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아가 허리를 굽혀 연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두 여자 중 한 명은 매우 당황한 표정을, 다른 한 명은 ‘내가 잘못 말했나?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큰 편이었고 강지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마주 보고 있는 여자들보다 반 머리 정도 더 컸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정유진이 귀찮게 구는 사람들을 대할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담담한 표정.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역시 어린 탓에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경멸의 기색이 묻어났다.“내가 바보라고? 그럼 남 뒤에서 험담하는 당신들은 뭐지? 교양 없는 애들인가?”이 두 소녀도 모두 서울의 유명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교양 없다는 말을 듣는 건 매우 창피한 일이었다.문제는 그들이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남 뒤에서 말하다 현장에서 들킨 거니까.“너,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 유한 오빠는 널 싫어해. 오빠는 줄곧 유정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이 말은 최근 강지아의 머릿속을 수없이 맴돌던 말이었기에 그녀에겐 별로 상처가 되지 않았다.“온유한이 주유정을 기다리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강지아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온유한을 좋아한다고 했어? 울면서 온유한과 결혼하고 싶다고 한 적 있어? 이 세상에 온유한만 남자인 것도 아니고.”두 소녀는 그녀의 날카로운 반박에 할 말을 잃고 치마를 들고 도망쳤다.강지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다.이때 치마가 연우에 의해 살짝 당겨졌다.“연우, 방금 고모 멋있었지?”연우는 옆을 가리키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치즈스틱 드실래요?”“!!”온유한은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다 들은 것 같았다.뭐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강지아는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연
이번 연회에 주유정의 가족이 많이 왔다. 그녀의 부모님, 외할아버지 가족, 그리고 두 사촌 오빠까지.최신애가 주씨 가문에 보이는 열정을 보면, 마치 온유한과 주유정이 곧 결혼식장에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이를 본 강지찬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했다.“어?”이때 최의현이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유한이 주유정 외할아버지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어디 갔지?”이때 온씨 가문의 친척들과 주씨 가문의 친척들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한 가족처럼.한규진이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나갔어. 그런데 지아는?”“아마 어디 숨어서 몰래 울고 있겠지.”강지아는 울고 있지 않았다. 호텔 곳곳에 사람들이 있어서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마찬가지로 심심해하던 서원준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와, 어디서 온 미인이야, 정말 예쁘다.”강지아는 축 처진 모습으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고 옆에는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오늘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당연히 아프지.” 서원준이 뻔뻔스럽게 말했다. “네가 가자마자 아프기 시작했어. 이상하지 않아?”강지아는 웃음이 났다. “내일 다시 보러 갈 테니 오늘은 그냥 참아요.”“술 마시지 마. 취하면 위험해.” 서원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눈을 굴렸다. “오빠랑 언니랑 같이 왔는데, 내가 취해도 누가 감히 나한테 뭘 어쩌겠어요?”서원준은 화면 속 꽃 같은 얼굴을 보며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걱정돼서 그러지. 착하지, 술 마시지 마.”그가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원래는 별로 마실 생각이 없었던 강지아가 오히려 병을 들어 꿀꺽꿀꺽 몇 모금 마셨다.서원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잡으러 가는 척했다. “너 기다려.”강지아가 놀라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너 잡으러 가는 거야.”“미쳤어요?” 화면 속에서
최신애는 주씨 가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유한이는 어디 갔어요? 이렇게 많은 친척들이 왔는데, 사람들 눈을 피해 어디로 간 거예요.”온혁진이 말했다. “친구들 만나러 갔겠지. 이제 다 큰 어른인데 계속 간섭하지 마.”“안 간섭하고 되겠어요?” 최신애는 아들이 또 강지아랑 어울리러 갔을까봐 걱정됐다.오늘 많은 친척들이 왔는데 최신애는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여보, 지아를 금혁이한테 소개해주면 어떨까요?”온혁진이 놀라며 물었다. “뭐라고? 당신 친정 조카 말이야? 그 바보 같은 녀석?”최신애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혁이가 왜 바보예요? 그래도 해외에서 졸업했잖아요. 게다가 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지아랑 나이도 비슷해요.”“흥, 그 3류 대학 졸업장은 국내 2류 대학보다도 못해. 그걸 어떻게 자랑스러워할 수 있어?” 온혁진은 매우 반대했다. “우리 집안이랑 강씨 집안은 오랜 세월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 당신이 지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이해하지만 절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최금혁이 최신애의 친정 조카라서 온혁진은 그 녀석이 고등학교 때 여자애를 임신시켜서 고소당하고 국내 학교에서 버티지 못해 해외로 보내졌다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강씨 가문이 그런 녀석인 줄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최신애는 오히려 자기 조카와 강지아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정말로 소개해 주려고 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강지아와 최금혁을 불러오게 했다.한편, 온유한은 강지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주씨 가문 쪽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해 줄게.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온유한은 서원준처럼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진심이었다.하지만 여자는 신기한 생물이라 때로는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설명할 수 없다니, 그렇게 복잡한 건가?“내가 설명해 달라고 했어? 굳이 그럴 필요 없어.”지금 설명할 수 없다면
“아, 지아구나. 몇 년 만에 보니까 알아보지 못했네.”최금혁가 급히 일어나 강지아에게 손을 내밀었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만난 적 있어요?”“최금혁이라고 해. 아줌마 친정 조카란다.” 최신애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지아야, 네가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만난 적이 있어. 그 후 금혁이가 유학을 갔다가 최근에 돌아왔거든. 아줌마가 두 사람 나이도 비슷한 것 같아 서로 소개 해주고 싶었어. 그냥 친구 한 명 더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강지아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척하며 최신애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이해했다. 그녀가 온유한에게 집착할까 봐 걱정돼서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는 거였다.바보 같은 사람을 친정 조카에게 소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강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어릴 때 엄마를 잃었잖아요. 저를 아껴주고, 제 친구 관계까지 신경 써주시는 사람은 역시 아주머니 뿐이에요.”최신애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예상 밖이었다. 순진해 보이는 강지아가 이렇게 뼈 있는 말을 할 줄이야.그녀는 알아차렸다. 강지아가 그녀의 위선과 참견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하지만 그녀의 멍청한 조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강지아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고모가 널 아끼서 그런 거지. 우린 다 한 가족이잖아.” 최금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지아야, 연락처 좀 교환하자. 나중에 내가 너 재밌는 데 데려갈게.”표정이 음흉해 보였는데 딱히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이를 깨달은 강지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휴대폰을 안 가져왔어요.”그녀는 최신애를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죄송한데 오빠한테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간다고요.”최신애도 어색해하며 속으로 강지아가 은혜를 모른다고 원망했다.‘금혁이가 뭐가 안 좋다는 거지? 잘생기고 집안도 괜찮은데.’옆에 있던 온혁진이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채고 급히 말했다.“지아가 몸이 안 좋
강지찬과 정유진이 도착했다.구경꾼들도 점점 많아져 온혁진과 최신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온유한이 강지아를 꼭 안고 있는 걸 보자 주유정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 웃는 얼굴로 최신애에게 다가갔다.“다들 왜 여기 모여 계세요?” 주유정이 최신애의 팔짱을 끼며 웃으며 말했다. “저쪽에 생일 케이크가 준비됐어요. 아주머니, 이제 초를 불어야 해요. 여러분도 여기 서 있지 마시고 다 같이 가서 케이크 먹어요.”온혁진도 서둘러 사람들을 재촉했다. “그래요 그래요, 다들 케이크 드시러 가요.”하지만 강지찬이 움직이지 않자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있었다.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던 강지찬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강지아의 감정은 이미 안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온유한의 품에서 빠져나와 오빠와 언니 곁으로 걸어갔다.오늘은 최신애의 생일이었다. 진심이든 아니든 최신애는 예전에 그녀를 정말 아껴줬고 그녀 역시 최신애에게서 모성애를 느꼈었다.이런 날 소란을 피우는 건 철없는 행동일 뿐이었다.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빠, 난 괜찮아. 아까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팠어.”정유진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순순히 꾸짖는 척했다. “어제 옷을 얇게 입었다고 했잖아, 역시 감기 걸렸구나? 머리 아직도 아파? 안 되겠다 싶으면 먼저 집에 가.”강지아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럼 언니는 좀 더 놀다 가요. 난 연우를 데리고 먼저 갈게요. 애들은 일찍 자야 하니까.”“그래, 의사 선생님께 집에 들르라 할게.”정유진은 끝까지 연기에 동참했다.막 가려는데 연락처를 얻지 못한 최금혁이 다시 다가왔다.“지아야, 내가 데려다줄까?”장형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최금혁을 막았고 강지아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최금혁은 현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외쳤다. “지아야,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최신애는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해지며 화가 났다. 처음으로 조카가 정말 멍청하다는 걸
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최금혁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인간쓰레기, 외국에서 몇 년 동안 정신없이 놀다가 졸업장도 돈으로 샀다고 하던데.”“재작년에 어린 여자 모델이 최씨 집안에 배불뚝이가 되어 찾아갔대. 최금혁 아이라고 우겼다잖아. 그 아가씨도 이참에 최씨 집안으로 시집갈 생각이었나 봐. 하지만 외국에 있는 최금혁이 절대 인정하지 않아 최씨 집안은 결국 돈을 주면서 겨우 내쫓았대.”“최신애 아주머니는 무슨 생각이었대? 최금혁더러 설마 지아를 꼬시라고 한 것은 아니지?”“아저씨도 별로 신경 안 쓰신대. 주유정이 돌아온 이후로 최씨 아주머니는 미친 사람 같아. 무슨 짓을 하는지 좀 봐.”한규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유한과 주유정을 이어주는 게 주목적이긴 한데 너무 성급한 것 같아.”경은우의 안색도 안 좋아졌다.“정말 체면이 없다니까.”조금 전, 강지찬이 지아와 온유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면 오늘 최신애는 생일잔치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최신애는 굳은 얼굴로 케이크에 첫 칼집을 낸 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아마 지금쯤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생일파티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몇 년 동안 유지한 사모님의 단아한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했다. 모두 강지아 탓이다.주유정은 물 한 잔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유정아, 말해봐. 금혁이를 지아에게 소개한 게 정말 잘못이야?”최신애는 마치 잘못을 뉘우치는 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주유정은 당연히 그녀 편이다.“잘못이라니요. 금혁 씨는 이모님이 제일 아끼는 조카잖아요. 게다가 금혁 씨는 잘생기고 회사에서도 일도 잘하고요. 귀여운 지아를 보면 누구라도 중매를 서주고 싶어 할 거예요.”최신애의 마음은 그제야 위로가 되었다.“그래도 네가 나를 잘 아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만 금혁이가 예전에 철이 없어서 여러 번 사고를 치다 보니 사람들이 금혁이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아. 다 내 탓이야. 지아의 결혼은 당연히 오빠와 새언니가 챙길 텐데, 내가 참견하는 것이 잘
온유한은 얼굴 반쪽이 퉁퉁 부은 최금혁을 옆으로 끌어내렸다.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최금혁은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형, 내가 누굴 건드렸다고 그래? 고모가 나에게 강지아를 소개해줬어. 그런데 그 계집애가 정말 클수록 예뻐지는 것 같아, 옛날 그 어리바리한 모습 하고는 완전히 달라...”말을 마치기도 전에 온유한이 그의 멱살을 잡았고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최금혁은 여태껏 형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형, 형. 대체 뭐 하는 거야?”“지아한테서 떨어져!”“왜? 강지찬이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한 번 대시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네가 대시한다고?”안경을 끼고 있는 온유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감히 한 번 해봐!”그는 하룻밤에 연달아 두 번이나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강지찬은 그렇다 치더라도 온유한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최금혁은 그제야 무슨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더니 말했다.“설마 형, 형도 강지아 좋아해?”최금혁을 옆으로 내던진 온유한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외삼촌의 외아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때려죽였을 것이다.“어쨌든 지아 옆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간다면 강지찬도 가만두지 않을 거고 나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런데 주유정 누나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최금혁은 진지한 얼굴로 묻더니 이내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형, 설마 양다리 걸치는 거야? 새 사랑과 옛사랑 모두 포기하지 못하겠어? 알았어. 이 동생이 졌네.”온유한이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최금혁은 센스있게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형을 하찮게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친척들이 그렇게 칭찬하던 사촌 형이었고 만약 열 번 중 아홉 번 매를 맞을 때마다 부모님이 온유한과 비교했기 때문이다.결국 형도 모든 남자들처럼 하체가 먼저 움직이는 동물이나 다름없었다.최금혁은 마침내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연회는 무사히 끝났고 강지찬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연회 내내 얼굴색이 안 좋았고 갈 때
명성 건물로 돌아온 온유한은 옆집 베란다는 깜깜하고 인기척이 없는 걸 보고 강지아는 집에 오지 않았음을 알았다.다음날 휴일이라 좀 늦게 일어났다.아래층에 가서 아침을 먹고 강씨 저택으로 가서 강지아를 불러내 올까 고민하던 중 강지아가 심플한 캐주얼 차림으로 하품을 하며 문밖으로 나오는 것을 발견했다.눈이 마주친 순간 하품하던 강지아의 얼굴이 굳어졌다.“여긴 왜 왔어?”강지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아마 온유한이 별로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내가 여기 사는 것은 어떻게 알았어? 오빠가 알려줬어?”계집애가 앞으로 혹시라도 본인을 피할까 봐 온유한은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그저 ‘응’이라고 얼버무렸다.강지아가 물었다.“무슨 일인데?”“최금혁이 다시는 괴롭히지 않을 거야. 내가 경고했으니까.”강지아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응’하고 대답한 뒤 능숙하게 아침 식사를 주문했다.그녀는 가게 안에서 먹을 생각이 없었고 포장해서 집으로 가져갈 계획이었다.어젯밤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저택에서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한밤중에 스스로 차를 몰고 명성 건물에 돌아왔고 밤을 새워 작업실 인테리어 설계도를 완성했다.지금은 아침을 먹고 잘 준비를 하려던 참이었는데 온유한이 바로 그녀의 뒤를 따라왔다.“또 무슨 일인데?”“나 집에 초대하지 않을 거야?”강지아는 어이없는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앞으로 우리 거리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만약 오빠 엄마가 다음에 아무 남자나 데리고 와서 나한테 소개해 주면 우리 오빠가 아마 절대 가만있지 않을 거야.”그녀를 쳐다보던 온유한은 손을 들어 엘리베이터를 누르더니 사람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강제로 끌고 들어간 후 엘리베이터 층을 눌렀다.일련의 동작들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다.“내가 22층에 사는지 어떻게 알았어?”“이 집은 내가 너의 오빠와 같이 와서 보고 산 거야.”이 사람을 쫓아낼 수 없는 것을 안 강지아는 어쩔 수 없이 집으로 데리고 들어갔다.하지만 온유한을
최신애는 반평생 살면서 오늘 처음으로 지금까지 쌓아왔던 고고한 이미지를 다 내려놓은 채 마치 미친 사람처럼 싸워봤다.그리고 온유한이 들어오는 모습을 보고 더욱 흥분해서 그에게 물었다.“봐봐, 네가 좋아한다던 여자가 지금 어떤 꼴인지. 더 할 말이 있어?”온유한은 그저 말없이 주위를 둘러봤는데 침대는 이미 엉망진창으로 된 채 바닥에는 뜯긴 콘돔이 널려져 있었다.그러나 그는 아주 덤덤하게 현채영에게 다가가 그녀의 샤워 가운을 다시 입혀준 뒤 머리도 뒤로 넘겨주며 다정하게 물었다.“어디 다친 데 없어요?”현채영은 재빨리 답했다.“아니요.”“그럼 가서 옷부터 갈아입어요.”온유한의 말에 그녀는 곧바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최신애는 자기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는 온유한의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끄, 끝이야?”그리고 온유한을 잡고 헝클어진 침대를 가리키며 다시 말을 이었다.“저 여자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안 보이냐고! 현장까지 잡은 마당에 넌 아무렇지도 않아?”그러나 온유한은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이건 저랑 채영 씨 사이의 문제니까 상관하지 마세요.”“온유한!”최신애는 복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렇게 변했어?”온유한은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여유롭게 답했다.“지태주 씨와의 일은 채영 씨가 나중에 해명할 겁니다. 저는 저 사람을 믿거든요.”“아직도 믿는다고?”최신애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두 눈으로 직접 다른 남자랑 침대에서 뒹군 꼴을 보고도 믿을 수 있어?”“그럴만한 사정이 있었겠죠.”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지태주는 히죽거리며 그에게 말했다.“온 대표님은 정말 좋은 남자의 표본인 것 같네요.”그의 말에 온유한이 그를 힐끔 쳐다보자 지태주도 같이 매섭게 쏘아보았지만 더 이상 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이 상황이 그저 답답해서 당장에라도 기절할 것 같았고 입으로는 끊임없이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미쳤어, 진짜 미쳤어.”계획대로라면 오늘 밤 현채영을 바로 쫒아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사람들이 안에서 나왔다.제일 앞에 서 있던 강지찬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뒤따라오던 최의현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저 사람 현채영 아니야? 저 남자는 누가야? 낯이 익네.”한규진은 호텔 로비에 막 들어선 최신애를 보고 한마디 했다.“쯧쯧, 볼거리가 생겼네.”현채영은 그 남자와 반대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최신애가 뒤따라가자 최의현 일행도 따라갔다.“미친, 생각났어.”최의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말했다.“저 자식, 그 지씨 가문 셋째 아니야? 추호와 친하던 애 있잖아. 지씨 가문에서 꽤 총애를 받고 있다고 들었는데.”“지씨 가문 셋째?”한규진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서울에서 지씨 가문은 명성이 높은 집안은 아니지만 구설수는 꽤 많다.예전에 지씨 집안의 막내아들이 밖에서 데려왔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사생아이지만 정실 마누라가 낳은 아들보다 더 총애를 받고 있다고 했다.틀림없이 지씨 가문 셋째 아들 지태주일 것이다.지태주와 현채영이 만난다고?생각보다 재미있는 관계가 될 것 같다.최의현은 당당한 모습으로 최신애의 뒤를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스위트룸 방문 앞에 멈춰선 최신애는 노크를 하는 대신 손목시계만 계속 들여다봤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20여 분 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온유한은 강지찬 일행과 마주쳤다.온유한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강지찬을 슬쩍 쳐다봤다.강지찬은 얼음장같이 차가운 얼굴로 온유한을 시크하게 흘겨보았다. 화가 난 건지 짜증 난 건지 알 수 없었다.옆에 있던 최의현이 온유한 앞에 다가가더니 턱으로 스위트룸 방향을 가리켰다.“어떻게 된 일이야? 현채영이 왜 지태주와...”온유한이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온유한의 말에 강지찬 일행은 온유한을 멍청하다고 생각했다.남자와 여자가 한밤중에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가서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고 있다. 설마 철학 토론이라도 하겠는가?하지만 온유한은 그들의 생각 따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본인
“지찬아, 유한이가 미친 거 아닐까? 임유희를 집에서 쫓아내고 현채영을 온씨 저택에 데려갔어. 최신애가 엄청 화를 낼 것 같은데?”최의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현채영에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는지 몰랐네... 그때 지아를 신경 쓰는 것보다 더...”강지찬이 힐끗 바라보자 최의현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임유희 때문에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 사이도 안 좋아졌어. 임씨 가문이 체면을 완전히 구겼잖아. 아마 이번 기회에 단단히 복수하려 할 거야. 그 임씨 부부도 생각이 있는 어른들은 아닌 것 같아. 온유한이 임유희에게 관심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어떻게든 딸을 이용해 온씨 가문에 바싹 달라붙어 가문의 지위를 올리려 했으니 말이야. 하지만 최신애만 그걸 모르고 어떻게든 유한이와 임유희를 엮어주느라 골머리를 앓았지. 온유한은 임씨 가문의 속셈을 알았을까?”한규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코웃음을 쳤다.“그 자식 계속 약속 펑크내서 이제 어떻게 생겼는지도 까먹을 것 같아.”경은우가 말했다.“유한이 형에게 다른 생각이 있는 것일 거야. 유한이 형이 절대 함부로 누구를 대하는 사람이 아닌데 요즘 하는 행동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니까.”최의현이 말했다.“며칠 전 만났을 때 임씨 가문 얘기를 몇 마디 했는데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어.”몇 사람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강지찬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밤 10시가 넘은 시각. 하루 종일 잠을 잔 현채영은 가방을 들고 외출 준비에 나섰다.“잠깐!”거실에 앉아 있던 최신애는 현채영의 화려한 차림을 보고 화를 냈다.온유한이 석식이 있어 집을 비우니 현채영은 한밤중에 외출을 하려 했다.현채영이 뒤돌아서서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무슨 일 있으세요?”“어디 가는 거야?”“친한 여자친구들과 술 약속이 있어 오늘 밤엔 안 들어올 거예요.”그 말에 최신애는 바로 화를 냈다. “친한 여자친구들? 부잣집에 시집갈 생각밖에 안 하는 날라리 여자들?”현
임유희도 온유한에게 쫓겨난 후 몸져누워 열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임유희는 이제 주위에서 웃음거리가 됐다.이 때문에 임씨 부부와 임유희 오빠는 온씨 가문에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바쁜 일과를 마치고 병원으로 향한 온유한은 문 앞에서 온혁진과 최신애가 다투는 소리를 들었다.“그때 임유희를 집에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잖아...”싸움에 휘말리기 싫은 온유한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병실에서 최신애가 병상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그럼 내 탓이란 말이에요? 당신 하나뿐인 아들이 현채영 그 여자와 엮이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강지아가 어때서?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그렇게 하니까 그렇지! 최신애, 우리 온씨 가문을 망치려고 작정한 거야?”온혁진의 말을 들은 최신애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평생 사랑한 이 남자가 그녀를 이렇게 생각할 줄 몰랐다.“내가 그런 거라고요? 다 유한이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요!”온혁진은 더 이상 이 일로 최신애와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았다.“처음부터 얘기했잖아. 유한이의 일은 본인이 알아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당신이 기어코 유한이와 지아를 갈라놓으니 이렇게 된 거잖아. 강씨 가문과 원수가 되었고 임씨 가문의 미움도 샀어. 만약 임씨 가문이 그때 강지찬처럼 작정하고 우리를 괴롭힌다면 이번에는 누구에게 부탁해서 도와달라고 할 거야?”집안 사업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온혁진의 말에 최신애도 바짝 긴장했다.“투자자들도 돈을 더 벌기 위해 투자하는데 임씨 가문 때문에 우리에게 뭐라고 하겠어요?”“당신이 뭘 알아? 정책이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어. 우리보다 우수한 의료 회사들도 점점 더 많아지고 있고. 경쟁업체에서 얼마 전에 외국에서 새로운 의료기기를 도입했다고 들었어. 우리가 올해 주력으로 추진하려고 했던 프로젝트였는데...”온혁진은 말을 할수록 화가 났다.“이런 얘기를 당신에게 해봤자 당신이 뭘 알겠어. 어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임씨 가
강지아도 명성 빌딩에 오래 묵을 생각이 없었기에 아침을 먹자마자 서원준과 함께 집을 나섰다.현관문 너머로 서원준의 목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그제야 어젯밤에 서원준도 이 이곳에 머물렀다는 것을 알고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벽을 내리쳤다.한편 기분이 좋아진 서원준은 일부러 온유한을 도발하기 위해 한마디 했다.“지아야, 이 집 어차피 비어 있는데 우리가 이사 오는 게 어때?”강지아는 서원준을 보지도 않고 대답했다.“꿈 깨.”서원준이 일부러 다가가서 강지아를 품에 꽉 껴안자 강지아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뭐 하는 거야?”서원준은 아쉬움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내 여자친구에게 뭘 하겠어? 어젯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중요한 걸 못했네.”강지아가 주먹으로 그의 가슴을 치며 말했다.“함부로 행동하기만 해 봐!”강지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보자 무언가를 기대하던 서원준은 순간 주눅이 들었다.이런 상황에 사랑하는 남녀들이라면 분명 저도 모르게 끌려서 그다음 진도로 넘어갔을 것이다.놀라움만 가득한 눈빛으로 서원준을 바라보는 순수한 강지아에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놓았다.하긴 강지아가 왜 고백을 받았는지 서원준은 잘 알고 있었다. 그저 온유한을 속이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서원준은 아쉬운 마음에 강지아의 볼을 꼬집은 뒤 말했다.“내일 나 출장 가. 저녁 비행기인데 같이 갈래? 꽤 재미있는 곳인데.”서원준은 연예계 활동 때문에 출장을 가야 했다. 강지아가 연예인은 아니지만 연예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거기에 가면 많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다.“안 가. 요즘 작업실에서 현지 수주를 받은 게 있어서 자리 비우면 안 돼.”“알았어. 그럼 빨리 갔다 올게.”두 사람 모두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매일 만날 수는 없었다.오늘 서원준은 석식 약속이 있었고 내일도 바쁘기에 출장에서 돌아온 뒤에야 강지아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차에 타기 전에 서원준은 우물쭈물하더니 자신의 얼굴을 가리키며 한마디 했다.“여기
오늘 기분이 좋은 서원준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강지아는 진수혁의 도움을 받아 서원준을 명성 빌딩에 데려다줬다. 그나마 여기가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다.진수혁은 이미 자신의 물건을 모두 옮겨갔기에 집은 예전 상태로 되었으며 먼지 하나 없이 깨끗이 청소까지 했다.두 사람은 서원준을 게스트 룸, 즉 진수혁이 묵었던 방에 데려다 눕혔다.이불을 끌어안은 서원준은 계속 웃고 있었다.“지아야... 나 너무 좋아... 정말 기뻐...”강지아는 진수혁에게 말했다.“이 집 어차피 비워둘 건데 그냥 있어도 되는데.”“여태까지 묵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고마워.”진수혁은 부엌을 가리키며 말했다.“전기와 가스 카드는 모두 원래 있던 곳에 놓아뒀어. 비용은 이미 지불했고.”말을 마친 진수혁은 오래 머물지 않고 이내 자리를 떴다.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진수혁은 온유한에게 명성 빌딩에서 이사를 했기에 더는 가지 않을 거라고 메시지를 보냈다.온유한은 휴대전화를 힐끗 본 뒤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다.병상에 누워있는 최신애는 최씨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토하기 시작했다.“이 자식 머릿속에 온통 그 여자 생각뿐이야. 우리 온씨 가문과 이 엄마는 안중에도 없다니까!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어 그러나 봐. 내가 죽어야 본인을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내 팔자야! 힘들게 키운 아들이 얼마 전까지 멀쩡했는데 지금은 원수나 다름없게 되었어. 하느님, 제가 살아서 뭘 하겠습니까?”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얘기하고 계세요. 야식 좀 사 올게요.”황은숙도 더 이상 여기에 있고 싶지 않았다. 시간은 벌써 한밤중이고 최신애의 하소연을 한참 동안이나 들으니 지칠 대로 지쳤다.“됐어. 나도 금성이 집에 가봐야 해. 유한아, 엄마 화나게 하지 말고 잘 모셔.”황은숙과 최금성은 서둘러 자리를 떴다.병실에는 온씨 모자만 남아 있었다.최신애의 얼굴에 있던 슬픔이 어느새 원망으로 변했다.“왜, 나와 같이 있기도 싫은 거야?”온유한이 말했다.“채영이 집
강지아의 인터뷰는 아주 재미있었다. 사회자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화령이 차를 우리면서 잡담을 나누는 형식으로 인터뷰를 했다. 그러면서 강지아의 다도 실력도 선보이게 되었다.녹화가 끝난 후 점심시간이 되어 화령이 강지아에게 점심을 사주기로 했다.“얼마 전에 온씨 집안이 떠들썩했던 거 알아?”강지아가 고개를 갸웃하자 화령이 말을 이었다.“나도 금성 씨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아직 외부로 알려지진 않은 것 같아.”국물을 한 모금 마신 강지아는 무슨 일이냐고 묻지도, 화령이 말하는 것을 제지하지도 않았다.“두 가지 일이 일어났어. 첫 번째는 최신애가 온씨 가문에서 며느리에게 물려줄 가보를 현채영이 훔쳤다면서 누명을 씌웠지. 그래서 경찰까지 불렀대. 온유한이 최신애와 싸우고 나서 경찰이 갔고 현채영은 별일 없었대. 두 번째 일은 어젯밤 온유한이 현채영을 위해 최신애가 집을 비운 틈을 타 임유희를 온씨 저택에서 쫓아냈고 최신애는 한밤중에 화를 내며 병원에 입원했대.”강지아는 국물을 삼킨 뒤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잘됐네. 두 사람 다 힘든 것보다 낫네. 적어도 현채영 씨는 힘들지는 않으니까.”강지아가 별 반응이 없자 화령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온유한이 많이 변했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아.”강지아가 말했다.“좋은 사람을 만났나 보지 뭐. 현채영 씨, 괜찮잖아.”화령은 온유한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작업실로 돌아온 강지아는 커피 한 잔을 끓였다.서랍을 열어보니 서원준에게 선물할 넥타이를 아직 전달하지 않아 그대로 있었다.나중에 기회를 봐서 그에게 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휴대폰이 울려서 수신자를 보니 진수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새집을 찾았기에 명성 빌딩에서 묵지 않겠다고 했다.월세도 내지 않고 강지아의 집에 산 것에 대해 저녁을 사겠다고 했다.“남자친구 데려가도 돼?”“당연하지. 단골 술집에서 만나. 사장님더러 십몇 년 동안 간직해온 술을 오픈하라고 해야겠네.”“그래.”강지아
순간 임유희는 오늘 밤 온유한의 손에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천천히 다가가 온유한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했던 임유희였다.임씨 가문이 온유한을 몰아세우면 그녀는 온유한 앞에서 이해심 많은 모습을 보여주며 그에게 점수를 딸 생각이었다.임근우와 장희수도 잘 협조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변고가 생겼다.“콜록... 유한 오빠... 그게...”“봤냐니까?”온유한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안경을 쓰고 있지 않아 표정이 매우 사나워 보였다.“아니, 아니...”임유희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물을 흘렸다.“방금 본 건 잊어버리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네네, 알겠어요!”임유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이 순간 온유한의 얼굴이 너무 무서워서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이 한참 후에야 손을 뗐고 임유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바닥에 쓰러졌다.하마터면 온유한의 손에 죽을 뻔했다.이 남자는 더 이상 3년 전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다.지금의 온유한은 강지아를 위해 미쳐버린 상태였다.그는 심장이 있는 왼쪽 가슴에 ‘지'자를 문신했다.미친 거 아닐까?너무 무섭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온 목적은 분명했다.강지아를 위해서라면 친엄마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이다.이런 남자를 그녀가 어떻게 옆에 둘 수 있겠는가?감히 엄두도 못 낼 것이다.임유희는 기다시피 하며 온유한의 방을 뛰쳐나갔다.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혹시라도 온유한이 따라올까 봐 서둘러 문을 닫은 뒤 방문을 잠갔다.화장실로 가서 세수를 한 뒤 거울을 보니 목에 빨간 자국이 생겼다.온유한이 진짜로 그녀를 목 졸라 죽일 뻔했다!침대에 몸을 웅크린 뒤 장희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입술을 깨물며 울음소리를 내지 못했다.“엄마, 온유한이랑 결혼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장희수는 지금 한창 신이 난 상태였다. 최신애가 장희수와 친해지기 위해 카드도 많이 양보했다.“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거야?”장희수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
“진짜 열받아 죽겠어. 정말!”화가 난 최신애는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엄마인 나를 점점 안중에도 안 두는구나. 같이 지옥에 가자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온혁진은 이런 최신애가 너무 귀찮았다. 낮에 임씨 가문 사람들과 만나면 그들은 온유한과 임유희의 혼사를 언제 치를 것이냐고만 물었다.지금 이런 상황에서 온유한이 임유희와 약혼한다는 것은 비현실적이다.“애초에 임씨 가문을 건드리지 않았더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우리가 오히려 발목이 잡혔어.”온혁진은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임씨 가문 사람들에게 어떻게 얘기하는지 모르겠지만 유한이 결혼에 대해 나는 상관하지 않을 거야. 경고하는데 당신도 좀 똑똑하게 굴어, 나중에 이도 저도 아닌 꼴이 되지 말고. 임씨 가문 사람들도 속셈이가 이만저만이 아니야.”최신애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속셈이가 있어 봤자 무슨 속셈이가 있겠어요? 유희를 우리 집 며느리로 들이고 싶은 것뿐이겠죠. 걱정하지 마세요. 유희가 유한이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임씨 가문도 그저 말로만 재촉하는 것이니 별일 없을 거예요. 게다가 나라고 상관하고 싶겠어요? 현채영 같은 여자가 강지아보다 훨씬 못한데 어떻게 우리 온씨 가문에 들이겠어요? 그런 여자를 들였다가는 서울의 웃음거리가 될 거예요.”온혁진은 골치가 아팠다. 말로는 상관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온유한이 진짜로 현채영과 결혼하려 한다면 절대 허락할 수 없었다.그래서 이 일은 최신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이날 오후 최신애는 장희수와 함께 미용실에 갔다. 대화가 잘 통했는지 저녁에는 카드 놀이하러 함께 갔다.온유한이 집에 돌아왔을 때, 집에는 임유희만 있었고 현채영은 다른 일이 있어서 현씨 저택으로 돌아갔다.“유한 오빠, 아직 밥 안 먹었죠?”온유한이 ‘응’이라고 대답하자 임유희는 얼른 하인을 시켜 밥을 차리게 하더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일이 있으셔서 밖에서 저녁 드시고 오겠대요. 아버님도 석식이 있으시다고 했고 현채영 씨도 저녁에 늦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