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몸에 휴대폰이고 지갑이고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택시를 잡아 친구 집에 도착한 후 택시기사의 휴대전화를 빌려 조예원에게 전화를 걸어 데리러 나와달라고 부탁했다.예원은 유진의 화려한 드레스 차림을 보더니 빠른 속도로 택시비를 내며 의문스러운 듯 물었다.“오늘은 뭐야? 도망가는 신부야, 신데렐라야?”요즘 디자인 작업으로 바빠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는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유진은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며 담담하게 말했다.“나 한빈이랑 헤어졌어.”예원이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물었다. “어?”엘리베이터에 들어서서야 정신을 차렸다.“왜? K그룹에 찍혀서 구치소에 있다며?”“나왔어.” 유진은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남 얘기하듯 건조하게 이야기했다.“내가 강지찬을 찾아갔고, 그 사람이랑 잤어.”예원이는 또다시 입을 떡 벌렸다.“...”‘강... 강지찬? 내가 아는 그 강지찬이 맞는 걸까?’조예원과 유진은 대학교 동창이었고 작년에 실내 인테리어 디자인 작업실을 함께 개업했다.작업실은 예원이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가끔 늦은 시각까지 야근할 때면 예원이네 집에서 잠을 잤으므로 이곳은 두 번째 집이나 다름없었다. 옷이며 생활용품이 모두 있었기에 문에 들어서자마자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이마의 상처에 물이 닿지 않게 조심조심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식탁에는 방금 쪄낸 만두가 놓여 있었다.이 만두는 지난번 유진의 엄마가 직접 빚어 얼려둔 것으로 야근하고 돌아올 때 간단하게 야식으로 먹으라고 챙겨준 것이었다.예원도 두뇌 회전이 빨랐던지라 앞뒤 얘기를 이어보더니 스스로 진실에 가까워졌다.“밥 안 먹었지?”마음이 아프면서도 한심해 보였다.“지금 네 모습 그대로 집에 가면 아저씨 아줌마가 마음 아파 못사실걸.”유진이 억지로 웃음을 지으며 마음 한쪽이 따뜻해짐을 느꼈다.“그래서 널 찾아온 거잖아.”“얼른 먹기나 해.” 예원은 마음속에 하고 싶은 말이 가득했지만 절친에게 차마 소리를 지르지 못해 답답한 채로 꾹 참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 앞에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정 교수네 딸 말이야,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던데 왜 이런대?”“겉보기에만 그렇겠지. 뒤에선 어떤 짓을 벌이고 다닐지 누가 알겠어.”“어머 쪽팔려라. 정 교수님이랑 이 선생 낯을 다 깎아 먹었겠네.”유진은 온몸에 피가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녀가 제일 두려워하는 것도 부모님의 명성에 자신이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역시 나쁜 일은 생각하는 대로 벌어진다더니.이때, 한빈 엄마의 목소리가 집 안에서 흘러나왔다.“... 당신들 대학교수가 딸 교육은 어떻게 시킨 거야? 밖에서 굴러온 남자랑 편 먹고 자기 예비 신랑을 해칠 궁리나 하고 있으니. 이런 악랄한 애는 우리 집에서 절대 못 받아들여! 선생은 무슨, 뒤통수 치는 법이나 가르치는 선생이면 모를가...”그 말에 유진은 참았던 화가 폭발했다.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참을 수 있으나 부모에게까지 행패를 부리다니, 절대 참을 수 없었다.분노에 휩싸인 채 구경꾼들을 밀치며 문을 열고 들어오자 옆집 아주머니 품에 안겨 울고 있는 엄마가 보였다.테이블 위에 물컵과 약상자가 있는걸 보니 이미 약을 먹은 것 같았다.“유진이 왔니?” 옆집 아주머니가 구원투수를 발견한 듯 불렀다.알고 보니 한빈네 엄마만 온 것이 아니라 소희까지 함께 있었다.두 사람의 의기양양한 모습을 보니 우리 집에 찾아와 화풀이하며 본때를 보여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한평생 글만 가르치고 얼굴을 붉혀본 적 없었던 아빠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분노와 수치심에 휩싸여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계셨다.유진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강지찬에서 이용당한 건 그러려니 했다. 둘 싸움에 고래등 터진 상황이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한빈에게 버림받아 파혼당한 것도 그러려니 했다.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되니까.하지만 부모님은 도대체 뭘 잘못했다고?평생 교편만 잡으시고 모두에게 선하신 분들이 자신 때문에 집까지 찾아온 사람들한테 치욕스럽게 모욕당하고 있다니!소희는 마
강지찬을 보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 모두 입을 뗄 수가 없었다.한빈 엄마는 전형적인 강약약강으로 눈앞의 강지찬을 보자 너무 놀라 종아리에 쥐가 나버렸다.소희가 그녀를 부축하더니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말했다.“강 대표님, 유진이 찾으러 오신 거죠? 대화 나누세요. 저희는 먼저 가볼게요.”둘은 조금 전의 기세의 반도 못 편 채 강지찬의 눈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복도가 좁아 강지찬의 긴 다리로 반을 차지하자 한빈의 엄마와 소희는 벽에 바싹 붙은 채로 슬금슬금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러자 유진이 남은 반쪽 꽃병을 들고 따라왔다.“거기서, 가지 마. 사과부터 해!”그녀는 차가운 눈으로 한빈의 엄마를 바라보며 말했다.“오늘 반드시 우리 엄마 아빠한테 사과해야 해, 그전엔 아무도 나갈 생각 하지 마!”한빈의 회사가 규모를 넓히기 시작한 뒤로 그 집 어미는 유진이네 집안을 업신여겼다. 유진의 부모님에게 말할 때도 항상 고고한 태도로 뭐라도 되는 양 굴었었다.전에는 유진이네 가족도 일일이 대꾸하기 싫어했다. 두 집안이 알게 된 지도 몇 년인데 서로 어떤 사람들인지는 뻔히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한빈의 엄마가 그녀를 모욕하는 것도 모자라 집까지 찾아와 자신의 부모까지 모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이 일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었다.“너 이...” 당장이라도 욕을 뱉으려던 한빈의 엄마는 곁눈질로 강지찬을 힐끗 보고는 ‘천박한 년’이라는 뒷말을 그대로 삼켜버렸다.반나절 만에 한빈의 파트너들 모두 연락이 닿지 않았고 투자비 회수는 물론 연락을 끊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한빈이 힘들게 모아온 인맥과 자원들이 강지찬에게 척을 졌다는 이유만으로 물거품이 된 것이다.그들 가족도 강지찬을 찾아가 난동을 부리지는 못하겠으니 어쩔 수 없이 모든 화를 유진이 가족에게 풀고 있는 것이었다.하지만 강지찬의 등장은 예상도 못 했었다. 안 봐도 유진이 도와달라고 불렀을 게 뻔했다.이 천박한 년, 역시 강지찬과 붙어먹은 게 확실했다.강지찬은 재밌는 구경을 끝냈다는
유진은 아버지의 말에 입을 꾹 닫은 채 베란다에서 빗자루를 들고 와 깨진 도자기를 깨끗이 청소하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 아빠, 먼저 데려다주고 와서 다시 설명해드릴게요.”정명학은 강지찬을 힐끗 쳐다봤고 지찬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다시 찾아뵙죠.”문이 닫히고 나서야 유진은 길게 숨을 토해냈다.강지찬은 그런 유진을 빤히 지켜보면서 알면 알수록 더 흥미로운 여자라고 생각했다.잠깐 전의 독기 가득한 모습은 만약 한빈엄마가 끝까지 사과하지 않았다면 진짜로 꽃병으로 찔러버릴 기세였다.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한없이 약해 보이는 사람이라도 선을 넘는다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었다.“뭘 봐요?”유진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오늘 화장을 하지 않아 희고 깨끗한 얼굴에 약간의 위태로움마저 비쳤지만, 표정만은 여전히 단호했다.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강지찬이 먼저 들어갔고 도발하듯 유진을 쳐다보며 물었다.“들어오기 겁나요?”유진은 이렇게 된 마당에 뭐가 겁나냐고 생각했다. 전에 일들은 둘째치고 오늘 그의 등장은 참으로 시기적절했다. 그가 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한빈엄마에게 시달려야 했을지 몰랐다.그녀가 엘리베이터로 들어가자마자 강지찬이 확 그녀를 덮쳐 엘리베이터 벽으로 밀었다.유진의 턱을 살짝 잡은 채 흥미롭게 물어오는 지찬이였다.“아깐 좋았죠?”유진은 하마터면 자리에서 폭발할 뻔했다.“이거 놔요, 뭐 하는 거예요?”손가락으로 전해지는 부드럽고도 매끈한 촉감에 지찬은 그날 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목소리도 알게 모르게 살짝 갈라져 있었다.“아까 좋았냐고요, 대답해요.”“미쳤어요?” 한빈엄마가 사과한 일을 말하는 것인데 말투는 왜 둘 사이의 말 못 할 일을 얘기하는 듯 야릇하게 깔고 있는지 몰랐다.강지찬은 그녀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나만 따라오면, 계속 좋게 해줄게요.”“...” 유진은 뭐라 답하면 좋을지 몰랐다. 미친 것이 분명했다. 여색을 즐
유진이 집으로 돌아오자 옆집 아주머니는 이미 돌아가고 없었다.부모님이 소파에 앉아계셨고 테이블에는 물 세 잔이 놓여있었다.이 상황을 유진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제대로 이야기해 보자는 뜻이었다.감출 생각도 없었던지라 평온한 말투로 한빈과 강지찬의 일을 곧이곧대로 이야기했다.엄마는 또다시 울기 시작했고 아빠는 엄마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난 괜찮아요. 이것 좀 봐요, 괜찮잖아요?”유진은 엄마 아빠가 자신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임을 알았기에 걱정을 덜어드리고자 웃으며 말했다.“지금이라도 한빈이 이런 사람인지 아는 게 결혼 후에 아는 것보다 훨씬 낫죠. 슬퍼하지 마세요, 전 잘 지낼 수 있을 거예요.”정명학이 엄숙한 얼굴로 물었다. “그럼 강지찬은?”부모님이 한평생 쌓아온 명성이 자신 때문에 영향을 받았다는 생각에 유진은 자책했다.“죄송해요. 엄마 아빠, 제가 불효자식이에요. 그 탓에 부모님까지 이런 꼴을 당하게 하고...”유진은 굳게 약속했다. “저랑 강지찬은 아무런 관계도 없어요. 앞으로 다신 만날 일 없을 거예요.”정명학과 이명자는 이미 말을 끝낸 듯 유진의 이런 태도에 크게 안도했다.“그래, 그 남자 무슨 꿍꿍이인지 예상할 수가 없더구나. 엮이지 않는게 좋겠어. 더군다나 그 집 배경이면 우리랑 천지 차이인데 엄마 아빠는 딴 건 다 필요 없어, 너만 행복하면 돼.”정명학은 격조가 있는 아버지였다.“이웃집에서 뭐라고 떠들든 듣지 않으면 그만이지. 우린 우리의 삶을 살면 돼.”유진은 마음이 말랑말랑해졌다. 엄마 아빠는 항상 그녀의 선택을 존중해왔고 전부터 한빈의 엄마한테 불만이 있었어도 유진의 체면을 생각해 왈가왈부하지 않았었다.부모님에게 어떻게 파혼 소식을 알려야 하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한빈엄마의 난리 통에 모든 것이 스르르 매듭이 풀려버렸다.한빈과 헤어졌단 말에 부모님도 한 시름 놓았을 것이다, 드디어 앞으로 그 집 어미한테 괴롭힘을 당할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유진은 엄마를 방으로 모셔다드
회의가 끝난 후, 최의현은 강지찬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갔다.“한빈이라는 자식 말이야, 이틀째 회사에도 안 나오고 집에 처박혀서 아예 외출 자체를 안 한다네?”최의현은 손으로 표창을 돌리며 말했다.“그 회사 요즘 매일 빚쟁이들이 찾아와서 소희라는 여자가 혼자 대처하고 있대.”여기까지 말한 최의현은 혀를 내둘렀다.“사내자식이 여자를 앞세우다니, 쯧.”강지찬은 그날 밤 정유진의 풋풋함과 피로 물든 침대 시트를 떠올리며 눈썹을 치켜올렸다.“확실히 남자 아니야.”그는 자세를 바꾸고 어색하게 마른기침을 해댔다.“끝났어?”최의현은 손에 들고 있던 표창을 내던졌고, 표창은 마침 과녁에 꽂혔다.“아, 맞다. 둘째 돌아온다며?”강지찬은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응.”최의현은 의자를 사무용 책상 앞으로 끌어당긴 후 엉덩이를 붙이더니 탁자를 두드렸다.“제발 맞서 싸우지 좀 마. 너 밖에서 소문 어떻게 난 줄 알아?”강지찬은 전혀 궁금하지 않았고, 묻기도 귀찮았다.최의현은 하는 수 없이 계속 말했다.“다들 네가 강지현을 거지 같은 곳으로 쫓아버렸다고 생각한다고. 환경도 열악하고 의료 수준도 한계가 있어서 더 늦으면 정말 그곳에서 죽을지도 몰라.”“풉.”강지찬은 차갑게 웃었다.영감이 며칠째 밥 먹으러 오라고 한 이유도 바로 강지현 때문이다.요즘 정유진은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주로 이명자의 옆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명자는 현기증과 고혈압이 심각해 그녀는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이명자와 함께 장 보러 갔다가 이웃을 마주쳤는데 멀리에서도 “교수”와 “외간 남자”라는 말이 똑똑히 들려왔다.정유진은 이명자에게서 팔을 풀고 돌아서서 활짝 웃으며 두 여자를 바라봤다.“아주머니, 따님이 외도로 사생아를 낳은 사건은 끝났어요?”“그리고 아주머니네 손자는 연애하다가 학생을 임신시켰...... 교육 좀 잘하셔야겠어요. 그렇게 책임감이 없어서야.”정유진은 일부러 큰 소리로 쩌렁쩌렁 말했고, 지나가던 사람들은 그녀의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소희가 임신을? 게다가 애 아빠가 한빈?언제부터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사이였지?이 순간, 충격은 둘째 치고 정유진은 정말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모자란 멍청이라는 생각이 들었다.한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에는 경악과 분노가 가득했다.“두 사람 언제부터야?”한빈과 헤어진 지 고작 일주일인데 소희가 임신했다는 것은...... 두 사람은 전부터 그녀를 속이고 만나왔다는 것을 의미한다.한빈, 네가 감히?한빈은 잠시 움찔했지만 자기를 바라보는 정유진의 눈빛에 왠지 으쓱해지며 역시 그녀는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요 며칠 그는 갖은 수를 써서 강지찬을 만나려고 했지만 적잖은 곤란에 부딪혔다. 평소에 함께 술도 자주 마시던 사람들은 갑자기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정유진과 강지찬의 관계를 생각하니 비록 인정하긴 싫었지만 지금 그를 도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정유진이었다.여기까지 생각한 한빈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유진아, 화내지 말고 우리 나가서 대화 좀 하자. 나 너한테 부탁할 거 있어.”그 미소는 너무나도 익숙한 미소였다. 한빈은 수없이 똑같이 웃으며 똑같은 말을 했었다.“유진아, 장 대표 접대 좀 부탁해. 몇 잔 같이 마시기만 하면 돼.”“유진아, 이번 달 보고서 좀 부탁해.”“유진아, 사모님 쇼핑하고 싶으시대. 부탁할게.”사랑했던 만큼, 이 순간 그녀는 한빈의 이 얼굴이 원망스러웠다.다 헤어진 마당에도 그녀를 이용하려고 하다니. 게다가 그는 지금 그녀의 질문에 아주 당당하게 귀를 닫고 입을 막아버렸다.한빈은 대체 정유진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미련하고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아직도 정유진의 손목을 잡고 있는 한빈의 모습에 소희는 화가 나서 씩씩거리며 정유진에게 달려들었고 그녀의 여린 뺨을 향해 손을 휘둘렀다.“뻔뻔한 년......”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한빈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소희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빈을 바라봤다.“한빈아, 너 지금 뭐 하는 거야?”“그만해!”병원 로비에
구경꾼이 점점 더 많아졌고 정유진은 더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역겨웠다.한빈이 그녀에 대한 감정은 진심이라고 생각했었다.우스웠다.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가식이고 거짓이었다.그녀가 대학교 1학년 때, 한빈은 4학년이었다. 그녀가 대학교 3학년이던 그해 한빈은 그녀에게 소희를 소개해 주며 자기 어머니에게 딸 같은 아이라고 했었다.처음에 그녀도 소희 언니라고 불렀는데 알고 보니 소희는 한빈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그녀를 언짢게 생각했다.그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한빈의 어머니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어쩌면 그때부터 두 사람의 관계가 모호했던 건 아니었을까?정유진은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내가 그렇게 바보였어?구경꾼들은 대부분 연세가 꽤 있는 아줌마 아저씨들이었고 그들은 비난의 눈빛으로 한빈과 소희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요즘 젊은것들은 자기애가 너무 없어.”“남자 쪽이 정말 쓰레기네. 욕심이 너무 많아.”“울지 마, 저런 인간 말종은 멀리하는 게 좋아. 더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어.”누군가 그녀에게 휴지를 건넸고, 그제야 그녀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작 한빈 때문에 눈물을 흘리다니.“고마워요.”정유진은 눈물을 닦았다.참다못한 소희가 입을 열었다.“다들 뭘 안다고 왈가왈부에요? 저 여자가 먼저......”정유진은 싸늘하게 소희를 노려보았다.“야, 소희. 너 지금 여기서 나와 시비 따지고 싶어? 난 괜찮은데, 넌 괜찮겠어?”지켜보던 한 아줌마는 너무 화가 나서 심장병이 올 것 같았다.“내가 젊었을 때 말인데, 제일 친한 친구 년이 내 남자 친구의 애를 임신하고 나한테 자랑하러 왔더라고. 그런데 애가 다섯 살도 되기 전에 그 망할 자식이 또 바람을 피웠지, 뭐야. 남의 남자 빼앗으면 언젠가는 똑같이 빼앗기게 돼 있어. 아가씨, 남자 친구 단속 좀 잘해. 그러다 아가씨도 같은 꼴 나.”“아주머니,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소희는 뭐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한빈은 그녀의
식탁 위의 분위기는 상당히 어색했다.최신애는 강지아에게 많이 먹으라고 말하며 계속 반찬을 얹어 주었다.앞에 있는 접시는 가득 찼지만 강지아는 최신애가 짚어 준 반찬을 한 입도 먹지 않은 채 먹고 싶은 것은 스스로 집어 먹었다.최신애의 얼굴은 잔뜩 어두워졌다.온혁진이 기침을 하며 강지찬과 강씨 가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오빠 회사 일은 잘 몰라요. 제가 관여할 일도 없고요.”강지아는 온혁진의 물음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거절했다.“궁금한 게 있으면 직접 오빠한테 물어보세요.”식사를 마친 뒤 강지아는 전화를 받고 나갔다.그녀는 온유한에게 데려다 달라고 하지 않고 직접 운전해서 갔다.밖에서 차 떠나는 소리가 들리자 최신애는 그제야 한숨을 내쉬었다.“아들아, 지아는 대체 무슨 뜻이야?”핸드폰을 들고 흉부외과 팀의 온라인 수술 토론을 보고 있던 온유한은 최신애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지아가 뭘 하든, 신경 쓰지 말고 묻지도 마세요. 아무 말도 하지 마시고요.”강지아는 화령과 술을 마시러 나갔다.화령의 기분이 좋지 않아 두 사람은 오늘 에이프릴 홀에서 방 하나를 빌려 하룻밤을 보내기로 했다.“미안해, 온씨 저택으로 들어간 첫날 밤인데 내가 불러냈네. 온 대표님이 화내겠다?”“그 사람 기분 따위 상관 안 해.”강지아가 소파에 편안히 누우며 말했다.“무슨 일인데? 최금성이 왜 또?”“별거 아니야.”화령이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최금성의 소울메이트가 돌아왔어. 지금 밖에서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을 거야.”“소울메이트?”강지아는 깜짝 놀랐다.“유주?”화령이 물었다.“너도 알아?”강지아가 일어나 앉으며 혀를 찼다.“골치 아프게 됐네.”그 말에 화령의 마음이 더 복잡해졌다.“왜 골치 아픈데, 정확히 얘기해봐.”술을 마실 마음이 싹 사라진 강지아는 화령보다 더 초조해 보였다.“왜 돌아왔대? 오랫동안 밖에 있다가 갑자기 돌아온 이유가 뭐야?”화령은 더욱 초조해졌다.“대체 왜 그러는 건데? 유주라는 여자, 대체
온혁진과 최신애는 마당에 서서 강지아를 기다리고 있었다.강지아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주는 것이었다.최신애의 미소는 눈으로 보기에도 어색했다.가장인 온혁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이제부터 우리는 한 가족이야. 지아야, 필요한 게 있으면 네 아주... 네 어머니에게 말해.”최신애도 말했다.“그래, 그래. 얼른 방에 가서 마음에 드는지 봐봐.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바꿔줄게.”고개를 끄덕인 강지아는 열려 있는 문을 바라보며 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최신애가 유난히 열정적으로 말했다.“지아야, 먼저 방에 가서 옷을 갈아입어. 조금 이따가 저녁 식사 준비할게. 오늘 저녁은 네가 좋아하는 음식만 준비하라고 했어.”강지아는 깜짝 놀랐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기억하세요?”“당연히 기억하지.”최신애가 약간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키웠는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모를 리가 있겠니? 너는 매운 걸 싫어했어, 어릴 때 실수로 고추를 먹으면 한참을 울었어. 네 엄마가 아무리 달래도 소용없었지, 그 매운맛이 가실 때까지 기다려야 했어.”“그걸 기억하시네요.”강지아가 말했다.간단한 몇 마디였고 특별히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최신애는 왠지 얼굴이 화끈거렸다.문을 들어서자 강지아는 긴장을 풀었다.이곳에 결국 들어오게 되다니... 평생 다시는 들어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하지만 옛말대로 매듭은 매듭을 묶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나는 게스트 룸에 있을게요.”강지아의 말에 최신애와 온혁진은 깜짝 놀랐다.“아, 아니. 네가 게스트 룸에 있으면 안 되지...”온유한이 말했다.“2층 방 좀 정리해 주세요.”게스트 룸이 2층에 있었기에 온유한은 당연히 그녀와 한 층에 있고 싶었다.강지아도 별말은 하지 않았다.최신애는 즉시 사람들을 시켜 2층에 있던 온유한 방 옆의 방을 강지아의 취향에 맞게 정리했다. 창고에 물건이 많았지만 하인들이 함께 움직여 30분 만에 강지아에게 아름답고 아늑한 방을 만들어줬다.강지아가 세수를 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
연우의 생일 파티에는 강씨 가문의 친지들이 많이 참석했기에 강지아는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한동안 응대를 해야 했다.화장실에 가서 화장을 고친 뒤 손을 씻고 있을 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허리를 꽉 잡았다.“누구야, 놔!”깜짝 놀란 강지아가 발로 그 사람을 밟으려 했다.이것은 장형준에게 배운 호신술이었다. 하이힐로 상대방의 발을 밟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호신술이었다.하지만 하이힐로 밟기 전에 강지아를 안고 있는 사람이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나야.”온유한이였다.강지아는 움직이지 않았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온유한의 품과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나 익숙했다.그에게 꽉 안겨 귀에서 들리는 그의 숨소리는 한 번 또 한 번 그녀의 심장을 강타했다.이제는 그가 두렵지 않다.하지만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심장은 여전히 두근거렸으며 몸은 본능적으로 저항하려 했지만 예전처럼 그를 보자마자 떨리는 것은 아니었다.“내 생각 안 했어? 지아야?”온유한의 물음에 강지아는 매우 평온하게 말했다.“생각했어.”그 대답에 온유한이 오히려 놀랐다.강지아가 놓아달라는 듯 온유한을 밀어내자 온유한도 그녀의 뜻대로 그녀를 놓아주었다.강지아가 말했다.“오늘 저녁에는 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 내일 오후에 데리러 와. 같이 온씨 저택으로 가자.”온유한은 또 한 번 놀랐다.“지아야,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니?”“알아, 우리 결혼했잖아. 같이 온씨 저택에 돌아가는 게 당연한 거 아니야?”쉽게 한 말 같지만 당연하지 않다...온유한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너는 온씨 저택에 갈 필요 없어. 우리 그냥 서울 캐슬에 살자. 그 집은 너를 위해 특별히 준비한 거야. 거기서 살면 편할 거야.”“아니, 온씨 저택으로 들어갈 거야.”강지아가 단호하게 말했다.강지아가 집에 들어와 살 거라는 소식을 들은 최신애는 마음속으로 거부감을 느꼈다.이제 강지아와 그녀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시어머니가 며느리 눈치를 보며 살아야 한
“온씨 가문이 정말 예전 같지 않아, 작년에 많은 일이 일어나면서 태안 그룹의 평판도 영향을 받았지.”“그건 다 최신애가 자초한 일이야, 이제는 강씨 가문의 아가씨에게 아부하려고 하지만 강지아가 어디 쳐다보기라도 해?”“강 대표가 냉정하다고들 하지만 온씨 가문에게는 정말 잘해주네. 최신애가 예전에 강지아에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가끔 귀에 들려오자 얼굴이 빨개진 최신애는 화가 나면서도 당황스러웠다.강지아도 몇 마디 들었지만 그냥 무시해 버렸다.“조카딸 생일 때문에 잠깐 돌아온 거야? 아니면 더는 안 나가는 거야?”화령의 물음에 강지아가 미소를 지었다.“내가 마치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 것처럼 말하네.”“그래, 넌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 않아. 그냥 피하러 다니는 거지.”서원준이 다가오자 화령이 웃으며 말했다.“한 번 나가면 두 명 다 피할 수 있구나.”서원준은 여전히 건들거리는 모습이었다.“돌아왔어?”“응, 돌아왔어.”강지아가 동하민을 향해 손을 내젓자 동하민이 그녀의 가방을 가져왔다.화령이 농담으로 한마디 던졌다.“우리 강씨 가문의 아가씨가 선물 주는 버릇은 고치지 못했나 봐.”서원준도 웃었다.“나한테도 줄 선물이 있나 보네.”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없었다. 이미 마음을 놓은 건지 아니면 일부러 가볍게 보이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강지아는 이번에 브로치 선물을 준비했다. 남자 것과 여자 것은 당연히 달랐지만 모두 예뻤고 값비싼 것들이었다.“또 도매한 거야? 정성이 없네.”화령은 겉으로는 비난했지만 이미 브로치를 들고 가슴에 대어 보고 있었다. 입과 몸이 따로 노는 게 특징인가 보다.강지아가 말했다.“나에게 뭐라고 하지 마, 그동안 내가 얼마나 바빴는지 너도 알잖아.”화령이 콧방귀를 뀌었다.“바쁘겠지, 펀과 함께 전 세계를 돌아다니느라 얼마나 바빴겠어. 그래도 브로치가 내 미모와 잘 어울리니까 마음에 드네, 고마워.”말을 마친 화령은 선물과 잔을 들고 알아서 자리
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의 가족 모임에 강홍식과 고세연은 초대받지 못했기에 참석하지 않았다.본가로 돌아오자 강홍식이 마당에 서서 강지찬과 강지아를 불효자식이라고 욕했지만 둘 다 아버지를 무시했다.강지아는 바로 자기 집 마당으로 돌아갔다.정유진은 강지아가 결혼식 날 왜 모른 척했는지 물어볼 줄 알았는데 돌아오는 내내 강지아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지아가 걱정돼.”강지찬은 아내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걱정할 필요 없어. 본인도 속으로 알고 있을 거야. 서원준과 결혼하는 것보다 온유한과 결혼하는 게 낫다는 걸.”사실 강지아는 지금 서원준과 결혼하지 않은 것을 매우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무고한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그날 밤, 강지아는 화령과 동하민을 데리고 해외로 패션쇼를 보러 떠났다.에이프릴 홀.술을 좀 많이 마신 최의현은 옆에 있는 온유한의 어깨를 탁탁 치며 말했다.“친구야, 우리랑 술 마신 지 얼마나 됐지? 너 벌 받아야 하는 거 아니야?”온유한이 미소를 지으며 앞에 있는 술을 한 모금 마신 뒤 한 잔을 따라 강지찬을 향해 들었다.“지찬아, 내 잔도 받아줘.”강지찬은 온유한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나서야 잔을 들고 멀리서 살짝 부딪혔다.강씨 가문과 온씨 가문은 이렇게 화해했다.온씨 집안.최신애가 매우 불쾌해하며 거실에 앉아 한숨을 쉬자 신문을 보던 온혁진이 그녀를 바라보았다.“졸리면 자러 들어가, 아들이 오늘 늦게 들어올 거야. 기다릴 필요 없어.”최신애는 또 한숨을 쉰 후 말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남들은 며느리를 들이면 기뻐서 날뛰는데 우리 집은 왜 이럴까요? 며느리에게 차 한 잔도 못 얻어 마시고 조상님보다 더 조상님 대접을 해줘야 하잖아요.”온혁진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누구를 탓하겠어? 당신이 불평할 자격이 있어? 경고하는데 이런 말 아들 앞에서 하지 마. 지아가 온씨 가문의 문턱도 안 들어오겠다고 해도, 평생 우리를 부모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아무 말도 할 자격이
강지아는 그 자리에 멈춰 서 있었다.온유한을 잔뜩 경계하는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온유한은 쟁반을 둥근 테이블 위에 놓으며 미소를 지었다.“지금 먹기 딱 좋으니까 얼른 와서 먹어.”온유한의 모습은 마치 두 사람 사이에 떨어져 있던 3년의 시간이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강지아는 배가 고팠지만 가까이 가지 않았다.“알았어.”온유한은 항복하는 듯 말했다.“와서 밥 먹어, 나는 잘게.”말을 마친 온유한은 옆방 침실로 들어갔다.강지아는 여전히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이 집이 완전히 그녀의 취향에 맞게 꾸며져 있다면 충전기도 그녀가 평소에 두던 곳에 있을 것이다.테이블 아래 서랍을 열자 아니나 다를까 충전기가 그 안에 있었다.밥을 먹은 뒤 방으로 돌아가 샤워를 한 강지아는 옷장을 열자마자 깜짝 놀랐다.옷장 안의 옷마저 그녀의 옷장에 있는 것들과 거의 똑같았기 때문이었다.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누운 강지아는 잠들지 못할 줄 알았으나 새벽까지 깊이 잠들었다.천장을 바라본 강지아는 무력감이 들면서도 이런 자신이 믿기지 않았다.아래층 거실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는 온유한은 여전히 여유로운 모습이었다.조금이나마 덜 위험한 모습을 보이면 강지아의 경계심도 조금은 풀어지게 될 것이다.발걸음 소리를 들은 온유한은 신문을 가지런히 접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아침 식사 준비됐어, 어서 와서 먹자.”말을 마친 뒤 주방으로 가서 밥과 반찬을 차렸다.집안일을 하는 온유한은 왠지 모르게 그녀의 눈길을 끌었다.아마도 잘생긴 남자는 무슨 일을 해도 멋져 보이는 법인가 보다.“얼른 와, 맛이 괜찮을 거야.”온유한이 기대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강지아는 순간 깨달았다. 이 집에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데... 그렇다면 어제 저녁 식사와 오늘 아침 식사도 온유한이 준비한 것일까?마음이 너무 닫힌 탓인지 이에 대해서도 전혀 감동을 하지 못했다.감동은커녕 마음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안 먹을 거야, 좀 이따
결혼식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결혼식이 아니라 친지 친구들 간의 대형 모임으로 변했다.강지찬은 받은 축의금은 모두 돌려줄 것이며 오늘 이 자리에 온 하객들은 맘 편히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강지찬이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을 때 장형준이 와서 보고했다.“대표님, 서원준 씨가 돌아왔습니다.”밖에 있는 서원준은 손에 있던 외투도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고 넥타이도 매지 않았다. 입고 있던 셔츠도 헐렁해졌다.입구의 테이블에서 술병을 하나 집어 들고는 바닥에 쏟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온 그는 강지찬 앞에 다가와 술병을 위로 집어 들었다.장형준은 서원준이 혹시라도 폭력을 쓸까 봐 재빨리 강지찬 앞을 가로막았다.강지찬은 장형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키라고 했다.“왜?”강지찬이 술병을 바라보며 묻자 서원준이 싸늘한 눈빛으로 말했다.“진작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거예요? 이날만 기다린 거예요?”강지찬은 솔직하게 말했다.“응, 예상했어.”“그래요, 그렇군요.”서원준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술을 한 모금 마셨다.하지만 강지찬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술병의 술을 다 마신 후, 그는 서연희를 데리고 호텔을 떠났다.성대한 결혼식이었지만 남자 측의 친지와 회사 동료들을 합쳐도 두 테이블밖에 되지 않았다.돌아가는 길, 두 모자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원준은 서연희를 집까지 바래다주었다.마당은 강지아가 전에 개조해 조금 변화가 있었다. 풀들이 제각각 자라던 마당이 강지아 덕분에 많이 질서정연해졌다.가을이 되었음에도 꽃들이 여전히 만발해 있었다.“지아가... 이제는 오지 않겠지?”서원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기 어머니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 주었다.서연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아들아, 지아의 오빠를 원망하지 마라. 오늘 이런 상황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야. 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지아의 마음속에 네가 없다는 것을.”한참 후, 서원준이 말했다.“알아.”주위 인테리어가 너무 익숙했던
온유한이 강지아를 거실 한가운데에 앉히자 강지아는 순간 멍해졌다.이 집은 온유한이 현채영에게 사 준 집이 아니었던가? 왜...“강지아 씨가 이 환경에서 안정감을 느낄 거라고 유한 씨가 그랬어요. 여기 있는 모든 물건들도 유한 씨가 직접 하나하나 주문 제작한 거고요. 어떤 물건들은 해외에서 들여온 거예요. 강지아 씨가 산 것과 같은 제품이에요. 온유한 씨가 겨우 찾아낸 거예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강지아 씨가 이 집의 주인이에요. 나는 그냥 온유한 씨가 고용한 연기자일 뿐이에요. 오늘이 내 마지막 출연이 될 거예요.”강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두 사람, 그런 사이 아니었어요...?”“아니에요.”현채영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온유한 씨의 마음속에 여자는 항상 강지아 씨뿐이에요. 이건 의심할 필요 없어요.”현채영은 프로페셔널하게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고 조용히 물러났다.집이 아주 넓었지만 강지아는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지아야, 마음에 들어?”온유한이 다시 그녀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강지아는 그 손을 뿌리쳤다.“내가 감동할 거라고 생각해? 감동하고 그다음에 같이 잘 살 거라고 생각해? 온유한, 인생이 장난이야? 책장을 넘기는 것처럼 모든 일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강지아는 돌아서서 걸어 나갔다.자리에 서 있는 온유한은 그녀를 바라보다가 리모컨을 눌렀다. 이내 열려 있던 대문이 서서히 닫혔다.“뭐 하는 거야? 나를 가두려고? 이것도 우리 오빠에게서 배운 거야?”강지아가 비웃으며 말하자 온유한은 다시 문을 열더니 그녀가 입고 있는 웨딩드레스를 가리켰다.“정말 그런 차림으로 강씨 본가에 돌아갈 거야? 그리고 지찬이와 형수님은 아직 호텔에 있어. 지아야, 일단 위층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한 다음 우리 다시 이야기하자.”강지아는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당장 오빠와 형수를 만나도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기에 그의 말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여기 위층이라고 해도 저택의 집과 똑같았기에 강지
“알았어! 그래! 내가 꺼질게! 강지아, 분명 나를 찾아와서 울 날이 있을 거야.”분노에 가득 찬 서원준은 외투를 벗고 흐트러진 머리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초라한 얼굴로 옷을 들고 사라졌다.강지아가 이제 막 숨을 돌리려는 순간, 누군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나를 방어하는 건 내가 혹시라도 서원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서야?”온유한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강지아는 더 이상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지아야, 네 마음속에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네.”강지아는 냉정한 얼굴로 온유한을 바라보았다.“그렇지 않아?”그러고는 온유한의 손을 뿌리치고 웨딩드레스를 들고 걸어 나갔다.하지만 몇 걸음 걷기도 전에 누군가가 그녀를 안아 들었다.“온유한, 뭐 하는 거야?”온유한은 그녀를 차 안에 앉혔다.차는 다시 출발했고 이번만큼은 온유한도 신호위반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운전했다.하지만 차는 명도 빌딩이나 강씨 혹은 온씨 저택으로 향하지 않았다.“어디로 가는 거야?”“우리의 새집으로.”새집.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사랑하는 신혼부부였다면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분명히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하지만 강지아는 그저 눈을 감았다.“강씨 본가로 돌아갈 거야.”온유한이 아무 말 없이 계속 운전하자 강지아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도 소용없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차는 마침내 고급 빌라 단지로 들어섰다.강지아는 이곳을 잘 알고 있었다. 온유한이 여기에 수십억 원짜리 집을 현채영에게 사줬다. 당시 이 소식을 들은 화령은 너무 부러워했다.“여기로 와서 뭐 하려고?”“도착하면 알게 될 거야.”차는 한 대형 빌라로 들어섰다.차에서 내리기도 전에 마당에 현채영이 서 있는 것을 본 강지아는 말문이 막혔다.온유한은 대체 뭘 하려는 걸까?옛 애인과 새 애인을 양손에 끼고 노는 걸 보여주려는 건가?“지아야, 내려.”온유한이 차 문을 열더니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강지아는 그저 황당하다는 생각뿐이었다.“내려가서 뭐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