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다인이 방 안의 책장을 가리키며 말했다.“요 며칠 하준 씨 책장에 있는 책은 전부 다 읽었어요.”남하준이 한 번 더 물었다.“정말 한 번 더 생각해 보지 않겠어?”서다인이 고개를 숙였다.“네, 나 내일 아침 바로 갈 거예요. 앞으로 이곳에 올 기회는 더 없겠죠.”남하준은 더는 그녀를 설득하지 않았다.그녀의 곁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면서 외투 단추를 풀며 당부했다.“집으로 돌아가면 할머니에게 이혼 얘기를 꺼내지 마. 할머니께서 자극받으실까 봐 걱정돼.”휴대폰을 쥐고 있던 서다인의 손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그녀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괴로운 감정이 북받쳐왔다.“미안한데 하준 씨 책에서 어떤 여자애 사진을 봤어요. 그 뒤에 ‘내가 사랑하는 여자 백하린’이라고 쓰여 있더군요.”외투 단추를 풀던 남하준이 멈칫하더니 온몸이 굳어진 듯 제자리에서 꼼작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서다인은 가슴이 비수에 꽂힌 듯이 아팠다.말 못 할 고통에도 애써 괜찮은 척하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장 결혼하고 싶은 여자는 하린 씨겠죠?”한참 뒤에야 남하준이 정신을 차리고는 계속 외투를 벗으면서 무심하게 말했다.“어렸을 때 하린이를 많이 좋아했던 건 맞아. 하지만 하린이가 14살 때 외국 명문 학교에 합격했거든. 하린이가 출국한 뒤로 우리는 연락이 끊겼어. 10년 동안 한 번도 못 만났지. 심지어 하린이가 돌아온 첫해에도 두 사람 사이는 어색했어.”말을 마친 후 남하준은 곧장 욕실로 향하고는 문을 닫아 샤워하기 시작했다.그의 설명에도 서다인은 괴로운 마음이 조금도 덜해지지 않았다.그녀는 심지어 자기가 내연녀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남하준과 백예린은 어려서부터 서로를 좋아했으니까 말이다.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남하준은 분명 백하린과 결혼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녀는 사랑도 감정도 없는 이 결혼에서 고통스럽게 버티지 않았을 것이다.찬 봄바람이 불어 들어오면서 서다인의
남하준이 방을 떠난 후 긴 복도를 지나 서재에 도착하고는 불을 켰다. 그리고 백하린에게 전화를 걸었다.전화가 연결되자마자 애교 섞인 백하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하준 오빠, 왜 아직도 안 와요? 나 너무 무섭단 말이에요.”몸도 마음도 피곤한 남하준이 나지막이 물었다.“뭐가 두려워?”백하린이 애교를 부렸다.“그냥 너무 무서워요, 그냥 와서 같이 있어주면 안 돼요?”남하준이 시간을 확인하자 어느덧 밤 11시가 되어 단호하게 거절했다.“시간이 너무 늦었어. 내가 너희 집 앞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을 보낼게. 두려워할 필요 없고 일찍 쉬어. 나 내일 아침 일찍이 다인이를 안성에 데려다줘야 해.”백하린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는 투덜거렸다.“정호 씨가 데려다주는 거 아니었어요? 왜 하준 오빠가 데려다줘요?”남하준이 테이블 앞에 앉고는 이마를 짚은 채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다인이는 지금 내 아내잖아.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백하린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하준 오빠. 서다인 언니는 몸이 더러우니까 절대 같이 자면 안 돼요.”남하준의 얼굴색이 어두워지더니 그는 미간을 구기고는 엄숙한 말투로 말했다.“하린아, 그런 뒷담화를 하면 되겠어? 모든 사람에게는 존경받을 만한 과거가 있어.”백하린이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엉엉... 하준 오빠, 정말 서다인 언니랑 잔 거예요? 전에 서다인 언니가 성병에 걸렸었다던데. 오빠도 감염되면 어떻게 해요?”다른 사람이었다면 남하준은 진작 화를 냈을 것이다.하지만 상대는 백하린, 그가 10년 넘게 짝사랑한 여자였다.남하준은 안타까운 마음에 인내심 있게 설명했다.“하린아, 내가 다인이랑 자는지 안 자는지는 다인이를 향한 내 마음에 달렸겠지. 다인이를 사랑하지 않으면 당연히 다인이의 몸에 손을 대지 않을 거야. 딴생각은 그만하고, 다른 사람 뒷담화도 이제 더는 하지 마.”“그럼 하준 오빠는 나 그렇게 사랑하면서 왜 나랑 안 자려는 거예요?”백하린이 장난기가 가득한 말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눈빛이 어두
서다인이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억울한 듯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백하린 씨 곁에 있어줘야 하는 거 아니었어요?”여자의 부드럽고도 조심스러운 목소리에는 억울함과 불쾌함이 묻어났다.그 어떤 남자라고 하더라도 서다인의 말에 마음이 살살 녹을 것이다. 남하준도 예외는 아니었다.하지만 그는 이런 느낌이 싫어서 일부러 차가운 척하며 대답했다.“괜찮아.”서다인이 한숨을 푹 쉬고는 더 물어보지 않기로 했다.‘하준 씨가 데려다준다면 받아들이지, 뭐. 마침 돌아가서 이혼하면 내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말이야.”서다인이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유일하게 남은 휴대폰과 가방을 챙기고는 남하준을 따라 방을 나서 식당에 아침 먹으러 갔다.이른 아침 식당에는 오가는 직원들이 끊이질 않았다.그들을 본 사람들은 모두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도련님, 사모님, 좋은 아침입니다.”남하준은 그들의 인사에 대답하지 않았다.인사를 건넨 사람이 워낙 많기도 했기에 다 대꾸할 수가 없었다.하지만 서다인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넨 사람에게 모두 미소를 지어 보이며 똑같이 인사를 건넸다.“좋은 아침이에요.”서다인은 캠프에 있는 며칠 동안 예의 바르고 겸손하며 누구에게나 친절을 베풀었다. 게다가 중독 사건에서 그녀의 도움을 받았기에 사람들은 서다인을 매우 좋아했다.서다인은 식탁 앞에서 음식을 기다렸다.남하준이 아침 두 세트를 챙기고는 하나를 서다인에게 건넨 후 식사를 시작했다.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만두피는 그대로 두고 그 안의 고기만 쏙 골라 먹는 서다인을 발견했다.삶은 달걀도 흰자만 먹고 노른자는 건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소고기죽도 파를 전부 골라냈다.남하준은 가슴이 왠지 모르게 움찔하다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나쁜 습관은 걔랑 정말 닮았네.”서다인이 죽을 먹으면서 나지막이 물었다.“누구랑요?”“하린이 말이야.”남하준이 담담하게 웃으며 눈치 없이 또 물었다.“여자들은 다 이렇나 봐?”서다인은 원래도 기분이
차가 멈춰 서자마자 서다인이 남하준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데려다줘서 고마워요.”이 한마디를 남기고 그녀는 물건을 안아 든 채 문을 닫고는 허름한 단층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단층집 앞에는 담배를 피우고 있는 두 건달이 앉아 있었다.남하준이 힐끗 쳐다보더니 곧바로 서다인이 향하고 있는 곳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꼈다. 두 건달은 주위를 경계하며 망을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남하준은 운전기사더러 전화해 사람을 불러오라는 지시를 내리고는 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따랐다.두 건달은 서다인과 아는 사이인지 그녀를 쉽게 들여보냈지만 남하준은 아니었다.남하준이 대문을 가리키며 말했다.“방금 들어간 여자가 내 아내예요. 나 들어가게 해줘요.”건달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서지석의 동생이 그쪽 아내라고요? 그럼 내가 당신 아버지라고 해도 사람들이 믿겠어요.”남하준은 상대와 잘 얘기해 보려고 했는데 선을 먼저 넘은 건 그들이었다.그의 눈에 살기가 어리더니 갑자기 주먹을 불끈 쥐고는 그들을 향해 매섭게 날렸다.그의 힘센 주먹이 상대의 뒷머리를 내려쳐 순식간에 건달 한 명을 기절시켰다.다른 건달은 깜짝 놀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러고는 바로 몸에 지닌 칼을 꺼내려고 했는데 그가 칼에 손이 닿기도 전에 남하준의 주먹을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이어서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남하준이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고는 무심하게 손을 닦더니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긴 복도를 지나니 어두운 불빛의 도박장이 보였다.사람이 우글우글 모여 있었고 매서운 연기가 자욱했다.구석에서 일어난 소동이 그의 주의를 일으켰다.남하준이 인파 속을 헤집고 들어가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서다인은 사 온 큰 포대를 어떤 남자의 머리에 씌우고는 야구 방망이를 움켜쥔 채 남자의 팔다리를 세게 내리쳤다.남자는 맞아 바닥에 쓰러졌고 당황한 나머지 머리에 씐 포대를 찢었다. 그리고 극심한 고통 때문인지 비명을 금치 못했다.서다인은 어금니를 깨물며 온 힘을 다해
남하준은 연약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서다인에게 이렇게 사나운 모습이 있을 줄은 몰랐다.서다인이 말을 하기도 전에 어떤 건달이 몸에 상처가 가득한 사내를 안고 오고는 남하준을 가리키며 말했다.“보스, 저 사람 만만치 않아요. 홍구를 기절시키고 나에게도 주먹을 휘둘렀다니까요.”곧이어 수십 명의 도박장 파이터들이 나타나더니 험상궂은 얼굴로 남하준을 빤히 쳐다봤다.이곳은 불법 지하 도박장이었기에 단골만 받았다. 남하준과 같은 낯선 얼굴이 보이면 그들은 잔뜩 경계했다.도박장 책임자가 분노의 목소리로 물었다.“내 부하를 기절시키고도 이곳에 쳐들어온 이유가 뭐야?”서다인이 겁도 없이 남하준 앞에 서고는 도박장 책임자를 보며 말했다.“윤수 오빠, 이 사람 내 친구예요.”진윤수가 콧방귀를 뀌고는 어금니를 깨물었다.“너 들어와서 네 오빠 때린 것도 충분히 우리 도박장 질서를 어지럽혔어. 너 때문에 지금 장사를 하지 못하겠잖아. 그런데 이제 네 친구가 내 부하까지 때려?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서다인은 남하준이 도박장 수십 명의 건달들에게 폭행을 당할까 봐 책임자 비위를 맞추며 말했다.“미안해요, 윤수 오빠.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영업하는 데 방해하지 않고 지금 바로 갈게요.”말을 마친 서다인은 빠르게 남하준의 손을 잡고는 자리를 뜨려고 했다.하지만 건달들이 그들의 앞길을 막았다.“이대로 가려고? 내가 그렇게 쉽게 보낼 것 같아?”서다인이 발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녀는 아직 남하준의 큰 손을 꽉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남하준은 건달들을 신경도 안 썼지만 자신의 손을 잡은 서다인 때문에 잠깐 넋을 잃었다.그는 저도 모르게 꽉 잡은 두 손에 시선을 옮겼다. 희고 보드라운 여자의 손이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지 않았다.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그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기 시작했다.분명 백하린의 손을 잡을 때는 전혀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었는데 말이다.서다인이 비위를 맞추느라 미소를 지어 보였다.“윤수 오빠, 어떻게 해야 우리를
수십 명의 건달이 동시에 무기를 들고는 남하준에게 돌진했다.식겁한 서다인은 당장이라도 남하준 앞에 서서 그 대신 몽둥이를 맞아주고 싶었다.하지만 남하준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는 덤덤한 표정으로 빠르게 총을 꺼내고는 진윤수를 조준했다.순간 진윤수는 두려움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로 몸을 부들부들 떨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가만있어! 제발 가만있어!”총을 본 순간 그의 부하들은 잔뜩 겁을 먹어 이리저리 줄행랑을 쳤다.M국에서 권총을 가지고 있는 건 권력을 상징한다. 그들은 남하준을 감히 건드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서다인은 남하준이 총을 꺼낸 순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이렇게 침착했던 게 다 이유가 있네. 총의 위력을 알고 있었구먼.’진윤수는 그에게 사죄의 웃음을 지어 보였다.“형님, 제가 눈이 멀었나 봅니다. 감히 형님의 심기를 건드렸다니, 정말 죄송합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저, 저는 돈이 필요 없습니다.”이때 밖에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남하준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는데 마침 10분이 지나 있었다.‘역시 우리 애들이 시간을 잘 지킨단 말이야.’남하준이 총을 거둬들였다.진윤수는 자기가 안전한 줄 알고 한시름을 놓고는 식은땀을 닦아냈다.하지만 이어서 양복 차림을 한 수십 명의 남자가 들이닥치더니 현장에 있던 건달들을 모두 제압했다.“도련님, 죄송합니다. 많이 놀라셨죠?”부하가 남하준 앞에 다가오고는 깍듯이 사과했다.M국에서 이 정도의 인원을 이끌 수 있고, 또 도련님이라고 불릴 만한 인물은 사람들이 익히 알고 있는 군전 그룹의 대표인 남하준밖에 없었다.진윤수는 겁에 질려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고는 무릎을 철썩 꿇으며 남하준에게 용서를 빌었다.“도련님, 제발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주세요. 정말 잘못했습니다.”남하준은 남자의 애원에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서는 부하에게 명령했다.“도박장을 봉쇄하고 이 사람들 모두 경찰에게 넘겨.”“네, 알겠습니다.”부하가 대답하고는 바로 그의 명령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남하준이 제자리에 얼어붙었다.그는 서다인의 맑은 눈을 바라봤는데 진주알 같은 이슬이 눈가에 맺히면서 흘러내리려고 했다.남하준은 왠지 모르게 낯선 느낌이 들었고, 또 신세를 한탄하는 그녀가 약간 짜증이 나기도 했다.“왜 그래?”서다인이 그를 등지면서 가장 빠른 속도로 몰래 눈물을 닦고는 감정을 추스른 후 다시 말했다.“지금 저녁 시간이라 가족분들이 다 집에 있을 거예요. 이따가 내가 먼저 들어갈 테니 하준 씨는 문 앞에 서서 듣고 있어요.”말을 마친 후 서다인은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그녀는 남하준을 기다리지도 않고 먼저 집에 들어갔다.별장 문을 열어 걸어 들어가자 집사 이수종이 보였다.이수종은 쉰 가까이 되는 나이에 침착하고 매끄러운 성격을 가졌다.그는 잠시 벙찐 표정을 보이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사모님, 안녕하세요. 마침 잘 돌아오셨어요. 이제 곧 저녁 식사가 시작되려 해요.”이수종이 서다인에게 선의를 베푼 것도 그저 집사로서 응당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다. 이 집안의 사람들 모두 그녀를 미워했다.“감사합니다.”서다인이 예의를 갖추며 대답하고는 별장 안으로 들어섰다.럭셔리한 인테리어의 거실 중앙에는 2m 길이의 식탁이 있었는데 열댓 명의 식구가 모여 앉아 얘기를 나누면서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어머님, 아버님, 안녕하세요.”서다인의 목소리가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깨뜨렸다.순간 별장 안에는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열댓 명이 날카롭고도 차가운 시선으로 서다인을 바라보고 있었다.온몸에 소름이 끼친 서다인은 머리털이 곤두섰고 긴장한 마음에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시형제들에게도 인사를 건네려고 했지만 그녀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여보, 저 사람 누구야? 왜 두 분을 어머님, 아버님이라고 불러?”“저 사람이 바로 수원 별장에서 할머니를 간병했던 간병인이야. 할머니를 얼마나 세뇌시켰는지 몰라. 하준이가 저 여자랑 결혼하지 않으면 죽겠다며 윽박질러서 두 사람 결혼했잖아.
서다인은 남하준이 걸어 들어왔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남하준은 막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지위가 높았다. 가족들마저 그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했는데 심지어 그의 부모님조차도 그의 눈치를 살펴야 했다.이때 남하준의 부모님이 감격스러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서고는 활짝 웃으며 다가와 서다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남하준의 아버지인 남창민이 기쁜 얼굴로 물었다.“하준아, 오늘 웬일로 집에 왔어? 시간이 났던 거야?”그의 어머니인 허윤미도 얼굴에 기쁨이 묻어났다.“아들, 얼굴 보기 힘드네. 한 달 만인 것 같은데 야윈 건 아니지?”남하준은 잘생겼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차갑고 싸늘한 냉미남이었다.위압감 있는 분위기 때문에 말 한마디 하지 않아도 사람을 오싹하게 만들었다.그는 자신의 볼을 감싸안은 허윤미의 두 손을 천천히 밀어냈다.“이번에 돌아온 김에 며칠 있다 가.”허윤미는 아들의 불쾌한 기분을 눈치챘다.남하준은 부모님의 말씀에 대답도 하지 않고 차가운 눈빛으로 거실 쪽을 바라보며 언짢은 기색으로 물었다.“나 남하준의 아내가 누구의 입맛을 떨어지게 했고, 누구의 집을 더럽혔다고?”나 남하준의 아내?그 말을 들은 서다인은 흠칫했다.남하준의 말은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찌르면서 감동과 충격을 동시에 선사했다.그녀는 남하준이 자신 때문에 가족에게 화를 낼 줄은 전혀 몰랐다. 그동안 당했던 수모와 억울함은 남자의 이 한마디로 많이 해소되었다.거실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긴장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설명하려고 했지만 또 남하준의 카리스마에 기가 눌려 서로 눈치만 살필 뿐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기분이 언짢아진 남창민은 아버지라는 신분에 기대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하준아, 다 네 형이랑 형수님들인데 예의를 좀 지키는 게 어때?”남하준은 분노의 시선을 남창민에게로 옮긴 후 조금은 차분하지만 더 단호한 말투로 말했다.“아빠,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서로에 대한 존중이에요. 저 사람들에게 그런 기본적인 매너가 있어요?”남창민은 얼굴색이 어두
지우가 부랴부랴 그를 불렀다. “아니요. 나 안 더워요.”남태준이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리모컨을 놓았다.그녀의 영롱한 큰 눈은 여전히 아름답고 맑고 깨끗했으며 매력적이었다.지우는 잔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한 후 용기를 내어 물었다. “태준 씨가 임다희와 사귀는지 물어보려고 왔어요.”남태준이 미간을 찌푸린 채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해?”지우는 휴대전화를 꺼내 인터넷에서 뉴스를 검색하여 남태준에게 건넸다.순간, 지우는 자신의 이런 행동이 지나치다고 느꼈다. 이미 헤어진 이상 그와 다른 여자에 관해 물어볼 자격이 없다고 느꼈다.하지만 그녀는 참지 못했다.확실히 묻지 않으면 그녀는 단념하지 않을 것이다.비록 죄책감을 느끼지만 마음속으로는 여전히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다.다만 이때 그 이야기를 거론하는 것은 그녀의 목적이 단순하지 않아 보일 수 있었다.모두 그녀의 어머니와 동생이 저지른 일이지만 그녀는 동생의 취업을 위해 목적을 갖고 남태준과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처럼 보일 수 있었다.그렇게 생각한 지우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뉴스를 본 남태준의 안색이 순간 어두워지더니 긴장하며 설명했다.“지우야. 나와 다희 그런 사이 아니야. 나 믿어줘.”현재 임다희는 그의 정보원이기 때문에 보안 및 기밀 유지 계약으로 인해 임다희의 신분과 작업을 기밀로 유지해야 했으므로 지우에 대해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없었다.하지만 남태준은 지우가 자신을 믿지 못할까 봐 초조하게 이마를 짚고 죽을상이 된 얼굴로 휴대폰 액정을 들여다보고 또 불안하게 소파에 기대어 지우를 바라봤다.지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이 여자가 먹여준 음식 먹었어요?”“그저 보통 친구와 밥 한 끼 먹은 거야. 나와 다희 그 정도로 가까운 사이 아니야.”“안 먹었어요?”“응. 거절했어.”“아.”지우가 드디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입술을 오므렸다.그러자 둘 다 침묵에 빠졌다.남태준이 지우를 바라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고민하는 듯했다
스쿠터를 타고 남태준의 집에 도착한 지우는 고개를 들어 한낮의 햇살을 올려다보았다. 이 시간에 그는 아마 출근 중이겠지?너무 일찍 온 것 같아서 그녀는 입구에서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차를 돌려 떠날 준비를 했다.그녀가 막 떠나려던 참에 남태준이 문을 열고 나왔고 그는 지우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성큼성큼 앞으로 쫓아가며 불렀다.“지우야!”지우는 차를 세우고 그를 뒤 돌아봤다.마음이 격해진 남태준은 몇 걸음 만에 지우 곁으로 달려가 뜨거운 시선을 내뿜으며 다정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방금까지만 해도 용기가 넘치던 지우는 그를 만난 순간 맥이 풀리며 긴장해서 물었다.“출근 안 했어요?”“오늘 휴식이야.”남태준은 둘 곳 없는 손을 주머니에 천천히 찔러 넣었다지우는 부끄러워서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를 애틋한 감정이 마음속에 번져 그녀를 긴장시키고 불안하게 만들었다.“어디 나가요?”지우가 묻자 남태준은 고민 없이 말했다.“아니. 나 아무 일도 없어. 들어가 앉을래?”지우가 고개를 돌려 집을 보니 또 긴장감이 감돌았다.머릿속에 지난번 장면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부끄러워졌다.“뭐 물어보려고 왔어요. 물어만 보고 갈 거예요.”묻기만 하고 바로 간다?남태준은 너무 아쉬웠다.헤어진 후 지우가 먼저 찾아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남태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여기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너무 더워.”지우도 고개를 들어 눈 부신 햇살을 보며 생각했다.‘이 남자가 햇볕에 약하다고?’그리고 남자의 건강한 구릿빛 피부를 보니 평소에도 햇볕을 많이 쬐는 것 같았다.지우는 몇 초 동안 고민하다가 차를 옆으로 몰고 가서 멈추고 가방을 들고 그의 앞에 다가갔다.그러자 남태준은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더니 그녀를 데리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그는 걸어가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오신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임다희가 육건우의 범죄 증거를 입수했으니 네가 가서 가져와. 난 오늘 중요한 일이 생겼으니 방해하지 마
“육건우가 지금 나랑 같이 거물을 만나러 가자고 하는데 네가 찾는 그 신비로운 사람인지 모르겠어. 와볼래?”남태준은 생각지도 않고 말했다.“주소 보내.”“좋아.”전화를 끊은 남태준은 지우의 메시지를 잊고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이 밤.지우는 휴대전화를 안고 남자의 답장을 기다렸지만 밤새 기다려도 소식이 없었다.벌써 두 번째였다. 남태준이 그녀에게 두 번이나 답장하지 않았다.지우는 마음이 완전히 뒤숭숭해져서 남태준이 아직도 자신을 좋아하는지 확신이 없었다.그에게 재결합을 청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그렇게 평온해 보이는 이틀이 지났다.두 사람은 서로 연락하지 않았고 지우는 평생 이렇게 많은 고민을 한 적이 없었다.남태준이 보고 싶어 미칠 것 같고 그와 임다희가 도대체 무슨 사이인지 계속 생각했다.송수빈이 자주 가던 커피숍으로 지우를 불렀고 지우는 일할 마음이 없어 컴퓨터를 보며 멍하니 있었다.송수빈은 한창 일하다가 다시 휴대전화를 들고 동영상을 보기 시작했다.문득 송수빈이 소리쳤다.“지우야. 네 전 남자친구 연예 뉴스에 나왔어!”지우는 정신을 차리고 긴장해서 고개를 내빼고 기웃거렸다.송수빈이 핸드폰 액정을 그녀 앞에 널어놓은 채 허탈한 표정으로 지우를 바라보며 안쓰러워했다.지우는 그 안의 사진과 글을 보고 움찔 놀라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남태준과 임다희가 한 레스토랑에서 데이트를 즐기고 있고 임다희가 남태준에게 음식을 먹여주는 다정한 장면이 찍힌 것이었다.제목은 ‘남자친구와 데이트하는 임다희, 다정하게 음식을 먹여주다.’였다.송수빈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나무랐다.“내가 정말 사람을 잘못 봤어. 남 대장님 너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전 여자친구랑 만나고 있어? 이거 환승 연애 아니야? 쓰레기!”지우는 가뜩이나 마음이 아팠는데 송수빈이 남태준을 쓰레기라고 욕하는 것을 듣자 그녀는 더욱 괴로워하며 감싸기 시작했다.“그냥 밥 한 끼 먹은 것뿐이잖아? 그게 뭐? 요즘 기자들 직업정신 없어서 사진 한 장으로도 아
지우는 눈물을 흐릿하게 머금은 채 일어나서 버럭 소리쳤다.“다른 사람에게 빌붙을 생각만 하지 말고 독립해야지!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서 이익을 얻을 궁리만 해? 네가 그러고도 남자야?”욕을 먹은 지성은 얼굴이 어두워지며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진효연은 아들이 아까워 남태준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지우를 야단쳤다.“지금 그게 동생에게 할 소리야? 지성이가 왜 남자답지 못하고 왜 독립적이지 않은데? 지성이는 그저 좋은 직장 찾고 싶은 거잖아. 게다가 태준이가 남이야? 지성이 미래의 매형인데 그 정도는 도와줄 수 있잖아?”남태준은 놀라서 어리둥절했다.지우는 순간 분노가 치밀어 올라 화를 냈다.“지금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우리 그런 사이 아니야!”“밥 안 먹어!”지우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먹이며 말하고는 식탁을 빠져나와 방으로 가더니 쾅 하고 방문을 닫았다.진효연은 그제야 반응하고 약간 난처한 표정으로 남태준을 보았다.남태준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두 사람 아직 화해 안 했어?”진효연이 조심스럽게 묻자 남태준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이제 저희 반대 안 하시는 거예요?”진효연이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나 반대 안 해. 내가 허락해서 두 사람 이미 다시 만나는 줄 알았어.”진효연은 말을 잇지 못하더니 문득 쑥스러웠다.남태준이 지우의 남자친구가 아니라면 방금 그녀의 부탁은 확실히 좀 지나쳤다.지금 남태준은 마음속에 돌이 박힌 듯 숨이 막혔다.이따금 전해지는 괴로움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차라리 지우가 어머니의 반대 때문에 그와 헤어졌길 바라고 있었다.지금 보니 지우의 어머니는 두 사람을 동의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지우는 정말 자신의 이유 때문에 헤어지자고 했을까?단순히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에게 아무 느낌이 없어서?남태준은 맛을 느낄 수 없는 식사를 했다.그가 떠날 때까지 지우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그는 차를 몰고 넓은 거리를 무작정 누볐고 마음이 아프고 숨이 막힐 것 같았다.뚜뚜.메시지 벨이 울렸다.
남태준은 당연히 진효연의 뜻을 알았다.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진효연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했고 딸은 결국 시집갈 것이고 평생 그녀와 함께할 수 없으므로 아들에게 더욱 마음이 기울 것이다.가난한 사람 중에는 가식적인 사람이 많았다.하지만 본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진효연이 남태준은 마음에 들었다. 무슨 생각이든 마음에 숨겨두지 않고 바로 표현할 줄 알았으니.남태준이 여유롭게 말했다.“아주머니, 지성이가 공무원이 되려면 반드시 공무원 시험을 쳐야 해요. 통과해야만 일자리를 마련해 줄 수 있어요.”진효연은 난처한 듯 웃으며 말했다.“공무원 시험이 어디 쉽나.”“만약 공무원이 되기 싫으면 안성에 가도 돼요. 제가 가족들한테 회사에 맞는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할게요.”진효연은 싱글벙글 웃으며 남태준에게 음식을 집어주었다.“고마워 태준아. 내가 정말 많이 고마워.”지성도 기뻐했다.“고마워요 형.”지우는 안색이 어두워졌고 밥 먹을 기분이 없어 수저를 놓았다.그녀는 아직 남태준의 여자친구가 아닌데 그녀의 가족은 흡혈귀처럼 그에게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관계가 더 가까워지면 앞으로 어떤 무리한 요구를 제기할지 모른다.지우는 지성을 가리키며 경고했다.“너 못 가.”진효연은 눈살을 찌푸린 채 지우를 쳐다보며 불쾌하게 말했다.“지금 뭐 하는 거야?”지성도 의문스러워하며 물었다.“내가 왜 못 가? 누나도 내가 나가서 돈 벌기를 바라잖아.”지우는 화를 꾹 참고 심호흡을 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면접 보고 들어가는 건 되는데 낙하산은 절대 안 돼.”“왜?”지우는 제대로 된 신분으로 자존감을 갖고 남태준과 만나고 싶었다. 그의 도움을 받으며 난처한 위치에 처 하고 싶지 않았다.“그냥.”“내가 언제 누나더러 도와 달래? 난 태준이 형에게 부탁했어. 게다가 형도 흔쾌히 수락했고.”“너 바보니? 일자리도 혼자 못 찾아?”“내가 졸업한 대학교가 평범하잖아. 취업이 어려운 요즘 세상에 대기업 들어가는 일이 어디 쉬운 줄 알아?”“그래도 넌...
네모난 식탁에는 여섯 가지 요리에 국 하나, 그리고 디저트와 과일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새우, 게, 생선, 닭, 쇠고기, 야채, 수입산 인삼 비둘기 찜이 있었다.이러한 음식은 그다지 비싸지 않지만 남태준은 명절이나 중요한 날이 아니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한 상 가득한 음식을 보던 남태준이 시선을 돌려 지성의 어두운 얼굴을 보니 이 맛있는 음식들이 지성을 위해 준비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지성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엄마, 의사가 상처 완전히 아물기 전에는 담백하고 잘 소화되는 음식을 많이 먹고 기름진 음식은 피하라고 했어요. 아직 이런 음식은 벅차요.”진효연은 야채를 집어 지성의 그릇에 놓았다.“넌 야채 많이 먹어. 이건 충분히 담백해.”지성은 게를 보며 침을 흘렸다. 평소 해산물을 거의 먹지 않는 그의 집에서 하필 그가 다쳤을 때 해산물을 준비하다니.밥을 먹기도 전에 화가 잔뜩 불렀다.진효연은 집게로 가장 큰 게를 집어 남태준 앞에 놓인 작은 접시에 놓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태준아. 넌 이거 많이 먹어.”“감사합니다.”남태준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어쩔 줄 몰라 하며 지우를 쳐다봤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국을 먹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남태준은 진효연이 너무 열정적인 것 같았다.설마 그를 수양아들로 삼아 지우의 오빠로 만들고 싶은 걸까?“혹시 게 뜯는 도구 있어요?”남태준이 식탁을 보며 묻자 진효연은 어리둥절했다.게를 자주 먹지 않으니 게를 먹을 때 전문적인 도구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지우는 그릇을 내려놓고 부엌으로 달려가 깨끗한 작은 가위와 커피용 작은 숟가락을 꺼내 남태준에게 건넸다.“대충 이거라도 써요. 우리 집은 게를 먹을 때 그냥 입으로 뜯었어요.”지우가 부드럽게 말하자 남태준은 엷게 웃으며 도구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우는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했다.진효연은 남태준에게 해산물을 집어주고 지성에게 닭고기를 집어주며 많이 먹으라고 했다.다들 열심히
지우가 물건을 들고 지성의 방으로 가져갔다.남태준은 신발을 갈아신고 들어가서 그녀의 집안을 둘러봤다.확실히 좀 좁고 낡긴 하지만 깔끔한 편이었다.부엌 맞은 편에 바로 식탁이 있고 식탁 옆에는 거실이 있고 거실 소파도 짧아서 세 명이 앉을 수 있을 정도였다.텔레비전은 구식이고 냉장고도 작아서 거실 구석에 비치되어 있었는데 전체적으로 비좁아 보였다.“태준이 왔어?”진효연은 음식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활짝 웃으며 열정적으로 맞이했다.“앉아. 어서 앉아. 준비 거의 끝나가.”너무 친절하고 다정한 태준이라는 호칭에 남태준은 조금 어리둥절했고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제가 뭐 도와드릴까요?”“없어. 없어. 그저 앉아서 차나 마시고 지우와 얘기나 나누면 돼. 부엌일 정도는 나 혼자로 충분하지.”남태준은 또 움찔했다.지우와 얘기를 나누라니. 조금 어리둥절했다.너무 갑작스러운 열정에 그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지성은 부랴부랴 남태준에게 거실 소파에 앉으라고 청한 뒤 녹차 한 잔을 우려낸 뒤 리모컨을 건넸다.“TV 볼래요?”남태준이 다급하게 거절했다.“괜찮아.”지성은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스포츠 채널을 누르면서 말했다.“누나는 로맨스 드라마만 좋아해요. 누나가 집에 있으면 내가 리모컨을 차지한 적이 없어요.”남태준이 따뜻하게 웃었다.“그건 직업 때문에 그런 거잖아.”“형도 누나 글 쓰는 거 알아요?”“누나가 경찰의 사랑 이야기를 쓴 적 있는데 아쉽지만 결말은 비극이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그 책을 출판했어요.”남태준은 방금 찻잔을 들자마자 흠칫 놀라더니 동작이 뻣뻣해져서 차마 차를 마실 수 없었다.방 안에서 지성의 옷을 챙겨주던 지우가 그의 말을 듣고 노기등등하게 뛰쳐나왔다.“야. 너 그 부질 없는 입 다물어!”남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지우를 바라보았다. 뾰로통한 그녀의 모습이 아주 귀여웠다.하지만 지성에게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다.지성은 긴장한 채 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담담하게 TV를 계속
지우가 휴대전화와 가방을 들고 일어서니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그래. 그럼 나 간다.”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남태준의 옆을 지나갔다.남태준의 시선은 그녀를 따라 움직였고 그녀가 병실을 떠나는 것을 지켜보벼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지우는 그와 한마디도 하고 싶지 않았다.저번에 강제로 그녀의 몸을 가지려고 해서 그녀를 놀라게 한 것 같았다.요 며칠 동안 그는 끝없는 번뇌와 후회 속에 살았다.그때 지성이 가방을 들고 남태준 앞으로 다가왔다.“형. 가요.”남태준은 정신을 차리고 그의 가방을 받아들며 말했다.“내가 들게.”지성은 크게 기뻐했고 눈에는 존경심이 가득했다.“고마워요. 형.”차에 오른 남태준은 차에 시동을 걸고 천천히 출발했다.잠시 후 지우가 뒤에서 따라오자 남태준은 속도를 줄이고 백미러로 지우가 스쿠터를 타는 모습을 보며 약간 멍해졌다.지성이 그런 남태준의 상태를 눈치채고 말했다.“누나 기다릴 필요 없어요. 매일 다니는 길이라 아주 익숙해요. 조금 있다가 앞쪽 길목에 도착해서 오솔길로 빠지면 누나가 우리보다 훨씬 빨라요.”남태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덤덤하게 대답했다.“그래.”지성은 힐끔 남태준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사실 우리 누나가 가끔 사납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착하고 어질어요. 어려서부터 집안일을 많이 하는 편이었고 사람 잘 챙길 줄 알고 성실하고 선량한 편이에요.”남태준이 입술을 오므리며 가볍게 웃었다.“알아.”“아주 가정적인 사람이에요. 아버지가 병에 걸리셨을 때, 난 대학생이었고 누나 혼자 힘으로 이 집안을 지켰어요. 병원비며 빚이며 모두 누나 혼자 짊어졌어요.”남태준이 계속 응대했다.“알아. 지우 좋은 사람인 거.”지성이 궁금해서 물었다.“우리 누나 좋은 사람인 거 알면서 왜 헤어졌어요?”남태준은 조금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네 누나가 나 안 좋아해. 별로 느낌이 없대.”지성은 입을 떠벌리고 주먹을 불끈 쥐며 이를 갈았다.“누나 사람 보는 눈은 개나 줘버렸나? 난 또 엄마가 두 사람
‘너 참. 한심하다!’지우는 속으로 자신을 욕하며 스쿠터를 돌려 힘없이 집 쪽으로 향했다.다음 날.지우는 더 이상 남태준을 찾으러 갈 엄두가 나지 않아 매일 휴대전화를 보며 그의 연락을 기다렸다.그가 메시지 한 통이라도 보내길 바랐다.그를 찾으러 갈 용기와 핑계가 필요했지만 메시지는 끝내 오지 않았다.지성의 퇴원을 앞두고 진효연은 집에서 많은 음식을 준비하고 그녀에게 남태준을 부르라고 했지만 지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병원 병실.지성은 옷을 개면서 의자에 앉아있는 지우를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물었다.“나 퇴원하는 거 도와주러 온 거 아니야? 왜 아무것도 안 하고 폰만 보면서 멍하니 앉아있어?”지우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지성을 쏘아보며 나무랐다.“너 이제 움직일 수 있잖아? 옷 몇 벌 개인다고 안 죽어.”“누나 같은 여자를 어느 남자가 데려가겠어? 정말 불쌍하다.”워낙 기분이 안 좋았던 지우는 그 말을 듣자 더욱 괴로워 벌컥 화를 냈다.“누가 너더러 데려가래?”지성과 지우는 어릴 적부터 서로 치고받으면서 커왔고 어린이 된 지금도 자주 다퉜다.지성이 인정사정없이 말했다.“남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여자가 바로 누나 같은 여자야. 지나가는 남자들 다 홀릴 것 같은 몸매를 지닌 것도 모자라 여자가 상냥하지도 않고 어질지도 않고 배려심도 없고 사납고 악독하잖아!”지우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되받아쳤다.“그래 나 몸매 좋다! 부렵냐? 너처럼 깡마른 자식은 대나무 장대 같은 아내밖에 차려지지 않아!”“너!”지성은 화가 치밀어 상처가 아팠고 어두운 얼굴로 지우를 가리켰다.지우는 멈추지 않고 계속 공격했다.“아니다. 너 같은 놈에게 어느 여자가 시집가겠어? 평생 노총각으로 늙어 죽어라!”지성은 이를 악물었다.“누나. 말이 너무 심하잖아!”그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자 지우와 지성은 모두 조용해져서 입구 쪽을 보았다문은 열려 있었고 남태준은 조금 난처한 표정으로 입구에 서서 그들 남매가 다투는 것을 보고 있었다.두 사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