모를 불안하게 쳐다봤다.여중권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남 대표님, 대화로 해결합시다. 과거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어려운 이씨 가문을 도와줬던 건 대표님도 잘 아실 겁니다.”남우영은 냉소를 띤 채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 딸을 회사에 들인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걸 제대로 정산할 때가 됐군요.”여중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혜원과 여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필사적으로 남우영에게 용서를 빌었다.“남 대표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어떤 방법이든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남우영은 비웃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잠시 후, 경찰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체포되었다.여민지는 울면서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남우영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외면했다.레스토랑을 나서며 남우영은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
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네. 이러다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남씨 가문 며느리가 감옥에 가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겠지?’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막막한 심정으로 끌려갔다.한편, 남우영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레스토랑에서 남우영을 만난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여민지의 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치 딸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남우영은 마주 앉아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전직 공무원에 전직 판사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다은 씨 같은 약자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여민지의 아버지, 여중권이 먼저 입을 열며 공손히 물었다.“남우영 씨는 어디에서 일하고 계십니까?”“에이스타 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여민지의 어머니, 이혜원이 대화를 거들며 말했다.“우리 딸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어요?”“얼마 안 됐습니다.”이혜원이 다시 물었다.“그럼 두 분 관계는 어느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남우영은 태연히 답했다.“오늘이 처음으로 저녁 약속을 한 정도입니다.”여중권과 이혜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중권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첫 만남부터 저희를 초대하신 이유는 뭔지...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어서요.”남우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결혼 이야기라니요. 두 분은 저와 다은 씨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이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민지가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빠, 엄마... 대표님께서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하셔
여민지는 모두의 칭찬과 아부 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남우영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로비를 응시하며 이다은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대부분 직원이 퇴근했지만, 그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안녕하세요.”여민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여민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도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소문이요?”“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더라고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심지어 대표님이 저에게 적극 대시한다고들 해요...”남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여민지는 그가 미소 짓는 걸 보고 신이 난 듯 한 발 더 다가섰다.“대표님, 기회 되면 저녁 식사하면서 조용히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남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좋아요. 부모님도 모시고 나오세요.”여민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뭐라고요?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남우영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갑시다.”여민지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우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건물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다은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이 함께 차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이다은은 뒤척이며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만약 이 사실이 남우영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다음 날 아침, 이다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남우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주어진 일을 받아 들고 묵묵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하는 등 사소한 일을 처리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그녀는 팀장에게서 늘 가벼운 업무만 배정받았다. 학력이 높지 않은 데다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우아한 몸매는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게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하러 나갔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은 그녀처럼 사무실에 남아 빵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이다은은 무심히 빵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어떻게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랑 번개 모임을 가지듯 결혼할 수가 있냐고!’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항공 개발 부서에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일이야.’그녀가 빵을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이다은 씨.”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남자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시락을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점심입니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주변을
남우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그의 얼굴도 차갑게 굳었다. 그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이혼은 절대 안 할 거예요.”이다은은 울음을 참지 못한 채 입술을 떨며 두 손을 모아 그에게 간절히 말했다.“남우영 씨, 제발 부탁이에요. 우리는 애초에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니에요. 이렇게 결혼하면 안 됐던 거예요.”‘남우영 씨’라고 변해버린 호칭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그의 가슴 깊숙이 꽂혔다. 이다은이 ‘남우영 씨’라고 불렀던 그 순간, 남우영은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질 수 없을 만큼 멀게 느껴졌다. 이다은은 무심결에 그의 마음을 무참히 베어냈다.서운함과 분노가 함께 치솟은 남우영은 단호한 목소리로 외쳤다.“우린 아직 이혼한 거 아니에요. 난 당신 남편이에요. 그런데 왜 나를 ‘남우영 씨’라고 불러요?”이다은은 그의 격한 반응에 당황하며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 알겠어요. 원하는 대로 부를게요. 하지만 이혼은 해야 해요.”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으며, 이 결혼을 끝내야 가족의 안전이라도 지킬 수 있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었다.하지만 ‘이혼’이라는 단어는 남우영의 숨조차 멎게 할 만큼 그에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그는 눈에 실핏줄이 가득한 채로 이다은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앞으로 끌어당기며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마주했다.“왜요? 제가 뭐가 그렇게 부족한 건데요? 왜 이렇게까지 저를 싫어하는지 이유라도 좀 말해봐요.”이다은은 그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떨구었다.“다은 씨가 원하는 얼굴이 아니에요? 아니면 제가 다은 씨의 기대에 미칠 만큼 자상하지 않았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이유를 알고 싶어요!”그의 절박한 외침에 이다은은 결국 억누르고 있던 눈물을 흘리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남우영 씨가 ‘남우영’이기 때문이에요.”그녀의 대답은 남우영의 머릿속을 하얗게 비워버렸고, 그는 슬픔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낮게 말했다.“다은 씨... 이혼하고 싶어요? 내 눈에 흙이
“그리고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국경 지대에서 살았고 학교도 모두 국경 지대에서 다녔어요. 남우영 씨와 제가 중학교 동창이라는 거예요?”이다은은 여전히 단체 사진들을 꼼꼼히 살펴보며 마치 실마리를 찾고 있는 듯 보였다.남우영은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다 쓸쓸한 표정으로 조용히 말했다.“단체 사진만 봐요. 다은 씨와 제가 단둘이 찍은 사진은 하나도 없으니까요.”이다은은 깜짝 놀라며 그의 말을 되새겼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불안한 예감이 서서히 피어오르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내가 싫다고 했던 거예요? 아니면 아예 그럴 기회조차 없었던 거예요?”그녀는 침을 삼키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남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대답했다.“다은 씨가 싫다고 했었어요.”“...”그 순간, 이다은의 심장은 순간 멎는 듯했고 혈관을 타고 섬뜩한 긴장감이 퍼지며 숨이 가빠졌다.‘중학생 때의 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나름 친절한 성격이었던 내가 동창의 사진 요청을 거절했다고? 그럴 리가 없어... 그렇다면 설마... 그 애인 거야?’이다은은 떨리는 손으로 사진을 내려놓으며 속으로 생각했다.‘남우영... 남 씨잖아! 그리고 군전 그룹 장군도 남 씨잖아!”남우영은 이다은의 반응을 살피며 잠시 멈칫하더니 조용히 고개를 내렸다.이다은은 또다시 심장이 철컹 내려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의 퍼즐을 맞추며 중학생 시절 유일하게 거리를 두었던 남자아이를 떠올렸다.‘그때 그 아이가 맞는 거야? 내가 일부러 멀리했던 그 애?’이다은은 다시 한번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혹시... 중학교 때 나한테 러브레터 보낸 적 있어요?”남우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랬었죠. 다은 씨가 그 다 찢어버렸지만요... 참, 한 번은 제 얼굴에 던지기도 했고요.”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손에 들고 있던 사진을 떨어뜨렸다. 그녀는 황급히 방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쾅 닫았다.남우영은 멍하니 서서 그녀의 반응을 지켜보았고,
남우영은 순간 굳어버렸다.이다은의 화난 눈을 마주 본 그는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목구멍이 막힌 듯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고개를 살짝 숙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이다은은 억누른 감정을 겨우 다스리며 차갑게 물었다.“왜 아무 말도 못 해요? 아직 변명할 핑계를 못 찾은 거예요, 아니면 끝까지 날 속이려는 거예요?”남우영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제 이름은 남우영이 맞아요.”이다은은 피식 웃으며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쳤다.“그건 나도 알아요. 혼인 신고서에 적혀 있었으니까...”잠시 침묵이 흐른 뒤, 남우영은 고백하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솔직히 말할게요. 다은 씨에게 거짓말했어요. 난 남우라는 사람이 아니고, 당신이 만나기로 했던 그 사람도 아니에요.”이다은은 그 말을 듣고 참지 못한 듯 날카롭게 물었다.“그럼 왜 이모가 소개해 준 사람인 척하면서 날 속였어요?”남우영은 입을 꾹 다문 채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이다은은 겁먹은 사람처럼 한발 물러서며 손을 뒤로 감췄고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남우영도 놀라긴 마찬가지였고 그는 경직된 채 서있었다. 몇 초간 머뭇거리던 그는 천천히 민망해진 손을 내려놓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남우 씨든 나든 어차피 모두 얼굴 한 번 본적 없는 사람 아니었어요? 어차피 모르는 남자와 결혼하는 거라면 저와 하나 그 남자와 하나 뭐가 그렇게 크게 다른가요?”이다은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그를 쏘아보며 단호히 말했다.“당연히 다르죠!”“이모가 소개해 준 남자라면 적어도 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남우영 씨는 뭐죠? 왜 맞선남인 척하면서 저와 결혼까지 한 거냐고요?”남우영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심스레 물었다.“내가 이렇게 다은 씨 곁에 있는데 왜 믿을 수 없어요? 이걸로 부족한가요?”이다은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그게 문제의 핵심이 아니잖아요.”그녀는
이다은은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문을 조용히 잠그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켜더니 곧바로 ‘남우영’이라는 이름을 검색하기 시작했다.검색 결과는 쓸모없는 정보들로 가득했지만, 그중 단 한 줄의 제목이 그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호기심에 마우스를 움직여 클릭한 그녀는 화면에 뜬 내용을 읽어 내려가다가 온몸이 얼어붙고 소름이 끼치는 걸 느꼈다.놀랍게도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 이름도 남우영이었다. 그러나 더욱 충격적이었던 건, 그의 이름이 연관된 정보가 거의 없다는 것, 그리고 인터넷 어디에서도 그의 사진 한 장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뭔가 이상한데...”이다은은 점점 불안에 휩싸이며 곧바로 휴대폰을 들어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몇 번 울리자, 이모가 전화를 받았다.“다은아, 웬일이니?”“이모, 저... 남우 씨 있잖아요. 그분이...”이다은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이모가 다급하게 미안하다며 지난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아이고! 다은아, 내가 미처 말을 못 했구나. 남우네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셔서 너랑 약속을 못 지켰다고 했었는데... 그걸 꼭 전해달라고 했었는데 내가 깜빡했어. 장례식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더라고...”그 말을 듣는 순간, 이다은은 온몸이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잠긴 방문을 바라봤지만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이모가 소개해 줬던 ‘남우 씨’가... 아니라는 말이야?’이모가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다은아, 남우 씨를 탓하지 마라. 아버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충격이 너무 컸다더라. 지금은 그냥 아버지를 잘 보내드리고 정리할 시간 좀 줘야 할 것 같아. 네가 괜찮다면 선은 좀 미루자꾸나.”이다은은 심장이 요동치는 걸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그녀는 갈라질 듯한 목소리로 간신히 물었다.“이모, 이모가 소개해 줬던 남우 씨말인데요... 지금 고향에 있는 거 맞죠?”“그렇지. 아직 고향에 있을 거야. 왜 그러니?”이다은은 목이 바짝 말랐고 깊은숨을 삼
남우영은 얇게 미소를 지으며 손에 든 외투를 옆으로 내려놓고 망설임 없이 성큼 다가가 놀랄 틈조차 주지 않고 단숨에 이다은을 안아 올렸다.“뭐 하는 거야!”이다은은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했지만 본능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그러자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고 얼굴이 화끈거리며 뜨겁게 달아올랐다.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따스한 기운이 천천히 퍼져나갔다.남우영은 이다은을 품에 안은 채 거실로 들어가 소파에 조심스레 앉더니 그녀를 무릎 위에 부드럽게 내려놓았다.두 사람은 밀착된 자세 속에서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고 공기 중에는 서서히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저녁은 먹었어요?”그의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며 울렸다.이다은은 실제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지만 그의 물음에 솔직히 답하기가 망설여져 결국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대답했다.“먹었어요.”남우영은 그녀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천천히 걷어 귀 뒤로 넘기며 깊고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다은은 그 시선에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동시에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어디 다녀왔는지 아직 나한테 말 안 해줬잖아요?”그의 물음에 이다은은 한순간 멈칫했지만 곧 기쁨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답하며 활짝 웃었다.“면접에 합격했어요! 이제 회사에 다니게 됐어요. 너무 기뻐서 잠깐 친정에 들렀어요.”남우영은 살짝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안았고 그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뜻함과 함께 다정하고도 진심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우리 다은 씨, 진짜 잘했네요. 내가 뭐랬어요? 분명 잘될 거라고 했잖아요.”그의 칭찬에 이다은은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그 순간에도 그의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 머물러 있었고, 마치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따뜻하면서도 강렬한 눈빛으로 세심하게 바라봤다.그 시선이 깊어질수록 이다은은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두근거리고 숨조차 쉬기 어려울 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