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연은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어색하게 말했다.“아빠, 언니한테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윤하경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가볍게 웃었다.“네가 챙겨준다면 더 고맙겠지.”그녀는 태연하게 식탁 한쪽에 앉으며 입가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아빠, 그 말은 좀 아니죠. 하연이는 집에서 먹고 자면서 아무것도 안 하잖아요. 뭔가 해야 마음 편하지 않겠어요?”그 말에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굳어졌지만 임수연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윤수철에게 말했다.“맞아요, 여보. 하경이가 틀린 말은 한 건 아니잖아요.”윤수철은 점점 얼굴이 어두워지며 매섭게 윤하경을 노려봤다.“먹기 싫으면 나가!”하지만 윤하경은 더욱 밝게 웃으며 대꾸했다.“왜 제가 나가요? 제가 여기서 밥 먹는 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드세요? 그러면 남 좋은 일만 시키게 되잖아요.”그녀의 말에는 뼈가 담겨 있었다. 윤하경은 곁눈질로 서 있는 윤하연을 바라보며 덧붙였다.“빨리 앉아. 아빠를 더 화나게 하지 말고.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너만 친딸인 줄 알겠어.”그리고 옆에 서 있던 집사를 향해 날카롭게 말했다.“뭐 하세요? 제 그릇이랑 숟가락 빨리 가져다주세요. 동생 하연이한테 직접 가져오라고 할 순 없잖아요?”‘동생’이라는 단어를 그녀는 일부러 강하게 강조했다.윤하연은 머뭇거리며 조용히 식탁에 앉았지만 윤하경이 자리를 잡은 이후로 식탁 분위기는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윤하경만이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갔다.끝내 침묵을 깬 것은 임수연이었다.“하경아, 어제 구지호가 사고로 병원에 입원했다던데 괜찮아?”윤하경은 고개를 들어 그녀를 힐끗 보며 웃었다.“궁금하시면 직접 가보시죠.”임수연은 순간 말문이 막혔지만 금세 억지 미소를 띠며 말했다.“내가 간다고 달라질 건 없잖아.”그녀는 집사에게 말했다.“좋은 식재료 좀 사 와요. 보양식 끓이게. 하경이 너랑 하연이가 오후에 병문안 다녀오면 좋겠다.”윤하경은 그녀를 빤히 보며 비웃듯 말했다.“저는 안 가도 될 것 같아요. 하연이가 가서
온지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오늘 모임이 있는데 강현우도 온대. 같이 갈래?]윤하경은 망설임 없이 답장을 보냈다.[당연히 가야지.]그녀는 어릴 때부터 역경이 닥칠수록 더 강해지는 성격이었다. 강현우가 협력하지 않겠다고 명확히 말하지 않는 이상, 윤하경은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온지우가 보내준 주소를 확인한 그녀는 서둘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정성껏 메이크업을 한 뒤 계약서와 기획안을 챙겨 목적지로 향했다.1층으로 내려가던 그녀는 소파에서 나지막이 속삭이는 임수연과 윤하연을 발견했다.“엄마, 만약 지호 오빠가 언니랑 약혼한다면 저는 어떻게 해요?”임수연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내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너는...”그 순간, 윤하경이 웃으며 말을 끊었다.“두 분, 남의 걸 어떻게 빼앗을지 의논하실 때는 좀 더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하시는 게 어때요? 제가 들으면 얼마나 서로 민망하겠어요.”윤하경은 계단을 내려가며 방금 한 말을 되새기며 만족스럽게 웃었고 임수연과 윤하연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굳어 있었다. 아무리 그들이 뻔뻔하다 해도 얼굴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사실 그들이 거실에서 대놓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이유도 이해할 만했다.평소 주말이면 윤하경은 침대에서 하루 종일 뒹굴며 방에서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윤하경이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려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윤하경은 두 사람 앞에 다가가며 웃음을 지었다.“굳이 그렇게까지 애쓰지 않아도 돼요. 구지호 같은 사람은 제가 아쉬워할 상대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몰래 숨어서 속닥일 필요 없어요.”그녀의 독설에 두 사람의 얼굴은 점점 더 일그러졌다.윤하경은 그들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미소를 머금은 채 문을 나섰다.목적지까지는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도착한 곳은 고급스러운 회장이었는데 입구에서 바로 직원에게 제지당했다.“죄송합니다. 오늘은 전관 대관이라 초대장이 필요합니다.”윤하경은 당황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잠
윤하경은 강현우의 시선을 느끼는 순간, 저도 모르게 그날 밤의 혼란스러운 기억이 떠오르며 얼굴이 순식간에 뜨거워지며 화끈거렸다.하지만 강현우는 도도한 분위기를 풍기며 그녀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이 상황에서 그를 변태라 부를 수도 없으니 그녀는 그저 헛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저희 회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이 계약을 체결하면 프로젝트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다른 회사보다 훨씬 더 세심하고 진심으로 임할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덧붙이며 그의 반응을 살폈지만 강현우의 표정은 여전히 무미건조했다. 그러자 윤하경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다시 말을 이었다.“또한, 어떤 요구사항이든 최대한 맞춰드릴 수 있습니다!”이번에는 그의 표정이 조금 바뀌었다.“어떤 요구사항이든 가능하다고?”윤하경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으며 강현우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하지만 강현우는 더는 말을 잇지 않고 손가락으로 소파 팔걸이를 천천히 두드리며 탁탁 소리를 냈다. 느긋하게 들리는 소리였지만 그녀의 신경을 날카롭게 자극하며 점점 더 긴장하게 만들었다.몇 초가 몇 분처럼 느껴진 순간, 그는 입을 열었다.“이 계약 사인 못 할 이유는 없지.”그 말에 윤하경은 얼굴이 밝아졌지만 곧이어 들려온 그의 말에 멈칫했다.“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그녀는 숨을 삼키며 물었다.“조건이요? 말씀만 해주시면 최대한 맞춰드리겠습니다.”그는 약간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내 조건은, 너야.”윤하경은 당황한 나머지 자동으로 고개를 끄덕였다가, 이내 깜짝 놀라며 말했다.“네? 잠시만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혹시 저를 여자 친구로 만들겠다는 건가요?”강현우는 입꼬리를 비웃듯이 말아 올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네가 자격이 된다고 생각해?”그의 말에 충격을 받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이때 강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네게 하루 시간을 줄게. 생각해 보고 계약서 들고 내 방 808호로 와.”그
한참 후, 방문이 열렸다. 강현우가 모습을 드러냈고 그의 표정엔 전혀 놀라움이 없었다. 마치 그녀가 올 걸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했다.샤워를 마친 그는 흰색 목욕 가운만 걸치고 있었다. 교차한 앞섶 사이로 느슨하게 묶인 허리띠 때문에 그의 탄탄한 가슴 근육이 은근히 드러났다.평소에는 깔끔한 맞춤 정장을 입고 있어 늘 날씬하고 단정한 느낌을 줬지만 그의 몸은 정반대였다. 탄탄한 가슴과 복근은 그의 꾸준한 운동을 증명했다. 이런 남자를 본다면 누구라도 시선을 뗄 수 없었을 것이다.강현우는 문 앞에 선 윤하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말했다.“결정했어?”윤하경은 입술을 꼭 다물고 손에 든 계약서를 내밀었다.“조건이 있어요. 돈은 오늘 안으로 입금돼야 하고 한 달 동안만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그리고... 절대 비밀로 해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나자, 강현우는 입가에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으로 끌어들였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는 그녀를 벽에 밀치고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키스했다.그의 익숙한 향이 그녀를 감쌌고 윤하경은 순간 놀라 손가락으로 그의 팔을 꽉 붙잡았다. 그녀의 이런 반응이 마음에 들었는지, 강현우의 입꼬리는 더 올라갔다.그는 그녀를 가뿐히 들어 올려 엉덩이를 받친 채 방 안으로 걸어갔다. 그의 능숙한 스킬은 윤하경을 더욱 당황하게 했고 그저 그의 흐름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이번의 강현우는 지난번보다 더 거칠고 열정적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그의 열정에 윤하경은 완전히 녹초가 되어 결국 잠이 들었다.얼마나 지났을까, 몸이 공중에 뜨는 듯한 느낌에 눈을 떴다. 강현우가 그녀를 안고 욕실로 향하고 있었다.‘이제야 끝났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자신의 생각이 너무 일렀다는 걸 깨달았다. 강현우는 그녀를 세면대 위에 올려놓으며 다시 시작했다. 그때의 상황은 그녀가 떠올리기만 해도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였다.그렇게 사랑을 나누면서도 강현우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리 감정이
강현우와의 짧지만 뜨거웠던 만남이 떠오르며 윤하경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조심스럽게 고개를 돌리자, 온지우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하경아, 왜 내 연락 씹어? 그리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여긴 객실 구역인데. 강현우는 지금 뒤쪽 파티룸에 있어. 내가 데려다줄게.”윤하경은 당황하며 변명하려 했다.“잠깐만 지우야, 나...”하지만 온지우는 그녀에게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며 객실 구역을 빠져나가, 곧 다른 건물로 향했다.밖으로 나오자 해가 기울어 있었고 윤하경은 시간이 꽤 흘렀다는 걸 깨달았다. 즉, 그녀는 강현우의 방에서 거의 하루 종일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강현우가 있는 파티룸은 멀지 않았다. 온지우는 성급하게 걸음을 재촉하며 문을 열었고 방 안에는 몇몇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아 있었다. 그중 강현우는 카드 테이블에 앉아 여유롭게 게임을 하고 있었다.불과 몇 시간 전의 격렬했던 순간이 무색할 만큼, 그는 깔끔하고 단정한 모습이었다. 흰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팔뚝의 선명한 근육은 매력적이었고 차분한 분위기는 여전히 돋보였다.강현우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잠시 윤하경의 손목에 머물렀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다시 고개를 돌리자, 차가운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마치 그녀와 전혀 모르는 사이처럼 보였다.“어때?” 온지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그러자 카드 테이블에 앉아 있던 추성운이 웃으며 말했다.“현우 형님이 있는데 누가 이길 수 있겠어? 하경 씨, 한 판 해볼래? 지면 내가 대신 내줄게.”윤하경이 대답하려던 순간, 강현우가 무심하게 말했다.“네 차례야. 카드 내.”추성운은 건성으로 카드를 한 장 내려놓으면서도 시선을 윤하경에게서 떼지 않았다.온지우는 이런 상황을 놓칠 리 없었다.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윤하경을 강현우 쪽으로 살짝 밀며 말했다.“현우 형님 카드 실력은 최고야. 하경아, 가서 형한테 좀 배워봐.”그러고는 자신이 똑똑한 선택을 했다는 듯 윤하경에게
추성운은 강현우가 윤하경에게 흥미를 느낀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그는 아쉬운 듯 어금니를 혀로 살짝 굴리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하고 슬쩍 윤하경을 훔쳐봤다.'윤하경은 정말 매혹적인 외모를 가졌어. 강현우 같은 사람도 반하지 않을 수 없겠지.'강현우가 자리를 권하자 윤하경은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어 그의 옆에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강현우 특유의 은은한 우디 향이 코끝을 스치며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했다.몇 판이 지나자, 강현우는 느긋하게 카드를 테이블 위에 던지며 말했다.“네가 해봐.”윤하경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봤다.“진심이세요?”사실 그녀는 카드 게임에 큰 흥미가 없었고 잘하지도 못했지만 몇 판을 지켜보며 게임 규칙 정도는 익혔다.강현우는 가볍게 웃으며 그녀를 힐끗 보았다.“이기면 네 거고 지면 내 책임이야.”윤하경은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들었다."그럼 해볼게요."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었고 판돈도 적지 않았다.비록 강현우의 조건을 받아들였지만 마음속에는 여전히 그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녀는 작은 복수를 하듯 일부러 계속 지는 척하며 강현우를 곤란하게 만들었다.큰 카드가 손에 들어와도 그녀는 일부러 내지 않고 꼭 붙들고 있었다. 판이 끝날 때마다 그녀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죄송해요, 현우 씨. 제가 워낙 서툴러서요.”강현우는 담배를 물고 그녀를 느긋하게 내려다봤다. 그의 표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무심함이 묻어났다.3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윤하경은 1억을 졌다. 그녀가 다시 한 판을 준비하려는 순간, 뜨거운 온기가 느껴지며 강현우가 그녀 뒤에서 다가왔다.그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이렇게 못한다고 소문나면 내 체면만 떨어지겠지.”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손에서 카드를 빼내 한 장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의 손등이 스치자 윤하경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겉으로는 성숙하고 대담해 보이는 그녀였지만 사실 그녀를 잘 아는 사
윤하경과 소지연은 병실을 나와 나란히 복도를 따라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소지연이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 하자, 윤하경은 재빨리 손을 뻗어 담배를 꺼버렸다.“담배 피우면 아줌마가 아실 텐데?”소지연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회계팀에서 돈 들어왔다는 연락 받았어. 그런데... 그 돈 어디서 난 거야?”하루 사이였지만 소지연은 윤하경이 한층 더 피곤해 보인다는 걸 느꼈다.소지연이 알게 되면 불필요한 죄책감을 가질까 윤하경은 돈의 출처를 명확히 밝히고 싶지 않았다. “뭐긴 뭐야? 강현우 쫓아다니면서 계약 땄지.”소지연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그 사람 계속 안 한다고 했던 거 아니야? 그런데 이상한 게, 회계팀 말로는 계약금이 원래 계약서 금액보다 30%나 더 들어왔다던데. 하경아, 설마 너 내 일 때문에 무리한 건 아니지?”회사 공동대표로서 소지연은 모든 수익의 출처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친구로서 윤하경이 말하지 않아도 뭔가 짐작이 갔다.그러자 윤하경은 일부러 얄밉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야, 내가 계약 따냈다고 하면 믿어야지. 설마 내 능력을 못 믿는 거야?”소지연은 당황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아니, 그런 뜻은 아니었어.”윤하경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됐지. 이제 엄마 잘 챙겨. 이번 계약 큰 건이라 앞으로 바빠질 거야.”소지연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딱히 이상한 점이 없자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소지연과 헤어진 뒤, 윤하경은 지친 얼굴로 코끝을 문지르며 병원을 나섰다.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자, 낯익은 두 사람과 마주쳤다.전 약혼자인 구지호와 그녀의 이복동생 윤하연이었다.윤하연은 휠체어에 앉은 구지호를 밀고 있었고 둘은 방금까지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참이었지만 윤하경을 보자마자 두 사람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윤하경은 잠시 놀랐지만 금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어머, 이런 우연도 다 있네. 정말 재밌는 일이야.”구지호는 무언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먼저 입을 연 건 윤하연이었다
사랑했던 사람이 쓰레기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병원을 나온 윤하경은 차 옆에 기대어 담배를 물었다. 쓴 연기가 폐 깊숙이 들어오자, 속에 쌓인 쓰라림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기분이었다.긴 머리칼을 흩날리며 담배를 피우는 그녀는 어둠 속에서도 단연 눈에 띄었고 윤하연은 그 모습을 내려오며 목격했다.순간 윤하연의 눈빛에는 질투가 스쳤지만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다가왔다.“언니, 여기서 나 기다리고 있었어?”윤하경은 슬쩍 그녀를 힐끗 보더니 아무 말 없이 담배를 껐다. 그런데도 윤하연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럴 필요 없는데. 오늘 아빠가 새 차를 사줬거든! 언니 아직 못 봤지? 한번 봐봐, 진짜 멋지지 않아?”그러면서 멀리 주차된 반짝이는 새 벤츠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윤하연은 특유의 상냥한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듣기엔 묘하게 불편했다.윤하경은 그 순간 과거 자신이 차를 사겠다고 했을 때를 떠올렸다.몇 년 전,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차를 사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자금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결국, 그녀는 작은 미니 쿠퍼를 사야만 했다.그런데 지금 윤하연의 이 벤츠는 그녀의 차보다 몇 배는 비싼, 무려 2억 원에 가까운 고가의 차량이었다.5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윤하연은 윤하경을 화나게 하는 방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윤하경이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자, 윤하연은 다시 물었다.“언니, 진짜 멋지지 않아?”그러자 윤하경은 미소를 띠며 부드럽게 말했다.“멋지네. 정말 예쁘고 너랑 잘 어울려.”평소 화를 자주 내던 윤하경이 마치 진심으로 칭찬하는 듯한 말투에 윤하연은 잠시 당황했다.윤하경은 더 이상 말없이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다. 그녀가 오히려 싸움을 걸지 않고 담담하게 대응하자 윤하연은 속으로 분통이 터졌다. 특히 아까 구지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나는 윤하경만 아내로 삼을 거야.”그 말을 생각할수록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잠시 후 윤하경이
윤하경은 강현우 품에 꼭 안긴 채 병원으로 들어갔다.얼굴은 끝까지 그의 가슴팍에 파묻은 채 혹시라도 누가 알아볼까 하는 듯 잔뜩 움츠러든 모습이었다.강현우는 그런 그녀를 아래로 내려다보며 한 번 훑어보더니 살짝 비웃듯 말했다.“왜, 내가 안고 있는 게 그렇게 창피해?”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작게 중얼거렸다.“그런 건 아니고... 혹시 폐 끼칠까 봐. 누가 사진이라도 찍으면 내일 당장 기사 나겠죠. 이런 모습 찍히면 나중에 여동생이라고 해명이라도 하셔야 할지도 몰라서요.”나름 배려심 가득한 말투였지만 강현우의 반응은 딱히 호의적이지 않았다.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강현우의 턱선이 딱 굳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이런 말 하는 걸 보니 입은 아직 덜 다친 모양이지.”말투는 가볍지만 묘하게 날카로웠다.윤하경은 그제야 입을 닫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지금 이 순간 굳이 그와 말싸움할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몇 분 뒤 강현우는 그녀를 진료실 앞에 조심히 내려놓았고 의사가 간단히 살펴본 후 말했다.“다른 데는 문제 없고 발목이 삐었네요. 며칠은 푹 쉬셔야겠습니다.”그리고 곁에 있던 강현우를 돌아보며 웃었다.“여자 친구분 잘 챙기셔야겠어요.”윤하경은 순간 손을 들어 해명하려 했지만 그보다 먼저 강현우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주의할 점은요?”의사는 잠시 멈칫하더니 둘을 한 번씩 보고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며칠 간은 격한 활동은 삼가셔야 해요. 잠자리도 포함해서요. 생각보다 심각합니다. 절대적인 안정이 필요해요.”윤하경은 부끄러워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으나 강현우는 여전히 정색한 얼굴로 말했다.“근데... 못 참으면?”“...”그 순간 윤하경은 진심으로 땅속에 숨고 싶었다.‘이 사람이 이런 식으로 말할 줄이야.’의사 역시 말을 잃고 안경을 고쳐 썼다.“참으셔야죠. 반드시요.”강현우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윤하경을 돌아보았다.“들었지? 못 참아도 참으래.”의사의 이상한 시선이 곧장 윤하경에게로 향
윤하경은 마치 물에 빠져 허우적대다 겨우 떠오른 사람처럼 붙잡은 나무토막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강현우를 꼭 껴안았다.강현우는 잔뜩 찌푸린 눈썹 아래로 날카로운 눈빛을 감추지 않았다.그는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이를 꽉 깨물고는 윤하경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뒤쪽을 돌아보니 민진혁이 그녀를 덮치려 했던 남자의 목을 발로 밟고 있었다.“사장님, 놈은 제압했습니다. 어떻게 처리할까요?”강현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남자를 노려봤다.그 눈빛에 담긴 살기는 말없이도 민진혁이 단번에 이해할 정도로 깊었다.“숨은 붙여놔. 그리고 경찰서로 넘겨.”“예. 일단 헤븐으로 데려가죠.”헤븐에 한 번 끌려간 자 중 멀쩡히 돌아온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구지호 같은 인물도 예외는 아니었으니 이따위 놈이 무사히 나올 리가 없었다.민진혁은 어이없다는 듯 남자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고 바로 우지원에게 전화를 걸었다.“한 건 들어왔어. 바로 처리해.”한편 강현우는 더 이상의 말도 없이 윤하경을 조심스레 차량 뒷좌석에 앉혔다.몸은 이미 안정을 되찾은 듯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떨고 있었고 그의 손끝에도 그녀의 긴장감이 고스란히 전해졌다.강현우도 따라 뒷좌석으로 올라탔고 갑자기 윤하경의 옷을 풀기 시작했다.“뭐 하는 거예요?”놀란 윤하경이 가슴을 감싸안으며 뒤로 물러났다. 강현우는 짧게 숨을 내쉬었으나 불쾌한 눈빛은 없었다.“다친 데 없나 보려고.”그제야 윤하경은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렸고 긴장이 풀리자 금방 여기저기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강현우는 그녀의 몸을 살폈고 무심코 발목을 건드렸다.“으악!”윤하경은 날카로운 통증에 숨을 들이켰고 강현우가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녀의 오른쪽 발목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하얗고 곱던 발이 그만큼 부어오른 걸 보자 그의 이마에 또 주름이 졌다.강현우는 조심스레 샌들을 벗기고 손끝으로 부은 부위를 살짝 눌렀다.그러자 윤하경이 움찔하며 물러났다.“아파요.”그녀의 여린 목소리가 귀에 닿자 강현우는 순간 다
이런 부류의 인간한테는 말로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윤하경은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아예 대꾸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저열한 욕망에 눈이 먼 남자가 그렇게 쉽게 보내줄 리 없었다.그녀가 무시하자 남자는 바로 손을 뻗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잡았다.“꺼져. 지금이라도 안 놔주면 바로 경찰 부를 거야!”윤하경이 단호하게 소리쳤지만 상대에게는 아무 효과도 없었고 남자는 오히려 익숙하다는 듯 비죽 웃으며 말했다.“에이, 왜 그래. 다 처음엔 부끄럽지. 좀 놀아보면 괜찮아진다니까.”그 말을 듣자마자 윤하경은 더는 참지 않고 소리쳤다.“사람 살려요. 도와주세요!”제발 누군가라도 듣기를 바라며 그녀는 있는 힘껏 외쳤다.‘차라리 아까 강현우 차에서 버티고 안 내리는 건데...’윤하경은 후회가 밀려왔다.“닥쳐. 소리 지르지 마!”남자가 당황해하며 목소리를 낮췄고 순식간에 그녀의 입을 틀어막고 골목 한쪽 어두운 곳으로 끌고 갔다.윤하경은 죽을힘을 다해 저항했지만 상대는 덩치도 크고 힘도 셌기에 그녀의 발버둥은 그저 허공에 흩날리는 먼지 같았다.벽에 밀쳐진 채 벗어날 수 없게 된 그녀 앞에서 남자는 잔인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돈 안 주는 것도 아니고 네 옷차림 보면 딱 답이 나오잖아. 화장 떡칠에 저렇게 짧은 치마를 입고 나와선 뭐... 그냥 산책하는 거야?”남자는 그러면서 바지를 내리려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그 입에서는 숨 막히는 악취가 풍겼고 윤하경은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손을 세게 물었다.“악!”남자가 소리를 지르며 손을 빼는 동시에 뺨을 올려 그녀를 세게 후려쳤다.그 순간 윤하경은 머릿속이 울릴 정도로 강한 타격에 정신이 멍해졌다.간신히 고개를 돌려 도망치려 했지만 남자는 곧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챘고 쓰러진 그녀 앞에 이미 바지를 내린 채 서 있었다.속옷까지 드러난 그의 모습에 윤하경은 치를 떨며 이를 악물었다.“건드리지 마. 넌 진짜 죽게 될 거야.”하지만 남자는 웃음을 터뜨렸다.“죽는다고? 너 같은 여자랑 한
윤하경은 잠시 머뭇이다가 조용히 강현우의 차에 올라탔다.차 안에 앉자마자 그 특유의 짙은 담배 냄새와 강현우 몸에서 나는 차가운 향이 뒤섞여 코를 찔렀다.고개를 살짝 돌려 강현우를 바라보려던 찰나 그의 비아냥 섞인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어휴. 내 앞에서는 그렇게 잘도 날뛰더니 조금 전엔 주미나 앞에서 말 한마디 못 하더라?”윤하경은 입을 열려다 그대로 멈췄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의 등장에 조금이나마 감동했던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는데 그 감정은 그의 말 한마디에 금세 사라졌다.강현우는 그녀를 흘겨보다가 억지로 고개를 돌리는 그녀의 얼굴을 붙잡아 억지로 자기 쪽을 보게 만들었다.“다음부터 누가 건드리면 그냥 받아 쳐. 내가 책임질게.”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단했고 눈빛도 말투도 진심이었다.하지만 윤하경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수 없었다.누군가에게 의지하면 안 된다는 걸 이미 너무 많이 배웠다.‘친아버지도 믿을 수 없는데 강현우가 다 뭐겠어.’그녀는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 사람인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에 입술을 거의 다문 채 조심스레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도와주시려고 그랬던 거 알겠어요. 괜히 제가 착각하지 않게 말해주셔서 감사하고요.”이 말을 전하며 오히려 강현우에게 부담 주지 않으려는 속내였으나 그런데도 강현우의 표정은 더 어두워졌다.그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비웃는 듯한 웃음을 지었다.“참...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네.”그러고는 단호하게 말했다.“내려.”“네?”윤하경은 순간 어리둥절했고 강현우가 이렇게 갑자기 차가워지는 순간들이 아직도 익숙하지 않았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다정하던 그가 이제는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그러자 민진혁이 말없이 차를 세웠고 백미러 너머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어딘가 연민 같은 감정이 깔려 있었다.이게 처음도 아닌지라 윤하경은 잠시 입술을 깨물고 말없이 차에서 내렸다.강현우는 차창 너머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가운 한숨을 내쉬고
“남모르게 하려면 애초에 그런 짓도 말았어야죠.”윤하경의 말에 주미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를 바라봤다.처음에는 분노로 가득하던 그 시선이 점점 두려움으로 바뀌기 시작했다.주미나는 솔직히 무서웠다.윤하경 혼자라면 어찌 해보겠지만 지금 그녀 뒤엔 강현우가 있었다.그 강현우가 대놓고 윤하경을 감싸고 있다는 것도 분명했고 이 상황에서 정면으로 맞붙을 자신이 없었다.그렇다고 그냥 물러나자니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으니 주미나는 이를 악물고 결국 손에 쥐고 있던 서류를 확 찢어버렸다.그러자 윤하경의 눈에 가벼운 비웃음이 스쳤다.“찢으셔도 돼요. 어차피 이런 자료 제가 마음만 먹으면 수백 장도 다시 뽑아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오늘 우리가 말이 안 통하고 끝까지 싸우시겠다면 이 자료들이 어디로 갈지 한번 맞혀보시죠?”윤하경은 천천히 주미나에게 다가가서는 맑고도 차가운 눈동자로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분명 얼굴만 보면 예쁘장하고 순한 인상이었는데도 지금 이 순간 주미나는 괜히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예를 들면... 당신들 집안과 적대적인 기업 손에 들어갈 수도 있고요. 아니면 법원, 경찰서에 제출될 수도 있고요.”그 말은 단순한 위협처럼 들리지 않았다.주미나는 윤하경이 한번 마음먹으면 정말 그럴 수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순간 병실 안이 숨 막히는 침묵에 잠겼고 그때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구지호가 신음처럼 이상한 소리를 냈고 그제야 주미나는 움직였다.윤하경은 주미나를 지나쳐 구지호를 내려다보았다.“적어도... 지호 오빠 생각은 좀 하셔야죠.”주미나는 씹어 삼킬 듯 어금니를 꽉 물었다.정말 지금 당장이라도 윤하경을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결국 그녀는 낮고 거친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좋아. 알겠어. 네 말대로 하자.”윤하경은 마치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전해주세요. 윤 회장님한테 더 이상 어리석은 짓 하지 말라고. 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이 자료
강현우는 느긋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윤하경의 콧날을 가볍게 건드렸고 그 눈길은 여전히 장난기 섞인 다정함으로 가득했다.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침대에 누운 구지호를 바라봤다.지금의 구지호 상태가 누구 덕분인지는 말 안 해도 명확했다.그런데도 강현우는 전혀 미안한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여유롭게 웃으며 구지호를 향해 손까지 흔들었다.그 모습은 구지호 눈엔 그야말로 저승사자를 보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구지호가 아무리 날고 기어봤자 강현우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고 침대 위에서 그가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눈에 보였다.주미나는 깜짝 놀라며 본능적으로 한 걸음 다가서서 강현우의 시야를 막아섰다.그제야 강현우가 그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구 여사님, 하나만 정정하죠. 저랑 윤하경 씨는 결혼한 적도 없고 애인이라 하기엔 좀... 억울하네요.”주미나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가 올 줄은 정말 예상 못 한 일이었다.“그럼 무슨 사이죠?”강현우는 가볍게 웃었다. 평소보다 조금은 부드러워진 눈매가 인상적이었다.“좋아하는 사이라면 충분하지 않나요?”주미나의 눈이 가늘어졌고 잠시 시선을 세운 채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었다.“설마 지금 하경이가 현우 씨 여자 친구라고 말하려는 건 아니겠죠?”그녀는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사실 강현우가 그렇게 말할 리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사가에서는 이미 강현우가 박씨 집안과의 정략결혼 이야기가 오가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강현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세우며 입꼬리를 올렸다.“적어도 구 여사님 눈은 아직 멀진 않은 것 같네요.”“너!”주미나가 소리치려다 문득 멈칫했다.‘이 말인즉 설마 진짜 윤하경이 여자 친구라는 걸 인정한 거야?’애인과 여자 친구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었다.전자는 숨겨야 하는 존재고 후자는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자리다.그제야 윤하경도 눈을 크게 뜨며 강현우를 올려다봤다.‘설마 정말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여자 친구라고? 심지어 주미나 앞에서?’이건 사실상 강현우가
구지호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윤하경을 붉어진 눈으로 노려봤고 그 눈빛 속 분노는 감추려고 해도 감춰지지 않았다.그런 시선에도 윤하경의 얼굴엔 단 한 줄기 미동도 없었다.‘봐봐. 결국 인간이란 게 이렇지 뭐.’구지호가 지금 저리도 분노하는 이유는 결국 자신이 저지른 일에 스스로 걸려들었기 때문이다. 실패한 자가 원망을 엉뚱한 데 쏟는 셈이었다.애초에 윤하경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구지호가 생명에는 지장이 없다는 걸 확인한 주미나는 뒤돌아서며 윤하경을 노려봤다.“너 대체 왜 온 거야? 지호를 그렇게 만들어놓고도 모자라니?”윤하경은 조용히 웃었다.“그 말은 좀 틀린 것 같은데요. 지호 스스로가 만든 결과예요. 남 잘못되게 하려다 본인이 당한 거잖아요? 어머니, 귀도 밝고 판단도 빠르신 분이 어쩌다 그 말만 믿고 절 원망하세요.”주미나는 콧방귀를 뀌듯 웃었다.“어머니? 웃기지 마. 난 그런 말 들을 자격 없어.”흥분해서 날을 세우는 주미나와 달리 윤하경은 줄곧 담담한 표정이었다.“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저야 거의 죽을 뻔하긴 했지만 그래도 수년의 정이 있잖아요.”“정?”주미나가 이를 갈며 그녀를 바라봤다.“난 네가 죽는 것만 바라는데?”“하... 지금도 후회해. 그날 밤 널 확 죽여버릴걸. 괜히 한 번 마음 약해져선... 너 같은 게 지호를 이렇게 만들고도 네 죽은 엄마한테 미안하지도 않아?”그 말에 윤하경의 얼굴이 갑자기 싸늘하게 식었다.조용히 있었던 그녀가 그 말을 들은 순간 확연하게 달라졌다.“닥치세요. 우리 엄마 입에 올리지 마세요.”화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마음이 무너진 건 그 순간이었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주미나도 살짝 당황한 듯 움찔했다.그러고는 윤하경 뒤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들을 훑어보고는 눈을 가늘게 떴다.“그래서 오늘 여기 온 이유가 뭐야? 강현우한테 기대기 시작했단 소리 하러?”주미나는 비웃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윤하경, 네 엄마가 무덤 속에서 네가 남자한테 몸 팔며 사는 꼴 보면 뭐라 할까? 기절할
전화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여보세요. 윤하경 씨? 저 우지원이에요.”윤하경은 약간 의외라는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우지원이 웃음을 섞어 말했다.“별건 아니고요. 대표님께서 윤하경 씨가 사람 필요하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사람 필요한지 조건이랑 인원수 알려달라고 하셔서요.”윤하경은 잠시 멈칫했다.설마 했는데, 강현우가 정말 신경 쓰고 있었다니. 그 사실만으로도 꽤 큰 짐이 덜어진 느낌이었다.“수고 좀 해주세요. 좀 몸 쓰는 일에 능한 사람들로 열 명쯤? 딱 봐도 위압감 느껴지는 사람들로요.”우지원은 작게 탄성을 뱉었다.“오, 꽤 큰일인가 보네요? 사람은 언제쯤 필요하세요?”윤하경은 잠깐 생각하더니 말했다.“한 시간 안에요.”“한 시간이요?”“네. 이번 일은 빨리 끝내야 해요. 하루라도 늦어지면 제 입장이 위험해지거든요.”우지원은 작게 중얼거리며 대답했다.“알겠습니다. 준비해 둘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그렇게 통화가 끝났고 윤하경은 강현우 쪽 사람들은 믿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잠시 고민하다가 바로 주미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대로 주미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이미 지난번 일을 겪은 뒤로 주미나와의 관계는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연락을 피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결국 윤하경은 더는 연락하지 않기로 했고 대신 우지원에게 문자를 보내 약속 장소와 시간을 정하고는 카페를 나섰다.한 시간 뒤, 윤하경은 구지호가 입원해 있는 병실에 들어섰다.그리고 놀랍게도 구지호는 이미 깨어나 있었다.하지만 여전히 온몸에 의료기기를 단 채 침대에 누워 있었고 움직일 수 있는 건 손뿐인 듯했다.예전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였던 만큼 그 몰락한 모습에 마음 한구석이 씁쓸해졌다.그래서였을까. 그의 초라한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진 않았다.구지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윤하경을 가리켰다. 표정엔 놀라움과 분노가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놀란 건 그녀의 뒤에 서 있는 체격 좋은 남자들 때문이었고 분노는 아마
윤하경은 찌푸린 이마로 휴대폰을 들어 백정연의 전화를 확인했다.“여보세요?”그 순간 본인의 목소리가 심하게 쉬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어젯밤 강현우가 너무 거칠게 굴었고 그녀는 분명 울면서 몇 번이나 그만하라고 애원했었다.결국 이 목소리도 전부 강현우 탓이었다.사정을 모르는 백정연은 깜짝 놀라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윤 대표님, 무슨 일이세요? 어디 아프신 건 아니죠?”윤하경은 민망하게 코끝을 만졌다. 전화라서 다행이지 대면이었다면 얼굴이 벌게진 걸 들킬 뻔했다.헛기침을 한 번 하곤 자연스럽게 둘러댔다.“어젯밤에 좀 쌀쌀했나 봐요.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요.”“병원은 다녀오셔야죠. 괜히 더 심해지기 전에요.”“오늘 회의 있잖아요. 그거 끝나고 갈게요. 대신 단체 채팅방에 공지 올려줘요. 오늘도 늦는 사람은 전부 사직서 각오하라고.”그녀는 전화를 받으며 욕실로 향했다. 그런데 막 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백정연의 말투가 어딘가 머뭇거렸다.“대표님... 그게... 오늘 회의는 아마 못 열 것 같아요.”“왜요?”윤하경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윤 이사님께서 오늘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휴가를 내렸어요. 회사에도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고요.”순간 윤하경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설마 했는데 정말 이럴 줄은 몰랐다.“이 사람이... 진짜 제정신이야?”회사 일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는 짓을 오로지 자신의 분노를 누르기 위해서 하는 짓이었다.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궁금하네. 도대체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백정연도 숨을 내쉬며 말했다.“저도 답답하죠. 하지만 대표님도 아시잖아요. 다들 난처해요. 아직 이사회 의장은 윤 이사님이니까요.”윤하경은 입술을 꾹 다물고 낮게 웃었다.“그래. 아주 잘들 하시네.”그녀가 쉽게 물러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그녀 자신이 잘 알았기에 곧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회의 참석자 전원에게 알려줘요. 오늘 회의 회사 앞 카페에서 진행할 거라고. 난 한 시간 후에 갈게요.”백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