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윤하경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되는 날이었다.3년 전부터 윤수철은 이날을 완전히 잊어버렸지만 주미나는 매년 이날을 기억하며 윤하경과 함께 산소를 찾았다. 그리고 놀랍게도, 올해는 윤하경 자신조차도 그날을 잊고 있었다.윤하경은 전화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고 머릿속에는 엄마가 세상을 떠나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잠시 눈을 감으며 마음을 가다듬었다.“하경아, 오늘 오후에 같이 네 엄마 산소에 가자.”주미나는 부드럽게 말했고 윤하경은 한참 고민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네, 어머님. 같이 가요.”결국, 그녀는 주미나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아직 아침 8시였다. 그녀는 이른 시간이지만 회사를 들러야겠다는 생각으로 일어섰다.회사의 상황은 최근 들어 그리 좋지 않았지만 온지우가 어제 자신이 지나쳤다는 걸 깨달았는지, 그의 집안에서 맡고 있던 사업 일부를 윤하경의 회사에 넘겼다.온지우는 농담 반, 사과 반으로 메시지를 남겼다.[하경아, 어제 일은 내가 잘못했어. 구지호가 울면서 부탁하길래 도와준 거야. 이번 건 내가 우리 아버지의 파트너들한테서 어렵게 따낸 거야. 나중에 내가 회사를 맡게 되면 광고나 기획은 전부 너한테 맡길게.]메시지에 계약서 링크까지 첨부되어 있었다.[우리 회사 직원이 곧 너희와 협의하러 갈 거야. 걱정 말고 편히 있어.]윤하경은 메시지를 읽으며 약간 고개를 젖혔다. 온지우에게 화를 내는 것도 어쩐지 의미 없게 느껴져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온지우와 윤하경은 어릴 적부터 가까운 사이였다. 두 사람은 중학교 때부터 같은 학교를 다녔고 그녀가 구지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온지우가 두 사람을 다시 이어보려는 것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사랑할 땐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만 끝나면 뒤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었다.온지우 역시 그녀의 성격을 잘 알았기에 오늘 이렇게 직접 사과하며 사업을 제안했을 것이다.온지우가 준 사업은
휴대폰 화면에는 강현우에게서 온 짧은 메시지가 떠 있었다.[시간 없어.]짧은 두 글자는 마치 그녀와의 대화를 단칼에 끊어버리는 것처럼 차갑게 느껴졌다.윤하경은 피식 웃으며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차에 타자마자 주미나는 밝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하경아, 조금 있다가 지호랑 데이트라도 해봐.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것도 좋잖아.”그녀는 운전석에서 핸들을 잡고 있는 구지호를 흘끗 쳐다보며 차분히 대답했다.“오늘 저녁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요. 다음에 하죠.”구지호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핸들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비록 그녀가 완전히 거절한 것은 아니었지만 한때 자신을 향했던 그녀의 태도가 이렇게 달라졌다는 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전의 윤하경이라면 감히 이렇게 선을 긋지 않았을 텐데.그는 복잡한 표정을 숨긴 채 차를 몰아 구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 윤하경은 차에서 내리며 주미나에게 깍듯하게 인사했지만 구지호는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바람피운 주제에. 이미 끝난 사람인데 내가 왜 다시 신경 써야 하지?’그녀는 단호히 마음을 다잡고 자리를 떠났다.차 안에서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온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는 곧바로 연결되었고 그가 있는 곳의 소음이 전화 너머로 생생히 전해졌다.“어, 하경아! 이제 화 푼 거야?”온지우의 장난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고 윤하경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그건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하느냐에 달렸지.”“뭔데? 말만 해. 네 부탁이라면 뭐든 들어줄게.”온지우는 이내 호기심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강현우가 오늘 밤 어디 있는지 좀 알아봐 줄래?”윤하경은 곧장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온지우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웃으며 장난스럽게 물었다.“너 설마 강현우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지? 그 남자는 좀 무서운 사람이야. 며칠 전에 어떤 여자가 강현우 방에 몰래 들어갔다가, 알몸으로 호텔 밖에 던져졌다는 얘기도 들었어.”윤하경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지만 곧 태연한 목소리로 말
윤하경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맞아요.”그러자 추성운이 혀를 차며 말했다.“어이구, 네가 구지호를 차버렸다던데 사실이야?”윤하경은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성운 씨, 언제부터 이렇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으셨죠?”사실 그녀가 이곳에 온 이유는 수다를 떨려고 온 게 아니었다. 오늘 그녀의 목표는 바로 강현우와의 계약을 따내는 것이다.수억 원 규모의 이번 계약이 성사되면 회사 운영이 한결 여유로워질 뿐 아니라 앞으로의 시장 확장에도 큰 도움이 되게 된다.온지우는 그녀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채고 얼른 끼어들며 분위기를 풀었다.“성운 씨, 아까 드시기로 한 술이 아직 석 잔 남아 있는 거 기억하시죠? 제가 직접 따라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죠.”온지우는 추성운을 다른 자리로 끌고 가며 윤하경에게 살짝 윙크를 날렸다. 윤하경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답한 뒤, 잔을 손에 들고 강현우가 있는 자리로 다가갔다.막 입을 열려던 순간, 강현우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그의 팔에 매달리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현우 씨, 저 좀 불편한데 여기 좀 눌러주세요.”그 여자는 말하면서도 경계 어린 눈길로 윤하경을 힐끔거리더니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 것처럼 불안해하며 윤하경을 째려봤다. 이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에 나지막이 웃으며 물었다.“그래? 어디가 불편한데? 여기? 아니면 여기?”그는 말하며 그 여자의 허리 주위를 천천히 어루만졌고 그러는 동안 단 한 번도 윤하경을 쳐다보지 않았다.강현우의 태도는 윤하경에게 굴욕을 주려는 듯 보였고 여자는 그의 행동에 얼굴이 새빨개지며 숨소리가 가빠졌다.“현우 씨, 정말 나쁜 남자야.”윤하경은 입가를 살짝 씰룩이며 억지로 미소를 유지했다. 그녀도 꽤 많은 상황을 겪어 봤지만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여전히 낯부끄럽게 느껴졌다.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윤하경은 목을 가다듬으며 말했다.“저기, 강 회장님, 사실 오늘은 지난번에 이야기했던 계약 건으로 다시 말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지금
윤하경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금세 파티장의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이전에 구지호의 기분을 신경 쓰느라 이들과 술을 마신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인지 많은 사람들이 그녀가 술잔을 드는 모습을 처음 보며 놀랐고 농담을 던졌다.“하경 씨, 오늘 정말 특별한 날인가 보네요. 이렇게 큰 판을 깔아주시다니요.”윤하경은 대꾸하기도 귀찮아했다.‘몇억 원짜리 계약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 성의는 보여줘야지.’그녀는 술잔을 내려놓으며 미소를 띠고 강현우를 바라봤지만 그는 미동도 없었다. 이에 윤하경은 다시 잔을 들어 술을 단숨에 들이켰다. 큰 잔의 술을 급하게 마시다 보니 위스키가 입가에서부터 턱, 목선을 타고 흘러내리며 그녀의 쇄골과 드레스 속으로 스며들었다.모두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고 아무도 강현우가 그녀를 바라볼 때 목젖이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몇 잔의 술이 넘어가며 윤하경의 얼굴엔 붉은 기운이 돌기 시작했지만 강현우는 여전히 멈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옆에 앉은 여자가 빈 잔에 다시 술을 채웠다.윤하경은 멈추지 않고 이를 악물고 한 잔씩 더 마셨다. 몇 잔을 더 마셨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고 강현우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그 순간,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며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고 순간 윤하경은 동작을 멈췄다.문을 박차고 들어선 사람은 바로 구지호였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윤하경을 노려보며 소리쳤다.“오늘 밤 계약하러 간다더니 이런 데 와서 술 마시고 있었어? 윤하경, 넌 자존심도 없어?”술기운에 흐릿했던 윤하경의 눈빛은 단숨에 차갑게 변했고 차분히 입술을 다물었다. 막 말을 꺼내려던 찰나, 강현우가 먼저 나섰다. 그는 코웃음을 치며 윤하경을 바라보며 말했다.“하경 씨, 일단 개인 문제부터 해결하고 다시 저한테 와서 계약 이야기하시죠.”비즈니스와 관련된 말 같았지만 윤하경은 그 속에서 조롱의 뉘앙스를 읽어냈다. 그녀가 더 깊이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큰 키와 존재감은 방 안
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들어 올리며 윤하경을 바라봤다.“응?”윤하경은 손을 떨며 침착하게 말했다.“담배 한 대만 주실래요? 부탁드릴게요.”그녀는 몸이 떨려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강현우는 잠시 흥미로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더니 차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가져왔다.“먼저 구급차부터 부르는 게 순서 아닐까?”윤하경은 담배를 받아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게 들이마셨다.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핸드폰을 꺼내 구조를 요청했다.구급차가 도착하기 전에 강현우는 보상금이라며 1억짜리 수표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차분히 생각을 정리해 보니, 윤하경은 강현우가 우연히 구지호의 차를 들이받았다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주차장이 이렇게 넓은데 하필 그 차를 들이받다니, 세상에 그런 우연이 있을 리 없었다.하지만 강현우의 무심하고 태연한 태도를 떠올리면 그게 정말 우연 같기도 했다.윤하경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 주미나가 걱정할까 봐 결국 구지호를 병원으로 데려갔다.차 안에서 구지호는 화가 나서 계속 윤하경과 강현우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이건 고의야! 내가 고소할 거야!”윤하경은 그런 구지호를 날카롭게 쳐다보며 차갑게 말했다.“계속 떠들면 지금 당장 널 차 밖으로 던질 거야. 병원까지 걸어가고 싶어?”강현우가 의도적으로 그랬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윤하경은 속으로 구지호가 자초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녀는 강현우와의 몇억짜리 계약이 무산된 상황에서 구지호가 더더욱 원망스러웠다.병원에서 구지호가 깁스를 마친 뒤, 주미나가 병원에 도착했다.“세상에, 이게 다 무슨 일이야!”윤하경은 입술을 깨물더니 구지호를 힐끗 보며 담담히 말했다.“아줌마, 저한테 묻지 마시고 지호한테 물어보세요.”구지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아무리 뻔뻔해도 윤하경에게 강압적으로 굴다가 강현우의 차에 치였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할 수는 없어 결국 더듬거리며 대답했다.“그냥... 사고였어요.”그러자 주미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누가 널 들이받은
윤하연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말했다.“아빠, 언니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가볍게 웃었다.“네가 챙겨준다면 더 고맙겠지.”그녀는 태연하게 식탁 한쪽에 앉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아빠, 그 말은 좀 아니죠. 하연이는 집에서 먹고 자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뭔가 해야 마음 편하지 않겠어요?”그 말에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윤수철에게 말했다.“맞아요, 여보. 하경이가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잖아요.”윤수철은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며 매섭게 윤하경을 노려봤다.“먹기 싫으면 나가!”하지만 윤하경은 더욱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왜 제가 나가요? 제가 여기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러면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되잖아요.”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윤하경은 곁눈질로 서 있는 윤하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빨리 앉아. 아빠를 더 화나게 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만 친딸인 줄 알겠어.”그리고 옆에 서 있던 집사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뭐 하세요? 제 그릇이랑 숟가락 빨리 가져다주세요. 동생 하연이한테 직접 가져오라고 할 순 없잖아요?”‘동생’이라는 단어를 그녀는 일부러 강하게 강조했다.윤하연은 머뭇거리며 조용히 식탁에 앉았지만 윤하경이 자리를 잡은 이후로 식탁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윤하경만이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끝내 침묵을 깬 것은 임수연이었다.“하경아, 어제 구지호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괜찮아?”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끗 보며 웃었다.“궁금하시면 직접 가보시죠.”임수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금세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내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그녀는 집사에게 말했다.“좋은 식재료 좀 사 와요. 보양식 끓이게. 하경이 너랑 하연이가 오후에 병문안 다녀오면 좋겠다.”윤하경은 그녀를 빤히 보며 비웃듯 말했다.“저는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하연이가 가서
온지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모임이 있는데 강현우도 온대. 같이 갈래?]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당연히 가야지.]그녀는 어릴 때부터 역경이 닥칠수록 더 강해지는 성격이었다. 강현우가 협력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는 이상, 윤하경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온지우가 보내준 주소를 확인한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정성껏 메이크업을 한 뒤 계약서와 기획안을 챙겨 목적지로 향했다.1층으로 내려가던 그녀는 소파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임수연과 윤하연을 발견했다.“엄마, 만약 지호 오빠가 언니랑 약혼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요?”임수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는...”그 순간,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두 분, 남의 걸 어떻게 빼앗을지 의논하실 때는 좀 더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하시는 게 어때요? 제가 들으면 얼마나 서로 민망하겠어요.”윤하경은 계단을 내려가며 방금 한 말을 되새기며 만족스럽게 웃었고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뻔뻔하다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사실 그들이 거실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유도 이해할 만했다.평소 주말이면 윤하경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윤하경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려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윤하경은 두 사람 앞에 다가가며 웃음을 지었다.“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돼요. 구지호 같은 사람은 제가 아쉬워할 상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몰래 숨어서 속닥일 필요 없어요.”그녀의 독설에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윤하경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나섰다.목적지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회장이었는데 입구에서 바로 직원에게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오늘은 전관 대관이라 초대장이 필요합니다.”윤하경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잠
윤하경은 강현우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날 밤의 혼란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며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화끈거렸다.하지만 강현우는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그를 변태라 부를 수도 없으니 그녀는 그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저희 회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 계약을 체결하면 프로젝트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진심으로 임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지만 강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러자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또한, 어떤 요구사항이든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어떤 요구사항이든 가능하다고?”윤하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강현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강현우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며 탁탁 소리를 냈다. 느긋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며 점점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진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이 계약 사인 못 할 이유는 없지.”그 말에 윤하경은 얼굴이 밝아졌지만 곧이어 들려온 그의 말에 멈칫했다.“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그녀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조건이요? 말씀만 해주시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내 조건은, 너야.”윤하경은 당황한 나머지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말했다.“네?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저를 여자 친구로 만들겠다는 건가요?”강현우는 입꼬리를 비웃듯이 말아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가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이때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네게 하루 시간을 줄게. 생각해 보고 계약서 들고 내 방 808호로 와.”그
“놔요.”윤하경은 화가 났다.방금 강현우에게 시달려 힘들었던 그녀는 지금은 그저 푹 쉬고 싶었다.“나도 너에겐 어른인데 나와 얘기할 때 이렇게 화를 낼 필요가 있어?”지금은 윤수철이 집에 없으니 임수연은 부드럽게 말하며 연기하지 않았다.“어른이라고요? 그럴 자격 있어요?”임수연은 말문이 막혔다.“너...”그녀가 손가락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키며 뭔가 말하려고 할 때 마침 뒤에서 윤수철의 발소리가 들려왔다.임수연은 순식간에 표정이 바뀌더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하경아, 난 그저 너와 얘기 좀 나누고 싶었을 뿐이야. 화내지 마. 너의 아빠가 요즘 회사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어. 너 돈이 있으면 아빠를 도와드릴 수 있을 텐데 그러면 적어도...”“부탁하지 마.”임수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뒤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윤수철은 천천히 앞으로 다가와 날카로운 눈빛으로 윤하경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딸을 보는 게 아니라 원수를 쏘아보는 것 같았다.윤하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임수연의 손을 뿌리치며 매우 귀찮다는 듯이 닦았다.“아버지 말씀이 맞아요. 저에게 부탁하지 마세요.”윤하경은 임수연을 흘겨본 후 몸을 돌려 올라가려다가 또 고개를 돌려 윤수철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아빠, 시간이 급하니 제가 말한 제안을 잘 생각해 보세요.”윤하경은 얼굴을 붉히며 다른 사람과 다투다가도 곧 웃으며 말했다. 물론 이런 건 임수연에게 배운 것이다.이틀 후면 약혼식이다.방에 돌아온 윤하경은 주미나의 연락을 받았는데 옷과 액세서리를 보냈다고 했다.문자를 보며 윤하경은 입술을 깨문 채 잠자코 말이 없었다.구지호가 어떻든 지간에 주미나는 그녀를 아껴줬고 심지어 딸처럼 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약혼식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윤하경은 주미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마음이 놓였다.주미나가 아무리 좋아도 구지호는 좋은 인연이 아니었고 주미나가 좋다고 해서 구지호와 결혼할 수는 없었다.이렇게 생각한 그녀는
그녀는 억지를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하물며 이런 일이 있고 난 뒤 강현우의 앞에서 고결한 척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특히 그녀도 이런 일을 생각하면 구역질이 나서 한꺼번에 충분히 사는 게 좋았다.하지만 강현우는 위험한 사람이기라 한 번 관계를 맺는 것에 그쳐야지 미련을 가져서는 안 된다. 자칫하다간 그녀도 이 감정에 빠질 수 있다.구지호는 물론 강현우도 좋은 인연은 아니다.그도 인정 빚을 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으니 이참에 돈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 좋았다.“이 카드는 도로 넣으세요. 다른 것은 우리 다 계산 끝난 거로 해요.”강현우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의 눈빛에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진 윤하경은 머뭇거리더니 자신이 산 물건을 들고 일어섰다.“그럼 다른 일이 없다면 그만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말을 마친 후 윤하경은 몸을 돌려 떠나갔다.유리 벽을 통해 그녀가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현우는 길쭉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쳤다. 그는 기쁘든 슬프든 표정으로 드러내지 않았다.이때 한 사람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현우야, 이런 우연이 있을 수가.”추성운이 갑자기 다가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아까 윤씨 가문의 아가씨를 본 것 같은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강현우는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잘못 봤어.”추성운은 오만방자하게 그의 맞은편에 앉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입가를 찌르며 말했다.“현우야, 이건 너무하잖아? 아까 분명히 윤하경 씨가 여기에 앉아있는 걸 봤어.”강현우는 그를 힐끔 쳐다봤다.“무슨 일이야?”추성운은 히죽거리며 말했다.“윤하경 씨와 사이가 좋은 편이지? 쯧쯧, 윤하경 씨를 구지호 이놈에게 주긴 너무 아까워. 구지호는 빛 좋은 개살구일 뿐이잖아.”추성운의 입에서 진지한 말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가볍게 대꾸하며 되물었다.“그래서?”추성운은 이 말을 듣고 몸을 앞으로 숙이며 그에게 물었다.“나는 어때?”강현우는 포크를 집은 손을 잠시 멈칫하
윤하경은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켰다.차가 약국 앞을 지나갈 때 윤하경은 고개를 돌려 강현우를 보며 말했다.“옆에 잠깐 세워 주세요.”강현우가 물었다.“무슨 일이라도 있어?”그는 질문했지만 브레이크를 밟으며 차를 세웠다.하이힐을 신고 차에서 내리던 윤하경은 발이 땅에 닿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하마터면 무릎을 꿇을 뻔했다.그녀는 차 문을 잡고 바로 선 다음 고개를 돌려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덤덤한 그의 모습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이 남자는 정말 능청스러웠다. 아까는 미친 듯이 사랑을 나눴지만 지금은 속세에 물들지 않은 것처럼 고상한 척한다.허리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 남자의 모습에 속았을 것이다.그녀는 콧웃음 치고 나서 하이힐을 또각거리며 약국에 들어갔다. 다시 나왔을 때는 손에 비상 피임약이 한 통 들려있었다.강현우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그건 뭐야?”윤하경도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현우 씨, 시치미를 뗄 필요가 없지 않아요? 이게 무엇인지도 몰라요?”항상 여자가 옆에 있었다는 소문이 자자한 강현우가 이게 무슨 약인지 모른다고 윤하경은 믿지 않았다.“아니면 현우 씨는 제가 어느 날 아이를 데리고 책임을 져달라고 찾아오길 바라세요?”윤하경은 약통에서 약 알을 꺼내고는 생수와 함께 먹으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지난 몇 번 관계를 맺을 때마다 모두 피임조치를 했지만 아까는 갑작스럽게 하다 보니 약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이 약이 건강에 영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 약을 먹는 것이 나중에 수술하는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강현우 같은 바람둥이는 여자와 아이를 책임지지 않을 것이 뻔했다.강현우는 차를 한 레스토랑 앞에 세웠다.음식을 주문한 후 윤하경은 심심해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에 원을 그리고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하얗고 길쭉해서 보기 좋았다.주문을 마친 후 강현우를 그녀를 힐끗 쳐다보더니 뭔가 생각났는지 양복 주머니를 더듬어
그는 만족해하며 커다란 손으로 좌석 아래쪽을 만지자 곧게 세워져 있던 의자가 뒤로 졎혀졌다.윤하경은 갑작스럽게 애매한 자세로 강현우의 품에 안겨졌다.‘강현우는 너무 잘 생겼어.’아래로부터 위로 그의 얼굴을 훑어보던 윤하경은 결국 듣기 거북한 말을 하지 못하고 그저 화가 나서 노려보았다.“현우 씨는 너무 매너 없는 거 아니에요?”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매너? 있어.”매혹적인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윤하경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때 강현우가 다시 몸을 숙였다.그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자 목젖이 드러났다.윤하경의 코끝에는 남자에게서 나는 공격성을 띤 차가운 향기가 가득했다. 그녀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처음 하는 것도 아니고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상황에서 거절하는 것은 억지스러운 짓이다.그녀가 처음으로 강현우와 엮일 때도 강현우는 거절하지 않았다.윤하경은 머뭇거리다가 반항하기도 귀찮아 아예 손을 뻗어 강현우의 목을 끌어안고 도발적으로 그의 입술을 깨물었다.그녀의 적극적인 반응에 강현우는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녀를 한 번 쳐다봤는데 두 눈에는 욕망이 가득 차 있었다.윤하경은 정말 보기 드문 미인이다.강현우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감싸 안았다. 두 몸뚱이가 이 좁은 공간에서 더 가까이 붙어 있었다.한번 시작하면 쉽게 끝나지 않은 일이 있다.다행히 강현우가 사는 이곳이 단독 별장이고 지하실에는 그들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윤하경은 민망해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윤하경은 점점 정신을 차리며 몸을 가볍게 움직였는데 뼈마디가 부서진 것처럼 시큰거리며 아파 났다.그녀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강현우를 노려봤다.그러나 이때 강현우는 이미 단정하게 차려입은 후 옆에 앉아 휴대폰을 꺼내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영성용 원피스 한 벌을 작은 사이즈로 주차장에 가져와.”그녀를 놓아준 지 얼마 안 되었지만 강현우는 벌써 당당하고 거만한 모습으로 변했
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나를 운전기사로 생각하는 거야?’하지만 그가 방금 배신당한 것을 보고 그녀는 순순히 시동을 걸었다.어쨌든 조금 전에 그가 자신을 도운 적이 있으니 말이다.차가 차고를 벗어나자, 윤하경은 그제야 떠오른 듯 고개를 돌려 강현우에게 물었다.“어디 가요?”강현우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별장으로.”지난번에 자신이 갔던 그 별장을 말한다고 생각한 윤하경은 알았다고 대답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차 안의 분위기는 순간 조용해져 두 사람이 숨 쉬는 소리만 들렸다.차고에 도착해 차에 시동을 끈 그녀는 그가 차에서 내리지 않자 힐끗 돌아보았다.강현우는 이목구비가 훤칠했는데 오뚝한 콧날과 깊은 눈매, 심지어 옆모습으로도 사춘기 소녀를 빠져들게 하기에 충분한 그런 얼굴이었다.하지만 꾹 다문 입술은 지금 그가 기분이 매우 나쁘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윤하경은 가볍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이 강현우와 조금 동병상련인 것 같았다.물론 감정적으로만 말이다.그녀는 핸들을 잡은 손가락으로 주먹을 살며시 쥐고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어 그에게 충고했다.“현우 씨, 사실 배신 당한 것도 그냥 그래요. 저도 약혼자에게 배신당했잖아요? 사실 조금만 참으면 다 지나갈 수 있어요...”강현우가 자신을 힐끗 보는 것을 발견한 그녀는 가볍게 기침을 하고 코끝을 문지르며 어색하게 입을 다물었다.강현우는 물론이고 그녀 자신도 그 한 마디가 전혀 위로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그녀가 잠시 말을 멈추고 강현우에게 내릴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려던 순간 강현우가 입을 열었다.“날 위로하는 거야?”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렇다고 쳐요.”“헐!”강현우는 차갑게 웃으며 갑자기 몸을 옆으로 돌리더니 손을 들어 윤하경을 끌어당겼다. 윤하경이 미처 반응하기도전에 따뜻하고 커다란 손이 그녀의 가는 허리를 움켜쥐었다.그녀의 이 차는 공간은 좁은 편은 아니었고 그녀의 체중도 가벼웠기에 강현우는 그녀를 쉽게 안아 매우 부끄러운 자세로 자
두 사람은 차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서로 실랑이하고 있었다.하지만 윤하경은 진해리와 배지훈임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사이가 보통이 아닌 것 같았다.윤하경은 담뱃재를 털고 나서 자신의 걱정거리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두 사람이 실랑이하는 것을 구경했다.“무슨 말이야? 내가 강현우랑 결혼하는 걸 정말 보고 싶어?”날카로운 여자의 목소리가 윤하경의 귀에 들려왔다.배지훈은 손을 들어 콧등을 살짝 눌렀다.“진해리, 그만 소란 피워.”“내가 소란을 피운다고?”진해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배지훈, 남자라면 지금 당장 아버지께 나와 결혼하겠다고 해.”윤하경은 깜짝 놀랐다.‘이게 무슨 말이지?’진해리는 곧 강현우의 약혼녀가 될 사람이다. 그렇다면 진해리가 배지훈과 함께 강현우를 배신한 거란 말인가?그녀는 순간적으로 어젯밤 맞은 후 강현우가 자신을 끌고 간 것이 잘한 일이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시끄러워질 것 같았던 그녀는 사실 도망치려고 했다.하지만 이때 시동을 거는 것은 너무 티가 나니 그녀는 최대한 자신의 존재감을 낮추기 위해 몸을 움츠릴 수밖에 없었다.진해리는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배지훈, 꼭 이렇게 매몰차게 굴어야 해?”진해리의 목소리는 이미 울먹이고 있었다.배지훈은 차에 기대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윤하경조차 그 무력감과 갈등을 느낄 수 있었다.그는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가 뱉고 나서야 진해리에게 말했다.“진해리, 그만해, 우리 사이는 불가능해. 강현우는 좋은 사람이야. 너 강현우와 함께 있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일 거야.”진해리는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없는 듯 고개를 들어 애잔한 눈빛으로 배지훈을 바라보았다.“배지훈, 너를 만난 걸 정말 후회해.”그녀는 말을 마치고 또각또각 하이힐을 밟고 걸어갔는데 뒷모습은 쓸쓸하고 슬퍼 보였다.배지훈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보다가 손에 들고 있던 담배가 거의 다 타버려서야 바닥
윤하경의 무관심한 모습을 본 윤수철은 화가 나 미칠 것 같았다.윤하경이 서두르지 않고 조용히 앉아서 차를 마시는 것을 본 윤수철은 한참 동안 침묵하다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왜, 한빛 그룹이 완전히 끝나야 네가 행복할 것 같아?”윤하경은 시큰둥하게 말했다.“제 생각은 한결같아요. 한빛 그룹의 주식은 팔 수 없어요.”“흥, 네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난 이 주식을 반드시 팔 거야. 네가 한빛 그룹 주식을 팔고 싶지 않은 거라면 구씨 가문을 설득해서 나에게 투자하라고 해. 돈이 들어오면 주식을 파는 일을 더는 생각하지 않을 거야.”윤하경은 눈을 내리깔고 하얀 손가락으로 찻잔을 가볍게 움켜쥐었다.찻물 온도가 딱 맞아 뜨겁지는 않았다.“고씨 가문을 설득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에요.”딸의 말을 들은 윤수철은 곧 기뻐하며 말했다.“역시 내 딸이야. 내가 이러는 것도 당연히 다 이 집안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지.”‘집?’윤하경은 비웃으며 눈을 돌렸다. 윤수철이 집을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 자신도 포함된 건지는 확실하지 않다.임수연이 집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그녀는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 쟁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구씨 가문에 투자하라고 설득할 수 있지만, 성남의 별장은 반드시 제 명의로 이전해야 한다고 했었잖아요. 윤하연과 임수연은 우리 엄마의 것을 누릴 자격이 없어요!”윤하은이 조그마한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말투는 자신의 친아버지와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다.어차피 부녀의 인연도 거의 사라졌다. 윤수철이 자신을 속이고 집을 윤하연에게 넘겼을 때 그는 딸을 잃었다.“왜 또 집 얘기를 해? 집이 그렇게 중요해?”윤수철은 참지 못하고 일어나 윤하경을 바라보았다.“구씨 가문이 투자하고 내가 재기하면 그때 그 집보다 더 큰 집을 사줄게. 어때?”윤하경이 그를 올려다보았다.“안 돼요! 아빠 말이 맞아요. 그 집은 저에게 매우 중요해요. 그 집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저에게 남겨주신 유일한 선물이에요.”그녀는 벌
그녀가 몸을 휘청이며 넘어질 것 같아 보이자 종업원이 급히 부축했다.“아가씨, 조심하세요.”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고마워요. 저기, 방금 나왔다가 길을 잃었는데 윤 회장님이랑 온 회장님이 어느 룸에 계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종업원은 웃으며 아주 예의 바르게 말했다.“네, 윤 회장님은 308 룸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세요.”이렇게 예쁜 아가씨는 거짓말하지 않을 것 같았다.윤하경은 종업원의 뒤를 따라 윤수철이 있는 룸에 도착했다. 두 회장님은 그때 마침 차를 음미하고 있었는데 그녀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윤수철의 굳은 표정으로 그녀가 오는 것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온지우의 아버지는 비즈니스 업계를 오랫동안 휘젓고 다닌 사람이라 깜짝 놀란 표정이 한순간 웃음으로 바뀌었다.“오랜만이야. 집에도 놀러 오지 않고. 어서 와서 앉아.”“시간 날 때 온지우랑 뵈러 가려고 했어요.”윤하경은 얌전하게 앉아 온성태가 건네주는 차를 받았다.윤수철은 옆에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무슨 일로 왔어?”윤수철은 표정이 어두웠지만 다른 사람 앞이라 윤하경에게 직접 화내지 않았다.윤하경은 그 말에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한빛 그룹 지분을 아저씨에게 팔려고 왔다면서요?”그녀의 말이 너무 직설적이라 윤수철은 순간 멍해졌다.온성태는 옆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처럼 자신에게 차를 따랐다.“우리 어른들 일인데 너랑 무슨 상관이 있어? 나가.”일이 이 지경이 되었어도 윤수철은 아직도 어른들의 일이라는 핑계를 대고 있다.윤하경은 빙긋 웃었다.“정말 제 일이 있을 것 같아서요. 아빠, 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긴 유산은 아빠 혼자만의 것이 아니에요. 한빛 그룹의 주식을 팔려는 거면 정말로 제가 결정할 일일 거예요.”지난날 한빛 그룹은 윤수철과 그녀의 엄마가 공동으로 설립한 것으로, 부부의 공동 재산에 속했다.엄마가 돌아가실 때 남겨진 유산 중 일부는 윤수철이 상속받았고, 다른 일부는 당연
“친구 찾으러 왔어요.”윤하경은 안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지만 경비원이 계속 막았다.“아가씨, 친구 이름이 뭐예요? 몇 호실로 예약하셨나요? 아니면 전화해서 데리러 나오라고 하세요.”윤하경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에 와본 적이 없는 그녀는 이렇게 많은 일은 생각하지 못했다.분명히 레스토랑인데 정보국이나 되는 듯했다.방금 온지우에게 몇 번 방인지 묻는 것을 잊었다. 휴대폰을 들고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휴대폰 배터리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엎친 데 덮친 격이다.어떻게 섞여 들어갈까 생각하며 눈을 든 그녀는 맞은편 주차장에서 크고 익숙한 모습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검은 양복을 입으니 남자는 어깨가 넓고 허리가 좁아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강현우였다.강현우는 눈을 들어 그녀를 한 번 훑어본 후, 눈길을 돌려 성큼성큼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윤하경은 쫓아가 그의 앞을 막았다.“무슨 일 있어?”강현우가 멈춰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른 윤하경 앞에서 그의 큰 몸집이 더 듬직해 보였는데 두 사람의 몸매는 강렬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미녀와 야수 같았다.윤하경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야 강한 압박감이 덜었다.“저기, 제가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들어가야 하는데 예약을 안 했어요.”강현우가 무표정하게 물었다.“그래서?”윤하경은 그를 올려다보며 말을 좀 더 직설적으로 했다.“그래서 저를 좀 데리고 들어가 주세요.”그러고는 또 낮은 소리로 한마디 보충했다.“어제 아무 보상이나 줄 수 있다고 했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크지도 작지도 않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현우가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남자는 고개를 살짝 들며 조롱 섞인 미소를 지었다.“서로 빚진 게 없다고 하지 않았어?”윤하경은 말문이 막혔다.이 개 같은 남자는 정말 조금도 말로 손해를 보려 하지 않는다.이렇게 작은 일도 도와주려 하지 않다니.그녀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을 때 강현우는 그녀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걸음을 옮겼다.“현우 씨!”방금까지 윤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