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각, 강현우는 재무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을 울리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거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여자친구?’배지훈이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윤하경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내리며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듯 그의 표정은 점마 굳어갔다. 그때 민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강현우를 한 번 흘낏 쳐다보았다. “대표님, 헤븐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강현우는 잠시 말없이 화면을 응시한 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옆에 있던 우지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누군가 손을 댄 것 같아요. 경찰이 이미 출동해서 조사 중입니다.” 강현우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거친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다. 나가자.” 민진혁은 당연히 강현우가 헤븐 쪽으로 향할 거라 생각하고 바로 차를 몰고 차고로 내려갔다. 하지만 차가 차고를 빠져나가자 뒤좌석에서 강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니티 병원으로 가.” 민진혁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미러를 보며 말했다. “병원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그는 뒷미러를 통해 강현우를 살짝 쳐다보았고 그 순간 강현우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그대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민진혁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차를 급히 몰았다. 한편, 세레니티 병원에서. 윤하경은 흐릿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열은 내려갔지만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미나는 칼을 들고 자신을 쫓아왔다. 구지호를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격
윤하경은 문득 자신이 한 질문이 어리섞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지훈이 이미 왔으니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 강현우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표정 보니까 내가 오지 않기를 바란 거냐?”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강현우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방금 그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떠오르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병실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꾸르륵...” 윤하경은 갑자기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멈치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점심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지금은 한밤중이니 배고픈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배가 고픈 소리를 내다니 마음 한 구석이 꺼림척했다. 그때 강현우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병실에는 윤하경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침대 옆에 있는 불을 켜고 핸드폰을 꺼내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만사가 꼬였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고 더 불운하게도 충전기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배고픔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고픔을 잊으려 애쓰던 찰나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린 그녀는 그제서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강현우라는 것을 확인했다. 강현우는 우아한 기운을 뿜어내며 병실에 들어섰고 그의 존재는 그 좁은 병실을 더 좁게 만들었다. 윤하경은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때 민진혁이 여러 개의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까 현우 씨가 말없이 나갔던 건 나한테 먹을 걸 사다주려고 나
윤하경은 손이 살짝 떨었다. 숟가락이 죽 그릇에 빠질 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눈빛 깊은 곳에 서린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등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맞설 때마다 결코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윤하경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말했다. “무슨 남자친구요? 그건 그냥 사람들이 오해한 거예요.” “오해?”강현우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어 연근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반찬은 분명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윤하경은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묘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은근히 비꼬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가 오후에 병원에 왔을 때 마침 배경빈 씨를 만난 거예요. 제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그분이 의사를 불러준 것뿐이에요. 아마 의사 선생님 우리 관계를 착각한 것 같아요.” “그래?” 강현우는 가볍게 한쪽 눈썹을 올리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너무 까다로웠다. ‘어떻게 해야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손을 들어 맹세하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이면 제가 벌을 받을게요.” 강현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좁혀지던 눈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제야 그는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 윤하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위기는 넘긴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이미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런데 옆을 돌아보니 강현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떠날
윤하경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병실을 떠난 뒤였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멀찍이 앉아 있던 민진혁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윤하경 씨, 깨어나셨군요.” “네...” 윤하경은 아직 멍한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며 물었다. “현우 씨는요?” “대표님께서 아침 일찍 회사에 회의가 있어 가셨습니다. 대신 제가 남아 윤하경 씨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오늘 퇴원하셔도 된다고 합니다. 퇴원 수속부터 밟을까요 아니면 아침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어젯밤 늦게 먹은 탓인지 윤하경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퇴원할게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제 하루 집을 비웠더니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고 회사도 이틀이나 나가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윤하경의 대답을 들은 민진혁은 즉시 병실을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공손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직접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정중했고 말투 역시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췄다. 윤하경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조용히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반드시 모셔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민진혁의 단호한 태도에 윤하경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느니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고마워요.”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하경은 옷만 갈아입고 곧장 회사로 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엉망진창이었다. 가구며 장식품이 죄다 어지럽혀져 있었고 윤수철이 아끼던
윤하경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덕분에 폭주하던 윤수철도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 뿐 그는 다시금 분노에 휩싸여 윤하경을 노려봤다. “왜 왔어? 설마 나 비웃으러 온 거냐?” “꺼져!” 그는 또다시 손에 잡히는 것을 윤하경에게 집어 던졌다. 윤하경은 몸을 살짝 틀어 피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윤수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화가 풀리신다면 저한테 던지셔도 돼요.” “어차피 저는 죽어도 상관없잖아요.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시니 다시 낳으면 그만이겠네요.” 윤하경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윤수철은 이를 악물었다.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낮게 내뱉었다. “네가 감히... 내가 못 할 거 같아?” “아버지라면 할 수 있겠죠.” 윤하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던 윤하연은 사라졌고 이제 저까지 없어지면 아버지는 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겠네요.”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면 조용하긴 하겠어요.” 윤수철은 콧방귀를 뀌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윤하경의 한마디가 그의 화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듯했다. 그녀는 그가 더는 난동을 부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을 치우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제 말해 보세요.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윤수철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뻔뻔할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가 더 괘씸했다. “어디 감히 네가 어른들 일에 끼어들어?” “당장 꺼져!” 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잊으신 거 아니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아직도 자기 머리 위에 그럴듯한 장식이 얹힌 걸 몰랐을 텐데요.” 그녀는 상대의 아픈 곳을 찌르는 법
윤하경이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나가보세요.”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문질렀다.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는데 마치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다.얼굴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때,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와 확인해 보니 비서였다.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안 부대표님, 회장님이 전화 연락이 안 돼요. 오늘 중요한 비즈니스 파티가 있는데 혹시 부대표님께서 저녁에 한빛 그룹을 대표해 참석할 수 있어요?”윤하경은 마음이 답답해서 거절하려고 물었다.“취소할 수 있어요?”비서가 난감해하며 말했다.“어렵습니다. 오늘 파티의 주최 측은 현재 우리의 최대 고객인데 그렇지 않아도 계약을 해지 의향이 있는 상태라... 만약 우리가 가지 않는다면 더 좋지 않을 거예요. 또 사전에 미리 초대장을 보냈고 저희도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회장님께서 연락이 안 되네요. 다른 사람은... 부대표님만큼의 위상이 안 되어서요.”윤하경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알겠어요. 주소를 보내주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마침 점심때라 저녁 파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그녀는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문지르면 소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 일이 많아 소지연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 했는데 이제야 상황을 물어보게 되었다.문자를 보낸 지 오래 지났어도 답장이 없자 그녀는 저녁에 일이 끝난 후 소지연의 집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파티 시간이 다가오자 윤하경은 옷을 갈아입었다. 한빛 그룹을 대표해 이런 만찬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옷을 입어 너무 가볍게 보이지도, 너무 공식으로 보이지도 않게 하려고 그녀는 고민 끝에 실크 스트랩 원피스를 선택했고 밖에는 같은 소재로 만든 양복 외투를 걸쳤으며 액세서리로는 진주로 된 장신구를 골랐다.진주와 실크의 질감이 조화를 이루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는데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여 보이자 진한
“오 팀장님.”그녀는 다가가서 오건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오건우는 즉시 손을 내밀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가 내민 손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비쳤다.윤하경은 가까이서 그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는데 아마 오늘 밤 그에게 아부하러 파티에 온 여자로 생각한 모양이다.“저는 한빛 그룹의 신임 부대표 윤하경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그녀의 자기소개를 듣고서야 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제야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오건우예요.”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람을 깔보는듯한 느낌을 주었다.윤하경은 약간 긴장되었다. 오기 전에 오건우의 자료를 보지 않고 그저 말투로 보아도 이분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아냈다.이제 이 사람과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윤하경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오 팀장님, 시간 되시면 이야기 좀 나눠 볼 수 있을까요?”오건우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조용했다.“죄송한데 시간이 없네요.”윤하경은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오건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윤하경을 에돌아 자리를 떠났고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윤 부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우린 이미 오 팀장님과 여러 번 약속을 잡았지만 모두 거절당했어요. 다음 달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이번에 계약을 달성하지 못하면 우리는...”비서가 말을 다 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취임하자마자 이미 회사의 재무제표를 보았는데 만약 한빛 그룹에서 최대 고객사인 오 팀장을 잃으면 아마 회사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다.강현우도 비록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결국 한계가 있었다.그렇다고 앉아서 밑천만 바라고 놀고먹으면 언젠가 망하기 일쑤였다.“괜찮아요. 오늘 저녁에 기회를 찾아봐야죠.”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어요.”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바로 가서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윤하경은 오건우를 따라 정원으로 나갔다.이번 만찬은 교외 호텔에서 열렸기 때문에 밤의 정원은 실내보다 훨씬 고요했다.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하이힐을 또박거리며 그를 따라갔다.“오 팀장님, 계시나요?”그녀의 목소리는 밤하늘에 맑게 퍼졌지만 몇 번을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몇 걸음 더 나아가며 다시 불렀다.“오 팀장님, 어디...”“악...”그녀는 심장이 멎을 것 같아 비명을 질렀다.“소리 지르지 마. 나야!”“오 팀장님?”이 작은 방에는 불이 꺼져 있지 않았고 그저 정원의 가로등에서 한 줄기 빛이 새어 들어왔다.윤하경은 눈을 깜빡이며 마침내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이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보았다.그런데 그녀는 곧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건우의 호흡이 너무 거칠어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왜 그러세요?”“시치미를 떼긴.”오건우의 목소리는 분노로 가득 찼다.“네가 한 짓이야?”윤하경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뭐라고요?”“나에게 약 먹인 거 말이야.”오건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음산한 눈빛으로 어두운 조명을 뚫고 윤하경을 바라봤다.윤하경은 멈칫거리다가 욕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무슨 헛소리예요? 저는 그저 계약에 관해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에요.”“흥...”오건우는 믿을 수 없다는, 그녀의 간계를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다.윤하경은 그가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이를 악물고 말했다.“정말 제가 아니라고요.”“그럼 왜 따라왔어?”오건우의 목소리는 점점 불안정해졌다.이 질문에 윤하경은 어이를 없어 다시 반복해서 말했다.“말했잖아요. 저는 그저 계약에 관해 얘기하러 왔을 뿐이라고요.”이 말을 듣자 오건우의 입가에 비웃음을 흘렸다.“계약을 따내기 위해 약을 탔나 보네.”윤하경은 말문이 막혀버렸다.“제정신이 아니죠?”오건우는 이를 악물었다. 밑바닥에서 한 계단씩 이 자리까지 올라온 그는 갖은 속임수를 다 겪어왔다. 윤하경의 이 수단을 한눈에 간파하고는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문밖에서 두 여자의
“쳇, 누가 알아.”“내 생각엔 강현우 쪽일 듯.”“그럼 난 오건우에 건다. 2천만. 뱅커는 누구?”“내가 할게!”그렇게 불과 몇 분 만에 현장에서 즉석 내기가 시작됐다.윤하경은 흘깃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두 남자의 승부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시작된 말타기였지만 지금은 마치 서로 절대 지지 않겠다는 오기처럼 느껴졌다.심지어 윤하경은 오건우의 말이 강현우 쪽으로 일부러 들이받으려는 걸 목격했다.그 순간, 심장이 목까지 뛰어올랐다.하지만 다행히도, 강현우는 노련하게 방향을 틀며 매끄럽게 피했고 오히려 더 빠르게 가속해 결승선을 향해 달려갔다.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강현우가 간신히 반 마신 정도 앞서고 있는 상황이고 결승선까진 이제 몇십 미터 남짓했다.윤하경의 손은 어느새 앞의 울타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10, 9, 8... 3, 2, 1!”“강현우가 이겼다!”“내가 이겼어!”강현우에게 걸었던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모두가 들떠 있었지만 윤하경은 오히려 그 순간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강현우가 이기든 지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강현우와 오건우가 말을 몰고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오건우가 먼저 말에서 내려 웃으며 말했다.“생각보다 강 대표님, 말도 잘 타시네요. 사업뿐만 아니라 말솜씨도 대단하신데요?”강현우도 말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지만 여전히 표정은 여유로웠다.“오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셨죠.”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강현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축하한다고 짧게 말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오 대표님, 오늘 계약 얘기하신다더니... 서명은 하실 건가요?”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오건우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하듯 시계를 보며 말했다.“마침 점심시간이네요. 밥 먹으면서 얘기하죠.”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엄연히
오건우의 말은 의도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왜요, 오 대표님도 한번 해보고 싶으신가요?”순간 윤하경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어젯밤? 아가씨? 그럼 어젯밤, 강현우가 다른 여자랑 있었다는 말인가?’숨이 턱 막혔지만 곧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명확하게 서로 필요해서 얽힌 사이였을 뿐인데 자기가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긴 한가?윤하경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며 애써 웃음을 되찾았지만 그 미소는 더 이상 진심이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두 분 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데... 제가 구경 좀 하면 안 될까요? 한번 붙어보시는 건 어때요?”오건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좋죠. 강 대표님은 어떠신가요?”강현우도 짧게 웃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하게 오건우를 꿰뚫고 있었다.“오 대표님의 제안이라면 응하지 않을 수 없죠.”두 남자의 눈빛 사이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그 기운을 느낀 윤하경은 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럼 말을 고르시죠. 하경 씨도 같이 가시죠?”오건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하경 씨의 안목이 남다르시던데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제가 이기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운 좋게 한 번 맞힌 거예요. 이번엔 패스하겠습니다. 두 분 먼저 가세요.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섰다.강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오건우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강현우는 눈빛이 차가워지며 피식 웃었다.“가시죠, 오 대표님.”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발을 옮겼다.윤하경은 혼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애초에 강현우와 어떤 미래가 있을 거란 기대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어젯밤 그가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걸 직접 들으니 가슴이 뻐
이번 경기는 원래 윤하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오건우가 괜한 말을 꺼낸 바람에, 본인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그녀의 눈동자는 경마장 트랙 위에 고정됐고 자신이 고른 말이 정말로 1등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오건우란 사람, 인성은 글렀을지 몰라도 적어도 대놓고 한 말을 뒤집을 만큼 치졸하진 않겠지. 적어도 체면은 차릴 사람이니까.’긴장 탓인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그 모습을 흘끗 본 오건우가 입을 열었다.“긴장하신 겁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깜짝 놀라 손을 풀며 무심한 척 말했다.“아니요, 전혀요.”오건우는 별다른 말 없이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꺼내 피웠다.수억 원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의 표정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윤하경은 자신이 괜히 예민했나 싶어 어깨를 살짝 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말이죠, 오 대표님.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거예요?”오건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눈가에 스치는 미소 덕분에, 순간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진 듯도 했다.“진짜 이유를 듣고 싶어요 아니면 대충...?”윤하경은 이런 말 돌리는 화법을 제일 싫어했다.“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기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그저 숫자만 보고 고른 말이, 놀랍게도 선두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기대는커녕 아무런 감정도 없던 윤하경조차 눈이 커졌다.“이거 보니까 오늘 계약은 꼭 하셔야겠네요?”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엔 진심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08번 말이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빨간 리본을 가르는 순간, 윤하경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겉으론 무표정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오건우에게 내밀었다.“오 대표님, 계약서입니다.”그녀의 입가엔 은근한 승리감이 묻어 있었다. 오건우는 피식 웃더니 계약서를 흘깃 보고는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갔다
그곳은 고급 사설 클럽, ‘빌리’였다.휴식과 오락이 결합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강현우의 ‘헤븐’이 회색 지대라면 이곳은 세상에 대놓고 고급스러움을 팔고 있었다.승마, 사격, 골프 등 없는 게 없고 규모도 엄청났다. 여기서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윤하경은 차를 세우고 막 내리려던 찰나, 핸드폰에 ‘돈줄’ 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어디야?]이 밝은 대낮에 강현우가 자길 찾다니.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솔직하게 답장을 보냈다.[빌리에 있어요. 오건우 대표가 계약 이야기하자고 불러서.]문자를 보낸 뒤로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넣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고객님, 예약하셨나요?”“아니요. 오건우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직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를 시작했다.좌우로 복잡하게 꺾인 복도를 지나, 조용한 프라이빗 룸 앞에 멈췄다.윤하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오건우가 VIP석에 앉아 트랙 너머 경마를 바라보고 있었다.차가운 분위기의 남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고 어제 감싸고 있던 붕대는 이미 사라졌으며 대신 이마에는 옅은 멍 자국만 남아 있었다.그걸 본 윤하경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어제 일부러 다친 척하고 자기한테 덮어씌우려던 거였던 건가?입술을 한 번 꾹 눌러 누르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오 대표님.”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반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게 말했다.“하경 씨, 또 보네요.” 그는 옆자리를 가리켰다.“앉으시죠.”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다가갔다.하지만 오건우가 가리킨 자리에는 앉지 않고 중간에 일부러 한 자리를 비워둔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왠지 모르게,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이 싫었다. 첫 만남도, 두 번째도 기분 나빴고 오늘 역시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오건우는 그녀가 그렇게 거리를 두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비웃듯 말했다.“설마 제가
민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았고 눈엔 눈물까지 맺혀 있었으며 목소리는 애처로웠다.“저... 정말 몰라요. 강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이 반지도 그냥 예뻐서 샀을 뿐이에요. 그런 용도인지도 몰랐어요...”강현우는 반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그녀 얼굴로 옮겼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 뭐, 굳이 말하기 싫다면... 괜찮아. 말하게 만드는 방법은 많거든.”그는 손뼉을 칠 듯 손을 들었다.하지만 그 순간, 민하경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죽어버려!”그녀는 이성을 잃은 듯 그대로 강현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하지만 그 순간 강현우는 한 발 옆으로 피하더니 힘 있게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퍽!민하경은 허공을 날아가듯 그대로 튕겨져 나가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강현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들어와.”그가 명령하자, 곧 우지원이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민하경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님.”강현우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제대로 혼내 줘. 누가 보낸 건지 입을 안 열면...”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낮고 무겁게 덧붙였다.“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우지원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강현우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에게 그 정도 암시는 충분했다.“네, 알겠습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들을 불러 민하경을 끌어냈다.“강현우... 너 같은 인간, 절대 가만 안 둬!”민하경은 이를 갈며 소리쳤고 우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입 막아.”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그제야 우지원은 강현우의 손에 들린 은색 반지를 힐끗 보며 혀를 찼다.“형님, 원수 진 사람 참 많으신 거 아시죠? 오늘은 운 좋게 살아남으신 겁니다. 전 오늘 밤이 형님의 로맨스인 줄 알았거든요.”그는 멋쩍게 웃었지만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 웃음은
강현우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고 무심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쓱 바라봤다.“오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협력 못 할 이유도 없죠.”오건우처럼 상황 파악에 능한 사람이라면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항상 원칙만 따진다고 들었는데 강 대표님도 결국 뒤로 길을 열어주시는 날이 있긴 하네요.”“뭐, 말씀만 해주신다면야, 저는 당연히 환영이죠.”서로 말이 많을 필요 없는 사이라 강현우는 잔을 살짝 들며 웃었다.“그럼 미리 축하하죠.”오건우도 미소를 지으며 잔을 맞들었다.“나중에 윤하경 씨가 알게 되면 강 대표님이 본인을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고 기뻐하겠네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어둠이 스쳐 갔다.그 깊은 시선은 강현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강현우는 가만히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차 안에서 봤던 윤하경의 얼굴을 떠올라 조용히 말했다.“그 일에 내가 관련됐다는 건, 굳이 그녀가 알 필요 없어요.”오건우는 눈을 좁히며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강 대표님, 꽤 감성적인 면도 있으시군요.”강현우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죠.”오건우도 일어서며 짧게 응했다. 그리고 강현우가 등을 돌리는 순간, 슬쩍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최상층 스위트 룸.강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미간이 살짝 들렸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분위기부터가 유난히 짙었다.그때, 욕실 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 민하경이 수줍은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강 대표님...”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조용히 손짓했다. “이리 와.”민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욕실 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검은색 레이스 슬립 차림이었고 키 큰 몸매에 딱 붙는 그 옷은 절묘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민하경은 조용히 다가와
강현우는 그 말을 듣고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그래요?”그는 오건우 맞은편에 앉으며 눈길을 들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오 대표님의 눈에 들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말투는 가볍고 무심했지만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시는 동작엔 은근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대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짧은 시선으로 오건우를 훑어보자 오건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말이 나온 김에 얘기지만 그 사람... 강 대표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강현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그래요? 그럼 더 궁금해지네요.”그는 왼손 엄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건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아직 무슨 관계도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공연히 얘기했다가 그 사람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잖아요. 강 대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오 대표님, 생각 참 깊으시네요.”강현우는 눈을 좁히며 말을 받아쳤다.“그래서 오늘 이렇게 오신 건...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오건우는 그 말에 여유롭게 등을 소파에 기댔다.“들으니까 강 대표가 요즘 유성구 재개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던데... 혹시 협력할 생각은 없습니까? 우리 둘이 경쟁자가 되면 서로에게 손해일 수도 있으니까요.”강현우의 눈에 살짝 농담 섞인 기색이 비쳤다.“제 기억이 맞다면 재개발 사업은 오 대표님의 전문 분야는 아닌 걸로 아는데요? 갑자기 관심이 생긴 이유라도?”“돈이 되는 일이라면 관심 가져야죠. 그렇지 않습니까?”오건우는 그를 향해 고요한 눈빛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고 그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강현우는 코웃음을 흘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시가 한 개를 집었다. 그러자 센스 있는 여자가 곧장 다가와 시가를 잘라주고 능숙하게 불까지 붙여주었다.그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썹을 한 번 들었다.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조심
윤하경은 자료를 검토하던 중이었다.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윤수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누가 너더러 경찰에 신고하랬어?”윤수철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묻잖아. 누가 너보고 멋대로 신고하래?”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웃었다.“제가 했어요.”“회사의 재무랑 인사를 제가 관리하고 있는데 장부에 이상이 있으면 당연히 신고해야죠. 뭐가 문제죠?”윤수철이 씩씩거리는 사이, 그녀는 말끔한 표정 그대로 침착하게 받아쳤다.그 태도에 윤수철은 더 화가 났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가리켰다.“넌 지금 이 회사에 누가 주인인지 잊은 거야?”윤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죠. 아버지요.”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하지만 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 것도, 거의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간 것도 아버지셨죠. 이 회사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잖아요.”“아직도 임수연이랑 윤하연 두 사람한테 미련이 있으세요?”윤수철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그들 때문일 것이다.전에 회계 내역을 조사하려 했을 때도 막아섰던 윤수철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때는 그냥 눈 감고 넘기려 했던 거였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고조되자 사무실 밖 직원들까지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그러자 윤수철이 홱 돌아서며 유리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다 꺼져! 볼 일 없는 사람 다 나가!”직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고 누구 하나 눈 마주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윤하경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고소, 취하해.”윤하경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죄송하지만 형법에 저촉되는 건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