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빈은 윤하경이 기침하는 소리에 곧장 몸을 일으켜 따뜻한 물 한 잔을 따라왔다.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컵을 내밀었다. “조금이라도 마셔요.” 윤하경은 그가 내민 컵을 받아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뜨거운 기운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그제야 조금 숨이 트이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배경빈은 피식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야 고맙다는 말을 하네요?”그의 말투는 가벼웠지만 묘하게 신경 쓰이는 느낌이 들었다. 윤하경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이내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배경빈은 흥미롭다는 듯 눈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다가 바로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팔짱을 낀 채 다리를 꼬고 앉는 모습이 제법 추궁하는 분위기였다. “그보다 왜 내 연락 씹었어요?” 그의 목소리는 가벼웠지만 묘하게 압박감이 느껴졌다. 윤하경은 순간 말문이 막혀 시선을 피했다. “그동안 좀 바빴어요.” 그 말 자체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바빴던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다. 강현우. 그는 생각보다 속이 좁았다. 혹여 자신이 배경빈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는다면 강현우가 무슨 일을 벌일지 몰랐다. 윤하경은 아직까지도 강현우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배경빈은 그녀의 대답이 못마땅한 듯 코웃음을 쳤다. “흥! 거짓말이잖아요.” 단정 짓듯 내뱉는 말투에 윤하경은 순간 당황해 입을 꾹 다물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순간 병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배지훈.어둡게 드리운 눈빛이 무거운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는 먼저 배경빈을 훑어보더니 이내 병상에 누워 있는 윤하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미묘하게 표정이 굳었다. 마치 예상하지 못한 광경을 마주한 듯했다. 배경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네가 여긴 왜 와?”
그 시각, 강현우는 재무보고서를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핸드폰이 갑자기 진동을 울리며 그의 시선을 끌었다. 그는 화면을 확인하거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여자친구?’배지훈이 이런 식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윤하경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어내리며 메시지를 읽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편한 기운이 감도는 듯 그의 표정은 점마 굳어갔다. 그때 민진혁이 문을 열고 들어와 강현우를 한 번 흘낏 쳐다보았다. “대표님, 헤븐 쪽에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확인해 보시겠습니까?”강현우는 잠시 말없이 화면을 응시한 뒤 천천히 고개를 들며 물었다. “무슨 일인데?” 옆에 있던 우지원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누군가 손을 댄 것 같아요. 경찰이 이미 출동해서 조사 중입니다.” 강현우는 잠시 아무 말 없이 거친 손끝으로 입술을 문질렀다. 시간이 지나고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알겠다. 나가자.” 민진혁은 당연히 강현우가 헤븐 쪽으로 향할 거라 생각하고 바로 차를 몰고 차고로 내려갔다. 하지만 차가 차고를 빠져나가자 뒤좌석에서 강현우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세레니티 병원으로 가.” 민진혁은 잠시 당황한 표정으로 미러를 보며 말했다. “병원요?” “혹시 몸이 안 좋으신가요?” 그는 뒷미러를 통해 강현우를 살짝 쳐다보았고 그 순간 강현우의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이 그대로 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민진혁은 곧바로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급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한 손으로 운전대를 쥐고 차를 급히 몰았다. 한편, 세레니티 병원에서. 윤하경은 흐릿하게 잠에 빠져 있었다. 열은 내려갔지만 여전히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웠다. 그녀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주미나는 칼을 들고 자신을 쫓아왔다. 구지호를 대신해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며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을 추격
윤하경은 문득 자신이 한 질문이 어리섞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지훈이 이미 왔으니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은 분명 강현우에게 전달됐을 것이다. 강현우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네 표정 보니까 내가 오지 않기를 바란 거냐?” 윤하경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정말?” 강현우는 의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녀가 방금 그토록 연약한 모습을 보였던 것이 떠오르자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병실은 잠시 정적에 휩싸였다. “꾸르륵...” 윤하경은 갑자기 자신의 배에서 나는 소리에 멈치했다. 그녀는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점심 이후로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았고 지금은 한밤중이니 배고픈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강현우 앞에서 이렇게 배가 고픈 소리를 내다니 마음 한 구석이 꺼림척했다. 그때 강현우는 미세하게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어두운 병실에는 윤하경만 남아 있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침대 옆에 있는 불을 켜고 핸드폰을 꺼내 배달 음식을 주문하려 했다. 하지만 오늘은 만사가 꼬였다. 핸드폰의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고 더 불운하게도 충전기도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다시 침대에 몸을 뉘었다. 눈을 감고 천장을 바라보았지만 배고픔 때문에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배고픔을 잊으려 애쓰던 찰나 병실 문이 다시 열렸다. 본능적으로 이불 속으로 몸을 움츠린 그녀는 그제서야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이 강현우라는 것을 확인했다. 강현우는 우아한 기운을 뿜어내며 병실에 들어섰고 그의 존재는 그 좁은 병실을 더 좁게 만들었다. 윤하경은 그가 다시 돌아온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때 민진혁이 여러 개의 도시락을 들고 들어왔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아까 현우 씨가 말없이 나갔던 건 나한테 먹을 걸 사다주려고 나
윤하경은 손이 살짝 떨었다. 숟가락이 죽 그릇에 빠질 뻔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았다. 겉으로는 무표정했지만 눈빛 깊은 곳에 서린 냉기가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등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내려앉는 걸 느꼈다. 이전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와 맞설 때마다 결코 좋은 일이 없었으니까. 윤하경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황급히 말했다. “무슨 남자친구요? 그건 그냥 사람들이 오해한 거예요.” “오해?”강현우는 느긋하게 젓가락을 들어 연근 한 조각을 집어 그녀의 그릇에 올려놓았다. 반찬은 분명 먹음직스러웠다. 하지만 윤하경은 쉽게 손을 뻗지 못했다. 그의 말투가 너무 묘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은근히 비꼬는 느낌이 섞여 있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이 상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면...그녀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 생각을 정리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정말이에요. 제가 오후에 병원에 왔을 때 마침 배경빈 씨를 만난 거예요. 제가 갑자기 쓰러졌는데 그분이 의사를 불러준 것뿐이에요. 아마 의사 선생님 우리 관계를 착각한 것 같아요.” “그래?” 강현우는 가볍게 한쪽 눈썹을 올리며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눈빛이었다. 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쉬었다.정말이지, 이 남자는 너무 까다로웠다. ‘어떻게 해야 납득을 시킬 수 있을까?’그녀는 잠시 고민하더니 결국 손을 들어 맹세하듯 말했다. “정말이에요. 거짓말이면 제가 벌을 받을게요.” 강현우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게 좁혀지던 눈이 조금 느슨해졌다. 그제야 그는 천천히 턱을 들어 올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먹어.” 윤하경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일단 이 위기는 넘긴 모양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그녀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웠다. 이미 새벽 세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그런데 옆을 돌아보니 강현우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떠날
윤하경은 자신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몰랐다. 그저 눈을 떴을 때 강현우는 이미 병실을 떠난 뒤였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멀찍이 앉아 있던 민진혁이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윤하경 씨, 깨어나셨군요.” “네...” 윤하경은 아직 멍한 머리를 가볍게 문지르며 물었다. “현우 씨는요?” “대표님께서 아침 일찍 회사에 회의가 있어 가셨습니다. 대신 제가 남아 윤하경 씨를 모시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이어서 말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상태가 많이 좋아지셔서 오늘 퇴원하셔도 된다고 합니다. 퇴원 수속부터 밟을까요 아니면 아침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어젯밤 늦게 먹은 탓인지 윤하경은 전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담담하게 말했다. “퇴원할게요. 집에 가고 싶어요.” 어제 하루 집을 비웠더니 어떤 상태일지 모르겠고 회사도 이틀이나 나가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병원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다. 윤하경의 대답을 들은 민진혁은 즉시 병실을 나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와 공손하게 물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직접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의 태도는 한없이 정중했고 말투 역시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갖췄다. 윤하경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조용히 말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돼요. 저 혼자 가도 괜찮아요.” “안 됩니다. 대표님께서 반드시 모셔다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민진혁의 단호한 태도에 윤하경은 더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괜히 신경 쓰느니 그냥 받아들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고마워요.”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열 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윤하경은 옷만 갈아입고 곧장 회사로 가려 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집이 엉망진창이었다. 가구며 장식품이 죄다 어지럽혀져 있었고 윤수철이 아끼던
윤하경의 목소리는 제법 컸다. 덕분에 폭주하던 윤수철도 잠시나마 이성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간 뿐 그는 다시금 분노에 휩싸여 윤하경을 노려봤다. “왜 왔어? 설마 나 비웃으러 온 거냐?” “꺼져!” 그는 또다시 손에 잡히는 것을 윤하경에게 집어 던졌다. 윤하경은 몸을 살짝 틀어 피했지만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한 걸음 윤수철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눈동자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고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화가 풀리신다면 저한테 던지셔도 돼요.” “어차피 저는 죽어도 상관없잖아요.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시니 다시 낳으면 그만이겠네요.” 윤하경의 빈정거리는 말투에 윤수철은 이를 악물었다. 이빨이 갈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그는 분노에 찬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낮게 내뱉었다. “네가 감히... 내가 못 할 거 같아?” “아버지라면 할 수 있겠죠.” 윤하경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렇게 아끼던 윤하연은 사라졌고 이제 저까지 없어지면 아버지는 이 집에서 완전히 혼자가 되겠네요.”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면 조용하긴 하겠어요.” 윤수철은 콧방귀를 뀌며 헛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윤하경의 한마디가 그의 화를 어느 정도 누그러뜨린 듯했다. 그녀는 그가 더는 난동을 부리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소파 위에 널브러져 있던 책을 치우고 털썩 앉았다. 그리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제 말해 보세요. 뭐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신 거예요?” 윤수철은 그녀를 돌아보았다. 저 뻔뻔할 정도로 여유로운 태도가 더 괘씸했다. “어디 감히 네가 어른들 일에 끼어들어?” “당장 꺼져!” 윤하경은 어깨를 으쓱이며 무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아버지, 잊으신 거 아니죠?” “제가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아직도 자기 머리 위에 그럴듯한 장식이 얹힌 걸 몰랐을 텐데요.” 그녀는 상대의 아픈 곳을 찌르는 법
윤하경이 알았다고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나가보세요.”그녀는 손을 들어 머리를 문질렀다. 일이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그녀는 무력감을 느꼈는데 마치 모든 일이 자신의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같았다.얼굴을 찌푸리고 고민하던 그때,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와 확인해 보니 비서였다.전화를 받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안 부대표님, 회장님이 전화 연락이 안 돼요. 오늘 중요한 비즈니스 파티가 있는데 혹시 부대표님께서 저녁에 한빛 그룹을 대표해 참석할 수 있어요?”윤하경은 마음이 답답해서 거절하려고 물었다.“취소할 수 있어요?”비서가 난감해하며 말했다.“어렵습니다. 오늘 파티의 주최 측은 현재 우리의 최대 고객인데 그렇지 않아도 계약을 해지 의향이 있는 상태라... 만약 우리가 가지 않는다면 더 좋지 않을 거예요. 또 사전에 미리 초대장을 보냈고 저희도 간다고 했어요. 그런데 회장님께서 연락이 안 되네요. 다른 사람은... 부대표님만큼의 위상이 안 되어서요.”윤하경은 입술을 깨물고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알겠어요. 주소를 보내주세요.”말을 마친 후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마침 점심때라 저녁 파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있었다.그녀는 약간 어지러운 머리를 문지르면 소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요즘 일이 많아 소지연에게 연락할 생각을 못 했는데 이제야 상황을 물어보게 되었다.문자를 보낸 지 오래 지났어도 답장이 없자 그녀는 저녁에 일이 끝난 후 소지연의 집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파티 시간이 다가오자 윤하경은 옷을 갈아입었다. 한빛 그룹을 대표해 이런 만찬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신경이 많이 쓰였다.옷을 입어 너무 가볍게 보이지도, 너무 공식으로 보이지도 않게 하려고 그녀는 고민 끝에 실크 스트랩 원피스를 선택했고 밖에는 같은 소재로 만든 양복 외투를 걸쳤으며 액세서리로는 진주로 된 장신구를 골랐다.진주와 실크의 질감이 조화를 이루었다.그녀는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았는데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여 보이자 진한
“오 팀장님.”그녀는 다가가서 오건우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오건우는 즉시 손을 내밀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가 내민 손을 훑어보다가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비쳤다.윤하경은 가까이서 그의 표정을 똑똑히 보았는데 아마 오늘 밤 그에게 아부하러 파티에 온 여자로 생각한 모양이다.“저는 한빛 그룹의 신임 부대표 윤하경이에요.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그녀의 자기소개를 듣고서야 오건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그제야 손을 내밀어 악수했다.“오건우예요.”그의 목소리는 차갑고 사람을 깔보는듯한 느낌을 주었다.윤하경은 약간 긴장되었다. 오기 전에 오건우의 자료를 보지 않고 그저 말투로 보아도 이분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보아냈다.이제 이 사람과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는 생각에 윤하경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오 팀장님, 시간 되시면 이야기 좀 나눠 볼 수 있을까요?”오건우는 손을 들어 손목시계를 한 번 보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윤하경을 바라보았는데 그의 두 눈은 물처럼 조용했다.“죄송한데 시간이 없네요.”윤하경은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거절할 줄 생각지도 못했다.오건우는 말을 마치자마자 윤하경을 에돌아 자리를 떠났고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윤 부대표님, 어떻게 할까요? 우린 이미 오 팀장님과 여러 번 약속을 잡았지만 모두 거절당했어요. 다음 달이면 계약이 끝나는데 이번에 계약을 달성하지 못하면 우리는...”비서가 말을 다 하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취임하자마자 이미 회사의 재무제표를 보았는데 만약 한빛 그룹에서 최대 고객사인 오 팀장을 잃으면 아마 회사 운영이 어려워질 것이다.강현우도 비록 적지 않은 자금을 투입했지만 결국 한계가 있었다.그렇다고 앉아서 밑천만 바라고 놀고먹으면 언젠가 망하기 일쑤였다.“괜찮아요. 오늘 저녁에 기회를 찾아봐야죠.”비서는 한숨을 내쉬었다.“그랬으면 좋겠어요.”비서는 믿을 수 없다는 말투였다.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바로 가서 샴페인 한 잔을 들고 구석진 자리를 찾아 앉았지만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윤하경 씨? 저 우지원이에요.”윤하경은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우지원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별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가 사람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 필요한지 조건이랑 인원수 알려달라고 하셔서요.”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설마 했는데, 강현우가 정말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짐이 덜어진 느낌이었다.“수고 좀 해주세요. 좀 몸 쓰는 일에 능한 사람들로 열 명쯤? 딱 봐도 위압감 느껴지는 사람들로요.”우지원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오, 꽤 큰일인가 보네요? 사람은 언제쯤 필요하세요?”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한 시간 안에요.”“한 시간이요?”“네. 이번 일은 빨리 끝내야 해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 입장이 위험해지거든요.”우지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그렇게 통화가 끝났고 윤하경은 강현우 쪽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주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주미나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락을 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윤하경은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우지원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카페를 나섰다.한 시간 뒤, 윤하경은 구지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그리고 놀랍게도 구지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온몸에 의료기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인 듯했다.예전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였던 만큼 그 몰락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그래서였을까.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진 않았다.구지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켰다. 표정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놀란 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자들 때문이었고 분노는 아마
윤하경은 찌푸린 이마로 휴대폰을 들어 백정연의 전화를 확인했다.“여보세요?”그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강현우가 너무 거칠게 굴었고 그녀는 분명 울면서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애원했었다.결국 이 목소리도 전부 강현우 탓이었다.사정을 모르는 백정연은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윤하경은 민망하게 코끝을 만졌다. 전화라서 다행이지 대면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진 걸 들킬 뻔했다.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자연스럽게 둘러댔다.“어젯밤에 좀 쌀쌀했나 봐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병원은 다녀오셔야죠.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요.”“오늘 회의 있잖아요. 그거 끝나고 갈게요. 대신 단체 채팅방에 공지 올려줘요. 오늘도 늦는 사람은 전부 사직서 각오하라고.”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백정연의 말투가 어딘가 머뭇거렸다.“대표님... 그게... 오늘 회의는 아마 못 열 것 같아요.”“왜요?”윤하경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어요. 회사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고요.”순간 윤하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이 사람이... 진짜 제정신이야?”회사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을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백정연도 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답답하죠.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난처해요. 아직 이사회 의장은 윤 이사님이니까요.”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게 웃었다.“그래. 아주 잘들 하시네.”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에 곧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알려줘요. 오늘 회의 회사 앞 카페에서 진행할 거라고. 난 한 시간 후에 갈게요.”백정
“사과할 거면 최소한 진심은 보여야지. 안 그래?”윤하경은 강현우가 이번엔 정말 화가 났다는 걸 알았고 그는 일부러 저러는 거였다. 그가 이렇게까지 집요할 땐 뭔가로 분풀이해야만 풀리는 성격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럴 줄은 몰랐다.“그게... 다른 방법은... 안 될까요?”말이 끝나기 무섭게 강현우의 비웃음이 돌아왔다.“안 되진 않아. 내 앞에서 입든가... 아니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입든가.”윤하경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고 전에 있었던 안 좋은 기억이 뇌리를 스치며 본능적으로 판단이 섰다.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종이봉투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를 마치고 그가 건넨 옷을 입고 나서 거울 앞에 선 윤하경은 얼굴이 금세 토마토처럼 빨개졌다.워낙 체격이 좋았던 터라 뭘 입어도 잘 어울렸지만 이런 종류의 옷은 평생 처음이었다. 지난번 헤븐 클럽에서 입었던 의상이 순진한 교복처럼 느껴질 정도였다.이건 뭐라 말할 수 없는 수위였다. 딱히 정확한 단어가 떠오르지도 않았고 머릿속에는 부끄러워서 사람 앞에 못 나가겠다는 딱 하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그래서 윤하경은 욕실 안에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문 쪽 거울에 비친 강현우의 모습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고 깜짝 놀란 윤하경은 뒤돌아보다가 머뭇거렸다.“그... 그냥 이거 벗을게요...”그녀가 욕실 문을 닫으려던 찰나 강현우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아끌었다. 그대로 그의 품에 안겨 벽에 몰리게 된 윤하경은 당황해 두 팔로 본능적으로 앞을 가리려 했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손을 제압해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모르는 척하긴. 네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 왔을 땐 이러지 않았잖아.”그의 말엔 조롱이 묻어 있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감미로웠지만 그 내용은 귀에 거슬렸다.아무리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되뇌었지만 그 말에 윤하경은 도저히 화를 억누를 수 없었다. 눈을 들고 강현우를 똑바로 바라보며 뭐라고 반박하려는 순간 그가 그녀의 턱을 틀어잡았다.“그러니까 우리
여전히 어젯밤과 같은 방이었다. 윤하경이 들어섰을 때 방 안은 천장의 메인 조명이 꺼져 있었고 침대 옆에 놓인 노란빛 스탠드 두 개만 은은하게 켜져 있었다. 덕분에 넓은 방 안은 흐릿하고도 아슬아슬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침대가 정갈하게 정리된 걸 본 순간 윤하경은 무의식적으로 어젯밤 강현우의 광기를 떠올렸다.‘이 남자는 도대체 어디까지가 끝인지...’허리를 슬쩍 짚는 그녀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생각은 좀 정리됐어?”놀라 돌아본 그녀의 눈앞엔 막 샤워를 마친 강현우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는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허리엔 흰색 타월 하나만 간신히 두른 채였다. 그 모습은 어딘가 일부러 유혹하려는 듯했다.윤하경은 시선을 피하며 조심스레 말했다.“그게... 어제는 제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요. 괜한 말한 거였어요. 화내지 마세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하...”그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윤하경의 턱을 집고 낮게 쏘아붙였다.“네가 거짓말할 땐 너무 티 나거든? 적어도 내 앞에선 제대로 연기라도 해.”윤하경은 억지로 웃으며 그의 허리에 팔을 살며시 감았다.“그래도 현우 씨 눈은 못 속이죠. 제가 뭘 꾸미겠어요.”강현우는 그녀의 아양에도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 눈빛에 마음이 불안해진 윤하경은 결국 체념한 듯 입을 열었다.“그게... 오건우 씨가 그러는데 어젯밤에 다른 여자랑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현우 씨가 부정도 안 하시길래 저도 그냥 그렇게 믿었고...”끝까지 말을 잇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올려 강현우를 똑바로 보며 덧붙였다.“그런데 진짜로 질투한 건 아니에요. 그냥... 좀 껄끄럽고 기분이 그랬어요.”그 말을 들은 순간 강현우의 표정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껄끄러워?”차가운 말투에 윤하경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아, 아니에요. 이제 안 그래요.”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수습하려 했지만 강현우는 말도 없이 그녀를 들어 침대 위에 던졌고 몸을
윤하경은 잠시 말이 막혔으나 곧이어 살짝 웃으며 강현우를 바라보는 눈빛에 조심스러운 애교가 섞였다.“강 대표님, 혹시 저... 당분간만 여기서 지내도 될까요?”강현우는 그녀를 한번 훑어보더니 손에 들고 있던 컵라면을 노골적으로 쳐다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말해.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여기까지 온 거야?”그의 말은 까칠했지만 이미 소파에 앉아 느긋하게 넥타이를 느슨히 푸는 모습은 어지간히 피곤해 보였다.윤하경은 손에 든 컵라면을 들고 주방으로 가 남은 것들을 정리했고 다시 돌아왔을 때 강현우는 이미 와인 한 잔을 손에 들고 있었다.그녀는 조심스레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단지 머물 자리를 구하러 온 건 아니었고 지금 그녀에게는 강현우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의 사람 중 몇 명만 빌릴 수 있다면 해야 할 일을 훨씬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윤하경은 조용히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어설프게 마사지를 시작했다. 손에 힘은 별로 없었지만 강현우는 뜻밖에 그걸 즐기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봐선 일이 꽤 복잡하겠네.”“강 대표님한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일이잖아요.”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혹시 사람 몇 명만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강현우는 눈을 뜨고 그녀를 바라봤다.“사람?”윤하경은 소파 뒤로 돌아가 강현우 앞에 앉았다.“요즘 좀 복잡한 일들이 있어서요. 위험한 건 아니고 그냥 좀 분위기 잡아줄 사람이 필요해요.”강현우는 와인을 천천히 마시며 말을 아꼈고 표정만으로는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윤하경은 점점 불안해졌다. 사실 외부에서 사람을 구할 수도 있었지만 강현우 쪽이 훨씬 믿을 수 있었기에 이렇게까지 부탁하고 있는 거였다.“뭔 일인지 말해봐. 들어보고 결정할게.”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대강의 상황을 말해주었다.“지난번 구씨 가문의 일은 아직 다 끝난 게 아니에요. 이번엔 주미나 씨랑 얘기를 좀 해보려고요.”“주미나랑 얘기하겠다고 이사까지 오냐?”강현우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대놓고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고 윤하경은 딱히
30분쯤 뒤에 윤하경은 회사 근처 카페에 앉아 있었고 기분이 좋지 않아 달콤한 카푸치노를 시켰다. 따뜻한 커피를 마시자 마음이 조금은 진정됐다.잠시 후, 한 남자가 맞은편에 앉았다.“하경 씨는 여전히 시간 잘 지키시네요.”“이번엔 뭘 찾으셨어요?”윤하경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고 사설탐정인 노강훈은 모자를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이번 의뢰는 정말 죽는 줄 알았네요. 그래도 원하셨던 자료를 찾았습니다.”그는 그녀 앞으로 서류봉투 하나를 던졌고 윤하경은 조용히 받아들여 펼쳐보았다. 예상한 만큼 특별히 놀랄 건 없었고 구씨 일가를 조사했더니 역시 쉽게 드러날 만한 허점은 거의 없었다. 구정수라는 인물은 겉으로는 점잖지만 뒤에서는 수단이 꽤 거칠었다.만약 구지호가 무심코 흘린 말이 아니었다면 이 정도 정보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이건 지금 자신의 유일한 방패였기에 그녀는 서류를 잘 챙겨 가방에 넣었다.“잔금은 오늘 저녁 여섯 시 전에 송금할게요.”“감사합니다.”노강훈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다 말끝을 망설이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우린 오래 협력했잖아요. 돈은 충분히 받았고 그래서 한 가지 정보를 더 드리려고요. 공짜로요.”그가 말을 마치고는 몸을 살짝 숙여 윤하경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주변을 살피듯 낮은 목소리로 꽤 오랫동안 무언가를 속삭였다.윤하경의 눈빛은 점점 더 어두워졌고 말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아무 반응이 없었다.노강훈은 그녀의 안색이 점점 나빠지는 걸 보고 마침내 한숨을 내쉬었다.“하경 씨, 마음 이해합니다. 이게 가족 얘기다 보니 원래는 말씀드릴 생각도 없었어요. 하지만... 못 믿겠다면 그냥 제가 괜한 말 했다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그 말만 남기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용히 커피숍을 떠났다.남겨진 윤하경은 긴 시간 동안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딱히 어떤 행동도 없이, 말없이 앉아만 있던 그녀는 한참 후에야 커피잔을 들었지만 그 손끝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윤수철이
하지만 그 표정은 기쁨이 아닌 놀람이었다.정확히 말하자면 믿기지 않는다는 놀람 그 자체였다.“이게 한빛 그룹이랑 오건우 씨의 계약서라고?”“네가 이걸 따냈다고?”윤하경은 그를 스윽 쳐다봤다.“네. 그러니까 이 사람은 이제 나가도 되겠네요.”윤수철의 미간이 깊게 찌푸려졌고 기쁨은커녕 흐린 눈동자엔 의심이 가득했다.한참 말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보던 윤수철은 낮게 물었다.“그래서 이게 네가 밤새 안 들어온 이유라는 거냐?”윤하경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윤수철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악의적으로 몰아붙일 줄은 몰랐다.계약을 따낸 딸에게 던진 첫마디가 딸이 잠자리를 해서 따온 거냐는 식의 비아냥이라니...이미 실망은 여러 번 해봤지만 이번엔 아예 달랐고 심장이 꽉 막힌 듯 아팠다.이를 악물고 떨리는 목소리를 삼킨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천천히 일어나 윤수철 앞으로 걸어가면서 비웃듯 말했다.“제가 어떻게 따냈는지 그건 상관없잖아요. 중요한 건 계약서가 제 손에 있다는 거고요. 필요하면 제가 없던 일로 만들 수도 있어요. 그러니까 윤 회장님, 저한테 괜히 성질내지 마세요. 저도 성질내면 다 같이 골치 아플 수 있거든요.”그 말에 담긴 조소와 경고는 너무도 분명했기에 자기 딸에게 그런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윤수철은 눈가를 떨며 손을 치켜 올렸지만 이번엔 윤하경이 먼저 손을 들어 그의 손목을 막았다.“회장님, 제발 현실을 좀 직시하세요. 제가 계약서를 따낸 방식이 궁금해하는 것보다 그 시간에 임수연 씨가 지금 어디 있는지나 생각해 보시죠.”말을 마친 그녀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무실을 나섰다.그가 들여온 신임 부대표 앞에서 잠시 멈춰 선 그녀는 차갑게 바라보며 말했다.“한 시간 안에 아직도 여기에 있으면 제가 직접 내던질 겁니다.”그러자 남자는 움찔하며 얼굴이 굳었다.“이렇게까지 하실 필요 없잖아요.”윤하경은 냉소를 터뜨리며 그 말은 무시하고 유유히 자리를 떴다.등이 곧게 펴진 그녀
“저기... 어제 말했던 그... 누가 현우 씨를 암살하려 했다는 건 어떻게 됐어요?”민진혁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주위를 둘러본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 그 일은... 안 묻는 게 좋습니다.”“네...”윤하경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머릿속이 복잡해서였을까.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이미 아홉 시 반이나 되었다.입구에서 우지원이 기다리고 있다가 다가왔다.“윤 대표님, 지금 오세요? 회장님께서 찾고 계세요.”“아버지가요?”윤하경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고 이유도 모른 채 짜증부터 치밀었다.“왜요?”우지원이 대답하기도 전에 윤하경의 시야에 윤수철이 들어왔다.멀지 않은 곳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고 얼굴에는 마치 온 세상을 빚졌다는 듯한 불만이 가득했다.윤하경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가 입을 열었다.“무슨 얘기든 사무실에서 하시죠. 여긴 일하는 곳이에요.”윤하경은 윤수철에게 겁이 나서가 아니라 이런 모습을 직원들 앞에서 보이고 싶지 않았다.가정사로 사람들 뒷얘기거리 되는 건 질색이었다.그렇게 말하고 윤하경이 먼저 걸음을 옮겼고 윤수철도 뒤따라 회장실로 들어왔고 꽝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윤하경은 소파에 털썩 앉아 무표정하게 물었다.“뭐 때문에 부르셨어요?”“뭐 때문에 부른 것 같아?”윤수철은 쏘아붙이듯 말했다.“내가 기억하기론 네가 한빛 그룹에 들어온 건 회사를 살려보겠다고 했기 때문이잖아. 그런데 지금까지 한 걸 보면 회사에 해가 되는 짓밖에 안 했어. 눈에 보이는 성과도 없고.”윤하경은 아무런 표정 없이 소파 팔걸이에 손가락을 콩콩 두드리며 말했다.“그래서요?”눈썹을 살짝 치켜올린 그녀의 얼굴엔 전투태세를 갖춘 고슴도치 같은 기운이 번졌다.“그래서 말인데...”윤수철은 말끝을 흐리며 손짓했다.그러자 한 남자가 들어왔다.브랜드 슈트에 번듯한 외모를 가진 멀쩡해 보이는 남자였다.하지만 사내에서 강현우를 오래 마주친 윤하경 입장에선 그 남자는 마치 양가죽을 뒤집어쓴 늑대가 아닌 그냥 하이에나처럼
욕망의 전장이 욕실에서 침대로 옮겨졌을 때 윤하경은 이미 기운이 다 빠져 있었다.처음에는 그럭저럭 응해주던 그녀였지만 나중엔 완전히 힘이 풀려버려서 강현우가 어떻게 하든 그냥 이불처럼 축 늘어져 있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았다.사실 언제 끝났는지도 잘 몰랐다.다만 기억나는 건 뜨겁고 묵직한 몸이 밤새도록 자신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는 사실뿐이었다.그렇게 지독하게 휘둘린 밤이었지만 오히려 그날 밤 윤하경은 유난히 편안하게 잠들었다.다음 날 아침, 그녀는 강현우보다 먼저 눈을 떴다.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여 그를 돌아보려는 순간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남자의 팔이 다시 허리를 감아 그녀를 끌어당겼다.강현우의 몸은 여전히 뜨겁고 묵직했다.딱히 움직인 것도 아닌데 그녀는 허리 뒤쪽에서 단단하게 눌려오는 감촉에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곧이어, 강현우의 낮고 나른한 목소리가 귀에 닿았다.“움직이지 마.”그러자 윤하경은 그대로 얼어붙었다.지금 이 상태에서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어젯밤의 2차전이 벌어질지도 몰랐다.그럴 기력은커녕 이미 온몸이 뻐근해서 제 몸 하나 가누기도 벅찼다.결국 그녀는 얌전히 강현우 품 안으로 몸을 더 말아 넣었다.꼼짝도 하지 않고 얌전히 안기며 조용히 숨을 골랐다.하지만 속으로는 살짝 불안했다.‘진짜 화가 풀린 걸까?’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 강현우가 드디어 깨어났다.몸을 움직이진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눈을 떴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걸 느끼자 윤하경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윤하경의 커다란 눈망울이 촉촉하게 빛났다.그런 그녀를 본 강현우는 비웃듯이 코웃음을 쳤다.“또 무슨 꿍꿍이야?”윤하경은 얌전한 고양이처럼 그의 가슴에 머리를 비비며 말했다.“대표님, 이제는... 화 안 나신 거죠?”그러자 강현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천천히 윤하경의 턱을 잡았다. 거칠고 단단한 손끝이 턱선을 따라 닿았고 그녀는 조금 아픈 듯 눈을 찌푸렸다.“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