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그녀의 대답은 너무나 담담하고 자연스러워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안현주와 박소희는 잠시 눈을 마주치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안현주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빛으로 윤하경을 응시했다. “정말이에요?” 윤하경은 잠시도 흔들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네.” “윤하경, 또 무슨 속셈이야?” 안현주는 윤하경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며 물었다. 그녀는 윤하경이 강현우와의 관계를 이렇게 쉽게 끊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한 듯했다. 그 남자는 강현우였다. 모든 여자가 꿈꾸는 이상형, 놓칠 수 없는 남자. ‘어떤 여자가 강현우와의 관계를 이렇게 쉽게 끝낼 수 있겠어?’ ‘윤하경이 겨우 강현우와 가까워졌는데 그렇게 쉽게 포기한다고?’‘말도 안 돼.’ 그때 커피가 테이블에 놓였다. 윤하경은 가늘고 하얀 손끝으로 커피를 천천히 저으며 마주 앉은 두 여자의 질문을 받는 내내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녀는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박소희 씨가 저를 찾아온 걸 강 대표님은 알고 계신가요?” 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박소희를 바라보며 얼굴에는 여전히 미소가 떠 있었다. “강현우를 이용해 나를 압박하려는 건가요?” 박소희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쏘아봤다. 윤하경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박소희 씨, 오해하셨네요.”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만약 박소희 씨가 강 대표님이 저를 만나시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저를 찾아오시는 대신 강 대표님에게 직접 가셔야 한다는 거죠.”“그렇지 않나요?” 박소희는 미간을 더욱 깊게 찌푸리며 생각했다. ‘강현우가 내 말을 들으면 내가 여기서 너랑 이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겠어?’‘내 말을 들었으면 벌써 너를 내쫓으라고 했어.’ 그때 윤하경은 안현주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가에 조롱 섞인 미소를 띠었다. “안현주, 다른 사람 신경 쓰는 전에 네 일이나 잘 챙기는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윤하경은 차에 앉아 머리가 점점 더 아파오는 걸 느꼈다. 하나하나의 일이 하나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머리가 점점 더 아파지며 마치 누군가 안에서 찢어놓는 듯한 통증이 밀려왔다. 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힘겹게 머리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통증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머리를 짚었다. “열이 나나?”그녀는 그제야 몸이 이상하다는 걸 실감했다. 바이러스는 빠르게 퍼지고 있었고 이제는 눈을 뜨고 있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였다. “기사님, 약국으로 가 주세요.” 택시 기사님은 룸미러로 윤하경을 흘깃 바라보더니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아가씨, 약국보다는 병원에 가는 게 낫지 않겠어요?”윤하경은 흐릿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병원으로 가 주세요. 감사합니다.” 차는 곧바로 속도를 높였고 10분 만에 병원 앞에 도착했다. 윤하경은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 기사에게 건넨 뒤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굽 높은 힐이 아스팔트를 밟을 때마다 불안하게 흔들렸지만 이를 악물고 병원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그러나 문 앞에 다다랐을 때 결국 균형을 잃고 그대로 쓰러졌다. 그 순간, 강력한 손길이 그녀의 허리를 단단히 붙잡았다. 그 덕분에 바닥에 그대로 넘어지는 건 간신히 피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희미해진 의식 속에서 그녀는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힘겹게 눈을 뜨지 흐릿한 시야 너머로 보이는 얼굴. “배경빈 씨?” “왜... 당신이죠?” 윤하경은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힘이 빠져 도저히 움직일 수 없었다. 자주 아프지 않는 사람은 한 번 병이 나면 더 심하게 앓는다고 했다. 그 순간, 몸이 휘청이고 머릿속이 흐려졌다. 배경빈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를 부축했다. 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나 보기 싫다는 뜻인가요?”“지난번 이후로 연락해도 답장 한 통 없더니.”
배경빈은 윤하경이 기침하는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켜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왔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컵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마셔요.” 윤하경은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조금 숨이 트이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배경빈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하네요?”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윤하경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배경빈은 흥미롭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바로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는 모습이 제법 추궁하는 분위기였다. “그보다 왜 내 연락 씹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졌다.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했다. “그동안 좀 바빴어요.” 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빴던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강현우. 그는 생각보다 속이 좁았다. 혹여 자신이 배경빈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강현우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윤하경은 아직까지도 강현우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거짓말이잖아요.” 단정 짓듯 내뱉는 말투에 윤하경은 순간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병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배지훈.어둡게 드리운 눈빛이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는 먼저 배경빈을 훑어보더니 이내 병상에 누워 있는 윤하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미묘하게 표정이 굳었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마주한 듯했다. 배경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여긴 왜 와?”
그 시각, 강현우는 재무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을 울리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거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여자친구?’배지훈이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윤하경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내리며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듯 그의 표정은 점마 굳어갔다. 그때 민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강현우를 한 번 흘낏 쳐다보았다. “대표님, 헤븐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강현우는 잠시 말없이 화면을 응시한 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옆에 있던 우지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누군가 손을 댄 것 같아요. 경찰이 이미 출동해서 조사 중입니다.” 강현우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거친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다. 나가자.” 민진혁은 당연히 강현우가 헤븐 쪽으로 향할 거라 생각하고 바로 차를 몰고 차고로 내려갔다. 하지만 차가 차고를 빠져나가자 뒤좌석에서 강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니티 병원으로 가.” 민진혁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미러를 보며 말했다. “병원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그는 뒷미러를 통해 강현우를 살짝 쳐다보았고 그 순간 강현우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그대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민진혁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차를 급히 몰았다. 한편, 세레니티 병원에서. 윤하경은 흐릿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열은 내려갔지만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미나는 칼을 들고 자신을 쫓아왔다. 구지호를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격
윤하경은 문득 자신이 한 질문이 어리섞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지훈이 이미 왔으니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 강현우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표정 보니까 내가 오지 않기를 바란 거냐?”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강현우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방금 그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떠오르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병실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꾸르륵...” 윤하경은 갑자기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멈치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점심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지금은 한밤중이니 배고픈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배가 고픈 소리를 내다니 마음 한 구석이 꺼림척했다. 그때 강현우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병실에는 윤하경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침대 옆에 있는 불을 켜고 핸드폰을 꺼내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만사가 꼬였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고 더 불운하게도 충전기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배고픔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고픔을 잊으려 애쓰던 찰나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린 그녀는 그제서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강현우라는 것을 확인했다. 강현우는 우아한 기운을 뿜어내며 병실에 들어섰고 그의 존재는 그 좁은 병실을 더 좁게 만들었다. 윤하경은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때 민진혁이 여러 개의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까 현우 씨가 말없이 나갔던 건 나한테 먹을 걸 사다주려고 나
윤하경은 손이 살짝 떨었다. 숟가락이 죽 그릇에 빠질 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눈빛 깊은 곳에 서린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등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맞설 때마다 결코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윤하경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말했다. “무슨 남자친구요? 그건 그냥 사람들이 오해한 거예요.” “오해?”강현우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어 연근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반찬은 분명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윤하경은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묘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은근히 비꼬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가 오후에 병원에 왔을 때 마침 배경빈 씨를 만난 거예요. 제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그분이 의사를 불러준 것뿐이에요. 아마 의사 선생님 우리 관계를 착각한 것 같아요.” “그래?” 강현우는 가볍게 한쪽 눈썹을 올리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너무 까다로웠다. ‘어떻게 해야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손을 들어 맹세하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이면 제가 벌을 받을게요.” 강현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좁혀지던 눈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제야 그는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 윤하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위기는 넘긴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이미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런데 옆을 돌아보니 강현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떠날
윤하경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병실을 떠난 뒤였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멀찍이 앉아 있던 민진혁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윤하경 씨, 깨어나셨군요.” “네...” 윤하경은 아직 멍한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며 물었다. “현우 씨는요?” “대표님께서 아침 일찍 회사에 회의가 있어 가셨습니다. 대신 제가 남아 윤하경 씨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오늘 퇴원하셔도 된다고 합니다. 퇴원 수속부터 밟을까요 아니면 아침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어젯밤 늦게 먹은 탓인지 윤하경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퇴원할게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제 하루 집을 비웠더니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고 회사도 이틀이나 나가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윤하경의 대답을 들은 민진혁은 즉시 병실을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공손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직접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정중했고 말투 역시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췄다. 윤하경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조용히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반드시 모셔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민진혁의 단호한 태도에 윤하경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느니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고마워요.”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하경은 옷만 갈아입고 곧장 회사로 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엉망진창이었다. 가구며 장식품이 죄다 어지럽혀져 있었고 윤수철이 아끼던
윤하경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덕분에 폭주하던 윤수철도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 뿐 그는 다시금 분노에 휩싸여 윤하경을 노려봤다. “왜 왔어? 설마 나 비웃으러 온 거냐?” “꺼져!” 그는 또다시 손에 잡히는 것을 윤하경에게 집어 던졌다. 윤하경은 몸을 살짝 틀어 피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윤수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화가 풀리신다면 저한테 던지셔도 돼요.” “어차피 저는 죽어도 상관없잖아요.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시니 다시 낳으면 그만이겠네요.” 윤하경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윤수철은 이를 악물었다.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낮게 내뱉었다. “네가 감히... 내가 못 할 거 같아?” “아버지라면 할 수 있겠죠.” 윤하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던 윤하연은 사라졌고 이제 저까지 없어지면 아버지는 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겠네요.”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면 조용하긴 하겠어요.” 윤수철은 콧방귀를 뀌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윤하경의 한마디가 그의 화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듯했다. 그녀는 그가 더는 난동을 부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을 치우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제 말해 보세요.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윤수철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뻔뻔할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가 더 괘씸했다. “어디 감히 네가 어른들 일에 끼어들어?” “당장 꺼져!” 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잊으신 거 아니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아직도 자기 머리 위에 그럴듯한 장식이 얹힌 걸 몰랐을 텐데요.” 그녀는 상대의 아픈 곳을 찌르는 법
윤하경은 강현우 품에 꼭 안긴 채 병원으로 들어갔다.얼굴은 끝까지 그의 가슴팍에 파묻은 채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하는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한 번 훑어보더니 살짝 비웃듯 말했다.“왜, 내가 안고 있는 게 그렇게 창피해?”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그런 건 아니고... 혹시 폐 끼칠까 봐. 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내일 당장 기사 나겠죠. 이런 모습 찍히면 나중에 여동생이라고 해명이라도 하셔야 할지도 몰라서요.”나름 배려심 가득한 말투였지만 강현우의 반응은 딱히 호의적이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의 턱선이 딱 굳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이런 말 하는 걸 보니 입은 아직 덜 다친 모양이지.”말투는 가볍지만 묘하게 날카로웠다.윤하경은 그제야 입을 닫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 굳이 그와 말싸움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몇 분 뒤 강현우는 그녀를 진료실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고 의사가 간단히 살펴본 후 말했다.“다른 데는 문제 없고 발목이 삐었네요. 며칠은 푹 쉬셔야겠습니다.”그리고 곁에 있던 강현우를 돌아보며 웃었다.“여자 친구분 잘 챙기셔야겠어요.”윤하경은 순간 손을 들어 해명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강현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의할 점은요?”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둘을 한 번씩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간은 격한 활동은 삼가셔야 해요. 잠자리도 포함해서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윤하경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강현우는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못 참으면?”“...”그 순간 윤하경은 진심으로 땅속에 숨고 싶었다.‘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이야.’의사 역시 말을 잃고 안경을 고쳐 썼다.“참으셔야죠. 반드시요.”강현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윤하경을 돌아보았다.“들었지? 못 참아도 참으래.”의사의 이상한 시선이 곧장 윤하경에게로 향
윤하경은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겨우 떠오른 사람처럼 붙잡은 나무토막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현우를 꼭 껴안았다.강현우는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를 꽉 깨물고는 윤하경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뒤쪽을 돌아보니 민진혁이 그녀를 덮치려 했던 남자의 목을 발로 밟고 있었다.“사장님, 놈은 제압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남자를 노려봤다.그 눈빛에 담긴 살기는 말없이도 민진혁이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깊었다.“숨은 붙여놔. 그리고 경찰서로 넘겨.”“예. 일단 헤븐으로 데려가죠.”헤븐에 한 번 끌려간 자 중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구지호 같은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이따위 놈이 무사히 나올 리가 없었다.민진혁은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고 바로 우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건 들어왔어. 바로 처리해.”한편 강현우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윤하경을 조심스레 차량 뒷좌석에 앉혔다.몸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그의 손끝에도 그녀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강현우도 따라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갑자기 윤하경의 옷을 풀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예요?”놀란 윤하경이 가슴을 감싸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강현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으나 불쾌한 눈빛은 없었다.“다친 데 없나 보려고.”그제야 윤하경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렸고 긴장이 풀리자 금방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강현우는 그녀의 몸을 살폈고 무심코 발목을 건드렸다.“으악!”윤하경은 날카로운 통증에 숨을 들이켰고 강현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하얗고 곱던 발이 그만큼 부어오른 걸 보자 그의 이마에 또 주름이 졌다.강현우는 조심스레 샌들을 벗기고 손끝으로 부은 부위를 살짝 눌렀다.그러자 윤하경이 움찔하며 물러났다.“아파요.”그녀의 여린 목소리가 귀에 닿자 강현우는 순간 다
이런 부류의 인간한테는 말로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예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저열한 욕망에 눈이 먼 남자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그녀가 무시하자 남자는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꺼져. 지금이라도 안 놔주면 바로 경찰 부를 거야!”윤하경이 단호하게 소리쳤지만 상대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었고 남자는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비죽 웃으며 말했다.“에이, 왜 그래. 다 처음엔 부끄럽지. 좀 놀아보면 괜찮아진다니까.”그 말을 듣자마자 윤하경은 더는 참지 않고 소리쳤다.“사람 살려요. 도와주세요!”제발 누군가라도 듣기를 바라며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차라리 아까 강현우 차에서 버티고 안 내리는 건데...’윤하경은 후회가 밀려왔다.“닥쳐. 소리 지르지 마!”남자가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한쪽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윤하경은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상대는 덩치도 크고 힘도 셌기에 그녀의 발버둥은 그저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 같았다.벽에 밀쳐진 채 벗어날 수 없게 된 그녀 앞에서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돈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네 옷차림 보면 딱 답이 나오잖아. 화장 떡칠에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선 뭐... 그냥 산책하는 거야?”남자는 그러면서 바지를 내리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그 입에서는 숨 막히는 악취가 풍겼고 윤하경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세게 물었다.“악!”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빼는 동시에 뺨을 올려 그녀를 세게 후려쳤다.그 순간 윤하경은 머릿속이 울릴 정도로 강한 타격에 정신이 멍해졌다.간신히 고개를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곧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쓰러진 그녀 앞에 이미 바지를 내린 채 서 있었다.속옷까지 드러난 그의 모습에 윤하경은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다.“건드리지 마. 넌 진짜 죽게 될 거야.”하지만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죽는다고? 너 같은 여자랑 한
윤하경은 잠시 머뭇이다가 조용히 강현우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 앉자마자 그 특유의 짙은 담배 냄새와 강현우 몸에서 나는 차가운 향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려던 찰나 그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어휴. 내 앞에서는 그렇게 잘도 날뛰더니 조금 전엔 주미나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더라?”윤하경은 입을 열려다 그대로 멈췄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장에 조금이나마 감동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는데 그 감정은 그의 말 한마디에 금세 사라졌다.강현우는 그녀를 흘겨보다가 억지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억지로 자기 쪽을 보게 만들었다.“다음부터 누가 건드리면 그냥 받아 쳐. 내가 책임질게.”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고 눈빛도 말투도 진심이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누군가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너무 많이 배웠다.‘친아버지도 믿을 수 없는데 강현우가 다 뭐겠어.’그녀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거의 다문 채 조심스레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도와주시려고 그랬던 거 알겠어요. 괜히 제가 착각하지 않게 말해주셔서 감사하고요.”이 말을 전하며 오히려 강현우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속내였으나 그런데도 강현우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참...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내려.”“네?”윤하경은 순간 어리둥절했고 강현우가 이렇게 갑자기 차가워지는 순간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던 그가 이제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그러자 민진혁이 말없이 차를 세웠고 백미러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어딘가 연민 같은 감정이 깔려 있었다.이게 처음도 아닌지라 윤하경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강현우는 차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가운 한숨을 내쉬고
“남모르게 하려면 애초에 그런 짓도 말았어야죠.”윤하경의 말에 주미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에는 분노로 가득하던 그 시선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주미나는 솔직히 무서웠다.윤하경 혼자라면 어찌 해보겠지만 지금 그녀 뒤엔 강현우가 있었다.그 강현우가 대놓고 윤하경을 감싸고 있다는 것도 분명했고 이 상황에서 정면으로 맞붙을 자신이 없었다.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주미나는 이를 악물고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확 찢어버렸다.그러자 윤하경의 눈에 가벼운 비웃음이 스쳤다.“찢으셔도 돼요. 어차피 이런 자료 제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장도 다시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말이 안 통하고 끝까지 싸우시겠다면 이 자료들이 어디로 갈지 한번 맞혀보시죠?”윤하경은 천천히 주미나에게 다가가서는 맑고도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분명 얼굴만 보면 예쁘장하고 순한 인상이었는데도 지금 이 순간 주미나는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예를 들면... 당신들 집안과 적대적인 기업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요. 아니면 법원, 경찰서에 제출될 수도 있고요.”그 말은 단순한 위협처럼 들리지 않았다.주미나는 윤하경이 한번 마음먹으면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순간 병실 안이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고 그때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구지호가 신음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고 그제야 주미나는 움직였다.윤하경은 주미나를 지나쳐 구지호를 내려다보았다.“적어도... 지호 오빠 생각은 좀 하셔야죠.”주미나는 씹어 삼킬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윤하경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좋아. 알겠어. 네 말대로 하자.”윤하경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해주세요. 윤 회장님한테 더 이상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자료
강현우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윤하경의 콧날을 가볍게 건드렸고 그 눈길은 여전히 장난기 섞인 다정함으로 가득했다.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운 구지호를 바라봤다.지금의 구지호 상태가 누구 덕분인지는 말 안 해도 명확했다.그런데도 강현우는 전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구지호를 향해 손까지 흔들었다.그 모습은 구지호 눈엔 그야말로 저승사자를 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구지호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강현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고 침대 위에서 그가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주미나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강현우의 시야를 막아섰다.그제야 강현우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구 여사님, 하나만 정정하죠. 저랑 윤하경 씨는 결혼한 적도 없고 애인이라 하기엔 좀... 억울하네요.”주미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올 줄은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었다.“그럼 무슨 사이죠?”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눈매가 인상적이었다.“좋아하는 사이라면 충분하지 않나요?”주미나의 눈이 가늘어졌고 잠시 시선을 세운 채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설마 지금 하경이가 현우 씨 여자 친구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그녀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사실 강현우가 그렇게 말할 리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사가에서는 이미 강현우가 박씨 집안과의 정략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적어도 구 여사님 눈은 아직 멀진 않은 것 같네요.”“너!”주미나가 소리치려다 문득 멈칫했다.‘이 말인즉 설마 진짜 윤하경이 여자 친구라는 걸 인정한 거야?’애인과 여자 친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전자는 숨겨야 하는 존재고 후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다.그제야 윤하경도 눈을 크게 뜨며 강현우를 올려다봤다.‘설마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여자 친구라고? 심지어 주미나 앞에서?’이건 사실상 강현우가
구지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윤하경을 붉어진 눈으로 노려봤고 그 눈빛 속 분노는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그런 시선에도 윤하경의 얼굴엔 단 한 줄기 미동도 없었다.‘봐봐. 결국 인간이란 게 이렇지 뭐.’구지호가 지금 저리도 분노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에 스스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가 원망을 엉뚱한 데 쏟는 셈이었다.애초에 윤하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구지호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걸 확인한 주미나는 뒤돌아서며 윤하경을 노려봤다.“너 대체 왜 온 거야? 지호를 그렇게 만들어놓고도 모자라니?”윤하경은 조용히 웃었다.“그 말은 좀 틀린 것 같은데요. 지호 스스로가 만든 결과예요. 남 잘못되게 하려다 본인이 당한 거잖아요? 어머니, 귀도 밝고 판단도 빠르신 분이 어쩌다 그 말만 믿고 절 원망하세요.”주미나는 콧방귀를 뀌듯 웃었다.“어머니? 웃기지 마. 난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어.”흥분해서 날을 세우는 주미나와 달리 윤하경은 줄곧 담담한 표정이었다.“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야 거의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년의 정이 있잖아요.”“정?”주미나가 이를 갈며 그녀를 바라봤다.“난 네가 죽는 것만 바라는데?”“하... 지금도 후회해. 그날 밤 널 확 죽여버릴걸. 괜히 한 번 마음 약해져선... 너 같은 게 지호를 이렇게 만들고도 네 죽은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조용히 있었던 그녀가 그 말을 들은 순간 확연하게 달라졌다.“닥치세요. 우리 엄마 입에 올리지 마세요.”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무너진 건 그 순간이었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미나도 살짝 당황한 듯 움찔했다.그러고는 윤하경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들을 훑어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오늘 여기 온 이유가 뭐야? 강현우한테 기대기 시작했단 소리 하러?”주미나는 비웃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하경, 네 엄마가 무덤 속에서 네가 남자한테 몸 팔며 사는 꼴 보면 뭐라 할까? 기절할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윤하경 씨? 저 우지원이에요.”윤하경은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우지원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별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가 사람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 필요한지 조건이랑 인원수 알려달라고 하셔서요.”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설마 했는데, 강현우가 정말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짐이 덜어진 느낌이었다.“수고 좀 해주세요. 좀 몸 쓰는 일에 능한 사람들로 열 명쯤? 딱 봐도 위압감 느껴지는 사람들로요.”우지원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오, 꽤 큰일인가 보네요? 사람은 언제쯤 필요하세요?”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한 시간 안에요.”“한 시간이요?”“네. 이번 일은 빨리 끝내야 해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 입장이 위험해지거든요.”우지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그렇게 통화가 끝났고 윤하경은 강현우 쪽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주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주미나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락을 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윤하경은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우지원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카페를 나섰다.한 시간 뒤, 윤하경은 구지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그리고 놀랍게도 구지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온몸에 의료기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인 듯했다.예전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였던 만큼 그 몰락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그래서였을까.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진 않았다.구지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켰다. 표정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놀란 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자들 때문이었고 분노는 아마
윤하경은 찌푸린 이마로 휴대폰을 들어 백정연의 전화를 확인했다.“여보세요?”그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강현우가 너무 거칠게 굴었고 그녀는 분명 울면서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애원했었다.결국 이 목소리도 전부 강현우 탓이었다.사정을 모르는 백정연은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윤하경은 민망하게 코끝을 만졌다. 전화라서 다행이지 대면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진 걸 들킬 뻔했다.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자연스럽게 둘러댔다.“어젯밤에 좀 쌀쌀했나 봐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병원은 다녀오셔야죠.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요.”“오늘 회의 있잖아요. 그거 끝나고 갈게요. 대신 단체 채팅방에 공지 올려줘요. 오늘도 늦는 사람은 전부 사직서 각오하라고.”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백정연의 말투가 어딘가 머뭇거렸다.“대표님... 그게... 오늘 회의는 아마 못 열 것 같아요.”“왜요?”윤하경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어요. 회사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고요.”순간 윤하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이 사람이... 진짜 제정신이야?”회사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을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백정연도 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답답하죠.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난처해요. 아직 이사회 의장은 윤 이사님이니까요.”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게 웃었다.“그래. 아주 잘들 하시네.”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에 곧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알려줘요. 오늘 회의 회사 앞 카페에서 진행할 거라고. 난 한 시간 후에 갈게요.”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