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인은 모기향을 들고 별장으로 향했다.“사모님.”그녀가 소리를 듣고 돌아섰다.양복 차림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공손히 그녀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더니 양손으로 편지봉투 하나를 건넸다.“도련님께서 전해드리라고 하셨습니다.”“이게 뭐죠?”“잘 모르겠습니다. 도련님께서 공무가 있어서 조만간 돌아오지 않을 테니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저희들에게 말씀해 주세요.”서다인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듣고 가슴이 아팠다.그녀는 곧 정신을 차리고 모기향을 남자에게 건네주고는 봉투에서 은행 카드를 꺼냈다.안에는 또 한 장의 쪽지가 있었는데, 강건하고 힘찬 글이 쓰여 있었다.[대문과 신용카드 비밀번호는 모두 151617. 중국으로 공무 집행 감. 귀국 날짜 미정.]서다인은 쪽지를 접어 주머니에 넣고 카드를 내려다보면서 남하준의 물건을 이리저리 만졌다.그녀의 마음은 마치 몇십 근의 돌로 짓눌려 있는 듯 말할 수 없이 답답하고 괴로웠다.그리움이기도 하고 서운함이기도 했다.서다인은 나지막이 물었다.“방금은 누가 저에게 파라솔을 씌워줬고 모기향도 켜준 거죠?”“도련님께서 제게 명령하신 겁니다.”서다인은 감동과 함께 잔잔한 아픔이 밀려왔다. 이런 남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남하준의 사랑을 듬뿍 받는 백하린은 대체 얼마나 행복할까?순간, 그녀는 백하린이 너무 부러웠다.그녀가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덕을 쌓아도 다음 생에 남하준의 사랑과 바꿀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서다인은 사색에 잠겨 한숨을 내쉬었다. 모기향을 받아들고 남자에게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남원에 사는 요 며칠 동안 서다인은 근 3년 동안 가장 조용하고 편안한 일상을 보냈다.하인의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껏 책을 보고, 노래를 듣고, 늦잠을 자며 편안하고 여유로운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다.하지만 이 아름다운 고요는 일주일 만에 돌아온 불청객에 의해 깨져버렸다.그녀가 남원에서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안 백하린은 남하준이 출장에서 돌아오는 날에 맞춰 급히 안
서다인은 속으로 움찔했다.‘뭘 하려는 거지?’백하린은 실눈을 뜨고 웃으며 말했다.“오빠 지금 돌아오는 길이야. 이 집은 윗분들을 접대하는 곳이라 대문 말고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불길한 예감이 서다인의 머릿속에 스쳤다. 백하린의 음산한 모습에 등골이 오싹해지고 두피가 저렸다.곧이어 백하린은 미친 듯이 책장으로 돌진해 그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던 책을 뒤집어 엉망진창으로 만들었다.그리고 자신의 뺨을 몇 번이나 후려갈겨 선명한 손자국을 남겼다.서다인은 입을 떡 벌리고 여자의 갑작스러운 자해 행위에 놀라 어리둥절했다.그녀의 비열한 수단은 일찍이 경험했지만, 서다인을 모함하기 위해 스스로를 가해할 정도로 잔인한 사람인 줄은 몰랐다.백하린을 애지중지하는 남하준은 어떻게 악명 높고 평판이 좋지 않은 서다인의 설명을 믿을 수 있을까?서다인은 아마 죽어도 이 누명을 씻을 수 없을 것이다.그녀는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백하린, 나에게 누명을 씌우려고 자해까지 하는 거예요? 정말 미쳤어요?”백하린은 차가운 눈을 가늘게 뜨고 서다인에게 천천히 걸어갔다.이에 서다인은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당신의 이런 모습을 남하준이 알까 봐 두렵지도 않아요?”백하린은 하찮은 듯 코웃음을 쳤다.“서다인, 남하준과 결혼하기 전에 잘 알아보지 그랬어? 남하준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오빠가 십수 년 동안 사랑한 죽마고우가 있다는 걸 알고 있어. 나에 대한 사랑은 네가 상상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야.”“그리고 난 오빠 마음속에 늘 완벽하고 순수하고 선량한 이미지거든. 이것 또한 네가 예측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지. 날 그렇게 사랑하는 오빠가 나에 대해 의심할 것 같아?”서다인은 가슴이 시큰거리고 숨이 막힐 것 같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백하린은 뒤쫓아 나가더니 문 앞에서 서다인을 잡아당겼다.그때, 무장한 군용 전차 한 대가 밖에서 천천히 들어왔다.백하린은 그 차량을 힐끗 보더니 이내 울음을 터뜨렸다.“미안해요, 다인 언니. 저는 내연녀가 아니
그녀의 말에 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눈빛은 활활 타오르고 온몸에는 주위 공기를 얼릴 듯한 무서운 냉기가 감돌았다.서다인은 사실 이 남자를 화나게 하면 목숨을 잃을까 봐 무서웠다.하지만 그녀는 죽더라도 자신을 위해 변명할 기회를 얻어야 했다.남하준이 믿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그의 마음속에 백하린의 무게는 변하지 않을 테니.남하준은 침묵했다.서다인의 연약한 눈동자 아래 꿋꿋한 강인함을 보았다.마치 사기 센터에서 그녀를 구했을 때, 도박장에서 그녀가 친오빠를 때릴 때와 같은 모습이었다.연약하지만 강인한 눈빛, 애써 눈물을 참으려 해도 눈물샘을 가누지 못하는 무기력함은 어린 시절 그 어떤 좌절에도 굴하지 않는 백하린과 너무 닮았다.남하준의 심장은 약간 두근거렸고 착각으로 인해 정신이 혼미했다.말을 마친 서다인은 손등을 들어 눈물을 닦았다. 그녀의 손바닥 부상이 특히 눈에 띄었고, 남하준은 그제야 그녀의 부상이 얼마나 심각한지 깨달았다.서다인은 자신의 짐 가방을 주워 들고 돌아서서 현관문으로 향했다. 두 걸음 걷던 그녀는 통증을 느끼고 허리를 굽혀 무릎의 상처를 살폈다.간단히 확인한 후 다시 몸을 쭉 펴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그녀의 가냘픈 뒷모습은 외롭고 씁쓸하고 고독해 보였다. 햇빛이 그녀에게 비쳐도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지 못하고 이따금 슬픔이 은은히 배어 있었다.백하린은 빨갛게 부은 볼을 감싸고는 안쓰럽게 흐느꼈다.“난 내연녀가 아니에요. 난 두 사람의 결혼을 깨뜨리지 않았다고요. 흑흑. 왜 날 때릴까요? 대체 왜?”백하린은 불쌍하게 울먹이며 집으로 들어갔다.남하준도 그녀를 따라 집으로 들어가 바닥에 널브러진 책을 주웠다.하지만 곧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린 시절 백하린은 무조건 책을 분류 별로 정리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쌓아 두었다.그의 눈동자에 놀란 기색이 스쳤다....조용한 밤, 남원의 서재.남하준은 컴퓨터 앞에서 비디오 영상 하나를 전송했다.그리고 휴대폰을 들어 M국 군
은경애는 서다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환하게 웃었다.“네 남편이 왔어.”서다인은 흠칫 놀라더니 얼굴이 약간 창백해졌다.은경애는 집 안을 가리키며 말했다.“집 안에 있어.”서다인은 긴장해서 뒤를 돌아보았다.‘백하린의 복수를 하러 온 걸까? 아니면 나랑 이혼하러 온 걸까?’은경애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네가 어제 여기서 하룻밤을 잤으니 네가 보고 싶어 데리러 왔나 보다!”서다인은 억지로 웃음을 지어 보였고 가슴이 찌릿찌릿 아팠다.할머니는 그들 사이가 얼마나 나쁜지 모르고 금슬이 좋은 부부인 줄 알고 있었다.은경애는 서다인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갔다.두 사람이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남하준이 방에서 나왔다.은경애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하준아, 이리 와 보거라.”“할머니.”남하준은 다가가 따뜻하게 인사를 건넸다.검은색 캐주얼 차림의 그는 듬직하고 위엄있는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서다인은 설레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 심장이 마구 뛰었다.하지만 모순적인 것은 그가 밉고, 원망스럽고, 보고 싶지 않고, 상대하고 싶지도 않았다.남하준은 서다인이 할머니를 부축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눈을 늘어뜨리고는 줄곧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그는 워낙 과묵하고 언변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서다인의 다친 손바닥을 보았을 때, 미안한 마음이 저절로 피어났다.침울한 기류가 분위기를 다운시키자 남하준이 목청을 가다듬더니 부드럽게 말했다.“그 상처 괜찮아?”은경애는 눈살을 찌푸리고 서다인의 다친 손을 잡아당겨 남자의 앞에 펼치고는 언짢게 말했다.“괜찮냐고? 봐봐, 여린 손바닥이 다 까졌어! 부주의로 넘어져 무릎을 다쳤고 손바닥에 찰과상을 입어 피가 났다더구나. 어제 내가 약을 발라줄 때 아주 펑펑 울었어. 나를 안고 아이처럼 두 시간 내내 울어서 눈도 퉁퉁 부었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실연당한 줄 알 거다!”서다인은 뻘쭘한 듯 할머니의 손을 잡아당기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할머니, 제가 언제 울었다고 그러세요.”남하준은 부끄럽고
저녁 무렵.식탁에서 세 사람은 모두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남하준의 휴대폰이 울리면서 오붓한 식사 시간을 깨뜨렸다.그는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보더니 미간을 가볍게 찌푸렸다.백하린이 영상통화를 걸어온 것이다.할머니와 서다인의 앞에서 그녀의 전화를 받기가 거북했다. 게다가 어제 서다인을 모함한 일도 미처 혼내지 못했다.남하준은 망설임 없이 전화를 끊었고 메시지를 보냈다.[바빠, 시간 나면 전화할게.]메시지를 보낸 남하준은 휴대폰을 식탁 위에 놓고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은경애는 남하준에게 반찬을 집어주며 부드럽게 물었다.“요즘 바쁘냐?”“좀 바빠요.”“공적인 일로, 아니면 사적인 일로?”할머니는 휴대폰을 가리켰다.“중요한 전화 아니에요.”남하준이 설명했다. 하지만 그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영상통화가 다시 걸려왔다.서다인은 그것이 백하린의 전화라는 것을 단박에 눈치챘고 기분이 다운되어 조용히 식사했다.남하준은 서다인을 힐끗 쳐다보고는 휴대폰을 집어 다시 끊어버렸다.두 번이나 때아닌 영상통화로 할머니와 서다인에게 폐를 끼친 것 같아 미안했던 남하준은 할머니에게 반찬을 집어 주고 또 서다인에게도 고기 한 점을 집어 주었다.서다인은 잠시 멍해졌다. 남자가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은 고기를 보면서 잠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예전 같으면 속으로 야호를 불렀을 것이다.하지만 지금은 기뻐할 마음도 없이 묵묵히 고기를 집어 다른 접시에 놓았다.남하준은 눈살을 약간 찡그렸다. 서다인이 여전히 화가 났고 억울해하는 것 같았다.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계속 목구멍에 걸려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백하린의 세 번째 전화가 걸려오자 이번에는 은경애가 재빨리 남하준의 휴대폰을 집어 들고 영상통화를 받았다.전화를 받자마자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하준 오빠, 서다인 진짜 너무 해요. 왜 내 방에 있는 물건을 함부로 만지냐고요! 서랍도 엉망진창이고 몇천만 원짜리 목걸이도 사라졌어요. 서다인이 훔쳤을지도 몰라요!”은경애의 안
서다인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남하준을 위해 해명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그럼 방금 그 여자는 누구야?”할머니는 병세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되니 서다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남하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중복했다.“아직 어린애가 헛소리하는 것뿐이에요.”남하준은 멍해졌다. 서다인은 그렇게 큰 억울함과 모욕을 당하고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백하린이 말한 것처럼 남을 헐뜯고 해코지할 사람이 아니었다.은경애는 서다인의 위로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저녁을 먹은 후, 세 사람은 정자 밖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밤빛이 몽롱하고 고요한 정원에는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가득했다.향긋한 차까지 더해지니 더욱 평화롭고 아늑했다.은경애가 손자 내외와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인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어르신, 백하린 씨라고 하는 분이 어르신과 도련님을 뵙고자 합니다.”서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멍한 표정으로 계속 차를 마셨다.은경애가 물었다.“백하린?”“네. 도련님과 죽마고우이고, 도련님이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셨던 분이고, 어르신께서도 가장 아끼던 예비 손자며느리라고 하던데요?”남하준은 이 말을 듣고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할머니, 제가 처리하고 올게요.”은경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말했다.“넌 가만히 있어. 들어와서 똑바로 말해보라고 해.”남하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서다인은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할머니, 백하린 씨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 같으니 저는 먼저 방으로 가서...”은경애가 엄숙하게 말을 끊었다.“너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다인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이때 하인은 이미 백하린을 화원 정자로 데리고 왔다.그녀는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에 고가의 액세서리를 착용해 세련미를 뽐냈다.백하린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그녀는 유독 서다인을 투명인간 취
은경애는 화가 나서 몸을 약간 떨며 주먹을 불끈 쥐고 남하준에게 물었다.“하준아, 이 여자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렇지?”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덤덤하게 말했다.“할머니, 이 친구가 백하린이에요.”은경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얼굴이 붉어졌고,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는 서다인을 잡고 물었다.“완자야,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이고 있는 거지? 너야말로 내 손자며느리잖아!”서다인은 할머니의 불안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챘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전에는 할머니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할머니의 호의를 마음 편히 받아들였다.하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오해라는 걸 알았으니, 서다인은 무슨 자격으로 계속 남하준의 아내로서 할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서다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을 잃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꿋꿋하게 말했다.“할머니가 저를 계속 완자라고 부르셔서, 저는 제 얼굴이 동그랗고 또 늘 완자 머리를 해서 그렇게 부르시는 줄 알았어요. 할머니가 저를 전에 아끼던 예비 손자며느리로 착각하신 줄은 정말 몰랐어요.”은경애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서다인의 손을 꼭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난 착각하지 않았다. 네가 바로 완자야. 이미 잊은 거냐? 네가 어릴 때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핑크빛이 돌아 하준이가 너보고 완자 같다고 해서 계속 너를 완자라고 불렀잖아.”“하준이는 어릴 때부터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아꼈어. 하지만 넌 그때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그 마음을 전혀 몰랐지. 네가 유학을 떠나 우리와 연락이 끊긴 후로 하준이는 몇 년 동안 거의 혼이 나간 채로 지냈단다.”“그리고 네가 커서 귀국하면 어떻게든 너와 결혼하게 도와달라고 나한테 부탁했어. 다시는 너를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어. 내가 너희 둘 결혼을 얼마나 어렵게 성사시켰는데.”은경애는 말할수록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더욱 흐느꼈다.“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서다인은 할머니가 울자 심장이 불에 타
은경애는 백하린이 건넨 휴대폰을 바닥에 힘껏 내팽개쳤다.“안 봐.”그녀는 격앙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하준아, 얼른 말해다오. 이 할미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얼른 말해.”남하준은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꼭 잡아드리며 다정하게 위로했다.“할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인이가 완자인 것 같으면 그냥 그렇게 해요. 할머니 마음 편하신 대로 하면 돼요.”이때 백하린이 벌떡 일어나며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하준 오빠, 내가 바로 완자라고요. 오빠 언제까지 할머니 기분 맞춰드리려고 진실을 뒤바꿀 순 없어요. 이건 결국 할머니 본인만 속이는 셈이잖아요!”남하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외쳤다.“그 입 닥쳐.”그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백하린과 서다인 모두 화들짝 놀랐다. 백하린은 속상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흘렸다.은경애는 슬픈 마음을 추스르며 서다인을 바라봤는데 눈가에 애잔함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래, 맞아. 내가 다인이 완자라면 완자인 거야.”화난 백하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또다시 끼어들었다.“할머니, 제가 완자라고요. 하준 오빠가 사랑한 사람은 줄곧 저였어요. 다인 언니를 사랑한 적도 없는데 할머니 때문에 오빠가 무슨 죄에요. 오빠랑 언니는 조만간 이혼할 텐데 이렇게 고집부릴 이유가 뭐냐고요 대체?”백하린은 할머니의 기분 따위 전혀 안중에 없이 바로 인신공격을 해버렸다.남하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한없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왜 어른이 된 백하린은 이토록 악독하게 변한 걸까?해외 교육에 문제가 생긴 걸까?할머니는 백하린의 말을 듣더니 울화가 치밀어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그녀는 백하린에게 삿대질하며 물었다.“너... 방금 누가 고집을 피운다고 했어?”은경애는 평생 자애롭고 너그러운 인품으로 살아오셨는데 늙어서 어디 근본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것에게
색은 남녀의 천성이었다.남자로서 자신이 호색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말이 안 되었다.“호색하지 않은 게 아니라 그때는...”백건이 설명하려는데 남서연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남서연은 다급히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뒤적거리며 크게 당황했다.백건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벨 소리에 묻혔다.“내가... 널 좋아하니까.”“여보세요, 할머니!”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귓가에 대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친구랑 같이 있어요. 곧 돌아가요... 아니에요. 오빠가 데리러 올 필요 없이 저 혼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돼요... 자꾸 저 어린애 취급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23살이에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 네 알겠어요. 이따가 봬요.”남서연은 통화를 끊고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는 고개를 들어 물었다.“방금 뭐라고 했어요?”백건은 안색이 굳어지더니 말이 목에 걸렸다. 몇 초 동안 침묵하다가 몸을 돌려 차 키를 가지러 갔다.“데려다줄게.”“괜찮아요. 택시 타고 가면 돼요.”남서연이 거절했지만 백건은 차 키를 들고 신발을 갈아 신고 남서연의 옆을 지나면서 그녀의 손을 잡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남서연은 등뼈가 굳어지며 한발 한발 밖으로 따라나섰고 시선은 자신의 손을 잡은 남자의 손에 고정되었다. 그의 따뜻한 큰 손바닥은 마치 전류가 흘러 그녀의 손바닥 피부에서 팔다리로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다정한 촉감에 그녀는 심장이 벌렁거렸다.그녀는 온몸이 긴장되고 호흡이 좀 가빠졌다.백건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당기는 게 아니라 손바닥을 잡아주고 있었다.이토록 다정하게 남자의 손바닥에 닿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남서연은 심장 박동이 점점 빨라져서 가슴이 쿵쾅대며 몰래 즐거워하고 있었다.백건은 그녀를 차량 옆으로 끌고 가 조수석 문을 열어주고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수줍게 숙이고 있었다.여자의 수줍은 자태는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러웠다.백건은 움찔하더니 그제야 자신이 남서연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손을 놓지 않았
저녁을 먹고 나니 8시가 넘었고 남서연은 과일도 조금 먹었다.이렇게 큰 집에 그녀와 백건 두 사람밖에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다소 긴장되고 어색했다.그녀는 시간을 보고 일어섰다.“시간이 늦었어요. 저 갈게요.”백건은 부랴부랴 일어나 다급하게 남서연의 손목을 잡으며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서연아.”남서연이 그를 뒤돌아보니 그의 눈빛에는 일말의 기대가 있었다.“조금만 더 앉아 있어. 조금만. 아직 9시도 안 됐으니 조급해하지 마.”남서연은 거절하기 미안하고 또 좋아하는 남자가 붙잡으니 다소 마음이 약해져 다시 자리에 앉았다.“그래요.”백건은 그녀가 심심할까 봐 물었다.“TV 볼래? 아니면 영화?”남서연은 2초간 머뭇거리다가 물었다.“애니메이션 영화 봐도 돼요?”백건은 2초간 어리둥절하더니 말했다.“그래. 어떤 애니메이션 보고 싶어?”남서연이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그녀가 너무 귀엽고 동심이 남아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그녀가 애니메이션을 좋아한다면 그도 함께 볼 수 있었다.그녀와 함께라면 무엇을 해도 지루하지 않았다.남서연은 생각하다가 말했다.“아무거나요. 사랑을 다룬 애니메이션 아무거나 골라봐요.”백건은 그런 것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었다.그는 평소에도 TV와 영화를 보지 않고 애니메이션은 더더욱 본 적이 없었다.그는 리모컨을 들고 TV를 켰다.자신이 잘 못 골라서 남서연이 지루해할까 봐 휴대전화를 꺼내 하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당장 재미있는 로맨스 애니메이션 영화 하나 보내줘. 꼭 재밌어야 해.”잠시 후 하현우가 영화 링크를 그의 휴대전화로 보내주며 꼭 이어폰을 끼고 보라고 일러줬다.백건은 별생각 없이 거실 조명을 어둡게 하고 휴대전화의 링크를 TV에 띄웠다.두 사람은 나란히 앉아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다.영화가 시작되면서 남서연은 서서히 몰입했다.영화의 질감은 아름다운데 여주인공의 몸매가 너무 화끈하고 옷차림도 살짝 드러났다.처음에는 재미있었는데 남녀주인공을 둘러싼 짝
사장은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인사했다.“감사합니다. 곧 보내드릴게요.”백건은 남서연을 끌고 나가 한적한 시장 거리에 서서 화가 난 채로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남서연은 어렴풋이 백건의 화를 느끼며 긴장된 듯 침을 삼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남자는 화를 꾹 억누르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남서연, 마지막으로 알려두는데 난 남우영의 삼촌이지 네 삼촌이 아니야. 난 네 부모님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다고. 알아들어?”남서연은 그가 왜 화가 났는지 몰라 거듭 사과했다.“미안해요. 알았어요. 다음부터는 그렇게 부르지 않을게요.”백건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허탈하게 그녀를 쳐다보았고 남서연도 그를 바라보았다.두 눈이 마주치자 눈빛 사이에 조금 다른 감정이 흘렀다.남서연이 용기를 내어 물었다.“오빠, 진짜 승아 누나와 사귀는 사이가 아니에요?”“아니야.”남서연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또 물었다.“그럼 여자친구는 있어요?”“없어.”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자신이 웃지 못하도록 입술을 오므리고는 담담한 척 대답했다.“아!”마음을 진정한 백건이 말했다.“가자. 화분이 배달되면 어떻게 놓을지 네가 봐줘.”남서연은 바짝 긴장했다.“오빠 집에까지 가자고요?”백건은 그녀의 말투를 듣고 그녀가 싫어하는 줄 알고 급히 설명했다.“그냥 화분 놓을 위치만 봐줘. 끝나면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네.”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쑥스러운 미소를 숨겼다.두 사람은 차에 올랐고 시동을 걸고 떠났다.가는 길에 남서연은 그에게 그때 무슨 마음으로 자기와 잠자리를 가졌는지 너무 묻고 싶었다.하지만 너무 어색해 결국 묻지 못했다.남자와 여자는 달랐으니 말이다.어떤 남자들은 사랑을 떠나 그저 외롭고 욕망이 끓어오르면 아무 여자나 찾아 생리적 수요를 해결하면 되었으니.산 중턱 별장으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웠다.그들이 막 집에 도착했을 때, 화분을 운반하는 차도 도착했고 일꾼들은 화분을 운반하고 차에서 내려 집으로 배달했다.남서연은 화분의 위치
“오빠. 우리 둘뿐이에요?”“응.”“그래요.”남서연은 마음속으로 기뻐하며 서둘러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맸다.문을 닫은 백건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떠났다.석양이 서쪽으로 지고 붉은 노을이 하늘에 가득했다.차 안의 분위기는 다소 답답하고 억압되었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으니 분위기가 점점 더 어색해졌다.남서연은 그 정적을 깨려고 화제를 찾으려 했지만 너무 떨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그녀는 몇 번이나 말을 하려다가 멈추었다.그때 백건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우영이는 네가 나와 꽃 사러 가는 거 알아?”“몰라요. 다혜랑 쇼핑 간다고 말했어요.”백건의 안색이 굳어지며 마음이 좀 언짢았다.꽃을 사러 시장에 가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도 아닌데 왜 그의 존재를 숨겼을까? 그와 쇼핑하러 가는 것도 가족을 속여야 하는 일일까?새가 지저귀고 꽃이 향기로운 꽃 시장에 간 두 사람은 어리둥절했다.그들은 모두 처음 와서 이 시장이 6시부터 문을 닫는 것을 몰랐다.차를 세우고 둘러보니 두세 군데 가게에 그래도 녹색 식물이 가득 진열되어 있었다.“화분 필요하세요?”마감 정리를 하던 사장이 반갑게 인사했다.남서연은 백건과 나란히 가게로 걸어가서 사방을 둘러보았다.백건은 남서연의 곁에 다가가 부드럽게 물었다.“뭐가 맘에 들어?”남서연은 그제야 모든 녹색 식물이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녀는 대나무 같은 녹색 식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거 예쁘네요.”그러자 백건이 사장에게 말했다.“이 친구가 좋아하는 거 다 포장해 주세요.”사장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네. 알겠습니다.”많은 희한한 녹색 식물이 정교하고 예쁘게 생겼다. 처음 본 남서연은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들었다.“이것도 예쁘네요.”“이건 무슨 꽃이에요? 실내에서 키울 수 있어요?”“태양이 조금 필요한 베란다에 심을 수 있어요.”“그것도 사죠.”백건이 말했다.남서연은 구석에 있는 이상한 식물을 보고 얼른 백건의 팔을 잡아끌었다.“오빠. 저것 좀
남서연은 심장이 움찔하더니 두 손으로 휴대전화를 꼭 잡은 채 백건이 보낸 메시지를 읽었다.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읽으며 매 글자의 뜻을 모두 이해했다.‘지금 나와 단독으로 만나겠다는 건가? 가야 하나?’남서연은 고민하다가 운전석의 남우영을 돌아보고 떠보듯 말했다.“오빠, 내일 퇴근 후에는 나 집에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왜?”“그게...”야근한다고 하면 남우영이 곧바로 조사해서 거짓말이라는 걸 알 테니 거짓말을 지어냈다.“친구랑 쇼핑하려고요.”“어느 친구? 어디서 쇼핑하는데?”남우영이 묻자 남서연은 자신 없이 대답했다.“회사 동료 다혜랑요. 회사 근처에서 쇼핑할 거예요.”남우영은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그래. 그럼 조심하고 일찍 집에 돌아와.”남서연은 속으로 기뻐하며 남우영에게 기대어 애교스럽게 웃었다.“고마워요 오빠.”남우영은 어리둥절했다.“나한테 왜 고마워해? 재미있게 놀아.”이어 주머니에서 블랙 카드 한 장을 꺼내 남서연에게 건넸다.“마음껏 사.”“괜찮아요. 나 돈 있어요. 충분해요.”남우영은 웃으며 카드를 남서연의 손에 쥐여주고 사랑스러운 말투로 말했다.“넣어둬. 오빠 돈 써. 네 돈은 모아서 부자 돼야지.”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빙그레 웃었다.“고마워요.”그녀는 다시 휴대전화를 보았지만 아직 백건에게 답장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채팅창에 입력 중이라고 떴는데 갑자기 취소되고 조금 있다가 다시 입력 중이라고 떴다.한참이나 메시지를 받지 못하자 남서연은 고개를 숙이고 타이핑을 했다.서재에 있는 백건은 휴대폰을 보고 또 보았다. 책상 위에 놓았다가 또 들고 메시지를 썼다 지우기를 반복했다.그녀의 답장을 애타게 기다렸다.‘왜 답장을 안 하지? 나와 함께 나가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는 건가?’뚜뚜.백건은 방금 내려놓은 핸드폰을 빠르게 집어 들고 열어보았다.[좋아요. 하지만 내일 출근해야 해서 퇴근 후에 시간 있어요.]백건은 미간을 구부리고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바로 답장했다.[그
화제가 끝나고 다시 침묵이 흘렀다.“회사에서 힘든 점은 없어?”그는 애써 화제를 찾으며 둘의 거리를 좁히려고 애썼다.남서연은 갑자기 감원 생각이 나서 고개를 돌려 그를 보며 물었다.“회사에서 감원해요?”남서연의 시선이 마침내 그에게 향하자 그의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가 번졌다.“넌 제외대상이니까 걱정 마.”“여다혜라고 내 친구가 있는데, 그 직원도 안 자르면 안 돼요?”“여다혜?”백건이 진지하게 묻자 남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이름 기억했어.”“고마워요.”말을 마친 남서연은 남자의 눈빛이 너무 뜨거운 것 같아 서둘러 시선을 TV에 옮겼다.“서연아...”백건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저번에 일은 우리...”그때 남우영이 걸어 나오자 백건의 소리가 뚝 그쳤다.남서연은 마음이 켕기고 또 긴장해서 서둘러 목소리를 낮추었다.“지나간 일은 다시 꺼내지 말아요. 이미 지나갔어요.”그녀는 남우영에게 들킬까 봐 두려웠지만 백건의 귀에는 아주 차갑고 무정하게 들렸다.이제 보니 성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여자아이가 몰래 금단의 열매를 시도한 충동적인 행동일 뿐이었다.감정도, 결혼도, 미래와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다.남우영은 두 사람 사이에 앉더니 남서연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말했다.“이 영화가 끝나면 우리 돌아가자. 너무 늦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너 걱정하셔.’“네.”남서연이 싱긋 웃으며 말하자 백건은 쓸쓸히 고개를 떨구었다.시간은 1분 1초 흘러갔다.백건은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고 남우영과 남서연이 떠날 때는 직접 문 앞까지 배웅했다.그는 우뚝 서서 남서연이 차에 오르는 것을 바라보았다. 남서연은 그를 향해 손을 흔들었고 곧 차량은 떠났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고,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서 그의 눈앞에서 차량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그의 마음은 텅 비고 너무 허전했다.고개를 돌려 커다란 집을 돌아보니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남씨 가문 사람들은 남서연을 너무 잘 보호했다. 그녀의 출퇴근을
남서연도 따라서 일어섰다.그러자 백건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 급히 입을 열었다.“여기까지 왔으니 저녁 먹고 가.”남우영은 고민하며 백건을 바라보았다.그가 식탁 쪽을 가리키자 도우미가 마침 음식을 내오고 있었다.“날이 저물었어. 지금 집에 돌아가면 너무 배고프잖아. 여기서 먹고 가.”남우영이 남서연을 보자 그녀는 여유롭게 말했다.“난 다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었다. 그는 백건의 외로움을 마음속으로 동정하며 식탁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그럼 오늘은 삼촌 집에서 저녁 먹자.”남서연은 휴대전화를 꺼내 할머니에게 남우영과 밖에서 저녁을 먹고 돌아가니 기다리지 말라는 메시지를 보냈다.메시지를 보낸 남서연이 소파에서 일어나 고개를 들고 걸음을 떼는 순간 백건과 부딪힐 뻔했다.그녀는 긴장해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고 부드러운 눈길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백건은 은근 고조된 기분을 감추고 차가운 외모에 비해 뜨거운 눈동자로 부드럽게 속삭였다.“요리사에게 네가 좋아하는 순두부찌개와 족발이랑 새우 만두 준비하라고 했어.”남서연은 살짝 넋이 나가 한참 동안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그는 자신이 이 음식들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았을까?분명 방금 같이 밥 먹기로 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을 미리 만들어 놓았을까?“고마워요.”남서연은 말랑말랑한 어조로 한마디 했다.백건은 그녀가 지나가도록 서둘러 자리를 옮겼고 남서연은 그의 곁을 넘어 식탁으로 향했다.그리고 백건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식탁에 앉고 보니 여섯 가지 요리와 국은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요리였다.남우영은 국자로 국을 떠주며 나무랐다.“삼촌, 이거 너무 뻔한 거 아니에요? 모두 서연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잖아요.”백건은 말없이 두 사람의 맞은편에 앉았다.남서연은 볼이 약간 뜨거워지고 수줍은 듯 눈을 내리떴다. 남우영이 건넨 국을 받아 조용히 마셨다.남우영은 뭔가를 눈치챘지만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없이 열심히 음식을 먹었다.백건은 식사 예절이 아주 우아하고 규범적이었는데
“이건 내 소관이 아니야. 인사팀장을 찾든지 아니면 바로 삼촌을 찾아가.”남서연은 한바탕 생각에 잠겼다.백건을 찾아가라?이것은 마치 그에게 접근하는 핑계 같았다. 다만 이 핑계가 좀 구차하고 미미했다. 그의 말 한마디면 일이 바로 해결될 수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남서연은 입술을 오므리고 생각했다.손가락으로 가볍게 가방 단추를 만지작거렸다.남우영이 열심히 차를 몰고 있는데 갑자기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그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넣고 한 번 눌렀다.“여보세요. 삼촌.”남서연은 소리를 듣고 그를 올려다보며 괜히 마음이 긴장됐다.휴대전화 저쪽에서 백건이 말했다.“중요한 서류가 있으니 한 번 다녀가.”“하 비서 시켜서 보내세요. 나 지금 서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있어서 못 가요.”“아주 중요한 거야. 다른 사람 손에 넣을 수 없어.”‘아주 중요하다고? 하 비서도 못 믿을 만큼?’남우영은 너무 궁금했다.그때 남서연이 옆에서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집에 늦게 가도 괜찮아요.”남우영은 싱긋 웃더니 바로 백건에게 말했다.“좋아요. 지금 당장 갈게요.”남우영은 방향을 틀었다.30분 후, 차량은 산 중턱에 있는 별장 리조트에 도착했다.한 번도 와본 적이 없는 남서연은 낯설고 궁금해서 물었다.“오빠 여긴 어디예요?”“삼촌이 사는 곳.”남서연은 차에서 내려 사방을 두리번거렸다.“백씨 가문에서 지내는 거 아니었어요?”남우영도 차에서 내려 문을 닫고 걸으며 말했다.“삼촌 이제 나와서 혼자 살아.”남서연이 그의 귀를 따라가며 경악해서 물었다.“왜요?”“외할머니가 통제욕이 너무 강하고 또 삼촌더러 승아 누나와 결혼하라고 협박하잖아.삼촌이 지금까지는 계속 참으며 살았는데 이제 한계를 건드려서 못 참고 외할머니와 크게 싸우고 혼자 살고 있어.”“외할머니가 그렇게 무서워요?”남우영은 벨을 누르고 고개를 돌려 답했다.“삼촌은 사생활이 전혀 없었어. 일기장도 외할머니가 떳떳하게 꺼내 보는데 무서운 사람이 아니겠어?”그때
엘리베이터 문은 디자인팀 사무실 층에서 멈추었다.문이 열리는 순간 남우영이 말했다.“서연아 도착했어.”남서연은 바로 나가서 엘리베이터를 마주 보며 남우영을 향해 미소 짓고 손짓했지만 부드러운 시선은 저도 모르게 백건에게 떨어졌다백건은 그윽한 눈빛으로 줄곧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두 눈이 서로 마주치자 서로 회피하지 않았다.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닫히면서 두 사람의 시야가 차단되었다.남서연은 가볍게 심장을 가리고 왠지 모를 긴장과 설렘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이제 백건을 당당하게 볼 수 있게 되었고, 더 이상 남몰래 수치심을 느끼지 않게 되었고, 남의 남자친구를 훔치는 죄책감도 없게 되었다.다만 아직 백건이 솔로인지 100% 확실하지 않았다. 유승아와 사귀지 않는다면 다른 여자친구가 있는 건 아닐까?‘일단 신경 쓰지 말자. 어쨌든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잖아.’남서연은 즐겁게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인 채 싱글벙글 웃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디자인 팀 사무실로 들어섰다.디자인 팀의 업무는 남서연에게 매우 충실하고 성취감이 있었다.그녀는 패션디자인을 매우 좋아해서 한번 일에 몰두하면 온 마음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겨울 신제품 디자인 초안을 선별하는 중인데 남서연이 제출한 몇몇 제품들이 탈락되었지만 그녀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여다혜는 초조한 나머지 머리를 싸안고 책상에 머리를 쿡쿡 박았다.초조해하는 여다혜를 본 남서연은 사무용 의자를 끌고 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여다혜는 일을 매우 소중하게 여겼고 슬퍼하며 말했다.“서연아, 내 디자인 모두 떨어졌어.”남서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으며 말했다.“괜찮아. 내 것도 마찬가지야.”“내가 걱정을 안 하게 생겼어? 계속 성과를 내지 못하면 다음번 구조조정에서 감원대상이 될 거야.”남서연은 경악했다.“또 감원해?”여다혜는 고개를 들고 슬픈 얼굴,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서연아, 너 그거 알아? 새로 부임한 대표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원래 대표보다 훨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