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경은 핸드폰을 들어 소지연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경아, 설마 구지호랑 끝까지 간 거야? 첫 경험은 결혼할 때까지 남겨둔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누가 구지호라고 했어? 다른 남자가 없을 것 같아 보여?]메시지를 보내자마자 소지연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진짜야? 윤하경, 대단한데?” 소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터져 나왔다. “그 구지호 같은 쓰레기를 네가 차버렸다니! 역시 내 친구!”누가 봐도 구지호가 형편없는 남자라는 건 다 알고 있었다. 윤하경도 예전에 그에게 푹 빠졌지만 이제 와 돌이켜 보면 그를 믿고 사랑했던 자신이 얼마나 우스웠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그래. 내가 구지호를 찼어. 그렇게 소문내줘.” 윤하경은 덤덤하게 대답했다. 구지호는 체면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사람이었기에 윤하경은 그를 망신 주고 싶었다.“근데 그 남자는 누구야?” 윤하경은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답했다. “옷 갈아입고 회사에서 얘기하자.” “알았어. 그런데 오늘 중요한 고객 만나는 날이니까 빨리 와.”전화를 끊고 호텔을 나선 윤하경은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젯밤, 그녀는 차를 가져오지 않고 택시를 타고 왔었다. 시계를 보니 이 시간에 택시를 잡기에는 시간이 빠듯했다.난감해하며 고민하던 순간, 익숙한 검은색 차 한 대가 그녀 앞에 멈췄다. 천천히 내려가는 창문 너머로 강현우가 보였고 그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차 안 가져왔어?” 윤하경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말했다. “그럼 택시를 부르면 되겠네. 난 먼저 간다. 잘 있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몰고 떠났다.“뭐야, 진짜?” 윤하경은 멀어져가는 차를 보며 혀를 찼다. 그리고 발치에 있던 돌멩이를 발로 세게 차며 혼잣말했다. “남자는 다 똑같아. 할 일 끝나면 모른 척.”윤하경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예상치 못했던 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구지호와 윤하연이었다
구지호는 쓰러질 듯한 윤하연을 서둘러 부축했다. 윤하경은 꼴도 보기 싫어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려 거실을 빠져나오려는 순간 윤수철이 소리를 질렀다. “윤하경! 당장 돌아와! 그 남자는 대체 누구야?!”‘역시. 우리 아버지는 늘 내 잘못만 본다니까.’윤하경은 쓴웃음을 지었다. 구지호와 윤하연이 서로 껴안고 있는 걸 직접 목격했다고 말했을 땐 마치 귀머거리가 된 사람처럼 들은 척도 하지 않더니. 하지만 윤하경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5년 전, 계모와 윤하연이 이 집에 들어온 후에 이곳은 그녀에게 더 이상 ‘집’이라는 존재가 아니었다. 다만 엄마의 물건들이 이 사람들 손에서 망가질까 봐 참으며 머물고 있었을 뿐이었다.회사의 문을 열고 들어선 윤하경은 마음을 다잡았다. 그녀가 책상에 서류를 올려놓을 때쯤, 소지연이 다가왔다. “하경아, 상대 회사 사람들이 왔어. 게다가 대표님이 직접! 우리 이번 프로젝트 진짜 중요한가 봐.” 소지연은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특히 네가 직접 만나길 원한대. 잘해봐! 내가 다음 달 유럽 여행 갈 수 있을지는 네 손에 달렸어!”윤하경은 자신감 있게 회의실로 들어갔지만 문을 열고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을 본 순간, 잠시 발이 멈칫했다. 그곳에 강현우가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차가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윤 대표님, 소문으로만 듣던 분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마치 어젯밤의 일이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냉정한 태도였다.윤하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이내 차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강 대표님께서 직접 와주셔서 정말 영광입니다.”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그녀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프로젝트는 ‘자연’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테마를 통해 귀사의 제품이 경쟁사와 차별화될 수 있는 요소를 부각할 계획입니다.”윤하경은 프레젠테이션에 집중했다. 일에 몰두한 그녀의 표정은 더욱 진지하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 화려한 이목구비에 눈가의 붉은 점은 그녀를 더욱 매혹적으로
택시 안에서 윤하경은 거울을 꺼내 립스틱을 덧발랐다. 그러자 창백한 얼굴이 조금은 생기를 되찾았다. 30분쯤 지나, 택시는 화려한 불빛으로 빛나는 클럽 ‘옥타곤’ 앞에 멈췄다. 하이힐을 신고 안으로 룸에 들어서자 안에는 남녀가 뒤섞여 노래를 부르고 술을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방 안 공기는 담배 연기, 술 냄새, 그리고 강한 향수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찌를 정도였다. 윤하경은 손으로 코를 가리며 가볍게 기침하고 안쪽을 둘러보며 온지우를 찾았다.하지만 온지우 대신, 그녀가 발견한 건 소파에 비틀거리며 누워 술을 마시고 있는 구지호였다. 그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잔을 연달아 들이켰다. 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며 속으로 욕했다. ‘재수 없게.’온지우가 구지호와 짜고 자신을 여기로 불렀다는 게 뻔히 보였다. 기분이 상한 그녀는 돌아서서 나가려 했지만 구지호가 이미 그녀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구지호의 흐릿하던 눈빛이 윤하경을 보자마자 선명해졌고 그는 휘청거리며 다가오더니 윤하경의 손을 붙잡았다. “하경아, 가지 마. 우리 얘기 좀 하자.”“얘기할 게 없어.” 윤하경은 차갑게 대꾸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것만으로도 불쾌 그녀는 그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구지호는 손을 놓지 않고 애원했다. “하경아, 내 말 좀 들어봐. 나랑 윤하연은 그런 사이가 아니야. 걔가 먼저 나한테 접근한 거야.”“그만해.” 윤하경은 그의 말을 끊고 쏘아붙였다. “책임을 여자한테 떠넘기는 게 남자라고 생각해? 윤하연이 잘못했다면 너도 똑같아. 둘 다 한심하다고.”구지호는 그녀의 날 선 말에 입을 다물었다. 그는 평생 남에게 비난받아 본 적이 없었고 게다가 늘 자신을 쫓아다니던 윤하경에게 이런 말을 듣는 건 처음이었다. 구지호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내가 이렇게 사과했으면 됐잖아. 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정말 약혼을 깨겠다는 거야?” 그는 화가 난 듯 말을 이었다. “하경아, 네가 어떻게 나한테 매달렸는지 잊었어? 네가 그렇게 애원해서 내가
“죄송합니다. 두 분 대화를 엿들은 건 아니에요.” 강현우는 코끝을 한번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윤하경과 구지호 사이를 지나치려 했지만 윤하경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녀는 강현우의 팔을 당기며 구지호를 향해 말했다. “어제 내가 누구랑 있었는지 알고 싶다며? 바로 이 사람이야.”윤하경의 말에 구지호의 창백하던 얼굴이 순간 굳어졌지만 이내 흘깃 웃으며 강현우를 향해 말했다. “강 대표님, 죄송합니다. 하경이가 잠시 감정적으로 행동한 것 같네요. 먼저 들어가서 술 한잔하시죠.”강현우는 상류층에서도 가장 손대기 어려운 인물로 통했다. 그의 집안은 재력과 권력 모두 독보적이었고 젊은 나이에 이미 가문 기업의 실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농담을 건네는 사람조차 거의 없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고는 말없이 걸음을 옮겼고 윤하경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잠시 후회했다.‘어젯밤 함께 잤는데 이 작은 부탁도 못 들어주나?’그때 구지호가 말했다. “하경아, 네가 나를 화나게 하고 싶어 하는 건 알겠어. 하지만 강현우를 끌어들이는 건 위험해.”그 말을 들은 강현우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구지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서, 구 대표님의 말은 제가 무서운 사람이라는 뜻인가요?”구지호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 아니요. 그런 뜻은 아닙니다.”그가 어색하게 변명을 늘어놓으려는 순간, 강현우는 윤하경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 끝났으니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윤하경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지금 바로 갈까요?”구지호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강현우는 평소 누군가의 일에 끼어드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런 그가 윤하경을 집에 데려다주겠다고 하다니.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구지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졌다. 결국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옆 벽에 주먹을 내리쳤다.강현우는 블랙 마이
소지연은 가볍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뭐 어때? 안 되면 말지. 우리한테 고객이 그 사람 하나뿐이 아니잖아. 천천히 하면 돼.”윤하경은 한숨을 내쉬며 뒷좌석에 몸을 깊숙이 기대었다. 겉으로는 언제나 강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가끔 모든 게 버겁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엄마가 세상을 떠난 이후, 그녀는 자신을 철옹성처럼 단단히 감싸며 살아왔다. 조금이라도 약해 보이면 누군가 틈을 타 자신을 짓밟아 버릴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다.그녀는 언제나 전투태세를 갖춘 닭처럼, 긴장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고 평소라면 윤수철은 벌써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하지만 오늘 윤수철은 소파에 단정히 앉아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그를 못 본 척 지나치려 했지만 그의 목소리가 발걸음을 붙잡았다.“어디 갔다 온 거야? 왜 이렇게 늦었어?”윤하경은 돌아서며 쏘아붙였다.“갑자기 왜 저한테 관심을 가지세요?”엄마가 살아있던 시절, 윤수철은 괜찮은 아버지였지만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계모와 윤하연이 이 집에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부녀 관계는 하루가 다르게 악화하였고 지금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되어버렸다.윤수철은 잠시 말문이 막힌 듯했지만 평소와 달리 화를 내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하경아, 여기 앉아봐. 할 얘기가 있어.”그의 부드러운 말투는 오랜만이라 더 의심스러웠지만 무슨 말을 꺼낼지 궁금해 얌전히 소파에 앉았다.윤수철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본론을 꺼냈다.“하경아, 우리 가문이 여기까지 오는데 쉽지 않았어. 그런데 말이다... 네 엄마가 남긴 물건 좀 나한테 줄 수 없겠니?”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단단히 굳어졌다.“그건 절대 안 돼요.” 그녀는 단호하게 외쳤다.“그건 엄마가 저에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드릴 수 없어요!”엄마가 남긴 건 열쇠 하나였다. 하지만 그 열쇠는 그녀가 스물네 살이 되기 전까지 열지 말라는 유언과 함께, 엄마의 가장 소중한 물건을 보관한 상자의
오늘은 윤하경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3년 전부터 윤수철은 이날을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주미나는 매년 이날을 기억하며 윤하경과 함께 산소를 찾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올해는 윤하경 자신조차도 그날을 잊고 있었다.윤하경은 전화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에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하경아, 오늘 오후에 같이 네 엄마 산소에 가자.”주미나는 부드럽게 말했고 윤하경은 한참 고민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네, 어머님. 같이 가요.”결국, 그녀는 주미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8시였다. 그녀는 이른 시간이지만 회사를 들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다.회사의 상황은 최근 들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온지우가 어제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의 집안에서 맡고 있던 사업 일부를 윤하경의 회사에 넘겼다.온지우는 농담 반, 사과 반으로 메시지를 남겼다.[하경아,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구지호가 울면서 부탁하길래 도와준 거야. 이번 건 내가 우리 아버지의 파트너들한테서 어렵게 따낸 거야. 나중에 내가 회사를 맡게 되면 광고나 기획은 전부 너한테 맡길게.]메시지에 계약서 링크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우리 회사 직원이 곧 너희와 협의하러 갈 거야. 걱정 말고 편히 있어.]윤하경은 메시지를 읽으며 약간 고개를 젖혔다. 온지우에게 화를 내는 것도 어쩐지 의미 없게 느껴져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온지우와 윤하경은 어릴 적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다녔고 그녀가 구지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온지우가 두 사람을 다시 이어보려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사랑할 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만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다.온지우 역시 그녀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오늘 이렇게 직접 사과하며 사업을 제안했을 것이다.온지우가 준 사업은
휴대폰 화면에는 강현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시간 없어.]짧은 두 글자는 마치 그녀와의 대화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차에 타자마자 주미나는 밝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하경아, 조금 있다가 지호랑 데이트라도 해봐.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잖아.”그녀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구지호를 흘끗 쳐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다음에 하죠.”구지호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비록 그녀가 완전히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때 자신을 향했던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전의 윤하경이라면 감히 이렇게 선을 긋지 않았을 텐데.그는 복잡한 표정을 숨긴 채 차를 몰아 구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윤하경은 차에서 내리며 주미나에게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구지호는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바람피운 주제에. 이미 끝난 사람인데 내가 왜 다시 신경 써야 하지?’그녀는 단호히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떠났다.차 안에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온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고 그가 있는 곳의 소음이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어, 하경아! 이제 화 푼 거야?”온지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윤하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건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지.”“뭔데? 말만 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온지우는 이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강현우가 오늘 밤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줄래?”윤하경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온지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너 설마 강현우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지? 그 남자는 좀 무서운 사람이야. 며칠 전에 어떤 여자가 강현우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알몸으로 호텔 밖에 던져졌다는 얘기도 들었어.”윤하경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태연한 목소리로 말
윤하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러자 추성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어이구, 네가 구지호를 차버렸다던데 사실이야?”윤하경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성운 씨,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셨죠?”사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수다를 떨려고 온 게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바로 강현우와의 계약을 따내는 것이다.수억 원 규모의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 운영이 한결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장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게 된다.온지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얼른 끼어들며 분위기를 풀었다.“성운 씨, 아까 드시기로 한 술이 아직 석 잔 남아 있는 거 기억하시죠? 제가 직접 따라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온지우는 추성운을 다른 자리로 끌고 가며 윤하경에게 살짝 윙크를 날렸다. 윤하경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잔을 손에 들고 강현우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강현우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 저 좀 불편한데 여기 좀 눌러주세요.”그 여자는 말하면서도 경계 어린 눈길로 윤하경을 힐끔거리더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처럼 불안해하며 윤하경을 째려봤다. 이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나지막이 웃으며 물었다.“그래? 어디가 불편한데? 여기? 아니면 여기?”그는 말하며 그 여자의 허리 주위를 천천히 어루만졌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윤하경을 쳐다보지 않았다.강현우의 태도는 윤하경에게 굴욕을 주려는 듯 보였고 여자는 그의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숨소리가 가빠졌다.“현우 씨, 정말 나쁜 남자야.”윤하경은 입가를 살짝 씰룩이며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도 꽤 많은 상황을 겪어 봤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여전히 낯부끄럽게 느껴졌다.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윤하경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저기, 강 회장님, 사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계약 건으로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지금
“쳇, 누가 알아.”“내 생각엔 강현우 쪽일 듯.”“그럼 난 오건우에 건다. 2천만. 뱅커는 누구?”“내가 할게!”그렇게 불과 몇 분 만에 현장에서 즉석 내기가 시작됐다.윤하경은 흘깃 사람들을 둘러보다가 다시 경기장으로 시선을 돌렸다.두 남자의 승부는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었다. 처음엔 그저 장난처럼 시작된 말타기였지만 지금은 마치 서로 절대 지지 않겠다는 오기처럼 느껴졌다.심지어 윤하경은 오건우의 말이 강현우 쪽으로 일부러 들이받으려는 걸 목격했다.그 순간, 심장이 목까지 뛰어올랐다.하지만 다행히도, 강현우는 노련하게 방향을 틀며 매끄럽게 피했고 오히려 더 빠르게 가속해 결승선을 향해 달려갔다.속도는 거의 비슷했다. 강현우가 간신히 반 마신 정도 앞서고 있는 상황이고 결승선까진 이제 몇십 미터 남짓했다.윤하경의 손은 어느새 앞의 울타리를 꽉 붙잡고 있었다.“10, 9, 8... 3, 2, 1!”“강현우가 이겼다!”“내가 이겼어!”강현우에게 걸었던 사람들이 소리 지르며 환호했다.모두가 들떠 있었지만 윤하경은 오히려 그 순간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았다.강현우가 이기든 지든, 어차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그녀가 잠시 멍하니 있는 사이 강현우와 오건우가 말을 몰고 자신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오건우가 먼저 말에서 내려 웃으며 말했다.“생각보다 강 대표님, 말도 잘 타시네요. 사업뿐만 아니라 말솜씨도 대단하신데요?”강현우도 말에서 내리며 헬멧을 벗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지만 여전히 표정은 여유로웠다.“오 대표님도 만만치 않으셨죠.”윤하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강현우에게 무표정한 얼굴로 축하한다고 짧게 말했다.그리고 시선을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오 대표님, 오늘 계약 얘기하신다더니... 서명은 하실 건가요?”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하지만 오건우는 그녀의 바람을 무시하듯 시계를 보며 말했다.“마침 점심시간이네요. 밥 먹으면서 얘기하죠.”당장 거절하고 싶었지만 그는 엄연히
오건우의 말은 의도가 너무도 분명했다. 그러자 강현우는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웃었다.“왜요, 오 대표님도 한번 해보고 싶으신가요?”순간 윤하경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어젯밤? 아가씨? 그럼 어젯밤, 강현우가 다른 여자랑 있었다는 말인가?’숨이 턱 막혔지만 곧 윤하경은 정신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와 자신은 명확하게 서로 필요해서 얽힌 사이였을 뿐인데 자기가 이런 감정을 느낄 자격이 있긴 한가?윤하경은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며 애써 웃음을 되찾았지만 그 미소는 더 이상 진심이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그녀는 태연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오건우를 바라봤다.“두 분 다 이렇게 기분이 좋으신데... 제가 구경 좀 하면 안 될까요? 한번 붙어보시는 건 어때요?”오건우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좋죠. 강 대표님은 어떠신가요?”강현우도 짧게 웃었지만 그 눈빛은 싸늘하게 오건우를 꿰뚫고 있었다.“오 대표님의 제안이라면 응하지 않을 수 없죠.”두 남자의 눈빛 사이에는 확실히 보이지 않는 불꽃이 튀었다.그 기운을 느낀 윤하경은 괜히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그럼 말을 고르시죠. 하경 씨도 같이 가시죠?”오건우가 그녀를 돌아보며 말했다.“하경 씨의 안목이 남다르시던데 이번에도 도와주시면 제가 이기는 건 시간문제 아닐까요?”윤하경은 고개를 저었다.“그냥 운 좋게 한 번 맞힌 거예요. 이번엔 패스하겠습니다. 두 분 먼저 가세요. 전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가볍게 입꼬리를 올린 뒤, 그녀는 조용히 돌아섰다.강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고 그녀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묵묵히 서 있었다.그리고 고개를 돌렸을 때, 오건우가 익살스러운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강현우는 눈빛이 차가워지며 피식 웃었다.“가시죠, 오 대표님.”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발을 옮겼다.윤하경은 혼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애초에 강현우와 어떤 미래가 있을 거란 기대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도, 어젯밤 그가 다른 여자와 있었다는 걸 직접 들으니 가슴이 뻐
이번 경기는 원래 윤하경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다.그런데 오건우가 괜한 말을 꺼낸 바람에, 본인도 모르게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그녀의 눈동자는 경마장 트랙 위에 고정됐고 자신이 고른 말이 정말로 1등으로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 스멀스멀 올라왔다.‘오건우란 사람, 인성은 글렀을지 몰라도 적어도 대놓고 한 말을 뒤집을 만큼 치졸하진 않겠지. 적어도 체면은 차릴 사람이니까.’긴장 탓인지,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그 모습을 흘끗 본 오건우가 입을 열었다.“긴장하신 겁니까?”그 말에 윤하경은 깜짝 놀라 손을 풀며 무심한 척 말했다.“아니요, 전혀요.”오건우는 별다른 말 없이 웃음을 흘리며 담배를 꺼내 피웠다.수억 원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도 그의 표정은 한 치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기만 했다.윤하경은 자신이 괜히 예민했나 싶어 어깨를 살짝 풀고 조심스럽게 물었다.“그런데 말이죠, 오 대표님. 왜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거예요?”오건우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그녀를 바라봤다. 눈가에 스치는 미소 덕분에, 순간 분위기가 조금 부드러워진 듯도 했다.“진짜 이유를 듣고 싶어요 아니면 대충...?”윤하경은 이런 말 돌리는 화법을 제일 싫어했다.“말씀 안 하셔도 괜찮아요.”그녀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경기는 이미 막바지에 접어들었다.그저 숫자만 보고 고른 말이, 놀랍게도 선두로 치고 나가기 시작했다.기대는커녕 아무런 감정도 없던 윤하경조차 눈이 커졌다.“이거 보니까 오늘 계약은 꼭 하셔야겠네요?”농담 섞인 말이었지만 그녀의 눈빛엔 진심도 있었다. 그리고 정말, 08번 말이 제일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다. 빨간 리본을 가르는 순간, 윤하경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겉으론 무표정하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그러고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계약서를 꺼내 오건우에게 내밀었다.“오 대표님, 계약서입니다.”그녀의 입가엔 은근한 승리감이 묻어 있었다. 오건우는 피식 웃더니 계약서를 흘깃 보고는 벌떡 일어나 걸어 나갔다
그곳은 고급 사설 클럽, ‘빌리’였다.휴식과 오락이 결합한 종합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강현우의 ‘헤븐’이 회색 지대라면 이곳은 세상에 대놓고 고급스러움을 팔고 있었다.승마, 사격, 골프 등 없는 게 없고 규모도 엄청났다. 여기서 소비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돈 많고 배경 있는 사람들뿐이었다.윤하경은 차를 세우고 막 내리려던 찰나, 핸드폰에 ‘돈줄’ 이 보낸 문자가 도착했다.[어디야?]이 밝은 대낮에 강현우가 자길 찾다니. 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 결국 솔직하게 답장을 보냈다.[빌리에 있어요. 오건우 대표가 계약 이야기하자고 불러서.]문자를 보낸 뒤로 한참이 지나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그녀는 핸드폰을 넣고 안으로 들어서려던 순간,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고객님, 예약하셨나요?”“아니요. 오건우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직원은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내를 시작했다.좌우로 복잡하게 꺾인 복도를 지나, 조용한 프라이빗 룸 앞에 멈췄다.윤하경이 안으로 들어서자, 그곳엔 오건우가 VIP석에 앉아 트랙 너머 경마를 바라보고 있었다.차가운 분위기의 남자는 손에 담배를 들고 있었고 어제 감싸고 있던 붕대는 이미 사라졌으며 대신 이마에는 옅은 멍 자국만 남아 있었다.그걸 본 윤하경은 어이가 없었다. 설마 어제 일부러 다친 척하고 자기한테 덮어씌우려던 거였던 건가?입술을 한 번 꾹 눌러 누르고 나서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오 대표님.”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더니 반갑지도 무뚝뚝하지도 않게 말했다.“하경 씨, 또 보네요.” 그는 옆자리를 가리켰다.“앉으시죠.”윤하경은 잠시 고민하다가 조용히 다가갔다.하지만 오건우가 가리킨 자리에는 앉지 않고 중간에 일부러 한 자리를 비워둔 채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왠지 모르게, 이 남자에게서 느껴지는 위험한 기운이 싫었다. 첫 만남도, 두 번째도 기분 나빴고 오늘 역시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오건우는 그녀가 그렇게 거리를 두자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비웃듯 말했다.“설마 제가
민하경은 고개를 들어 강현우를 바라보았고 눈엔 눈물까지 맺혀 있었으며 목소리는 애처로웠다.“저... 정말 몰라요. 강 대표님을 진심으로 좋아했어요. 이 반지도 그냥 예뻐서 샀을 뿐이에요. 그런 용도인지도 몰랐어요...”강현우는 반지를 바라보던 시선을 천천히 그녀 얼굴로 옮겼다. 그러고는 날카롭게 웃으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그래? 뭐, 굳이 말하기 싫다면... 괜찮아. 말하게 만드는 방법은 많거든.”그는 손뼉을 칠 듯 손을 들었다.하지만 그 순간, 민하경이 바닥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죽어버려!”그녀는 이성을 잃은 듯 그대로 강현우를 향해 달려들었고 하지만 그 순간 강현우는 한 발 옆으로 피하더니 힘 있게 그녀의 배를 걷어찼다.퍽!민하경은 허공을 날아가듯 그대로 튕겨져 나가 마치 망가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졌다.강현우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들어와.”그가 명령하자, 곧 우지원이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바닥에 피를 토하며 쓰러진 민하경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형님.”강현우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말했다.“제대로 혼내 줘. 누가 보낸 건지 입을 안 열면...”그는 말을 잠시 멈췄다가, 낮고 무겁게 덧붙였다.“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만들어.”우지원은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년 동안 강현우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에게 그 정도 암시는 충분했다.“네, 알겠습니다.”그는 고개를 끄덕이곤 사람들을 불러 민하경을 끌어냈다.“강현우... 너 같은 인간, 절대 가만 안 둬!”민하경은 이를 갈며 소리쳤고 우지원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입 막아.”그 말이 떨어지자, 방 안은 완전히 조용해졌다.그제야 우지원은 강현우의 손에 들린 은색 반지를 힐끗 보며 혀를 찼다.“형님, 원수 진 사람 참 많으신 거 아시죠? 오늘은 운 좋게 살아남으신 겁니다. 전 오늘 밤이 형님의 로맨스인 줄 알았거든요.”그는 멋쩍게 웃었지만 강현우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그 웃음은
강현우는 시가를 깊게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뿜고 무심한 눈빛으로 오건우를 쓱 바라봤다.“오 대표님이 원하신다면 협력 못 할 이유도 없죠.”오건우처럼 상황 파악에 능한 사람이라면 그 한마디에 담긴 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는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항상 원칙만 따진다고 들었는데 강 대표님도 결국 뒤로 길을 열어주시는 날이 있긴 하네요.”“뭐, 말씀만 해주신다면야, 저는 당연히 환영이죠.”서로 말이 많을 필요 없는 사이라 강현우는 잔을 살짝 들며 웃었다.“그럼 미리 축하하죠.”오건우도 미소를 지으며 잔을 맞들었다.“나중에 윤하경 씨가 알게 되면 강 대표님이 본인을 위해 얼마나 신경 썼는지 알고 기뻐하겠네요.”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눈빛엔 알 수 없는 어둠이 스쳐 갔다.그 깊은 시선은 강현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강현우는 가만히 술을 한 모금 마시며 차 안에서 봤던 윤하경의 얼굴을 떠올라 조용히 말했다.“그 일에 내가 관련됐다는 건, 굳이 그녀가 알 필요 없어요.”오건우는 눈을 좁히며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봤다.“강 대표님, 꽤 감성적인 면도 있으시군요.”강현우는 시계를 슬쩍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방에 누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나머지는 다음에 얘기하죠.”오건우도 일어서며 짧게 응했다. 그리고 강현우가 등을 돌리는 순간, 슬쩍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최상층 스위트 룸.강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미간이 살짝 들렸다.방 안은 은은한 조명으로 가득했고 분위기부터가 유난히 짙었다.그때, 욕실 문 사이로 얼굴을 내민 민하경이 수줍은 눈빛으로 그를 불렀다.“강 대표님...”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올리며 웃더니 대답은 하지 않고 다만 손가락으로 조용히 손짓했다. “이리 와.”민하경은 잠시 머뭇거리다 욕실 문 뒤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는 검은색 레이스 슬립 차림이었고 키 큰 몸매에 딱 붙는 그 옷은 절묘하게 선을 넘지 않았다.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민하경은 조용히 다가와
강현우는 그 말을 듣고 길게 찢어진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그래요?”그는 오건우 맞은편에 앉으며 눈길을 들었다.“도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오 대표님의 눈에 들었는지 궁금해지는데요?”말투는 가볍고 무심했지만 손에 든 잔을 천천히 들어 한 모금 마시는 동작엔 은근한 긴장이 깃들어 있었다. 그는 기대듯 소파에 몸을 기댄 채, 짧은 시선으로 오건우를 훑어보자 오건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말이 나온 김에 얘기지만 그 사람... 강 대표도 잘 아는 사람이에요.”그 말에 강현우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그러나 겉으론 아무렇지 않게 받아쳤다.“그래요? 그럼 더 궁금해지네요.”그는 왼손 엄지에 낀 반지를 천천히 굴리며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오건우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아직 무슨 관계도 정해진 건 아니니까요. 공연히 얘기했다가 그 사람 이름에 누가 될 수도 있잖아요. 강 대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오 대표님, 생각 참 깊으시네요.”강현우는 눈을 좁히며 말을 받아쳤다.“그래서 오늘 이렇게 오신 건...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오건우는 그 말에 여유롭게 등을 소파에 기댔다.“들으니까 강 대표가 요즘 유성구 재개발 프로젝트에 관심이 많다던데... 혹시 협력할 생각은 없습니까? 우리 둘이 경쟁자가 되면 서로에게 손해일 수도 있으니까요.”강현우의 눈에 살짝 농담 섞인 기색이 비쳤다.“제 기억이 맞다면 재개발 사업은 오 대표님의 전문 분야는 아닌 걸로 아는데요? 갑자기 관심이 생긴 이유라도?”“돈이 되는 일이라면 관심 가져야죠. 그렇지 않습니까?”오건우는 그를 향해 고요한 눈빛을 던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혔고 그 안에서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강현우는 코웃음을 흘리고 아무 말 없이 손을 뻗어 시가 한 개를 집었다. 그러자 센스 있는 여자가 곧장 다가와 시가를 잘라주고 능숙하게 불까지 붙여주었다.그는 그녀를 힐끗 바라보며 눈썹을 한 번 들었다.그녀는 수줍게 고개를 숙였지만 입술을 살짝 깨물며 다시 조심
윤하경은 자료를 검토하던 중이었다.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자, 마주한 건 눈가가 벌겋게 부어오른 윤수철이었다. 밤새 잠을 못 자서 그런 건지, 분노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그녀는 천천히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덮고 물었다.“무슨 일로 오셨어요?”“누가 너더러 경찰에 신고하랬어?”윤수철은 침착하지 못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내가 묻잖아. 누가 너보고 멋대로 신고하래?”윤하경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가볍게 웃었다.“제가 했어요.”“회사의 재무랑 인사를 제가 관리하고 있는데 장부에 이상이 있으면 당연히 신고해야죠. 뭐가 문제죠?”윤수철이 씩씩거리는 사이, 그녀는 말끔한 표정 그대로 침착하게 받아쳤다.그 태도에 윤수철은 더 화가 났고 손을 부르르 떨며 그녀를 가리켰다.“넌 지금 이 회사에 누가 주인인지 잊은 거야?”윤하경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당연히 기억하죠. 아버지요.”그러고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하지만 이 회사를 위태롭게 만든 것도, 거의 파산 직전까지 끌고 간 것도 아버지셨죠. 이 회사가 아버지 혼자만의 것도 아니잖아요.”“아직도 임수연이랑 윤하연 두 사람한테 미련이 있으세요?”윤수철이 이렇게까지 급하게 찾아온 걸 보면 분명 그들 때문일 것이다.전에 회계 내역을 조사하려 했을 때도 막아섰던 윤수철의 태도를 떠올리면 그가 이미 뭔가 알고 있었다는 건 명백했지만 그때는 그냥 눈 감고 넘기려 했던 거였다.윤하경은 어이가 없었고 두 사람의 말다툼은 점점 고조되자 사무실 밖 직원들까지 안을 힐끔힐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그러자 윤수철이 홱 돌아서며 유리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다 꺼져! 볼 일 없는 사람 다 나가!”직원들은 바람처럼 흩어졌다고 누구 하나 눈 마주치지 않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윤하경은 다시 자리에 앉아, 무표정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윤수철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고소, 취하해.”윤하경은 손바닥을 펼치며 어깨를 으쓱였다.“죄송하지만 형법에 저촉되는 건
“진짜 미친놈이야.”병실 문이 닫히는 순간, 윤하경은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고 우슬기가 다가오며 물었다.“대표님, 어땠어요?”“어떻긴. 그냥 돌아가자.”윤하경은 짧게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오건우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뒤틀린 조건을 내걸 줄은 몰랐다. 쉽지 않은 상대인 줄은 알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했다.우슬기는 그래도 병실까지 들어갔으니 뭔가 실마리라도 잡았을 줄 알았는데 전혀 수확이 없다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윤하경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굳어 있는 걸 보고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조용히 따라나섰다.병실 안.오건우는 병실 문 쪽을 바라보다가, 아주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고 그 눈빛은 평온한 듯하면서도 속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그때, 아까 문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이 다시 들어왔다.“대표님, 윤하경 씨 일행은 떠났습니다.”그는 말을 마친 뒤 살짝 눈치를 보며 망설였고 이내 고개를 숙였다.오건우는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나서 조용히 말했다.“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경호원은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조심스럽게 말했다.“윤하경 씨가 나가면서... 대표님한테 ‘미친놈’이라고 중얼거린 것 같습니다.”“미친놈?”오건우는 그 말을 따라 한 뒤, 잠시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젖히며 흥미롭다는 듯 미소 지었다.“흥... 재밌네.”그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경호원은 속으로 욕을 먹고도 이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다니 자기 보스지만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퇴원 수속 해. 그리고 한빛 그룹 관련 자료 정리해서 가져와. 인사 변동 사항까지 전부.”“알겠습니다.”경호원이 고개를 숙이고 병실을 나섰다.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우슬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윤 대표님, 그럼 오 대표님 쪽은... 정말 가능성이 없는 건가요?”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다물며 앞을 똑바로 응시했다.“몰라. 일단 회사에 돌아가면 오산 그룹 자료 다시 정리해 줘. 혹시라도 틈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리고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