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인은 억지로 웃음을 짜내며 남하준을 위해 해명했다.“그런 거 아니에요.”“그럼 방금 그 여자는 누구야?”할머니는 병세 때문에 충격을 받아서는 안 되니 서다인은 잠시 망설였다. 그녀는 남하준의 말을 곧이곧대로 중복했다.“아직 어린애가 헛소리하는 것뿐이에요.”남하준은 멍해졌다. 서다인은 그렇게 큰 억울함과 모욕을 당하고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백하린이 말한 것처럼 남을 헐뜯고 해코지할 사람이 아니었다.은경애는 서다인의 위로에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저녁을 먹은 후, 세 사람은 정자 밖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밤빛이 몽롱하고 고요한 정원에는 담소를 나누는 소리가 가득했다.향긋한 차까지 더해지니 더욱 평화롭고 아늑했다.은경애가 손자 내외와 한창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하인이 다가와 공손히 말했다.“어르신, 백하린 씨라고 하는 분이 어르신과 도련님을 뵙고자 합니다.”서다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고 멍한 표정으로 계속 차를 마셨다.은경애가 물었다.“백하린?”“네. 도련님과 죽마고우이고, 도련님이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하셨던 분이고, 어르신께서도 가장 아끼던 예비 손자며느리라고 하던데요?”남하준은 이 말을 듣고 어두운 표정으로 일어섰다.“할머니, 제가 처리하고 올게요.”은경애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지더니 차갑게 말했다.“넌 가만히 있어. 들어와서 똑바로 말해보라고 해.”남하준은 주먹을 불끈 쥔 채 차가운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서다인은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지만, 속으로는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할머니, 백하린 씨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 같으니 저는 먼저 방으로 가서...”은경애가 엄숙하게 말을 끊었다.“너도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서다인은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이때 하인은 이미 백하린을 화원 정자로 데리고 왔다.그녀는 하늘하늘한 흰색 원피스에 고가의 액세서리를 착용해 세련미를 뽐냈다.백하린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그녀는 유독 서다인을 투명인간 취
은경애는 화가 나서 몸을 약간 떨며 주먹을 불끈 쥐고 남하준에게 물었다.“하준아, 이 여자가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지? 그렇지?”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덤덤하게 말했다.“할머니, 이 친구가 백하린이에요.”은경애는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얼굴이 붉어졌고, 떨리는 손으로 옆에 있는 서다인을 잡고 물었다.“완자야, 지금 너희들이 나를 속이고 있는 거지? 너야말로 내 손자며느리잖아!”서다인은 할머니의 불안한 감정의 변화를 눈치챘다. 드디어 그날이 온 것이다.전에는 할머니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할머니의 호의를 마음 편히 받아들였다.하지만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오해라는 걸 알았으니, 서다인은 무슨 자격으로 계속 남하준의 아내로서 할머니의 사랑을 받을 수 있을까?서다인은 마지막으로 남은 사랑을 잃게 될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것 같지만 꿋꿋하게 말했다.“할머니가 저를 계속 완자라고 부르셔서, 저는 제 얼굴이 동그랗고 또 늘 완자 머리를 해서 그렇게 부르시는 줄 알았어요. 할머니가 저를 전에 아끼던 예비 손자며느리로 착각하신 줄은 정말 몰랐어요.”은경애의 눈가가 촉촉해지더니 서다인의 손을 꼭 잡고 흐느끼며 말했다.“난 착각하지 않았다. 네가 바로 완자야. 이미 잊은 거냐? 네가 어릴 때 통통하고 얼굴이 동글동글하고 핑크빛이 돌아 하준이가 너보고 완자 같다고 해서 계속 너를 완자라고 불렀잖아.”“하준이는 어릴 때부터 너를 아주 많이 좋아하고 아꼈어. 하지만 넌 그때 너무 어리고 순진해서 그 마음을 전혀 몰랐지. 네가 유학을 떠나 우리와 연락이 끊긴 후로 하준이는 몇 년 동안 거의 혼이 나간 채로 지냈단다.”“그리고 네가 커서 귀국하면 어떻게든 너와 결혼하게 도와달라고 나한테 부탁했어. 다시는 너를 떠나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어. 내가 너희 둘 결혼을 얼마나 어렵게 성사시켰는데.”은경애는 말할수록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더욱 흐느꼈다.“그런데 지금 와서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고?”서다인은 할머니가 울자 심장이 불에 타
은경애는 백하린이 건넨 휴대폰을 바닥에 힘껏 내팽개쳤다.“안 봐.”그녀는 격앙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보며 눈물을 글썽거렸다.“하준아, 얼른 말해다오. 이 할미가 잘못 본 게 아니라고 얼른 말해.”남하준은 가까이 다가가 할머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파르르 떨리는 손을 꼭 잡아드리며 다정하게 위로했다.“할머니, 일단 진정하시고 너무 속상해하지 말아요. 다인이가 완자인 것 같으면 그냥 그렇게 해요. 할머니 마음 편하신 대로 하면 돼요.”이때 백하린이 벌떡 일어나며 분노 조로 쏘아붙였다.“하준 오빠, 내가 바로 완자라고요. 오빠 언제까지 할머니 기분 맞춰드리려고 진실을 뒤바꿀 순 없어요. 이건 결국 할머니 본인만 속이는 셈이잖아요!”남하준이 싸늘한 표정으로 나지막이 외쳤다.“그 입 닥쳐.”그가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퉁명스럽게 쏘아붙이자 백하린과 서다인 모두 화들짝 놀랐다. 백하린은 속상한 듯 입을 삐죽거리며 눈물을 흘렸다.은경애는 슬픈 마음을 추스르며 서다인을 바라봤는데 눈가에 애잔함과 연민으로 가득 차 있었다.“그래, 맞아. 내가 다인이 완자라면 완자인 거야.”화난 백하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또다시 끼어들었다.“할머니, 제가 완자라고요. 하준 오빠가 사랑한 사람은 줄곧 저였어요. 다인 언니를 사랑한 적도 없는데 할머니 때문에 오빠가 무슨 죄에요. 오빠랑 언니는 조만간 이혼할 텐데 이렇게 고집부릴 이유가 뭐냐고요 대체?”백하린은 할머니의 기분 따위 전혀 안중에 없이 바로 인신공격을 해버렸다.남하준은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한없이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째려봤다.왜 어른이 된 백하린은 이토록 악독하게 변한 걸까?해외 교육에 문제가 생긴 걸까?할머니는 백하린의 말을 듣더니 울화가 치밀어 사색이 된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그녀는 백하린에게 삿대질하며 물었다.“너... 방금 누가 고집을 피운다고 했어?”은경애는 평생 자애롭고 너그러운 인품으로 살아오셨는데 늙어서 어디 근본도 모르는 새파랗게 젊은것에게
백하린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본인이 방금 한 말로 은경애가 화나서 잘못된다면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하지만 생각을 바꾸어 만약 은경애가 죽으면 남하준과 서다인도 계속 결혼 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으니 무조건 이혼할 것이다.여기까지 생각한 백하린은 순간 근심걱정이 사라졌다. 할망구가 죽는 것도 나름 좋은 일인 듯싶었다....긴긴밤, 고독과 적막이 어우러진 밤.병원 VIP 병실 안은 흐릿한 불빛에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서다인은 은경애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메마른 할머니의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한 채 편히 잠든 할머니를 지그시 쳐다봤다.그녀는 한시라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할머니가 무사하게 얼른 정신을 차리기만 바랐다.애초에 그녀가 병원에서 처음 의식을 회복했을 때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고 몸엔 온통 상처투성이였다.그녀 앞에는 한 무리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이들은 자칭 서다인의 엄마, 아빠, 오빠, 친척, 친구들이라고 했다.경찰도 현장에서 사건 기록을 작성하며 그녀의 신원을 확인했다.하지만 가족과 지인이라는 이 사람들은 그녀의 사활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직 돈 받는 게 목적이었다.서다인이 죽은 전남편의 집에서 1조 원을 훔친 것 때문에 한바탕 폭행을 당하고 기억을 잃었다.경찰이 증거불충분으로 그녀를 체포하지 않았기에 겨우 재난을 모면했다.서다인도 사람을 찾아서 자신의 신원을 조사해보았다.애초에 가정환경이 열악했던 그녀는 부모와 오빠의 사랑을 전혀 못 받고 어린 나이에 사회에 뛰어들어 직접 돈을 벌고 생계를 유지했다. 그 과정에 수없이 많은 그릇된 길을 걸었었다.기억을 잃은 후 그녀는 더더욱 이 세상의 따스함을 느낄 수가 없었고 인생에 대한 갈피가 전혀 안 잡혔다.그러다가 드디어 은경애 어르신을 만났다.자애로운 어르신은 서다인을 손녀처럼 생각하며 진심으로 이뻐해 주시고 엄청 잘해주셨다.할머니 옆에서 3년 동안 간병인으로 지낸 시간이 그녀의 인생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이었다.할머니는 그녀 마음속 유일한 가족이기에 이
백하린은 남하준이 화난 걸 깨닫고 가여운 얼굴로 눈물을 질끈 짜내며 진심으로 사과했다.“미안해요, 오빠. 갑자기 왜 나한테 이렇게 무섭게 구는 거예요?”남하준이 싸늘한 어투로 되물었다.“집에 카메라가 없다고 네가 다인이한테 꼼수 부려서 모함한 걸 내가 모를 것 같아?”백하린은 순간 사색이 되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남하준을 바라보다가 잠시 당황한 척하더니 바로 정신을 차렸다.“다인 언니가 나한테 누명 씌웠어요.”“끝까지 잡아떼네. 내가 바보로 보여?”남하준은 실망 어린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백하린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걸 알아채고 눈물을 왈칵 쏟아내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미안해요, 오빠. 내가 잘못했어요.”남하준은 여전히 저 자신을 억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 참았다.“네가 진짜 잘못을 깨달았다면 굳이 다인이가 목걸이를 훔쳤다고 모욕할 필요가 있을까? 게다가 할머니까지 화나게 해서 병원에 입원시켜?”“앞으로 다시는 나랑 다인의 일에 끼어들지 마. 혼자 할머니 댁에 가지도 말고. 한 번만 더 이런 식이면 그땐 절대 가만 안 둬.”백하린은 앞으로 두어 걸음 다가가 살며시 남하준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며 몸을 비틀었다.“오빠, 나 진짜 잘못했어요. 이번 한 번만 용서해줘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남하준은 그녀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치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차갑게 쏘아붙였다.“내일 사람 시켜 네 물건 전부 짐 싸서 집으로 보낼 거야. 집에서 반성이나 잘해.”말을 마친 남하준은 앞으로 걸어가 초인종을 눌렀다.백하린은 울며 애원하고 사과도 해보고 애교에 갖은 수단을 다 부려봤지만 남하준은 꿈쩍하지 않았다.집사가 문을 열고 나온 후 그는 백하린을 집사에게 맡기고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났다.새벽 3시의 거리는 차 한 대 없이 텅 비어 있었다.남하준은 초조한 마음을 안고 병원으로 향했다.병실 앞에 도착한 남하준은 살며시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섰다.흐릿한 불빛 아래 서다
할머니는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다독여주었다.“걱정 마. 할미 아직 튼튼해.”서다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 어젯밤에 진짜 깜짝 놀랐어요.”할머니는 입꼬리를 올리고 눈웃음을 지었다.“이 할미 그리 쉽게 넘어지지 않아. 몸조리 잘해서 너 대신 그 성가신 내연녀 해결해버려야지.”옆에 앉아있던 남하준이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진지한 말투로 수정했다.“할머니, 저랑 다인이 사이에는 제삼자가 없어요.”할머니는 코웃음 치며 꼭 마치 본인이 배신을 당한 것마냥 분노를 터트렸다.“어젯밤 그년은 제삼자가 아니면 뭔데? 남녀 사이에 순수한 우정이 있다는 말, 난 그딴 소리 전혀 안 믿어. 순수하긴 뭐가 순수해.”남하준은 말문이 턱 막혀서 하려던 말을 멈췄다.서다인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그의 모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하지만 이대로 웃으면 너무 무례할 것 같아 머리를 숙이고 입을 막은 채 몰래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남하준은 감히 웃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눈빛이 한없이 부드러워졌다.할머니는 그녀의 등을 살며시 토닥였다.“완자야, 내가 사람 시켜서 깨끗한 세안 용품을 욕실에 놔뒀으니까 가서 씻고 나와서 밥 먹어.”서다인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녀는 곧이어 욕실로 향했다.할머니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감개무량하게 말했다.“쟤가 서다인이든 완자든 난 다 좋아. 너랑 아주 잘 어울려. 그러니까 너도 그딴 년 때문에 다인이랑 절대 이혼하면 안 돼. 알겠지?”남하준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할머니의 건강을 걸고 감히 장담할 수도 없었다.“알았어요.”할머니는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살짝 언짢은 듯 그에게 질문했다.“솔직하게 말해봐. 정말 완자한테 아무 느낌 없어?”남하준은 의자를 끌고 할머니 옆으로 다가와 몸을 기울이며 대답했다.“할머니, 제가 처음부터 할머니가 이 결혼을 부추기는 걸 반대했죠? 다인이를 완자라고 오해하든 아니든 강제적으로 결혼식을 치르게 하는 건 잘못됐어요. 이건 아니에요
남씨 일가 사람들은 할머니를 둘러싸고 따뜻한 관심을 선보였다.서다인은 자신이 병실에 남아있을 필요가 없어 보여 밖으로 나갔다.그녀는 병원 1층 정원 복도에 가서 적적하게 슬레이트 벤치에 앉아 먼 곳에 있는 식물을 멍하니 바라봤다.순간 한 남자의 자석 같은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무슨 생각해?”서다인은 사색을 가다듬고 머리를 갸웃거리며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다.남하준은 어느새 그녀의 옆에 다가와 벤치에 앉았다.그의 강렬한 포스에 발이 닿는 곳마다 차가운 서리가 한 층 뒤덮일 것 같았다.서다인은 가슴이 움찔거리고 몸이 뻣뻣해지더니 천천히 자세를 다잡았다.“아니에요, 아무것도.”그녀가 담담하게 대답했다.남하준은 가볍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 짙은 눈길로 싸늘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녀를 바라봤다.“우리 계획 다 들었어?”서다인은 화들짝 놀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하준을 쳐다봤다.남하준은 맑고 영롱한 그녀의 눈동자를 마주했다.서로 눈이 마주치자 남하준은 그녀의 눈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며 신비롭게 아름답다는 것을 발견했다.그가 한마디 덧붙였다.“안개 찾기 프로젝트.”서다인은 그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모르지만 솔직하게 대답했다.“조금 들었어요.”남하준은 안색이 어두워지더니 은은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계획이 유출됐네.”계획이 유출됐는데 그녀랑 무슨 상관이지?설마 지금 서다인을 의심하는 걸까?서다인은 대뜸 서운한 감정이 북받쳤다.“지금 날 의심하는 거예요?”남하준은 눈앞의 풍경만 감상할 뿐 그녀의 질문에 정면으로 대답하지 않았다.“이 계획을 아는 사람은 대통령과 몇몇 요직에 있는 지도자들 외엔 너랑 나밖에 없어.”이렇게 말하니 그녀의 혐의가 더 커졌다.서다인은 그가 의심하는 건 이해되지만 안개 찾기 프로젝트의 상세한 내용은 아예 몰랐고 비밀을 유출할 리는 더더욱 없었다.“하준 씨, 나 아니에요.”서다인은 아주 정색하며 단호하게 한 글자씩 또박또박 말했다.“당신들 상세한 계획 내용도 모르고 그
남하준은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심 조로 말했다.“서다인, 만약 네가 기억 상실한 것처럼 연기하는 거라면 이 모든 게 다 합리해져.”서다인은 속절없이 한숨을 내쉬고 고개를 푹 떨군 채 저 자신을 비웃듯이 말했다.“성형해서 할머니께 이쁨받고 하준 씨랑 결혼해서 당신 옆에 잠복해 있다고요? 재물과 신분 따위 바라지도 않고 오직 M국의 더 많은 중요한 기밀을 훔쳐 가기 위해서요? 내가 만약 기억 상실한 척 연기하는 거라면 난 정말 끝내주는 스파이인 것 같아요.”남하준이 답했다.“맞아, 바로 그거야.”서다인은 실소가 새어 나왔다.“이젠 정체가 곧 드러날 것 같으니 당신과 이혼하지 못해서 안달인 거겠죠.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네요. 누가 봐도 합리적이고요.”남하준이 침묵했다.서다인은 머리를 들고 하늘을 바라봤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너무 답답한 나머지 질식할 것만 같았다.그녀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하지만 이 일들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본인조차 이런 일들이 백 퍼센트 존재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어쩌면 그녀가 기억을 잃기 전에 블랙 섀도우의 사람이지 않았을까? 남하준에게 접근하는 것도 조직의 계획이지 않았을까?다만 계획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기억을 잃은 거겠지...서다인은 딱히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런 근거 없이 말을 내뱉는 건 무의미한 노릇이니까.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묵묵히 떠나갔다.이제 막 두어 걸음 나섰는데 남하준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다인아, 이 모든 게 너무 순조로워.”서다인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등 돌린 채 멍하니 넋을 놓았다.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가녀린 뒷모습을 마주하고 힘차게 말을 이었다.“만약 네가 진짜 ‘블랙 섀도우’ 조직의 사람이라면 내가 이토록 순조롭게 너에 관한 모든 자료를 확보할 순 없어. 가정배경과 네 과거의 모든 경력들, 성형 전후의 사진 정보, 심지어 네가 블랙 섀도우 조직에 들어가서 특수 훈련을 받은 것까지 손 하나 까
퇴근 후 집에 들어온 남우영은 냉장고에 붙은 메모, 그리고 방에 가지런히 놓인 선물들과 그 위에 올려놓은 그의 블랙카드를 발견했다.답답한 듯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외투를 대충 침대 위에 던진 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허리를 숙였다.그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숨을 내쉬었다.‘선물과 카드를 돌려준 걸 보니, 내일은 이혼 서류를 건네겠다는 뜻인가?’그 생각이 그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잠시 고민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이다은의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남우영은 조심스레 문을 두드렸다.“다은 씨, 얘기 좀 해요.”방 안에서 아무런 인기척 소리가 들리지 않자, 그는 다시 한번 부드럽게 말했다.“다은 씨...”잠시 후, 방 안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오늘은 일찍 자려고요.”시간을 보니 아직 자기에는 이른 초저녁이었다.남우영은 문 앞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돌아섰다. 방으로 돌아간 그는 샤워를 마친 후 잠옷으로 갈아입었다.밤 9시경, 남우영은 다시 이다은의 방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지 않고 직접 등록된 지문으로 방문을 열었다.방 안은 불이 꺼져 있었고 거실의 불빛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와 희미하게나마 침대의 윤곽만이 보였다.남우영은 문을 닫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잠들지 않은 채 침대에 누워 있던 이다은은 문 열리는 소리에 긴장하며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불안한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어둠 속에서 다가온 남우영이 신발을 벗고 침대 위로 올라왔다.“남우영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이다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녀의 경계심이 가득 담긴 눈빛에도 불구하고 남우영은 대답 대신 이불을 들추고 그녀 옆에 누웠다. 그의 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몸이 굳어 긴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남우영 씨! 도대체 뭐 하는 짓이냐고요?”남우영은 그녀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으며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내가 내 아내를 안고 자겠다는 게 그렇게 이상한가요? 이참에 우리 말도 놓자.”이다은은
이다은은 남우영의 메시지를 읽고는 휴대폰을 침대 위에 내던지듯 내려놓으며 화난 목소리로 혼잣말했다.“남우영, 나쁜 놈! 돈 많고 권력 있다고 다 네 맘대로 되는 줄 아는 거야? 사람을 이렇게 갖고 놀면 재밌어? 정말 너무해...”그녀는 복잡한 마음을 억누르며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충분히 쉰 덕분인지 몸이 한결 가벼워진 이다은은 간단히 씻고 준비를 마쳤다. 아침 일찍 집을 나선 그녀는 남우영이 눈을 뜨기도 전에 이미 집을 떠난 상태였다.그녀는 회사에 휴가를 내고 다시 우주항공청으로 향했다. 남은 데이터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 연구소로 들어선 그녀는 몇몇 뛰어난 교수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다.교수들은 그녀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정규 학위가 없다는 점을 아쉬워했다.점심시간, 이다은은 교수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하게 되었다. 그녀는 밝고 친근한 성격 덕분에 교수들과 금세 가까워졌다.정안 교수는 유난히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이다은 씨,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돼요?”“스물일곱입니다.”정안은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정말요? 믿기지 않네요. 제 아들이랑 동갑인데, 훨씬 어려 보이세요.”이다은은 머뭇거리며 물었다.“교수님, 자녀가 몇 분 계세요?”정안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아들 하나요.”“아, 그러시구나...”이때 옆에 있던 교수들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정 교수님, 혹시 이다은 씨를 아드님께 소개하려고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정안은 손사래를 치며 어색하게 웃었다.“아니에요. 우리 아들은 다은 씨에게 어울릴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다른 교수는 웃으며 농담을 이어갔다.“그거 반어법 아닌 거 확실하죠?”이다은은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정안은 그녀가 불편할까 봐 서둘러 말했다.“무슨 그런 말씀을! 물론 우리 아들이 다른 씨같이 참하고 능력 있는 여자 친구를 만난다면 저야 기쁘겠죠. 하지만 우리 아들은...”정안은 말끝을 흐리며 한숨을 쉬면서 잠시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이
남우영의 폭풍 같은 키스에 이다은은 점점 더 깊이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애썼지만, 어느새 그녀는 모든 것을 맡긴 채 그에게 안겨 있었다. 그의 강렬한 입맞춤과 단단한 품 안에서 도망치고 싶었지만, 몸은 이미 이성을 잃고 그의 리드에 따르고 있었다.숨은 점점 가빠지고 온몸은 점점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릿속은 하얗게 비어버린 듯했고, 그녀는 자신이 주방을 벗어나 거실로 이끌리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두 사람의 침실은 2층에 있었지만, 거실 소파 앞에 다다르자, 남우영은 이다은이 갑작스럽게 이성을 되찾아 자신을 밀어낼까 두려워 서둘러 그녀를 소파에 눕혔다.이다은은 여전히 그의 키스에 취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고 가슴은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아슬아슬하게 이다은의 온몸 곳곳을 부드럽게 만지던 그의 손길은 점점 더 대담해졌고, 거실의 공기는 뜨겁고도 위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남우영은 테이블 위에서 리모컨을 집어 들어 거실의 조명을 어둡게 조정했다. 은은한 빛으로 바뀐 거실은 마치 꿈속 같은 몽환적이고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다은은 이 로맨틱한 분위기에 젖어 자신이 언제 옷을 벗었는지도 알지 못했고 상황이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그러나 갑작스럽게 찾아온 살이 찢기는 듯한 첫 경험의 고통이 그녀를 현실로 되돌려놓았다.“아... 아파요!”이다은은 고개를 돌려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며 두 손으로 그의 가슴을 밀어냈다. 그녀는 눈물을 터뜨리며 간신히 말했다.“남우영 씨, 미쳤어요? 진짜 나쁜 놈이에요... 흑...”“미안해요... 다은 씨... 정말 미안해요.”남우영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미안하다고 속삭였지만, 고장난 1톤 트럭처럼 절대 멈추지 않았다.그의 강압적인 태도는 이다은을 더욱 혼란스럽고 무력하게 만들었다.이다은은 그의 품속에서 몸부림치며 울었다. 고통과 두려움, 분노가 뒤섞인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고, 더 이상 어떤 존중도 느낄 수 없었다.‘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멈추지 않아
두 사람이 차에 타자, 기사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했다.이다은은 창가 쪽으로 몸을 틀어 최대한 남우영과 거리를 두며 참았던 화를 터뜨리듯 날 선 목소리로 말했다.“남우영 씨, 왜 자꾸 억지 부리시는 거예요?”남우영은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의자에 기대고 짐짓 느긋한 목소리로 대꾸했다.“억지라니요.”“억지잖아요! 남우영 씨의 차를 얻어 타고 싶지 않다고 분명하게 얘기했잖아요!”“다은 씨, 제가 잘못한 거니까 저를 미워해도 돼요. 저를 원망한다 해도 할말 없고, 심지어 때려도 괜찮아요. 하지만 이혼은 절대 안 돼요.”이다은은 울분을 담아 쏘아붙였다.“이건 사기 결혼이에요! 이 결혼은 애초에 무효라고요!”“사기 결혼이라... 그 말 누가 믿을까요?”이다은은 그의 눈빛과 말투에 당황한 듯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사기 결혼이라니... 보통 그런 건 돈이나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나 하는 거잖아. 근데... 남우영 같은 부자가 나같이 탈탈 털어도 먼지밖에 나오지 않는 여자를 속여서 결혼했다? 그걸 누가 믿겠어?’“그건...”결국 그녀는 아무 말도 있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마음속 어딘가에서 밀려오는 무거운 감정이 그녀를 짓눌렀다.이다은 역시 이혼을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하는 좁힐 수 없이 큰 간격은 그녀로 하여금 스스로를 옭아매게 했다.이다은이 아무리 분수를 알고 결혼을 요구해도 남우영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이다은은 곧장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남우영은 평소처럼 주방으로 향해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한때는 대저택에서 손끝 하나 물에 적시지 않던 도련님이었지만, 지금의 그는 요리하는 시간을 자기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이다은은 씻고 나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었다.그때, 방에서 나오던 그녀는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더니 흠칫 놀라며 다급히 주방으로 뛰어 들어갔다.“남우영 씨! 제발 이제 저를 위해 요리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거... 받을 자격 없다
이다은은 정안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화학 교수라고 하면 보통 나이 많은 대머리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 세련되고 기품 있는 분도 있구나.’정안은 부드럽고 따뜻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뒤쪽 데이터에서 또 편차가 발생했습니다. 이전에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수정했던 동료에게 다시 맡겼지만, 이번엔 손도 못 대더군요. 이유를 물어보니 그 데이터를 수정했던 숨은 고수가 있다며 다은 씨를 언급했어요.”이다은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정안 교수님, 이덕수 차장님,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 제가 잘못했습니다. 신고만 하지 말아주세요. 제가 받은 돈은 다 돌려드릴게요. 각서도 쓰고 협약서에도 서명하겠습니다. 그리고 절대 데이터를 유출하거나 누설하지 않겠다고 맹세합니다.”정안은 차분히 고개를 저으며 웃음을 지었다.“다은 씨, 오해하신 것 같네요. 저희는 당신 씨를 감옥에 보낼 생각 전혀 없어요. 다만 데이터를 직접 확인해 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문제의 원인을 찾아 주실 수 있을까요?”이다은은 순간 멍하니 정안을 바라보다 방 안의 다른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모두가 기대와 긴장 섞인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이덕수마저 옆 의자를 당기며 권했다.“자, 여기 앉으세요.”이다은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얼굴로 대형 스크린을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자신에게 쏠린 가운데,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억누르며 마우스를 집어 들었다.비록 M국 항공우주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지는 못했지만, 항공우주 데이터 분석에 대한 열정만은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자격이 부족하다며 좌절하는 대신, 독학으로 공부하며 스스로 능력을 키워온 결과였다.시간이 흘러 30분이 지나자, 이다은은 화면에 집중한 채 외쳤다.“찾았어요! 여기 오류가 있네요.”방 안의 사람들은 고개를 내밀어 화면을 들여다보았다.문제는 단순히 코드 하나가 어긋난 것이었다. 하지만 이를 수정하기 위한 접근 방식은 쉽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반면 남우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히 입을 열었다.“저는 이다은의 남편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그 이다은 말입니다.”그의 말에 세 사람은 순간적으로 굳어버렸고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자리에 앉아있었다.침묵을 깨고 여중권이 겨우 입을 열었다.“오늘 이렇게 저희를 부르신 이유가 바로 이 일 때문이겠군요.”여민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남우영을 바라보며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저를 홍보팀에 들여온 것도 계획된 거였나요? 저를 직접 면접 본 것도 다 계획이었나요?”남우영은 부드럽지만 의심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물론입니다. 여민지 씨가 제 아내를 사칭한 증거를 더 많이 확보하기 위해서였죠. 제 아내로 위장해 제 아내의 학위를 가로채고, 그 신분으로 회사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옥에 갈 이유가 되니까요.”여민지는 온몸을 떨며 부모를 불안하게 쳐다봤다.여중권은 침착한 척하며 말했다.“남 대표님, 대화로 해결합시다. 과거 일인데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어려운 이씨 가문을 도와줬던 건 대표님도 잘 아실 겁니다.”남우영은 냉소를 띤 채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그들을 차갑게 바라보았다.“당신 딸을 회사에 들인 이유가 바로 오늘 같은 날이 올 거란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모든 걸 제대로 정산할 때가 됐군요.”여중권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고 이혜원과 여민지는 안절부절못하며 필사적으로 남우영에게 용서를 빌었다.“남 대표님, 제 딸을 살려주십시오. 어떤 방법이든 따르겠습니다.”그러나 남우영은 비웃으며 단호히 말했다.“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잠시 후, 경찰들이 레스토랑에 도착했고, 세 사람은 충격과 공포 속에서 체포되었다.여민지는 울면서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지만, 남우영은 흔들림 없이 그들을 외면했다.레스토랑을 나서며 남우영은 차로 돌아갔다.그 순간,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전화를 받
이다은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고 단 하나의 문장만이 반복적으로 떠올랐다.‘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사고를 치고야 말았네. 이러다 감옥에 가는 건가? 그런데 나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남씨 가문 며느리가 감옥에 가면 그야말로 집안 망신이겠지?’그녀는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막막한 심정으로 끌려갔다.한편, 남우영은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를 저녁 식사 자리에 초대했다.레스토랑에서 남우영을 만난 여민지와 그녀의 부모는 기대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의 정체를 알게 된 여민지의 부모는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게 차려입고 등장했다. 마치 딸이 재벌가 며느리라도 되는 듯, 두 사람은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했다.남우영은 마주 앉아있는 그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전직 공무원에 전직 판사라... 대단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지. 다은 씨 같은 약자에게는 그들의 권력이 얼마나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을까...’여민지의 아버지, 여중권이 먼저 입을 열며 공손히 물었다.“남우영 씨는 어디에서 일하고 계십니까?”“에이스타 그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이번에는 여민지의 어머니, 이혜원이 대화를 거들며 말했다.“우리 딸과는 얼마나 알고 지내셨어요?”“얼마 안 됐습니다.”이혜원이 다시 물었다.“그럼 두 분 관계는 어느 정도로 발전한 건가요?”남우영은 태연히 답했다.“오늘이 처음으로 저녁 약속을 한 정도입니다.”여중권과 이혜원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여중권이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첫 만남부터 저희를 초대하신 이유는 뭔지... 혹시 결혼 이야기가 나온 건가 싶어서요.”남우영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말을 잘랐다.“결혼 이야기라니요. 두 분은 저와 다은 씨가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이혜원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여민지가 황급히 끼어들며 말했다.“아빠, 엄마... 대표님께서 두 분을 직접 뵙고 싶어 하셔
여민지는 모두의 칭찬과 아부 속에서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느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퇴근 시간이 되었지만 남우영은 여느 때처럼 집으로 향하지 않고 차 안에 앉아 조용히 로비를 응시하며 이다은이 나올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시간이 흘러 대부분 직원이 퇴근했지만, 그녀는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조바심이 난 그는 차에서 내려 곧장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러나 로비에 들어서는 순간, 누군가 그의 앞을 막아서며 길을 가로막았다.“대표님, 안녕하세요.”여민지가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밝게 인사했다. 그녀의 눈빛은 자신감과 설렘으로 가득 차 있었다.남우영은 인상을 살짝 찌푸리며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네.”여민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며 작게 말했다.“대표님, 오늘 회사에서 떠도는 이상한 소문 때문에 마음 상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저도 누가 그런 소문을 퍼뜨렸는지 모르겠어요.”남우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무슨 소문이요?”“대표님이 저를 좋아하신다는 얘기요. 회사 사람들이 다들 그렇게 수군거리더라고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심지어 대표님이 저에게 적극 대시한다고들 해요...”남우영은 어이가 없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대체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지?’여민지는 그가 미소 짓는 걸 보고 신이 난 듯 한 발 더 다가섰다.“대표님, 기회 되면 저녁 식사하면서 조용히 얘기 나눠보는 건 어떠세요?”남우영은 한숨을 내쉬며 짧게 답했다.“좋아요. 부모님도 모시고 나오세요.”여민지는 순간적으로 굳어버렸다.“뭐라고요? 처음 함께하는 식사 자리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오라고요?”남우영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차가 기다리고 있으니 나갑시다.”여민지는 그의 말뜻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들뜬 마음으로 주변 직원들의 시선을 받으며 남우영과 함께 사무실을 나섰다.한편, 건물 모퉁이에 숨어 있던 이다은은 두 사람이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그들이 함께 차
또다시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이다은은 뒤척이며 밤새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불안과 두려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만약 이 사실이 남우영 부모님 귀에 들어가면... 우리 가족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할 수 없어.’그녀는 이불을 꽉 움켜쥔 채 생각했다.‘현실은 동화가 아니야. 왕자가 신데렐라와 결혼하는 일 같은 건 절대 있을 수 없어.’다음 날 아침, 이다은은 평소보다 훨씬 일찍 눈을 떴다. 남우영이 아직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그녀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회사에 도착하자 팀장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익숙한 듯 주어진 일을 받아 들고 묵묵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문서를 정리하고 자료를 검색하는 등 사소한 일을 처리하며 머릿속을 비우려 애썼다.그녀는 팀장에게서 늘 가벼운 업무만 배정받았다. 학력이 높지 않은 데다 특별 채용으로 입사한 그녀를 향한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게다가 사랑스러운 외모와 우아한 몸매는 사람들이 그녀를 오해하게 했다.점심시간이 되자, 동료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식사하러 나갔다. 그러나 몇몇 직원들은 그녀처럼 사무실에 남아 빵이나 배달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이다은은 무심히 빵을 뜯으며 한숨을 내쉬었다.‘도대체 왜 이런 이상한 결혼을 하게 된 거지... 어떻게 에이스타 그룹의 대표랑 번개 모임을 가지듯 결혼할 수가 있냐고!’아직도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그리고 덕분에 이렇게 쉽게 항공 개발 부서에 들어오다니... 이건 분명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일이야.’그녀가 빵을 입에 물고 멍하니 앉아있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그녀를 불렀다.“이다은 씨.”그녀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세련된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건 남자가 한 손에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도시락을 그녀의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공손히 말했다.“대표님께서 준비하신 점심입니다.”이다은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주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