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유진이 조예원의 전화를 받았을 때는 방금 일 처리를 마친 뒤였다.부주의로 추돌사고가 일어났었고 다행히 상황이 심각하진 않아 기스만 살짝 난 상태였다.상대방도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인지라 유진은 돈을 이체해주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신안은 다시 우리에게 맡기겠다고?”주변에 은행이 보였는지라 유진은 카드를 들고 출금하러 은행으로 향했다.예원은 전화 반대편에서 누구보다 흥분해 있었다.“우리보다 더 적합한 인테리어 회사는 못 찾은 모양이야. 설계도는 수정할 필요도 없대, 전에 한 것대로 하면 되고, 내일 바로 계약서를 쓰러 오겠다고 했어.”좋은 소식이었지만 유진은 크게 기쁘지 않았다.“그래, 금방 돌아갈 거야.”예원은 어딘가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왜 그래? 무슨 일 있어?”심란한 사건이 한두 개가 아니라 유진은 어떤 일을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강지찬에게 하도 화가 났던지라 ATM 기계는 출금 한도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 어쩔 수 없이 창구로 가 남은 돈을 인출했다.전에도 한빈의 돈을 쓴 적이 없었던지라 강지찬의 옷 선물도 당연히 받을 리가 없었다.K그룹에 도착한 후 유진은 신문지로 포장한 돈을 안내데스크에 전달했다.“강 대표님께 전해주세요.”데스크 직원은 어리둥절했다.“아가씨 성함을 알려주시죠. 대표님께 메시지를 남길까요?”유진이 답했다. “아니요, 아마 알 겁니다. 감사해요!”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았던 유진은 돈만 남긴 채 자리를 떴고 1시간쯤 흘렀을까 회사로 돌아온 강지찬을 데스크 직원이 불러세웠다.“강 대표님, 아가씨 한 분이 물건을 맡기셨습니다.”강지찬이 발걸음을 멈추더니 데스크 직원이 건네준 물건을 보며 눈이 어둡게 번뜩였다.이에 최의현이 받아 보더니 외쳤다.“어머, 돈이잖아. 몇천만 원은 돼 보이는데?”“남긴 메시지는 없었어요?”“없었습니다. 알 거라고 하시던데요.”강지찬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누군지 알아차렸고 단번에 의현의 손에서 돈을 뺏어가더니 굳은 얼굴로 대표 전용 엘리베이터
정유진과 조예원은 업무를 분담해 진행했다.조예원은 공사와 행정업무를 담당했고 정유진은 설계를 담당했다.신안에서 전에 제출한 방안을 사용하겠다 확정했지만, 정유진은 야근을 하며 효과 이미지를 다시 수정하고 새벽 2시가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고 팩을 했더니 다시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조예원은 그런 유진이 부러웠다.“너 야행성 인간이지? 밤을 새운 흔적조차 없다니 너무 화가 나.”예원도 어제 야근을 했고 유진과 비슷한 시각에 잠들었는데 다크서클이 생긴 듯한 기분이었다.정유진은 우유 두 잔을 따랐고 어제 겪은 일과 강지현의 신분을 예원에게 알려주기로 했다.사실을 알고 난 예원은 입을 떡 벌리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세상에! 너랑 강지찬은 무슨 악연이래?”정유진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신안 쪽은 상관없어. 우린 요양원과 협력하는 거지 강지찬과 협력하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수고스럽더라도 계속 과정에 신경 써줘야 돼.”예원이 바로 대답했다.“당연하지, 이런 시공 안은 우리 전문이잖아. 상록수 별장까지 계약하면 앞으로 다른 건은 상관하지 않고 매일 이 두 공사현장만 돌아다닐 거야.”유진은 자신이 없었다. “강지찬과 강지현의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았어. 이번 계약 따내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 같아.”강지현이 그녀에게 계속 설계도를 내달라 부탁했지만, 유진은 그가 그저 신의를 저버리지 못해 하는 말이라 생각했다.어차피 신안의 시공권은 따냈으니 상록수 별장 건은 따내든 말든 예원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일의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그 성패는 하늘에 달려 있다잖아. 넌 설계도나 생각해, 계약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나중에 다시 생각하고.”예원은 언제나 여유로웠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였고 정유진도 그녀에게 동화돼 기분이 좋아졌다.어차피 곧 큰 계약을 따낼 예정이었고 이 계약은 올해 사무실에서 따낸 계약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정유진이 근 두 달이나 고생한 결과였다.하지만 이런 좋은 기분은 그녀가 회사에 들어선 그 순
아픈 동생 때문에 시에서 가장 호화롭고 선진적인 의료 장비를 갖춘 요양원을 만들었다니, 역시 이런 일은 강지찬같은 재벌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다.일반인에게는 꿈도 못 꿀 일이지.신안이라... 이 이름도 지아에게서 따온 것일까?정유진은 살짝 난감해졌다.하지만 예원은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신안의 사장이 강 대표님이라고요? 역시 강 대표님 사랑이 대단하시네요, 존경스러워요!”강지찬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정유진만 바라보고 있었다.“정 사장님 계속하시죠!”정유진은 그런 강지찬을 한 대 때려놓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예원은 끊임없이 유진에게 눈짓을 보냈다.‘입원 동이 자그마치 3채야! 중요한 거래라고, 두 달이나 매진한 일이잖아!’강지찬과 함께 온 사람 중에 신안 요양원과 작업실 사이의 소통을 책임지던 책임자도 와있었지만, 발언권은 없었고 옆에 앉은 채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그제야 정유진은 왜 날아갔던 계약이 다시 돌아왔는지 알아챘다. 분명 강지찬이 수를 쓴 것이었다.다만, 지금 강지찬은 내가 지아를 꼬집었다고 의심하고 있지 않나?왜 다시 신안의 프로젝트를 나에게 맡긴 거지?유진은 말없이 가방을 내려놓은 후 키키에게 어제 다시 수정한 설계도를 보여주라고 부탁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강 대표님이 계약서를 쓰러 오셨으니 다시 한번 방안에 관해 설명해드리겠습니다. 계약서에 견적도 적혀있으니 확인해보시죠.”키키는 아침에 다시 인쇄해 낸 계약서를 테이블에 올려놨고 강지찬은 일어서며 답했다.“그래요, 그럼 우리 정 사장님의 방안을 한번 들어봅시다.”입으로는 진지한 태도로 말하고 있었지만, 정유진에게 꽂힌 시선은 전혀 진지하지 않았다.마치 정유진이 방안을 설명해주는 것이 아니라 노래라도 한 소절 불러주는 듯한 모습이었고 차가운 눈빛에 한 줄기 웃음기가 서려 있어 보기만 해도 얄미웠다.강지찬이 자리를 옮겨 앞으로 앉았다.오늘 흑백 패턴의 드레스를 입은 유진은 넓게 퍼지는 치마단 덕에 허리가 유난히 가늘어 보였다. 실제로도 허리가 상당히 가는
강지찬이 일부러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이 차단당했다는 걸 알고 일부러 저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정유진은 그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귀한 블랙 카드의 비밀번호가 이토록 쉽게 설정된 것일까?어쩔 수 없이 다시 이 사람을 차단 상대에서 옮겼고 휴대폰 번호 뒤 6자리를 입력했다.그 결과에 유진은 멍해졌다. “...”실제로 비밀번호가 맞았다.강지찬은 계약서를 보지도 않아 인테리어 비용조차 모르는 채로 계약을 마치고 모든 금액을 지불했다.그래, 부자한테 이 오십억쯤이야 아무것도 아니겠지.귓가에는 강지찬의- 차가운 말이 들렸다.“벌써 세 번째네요, 다음번에 정 사장님에게 연락할 때 연락이 통했으면 좋겠어요.”“...” 역시 일부러 저런 것이다. 듣기에도 살짝 미묘한 말이었고 하필 예원이도 일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었다.“저기, 계약서도 마무리했으니 앞으로의 공사는 저와 시공부서 부장님이 함께 책임지겠습니다. 한 부장님, 이쪽으로 와서 시공 관련 사항에 대해 논의하시죠.”한 부장은 기다렸다는 듯 예원을 따라 시공부서 부장의 사무실로 향했다.예원은 한술 더 떠 유진에게 당부했다.“유진아, 방금 캡슐이 도착했던데, 대표님에게 커피라도 내려드려.” 그러고는 강 건너 불구경 하는 키키도 내보내는 것을 잊지 않았다.유진은 할 말을 잃었다.어제 옷값을 돌려줬으니 앞으로는 어떠한 일로도 엮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다.하지만 정신을 차려보니 강지찬의 번호가 어느새 또다시 휴대전화에 저장돼있었다.사람이 없어지자 강지찬은 본모습을 드러냈다.“다시 날 차단한다면 어떻게 응징할지 기대해요.”협박을 가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당하게 물었다.“당신 사무실은 어디죠?”정유진은 자신의 심정을 명확하게 설명하긴 어려웠지만, 이 남자만 보이면 왠지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전 마음이 바르지도 못한 여자인데, 왜 저랑 계속 협력하는 거죠?”강지찬은 그녀를 한 눈 보더니 계속 그녀의 사무실을 찾았다.“도대체 어디에요
정유진은 강지찬 덕에 화가 폭발할 것 같았다. 이토록 뻔뻔하고 무례한 남자를 본 적이 없었다.“저리 비켜요, 사람 부르기 전에!”강지찬은 비키기는커녕 문까지 걸어 잠갔다.“불러요, 신경 쓰지 않으니까.”정유진은 화가 나 호흡이 거칠어지며 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아까부터 쭉 그녀의 입술에 고정됐던 강지찬의 시선은 어느샌가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그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 깨달은 정유진은 그대로 강지찬을 차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다.“변태예요? 뭔 생각 하는 거예요?”강지찬도 유진을 더는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결국, 한발 물러나 유진을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뭘 무서워해요, 여기서 당신을 안을 만큼 미치진 않았거든요.”정유진은 문을 열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고 싶었다.하지만 강지찬은 의자 하나를 끌어오더니 그대로 앉으며 말했다.“화내지 말아요, 날 화나게 했으면서, 내가 좀 놀리는 건 안 돼요?”유진은 생각할수록 미친놈이라는 생각에 대꾸했다.“내가 언제 화나게 했죠?”강지찬은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쳐다보며 답했다.“어제, 4번이나요.”“...” 도대체 누가 누굴 화나게 했단 말인가?강지찬은 하나하나 예를 들어가며 유진에게 설명해줬다.“첫 번째는, 나 몰래 다른 남자한테 꼬리친 거.”정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누구한테 꼬리를 쳤다고 그래요? 아니, 내가 다른 남자한테 꼬리를 치든 말든 당신이랑 아무런 상관도 없거든요!”강지찬은 말을 이었다. “둘째는, 일부러 대꾸하면서 날 화나게 한 거.”“...” 정유진은 더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세 번째는, 옷값을 돌려준 거. 나 강지찬이 한번 선물한 물건을 다시 돌려받는 건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서요.”“..”“네 번째는, 또 나를 차단한 거.”정유진은 이제 깨달았다. 지찬의 눈에 유진이 얼마나 괴롭히기 좋았으면 집요하게 그녀만 잡고 괴롭히고 있는 것이었다.“또 있어요? 한꺼번에 말해요.” 말하고 당장 꺼지라는
또 대화가 싸움으로 번졌다.어찌 됐건 강지찬은 그녀의 고객이었으니 정유진은 친히 그를 배웅해줬다.지찬이 차에 오르려고 하자 유진이 그제야 말을 꺼냈다.“지아는 고세연 씨가 꼬집은 거에요. 제가 직접 봤어요.”강지찬은 발걸음을 멈추더니 몸을 돌려 그녀를 쳐다봤다. 어느 정도 거리가 있었지만, 그의 시선은 깊고도 차가워 보였다.어르신이 고세연을 점 찍어둔 며느릿감이라 했으니 이 사람의 여자친구겠지?어찌 됐건 유진의 말은 사실이었으니 믿고 말고는 지찬에게 달려 있었다.지아 생각에 정유진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덧붙였다.“지아를 위해 제일 호화로운 요양원을 지어주면서 왜 좀 더 같이 있어 주지 않나요? 어떻게 지아 옆에 붙인 사람들이 좋은 사람이란 걸 확신할 수 있죠?”강지찬의 눈동자에 힘이 들어가더니 물었다. “날 의심하는 건가요?”정유진은 그의 오만한 태도를 가장 싫어하는 터라 그대로 반문했다.“의심하면 안 되나요? 당신이 한 모든 말과 내린 모든 결정이 옳은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어요?”‘내가 고세연을 지적한 게 못마땅해서겠지? 여색을 즐기지 않는다던 소문은 역시 가짜였어.’ 유진이 생각했다.강지찬은 상당히 불쾌한 듯 답했다. “당신이 참견할 정도는 아니에요.”말을 마치고는 차에 올라 그대로 떠나버렸다.강지찬의 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유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실제로 유진은 강지찬이 조금은 무서웠다.형준도 유진의 말을 듣고는 지찬에게 물었다. ”대표님, 요양원으로 갈까요? 자택으로 갈까요?”강지찬이 목소리를 낮추며 답했다. “요양원으로 가.”오빠가 또 오자 지아도 몹시 기뻐했다. 강지찬은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으며 차갑지 않은 말투로 얘기했다.“약 잘 먹었어?”“다 나았다니까. 약 안 먹어도 돼.”강지아는 강지찬이 또 자신을 보러오자 기분이 좋았다. 고세연의 말이 맞았다. 역시 아프니 오빠가 매일 그녀를 보러 왔다.강지찬은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는 편이었다. 보기만 해도 그리 쉬운 성격이 아니었고 수법이
예원과 신안의 한 부장이 대화를 마치자 이미 점심이 됐고 유진은 배달음식을 시켰다.“부자는 다르더라고요. 50억 원이나 되는 돈을 말 한마디에 바로 긁다니. 뭐 50만 원 긁는 것처럼 말이에요.”감탄하면서도 예원은 가십거리도 잊지 않았다.“너랑 강지찬은 도대체 무슨 일이야? 그 사람이 널 맘에 들어 한 거야?”정유진은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소리야? 그 사람은 여자친구가 있어.”“그럴 리 없어!” 예원은 생각도 하지 않고 대답했다. “분명 너한테 마음이 있는 것 같다니까.”정유진은 살짝 멈칫했다. “...”전에 강지찬의 등장은 한빈에게 맞서기 위함이었다면 지금은?거기에다 오늘 사무실에서 한 말들까지 생각해보면...정유진은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당시에는 자신을 분노하게 만든 강지찬 때문에 정신이 없어 그가 여자친구가 있다는 일조차 잊고 있었다.그때 예원이 테이블을 탁 내리치더니 말했다. “어머! 설마 한빈을 따라 배우려는 건 아니겠지?”정유진은 무의식적으로 속에서 신물이 나는 듯했다. “앞으로 만날 기회는 없을 거야. 거리를 둘거거든.”예원은 멈칫하더니 속으로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그, 유진아, 한 부장님 말로는 이틀 뒤 신안의 착공식에 강 대표님도 오신다던데. ““...”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강지찬이 이토록 한가한 사람이었나?k 그룹이라는 큰 회사를 운영하면서 자리에 앉아있을 필요도 없는지 의문이었다.예원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채 물었다. “그 사람 혹시 그냥 너랑 자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지?”“꿈도 꾸지 말라고 해!”계약서에 사인도 했겠다, 금액도 지급했겠다, 이 일은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었다.그들에게는 위약금으로 물어줄 자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예원이 밥도 넘어가지 않는 모습에 유진이 말했다.“일은 일이니 신경 쓸 거 없어. 신안의 착공식은 좀 웅장하게 진행하자. 매체들도 참석할까 봐 걱정돼서 그래.”그 말에 예원은 또다시 흥분한 듯 물었다.“그럼 우리 작업실이 뉴스에 오르는 거야? 우리도 이제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었기에 유진은 어쩔 수 없이 강지찬과 나란히 섰다.강지찬이 살짝 몸을 돌렸고 기자가 서둘러 그들의 사진을 찍으려 셔터를 눌러댔다.사진 촬영이 끝난 줄 알고 돌아가려는 그때, 유진의 어깨가 갑자기 무거워졌다.강지찬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며 친밀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려 강지찬을 쳐다봤고 강지찬 역시 그녀에게 시선을 맞췄다.귀에는 앞쪽에서 들려오는 셔터음밖에 들리지 않았다.이 망할 놈의 남자가 또 무엇을 하려는 거지?강지찬이 그녀를 향해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말했다.“몇 장 더 찍어요.”많은 사람 앞에서 강지찬의 체면을 깎을 수는 없었는지라 유진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어깨를 잡힌 채 몇 장 더 찍을 수밖에 없었고 강지찬은 한술 더 떠 사람들을 향해 설명했다.“우리 정 디자이너는 저랑 친구 사이입니다. 기자님들 잊지 말고 사진을 제 비서에게 보내주세요.”조금 전까진 말조차 귀찮아서 꺼내지 않던 사람이 고작 사진 몇 장을 위해 입을 열다니.진짜 친구 사이처럼 간단한 관계일까?기자들의 눈빛이 번뜩이며 둘 사이의 관계가 간단하지마는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챘지만, 함부로 묻지는 못했다.강지찬은 평소에도 상당히 바빴고 인터뷰에 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오늘 강지찬을 인터뷰할 기회가 생긴 지라 기자들은 흥분되면서도 행여나 잘못된 질문으로 이 큰 인물의 심기라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러운 마음이었다.“알겠습니다. 대표님, 당연히 잊지 말아야죠.”정유진은 온 힘을 쥐어짜내 꾹꾹 참고 나서야 무대 위에서 강지찬과 싸우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후 쏜살같이 무대를 내려왔고 예원이 건네주는 물을 받아 꿀떡꿀떡 마시며 정신을 진정시켰다.“갑자기 또 무슨 미친 짓인지 모르겠네.”유진은 더 있을 수가 없었다. 예감으로는 지금 나가지 않으면 강지찬이 또 언제 무슨 수를 쓸지 모르는 상황이었다.“여긴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조금 있다가 난 먼저 가볼게.”유진의 말에 예원
친아들과 시누이에게 연달아 비난을 받는 게 자존심이 강한 최신애한테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뺨 맞는 거나 다름없이 창피했다.비록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번 일은 확실히 온씨 가문에서 초래한 일이다.그리고 임씨 가문이 이런 행동을 하게 된 원인도 다 최신애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다.하여 위태로운 공장과 아직 조사를 받는 온혁진을 생각하니 최신애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임씨 가문의 문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임유희와 장희수가 마침 집에 있었다.보아하니 지난번에 장희수가 손을 댄 게 틀림없었다. 그녀는 최신애를 보자마자 여유로운 얼굴로 물었다.“사돈 오셨어요?”예전 같으면 저 ‘사돈’ 소리가 아주 반갑게 들렸겠지만 지금은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예민하게 느껴졌다.“온씨 가문에서 어떻게 감히 임씨 가문과 사돈을 맺겠습니까.”최신애는 어두운 얼굴로 다시 물었다.“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볼게요. 저희가 어떻게 하면 살려주실 건가요?”장희수는 그녀의 말뜻을 못 알아들은 척 되물었다.“사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저희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겠네요.”“시치미 떼지 마세요. 이 모든 일이 다 당신들이 뒤에서 손을 쓰고 있는 거잖아요. 저희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셨나요?”그리고 최신애는 임유희에게 고개를 돌려 한껏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유희야, 내가 너를 얼마나 챙겨줬는지 네가 제일 잘 알 거야. 난 그저 네가 아주 착한 아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고작 우리 온씨 가문을 짓밟겠다고 공장 쪽 사람들을 매수해서 우리를 모함할 줄은 몰랐어. 양심적으로 나한테 미안하지도 않아?”임유희는 그녀의 말에 멍해져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장희수를 바라보았다.보아하니 이 일은 그녀가 전혀 모르고 있던 눈치였다.이때, 장희수가 차갑게 웃으며 답했다.“사돈께서는 말 가려서 해주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저는 그래도 두 집안의 옛적 친분을 생각해서 오늘 집에 들인 건데 자꾸 헛소리하시면 저도 참지 않겠습니다.”최신애는 시간을 질질 끄는 게 너무 싫었다.“단도직입적으로 말씀해
최신애는 온미정에게 차마 집에 일이 생긴 게 임씨 가문의 소행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그저 온혁진을 꺼내줄 방법에 대해 생각하라고만 했다.“꺼내달라고요?”온미정은 역시나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그 뜻인즉, 공장에 일이 생겼다는 게 사실이고 제품에 품질 문제가 있어서 세무조사가 들어갔다는 게 다 진짜란 소리예요?”최신애는 온미정의 눈도 차마 똑바로 보지 못하고 답했다.“공장 쪽의 상황은 아가씨도 아시다시피 저번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다 처리했었는데 또 이런 문제가 터질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어디까지나 아가씨 오빠가 사람을 너무 잘 믿어서 문제에요.”최신애는 말하다가 그녀의 눈치를 살폈는데 역시나 자기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지금까지 공장은 아무런 문제도 없었는데 왜 올해에 들어서 갑자기 이런 문제가 자꾸 발생하는 거예요?”“진짜 공장에 문제 있는 건가요, 아니면 누군가가 이 기회를 틈타 나쁜 짓을 하는 건가요?”순간 최신애의 표정이 굳어지면서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이제 와서 그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요? 지금 급한 건 아가씨 오빠를 구해내는 거라니까요.”온미정이 주위를 둘러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유한이는요?”최신애는 또다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온유한이 했던 말이 머리에 떠오르면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그 빌어먹을 놈이 아버지가 눈앞에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고도 아무런 반응이 없더라고요. 사람을 찾아서라도 아버지를 다시 데려올 생각은 안 하고 현채영을 데리고 술 마시러 나갔어요.”온미정은 너무 어이없는 나머지 말문이 막혔다.“제가 방법을 한번 생각해 볼게요.”그녀는 말을 마친 뒤 그대로 자리를 떴다.최신애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음 날 바로 임씨 집안에 쳐들어갔다.과정은 알 수 없지만 결과는 매우 참혹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임씨 가문에서 쫓겨났다.아마도 장희수와 몸싸움도 있었는지 머리는 산발이 된 채로 차에 올라탔다.온혁진은 끌려간 뒤 계속 돌아오지 못했고 회사도 혼란에 빠졌다.게다가
최신애는 저녁 8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온 온유한을 기다리고 있었다.온혁진이 잡혀간 뒤부터 최신애는 계속 온유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안 되는 걸 보고 혹시 그가 지금 자기 아버지랑 공장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다니느라 바빴나 싶어 온유한이 돌아오자마자 재빨리 달려가 물었다.“어때, 아들? 네 아버지는 괜찮아? 그리고 공장은 대체 어떻게 되는 거야? 물건들이 왜 품질 문제가 생긴 건데? 분명 우리는 매년 제때 세금을 신고했는데 왜 문제가 있다는 거야?”그러나 온유한은 덤덤하게 한마디만 했다.“저도 몰라요.”순간 최신애가 어리둥절해서 되물었다.“모, 모른다고? 네가 왜 몰라? 그럼 몇 시간 동안 뭐 하다 왔는데?”“퇴근하고 채영 씨랑 밥 먹고 쇼핑도 좀 했어요. 지금 옷만 갈아입고 다시 나갈 거고 오늘 저녁에는 밖에서 잘게요.”말을 마친 뒤 위층으로 올라가려 했다.그제야 최신애는 정신이 번쩍 들더니 재빨리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못가!”온유한은 눈앞의 최신애를 살짝 짜증 난 얼굴로 바라보았다.“할 말이 더 남으셨어요?”최신애는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분노의 말을 쏟아냈다.“할 말이 더 남았냐고? 그게 지금 어머니한테 할 소리야? 온유한, 네 아버지는 붙잡혀가서 지금 조사받고 있고 우리 회사에 일이 터졌는데 네가 유일한 후계자로서 어떻게 이리도 태연할 수 있어?”그녀의 물음에 온유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예전에 제가 말씀드렸었는데 혹시 잊어버리셨나요?”순간 최신애는 가슴이 뜨끔해지면서 어렴풋이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그는 분명 자신을 포함한 온씨 가문을 망가뜨리겠다고 했었다.“너...”최신애는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마음에도 없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는데 그게 진심이었다니.그녀는 순간 눈앞의 자기 아들이 이상하게 소름 끼치는 것 같았고 혹시나 해서 그에게 물었다.“혹, 혹시 지금 뭘 알고 이러는 거야?”그녀의 말에 온유한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의현이가 전부터 나한테 임
“온씨 가문과 임씨 가문이 완전히 사이가 틀어졌대. 그리고 임씨 어르신네 생일잔치에서 온유한 씨가 임유희 씨 오빠분한테 맞았대.”“현장에 있던 사람들이 말하길 그날 임씨 가문에서 이제부터 집안의 모든 재산을 탕진하더라도 온씨 가문과 맞서 싸우겠다고 엄포까지 내렸대.”“그날 온혁진 씨가 직접 사과했다고 들었는데 아무런 소용이 없었겠지. 그러고 보면 온유한도 참 간이 커. 어떻게 현채영을 데리고 그 장소에 갈 수가 있어? 일부러 약 올리려는 거잖아. 임씨 집안의 체면이 뭐가 됐겠어?”임씨 가문은 세가의 반열에 오르기도 전에 이런 불미스러운 일로 의도치 않게 유명해졌다.강지찬과 최의현은 밖에서 들어오는 내내 사람들이 두 집안의 가십거리에 대해 수군거리는 걸 듣게 되었다.방안에 들어와 문을 닫은 뒤 최의현이 물었다.“그 자식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강지찬은 그의 말을 무시한 채 소파에 가서 앉았다.이때 한규진이 말했다.“오후에 임씨 집안 사람이 나한테 전화 와서 법률적인 문제로 의뢰하고 싶다고 하더라. 내 생각에는 아마도 온씨 집안과 관련 있는 일인 것 같아.”그의 말에 최의현이 급히 말을 끊었다.“내가 예전에 들은 바로는 임 씨네 그 두 부자는 아주 독한 사람이라던데 유한이랑 아버지는 분명 그들의 상대가 안 돼. 규진아, 우리가 비록 지금은 유한이랑 놀지 않지만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할 것 같아.”한규진은 그저 입을 삐쭉거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최의현은 다시 강지찬에게 물었다.“형, 그냥 이대로 유한이가 망가지는 걸 보고만 있을 거야?”“아니면?”“...”지난 몇 년 동안 강지아의 모습만 생각하면 그는 온유한을 볼 낯이 없었다.그러다가 술 한잔을 한 번에 입으로 털어 넣으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쳤다.“그놈은 좀 당해봐야 해!” “아니다. 그 온씨 가문 사람들 전체가 당해봐야 해. 이번 일로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어.”그 후로 며칠 뒤, 임씨 가문에서는 계속 자금을 미루고 있던 온씨 가문을 고소했다.그 소
드디어 임종태의 생일 잔칫날이 돌아왔고 온혁진과 최신애는 기쁜 마음으로 연회장에 나타났다.그러나 온유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임유희를 제외한 온씨 가문의 모든 사람이 다 어두운 얼굴인 걸 보고 현장에 온 사람들은 무슨 일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우리 미래 태안 그룹의 후계자분이 왜 안 보이실까? 오늘은 임 어르신의 팔순 잔칫날인데 예비 사위가 참석하지 않았다는 게 말이 안 되는데?”“들은 바에 의하면 어제 온유한이 현채영을 데리고 카지노에 가서 크게 놀았다던데 지금쯤 침대에서 일어났는지 모르겠네요.”임씨 가문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온혁진도 초조한 마음에 최신애에게 다시 전화해 보라고 재촉했다.이미 전화에 불이 날 정도로 연락해 봤으나 온유한 쪽에서 한사코 받지 않으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생일잔치는 시작되었고 백발의 임종태가 휠체어에 앉은 채 밀려 나왔다.임근우는 자기 아버지가 젊었을 때 남매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키워줬고 또 자신은 어떻게 가업을 일으켜 세워 임종태의 노후를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했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이야기했다.바로 이때, 온유한이 도착했다.그러나 그의 옆에 현채영의 모습도 보였는데 화장도 깔끔하게 하고 온유한과 커플 드레스까지 맞춰 입었다.그리고 온유한의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당당하게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순간 현장은 떠들썩해졌다.임근우는 너무 놀란 나머지 손에 들고 있던 마이크까지 떨어뜨렸는데 무엇보다도 이 모습으로 나타난 온유한이 너무 괘씸했다.그리고 옆에 있던 임유희도 비록 온유한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고 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 부딪히니 모든 사람이 그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보는 것 같아 마치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고 전 세계의 웃음거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금까지 자라오면서 이런 수치심은 또 처음이었다.그러나 이렇게 만든 주범은 벌써 임 씨 가족들 앞에까지 다가와 뻔뻔하게 인사를 건네고
한편, 임씨 가문.임유희의 병은 좀처럼 낫지 않었고 살만 점점 빠지고 있었다.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장희수는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다.“온유한 그 사람은 진짜 전화 한 통도 없었어?”임유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답했다.“엄마, 나 이제 진짜 그 사람이 싫어졌으니까 더 이상 강요하지 말아줘. 응?”“그 말은 이미 너무 늦었어. 네 아버지랑 오빠는 이미 오랜 세월 간 쌓아온 인맥을 거의 전부 온씨 가문의 배 사업에 쏟아부어서 절대 포기하지 않을 거야.”임유희는 지금 온유한을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치는데 그런 애틋한 감정이 들 리가 없었다.“이 울타리 안에 발을 들이고 싶은 건 그 두 사람인데 나랑은 무슨 상관이야?”임유희는 머리를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나도 엄마 딸인데 왜 내 생각은 안 해줘? 유한 오빠는 날 좋아하지도 않는데 내가 왜 억지로 만나야 해?”“처음에 네가 좋다고 쫓아다녔잖아.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해?”장희수도 인내심이 점점 바닥이 났다.“네 아버지 뜻은 만약 온유한이 연락이라도 오면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고...”“절대 전화 올 일이 없을 테니까 그만 포기해.”임유희는 단번에 그녀의 말을 잘랐다.“그리고 여기서 분명히 말하겠는데 그 사람은 절대 나랑 결혼하지 않을 거야. 지금 잔머리를 굴린다고 해도 유한 오빠는 그리 쉽게 넘어올 사람이 아니라고.”“무슨 뜻이야?”임유희는 얼굴을 가리고 더욱 세게 울음을 터뜨렸다.“유한 오빠는 지금 우리, 그리고 온씨 가문 사람에게 복수하는 거라고. 왜냐하면 그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좋아하는 여자가 오직 지아 씨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이제 알겠어?”장희수는 그녀의 말에 너무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가능해? 이미 헤어진 지도 몇 년이나 지났는데?”“틀림없어!”임유희는 심장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난 강지아 씨랑 싸우고 싶지 않아. 이길 자신도 없고. 엄마, 엄마가 아빠랑 오빠한테 좀 잘 말해서 그냥 온씨 가문과 협력만 하고 결혼 이야기는 꺼
이튿날, 온유한은 점심이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마침 온혁진이 화가 잔뜩 난 채 최신애한테 분풀이하고 있었다.“내가 임유희랑 잘 이야기해 보라고 했는데 갔어, 안 갔어? 지금 임씨 가문의 사람들이 내 전화는 아예 받지도 않는데 이거 어떡할래?”최신애는 그의 말에 깜짝 놀랐다.‘대체 뭐 하자는 거지? 설마 지금 강지찬 따라 하는 건가?’그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애써 부여잡고 말했다.“만나러 갔는데 임유희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그 애 어머니한테 쫓겨났어요. 그래서 밖에 나와서 차 한잔 마시자고 문자를 몇 통이나 보냈는데도 답장이 없었고요.”말을 마친 뒤 문자 메시지를 그에게 보여줬는데 확실히 아무런 답장도 받지 못했다.이때, 온혁진이 위층에서 내려오는 온유한에게 말했다.“유한아, 네가 임씨 가문에 좀 가봐.”“싫어요.”온유한은 고민도 안 하고 단칼에 거절했다.그러자 최신애가 재빨리 다가와 그에게 설명했다.“우리랑 협력하는 사람들은 전부 임씨 가문의 그 부자 말만 듣는대. 만약 그들이 짜고 돈을 보내지 않으면 공장과 실험실은 올스톱이야. 아들아, 유희는 분명 너라면 만나줄 것 같은데 둘이서 잘 이야기해 봐.”온유한은 듣다 보니 최신애의 행동이 너무 우스웠다.“왜 제가 임씨 가문에 찾아가서 그 사람들을 만나줄 거라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거죠?”“이 태안 그룹이 나중에는 다 네 것이 되는데 상관 안 할 거야?”“네. 전 싫어요.”온유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어머니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게 다 하찮게만 여겨지거든요.”“뭐라고?”최신애는 그의 대답이 너무 충격적이라 뒤로 주춤했다.온유한은 어젯밤 술의 기운이 아직도 도는지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 일부러 독한 말을 마구 내뱉었다.“온씨 가문이 그리 대단해 보여요? 그러면 무조건 제 발로 짓밟아야겠네요.”“당신 아들인 제가 그리도 대단해 보여요? 그러면 무조건 막 살아야겠네요.”“온씨 가문도, 저도 모두 죽어버리면 더 이상 어떻게 어머니의 그 고귀
“왜 이렇게 빨리 왔어?”강지찬과 정유진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정유진은 더 이상 묻지 말라는 듯이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그제야 강지아는 소파 위의 강지찬과 새언니를 보고 자신이 집을 잘못 들어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이왕 온 김에 그녀는 쿠션을 안고 아예 소파에 앉아버렸고 잠깐 생각을 정리한 뒤에 다시 자기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이때, 강지찬이 더는 참지 못하고 물었다.“서원준 씨 어머니 만나러 갔어?”“응.”“어땠어?”“좋았어.”강지찬은 순간 어두운 얼굴로 그녀에게 말했다.“원준 씨는 분명 자기 어머니가 너를 매우 좋아할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설마 또 그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린 건 아니지?”저 ‘또’라는 말이 그녀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그러다가 정유진이 강지아의 손목에 찬 팔찌를 발견하고 웃으며 말했다.“가보도 준 걸 보면 마음에 든 것 같은데?”강지아는 팔찌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이 시각, 온씨 가문의 최신애도 지금 할 말을 잃었다.술에 잔뜩 취한 온유한을 현채영과 운전기사가 부축해서 데려왔기 때문이다.그러면서 입으로는 계속 큰 소리로 알 수 없는 말들을 중얼거렸다.“제...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려줄 테니까 저랑 결혼... 해줘요.”그리고 현채영은 옆에서 그의 말에 대답을 해줬다.“네. 알겠으니까 우리 꼭 결혼해요.”최신애는 듣다가 화가 치밀어 올라 죽을 것 같았다.“우리 아들을 꼬드겨서 또 어디에 갔던 거야?”“그저 같이 술을 마셨을 뿐이에요.”“멀쩡했던 우리 아들이 너 때문에 하루가 멀다고 술에 절어있어. 유한이는 의사야. 수술하는 의사라고!”최신애는 현채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진짜 유한이를 망치려고 작정했어?”그녀의 말에 현채영이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유한 씨는 지금 저랑 같이 있는 게 너무 행복하대요. 저랑 하루 종일 술도 마시고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했거든요. 그리고 또 뭐라고 하는 줄 아세요?”“어머니께서 바라왔던 지난날들
서원준의 진지한 태도에 강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피했다.“왜 차는 멈췄어. 시간도 늦었는데 빨리 가...”“마음이 아팠지?”서원준은 그녀가 도망치지 못하게 그녀의 어깨를 잡고 눈을 맞췄다.“온유한 씨랑 현채영 씨 소식을 듣고 마음이 아팠지?”“아니.”강지아는 단칼에 부인했지만 서원준은 믿지 않았다.“아닌데 왜 이렇게 몸을 떨어?”그는 강지아의 한쪽 손을 잡아주며 다시 말을 이었다.“지금 지아 씨 자신을 좀 봐봐. 얼마나 떨고 있나.”강지아는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다.“그런 게 아니니까 빨리 출발해.”서원준은 여전히 거짓말하는 강지아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뭐가 그런 게 아닌데? 안 떨었다는 거야, 아니면 이제 온유한은 잊었다는 거야?”강지아는 그의 말에 발끈 화를 냈다.“아니라면 아닌 줄 알아!”그리고는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이거 놔. 그냥 나 혼자 갈게.”서원준은 그녀의 어깨를 너무 세게 잡은 나머지 뼈가 다 으스러질 것 같았다.“제발 정신 좀 차려. 세상에는 온유한 한 사람만 있는 게 아니니까.”“그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야. 지아 씨한테 안정감도 주지 못하고 사랑도 주지 못하는데 대체 뭐가 아쉬워서 아직도 그런 사람을 그리워하고 있어?”그의 입에서 자꾸 들리는 온유한이라는 단어에 강지아는 머리가 터져버릴 것 같았다.“그만 말하라고!”그러나 서원준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말도 못 해? 대체 온유한 씨는 당신한테 어떤 존재인 거야?”비록 오늘 저녁 식사 자리는 매우 순조로웠지만 서원준은 만족하지 못했다.서영희가 그토록 강지아를 마음에 들어 하는데도 여전히 경계심이 있어 보이는 건 분명 예전에 온유한과 함께 했을 때의 그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다는 뜻이다.“지아 씨, 나한테도 기회를 줘. 우리 같이 노력해서 내가 온유한을 잊을 수 있도록 도와줄게.”서원준은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시선을 맞췄다.“날 봐!”“나도 더 이상 기다리기 싫어졌어. 나는 원래 비열하고 욕심도 많아서 지아 씨랑 같이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