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그건 아주 잠깐뿐이었다. 그녀는 곧 평온한 표정을 되찾고 말했다.“어떻게 죽긴요, 병으로 돌아가셨죠.”“하, 하경 씨 참 순진하네요.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두 그 인간에게 속고 살다니.”남자의 말에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그게 무슨 뜻이죠?”“당신 어머니가 병원에 계실 때, 임수연이 당신 어머니의 간병인이었다는 거 아세요?”남자의 말에 윤하경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뭐, 알고 계신 게 많으신가 보네요.”어머니가 입원했을 당시 임수연은 간병인으로 곁을 지켰다. 주치의가 추천해 준 간병인이라 윤하경도 꽤 신뢰했고 임수연은 처음엔 정말로 정성을 다하는 듯했다.그래서 그녀는 임수연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아버지에게 당시 이름이 ‘임하연’이던 임수연의 딸이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기에 자신의 학교로 전학시켜달라고 말했다.그렇게 윤하경은 학교에서도 윤하연을 잘 챙겼지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 임수연과 아버지가 한 침대에 있는 모습을 목격했다.그 충격은 아직 미성년자였던 그녀에게 큰 상처로 남았고 이후 그녀의 성격은 한층 더 날카롭고 차갑게 변했다.윤하경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지만 이내 침착함을 되찾으며 물었다.“그래서요?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남자는 잠시 가방을 뒤적이더니 몇 장의 문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이걸 먼저 보시죠.”윤하경은 말없이 문서를 받아 들고 읽기 시작했다. 문서를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눈빛이 점점 어두워졌다.한참 후,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노려봤다.“어떻게 이게 사실이라고 믿죠?”남자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하경 씨는 똑똑하니까 스스로 확인할 방법이 있을 겁니다. 여기에 진짜라는 증거는 아직 많이 남아있어요. 필요하다면 언제든 연락하세요. 단, 가격은 1억입니다. 한 푼도 깎을 생각 없으니 그렇게 아세요.”남자가 일어나 떠나려 하자, 윤하경이 물었다.“당신은 대체 누구죠?”남자는 순간 멈춰 섰고 윤하경이 입을 열었다.“그 증거를 들고 임수연을 바로 찾아가면
‘그곳’이란 바로 윤하경이 처음 강현우를 만났던 호텔이었다. 이 호텔 역시 강씨 일가의 소유였다.윤하경이 도착했을 때 강현우는 아직 오지 않았다. 아마도 강현우가 미리 연락을 해둔 모양인지 프런트 직원은 곧장 그녀를 객실로 안내했다.지난번에는 급히 왔다가 서둘러 떠나서인지 객실 내부를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생활용품부터 각종 물품까지 모두 완비된 걸 보니 이곳은 강현우가 자주 머무는 곳임이 분명했다.윤하경은 와인 저장고로 가서 무심히 와인 한 병을 꺼내더니 잔에 따라 한 모금 삼켰다.와인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긴 숨을 내쉬며 몸을 기대었지만 머릿속에는 어머니가 돌아가던 날의 모습이 떠올랐다.그때 그녀는 고등학교 3학년이란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고 있었는데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렸다.더욱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간병인 임수연이 집안에 들어오면서 그녀는 또 한 번 충격을 받았다.그리고 방금 만난 남자가 보여준 자료가 사실이라면 어머니의 죽음과 그 후의 일들 모두 어떤 의도와 계획 속에서 일어난 것일지도 모른다.그녀는 유리잔을 움켜쥐었고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갔다.머릿속이 어지러운 그녀는 다시 와인 한 잔을 자신에게 들이부었다.해 질 무렵, 강현우가 호텔에 도착했다.창밖으로 마지막 햇살이 객실 바닥에 누워 있던 윤하경의 몸에 스며들었다.그녀의 주변에는 빈 와인병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종류도 제각각이었다. 강현우는 이를 보고 본능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다가가 발끝으로 그녀를 살짝 건드렸다.“윤하경!”남자의 목소리는 낮게 깔려 있었고 어딘가 불쾌한 기색이 엿보였다.그러나 윤하경은 이미 곯아떨어진 상태였다. 그의 발끝에 살짝 찔리자 몸을 약간 비틀었는데 원래부터 얇고 짧은 옷이 조금만 움직여도 그녀의 몸매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강현우는 자제력이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이 장면에서 눈동자가 살짝 흔들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그는 귀찮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아오자 윤하경은 임수연과 마주쳤다.그 시간에 윤수철과 윤하연은 이미 출근한 뒤라 집에는 그녀와 임수연만 남아 있었다.어제 그 남자가 했던 말이 머릿속을 스치자 윤하경의 눈빛이 싸늘해졌다.하지만 임수연은 그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 가슴 앞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경아, 어제도 밤새 집에 안 들어왔더라? 참, 내가 이런 계모 역할 하기가 참 어렵다. 몇 마디만 하면 네가 화를 내니. 세상에 어느 집 딸이 이렇게 밤늦게 다니는지 모르겠다니까.”한숨을 내쉬며 그녀는 덧붙였다.“네 아버지가 화내는 것도 다 이유가 있지 않겠니?”하지만 이번에 윤하경은 평소와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임수연이 입고 있는 비단 소재의 잠옷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아줌마, 솔직히 이런 옷은 별로 잘 안 어울리는 것 같아요.”그녀는 웃음 섞인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제가 기억하기로는 아줌마가 간병인으로 우리 엄마를 돌보던 그 시절 옷차림이 더 잘 어울렸던 것 같은데요?”임수연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과거, 간병인으로 일할 때 그녀는 소박한 옷차림을 했고 밤에는 생계를 위해 길거리에서 음식을 팔았다. 옷 한 벌 사는 것도 신중하게 고민하던 시절이었다.하지만 윤씨 가문에 들어오고 나서부터는 좋은 것만 찾으며 온몸을 치장하는 데 몰두했다.그녀는 이제 부잣집 아내 행세를 하고 싶어 했지만 그 겉모습은 명품으로 치장한 졸부처럼 보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부잣집 부인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외면받는 처지였다.윤하경의 말은 그녀의 아픈 과거를 정확히 겨눴다. 임수연은 차마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윤하경, 도대체 네 눈에는 내가...”임수연이 목소리를 높이려는 순간, 윤하경이 뒤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아빠?”임수연은 순간 입을 다물었고 표정은 순식간에 온화한 미소로 바뀌었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윤하경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임수연은
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헛소리 그만해. 내 앞에서 그 사람 얘기는 꺼내지도 마.”그녀는 앞에 놓인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차분히 말했다.“다른 이유가 있으니까 탐정 연락처나 보내줘.”구체적인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같은 분야에서 일하다 보니 온지우 같은 사람은 비밀을 지키기 어려웠다. 모든 게 명확해지기 전까지 괜히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온지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알겠어.”그는 짧은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그나저나 구지호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넌 한 번도 안 갔다며? 정말 끝낸 거야?”윤하경은 그를 흘겨보며 대답했다.“그만하라고 했잖아.”온지우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참 우습지 않냐? 네가 구지호한테 매달릴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구지호가 너한테 매달리네. 요즘 구지호의 SNS를 보면 온통 감성적이고 오글거리는 글들뿐이야.”그러더니 한 마디를 더 덧붙였다.“아, 그리고 트위터에도 비슷한 글 올리더라.”윤하경은 이미 강현우의 SNS 계정을 차단한 상태라 이런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고 하지만 솔직히 흥미도 없었다.온지우가 말을 이었다.“아, 그리고 사람들이 너랑 구지호가 다시 만날지 두고 내기를 했대.”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휴대폰을 집으며 말했다.“그럼 내 이름으로 2,000만 원 걸어. 절대 안 돌아간다고.”그녀는 덧붙였다.“그리고 탐정 연락처 꼭 보내줘. 난 먼저 가볼게. 요즘 회사 일로 바빠서.”온지우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윤하경이 구지호를 완전히 잊었다고 믿을 수 없었다.카페를 나와 택시를 잡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왜? 무슨 일이야?”윤하경은 차 문을 열며 전화를 받았고 소지연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로웠다.“강한 그룹에서 연락이 왔어. 계약을 취소하겠대.”윤하경은 순간 멍해졌다.“뭐라고? 이유가 뭔데?”“글쎄 전화로는 이유를 안 알려줬어. 계약을 취소하고 위약금은 지급하겠다고 했고 우리가 남은
비서는 윤하경을 힐끔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강현우를 만나러 온 여자들은 많았지만 단 한 명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대부분 비서한테서 막혔고 일부는 아예 끌려 나가는 수모를 겪었다.강현우는 그를 하루를 꼬박 기다린다고 해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윤하경 씨, 강 대표님께서 들어오시랍니다.”윤하경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을 때 강현우는 책상에 앉아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머리 위로 비추는 조명은 그의 윤곽을 한층 부드럽게 돋보이게 했지만 동시에 거리감을 느끼게 했다.카펫 때문에 윤하경의 발걸음 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다.윤하경이 무언가 말하기도 전에 강현우가 고개도 들지 않은 채 말했다.“여기는 무슨 일이야?”‘뻔뻔한 자식, 알면서 왜 묻는 거야.’윤하경은 속으로 씩씩댔지만 겉으론 차분하게 다가갔고 강현우라는 상대는 함부로 부딪힐 수 없었다.“강 대표님, 저희와의 계약을 왜 갑자기 취소하셨나요?”드디어 고개를 든 강현우의 얼굴은 조명 아래에서 한층 더 부드럽게 보였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전문가가 아닌 사람들과 협력하는 건 서로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그랬어.”“네?”윤하경은 깜짝 놀라 자세를 바로잡고 자신 넘치게 대답했다.“우리 회사는 작지만 저와 팀원 모두 전문성을 갖추고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이 점만큼은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그녀의 말에 강현우는 가벼운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에는 분명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설마 회사 얘기가 아니라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그녀는 아침에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얼굴이 뜨거워졌다.그가 말하는 전문가가 아니라는 건 팀이 아니라 자신을 말한 것이 분명했다.윤하경은 입술을 깨물었고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강현우는 그녀의 당황한 얼굴을 놓치지 않았고 비웃음이 가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면서 말했다.“윤하경 씨, 내가 처음 제시했던 조건을 잊었어?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못 하면 협력을 끝내는 게 맞지 않겠어?”그의 직설적인 말에 윤하경은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
강현우는 늘 냉정하고 말이 적었다.윤하경은 잠깐의 대치 끝에 결국 힘없이 손을 들면서 항복했다. 대항할 의지도 체력도 바닥났고 결국 모든 걸 포기하고 체념해 버렸다.그 순간 강현우가 그녀의 턱을 움켜쥐며 차갑게 눈을 마주쳤다.“집중하든가 아니면 나가든가.”윤하경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내가 어쩌다가 이런 재앙을 불러들였지...’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 결국 마음을 다잡고 그를 상대해야 했다.모든 일이 끝난 뒤, 강현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허리에 수건만 둘러매고 그녀를 내려다봤다.조명이 어두워 그의 눈빛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윤하경은 그의 눈빛을 애써 알고 싶지 않았고 그녀는 속으로 날짜를 계산하며 버텨야 할 남은 시간을 떠올렸다.‘아직 20일이나 남았어. 참아야지.’강현우가 욕실로 향하려던 순간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의 크고 맑은 눈이 순간적으로 순진한 표정을 담고 반짝였다.“강 대표님, 협력 건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강현우는 가볍게 손을 빼내며 냉정하게 대답했다.“계속 진행하라고 지시할 거야.”그제야 윤하경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손을 놓았고 다시 침대에 몸을 뉘며 한숨 돌렸다.하지만 그녀는 강현우가 그녀의 손목을 힐끗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뜬 것을 보지 못했다.잠시 후, 강현우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 윤하경은 여전히 침대에 누워 있었다.그는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지만 그녀는 방금 강현우 때문에 너무 피곤한 탓에 여전히 움직일 힘이 없었다.그런데도 강현우의 무심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왜 아직도 여기 있는 거야?”“네?”윤하경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현우 씨는 원래 이렇게 냉정한 사람이에요?”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난 그녀는 대충 샤워하고 나왔다.강현우의 차갑고 냉정한 분위기는 그녀를 여전히 불편하게 만들었지만 오래 있을 이유도 없으니 별로 개의치 않았다.‘어차피 여긴 금방 떠날 거니까.’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강현우는 값비싸 보이는 실크 잠옷을 입고 소파에
한선아는 잠시 얼굴을 굳히더니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작은아버지 댁 딸이 해외에서 돌아왔대. 둘이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떻겠니?”그 말속에 담긴 의도는 너무도 뻔했다. 결혼을 재촉하는 말이었다.윤하경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강현우 같은 완벽한 남자도 이런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다니. 결국 아무리 대단해 보여도 다들 비슷한 처지네.’강현우는 무의식적으로 윤하경이 숨은 쪽을 힐끗 보더니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엄마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한선아는 얼굴을 굳히다가도 이내 한숨을 쉬며 부드럽게 말했다.“현우야, 엄마도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잖니. 진해리는 정말 괜찮은 아가씨야. 해외 유학 박사인 데다 예쁘고 성격도 반듯한 아이야. 네 주변에 그런 이상한 여자들보다는 훨씬 낫잖아. 너 빨리 결혼하면 나도 마음 편히 살 수 있을 텐데.”윤하경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멈췄다.‘그런 이상한 여자 중 하나가 바로 나라는 얘기겠지?’그녀는 더 이상 이 대화를 듣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강현우가 피곤하다며 적당히 핑계를 대고 한선아를 돌려보내는 소리가 들리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윤하경은 커튼 뒤에서 조용히 나왔고 그녀의 얼굴은 담담했지만 발걸음은 빨랐다.그녀가 말없이 밖으로 나갔고 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운전기사를 불렀다.“데려다줘.”그러고는 별다른 말 없이 계단을 올라갔다.윤하경은 차에 올라타 밤바람이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걸 느끼며 조용히 담배를 꺼내 물었다.평소에 담배를 자주 피우지 않았지만 요즘은 손이 자주 갔다.강현우와 얽히게 된 것도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그 후로는 모든 일이 그녀의 통제 밖에서 흘러갔다.그녀는 자신의 몸을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편은 아니었다.하지만 아까 한선아가 했던 말은 계속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고 가슴 한구석이 답답하고 무거운 느낌이었다.집 근처 100미터쯤 남은 지점에서 윤하경은 기사에게 말했다.“여기서 내려주세요.”윤하경은 자신
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담담하게 말했다.“아빠는 구지호랑 윤하연이 아무 관계 없다는 걸 침대 밑에 숨어서 직접 들으셨나 보죠?”윤수철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평소에도 그녀가 독설을 잘 날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특히 날이 선 말이었기에 그의 얼굴은 점점 굳어갔다.그 틈을 타 윤하경은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갔고 방에 들어가자마자 문을 세게 닫아버렸다.잠시 멍하니 서 있던 윤수철은 가슴을 부여잡으며 얼굴을 찡그렸다.“이런 불효녀가 따로 없네. 정말 버릇없는 년!”그 순간 윤하연이 다가와 그의 팔을 부축하며 눈물을 글썽였다.“아빠, 죄송해요. 앞으로는 지호 오빠를 만나지 않을게요. 언니가 오해하지 않도록요.”그녀는 흐느끼며 덧붙였다.“하지만 정말이에요. 전 그런 적 없어요. 언니가 저를 오해한 거예요.”윤수철은 딸의 눈물을 보며 한숨을 쉬더니 부드럽게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아빠는 네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알아. 언니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마.”그리고 단호한 목소리로 덧붙였다.“다음번엔 내가 반드시 네 억울함을 풀어줄게.”1층은 훈훈한 부녀의 장면으로 가득했지만 2층의 윤하경은 정반대였다.방에 들어온 그녀는 가방을 대충 던져놓고 욕실로 향했고 드레스를 벗으려던 그녀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잠시 멈췄다.목과 어깨, 몸 곳곳에 남아 있는 붉은 자국들은 강현우와의 격렬했던 순간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진짜 늑대를 건드렸어. 그것도 아주 위험한 늑대를 말이야.’지금의 강현우는 그녀 눈에 완벽한 포식자였다.더 답답한 건 그녀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이라 도망칠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윤하경은 따뜻한 욕조 물에 몸을 담그며 휴대폰을 들어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프로젝트팀에 말해서 강씨 가문 프로젝트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전해줘. 필요하면 야근도 하라고.”소지연은 약간 놀란 듯 물었다.“강한 그룹 쪽 문제는 해결됐어?”“응.”윤하경은 간단히 대답했다.“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는 만족해하며 커다란 손으로 좌석 아래쪽을 만지자 곧게 세워져 있던 의자가 뒤로 졎혀졌다.윤하경은 갑작스럽게 애매한 자세로 강현우의 품에 안겨졌다.‘강현우는 너무 잘 생겼어.’아래로부터 위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윤하경은 결국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현우 씨는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매너? 있어.”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강현우가 다시 몸을 숙였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자 목젖이 드러났다.윤하경의 코끝에는 남자에게서 나는 공격성을 띤 차가운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다.그녀가 처음으로 강현우와 엮일 때도 강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뭇거리다가 반항하기도 귀찮아 아예 손을 뻗어 강현우의 목을 끌어안고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쳐다봤는데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다.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두 몸뚱이가 이 좁은 공간에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다행히 강현우가 사는 이곳이 단독 별장이고 지하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윤하경은 점점 정신을 차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는데 뼈마디가 부서진 것처럼 시큰거리며 아파 났다.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러나 이때 강현우는 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영성용 원피스 한 벌을 작은 사이즈로 주차장에 가져와.”그녀를 놓아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현우는 벌써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변했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그가 방금 배신당한 것을 보고 그녀는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어쨌든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도운 적이 있으니 말이다.차가 차고를 벗어나자, 윤하경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에게 물었다.“어디 가요?”강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별장으로.”지난번에 자신이 갔던 그 별장을 말한다고 생각한 윤하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져 두 사람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차고에 도착해 차에 시동을 끈 그녀는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힐끗 돌아보았다.강현우는 이목구비가 훤칠했는데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 심지어 옆모습으로도 사춘기 소녀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얼굴이었다.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강현우와 조금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물론 감정적으로만 말이다.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주먹을 살며시 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그에게 충고했다.“현우 씨, 사실 배신 당한 것도 그냥 그래요. 저도 약혼자에게 배신당했잖아요? 사실 조금만 참으면 다 지나갈 수 있어요...”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그 한 마디가 전혀 위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강현우에게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려던 순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날 위로하는 거야?”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고 쳐요.”“헐!”강현우는 차갑게 웃으며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손을 들어 윤하경을 끌어당겼다. 윤하경이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었다.그녀의 이 차는 공간은 좁은 편은 아니었고 그녀의 체중도 가벼웠기에 강현우는 그녀를 쉽게 안아 매우 부끄러운 자세로 자
두 사람은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실랑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진해리와 배지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윤하경은 담뱃재를 털고 나서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구경했다.“무슨 말이야? 내가 강현우랑 결혼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윤하경의 귀에 들려왔다.배지훈은 손을 들어 콧등을 살짝 눌렀다.“진해리, 그만 소란 피워.”“내가 소란을 피운다고?”진해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배지훈, 남자라면 지금 당장 아버지께 나와 결혼하겠다고 해.”윤하경은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말이지?’진해리는 곧 강현우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해리가 배지훈과 함께 강현우를 배신한 거란 말인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맞은 후 강현우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았던 그녀는 사실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시동을 거는 것은 너무 티가 나니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진해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배지훈, 꼭 이렇게 매몰차게 굴어야 해?”진해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배지훈은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윤하경조차 그 무력감과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고 나서야 진해리에게 말했다.“진해리, 그만해,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 강현우는 좋은 사람이야. 너 강현우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거야.”진해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빛으로 배지훈을 바라보았다.“배지훈, 너를 만난 걸 정말 후회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밟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배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버려서야 바닥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