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또 그 사람들이 귀찮게 했어?” 강지찬이 정유진을 품에 안고 그녀의 목덜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정유진은 눈을 감으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에요. 다 해결됐어요.” “우리 아내가 점점 더 대단해지네. 이거 어쩌면 좋지? 평생 너한테 기대고 싶을 지경이야.” 정유진은 그제야 째려보며 말했다. “너무 오버하지 마요. 프로젝트가 얼마나 많은데 나 정말 정신없어요.” 강지찬은 사랑하는 아내의 허리를 놓고 싶지 않은 듯, 계속 붙들고 있었다. “며칠만 더 참아줘. 드러난 곳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따로 움직이면 더 수월해질 거야.” 정유진은 그가 나름의 계획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당연히 지지했다. 두 사람은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강지찬이 연우만 집에 있는 것을 보더니 이마를 찌푸렸다. “지아는 아직도 안 들어왔어?” 정유진은 설명했다. “원준 씨가 교통사고가 났잖아요. 그래서 병원에서 간호 중이에요.” 강지찬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그는 다시 정유진에게 물었다. “며칠 후에 있을 온씨 집안 생신 연회, 옷은 준비됐어?” “오늘 도착했어요. 아직 지아는 입어보지 않았지만요.” 이 대화를 나누면서 두 사람의 표정이 모두 무거워졌다. 최신애의 생일에 강지아가 갈지 말지 고민하는 것이다. 다음 날, 강지아는 집에 돌아왔고 정유진은 다시 이 이야기를 꺼냈다. “갈 거예요. 왜 안 가겠어요.” 강지아가 과일을 먹으며 말했다. “안 가면 사람들이 내가 쫄았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정유진은 그녀에게 주의를 줬다. “그때 유정 씨가 분명히 있을 거야.” “있으면 있는 거죠, 뭐.” 강지아는 마음의 준비를 다 했다고 생각했지만 최신애가 마치 미래 며느리를 소개하듯 주유정과 팔짱을 끼고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야, 자신이 생각만큼 대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정유진은 그녀의 얼굴빛이 달라진 걸 보고 살며시 손을 잡아줬다. “언
강지아가 허리를 굽혀 연우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녀 뒤에 있던 사람들은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그녀가 몸을 돌렸을 때 그녀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두 여자 중 한 명은 매우 당황한 표정을, 다른 한 명은 ‘내가 잘못 말했나? 뭐 어쩌라고’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강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키가 큰 편이었고 강지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있어서 마주 보고 있는 여자들보다 반 머리 정도 더 컸다.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문득 정유진이 귀찮게 구는 사람들을 대할 때의 표정이 떠올랐다. 담담한 표정.그래서 그녀도 그렇게 해보려 했지만 역시 어린 탓에 눈빛에 무의식적으로 경멸의 기색이 묻어났다.“내가 바보라고? 그럼 남 뒤에서 험담하는 당신들은 뭐지? 교양 없는 애들인가?”이 두 소녀도 모두 서울의 유명한 집안 출신이었기에 교양 없다는 말을 듣는 건 매우 창피한 일이었다.문제는 그들이 억울하다고 할 수도 없다는 거였다. 남 뒤에서 말하다 현장에서 들킨 거니까.“너, 네가 잘났다고 생각하지 마. 유한 오빠는 널 싫어해. 오빠는 줄곧 유정 언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이 말은 최근 강지아의 머릿속을 수없이 맴돌던 말이었기에 그녀에겐 별로 상처가 되지 않았다.“온유한이 주유정을 기다리든 말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강지아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언제 온유한을 좋아한다고 했어? 울면서 온유한과 결혼하고 싶다고 한 적 있어? 이 세상에 온유한만 남자인 것도 아니고.”두 소녀는 그녀의 날카로운 반박에 할 말을 잃고 치마를 들고 도망쳤다.강지아는 눈썹을 치켜올리며 승리의 기분을 만끽했다.이때 치마가 연우에 의해 살짝 당겨졌다.“연우, 방금 고모 멋있었지?”연우는 옆을 가리키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저씨, 치즈스틱 드실래요?”“!!”온유한은 언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들의 대화를 다 들은 것 같았다.뭐 들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강지아는 그를 상대할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연
이번 연회에 주유정의 가족이 많이 왔다. 그녀의 부모님, 외할아버지 가족, 그리고 두 사촌 오빠까지.최신애가 주씨 가문에 보이는 열정을 보면, 마치 온유한과 주유정이 곧 결혼식장에 들어설 것 같은 분위기였다.이를 본 강지찬의 얼굴은 얼어붙은 듯했다.“어?”이때 최의현이 소리를 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온유한이 주유정 외할아버지와 대화하고 있었는데, 어디 갔지?”이때 온씨 가문의 친척들과 주씨 가문의 친척들이 함께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한 가족처럼.한규진이 잔에 든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다. “나갔어. 그런데 지아는?”“아마 어디 숨어서 몰래 울고 있겠지.”강지아는 울고 있지 않았다. 호텔 곳곳에 사람들이 있어서 그녀는 위층으로 올라가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마찬가지로 심심해하던 서원준이 영상통화를 걸어왔다. 그녀가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모습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와, 어디서 온 미인이야, 정말 예쁘다.”강지아는 축 처진 모습으로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고 옆에는 스파클링 와인 한 병이 놓여 있었다.“오늘 어때요? 아직도 아파요?”“당연히 아프지.” 서원준이 뻔뻔스럽게 말했다. “네가 가자마자 아프기 시작했어. 이상하지 않아?”강지아는 웃음이 났다. “내일 다시 보러 갈 테니 오늘은 그냥 참아요.”“술 마시지 마. 취하면 위험해.” 서원준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눈을 굴렸다. “오빠랑 언니랑 같이 왔는데, 내가 취해도 누가 감히 나한테 뭘 어쩌겠어요?”서원준은 화면 속 꽃 같은 얼굴을 보며 마음이 간질간질해졌다.“걱정돼서 그러지. 착하지, 술 마시지 마.”그가 마시지 말라고 하니까, 원래는 별로 마실 생각이 없었던 강지아가 오히려 병을 들어 꿀꺽꿀꺽 몇 모금 마셨다.서원준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침대에서 내려와 잡으러 가는 척했다. “너 기다려.”강지아가 놀라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너 잡으러 가는 거야.”“미쳤어요?” 화면 속에서
최신애는 주씨 가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아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발견했다.“유한이는 어디 갔어요? 이렇게 많은 친척들이 왔는데, 사람들 눈을 피해 어디로 간 거예요.”온혁진이 말했다. “친구들 만나러 갔겠지. 이제 다 큰 어른인데 계속 간섭하지 마.”“안 간섭하고 되겠어요?” 최신애는 아들이 또 강지아랑 어울리러 갔을까봐 걱정됐다.오늘 많은 친척들이 왔는데 최신애는 문득 한 사람이 생각났다. “여보, 지아를 금혁이한테 소개해주면 어떨까요?”온혁진이 놀라며 물었다. “뭐라고? 당신 친정 조카 말이야? 그 바보 같은 녀석?”최신애는 그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금혁이가 왜 바보예요? 그래도 해외에서 졸업했잖아요. 게다가 생긴 것도 나쁘지 않고 지아랑 나이도 비슷해요.”“흥, 그 3류 대학 졸업장은 국내 2류 대학보다도 못해. 그걸 어떻게 자랑스러워할 수 있어?” 온혁진은 매우 반대했다. “우리 집안이랑 강씨 집안은 오랜 세월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했어. 당신이 지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건 이해하지만 절대 쓸데없는 일에 끼어들지 마.”최금혁이 최신애의 친정 조카라서 온혁진은 그 녀석이 고등학교 때 여자애를 임신시켜서 고소당하고 국내 학교에서 버티지 못해 해외로 보내졌다는 걸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강씨 가문이 그런 녀석인 줄 모를 리가 없었다.하지만 최신애는 오히려 자기 조카와 강지아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하며, 정말로 소개해 주려고 했다. 그녀는 사람을 보내 강지아와 최금혁을 불러오게 했다.한편, 온유한은 강지아의 말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주씨 가문 쪽 일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해 줄게.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온유한은 서원준처럼 허튼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다 진심이었다.하지만 여자는 신기한 생물이라 때로는 진실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설명할 수 없다니, 그렇게 복잡한 건가?“내가 설명해 달라고 했어? 굳이 그럴 필요 없어.”지금 설명할 수 없다면
“아, 지아구나. 몇 년 만에 보니까 알아보지 못했네.”최금혁가 급히 일어나 강지아에게 손을 내밀었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 만난 적 있어요?”“최금혁이라고 해. 아줌마 친정 조카란다.” 최신애가 열정적으로 말했다. “지아야, 네가 기억 못 할 수도 있겠다. 예전에 우리 집에서 만난 적이 있어. 그 후 금혁이가 유학을 갔다가 최근에 돌아왔거든. 아줌마가 두 사람 나이도 비슷한 것 같아 서로 소개 해주고 싶었어. 그냥 친구 한 명 더 생기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강지아는 머리카락을 만지는 척하며 최신애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이해했다. 그녀가 온유한에게 집착할까 봐 걱정돼서 남자 친구를 소개해주는 거였다.바보 같은 사람을 친정 조카에게 소개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강지아는 미소를 지었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해요. 저는 어릴 때 엄마를 잃었잖아요. 저를 아껴주고, 제 친구 관계까지 신경 써주시는 사람은 역시 아주머니 뿐이에요.”최신애의 얼굴색이 살짝 변했다.예상 밖이었다. 순진해 보이는 강지아가 이렇게 뼈 있는 말을 할 줄이야.그녀는 알아차렸다. 강지아가 그녀의 위선과 참견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하지만 그녀의 멍청한 조카는 알아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강지아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우리 고모가 널 아끼서 그런 거지. 우린 다 한 가족이잖아.” 최금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지아야, 연락처 좀 교환하자. 나중에 내가 너 재밌는 데 데려갈게.”표정이 음흉해 보였는데 딱히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이를 깨달은 강지아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휴대폰을 안 가져왔어요.”그녀는 최신애를 향해 말했다. “아주머니, 죄송한데 오빠한테 말씀 좀 전해주시겠어요? 제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먼저 간다고요.”최신애도 어색해하며 속으로 강지아가 은혜를 모른다고 원망했다.‘금혁이가 뭐가 안 좋다는 거지? 잘생기고 집안도 괜찮은데.’옆에 있던 온혁진이 상황이 좋지 않음을 눈치 채고 급히 말했다.“지아가 몸이 안 좋
강지찬과 정유진이 도착했다.구경꾼들도 점점 많아져 온혁진과 최신애는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온유한이 강지아를 꼭 안고 있는 걸 보자 주유정의 눈에 날카로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곧바로 표정을 바꾸고 웃는 얼굴로 최신애에게 다가갔다.“다들 왜 여기 모여 계세요?” 주유정이 최신애의 팔짱을 끼며 웃으며 말했다. “저쪽에 생일 케이크가 준비됐어요. 아주머니, 이제 초를 불어야 해요. 여러분도 여기 서 있지 마시고 다 같이 가서 케이크 먹어요.”온혁진도 서둘러 사람들을 재촉했다. “그래요 그래요, 다들 케이크 드시러 가요.”하지만 강지찬이 움직이지 않자 다른 사람들도 그대로 있었다.표정이 매우 좋지 않았던 강지찬이 다시 한 번 물었다. “무슨 일이에요?”강지아의 감정은 이미 안정되어 있었다. 그녀는 온유한의 품에서 빠져나와 오빠와 언니 곁으로 걸어갔다.오늘은 최신애의 생일이었다. 진심이든 아니든 최신애는 예전에 그녀를 정말 아껴줬고 그녀 역시 최신애에게서 모성애를 느꼈었다.이런 날 소란을 피우는 건 철없는 행동일 뿐이었다.그녀는 미소 지었다. “오빠, 난 괜찮아. 아까 갑자기 머리가 좀 아팠어.”정유진은 그녀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순순히 꾸짖는 척했다. “어제 옷을 얇게 입었다고 했잖아, 역시 감기 걸렸구나? 머리 아직도 아파? 안 되겠다 싶으면 먼저 집에 가.”강지아는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그럼 언니는 좀 더 놀다 가요. 난 연우를 데리고 먼저 갈게요. 애들은 일찍 자야 하니까.”“그래, 의사 선생님께 집에 들르라 할게.”정유진은 끝까지 연기에 동참했다.막 가려는데 연락처를 얻지 못한 최금혁이 다시 다가왔다.“지아야, 내가 데려다줄까?”장형준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최금혁을 막았고 강지아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떠났다.최금혁은 현장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여전히 외쳤다. “지아야, 나중에 내가 찾아갈게!”최신애는 얼굴이 푸르락붉으락해지며 화가 났다. 처음으로 조카가 정말 멍청하다는 걸
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최금혁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한 것이 한스러웠다.“인간쓰레기, 외국에서 몇 년 동안 정신없이 놀다가 졸업장도 돈으로 샀다고 하던데.”“재작년에 어린 여자 모델이 최씨 집안에 배불뚝이가 되어 찾아갔대. 최금혁 아이라고 우겼다잖아. 그 아가씨도 이참에 최씨 집안으로 시집갈 생각이었나 봐. 하지만 외국에 있는 최금혁이 절대 인정하지 않아 최씨 집안은 결국 돈을 주면서 겨우 내쫓았대.”“최신애 아주머니는 무슨 생각이었대? 최금혁더러 설마 지아를 꼬시라고 한 것은 아니지?”“아저씨도 별로 신경 안 쓰신대. 주유정이 돌아온 이후로 최씨 아주머니는 미친 사람 같아. 무슨 짓을 하는지 좀 봐.”한규진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유한과 주유정을 이어주는 게 주목적이긴 한데 너무 성급한 것 같아.”경은우의 안색도 안 좋아졌다.“정말 체면이 없다니까.”조금 전, 강지찬이 지아와 온유한의 체면을 봐주지 않았다면 오늘 최신애는 생일잔치에서 비웃음거리가 되었을 것이다.최신애는 굳은 얼굴로 케이크에 첫 칼집을 낸 뒤 핑계를 대고 자리를 떴다. 아마 지금쯤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생일파티에 온 것을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몇 년 동안 유지한 사모님의 단아한 이미지가 하루아침에 무너질 뻔했다. 모두 강지아 탓이다.주유정은 물 한 잔을 조심스럽게 건넸다.“유정아, 말해봐. 금혁이를 지아에게 소개한 게 정말 잘못이야?”최신애는 마치 잘못을 뉘우치는 듯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주유정은 당연히 그녀 편이다.“잘못이라니요. 금혁 씨는 이모님이 제일 아끼는 조카잖아요. 게다가 금혁 씨는 잘생기고 회사에서도 일도 잘하고요. 귀여운 지아를 보면 누구라도 중매를 서주고 싶어 할 거예요.”최신애의 마음은 그제야 위로가 되었다.“그래도 네가 나를 잘 아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만 금혁이가 예전에 철이 없어서 여러 번 사고를 치다 보니 사람들이 금혁이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아. 다 내 탓이야. 지아의 결혼은 당연히 오빠와 새언니가 챙길 텐데, 내가 참견하는 것이 잘
온유한은 얼굴 반쪽이 퉁퉁 부은 최금혁을 옆으로 끌어내렸다.찬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최금혁은 억울해 죽을 지경이다.“형, 내가 누굴 건드렸다고 그래? 고모가 나에게 강지아를 소개해줬어. 그런데 그 계집애가 정말 클수록 예뻐지는 것 같아, 옛날 그 어리바리한 모습 하고는 완전히 달라...”말을 마치기도 전에 온유한이 그의 멱살을 잡았고 안색은 급격히 어두워졌다. 최금혁은 여태껏 형이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다.“형, 형. 대체 뭐 하는 거야?”“지아한테서 떨어져!”“왜? 강지찬이 나를 좋아하지 않지만 한 번 대시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네가 대시한다고?”안경을 끼고 있는 온유한의 눈동자가 번뜩였다.“감히 한 번 해봐!”그는 하룻밤에 연달아 두 번이나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강지찬은 그렇다 치더라도 온유한은 대체 왜 이러는 것일까?최금혁은 그제야 무슨 생각이 난 듯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더니 말했다.“설마 형, 형도 강지아 좋아해?”최금혁을 옆으로 내던진 온유한의 손은 심하게 떨고 있었다.외삼촌의 외아들이 아니었다면 진작 때려죽였을 것이다.“어쨌든 지아 옆에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간다면 강지찬도 가만두지 않을 거고 나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그런데 주유정 누나랑 결혼하는 거 아니었어?”최금혁은 진지한 얼굴로 묻더니 이내 얼굴을 들이밀며 말을 이었다.“형, 설마 양다리 걸치는 거야? 새 사랑과 옛사랑 모두 포기하지 못하겠어? 알았어. 이 동생이 졌네.”온유한이 싸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최금혁은 센스있게 입을 다물었다.하지만 속으로는 그런 형을 하찮게 생각했다. 어릴 적부터 친척들이 그렇게 칭찬하던 사촌 형이었고 만약 열 번 중 아홉 번 매를 맞을 때마다 부모님이 온유한과 비교했기 때문이다.결국 형도 모든 남자들처럼 하체가 먼저 움직이는 동물이나 다름없었다.최금혁은 마침내 약간의 심리적 안정을 찾았다.연회는 무사히 끝났고 강지찬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지만 연회 내내 얼굴색이 안 좋았고 갈 때
강우빈이 태어나던 해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인연을 완전히 끊었고 강지찬과 온유한도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강지찬도 기분이 나빴다.아들이 태어난 후 백일잔치도 하지 않은 채 집안 식구들끼리만 축하를 했다.어느덧 우빈이는 세 살이 되었고 강지아가 때마침 귀국했기에 못 해준 축하를 이제는 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이번 강우빈의 생일잔치는 성대하게 치르기로 했다.생일파티는 강씨 가문의 식장에서 열렸고 강지찬의 체면을 세워주기 위해 손님들이 많이 왔다.정유진과 강지아는 하객 대응을 맡았다. 사람들은 오래간만에 나타난 강지아를 보고 깜짝 놀랐다.하지만 강지아는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친구들이 한 명씩 올 때마다 반갑게 맞이했다.온씨 가문과 최씨 가문에는 초청장을 보내지 않았지만 화령은 강지아와 절친이었기에 생일잔치에 왔다.편집장으로 승진한 화령은 옛날의 풋풋함이 사라졌지만 아름다운 미녀의 기질을 한껏 풍기고 있었다.“여기 온 것을 나중에 시어머니가 알면 어떻게 해?”강지아가 한마디 물었다.황은숙은 아직도 자기 아들 최금혁을 아프리카로 보낸 강지아와 화령이 미워 죽을 지경이었다.강지아의 말에 화령이 긴 웨이브 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말했다.“시어머니는 무슨, 그리고 진짜 시어머니라고 해도 내 일에 간섭할 수 없어.”“아이고, 우리 화령 편집장님 점점 폼이 나네. 어쩐지 최금성이 3년이나 아끼더라니, 다 이유가 있었어.”강지아의 장난기 가득한 말투였지만 화령의 얼굴에 있던 웃음이 옅어졌다.“전엔 얘기 안 했나? 작년에 유산했어.”“어?”“아기가 싫대.”화령이 최금성을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강지아인지라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아팠다.좋아하는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는데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을 것이다.최금성이 아이를 키우지 못할 형편도 아닌데 말이다.“왜 싫대?”“난 그냥... 뭐랄,. 파트너니까. 애인 대역이라고 할 수도 없지.”화령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며 말을
“당연히 아프지. 문신을 할 때보다 훨씬 아파. 지난주에도 예쁜 여대생이 왔는데 울면서 문신을 지웠어. 하도 울어서 눈이 다 부었어.”“아파서 우는 건 아닐 거야.”“그렇지. 헤어진 사랑 때문에 우는 거겠지. 나도 남자이긴 하지만 어떤 남자들은 진짜로 못 돼 먹었다니까.”강지아는 잡지를 하나 집어 들어 펼쳐보았다.“네 사장님께 얘기해줘. 지금 작업 끝나면 내 다리 문신도 지워달라고.”“그래.”대답을 하고 난 뚱보는 그제야 반응했다.“뭐라고?”강지아가 말했다.“예쁜 그림 있어? 어디 좀 봐봐.”“응? 아!”뚱보는 멍한 얼굴로 노트 하나를 가져왔다.“이건 사장님이 직접 그린 그림이야.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봐봐.”여기까지 말한 뚱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한마디 물었다.“아니, 지아 누나. 무슨 일 있어? 남자친구와 헤어졌어?”“응.”입이 무거운 진수혁이 보아하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것 같았다.물론 말을 했든 안 했든 강지아는 상관하지 않았다.검은 장미꽃 한 송이를 본 강지아는 그 그림을 가리키며 말했다.“이걸로 하자. 섹시해 보이네.”그러자 뚱보가 말했다.“이 그림은 몇 년 전 거야. 요즘 젊은 여자들은 흑장미 문신을 하지 않아.”“난 괜찮은 것 같은데. 그냥 이걸로 할게.”뚱보는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30분이 지나자 진수혁의 하던 작업도 끝났다.강지아의 차례가 돌아오자 진수혁이 한마디 했다.“올 줄 알았어.”강지아도 한마디 했다.“걱정 마. 울지 않을 테니.”그녀는 정말로 울지 않았다. 지우는 게 정말 아팠지만 참고 견뎠다.“지우자마자 바로 다시 문신할 수 있어? 그림은 이미 선택했는데.”“안 돼. 약국에 가서 소염제 같은 걸 사서 매일 바르고 상처가 완전히 회복해야 다시 문신을 할 수 있어.”강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좀 이따 퇴근한 다음에 단골 술집에서 봐. 내가 한턱낼게.”진수혁이 말했다.“문신 지우자마자 술 마시면 안 돼.”강지아가 웃으며 대답했다.“그래. 안 마실게.”그녀를 힐
강지아는 오늘 돌아온다는 말을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연회장을 한 번 둘러본 뒤 바로 빠져나왔다. 강지찬과 정유진을 놀라게 하고 싶지 않았다.강지아가 집에 들어가자 집사들은 깜짝 놀라더니 얼른 그녀를 반갑게 맞이했다.다음 날 아침, 강지아는 선물 꾸러미를 들고 새언니가 있는 마당으로 갔다.“고모!”“고모.”두 아이가 달려와 강지아에게 안겼다.“우리 연우가 더 예뻐졌네. 우빈이도 점점 귀여워지고 있어.“귀여운 게 아니라 멋진 거지!”강우빈이 가슴을 치며 말했다.“그래그래, 멋지네. 역시 우리 우빈이야!”녀석은 거만한 수탉처럼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어깨를 쭉 폈다.“새언니, 이 녀석 누구를 닮은 거예요? 새언니도 아닌 것 같고 우리 오빠도 닮은 것 같지 않네요.”정유진은 호호 웃었다.“어렸을 때 오빠 사진 봐봐. 가슴을 저렇게 펴는데 꼬리가 있었더라면 하늘 높이 치켜올렸을 거야. 두 남매 모두 네 오빠 닮은 것 같아. 어쨌든 나는 아니야.”그러자 연우가 말했다.“내 미모는 그래도 엄마를 더 많이 닮았지.”집안 분위기는 아주 화기애애했다.하인들이 아이들에게 아침을 먹이기 위해 데리고 간 후에야 강지찬이 입을 열었다.“어젯밤에 돌아온 거야? 연회에 갔었어?”강지아는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귀신은 속여도 우리 오빠는 못 속인다니까. 가서 한 번 둘러보고 나왔어.”“볼 게 뭐가 있다고?”강지찬이 어두운 안색을 보이자 정유진은 혹시라도 강지아가 서운해할까 봐 얼른 강지찬을 툭 친 뒤 화제를 돌렸다.“방씨 아주머니가 아침에 네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좋아하는 크리스털 찐만두를 했어. 오랜만에 먹는 거지?”강지아는 정유진의 팔짱을 끼며 말했다.“새언니, 내 눈치 보지 않아도 돼요. 난 괜찮아요.”아침밥을 먹은 뒤 강지아는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집을 나섰다.진수혁의 기존 문신 가게는 오래된 동네에 있었기에 지금은 대부분 철거했다. 그러면서 진수혁도 이사를 가게 되었다.가게 때문에 형편이 빠듯해 강지아의 빈 집에서
최신애가 깨어났을 때 온유한과 현채영은 옆에 없었고 임유희만 그녀 옆을 지키고 있었다.“유한이는?”“유한 오빠는...”임유희의 안색이 안 좋았다.“접대가 있다며 현채영 씨를 데리고 갔어요.”화가 난 최신애는 또다시 기절할 뻔했다.“친엄마가 기절했으면 병원에서 효도하고 반성할 생각은 안 하고 또 그 천한 년을 데리고 술 마시러 갔다고?”최신애는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고 머리도 어지러웠다.옆에 있던 임유희가 그녀를 위로하며 말했다.“어머님, 진정하세요. 유한 오빠 아마 중요한 술자리가 있어서 그런 것일 거예요. 어머님의 혈압이 낮아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갔어요.”“내가 죽어야만 나를 엄마라고 생각할 것 같구나!”임유희도 그녀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몰랐다.본인도 매우 슬펐기 때문이다.그녀도 아무런 명분 없이 온씨 저택에 머무른 것을 매우 후회하고 있었다.그녀와 현채영이 한집에 사는 것을 아는 외부 사람들이 뒤에서 어떻게 비웃을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중요한 것은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자주 띄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현채영 같은 여자와 비교당한 생각만 하면 임유희는 속이 울렁거렸다.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은 현채영에게 졌다는 것이다.강지아에게 진 것은 인정할만했다. 막강한 강씨 가문이고 온유한과는 어릴 때부터 친했기에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하지만 현채영은?집안이 망해 명예도 없는데 온유한은 그녀를 보물처럼 아끼고 어디나 데리고 다닌다.임유희는 손톱이 손바닥에 박힐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연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서울의 명망 있는 대갓집 규수들은 거의 다 왔다.강지찬은 정유진을 데리고 왔고 한규진도 연예계에서 잘나가는 아역 배우였던 여자친구와 함께 왔다.최의현은 약혼녀를 데리고 왔고 최금성은 당연히 화령을 데리고 왔다.온유한이 현채영과 함께 나타나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로 쏠렸다.이 자리에 현채영의 옛 애인도 있었기 때문이다.반면 온유한은 아무것도 모르는 듯 현
대화를 나눈 후에야 온유한은 강지아에게 문신해준 사람이 진수혁이라는 것을 알았다.그녀가 타투이스트와 친구가 된 것을 온유한은 모르고 있었다.“지아가 그쪽 이름을 문신으로 새긴 거 보면 많이 사랑한 것 같은데 왜 헤어진 거야?”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지아에게 내가 어울리지 않으니까.”맥주를 다 마신 뒤 온유한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고 진수혁은 쓰레기를 치운 뒤 샤워를 했다.진수혁은 이 집에 살고 있긴 했지만 강지아의 안방이 아니라 게스트 룸에 묵었다.샤워를 마친 뒤 강지아에게 문자를 보냈다.[네 전 남자친구와 한바탕 싸웠어.]강지아에게서 바로 답장이 왔다.[누가 이겼어?][당연히 내가 이겼지, 네 전 남자 친구 몸도 별로 안 좋았어. 반쯤 취했거든.][앞으로는 손 쓰지 마. 감당 못 하니까.][마음이 아픈 거야?][내가 마음 아플 게 뭐가 있겠어. 진작 헤어진 사람인데.][언제 돌아와? 단골 술집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곧 갈 거야, 돌아가면 연락할게.]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 두 사람 모두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온씨 저택에 얼굴을 비쳤다.현채영이 종이백을 들고 있는 걸 보니 쇼핑을 하고 온 모양이었다.임유희를 본 현채영은 반갑게 인사했다.“임유희 씨, 퇴근했나 봐요? 오늘 쇼핑하다가 임유희 씨와 잘 어울리는 치마가 있어서 샀어요.”현채영은 치마를 꺼내 보이며 말했다.“마음에 드는지 한 번 봐요.”이런 체면치레에 임유희는 순간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아니요. 괜찮아요.”약간 울먹거리는 임유희의 목소리에도 현채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우리 사이에 왜 예의를 차리고 그래요. 이 치마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거예요. 유희 씨가 나보다 날씬해서 안 입으면 나도 못 입는단 말이에요. 나와 유한 씨가 특별히 임유희 씨를 위해 산 건데.”그러자 옆에 있던 최신애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던지며 말했다.“누가 이따위 치마가 필요하대? 너 지금 일부러 이러는 거지? 온유한이
임유희가 돌아오자 최신애는 얼른 하인더러 저녁 식사를 차리라고 지시했다.마침 현채영이 없으니 임유희와 온유한에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그런데 음식이 다 나오기도 전에 온유한이 술을 마시러 나가자 임유희도 밥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최의현과 단둘이 술을 마시기로 약속한 온유한인지라 강지찬을 부르지 않았다.“현채영을 집으로 데려갔다면서?”“응.”최의현은 순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그럼 집안이 시끌벅적하겠구나, 임유희에 현채영까지.”술을 한 모금 마신 온유한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두 사람은 룸을 예약하지 않고 밖에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며칠 후면 지찬이네 아들 생일인데 갈 거야?”온유한은 양복 주머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 최의현에게 건넸다.안에는 순금에 보석을 박은 금 자물쇠가 들어있었다. 뭘 선물해야 좋을지 몰라 비싼 것으로 선택했다.선물을 받은 최의현이 물었다.“안 갈 거야? 지아가 올지도 모르는데.”술을 마시던 온유한은 한참 뒤에야 말했다.“안 가.”최의현은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너 설마 진짜로 현채영과 그런 사이야? 일부러 네 엄마 화나게 하기 위해 만나는 줄 알았는데... 아니, 너 도대체 무슨 생각인데?”온유한은 술을 한 모금 더 마신 후 말했다.“지아와 진작 헤어졌고 강씨 가문과도 인연을 끊었는데 내가 가서 뭐해?”“너 이 자식...”최의현은 당장이라도 욕설을 내뱉을 기세였다.“너 그냥 화가 나서 이러는 거지?”온유한이 피식 웃었다.“서원준과 약혼하면 내가 큰 선물 보낼게.”“너 정말 미쳤구나.”최이현이 한마디 했다.두 사람은 적당히 마신 후, 에이프릴 홀에서 나왔다. 시계를 보니 아직 열한 시가 되지 않았다.최의현은 약혼녀의 전화를 받고 먼저 가버렸고 온유한은 차 열쇠를 운전 기사에게 건넸다.관자놀이를 주무르며 눈을 감은 온유한은 집만 생각하면 짜증이 났다.“오늘은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운전 기사는 백미러로 그를 힐끗 쳐다본 뒤 말했다.
현채영은 두 손가락으로 카드를 집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어머님, 카드 안에 얼마 있는데요?”“20억.”현채영이 입을 삐죽거리자 최신애가 냉소를 지었다.“왜 적어? 네 집에 20억은커녕 2천만 원이라도 있긴 해?”현채영은 어깨를 한 번 들썩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머님, 제가 바보 같아 보이나요? 유한 씨에게 시집오면 온씨 가문 사업이 모두 내 것이 될 텐데 고작 20억으로 유한 씨를 포기하라고요?”그러자 최신애가 현채영에게 삿대질하며 말했다.“유한이에게 시집가고 싶어? 꿈 깨! 눈치가 있으면 돈 들고 꺼져.”현채영은 카드를 최신애 앞으로 밀며 말했다.“제가 나갈지 말지는 어머님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유한 씨가 결정하는 거예요.”“너!”이때 마침 현채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전화를 받은 현채영은 전화기 너머의 사람을 향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오 대표님이시네요? 오랜만이에요. 오 대표님... 생각이요? 당연히 했죠. 너무 보고 싶어요... 저녁이요? 알겠어요. 그럼 저녁에 뵐게요.”최신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너! 너 다른 남자와 노닥거리는 걸 유한이 알아?”현채영이 웃으며 말했다.“어머님, 유한 씨는 당연히 모르죠. 하지만 오 대표님은 그저 친구일 뿐이에요. 오랜만이라 만나서 술 한잔 마시는 거니까 유한 씨도 뭐라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런 여자를 온유한이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집으려 데려왔다니! 최신애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정말 가문이 망하는 꼴을 보고 싶어 환장했나...“너 이거, 이거...”화가 난 최신애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말도 잇지 못했다.“유한이에게 네 민낯을 똑똑히 알리고 말 거야. 널 내쫓게 할 거야.”그 말에도 현채영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말하세요. 유한 오빠가 어머님을 믿을까요. 아니면 저를 믿을까요?”최신애는 말문이 막혔다.오후에 꿀잠을 잔 현채영은 온유한이 퇴근하기 전에 메이크업을 하고 집을 나섰다.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최신애는 바로 가서 고자질
최신애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열받아 죽겠네. 유한이가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아. 조금 전에 한 말 무슨 뜻이야? 밖에서 현채영과 자고 오겠다는 얘기야?”임유희는 심장이 쿡쿡 찌르는 것 같았다.첫 만남 때 절친이 힘을 내라고 북돋우는 데 용기를 얻어 그에게 다가가 연락처를 물었지만 그는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대답했다.“여자친구가 있어요.”그때 강지아가 너무 부러웠다.지금의 온유한은 더 이상 그녀를 설레게 했던 온유한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는 없었다.“어머님, 아니면 저 그냥 집에 갈게요. 제가 여기 있어 봤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히려 유한 오빠를 더 화나게 하는 것 같아요.”“안돼. 네가 가면 저 여자가 더 함부로 나댈 거야. 내일부터 출근이잖아. 운전 기사에게도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 출퇴근 픽업을 책임질 거야. 퇴근하자마자 집에 와. 저런 여자와 넌 달라. 넌 네 할 일만 해. 나머지는 나에게 맡기고.”이 말에 임유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이날 밤 온유한과 현채영은 진짜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고 다음 날 정오에야 얼굴을 비쳤다.그 모습을 본 최신애는 현채영에게 눈을 희번덕인 뒤 온유한을 향해 말했다.“유한아, 오늘 평일인데 병원에 안 가봐도 돼? 넌 어중이떠중이들과 달라. 앞으로 온씨 가문 사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사람이야.”그러자 현채영이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웃었다.“어머님, 유한 씨를 잘 모르시나 봐요. 어제 저녁에 간 석식 자리가 평범한 술자리는 아니에요. 단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밖에서 하룻밤 묵은 것뿐이에요. 알다시피 저와 유한 씨 다 성인이고 집에서는 좀 불편한 것도 있어서.”그 말에 최신애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무슨 뜻이지? 아들이 이 천한 년과 잤다는 뜻인가?이제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온유한인지라 이런 것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3년 전에 임유희도 건드리지 않았고 아마 강지아도 건드리지 않았을 것으로 최신애는 짐작했다.그런데 이 뻔뻔한 천한 년과 잤다고
다행히 주방에서 매일 죽을 끓였기에 현채영의 앞에 죽 한 그릇이 놓여졌다.그러나 한 입 맛본 현채영은 미간을 찌푸렸다.“맛이 이상해요. 음식 재료를 안 좋은 거 쓰신 거 아니에요?”화가 난 최신애는 테이블을 탁 하고 쳤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 여기가 네 집인 줄 알아? 교양이 하나도 없네!”최신애의 이런 모습에도 현채영은 전혀 화를 내지 않았고 그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어머님이 안 좋은 거 드실까 봐 걱정돼서 그러죠. 어떤 사람들은 안 좋은 물건을 좋은 것이라고 속여서 팔아요. 먹는 음식은 자기가 즐겨 먹는 음식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음식 재료 자체도 좋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요?”말을 마친 현채영은 죽을 내려놓으며 옆에 있는 하인을 향해 말했다.“집에 두유 있나요? 없으면 따뜻한 우유 한 잔 주세요.”성격이 좋은 온혁진도 자리가 가시방석이라 밥을 먹자마자 출근했다.최신애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임유희 앞인지라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두유와 찐만두 두 개를 먹은 현채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온유한에게 말했다.“어젯밤 늦게 자서 난 조금만 더 잘게. 안 그러면 피부가 안 좋아져.”그 말에 온유한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마디 했다.“방 앞까지 데려다줄게.”“어머님, 유희 씨, 그럼 전 먼저 일어날게요.”현채영은 온유한의 팔짱을 끼며 한마디 인사하고는 온유한과 같이 자리를 떴다.그 모습에 화가 난 최신애는 옆에 있는 임유희를 다독이며 말했다.“너무해! 유한이가 일부러 나 화나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니 넌 신경 쓰지 마.”임유희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 그런데 어머님, 유한 오빠가 저를 점점 더 차갑게 대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최신애도 한숨을 내쉬었다.“3년 전 그날, 너희 둘이 진짜로 잤더라면 좋았을 텐데… 유한이가 어떤 애인지 내가 제일 잘 알아. 그때 강지아가 아무리 좋아도 널 건드린 이상 분명 책임지려 했을 거야.”사실 그 일은 임유희에게 언급하기조차 싫은 인생의 오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