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서다인은 샤워를 마친 후 햇살이 가득한 등나무 의자에 앉아 잃어버린 휴대폰을 들고 뉴스를 확인했다.그녀를 납치한 김호영은 현장에서 사살되고 사기 센터의 피해자들도 모두 구출되었다. 그리고 범행에 가담한 사람들은 남하준의 부하들에게 잡혀 경찰에 인계되었다.그녀의 가방도 휴대폰도 모두 되찾았지만 아쉽게도 3년 동안 모은 돈은 모두 그녀의 친오빠가 빼돌렸다.지금의 그녀에게는 이 휴대폰 말고는 무일푼이다.기억을 잃은 후로 그녀는 은경애를 만났는데 은경애는 마치 원래 그녀를 알고 있던 것처럼 예뻐했고, 꼭 그녀를 곁에 두려고 했다.그렇게 서다인은 은경애 옆에서 3년 동안 간병인을 해 왔다.친구도 없고 불운과 재앙만 안겨주는 가족을 찾아갈 수도 없으니 생활고에 쪼들리는 지금 누구에게 돈을 빌려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서다인이 생각을 거두고는 문 쪽을 바라봤는데 남하준의 튼실하고 넓은 어깨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남자는 지금 문을 닫고 있었다.그런 그의 모습을 본 서다인은 이상하게도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그녀는 긴장된 마음에 시선을 거두고는 고개를 푹 숙여 휴대폰으로 디지털책 아무거나 하나 열어 읽기 시작했다.남자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는데 그가 내디딘 걸음마다 서다인의 심장을 강타하고 있었고 긴장감은 갈수록 커졌다.남하준이 그녀의 앞을 지나갔다.그녀가 고개를 들자 남하준은 베란다 난간을 등진 채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위압감을 풍기는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의심스러운 듯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그와 눈을 마주치자 서다인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지만 겨우 침착을 유지하며 나지막이 물었다.“왜 나를 그렇게 봐요?”남하준이 대답했다.“정말 3년 전에 있었던 일을 잊었어?”“네.”서다인이 고개를 끄덕였다.남하준이 입술을 감쳐물고는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킨 뒤 또 물었다.“청유액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어?”서다인의 머릿속에는 이 물질
서다인이 방 안의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요 며칠 하준 씨 책장에 있는 책은 전부 다 읽었어요.”남하준이 한 번 더 물었다.“정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겠어?”서다인이 고개를 숙였다.“네, 나 내일 아침 바로 갈 거예요. 앞으로 이곳에 올 기회는 더 없겠죠.”남하준은 더는 그녀를 설득하지 않았다.그녀의 곁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면서 외투 단추를 풀며 당부했다.“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마. 할머니께서 자극받으실까 봐 걱정돼.”휴대폰을 쥐고 있던 서다인의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괴로운 감정이 북받쳐왔다.“미안한데 하준 씨 책에서 어떤 여자애 사진을 봤어요. 그 뒤에 ‘내가 사랑하는 여자 백하린’이라고 쓰여 있더군요.”외투 단추를 풀던 남하준이 멈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진 듯 제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서다인은 가슴이 비수에 꽂힌 듯이 아팠다.말 못 할 고통에도 애써 괜찮은 척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하린 씨겠죠?”한참 뒤에야 남하준이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 외투를 벗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하린이를 많이 좋아했던 건 맞아. 하지만 하린이가 14살 때 외국 명문 학교에 합격했거든. 하린이가 출국한 뒤로 우리는 연락이 끊겼어. 10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났지. 심지어 하린이가 돌아온 첫해에도 두 사람 사이는 어색했어.”말을 마친 후 남하준은 곧장 욕실로 향하고는 문을 닫아 샤워하기 시작했다.그의 설명에도 서다인은 괴로운 마음이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내연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하준과 백예린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남하준은 분명 백하린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사랑도 감정도 없는 이 결혼에서 고통스럽게 버티지 않았을 것이다.찬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서다인의
남하준이 방을 떠난 후 긴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하고는 불을 켰다. 그리고 백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애교 섞인 백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몸도 마음도 피곤한 남하준이 나지막이 물었다.“뭐가 두려워?”백하린이 애교를 부렸다.“그냥 너무 무서워요, 그냥 와서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남하준이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밤 11시가 되어 단호하게 거절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가 너희 집 앞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보낼게. 두려워할 필요 없고 일찍 쉬어. 나 내일 아침 일찍이 다인이를 안성에 데려다줘야 해.”백하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렸다.“정호 씨가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준 오빠가 데려다줘요?”남하준이 테이블 앞에 앉고는 이마를 짚은 채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다인이는 지금 내 아내잖아.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백하린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서다인 언니는 몸이 더러우니까 절대 같이 자면 안 돼요.”남하준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미간을 구기고는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하린아, 그런 뒷담화를 하면 되겠어? 모든 사람에게는 존경받을 만한 과거가 있어.”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엉엉... 하준 오빠, 정말 서다인 언니랑 잔 거예요? 전에 서다인 언니가 성병에 걸렸었다던데. 오빠도 감염되면 어떻게 해요?”다른 사람이었다면 남하준은 진작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상대는 백하린, 그가 10년 넘게 짝사랑한 여자였다.남하준은 안타까운 마음에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하린아, 내가 다인이랑 자는지 안 자는지는 다인이를 향한 내 마음에 달렸겠지. 다인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당연히 다인이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거야. 딴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 뒷담화도 이제 더는 하지 마.”“그럼 하준 오빠는 나 그렇게 사랑하면서 왜 나랑 안 자려는 거예요?”백하린이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눈빛이 어두
서다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억울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하린 씨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여자의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쾌함이 묻어났다.그 어떤 남자라고 하더라도 서다인의 말에 마음이 살살 녹을 것이다. 남하준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차가운 척하며 대답했다.“괜찮아.”서다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준 씨가 데려다준다면 받아들이지, 뭐. 마침 돌아가서 이혼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말이야.”서다인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일하게 남은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고는 남하준을 따라 방을 나서 식당에 아침 먹으러 갔다.이른 아침 식당에는 오가는 직원들이 끊이질 않았다.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도련님,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남하준은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인사를 건넨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기에 다 대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모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서다인은 캠프에 있는 며칠 동안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중독 사건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서다인을 매우 좋아했다.서다인은 식탁 앞에서 음식을 기다렸다.남하준이 아침 두 세트를 챙기고는 하나를 서다인에게 건넨 후 식사를 시작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만두피는 그대로 두고 그 안의 고기만 쏙 골라 먹는 서다인을 발견했다.삶은 달걀도 흰자만 먹고 노른자는 건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소고기죽도 파를 전부 골라냈다.남하준은 가슴이 왠지 모르게 움찔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나쁜 습관은 걔랑 정말 닮았네.”서다인이 죽을 먹으면서 나지막이 물었다.“누구랑요?”“하린이 말이야.”남하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눈치 없이 또 물었다.“여자들은 다 이렇나 봐?”서다인은 원래도 기분이
차가 멈춰 서자마자 서다인이 남하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데려다줘서 고마워요.”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물건을 안아 든 채 문을 닫고는 허름한 단층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단층집 앞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건달이 앉아 있었다.남하준이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서다인이 향하고 있는 곳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두 건달은 주위를 경계하며 망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남하준은 운전기사더러 전화해 사람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두 건달은 서다인과 아는 사이인지 그녀를 쉽게 들여보냈지만 남하준은 아니었다.남하준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들어간 여자가 내 아내예요. 나 들어가게 해줘요.”건달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서지석의 동생이 그쪽 아내라고요? 그럼 내가 당신 아버지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어요.”남하준은 상대와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선을 먼저 넘은 건 그들이었다.그의 눈에 살기가 어리더니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들을 향해 매섭게 날렸다.그의 힘센 주먹이 상대의 뒷머리를 내려쳐 순식간에 건달 한 명을 기절시켰다.다른 건달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바로 몸에 지닌 칼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가 칼에 손이 닿기도 전에 남하준의 주먹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이어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남하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는 무심하게 손을 닦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긴 복도를 지나니 어두운 불빛의 도박장이 보였다.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고 매서운 연기가 자욱했다.구석에서 일어난 소동이 그의 주의를 일으켰다.남하준이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서다인은 사 온 큰 포대를 어떤 남자의 머리에 씌우고는 야구 방망이를 움켜쥔 채 남자의 팔다리를 세게 내리쳤다.남자는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당황한 나머지 머리에 씐 포대를 찢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비명을 금치 못했다.서다인은 어금니를 깨물며 온 힘을 다해
남하준은 연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서다인에게 이렇게 사나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서다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어떤 건달이 몸에 상처가 가득한 사내를 안고 오고는 남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보스, 저 사람 만만치 않아요. 홍구를 기절시키고 나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니까요.”곧이어 수십 명의 도박장 파이터들이 나타나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남하준을 빤히 쳐다봤다.이곳은 불법 지하 도박장이었기에 단골만 받았다. 남하준과 같은 낯선 얼굴이 보이면 그들은 잔뜩 경계했다.도박장 책임자가 분노의 목소리로 물었다.“내 부하를 기절시키고도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야?”서다인이 겁도 없이 남하준 앞에 서고는 도박장 책임자를 보며 말했다.“윤수 오빠, 이 사람 내 친구예요.”진윤수가 콧방귀를 뀌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너 들어와서 네 오빠 때린 것도 충분히 우리 도박장 질서를 어지럽혔어. 너 때문에 지금 장사를 하지 못하겠잖아. 그런데 이제 네 친구가 내 부하까지 때려?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서다인은 남하준이 도박장 수십 명의 건달들에게 폭행을 당할까 봐 책임자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미안해요, 윤수 오빠.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영업하는 데 방해하지 않고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서다인은 빠르게 남하준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하지만 건달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이대로 가려고? 내가 그렇게 쉽게 보낼 것 같아?”서다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남하준의 큰 손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남하준은 건달들을 신경도 안 썼지만 자신의 손을 잡은 서다인 때문에 잠깐 넋을 잃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꽉 잡은 두 손에 시선을 옮겼다. 희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분명 백하린의 손을 잡을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었는데 말이다.서다인이 비위를 맞추느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윤수 오빠, 어떻게 해야 우리를
수십 명의 건달이 동시에 무기를 들고는 남하준에게 돌진했다.식겁한 서다인은 당장이라도 남하준 앞에 서서 그 대신 몽둥이를 맞아주고 싶었다.하지만 남하준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빠르게 총을 꺼내고는 진윤수를 조준했다.순간 진윤수는 두려움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가만있어! 제발 가만있어!”총을 본 순간 그의 부하들은 잔뜩 겁을 먹어 이리저리 줄행랑을 쳤다.M국에서 권총을 가지고 있는 건 권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남하준을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서다인은 남하준이 총을 꺼낸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침착했던 게 다 이유가 있네. 총의 위력을 알고 있었구먼.’진윤수는 그에게 사죄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형님, 제가 눈이 멀었나 봅니다. 감히 형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저, 저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이때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남하준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는데 마침 10분이 지나 있었다.‘역시 우리 애들이 시간을 잘 지킨단 말이야.’남하준이 총을 거둬들였다.진윤수는 자기가 안전한 줄 알고 한시름을 놓고는 식은땀을 닦아냈다.하지만 이어서 양복 차림을 한 수십 명의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현장에 있던 건달들을 모두 제압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부하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깍듯이 사과했다.M국에서 이 정도의 인원을 이끌 수 있고, 또 도련님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군전 그룹의 대표인 남하준밖에 없었다.진윤수는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는 무릎을 철썩 꿇으며 남하준에게 용서를 빌었다.“도련님, 제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정말 잘못했습니다.”남하준은 남자의 애원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서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도박장을 봉쇄하고 이 사람들 모두 경찰에게 넘겨.”“네, 알겠습니다.”부하가 대답하고는 바로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하준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그는 서다인의 맑은 눈을 바라봤는데 진주알 같은 이슬이 눈가에 맺히면서 흘러내리려고 했다.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고, 또 신세를 한탄하는 그녀가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다.“왜 그래?”서다인이 그를 등지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몰래 눈물을 닦고는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말했다.“지금 저녁 시간이라 가족분들이 다 집에 있을 거예요. 이따가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하준 씨는 문 앞에 서서 듣고 있어요.”말을 마친 후 서다인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남하준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집에 들어갔다.별장 문을 열어 걸어 들어가자 집사 이수종이 보였다.이수종은 쉰 가까이 되는 나이에 침착하고 매끄러운 성격을 가졌다.그는 잠시 벙찐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안녕하세요. 마침 잘 돌아오셨어요. 이제 곧 저녁 식사가 시작되려 해요.”이수종이 서다인에게 선의를 베푼 것도 그저 집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이 집안의 사람들 모두 그녀를 미워했다.“감사합니다.”서다인이 예의를 갖추며 대답하고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럭셔리한 인테리어의 거실 중앙에는 2m 길이의 식탁이 있었는데 열댓 명의 식구가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서다인의 목소리가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순간 별장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열댓 명이 날카롭고도 차가운 시선으로 서다인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몸에 소름이 끼친 서다인은 머리털이 곤두섰고 긴장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형제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려고 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여보, 저 사람 누구야? 왜 두 분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불러?”“저 사람이 바로 수원 별장에서 할머니를 간병했던 간병인이야. 할머니를 얼마나 세뇌시켰는지 몰라. 하준이가 저 여자랑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며 윽박질러서 두 사람 결혼했잖아.
이다은이 심장을 부여잡고 있자 남우영은 긴장이 가득 찬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아파? 의사는 보인 거야? 나랑 함께 검사받으러 가자.”이다은은 안절부절못하는 남우영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남우영, 나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야. 그냥 마음의 준비가 안 돼 있어서 그래. 아이랑 가족이랑 그리고 일까지 어떻게 평형을 잡고 케어해야 할지 모르겠어.”남우영은 이다은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일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도 알고 있고 계속하여 일을 하며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어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며 더욱이 그녀는 전업주부가 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렇게 할머니로 늙어가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그는 회심의 미소를 짓고 이다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품에 안고 속삭였다.“이다은, 넌 이 남편의 재산 능력을 잊은 거야?”이다은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남우영은 약속하는 듯한 말투로 달래며 말했다.“네가 원한다면 출퇴근은 항상 차로 데려다줄 거고, 곁에는 번거로운 일들을 분담해 줄 매니저를 붙여 줄 거고, 심지어 가방 들어 줄 사람도 따로 안배할 거고, 집에 돌아오면 가사도우미랑 내가 널 돌볼 것이야.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산후조리원, 가사도우미, 영양사, 헬스 관리사 등 아이를 케어해줄 수 있는 사람들을 전부 다 따로 안배해 줄 거야. 아이의 양육 문제는 전문적인 산후조리사와 육아 도우미, 그리고 부모님들도 계시잖아. 만약 손자를 돌보고 싶어 하시면 우리 집에서 같이 살 수도 있고 몇 년 후 내가 퇴직하면 그땐 나도 같이 부담할 수 있잖아. 이렇게 많은 후원자가 뒤에서 보호하고 있을 텐데 뭘 더 걱정해.”남우영의 말을 들은 이다은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그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감격에 목이 멘 채 말했다.“고마워, 우영아.”남우영은 행복한 얼굴로 이다은의 이마에 키스했다.이렇게 모든 일들은 다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10개월 뒤, 남씨 가문에서는 큰 경사를 맞이하게 되었다.남우영과 이다은의 딸은 전 달에 이미 출산 되였
지구 반 바퀴를 여행하고 돌아온 이다은은 여행 내내 헛구역질을 하고 졸리고 피곤한 증상으로 몸에 이상한 변화를 느껴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검사 결과는 예상한 대로 임신으로 나왔고 이다은의 마음은 한편으로 격동되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여자는 임신하면 매일 집에서 남편을 돕고 애만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 온 이다은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을 너무 사랑하고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해 천천히 노력하고 있기에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병원에서 진료를 마친 이다은이 집에 도착하자 함께 여행했던 부모님들도 선물을 들고 돌아와 집에 계셨다.“아빠, 엄마.”이적과 김연아는 아직 여행의 행복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이다은의 인사도 듣지 못한 채 남우영과 여행 중의 풍경들을 얘기하고 있었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소리를 듣고 바로 일어나 옆에 다가서며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이다은, 이른 아침에 어딜 다녀온 거야? 눈떠보니 없던데.”이다은은 가벼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침 산책 갔다 왔어.”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으며 말했다.“부모님들이 우리 선물까지 사서 챙겨 오셨어.”김연아는 만면에 웃음꽃을 띤 채 말했다.“다은아, 엄마는 태어나서 처음 외국 여행 가봤고 너무 재밌었어. 사돈한테 정말 고마워.”이번 여행을 통해 김연아와 이적은 마음속의 모든 불안과 열등감을 떨쳐내고 대가족에 합류하게 되었다.그들은 그제야 딸이 아주 훌륭한 남편에게 시집을 갔고 시댁도 교양 있고 너무 좋은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이다은은 어머니가 주는 선물을 받으며 말했다.“고마워요, 엄마.”이번 여행으로 인해 이적도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차분하게 말하며 얼굴엔 참을 수 없는 웃음을 하고 있었고 김연아도 그냥 말을 받아치며 사돈들이 어떻게 잘해주었는지 얘기하고 있다가 점심까지 먹고서야 본인의 집으로 돌아갔다.남우영이 이적 부부에게 그들이 여태 만져본 적이 없는 큰 액수로 평생 쓰기에 충분한 예단값과 별장 한 채를 주었기에 두 사람
괜찮은 계획이라 생각한 남우영도 바로 동의하며 말했다.“그럼 우리 여행 코스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다음 주에 출발하는 건 어때?”이다은은 두 손으로 남우영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그래 좋아, 그럼 우리 일단 일어나서 지도도 찾아보고 시간도 짜고 우리들만의 여행결혼식을 준비하자.”남우영은 일어나려는 그녀의 손목을 잡고 베개 위로 올려 누르며 말했다.“계획은 내일 짜면 돼. 나 지금 아주 중요하게 해야 할 일이 있단 말이야.”이다은이 이어 말하려 하자 남우영은 머리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며 입막음해 버렸고 그렇게 둘은 또다시 한 몸이 되었다.일주일 뒤, 이다은은 또다시 공아영의 변호사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고 공아영이 사과의 말과 함께 용서해 주기를 바라며 남하준에게 사정하여 그녀를 용서해 달라는 말을 전달해달라는 내용이었다.이다은은 법률은 공평하고 공정하다는 것만 믿고 이 일을 더 이상 상관하지 않았다.예전에 이다은의 학위를 도용했던 여민지도 이미 남우영에 의해 감방에 보내졌는데 사람을 찾아 이다은의 아버지를 때리고 어머니를 해치고 부모님의 집마저 허물게 한 공아영의 죄는 더욱더 큰 처벌을 받아야 했다.공항 대기실에서 이다은은 남우영이 준 설계도를 보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그녀는 얼굴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설계도를 보다가 갑자기 속이 울렁거림을 느끼면서 입을 막고 헛구역질만 하고는 또 눌린 듯하여 심호흡을 한번 하고 계속해서 보았다.이때 화장실에서 나온 남우영은 이다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다은아, 우리 이제 탑승해야 해.”이다은은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남우영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남우영과 이다은은 얘기를 주고받으며 즐겁게 걸어가고 있다가 갑자기 앞에 4명의 익숙한 얼굴들이 만면에 환한 웃음을 띠고 나타나자 너무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아빠, 엄마.”이다은과 남우영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어떻게 되어 여기까지 오셨어요?”중요한 건 그들은 모두 트렁크를 챙겨 들고 손에는 탑승권과
이다은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남우영을 천천히 안아주며 수줍은 말투로 단호하게 말했다.“남우영, 내 맘에 너밖에 없어.”남우영은 몸이 살짝 굳어지더니 정신이 번쩍 들면서 격동되고 갈망하는 눈빛으로 이다은을 마주 보며 낮은 소리로 속삭였다.“다시 말해줘, 다시... ”이다은은 부드러운 말투로 이어 말했다.“남우영, 나 너 좋아해.”남우영은 감동되어 눈시울을 붉히며 바로 이다은을 품에 꼭 껴안으며 말했다.“다은아... 이다은... ”그는 격동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이다은의 귀에 대고 이름만 불러댔다.“넌 날 좋아해?”이다은이 부끄러워하며 묻자 남우영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널 사랑하는 건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그래도 또 듣고 싶어.”남우영은 모든 진심을 담아 뜨거운 눈길로 이다은을 바라보며 말했다.“사랑해 이다은, 엄청 많이 사랑해.”너무 껴안은 탓에 숨 막힌 이다은은 남우영을 밀어내며 말했다.“나도 사랑해. 하지만 우리 이제 일어나 출근해야 해.”“우리 오늘 출근 안 해.”남우영은 일어나려 하는 이다은을 다시 안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으며 품에 꼭 껴안았다.이다은은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그럼 화장실엔 가도 되는 거지?”“그럼, 당연하지.”남우영은 말이 끝나기 바쁘게 이다은을 안고 화장실로 향했다.품에 안긴 이다은은 부끄러워 발버둥질하며 말했다.“내려줘, 나 혼자 갈 수 있단 말이야.”남우영은 이다은의 이마에 뽀뽀하고는 말했다.“내가 안아다 주고 다시 안아올 거야. 오늘은 너 어디도 못가, 내 옆에만 있어야 해.”이다은은 낮은 소리로 달래며 말했다.“남 대표님, 진짜 출근 안 해도 되는 거예요?”“난 오늘 너랑만 있을 거야.”남우영은 사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화장실로 들어갔다.화장실에서는 히히 닥닥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일주일 뒤, 이적은 퇴원했고 남우영은 그들을 새로운 집으로 모시고 가사도우미 두 명까지 안배해 줬다.평생 남 밑에서 일만 해온 이적과 김연아는 난생처음 이런
그러자 정안이가 옆에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공짜라는데 받으셔야죠.”이적은 바로 수표를 받아 쥐고는 어찌할 바를 몰라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공혁재는 돈까지 내밀었으니 이 일은 이렇게 끝나는 줄만 알고 말했다.“그럼 저는 손녀를 데리고 이만 물러나겠습니다.”말이 끝나기 바쁘게 공혁재는 공아영의 손을 잡고 병실에서 나갔다.공아영은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아 뒤돌아 이다은을 쏘아보면서 공혁재에게 끌려 나갔다.병실 안은 그제야 조용해졌고 어색한 분위기가 되자 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한 채 또다시 서로를 쳐다만 보았다.이때 정안이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저 사람들 이대로 내버려두면 안돼.”남하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정안이의 손을 잡고 어루만지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걱정하지 마, 내가 반드시 사돈 부부를 위해 정의를 되찾아 드릴 테니까.”정안이는 그제야 안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이적과 김연아는 옆에서 그들의 대화를 듣고 감동되어 고마움을 금치 못했다.이번 사돈 보기는 이적이 병상에 누워 있은 탓에 짧은 시간에 끝나 버렸고 이다은과 남우영은 양가 부모님들과 인사를 나누고 집으로 향했다.돌아가는 길에 남우영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갑자기 뒤에서 이다은을 꼭 껴안아 줬다.깜짝 놀란 이다은은 그 자리에 경직되어 긴장하면서 물었다.“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남우영은 눈을 감고 이다은의 뒷목에 얼굴을 갖다 대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다.“미안해 다은아, 나 때문에 이런 일까지 당하게 해서.”“왜 나한테 사과하는 거야?”“공아영의 일로 널 힘들게 해서 미안해.”이다은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껴안고 있는 남우영의 손을 만지면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네가 잘못한 거 아니야, 나한테 사과 안 해도 돼.”“널 힘들게 했으니 내 잘못이야.”그의 말에 이다은은 그대로 멍하니 서 있으면서 마음속으로는 더없이 감동했다.“비록 네가 날 위해 질투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공아영 문제로 이렇게 힘들게 할 줄은 몰
교만하고 무지막지한 공아영은 여태 할아버지는 빽이 많아 돈과 권력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 낼 수 있었으니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하여 공아영도 눈에 뵈는 것이 없이 커왔고 나라 장군 앞에서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공혁재는 당황해하며 작은 소리로 타일렀다.“얼른 도련님 부인한테 사과해.”공아영은 이다은을 가리키며 화를 내며 말했다.“저 여자가? 도련님 부인이라고요? 웃기시네, 사과해도 저 여자가 저한테 사과해야죠.”공혁재는 당황하여 진땀을 뻘뻘 흘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의 안색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고 남우영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겨우 참고 있었으며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공아영은 이미 그를 원망하며 말하기 시작했다.“남우영, 넌 어떻게 된 일인지 전혀 모르면서 내 연락처를 차단하고 계약까지 해지해? 너 너무 하는 거 아니야?”옆에서 듣고 있던 정안이는 이 일을 아들이 제대로 처리 못 하면 부부 관계에 영향을 줄 수 있기에 조마조마해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받아치며 말했다.“공아영 씨, 부탁인데 본인의 위치를 잘 알고 말씀하세요. 제 아들은... ”정안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아영은 뒤돌아보며 한마디 쏘아붙였다.“사모님, 전 남우영한테 물어본 거고 사모님한테 물어본 거 아니니까 그렇게 앞질러 대답할 필요 없어요.”정안이는 윗사람한테 버릇없이 쏘아붙이는 공아영의 오만무례함에 충격을 받고 하던 말을 멈추었다.세상에나! 이 여자의 시건 방지함이 이렇게 지나치다니.남하준은 새파랗게 된 얼굴로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곧 폭발할 것만 같았지만 정안이가 옆에서 그의 주먹을 내리며 좀만 더 참으라고 손짓했다.공아영은 다시 남우영을 보며 분노하며 말했다.“남우영, 왜 대답이 없어? 내가 지금 너한테 묻고 있잖아.”남우영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뻗쳐 더는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공아영, 잘 들어. 난 너의 그 어떤 해석도 필요하지 않아. 다만 너 때문에 내 아내가 기분 나빴다는 것만으로 널
그 뒤로 김연아는 현실만 믿고 더 이상 드라마에 나오는 텃세 부리는 부잣집 여자 역을 믿지 않았다.남우영은 이다은의 손을 잡고 소파에 가서 앉았고 두 사람도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필경 양가 부모님이 처음 뵙는 자리인 데다 것도 병원이라니, 자칫하여 부모님들 사이가 나빠지면 그 둘의 미래도 그다지 좋지 않을 것이 뻔했다.이다은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로 긴장했고 옆에서 눈치챈 남우영은 휴지를 꺼내 손바닥을 닦아 주며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긴장 안 해도 돼. 너도 보다시피 우리 엄마 아빠 다 좋은 분들이셔.”이다은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너 나보다 더 긴장한 거지?”남우영은 가볍게 웃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필경 장인 장모 앞이라 그도 긴장된 건 사실이었다.남하준은 사람들 앞에서 항상 말이 없는 편이라 이 순간도 화제를 찾을 수가 없었다.이적과 김연아는 긴장하고 두려워서 지금까지도 많이 어색해하며 혹시 말 한마디 잘못하여 딸을 더 번거롭게 만들까 봐 걱정하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정안이는 얼른 화제를 꺼내 말했다.“연아 언니, 듣자 하니 회사에서도 잘리셨다면서요?”“네, 맞아요.”“그럼 그 회사에서 보상은 해줬어요?”정안이의 물음에 김연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이런 작은 가사도우미 회사들은 평소에 잡일들만 많고 합동서도 안 쓰는데 무슨 보상이 있겠어요.”정안이는 뒤돌아 남하준을 보며 말했다.“하준 오빠, 들었지?”남하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들었어. 사람 시켜 어찌 된 일인지 잘 알아보고 배상할 건 배상하고 처벌할 건 처벌하고 하나도 빠짐없이 내가 잘 처리하도록 할게.”김연아와 이적은 너무 놀라 막연하게 두 눈만 깜빡거렸다.이때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모두의 시선은 현관문 쪽으로 향했다.“도련님, 사람들 도착했습니다.”밖에서는 위엄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또다시 긴장한 김연아는 낮은 목소리로 옆에 있는 정안이에게 물었다.“또
손에 꽃바구니를 들고 있던 정안이는 웃으며 말했다.“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요 사돈, 저희는 사돈 뵈러 왔어요.”사돈이라는 두 글자에 침대 위에 누워있던 이적마저 놀라 서둘러 다친 몸을 가누며 억지로 일어났다.김연아도 너무 놀라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남하준의 손에 쥐여있는 선물부터 받아 내려놓았다.남우영이랑 이다은은 두 번째 엘리베이터를 탄 탓에 아직 병실에 도착하지 못했다.김연아에게 선물을 넘긴 남하준은 얼른 이적한테로 다가가서 어깨를 눌러 눕히며 말했다.“이적 씨는 다치셨으니 일어나실 필요 없어요. 얼른 누워계셔요.”“남 장군님, 저...”이적은 당황한 나머지 말도 못 했다.김연아는 손까지 떨면서 겁에 질린 눈빛으로 정안이를 바라보며 혹시 아까 두 사람이 싸운 내용을 들었을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남하준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장군이라고 부르시는 게 이렇게 서먹서먹한데 당신 부부 둘 다 저보다 나이가 많으시니 이적 형이라 부르고 다은이 어머님은 연아 누나라고 부를 테니 저한테 그냥 하준이라 불러요.”정안이도 다가와 남하준에게 기대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이적 오빠, 연아 언니, 저한테는 완자라 불러주시면 돼요.”이 말을 들은 김연아는 얼굴이 빨개졌다.부끄러워서가 아니라 송구스러워서였다.앞에 있는 이 부부는 젊고 멋있고 이쁠 뿐만 아니라 권력도 막강한데 텃세 하나 없이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었다.이 순간 김연아는 자신이 추측했던 것들이 부질없는 짓이라 생각하게 되었다.이적은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멍해 서 있는 아내를 급히 불렀다.“여보, 얼른 사돈에게 의자를 가져다드리지 않고 뭐해.”김연아는 그제야 반응하여 얼른 대답했다.“으...응.”정안이는 그들이 이렇게 어색하고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고 급히 가서 김연아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그러지 않아도 돼요. 저희 절로 할게요.”정안이가 가까이 오자 김연아는 다시 몸이 굳어졌고 숨도 크게 쉬지 못했으며 자신의 구린 옷이 이렇게 고귀하고 예쁜 사돈의 옷
한편, 병실에서 한시간 넘게 잔 이적은 호사가 약 바꾸러 왔을 때야 잠에서 깼다.약을 바꾸고 나서 김연아는 이적에게 귤을 까주고 둘은 한 조각씩 나눠 먹으며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딸이 고른 사위가 사람 참 괜찮네. 사 온 귤까지 너무 달콤해.”김연아는 감개무량해하며 말했다.이적은 귤 모양을 힐끗 보고는 말했다.“이거 아마 엄청 비쌀걸.”“그럼, 큰 슈퍼마켓에 가면 이런 귤은 개별로 팔아. 소고기 양고기보다도 더 비싼 거야.”김연아는 달콤한 귤을 한 조각 입에 물고 말했다.이적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호기심에 물었다.“우리 집이 저렇게 되었는데 사위한테 말하면 우릴 도와 해결해 주지 않을까?”김연아는 그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우리 이런 일로 딸한테 폐 끼치면 안 돼. 그런 말은 꺼내지도 마.”“내가 뭔 폐를 끼쳤다고 그래. 사위가 돈이 그렇게 많은데 이 정도쯤이야 그 사람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잖아.”“입 닥쳐.”김연아는 분노하며 말했다.“그 사람이 돈이 있는 건 그 사람 일이야. 어쨌든 당신은 뻔뻔스럽게 손 내밀며 도와달라고 하면 안 돼. 우리가 아무리 가난해도 남의 것 탐내면 안 되는 거야.”“이 여편네는 항상 체면만 차리고 고집이 너무 세서 문제야.”김연아는 콧방귀를 뀌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사위 집안은 돈도 있고 권력도 있는 집안이라 우리 딸이 워낙 어울리지도 않는데 우리까지 사사건건 찾으면 사돈집에서 얼마나 귀찮겠어.”이어 이적은 시큰둥하게 물었다.“딸이 부잣집에 시집가면 그럼 부모도 모실 수 없다는 건가?”“당연히 모시겠지. 그것도 딸이 혼자 해야 하는 거지. 우린 최대한 사위 집안에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래야 딸의 결혼생활도 오래 갈 거잖아.”이적은 시큰둥하게 듣더니 몸의 상처도 생각 못 한 채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사위는 왜 우릴 모시면 안 되는 건데?”“그럴 의무가 없잖아.”“근데 돈이 많고 그냥 조금만 줘도 너랑 나 남은 생은 아무 걱정 안 해도 되잖아.”이적은 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