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 화면에는 강현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시간 없어.]짧은 두 글자는 마치 그녀와의 대화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차에 타자마자 주미나는 밝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하경아, 조금 있다가 지호랑 데이트라도 해봐.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잖아.”그녀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구지호를 흘끗 쳐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다음에 하죠.”구지호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비록 그녀가 완전히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때 자신을 향했던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전의 윤하경이라면 감히 이렇게 선을 긋지 않았을 텐데.그는 복잡한 표정을 숨긴 채 차를 몰아 구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윤하경은 차에서 내리며 주미나에게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구지호는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바람피운 주제에. 이미 끝난 사람인데 내가 왜 다시 신경 써야 하지?’그녀는 단호히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떠났다.차 안에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온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고 그가 있는 곳의 소음이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어, 하경아! 이제 화 푼 거야?”온지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윤하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건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지.”“뭔데? 말만 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온지우는 이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강현우가 오늘 밤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줄래?”윤하경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온지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너 설마 강현우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지? 그 남자는 좀 무서운 사람이야. 며칠 전에 어떤 여자가 강현우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알몸으로 호텔 밖에 던져졌다는 얘기도 들었어.”윤하경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태연한 목소리로 말
윤하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러자 추성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어이구, 네가 구지호를 차버렸다던데 사실이야?”윤하경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성운 씨,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셨죠?”사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수다를 떨려고 온 게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바로 강현우와의 계약을 따내는 것이다.수억 원 규모의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 운영이 한결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장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게 된다.온지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얼른 끼어들며 분위기를 풀었다.“성운 씨, 아까 드시기로 한 술이 아직 석 잔 남아 있는 거 기억하시죠? 제가 직접 따라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온지우는 추성운을 다른 자리로 끌고 가며 윤하경에게 살짝 윙크를 날렸다. 윤하경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잔을 손에 들고 강현우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강현우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 저 좀 불편한데 여기 좀 눌러주세요.”그 여자는 말하면서도 경계 어린 눈길로 윤하경을 힐끔거리더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처럼 불안해하며 윤하경을 째려봤다. 이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나지막이 웃으며 물었다.“그래? 어디가 불편한데? 여기? 아니면 여기?”그는 말하며 그 여자의 허리 주위를 천천히 어루만졌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윤하경을 쳐다보지 않았다.강현우의 태도는 윤하경에게 굴욕을 주려는 듯 보였고 여자는 그의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숨소리가 가빠졌다.“현우 씨, 정말 나쁜 남자야.”윤하경은 입가를 살짝 씰룩이며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도 꽤 많은 상황을 겪어 봤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여전히 낯부끄럽게 느껴졌다.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윤하경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저기, 강 회장님, 사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계약 건으로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지금
윤하경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금세 파티장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이전에 구지호의 기분을 신경 쓰느라 이들과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술잔을 드는 모습을 처음 보며 놀랐고 농담을 던졌다.“하경 씨, 오늘 정말 특별한 날인가 보네요. 이렇게 큰 판을 깔아주시다니요.”윤하경은 대꾸하기도 귀찮아했다.‘몇억 원짜리 계약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그녀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띠고 강현우를 바라봤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이에 윤하경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큰 잔의 술을 급하게 마시다 보니 위스키가 입가에서부터 턱,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의 쇄골과 드레스 속으로 스며들었다.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고 아무도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볼 때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몇 잔의 술이 넘어가며 윤하경의 얼굴엔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여자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윤하경은 멈추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잔씩 더 마셨다. 몇 잔을 더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강현우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순간 윤하경은 동작을 멈췄다.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람은 바로 구지호였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윤하경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오늘 밤 계약하러 간다더니 이런 데 와서 술 마시고 있었어? 윤하경, 넌 자존심도 없어?”술기운에 흐릿했던 윤하경의 눈빛은 단숨에 차갑게 변했고 차분히 입술을 다물었다.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강현우가 먼저 나섰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 씨, 일단 개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저한테 와서 계약 이야기하시죠.”비즈니스와 관련된 말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 속에서 조롱의 뉘앙스를 읽어냈다.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큰 키와 존재감은 방 안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윤하경을 바라봤다.“응?”윤하경은 손을 떨며 침착하게 말했다.“담배 한 대만 주실래요? 부탁드릴게요.”그녀는 몸이 떨려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강현우는 잠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가져왔다.“먼저 구급차부터 부르는 게 순서 아닐까?”윤하경은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핸드폰을 꺼내 구조를 요청했다.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에 강현우는 보상금이라며 1억짜리 수표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윤하경은 강현우가 우연히 구지호의 차를 들이받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주차장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 그 차를 들이받다니,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강현우의 무심하고 태연한 태도를 떠올리면 그게 정말 우연 같기도 했다.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주미나가 걱정할까 봐 결국 구지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차 안에서 구지호는 화가 나서 계속 윤하경과 강현우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이건 고의야! 내가 고소할 거야!”윤하경은 그런 구지호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계속 떠들면 지금 당장 널 차 밖으로 던질 거야. 병원까지 걸어가고 싶어?”강현우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윤하경은 속으로 구지호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강현우와의 몇억짜리 계약이 무산된 상황에서 구지호가 더더욱 원망스러웠다.병원에서 구지호가 깁스를 마친 뒤, 주미나가 병원에 도착했다.“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더니 구지호를 힐끗 보며 담담히 말했다.“아줌마, 저한테 묻지 마시고 지호한테 물어보세요.”구지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뻔뻔해도 윤하경에게 강압적으로 굴다가 강현우의 차에 치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 결국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냥... 사고였어요.”그러자 주미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널 들이받은
윤하연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말했다.“아빠, 언니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가볍게 웃었다.“네가 챙겨준다면 더 고맙겠지.”그녀는 태연하게 식탁 한쪽에 앉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아빠, 그 말은 좀 아니죠. 하연이는 집에서 먹고 자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뭔가 해야 마음 편하지 않겠어요?”그 말에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윤수철에게 말했다.“맞아요, 여보. 하경이가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잖아요.”윤수철은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며 매섭게 윤하경을 노려봤다.“먹기 싫으면 나가!”하지만 윤하경은 더욱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왜 제가 나가요? 제가 여기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러면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되잖아요.”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윤하경은 곁눈질로 서 있는 윤하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빨리 앉아. 아빠를 더 화나게 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만 친딸인 줄 알겠어.”그리고 옆에 서 있던 집사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뭐 하세요? 제 그릇이랑 숟가락 빨리 가져다주세요. 동생 하연이한테 직접 가져오라고 할 순 없잖아요?”‘동생’이라는 단어를 그녀는 일부러 강하게 강조했다.윤하연은 머뭇거리며 조용히 식탁에 앉았지만 윤하경이 자리를 잡은 이후로 식탁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윤하경만이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끝내 침묵을 깬 것은 임수연이었다.“하경아, 어제 구지호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괜찮아?”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끗 보며 웃었다.“궁금하시면 직접 가보시죠.”임수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금세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내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그녀는 집사에게 말했다.“좋은 식재료 좀 사 와요. 보양식 끓이게. 하경이 너랑 하연이가 오후에 병문안 다녀오면 좋겠다.”윤하경은 그녀를 빤히 보며 비웃듯 말했다.“저는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하연이가 가서
온지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모임이 있는데 강현우도 온대. 같이 갈래?]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당연히 가야지.]그녀는 어릴 때부터 역경이 닥칠수록 더 강해지는 성격이었다. 강현우가 협력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는 이상, 윤하경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온지우가 보내준 주소를 확인한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정성껏 메이크업을 한 뒤 계약서와 기획안을 챙겨 목적지로 향했다.1층으로 내려가던 그녀는 소파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임수연과 윤하연을 발견했다.“엄마, 만약 지호 오빠가 언니랑 약혼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요?”임수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는...”그 순간,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두 분, 남의 걸 어떻게 빼앗을지 의논하실 때는 좀 더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하시는 게 어때요? 제가 들으면 얼마나 서로 민망하겠어요.”윤하경은 계단을 내려가며 방금 한 말을 되새기며 만족스럽게 웃었고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뻔뻔하다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사실 그들이 거실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유도 이해할 만했다.평소 주말이면 윤하경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윤하경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려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윤하경은 두 사람 앞에 다가가며 웃음을 지었다.“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돼요. 구지호 같은 사람은 제가 아쉬워할 상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몰래 숨어서 속닥일 필요 없어요.”그녀의 독설에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윤하경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나섰다.목적지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회장이었는데 입구에서 바로 직원에게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오늘은 전관 대관이라 초대장이 필요합니다.”윤하경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잠
윤하경은 강현우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날 밤의 혼란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며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화끈거렸다.하지만 강현우는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그를 변태라 부를 수도 없으니 그녀는 그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저희 회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 계약을 체결하면 프로젝트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진심으로 임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지만 강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러자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또한, 어떤 요구사항이든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어떤 요구사항이든 가능하다고?”윤하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강현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강현우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며 탁탁 소리를 냈다. 느긋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며 점점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진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이 계약 사인 못 할 이유는 없지.”그 말에 윤하경은 얼굴이 밝아졌지만 곧이어 들려온 그의 말에 멈칫했다.“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그녀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조건이요? 말씀만 해주시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내 조건은, 너야.”윤하경은 당황한 나머지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말했다.“네?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저를 여자 친구로 만들겠다는 건가요?”강현우는 입꼬리를 비웃듯이 말아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가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이때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네게 하루 시간을 줄게. 생각해 보고 계약서 들고 내 방 808호로 와.”그
한참 후, 방문이 열렸다. 강현우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표정엔 전혀 놀라움이 없었다. 마치 그녀가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샤워를 마친 그는 흰색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교차한 앞섶 사이로 느슨하게 묶인 허리띠 때문에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은근히 드러났다.평소에는 깔끔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어 늘 날씬하고 단정한 느낌을 줬지만 그의 몸은 정반대였다. 탄탄한 가슴과 복근은 그의 꾸준한 운동을 증명했다. 이런 남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시선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강현우는 문 앞에 선 윤하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결정했어?”윤하경은 입술을 꼭 다물고 손에 든 계약서를 내밀었다.“조건이 있어요. 돈은 오늘 안으로 입금돼야 하고 한 달 동안만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강현우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로 끌어들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그녀를 벽에 밀치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키스했다.그의 익숙한 향이 그녀를 감쌌고 윤하경은 순간 놀라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이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현우의 입꼬리는 더 올라갔다.그는 그녀를 가뿐히 들어 올려 엉덩이를 받친 채 방 안으로 걸어갔다. 그의 능숙한 스킬은 윤하경을 더욱 당황하게 했고 그저 그의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이번의 강현우는 지난번보다 더 거칠고 열정적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열정에 윤하경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결국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떴다. 강현우가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이제야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너무 일렀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우는 그녀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으며 다시 시작했다. 그때의 상황은 그녀가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였다.그렇게 사랑을 나누면서도 강현우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리 감정이
강현우가 가까이 다가오자 향기가 코끝을 스쳤고 윤하경은 강현우에게 기대며 말했다.“우리 이미 몇 번이나 잤잖아요. 다음엔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말아줘요. 나 정말 깜짝 놀랐거든요.”평소에는 이렇게 말하지 않지만 오늘은 일부러 강현우를 약 올리려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그녀의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에 일부러 살짝 애교를 얹자, 웬만한 남자는 다 무너질 법했다.강현우는 살짝 고개를 숙여 그녀를 바라보며 눈빛이 깊어졌다.그리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안더니, 한 손으로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눈높이를 맞추었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반응할 틈도 없이, 강현우의 그윽한 눈빛과 마주쳤다.“아직 부족했나 보네.”말을 끝내고 강현우는 그녀를 벽에 밀어붙이며 거칠게 키스했다.이런 강현우의 공격적인 행동에 윤하경은 완전히 압도되어, 자신이 왜 그를 건드렸는지 후회했다....회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출근 시간이 한참 지나 있었다.이때 소지연이 다가오며 말했다.“무슨 일이야? 오늘은 전화도 안 받던데.”윤하경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그냥 묻지 마.”소지연은 그녀에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건네며 업무 보고를 시작했다.“오늘 한 고객이…“그런데 말하다 말고 윤하경의 입술을 보더니,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입술 어쩌다 그랬어? 좀 부은 것 같은데.”윤하경은 책상 위 손거울로 확인하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별일 아냐. 개한테 물렸어.”소지연은 잠시 말이 없더니, 몸을 숙여 그녀의 책상 위에 팔꿈치를 괴고 물었다.“솔직히 말해. 어젯밤에 누구 만난 거야?”윤하경은 마지못해 대답했다.“됐고 일 얘기나 하자.”소지연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업무 이야기를 했다.오전 내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소지연은 같이 점심을 먹자고 제안했지만 윤하경은 핸드폰을 확인하고 말했다.“미안해. 점심은 다른 약속이 있어. 저녁에 보자.”그녀는 가방을 챙기고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10분 뒤, 그녀는 회사 건너편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얼마
윤하경은 강현우와 8시에 약속이 있다는 걸 깜빡할 뻔했다.그는 속이 좁기로 소문난 사람이라 지난번엔 술에 취한 것뿐인데도 바로 프로젝트를 철회하려고 했다. 이번에도 늦으면 어쩌려나 싶어서 윤하경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저기... 나 좀 급한 일이 생겨서. 여기서 내려줘. 지금 너무 바빠.”소지연은 그녀가 허둥지둥하는 걸 보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뭔데? 무슨 일이야? 내가 도와줄까?”윤하경은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가볍게 헛기침했다.“아냐. 그냥 약속이 하나 있어서.”사실은 그 약속이란 잠자리를 위한 것이었고 소지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겠어. 조심해서 다녀와.”그렇게 서둘러 호텔로 향한 그녀는 약 25분 만에 도착했다.시계를 보니 7시 55분이었다. 간신히 제시간에 도착한 걸 확인한 윤하경은 안도하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호텔 문 앞에서 그녀는 심호흡하고 노크를 했다.잠시 후 문이 열렸고 그 뒤로 보이는 것은 강현우의 정교하게 다듬어진 얼굴이었다.다만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의 얇고 단호한 입술은 살짝 아래로 처져 있었고 손에는 붉은 와인잔이 들려 있었다.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시계를 들어 그의 눈앞에 내밀었다.“보세요. 저 늦지 않았어요.”강현우는 코웃음을 치며 살짝 몸을 비켜 그녀를 들여보냈다.방 안으로 들어선 그녀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뒤를 따랐다.“뭐 하러 멍하니 서 있어?”강현우가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말했다.“샤워나 해.”윤하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있는데 문 뒤쪽에서 소리가 났고 돌아보기도 전에 강현우가 이미 욕실로 들어왔다.윤하경은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지만 그가 이미 그녀에게 다가왔다.순식간에 욕실은 자욱한 수증기로 가득 찼고 그녀는 이내 생각할 틈도 없이 그의 품에 안겼다.욕실에서 나온 그녀는 어떻게 나왔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저 강현우의 어깨에 기대어 울며 이를 악물었던 기억만 아련하게 떠올랐다.그러고 나서
윤하경이 자리에서 일어나 윤수철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아줌마도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그 집은 대체 무슨 상황이죠? 이제 좀 들어보고 싶어요.”윤수철은 잠시 말없이 있다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하경아, 네 눈엔 내가 아빠로 보이긴 하니?”윤하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그게 무슨 말씀이세요?”그녀는 속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다.아마도 그 집에 얽힌 사연이 단순하지 않을 것이다.윤하경은 입을 다문 채 담담한 시선으로 윤수철을 응시하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윤수철은 입술을 꼭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내가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매일 내 것만 노리는 거냐? 그 집 이야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말아. 내가 알아서 줄 때가 되면 줄 테니.”임수연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더니 손을 뻗어 그의 팔을 살짝 잡아당겼다.그러나 윤수철은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는 씩씩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고 거실에는 윤하경과 임수연 둘만 남았다.윤수철이 자리를 떠나자 임수연도 더 이상 꾸밀 필요가 없다는 듯 비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참 우습네. 가족한테 얻어낼 생각만 하는 딸이라니.”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받아쳤다.“그럼 이제 보셨겠네요.”“하지만 그건 제 부모님의 재산이에요. 그쪽하고는 상관없는 일 아닌가요?”그녀는 느긋하게 눈을 흘기며 손에 든 새 차 열쇠를 가볍게 흔들었다.“어쨌든 오늘 새 차를 받아서 기분이 좋으니 이번엔 넘어갈게요.”그 말을 마친 그녀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문밖으로 나갔다.새 차는 저택 앞 도로에 주차되어 있었고 차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차에 올라탔다.운전석에 앉은 윤하경은 소지연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연아, 저녁에 나와서 같이 밥 먹자.”소지연이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무슨 좋은 일 있어?”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빠가 새 차를 사줬어. 널 태우고 드라이브 해줄게.”“원하면 이 차로 훈남도 낚으러 다녀도 돼.”소지
윤수철은 탁자 위에 놓인 차 키를 집어 들더니 윤하경에게 건넸다.“이건 오늘 너를 위해 산 새 차야. 지난번에 네가 화난 것도 이해해. 네 차도 몇 년 탔으니까 이제 바꿀 때가 됐지. 네가 지호랑 약혼하기로 한 기념으로 아빠가 주는 선물이야.”윤하경은 그의 손에 든 차 키를 무심하게 바라봤다.‘오, 심지어 파나메라네.’윤하연의 차보다는 좀 고급이었지만 가격 차이는 크지 않았다.‘그래도 아빠라고 두 딸을 공평하게 챙기네.’그녀는 속으로 비웃었다.‘내 차가 작아서 바꾼 걸까? 아니면 구지호네가 날 학대한다고 생각할까 봐 체면 세우려고 산 걸까?’하지만 이런 건 사실 중요하지 않았고 윤하경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의 팔짱을 끼고는 살짝 흔들었다.“고마워요. 아빠, 역시 아빠가 최고네요.”어머니가 돌아가신 뒤로 그녀는 아버지에게 이렇게 애교를 부린 적이 거의 없었다.윤수철은 잠시 멈칫하더니 어색한 기침을 했다.윤하경은 고개를 숙인 채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왜 그래?”윤수철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고 윤하경은 코끝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아빠가 이제는 윤하연만 좋아하고 저를 신경 안 쓰는 줄 알았어요.”그의 표정이 약간 굳었지만 곧 부드러운 웃음을 지었다.“말도 안 돼. 넌 내 딸인데 내가 어떻게 널 안 좋아하겠니?”“정말이에요?”윤하경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고 윤수철은 확신에 차서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용히 말했다.“아빠, 저는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가 정말 그리워요.”그녀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엄마가 저한테 어른이 되면 성남에 있는 그 별장을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결혼해도 언제든 갈 수 있는 제 공간이 되게요.”그 말을 들은 윤수철은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었다.“아빠, 그 집에 정말 오랜만에 가보고 싶어요. 우리 나중에 같이 가요. 어때요?”윤하경은 말은 돌려 했지만 의도는 명확했다. 언제 집을 자신에게 넘길 건지 묻는 것이었다.그 집은 어머니가
윤하경이 자리를 떠나자마자 윤하연이 기다렸다는 듯이 기둥 뒤에서 나왔다.구지호는 그녀를 보자 순간 당황한 기색을 보였고 급히 윤하경이 갔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하지만 윤하경은 이미 잘 숨은 상태였기에 구지호는 그녀를 발견하지 못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윤하연을 바라봤다. 그의 표정엔 짜증이 서려 있었다.“여기서 뭐 하는 거야?”윤하연은 금세 눈가에 눈물이 고이며 말했다.“지호 오빠, 정말 언니랑 약혼할 거야?”구지호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당연히 하경이랑 결혼해야지.”윤하연은 눈물을 참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난? 난 오빠한테 뭐였는데?”그녀의 물음에도 구지호의 표정엔 짜증 외에 다른 감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처음에 네가 먼저 나한테 다가온 거잖아. 하연아, 우린 그냥 잠깐 즐긴 거야. 그런데 지금 와서 왜 이러는 건데?”윤하연은 그의 차가운 태도에 충격을 받은 듯 눈물을 흘리며 물었다.“오빠... 나한테 이렇게 생각했던 거야?”“나는... 나는 진심으로 오빠를 좋아했는데.”멀찍이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윤하경은 그들의 대화 내용까지는 들을 수 없었지만 상황을 보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윤하연, 연기 하나는 진짜 수준급이네. 역시 엄마한테 잘 배웠어.’그녀는 핸드폰을 꺼내 조용히 녹화 버튼을 눌렀고 구지호는 윤하연의 눈물에 점점 더 짜증이 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잠시 고민하더니 말했다.“돈이 필요해?”윤하연은 얼굴이 하얗게 질리며 중얼거렸다.“오빠... 어떻게 그런 말을 해?”구지호는 한숨을 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알았어. 오늘 밤에 만나. 평소에 만나던 그 장소로 와. 그때 얘기하자.”그는 이 상황이 윤하경에게 들킬까 봐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윤하연은 밤에 다시 만날 수 있다는 말에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나도 오빠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말을 마친 윤하연은 아쉬운 듯 몇 번이나
구지호는 기분이 좋은지 운전을 꽤 거칠게 했다.예전 같았으면 윤하경이 조심해서 좀 천천히 가라고 했겠지만 지금은 그저 옆 좌석 손잡이를 꼭 붙잡았다.‘스스로 사고가 나면 병원에 가겠지. 차라리 내 앞에서 안 보이는 게 나아.’하지만 그의 운전은 예상과 달리 아슬아슬했을 뿐 무사히 쇼핑몰에 도착했다.쇼핑몰 1층에는 보석 매장이 있었다.구지호는 기세 좋게 매장으로 들어가 직원에게 말했다.“가장 큰 다이아몬드부터 보여줘요.”직원은 대박 손님이 왔다며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잠시 후, 직원은 값비싼 보석 반지 몇 트레이를 가져왔다.다이아몬드, 사파이어, 자수정 등 다양한 보석들이 눈부시게 빛났다.윤하경은 보석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크고 투명한 것이 더 비싸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구지호를 힐끔 보고는 트레이 위를 가볍게 살피다가 가장 큰 사파이어 반지에 손을 멈췄다.그녀는 반지를 집어 손가락에 끼워 보았고 반짝이는 사파이어가 그녀의 손에서 빛을 발했다.윤하경은 미소를 띠며 구지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예뻐. 이걸로 하면 되겠네.”구지호는 순간 얼굴이 굳었고 잠시 멈칫하더니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아직 급하게 결정할 필요는 없잖아. 좀 더 보고 네가 진짜 마음에 드는 걸로 고르자.”‘대단하네. 돈 아끼는 말을 이렇게 깔끔하게도 표현하네.’윤하경은 속으로 피식 웃었고 구지호의 집안은 부유했지만 이 반지 가격이 몇십억 원대라는 걸 생각하면 그의 주머니 사정이 벌써 불편해졌을 게 분명했다.그녀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며 웃음을 참으려 했지만 반지를 빼지 않고 손목을 들어 조명에 반짝이며 말했다.“난 한 번 보고 마음에 들면 바로 골라야 좋더라. 이건 딱 내 스타일인데.”그러자 구지호는 표정 관리가 안 되기 시작했다. 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그가 무언가 말하려는 찰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고 한숨을 쉬는 척하며 말했다.“근데 나 원래 보는 눈이 좀 별로라 가끔 겉만 번지르르한
윤하경이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윤수철이 먼저 말을 꺼냈다.“좋아, 좋아. 하경이 오후에 시간 비어 있어.”두 가문의 어른들은 윤하경의 생각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일사천리로 대화를 진행했다.윤하경은 살짝 인상을 찌푸렸지만 윤수철은 웃는 얼굴로 그녀를 한쪽으로 끌고 가며 은근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너랑 지호 이 결혼은 꼭 성사돼야 해.”그는 짧게 뜸을 들이더니 날카로운 한마디를 덧붙였다.“네 엄마가 남긴 물건이 아직 내 손에 있다는 거 잊지 말고.”분명한 위협이었고 그 말을 들은 윤하경은 속에서 울컥 치미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윤수철은 그녀의 차가운 표정을 의식한 듯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달래는 척했다.“그리고 네가 지호를 그렇게 오래 좋아했잖아. 여자란 원래 좀 투덜대다가도 금방 풀리는 거야. 너무 까탈스럽게 굴지 마.”그 말을 듣자 윤하경은 헛웃음이 터졌다.‘와. 이게 친아버지라는 사람이 할 소리야?’그녀는 차갑게 웃으며 물었다.“그렇게 윤하연이 좋으면 하연이를 지호랑 결혼시키지 그러세요? 딱 어울리잖아요.”윤수철의 얼굴이 단번에 굳어지더니 목소리가 살짝 다급해졌다.“헛소리하지 마! 하연이가 지호랑 결혼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이것 보라니깐.’윤수철도 구지호가 믿을 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윤하연은 안 되고 자신은 된다는 게 정말 우스웠다.윤하경은 어처구니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내가 지호를 좋아해서 결혼하라 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지호가 문제가 많다는 걸 알아서 하연이는 안 된다는 건가요?”그녀의 직설적인 물음에 윤수철은 순간적으로 눈길을 피했고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움이 드러났고 얼버무리듯 말했다.“지호는 괜찮은 아이야. 헛소리하지 마.”그는 그녀와 더 이상 말다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듯 그녀의 팔을 잡아끌고 구지호 앞으로 데려갔다.“지호야, 하경이는 너한테 맡길게. 얘가 좀 고집스러우니 잘 부탁해.”윤하경은 가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며 잠시 표정을 다
강현우의 옆모습은 여전히 완벽했고 윤하경은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아니요. 없어요.”‘적어도 지금은...’윤하경은 자신이 이 남자 앞에서 왜 이렇게 늘 작아지는지 자책하며 고개를 살짝 저었고 입술을 깨물며 정신을 다잡은 뒤 화장실 칸을 나왔다.거울 앞에 서서 메이크업을 고치던 그녀는 거울 속에 약간 부어오른 자신의 입술을 보며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나도 한 방 먹였지.’그녀는 강현우 셔츠 카라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떠올렸다.그 여자가 그걸 보면 어떤 반응일까? 그 생각에 기분이 한결 좋아진 윤하경은 발걸음을 가볍게 화장실을 나섰다.강현우가 있는 방의 문을 지나치며 그녀는 무심한 듯 안쪽을 힐끗 들여다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옆에 앉은 여자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참 연기 잘하네.”윤하경은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방 안으로 들어서자 구지호의 아버지 구성수가 자리에 앉아 있었다. 윤하경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깍듯하게 인사했다.“아저씨, 오랜만이네요.”구성수는 다정한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하경이는 볼 때마다 점점 더 예뻐지네.”윤하경은 예의상 말했다.“아저씨도 여전히 젊어 보이세요.”그때 구지호가 방으로 들어오며 물었다.“하경아, 어디 갔었어? 화장실 갔는데 안 보이던데.”윤하경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윤수철 옆에 자리를 잡았다.“잠깐 옆 슈퍼에 다녀왔어.”구지호는 안도한 듯 웃으며 그녀 옆자리에 앉았다. 음식이 차례로 나오기 시작했고 구지호는 그녀에게 다정한 척 음식을 덜어주었다.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한 남자 친구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가 덜어준 음식을 손도 대지 않았다.한편, 윤수철과 구성수는 사업 이야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록 윤수철의 인품은 별로였지만 사업에서 성공한 사람으로서 배울 게 나름 있었다.구씨 가문은 의류 사업을 하고 있었고 윤수철은 최근 그쪽에 손을 대보고 싶어 둘은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 윤하경이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어도 두 사람은
윤하경은 갑작스러운 인기척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다름 아닌 강현우였다.그녀는 순간적으로 멈칫하며 손을 내렸고 세수하던 것도 잊은 채 그를 쳐다봤다.“여기 웬일이에요?”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그녀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데이트 중 아니었어요?”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현우는 뒤돌아 화장실 문을 닫더니, 한순간에 그녀를 세면대에 밀착시키고 거침없이 그녀의 입술을 덮쳤다.그의 차가운 기운과 익숙한 향기가 동시에 밀려들며 윤하경의 심장이 한순간 멎는 듯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으로 그를 밀쳐냈다.“여기서 이러지 마세요.”윤하경은 가쁜 숨을 내쉬며 말했다.“사람들 다니잖아요.”하지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그녀를 화장실 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이 고급 레스토랑은 화장실마저 세련되고 칸마다 독립적으로 나뉘어 은밀하고 안전했다. 그는 그녀를 칸 문에 밀어붙이고 손으로 문을 단단히 닫았다.윤하경은 그제야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여긴 여자 화장실이에요.”그러나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그래서 구지호랑 다시 잘해보기로 한 거야?”윤하경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아니에요.”그녀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쳤고 그의 손길이 점점 대담해졌고 등이 드러난 그녀의 드레스를 점점 더 파고 들어갔다. 차가운 손이 윤하경의 피부를 스치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고 그녀는 깔끔하게 다림질된 그의 셔츠를 힘껏 움켜쥐었다.비록 함께한 시간이 많지 않았지만 강현우는 마치 본능적으로 이런 상황을 다룰 줄 아는 사람처럼 그녀를 휘어잡았고 그녀가 저항할 틈을 주지 않았다.그러나 그 순간 화장실 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하경아, 너 거기 있어?”구지호의 목소리였다. 소리가 멀리서 들려오는 걸로 보아 화장실 입구에 서 있는 듯했다.윤하경은 정신이 번쩍 들었고 숨을 고르며 상황을 정리하려 애썼다.강현우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