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무렵, 유홍기는 자료 하나를 들고 부산 제1 경찰서에 도착했다.심택연은 그런 그에게 말할 기회도 주지도 않고 냉랭하게 말했다.“뭐 하러 왔어? 김예훈을 풀어달라고 빌러 왔어? 내가 말해주는데, 난 오늘 임 어르신 전화를 10통이나 끊은 사람이야. 김예훈을 풀어달라고? 어림도 없어.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는데. 내가 권력을 남용했다간 부산 경찰서 이미지에도 타격이 있을 것이고, 임 어르신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야! 그러니까 나가!”심택연이 차가운 표정으로 출입문을 가리키자 유홍기가 피식 웃더니 말했다.“심 도련님, 저는 김 도련님을 풀어달라고 사정하러 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 익명으로 증거를 보내왔길래요. 심 도련님께서도 좋아하실 만한 증거죠. 자료에 의하면 후지와라 미유 씨는 에이즈 말기라 살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도 않았었습니다. 어머님이신 오려원 씨가 남은 평생 편하게 살라고 고의로 김 도련님을 모함했던 것입니다. 김 도련님한테 에이즈를 감염시키려고 우연한 만남을 가정해 김 도련님 욕실마저 빌렸던 것입니다. 이 첫 번째 계획이 실패하니 제 죽음으로 김 도련님을 궁지로 몰고 간 거죠. 그래서 모든 알리바이는 전부 거짓입니다. 김 도련님께서는 무죄로 석방되어야할 뿐만 아니라 저희 경찰서에서 사과해야할 정도입니다...”유홍기는 주머니에서 녹음기 하나를 꺼내 심택연에게 들려주었고, 또 사진 한 장과 친필서까지 보여주었다.심택연은 표정이 확 변하더니 서서히 말했다.“확실한 거 맞아? 원본이긴 하고? 다른 사람한테 공개한 적 있어?”유홍기가 담담하게 말했다.“이 증거들을 받자마자 임 어르신께 보고드렸습니다. 임 어르신께서는 심 도련님께 드리면 알아서 잘 처리해 주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 도련님을 그 정도로 믿는다고 하셨습니다.”심택연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니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공과 사를 엄연히 구분하는 것이 맞긴 하지. 내일 아침 바로 석방해 드려. 그리고 언론에 사건의 진실도 알려드리고, 일
부산 제1 경찰서.김예훈은 변장우가 준비해 준 푸짐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바로 풀려났다.변장우 이들은 이상한 표정으로 경찰서 앞까지 배웅했다.아무도 김예훈이 잡힌 지 48시간도 안 되어 모든 알리바이가 뒤집힐 줄은 몰랐다.어쩌면 내일 기자회견을 열어 이 사건을 다시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고, 심지어 이 사건이 더 복잡해질지도 몰랐다.하지만 김예훈이 무죄로 풀려난 것은 사실이었다.변장우 이들은 김예훈에게 너무 지나치게 무례하지 않았던 것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포르쉐 918 한대가 김예훈 앞에 세워지고, 차창이 내려지자 하은혜의 아리따운 얼굴이 보였다. 변장우 이들은 질투 나고 부럽기 그지없었다.하은혜는 차에서 내려 김예훈을 위해 직접 차 문을 열어주면서 웃으면서 말했다.“김 대표님, 수고 많으셨습니다.”김예훈은 변장우 이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어떻게 해결하셨어요?”하은혜는 운전대를 돌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후지와라 미유 씨 쪽에서 크게 발견된 점은 없었지만 방향만 잘 잡으면 사건을 파헤치기 어렵지 않을 거예요. 오려원 씨한테 며칠만 더 줬다면 진작에 도망쳤을지도 몰라요. 그러면 저희한테 아무런 희망도 없었을 텐데 배후자가 성급한 나머지 저희에게 틈을 보여준 거죠. 그리고 저희 외삼촌을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어요. 저희 외삼촌은 피도 눈물도 없으신 분이신데, 외삼촌이 없었더라면 진작에 김 대표님을 궁지로 몰고 갔을 거예요. 아무튼 계획이 치밀해 보여도 빈틈이 있어서 김 대표님을 빼내는데 생각보다 어렵진 않았어요.”김예훈은 창문을 닫더니 말했다.“배후자가 방호철 씨라는 거 저희가 모두 아는 사실이잖아요. 제가 경매장에서 방호철 씨를 자극하는 바람에 완벽했던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고 해도 믿을 거예요?”하은혜가 미간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김예훈이 계속해서 말했다.“방호철 씨는 서울 4대 도련님인 것만큼 철저하게 계획하여 빈틈이 없을 거예요. 처음부터 목적이 저랑 임 어르신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김 대표님의 뜻은...”하은혜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일본인도, 방호철 씨도 해결해버리면 심씨 가문에 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그런데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거, 상대방도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방호철 씨든 사쿠라 씨든 제가 살아서 이곳을 떠나는 거 지켜보고만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이때 김예훈과 하은혜의 표정이 동시에 변했다.김예훈이 왼손으로 하은혜의 다리를 터치하자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던 포르쉐 차량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렸다.피융!이때 총알 하나가 뒷좌석 유리를 뚫고 뒷좌석에 떨어졌다. 반응이 일 분이라도 늦었다면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저격수예요!”김예훈은 방호철이 저격수를 보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지 표정이 심각해졌다.이미 대한민국의 법을 어기려는 작정이었다.하은혜도 표정이 일그러지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들을 꺾어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피융!바로 이때, 또 총알 하나가 맞은편에 있던 화물차 트럭에 꽂혔다.트럭 기사는 비명을 지르더니 아예 신호등에 차를 박고 말았다.사면팔방에서 오는 차들이 멈춰버리자, 차 주인들은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밟긴 했지만 도통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이때 누군가의 신고로 경찰차가 도착했다.김예훈과 하은혜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늦추지 못했다. 김예훈은 저 멀리 있는 폐기된 건물에서 빨간 점이 반짝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이쪽을 노리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저격수는 가면에 기다란 코트를 입고 있어 얼굴도, 성별도 확인할 수가 없었다.심지어 전체 부산을 사냥장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똑바로 서서 특이하게 총을 잡고 거침없이 김예훈을 노리고 있었다.“엎드려요!”“차를 버려요!”김예훈은 한순간에 판단이 섰는지 하은혜더러 핸들을 돌리라면서 비좁은 골목으로 안내했다.이때, 또 총알 하나가 앞바퀴를 관통했다.반응이 빨랐던 덕분에 차량은 비틀거리면서 골목에 들어서게 되었다.김예훈은 두 사람의 안전벨트를 풀어 하은혜를 안은 채 차 밖으로 뛰어내렸다.퍽!
김예훈은 상대방의 선제공격에 화를 내는 대신 침착하게 피해 다닐 뿐이었다. 결국 지름길을 통해 폐기된 그 건물에 도착하게 되었다.“하하, 재밌군!”코트를 입고있는 저격수가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여자인 것 같았다.그녀는 아예 가면을 벗어던지고 사악한 미소를 짓더니 이곳을 벗어나는 대신 총알을 장전하고 김예훈이 무조건 지나칠 길을 폭파시키려고 했다.몇 초 뒤, 저격수는 본능적으로 방아쇠를 당겼다.퍽!김예훈이 피하는 바람에 총알은 머리 위에 있던 기둥에 꽂혔다.필사의 일격이 실패하자 저격수는 표정이 심각해지기 시작했다.그녀는 일본에서 유명한 저격수로서 쏘는 총마다 치명적이었다.김예훈이 연속적으로 리듬을 파괴하긴 했지만 오히려 흥미가 생겼다.그녀는 다시 평정심을 되찾고 방아쇠를 당겨 반대 방향을 사격했다.퍽!또 한 번 거대한 소리가 들려오자, 이번에는 무조건 김예훈의 머리를 적중 시켰을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나타난 것은 김예훈의 머리 대신 그의 외투였다.긴박하던 발걸음 소리마저 사라지고, 김예훈은 어느샌가 모습을 감추었다.“젠장!”김예훈의 실력이 이 정도일지 몰랐는지 저격수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지고 말았다.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총알을 피하는 사람은 없었다.김예훈이 이 정도로 상대하기 어려운 놈일 줄 몰랐다.저격수는 여러 번의 실패에도 상심하지 않고 수류탄 하나를 꺼내 김예훈이 있는 곳에 던졌다.퍽!거대한 폭발 소리와 함께 건물에는 커다란 구멍이 생기고 말았다.이와 동시에 김예훈은 건물에서 몸을 피해 땅바닥을 굴렀다.저격수는 또다시 방아쇠를 당겼다.퍽! 퍽! 퍽!매번 김예훈이 착지한 곳을 적중하게 되었지만 김예훈은 그녀의 다음 행동을 먼저 예상했다는 듯이 깔끔하게 앞구르기 해서 벽 뒤에 몸을 숨겼다.저격수의 표정은 점점 더 사악해졌다.이 바닥에서 킬러를 해오면서 이렇게까지 상대하기 어려운 놈은 처음이었다.하지만 그녀는 김예훈이 끝까지 총알을 피할 수 있을 거라고 믿지 않았다.끊임없는 사격에 벽에 구멍
김예훈은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 나왔다. 세 발짝만 움직였지만 저격수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단 세 걸음으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확 줄어들어 저격수에게는 시야 확보가 어려웠다.“당신 졌어.”김예훈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목표물이 가까워졌다는 건 죽음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내가 너라면 총을 내려놓고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을 거야. 그러면 죽여주는 대신 군사법원에 보내줄게. 목숨만은 구제할 수 있을 거야.”김예훈의 미소를 지켜보던 저격수는 멈칫도 잠시, 손에 쥐고 있던 총을 바닥에 내던졌다.총이 바닥에 떨어지는 순간, 오른손에 비수 하나가 나타나면서 김예훈을 향해 덮쳤다.쨍!김예훈은 뒤로 물러나는 대신 방금 길가에서 주운 쇠 방망이 하나를 들었다.비수와 쇠 방망이가 서로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저격수는 휘청거리면서 뒤로 몇 보 물러서더니 입가에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김예훈은 그저 쇠 방망이를 만지작거릴 뿐 별로 표정 변화가 없었다.“저격수인 주제에 나랑 한판 붙어보자고? 그럴 능력이 있다고 생각해?”저격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본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되겠군.”김예훈은 미소를 거두고 앞으로 걸어갔다.저격수는 표정이 확 바뀌면서 뒤로 물러섰다. 뒤로 물러서면서 코트를 펼치는 순간, 열몇 자루의 비수가 날아왔다.김예훈은 쇠 방망이로 순식간에 이 비수들을 바닥에 떨어뜨렸다.이 장면을 지켜보던 저격수는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욕설을 퍼부었다.“바까야루!”“일본인이네...”김예훈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사쿠라 씨 사람이군. 그런데 내가 경찰서를 나서자마자 습격한 거, 방호철 씨한테 보고는 했나? 또 방호철 씨 일을 그르칠까 봐 두렵지도 않아?”김예훈의 차가운 말투에 저격수는 표정이 확 어두워지더니 여전히 아무 말도 못하고 공격을 가했다.비수, 다트, 화살, 독가스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김예훈이 있는 곳을 향해서 뿌렸다.하지만 이것마저도 김예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샤샥!또
뺨 한 대로 저격수는 아예 십몇 미터 밖으로 날아가 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풉!”저격수는 피를 토해내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이때, 찢어진 옷 틈 사이로 하체에 그려져 있는 문신이 드러났다.김예훈은 표정이 이상해지면서 미간을 찌푸렸다.야마자키파?...두 시간 뒤, 부산 교외에 있는 한 별장 내.이곳은 오정범 이들의 은둔지였다. 비록 낡았지만 외딴곳에 있어 조용하기만 했다.김예훈이 저녁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고 있을 때, 최산하가 뒷마당에서 손을 툭툭 털면서 걸어들어왔다.“회장님, 저 일본년이 실토했습니다. 이름은 야마구치 유코, 일본 야마자키파의 킬러 중의 한 명으로 저격용 총을 잘 다루고 있고, 사격 실력이 전 세계에서 톱10에 든다고 합니다. 최근에 다른 야마자키파 고수들과 함께 부산을 찾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로 신분을 알지 못해 어떤 사람이 왔는지도 모른답니다. 사쿠라 씨의 명을 받아 회장님을 죽이려고 했답니다. 경매장에서 방호철 도련님의 체면을 깎아내린 것도 모자라 아무렇지 않게 경찰서에서 풀려나니 열받았나 봅니다. 사쿠가 씨가 쓸데없는 짓을 했네요. 방호철 도련님을 도와준답시고 경찰서에서 풀려나자마자 죽이려고 했다뇨. 정말 실패한 작전이네요.”김예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직접 최산하에게 차를 따라주었다.“짧은 시간 내에 이 모든 것을 알아내느라 수고했어.”사건이 발생한 지 2시간도 안 되어 이 많은 비밀을 알아냈으니 최선을 다한 모양이었다.최산하는 조심스레 차를 받아 마셨다. 마치 김예훈이 건넨 찻잔이 20억 원은 되는 듯싶었다.“야마자키파 고수라...”김예훈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서로 존재를 모른다고? 그러면 야마자키파에서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사쿠라한테 사람을 많이 붙여준 모양이네. 그런데 야마자키파, 혹은 사쿠라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일까? 방호철의 편을 들어주는 거? 별로 자기한테 도움이 안 될 텐데?”최산하가 잠깐 생각하더니 공손하게 말했다.“회장님, 사실 그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
김예훈이 잠깐 생각에 잠기더니 말했다.“진윤하한테 부산 내에서 협조 좀 해달라고 부탁해 봐. 그리고 더 많은 증거를 알아낼 수 있도록 저 저격수 년을 더 추궁해 봐. 단, 빨리 움직여야 할 거야.”“네!”최산하는 한껏 엄숙한 표정이었다.총사령관님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지만 명령대로 움직이면 되었다.김예훈은 일본인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커졌다.임강호가 겪었던 일이든, 용문당이 겪었던 일이든, 심씨 가문이 겪었던 일이든 일본 야마자키파의 흔적이 보였다.야마자키파의 목적을 더 알아내지 못한다면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몰랐다.퍽!김예훈이 다른 부탁을 더 하려고 할 때, 거대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토요타 알파드 차량으로 별장 문을 부숴버렸다.뒤이어 수십 대의 토요타 알파드 차량에서 몇백 명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성들이 검을 쥔 채 하나둘씩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그렇게 이들은 순식간에 별장을 포위해 버리고 말았다.이 중에서 앞장서던 키 큰 남성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김예훈, 난 야마자키파 마루야마 타이치라고 해. 네가 내 동생 야마구치 유코를 납치했다며! 1분을 줄 테니 당장 풀어줘! 아니면 이곳을 밀어버리고 너를 산산조각 내줄 것이야!”교외라 그런지 야마자키파는 더욱 눈에 뵈는 것이 없었다.이 몇백 명의 일본인들은 아마도 각종 수단을 통해 밀입국했을 것이다.말로만 듣던 야마자키파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이자 포스가 엄청나게 무시무시했다.부산 용문당 제자라고 해도 빠른 시일 내에 이렇게 많이 모이기 어려웠다.분위기는 한순간에 긴장감의 극치에 달했다.이때 최산하가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말했다.“회장님, 제가 사람을 불러올까요?”최산하는 이 바닥에서 오래 지내본 사람이라 상대방이 죽을 각오로 덤벼든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챘다.김예훈이 피식 웃더니 말했다.“우리가 잡고 있는 야마구치 유코라는 사람이 이용 가치가 있나 보네. 이따 다시 거칠게 심문해 봐. 일본 야마자키파 고수들과 관련된 자료 정도는 얻어야 하지 않겠어?”김예훈은 야마구치
이 모습을 지켜보던 최산하가 멈칫하더니 말했다.“회장님, 정범이 형님이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상대방은 몇백 명이나 되잖아요! 소수는 다수에 대적하기 어렵다는 말도 있는데 정범이 형님이 아무리 강해봤자 상대방이 동시에 덮쳐들면 속수무책이잖아요!”최산하는 오정범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떵떵거리는 마루야마 타이치라고 해도 오정범과 1:1로 붙는다면 상대도 안 될 것이다.열몇 명이 동시에 덮친다고 해도 오정범에게는 식은 죽 먹기였다.하지만 지금은 몇백 명이 한곳에 모여있으니 죽는 것은 한순간의 일이었다.이 많은 사람들과 붙는다는 건 목숨을 바치는 거나 다름없었다.6대 파벌이 광명산을 포위했던 그해, 아무리 강한 강무열이라고 해도 집중 공격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 더욱이 이 일본인들은 매너 같은 거 신경 쓰지 않고 다함께 덮칠 것이 뻔했다.“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범이도 내 곁에 있은 지 오래됐는데 지금은 한계를 넘어설 때야. 오늘 밤 물러서지 않고 저 사람들과 제대로 붙어보면 그 한계를 넘어설 수도 있어. 그러면 장병급 레벨에 도달해 장병급 고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거지.”김예훈의 뜻깊은 말에 오정범은 더욱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다른 사람은 몰라도 오점범만은 김예훈의 진짜 신분을 잘 알고 있었다.총사령관님이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고 하면 정말 벗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오늘 대결에서 이기면 장병급으로 거듭나 숙원을 이룰 수 있었고, 패한다고 해도 그까짓거 죽으면 되는 일이었다.오정범이 태연하게 앞으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최산하는 어안이 벙벙했다.“회장님, 밖에 있는 몇백 명의 사람들 모두 야마자키파 고수들이에요. 무도관을 몇 년씩이나 다닌 만만찮은 사람들이라고요. 심지어 어떤 사람은 검도를 십몇 년이나 배웠는데 정범이 형님 혼자서 되겠어요?”김예훈이 피식 웃더니 최산하의 어깨를 토닥거렸다.“비록 네가 무술을 배우기 좋은 시기를 놓쳤지만 성과를 얻고 싶다면 직접 가서 봐. 무술을 배우
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일본인이 말 잘하는 걸로 유명하던데 오늘 그걸 직접 경험할 줄이야. 대한민국 무신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으면 분명 믿었을 거야. 그런데 입만 번지르르하고 배신에 익숙한 일본인이 한 말을 어떻게 믿으라고. 내가 곧 죽을 나이가 된 건 맞지만 알건 다 알아. 남양국과 대한민국 간의 분쟁은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 있어. 그런데 만약 언젠가 일본이 목적을 달성하는 날이 다가온다면 우리 남양국도 좋은 날이 없을 건 확실해. 공과 사를 불문하고 내가 너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당연하지 않을까?”설득에 실패한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러면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얼마든지 덤벼. 지옥으로 보내줄 거니까.”아마미네 토시로는 표정이 심각해지더니 속으로는 김예훈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진주·밀양에 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어떻게 이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많은 세력을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거지? 김예훈을 죽이지 않았다간 앞으로 일본인이 진주·밀양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거야.”“불가능할 텐데? 지금은 물론 전성기 시절에도 나를 죽이지 못했을 거야. 나를 죽이려면 아마 야마자키파 전 수장인 야마모토 타케시를 모셔 와야 할 거야.”양상철은 태연하기만 했다.“넌 아직 그럴만한 자격이 없어.”아마미네 토시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그분은 더 이상 속세의 일에 관여하지 않기로 했어. 너 같은 잡것들이 어르신을 방해하지 않게 내가 노력할 수밖에.”아마미네 토시로는 또 알약을 하나 삼켰다.알약을 삼키자마자 그는 근육이 수축하면서 눈동자가 새빨개지기 시작했다.다음 순간 양상철을 향해 비수를 날렸다.양상철은 넓은 소매를 휘둘러 비수를 한쪽으로 내팽개쳤다.펑.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지면서 숲속에 불꽃이 튀겼다.이 모습에 양상철은 속으로 일본인이 정말 뻔뻔하다고 욕했다.‘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 정정당당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옆길로 샐 궁리만 한다니. 정말 염치가 없네.’공격을 피한 양상철은 앞으로 나
오륜 사찰 금지구역.아마미네 토시로는 복부 상처를 감싸 쥔 채 얼굴이 일그러져있었다.그는 곧 알약 하나를 삼키고는 절벽 끝에 엎드려 망원경으로 아래쪽 상황을 지켜보았다.잠시 후 그는 얼굴이 약간 창백해지더니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혜선 스님이 아직 저 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니. 역시 여자 등이나 처먹는 기생오라비가 맞았어. 여자들마다 아까워서 죽이지 못하잖아.”아마미네 토시로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이곳에 남긴 흔적을 없애고는 이곳을 떠나려고 했다.그런데 일어서는 순간 뒤에서 바스락 소리가 들려왔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무언가를 짐작한 듯 재빨리 거즈로 상처를 감싸고는 검을 쥐고 심각한 표정으로 뒤쪽을 바라보았다.1분 1초가 흘러가면서 주변 공기는 점점 무겁게 가라앉았다.이 순간은 1분이 마치 1년처럼 느껴졌다.잠시 후, 마침내 숲속에서 어떤 노인이 뒷짐을 쥐고 서서히 걸어 나왔다.그는 어마어마한 기세를 뿜어내면서 살기 가득한 눈빛으로 아마미네 토시로를 쳐다보았다.아마미네 토시로는 맞은편에 있는 노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남양 무신 양상철?”양상철이 덤덤하게 말했다.“나를 알아봤으면 너의 아들보고 너한테 전하라고 한 말도 들었을 텐데. 지금 보니 내 말을 귓등으로 흘린 모양이군. 왜. 10년 동안 너무 조용하게 지냈더니 나를 잊은 거야?”남양 무신 양상철을 알고 있는 아마미네 토시로는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남양국이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섬라국과 화국에 의해 멸망하지 않은 것도, 심지어 동해 해역에서 꽤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양상철 덕분이라고 할 수 있었다.전해지기로는 대한민국 출신인 그의 조상님이 남양국으로 이주한 뒤 혼자 힘으로 이 나라를 일궈냈다고 했다.남양 무신은 남양인들의 존경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양국을 쥐락펴락할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도 했다.간단히 말해서 남양국에는 무신이 한 명뿐이지만 단 한 명으로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적어도 아마미네 토시로는 지금 상태로는 절대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총사령관님은 젊고 멋있는 분이야. 포스까지 장난 아니라고. 그분은 우리 대한민국 국방부의 살아있는 전설이라고. 무슨 염치로 자기가 총사령관이라고 하는 거야? ‘총사령관’이라는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혜선 스님은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이 이유만으로도 난 네가 너무 싫어졌어. 오륜 사찰에 사람을 함부로 죽여서는 안 되는 규칙만 없었더라면 넌 오늘 살아서 나가지도 못했을 거야.”김예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내가 한 말은 다 사실인데 믿든 말든 마음대로 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그런 말을 하다니. 정말 쓸모없는 인간이네.”혜선 스님은 김예훈이 우상인 총사령관의 이름을 더럽혔다는 생각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녀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김예훈을 쫓아내. 저 자식이 원하든 말든 진주 밖으로 쫓아내라고. 그리고 앞으로 김예훈이 총사령관이라고 자칭하거나 진주·밀양에 발을 내딛는 순간 오륜 사찰에서 죽여버릴 거라는 공식적인 입장도 전해.”혜선 스님은 말을 끝내자마자 뒤돌아 떠나려고 했다.다음 순간, 열몇 명의 오륜 사찰 제자들이 나타나 검으로 김예훈을 겨냥했다.그중 한 명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김예훈, 꺼져.”김예훈은 이들을 무시한 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혜선 스님을 바라보며 말했다.“혜선 스님,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여전해. 나를 오륜 사찰에서 쫓아내는 건 상관없는데 진주·밀양에서 쫓아낼 생각은 하지도 마. 내가 총사령관이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한마디만 물을게. 김현민이 곧 9대 국방부 총사령관이 될 거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 걔가 과연 전설 속 당도 부대 총사령관일까? 나이, 실력은 막론하고, 정말 김현민이 총사령관이라고 생각해? 총사령관님은 유라시아 전쟁에서 5대 강국을 단숨에 제압하고 혼자 힘으로 일본의 수많은 검신, 음양 대가들을 물리치신 분이야. 총사령관님 같은 분이 굳이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의 수장 자리를 탐내서 일본인에게 굽신거릴까? 솔직히 말해서 김현민 같은 사람한테 총사령관이라는
“24시간 내로 진주에서 꺼져주시면 예전에 있었던 일을 따지지도 않을게요. 어쩌면 저희가 약간의 혜택도 드릴 수 있어요.”혜선 스님의 진지한 말투에 김예훈은 피식 웃고 말았다.“성녀님, 저희 오늘 두 번째로 만나는 거 아니에요? 제가 그렇게도 싫으세요? 제가 정말 진주를 떠났으면 좋겠어요?”“네. 김예훈 씨가 진주에 오고부터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요. 진주·밀양 안동 김씨 가문 내부에서도 분열 조짐을 보이고 있고요.”혜선 스님은 차분한 모습으로 제자가 건넨 차를 마시며 말했다.“안동 김씨 가문은 진주·밀양의 기둥과도 같아요. 김예훈 씨 존재만으로도 진주·밀양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데 하루빨리 떠났으면 좋겠어요. 안동 김씨 가문을 위한, 진주·밀양을 위한, 김예훈 씨 자신을 위한 일이라 생각하고 이 간단한 조건을 들어주시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웃는 얼굴로 말했다.“혜선 스님,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이렇게 많은 일이 벌어진 걸 보면 김현민이 수장 자리에 앉을 자격이 없는 거 아니겠어요? 제가 있든 없든 수장 자리를 지켜낼 자격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저랑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일이 아닐까요? 이런 일로 제가 진주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혜선 스님이 눈살을 찌푸리며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씨, 왜 그렇게 고집을 부리는 거예요?”“고집을 부리는 게 아니라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해서 그래요. 제가 왜 진주를 떠나야 하는 거죠?”김예훈은 어깨를 으쓱이며 직설적으로 말했다.“이곳이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제 자유 아닌가요? 아무도 저한테 뭐라 할 자격이 없는 것 같은데요? 오륜 사찰이 아직 저한테 해명해야 할 것이 있는 건 둘째치고, 그런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제가 실수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다고 꺼지라는 거예요? 혜선 스님, 장사를 너무 잘하시네요. 오히려 제가 그 보잘것없는 몸매를 보고 눈을 버릴 뻔했는데도요? 서로 없었던 일로 하는 건 괜찮은데 이걸로 저를 협박해서 진주에서 쫓아내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혜선 스님은 정말 선녀와 다를 바 없었다.그녀는 유리알 같은 눈동자로 김예훈을 차갑게 쳐다보면서 말했다.“제 목욕탕에 무단 침입했으니 김예훈 씨를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전에 선재 스님 사건 때 저희 오륜 사찰에 해명을 요구했었죠? 이제 서로 빚진 것이 없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혜선 스님.”오륜 사찰 여제자들은 하나같이 멍한 표정을 지었다.‘성녀님의 알몸까지 봤는데 이대로 넘어간다고? 아, 선재 스님 사건을 해명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러면 누가 손해 보는 거지?’이때 한 여제자가 무의식적으로 혜선 스님을 힐끔 쳐다보며 눈가를 파르르 떨었다.‘설마 오륜 사찰과 맨날 사이가 안 좋던 저 자식을 성녀님이 인정해버린 걸까?’김예훈은 그저 어이없기만 했다.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은 이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어쨌든 잘못한 것이 있으니 천천히 목욕탕에서 나와 혜선 스님이 살벌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향긋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그의 아무렇지 않은 행동에 한 제자가 말했다.“그건 성녀님께서 몸 닦는 수건인데...”퍽.제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혜선 스님은 얼굴이 빨개지면서 앞으로 걸어가 김예훈의 가슴팍을 쳤다.퍽.김예훈은 재빨리 손으로 막았지만 뻘쭘한 마음에 별로 힘을 쓰지도 않았다.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혜선 스님이 이미 수건을 빼앗아 간 후였다.혜선 스님의 표정은 다시 냉랭해지면서 김예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이제 저희 오륜 사찰에 볼일 없을 것 같은데 이만 가시죠.”김예훈은 상대방의 분노를 느끼고 눈꺼풀이 살짝 떨렸다.더 이상 도망가지 않으면 그녀가 칼을 빼 들고 죽일 것만 같았다.김예훈은 피식 웃으며 돌아서서 말했다.“가긴 가겠지만 한마디만 할게요. 오늘 이 일이 정말 우연이라면 제가 해명해야 되겠지만...”김예훈은 말을 하다 말고 눈빛이 차가워지고 말았다.“만약에 오륜 사찰이 일본인과 손잡고 저를 함정에
“성녀님? 도포? 오륜 사찰? 당신이 바로 혜선 스님이에요?”보지 말아야 할 모습까지 다 봐버린 김예훈은 표정이 일그러져있었다.오륜 사찰의 성녀인 혜선 스님의 목욕탕에 빠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티끌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을 보니 왜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라고 하는지 이해할 것만 같았다.‘성녀의 목욕탕에 빠뜨리는 것이 바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계획이었나? 정말 그의 계획이라면 김현민이 자기를 죽일까 봐 걱정되지도 않았을까? 그리고 내 기억이 맞는다면 김현민 그 자식이 성녀 혜선 스님을 마음에 품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혜선 스님은 약간 당황하긴 했지만 애써 감정을 추스르면서 김예훈을 쳐다보았다.잠시 후, 갑자기 자기 목욕탕에 나타난 이 건방진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이때 혜선 스님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김예훈 씨?”“뭐? 몇 번이고 우리 오륜 사찰의 얼굴에 먹칠하고 경매회까지 망친 그 김예훈?”“선재 스님을 해친 것도 모자라 3일 안에 제대로 된 설명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어?”“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어.”“성녀님, 저 자식이 이곳에 나타난 건 성녀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모욕이에요. 죽여야 한다고요.”오륜 사찰의 한 제자가 분노에 가득 찬 얼굴로 곧장 달려들어 김예훈을 검으로 찌르려 했다.퍽.이때 혜선 스님이 손가락을 튕겨서 검을 날려버리고는 뒤돌아 병풍 뒤로 가서 옷을 갈아입으며 말했다.“진주에 어쩌다 천연 온천이 생겼는데 여기서 피를 볼 순 없지.”제자들 모두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성녀님, 저희가 너무 성급했나 봐요. 지금 바로 저 자식을 데리고 나가서 죽여버릴게요.”제자들은 검을 빼 들고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아직 목욕탕에서 나오지 않은 김예훈을 째려보았다.‘계속 우리 오륜 사찰을 건들던 놈이 감히 성녀님 목욕탕에 뛰어들다니. 죽고 싶어서 환장했나 보네.’“툭하면 죽이느니 마느니 하지 말고 제 설명 좀 들어보면 안 될까요?”김예훈은 한숨을 내쉬었다.아무리 그래도 여자 목욕탕에 뛰어들어 못 볼 꼴
쨕.아마미네 토시로는 옆으로 날아가더니 세게 바위에 부딪히면서 피를 뿜어냈다.그는 얼굴이 일그러진 채 눈빛이 어두워지면서 긴장하기 시작했다.비록 처음부터 온갖 함정까지 파놓으면서 김예훈을 평생의 적으로 대했지만 김예훈이 이런 상황에서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침착함을 유지할 줄 몰랐다.연기까지 하면서 겨우 이곳까지 끌고 왔는데 김예훈을 죽이지도 못하고 오히려 뺨 맞을 줄은 더더욱 몰랐다.‘정말 괴물이네.’퍽.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에 뺨 자국이 나 있는 채로 이를 꽉 깨물더니 말없이 공중으로 뛰어올라 검을 휘둘렀다.칼날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유성처럼 빠르고도 정확했다.김예훈도 무심한 표정으로 검을 휘둘렀다.‘쨍’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또다시 스쳐 지나갔다. 김예훈은 절벽 끝에 서 있었고, 아마미네 토시로는 울창한 숲 변두리에 서 있었다.“대단한데?”아마미네 토시로는 칼날을 만지작거리면서 험악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너 같은 사람은 몇 년 더 지나면 아마 내가 너의 상대가 안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은 널 얼마든지 죽일 수 있어.”김예훈이 담담하게 말했다.“정말 자신 있었다면 왜 이런 꼼수를 부린 거지? 일본인은 무신 경지에 이르렀어도 결국엔 본성을 잃지 못하네. 네가 도망치려고 바다에 뛰어든 순간부터 넌 영원히 나를 따라잡을 수 없었어. 지금까지 너를 죽이지 않았던 이유도 네가 또 어떤 꼼수를 준비했는지 알고 싶어서였어. 그런데 너무 실망이네.”“실망하긴 아직 이른 것 같은데?”아마미네 토시로는 피식 웃고 말았다.“김예훈, 여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어? 여기에 있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냐고. 모르고 있었다면 내가 알려줄까?”아마미네 토시로는 검으로 힘껏 바닥을 내리쳤다.쿵.격렬한 진동이 울리면서 김예훈이 서 있던 절벽이 순식간에 갈라졌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던 검을 앞으로 던졌다.“풉.”몸에 검이 제대로 꽂힌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후회되지 않는 듯 미친 듯이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반면으로
“풉!”핏덩이를 토해낸 아마미네 토시로는 한숨을 내쉬었다.“김예훈, 역시 대단해. 어린 나이에 탑 무신 급 경지에 이르다니. 내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으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야. 너 같은 사람이 우리 일본의 귀족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김예훈이 덤덤하게 말했다.“아마미네 토시로, 아무리 쓸데없는 소리를 해도 난 널 살려줄 마음이 없어. 요트에 있을 때 이미 이 구역 통신을 차단하라고 했거든. 간단히 말해서 네가 방금 나 몰래 보낸 메시지, 아무도 볼 수 없다는 뜻이야.”아마미네 토시로는 얼굴이 살짝 굳으며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그런데 몇 분 전에 보낸 구조 요청 메시지가 발신 실패로 떠 있는 것이다.“이런 제기랄!”이 순간 아마미네 토시로는 본능적으로 고함을 질렀다.“정말 나랑 끝까지 해보자는 거야? 받아라! 불사참!”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노의 함성을 지르며 양손에 들고 있던 검을 힘껏 내리쳤다.칼날이 얼마나 매서운지 마치 귀신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김예훈은 아무런 무기도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미간을 찌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하지만 아마미네 토시로가 이 기세를 몰아 검을 휘두를 거라 생각하고 있을 때, 김예훈을 스쳐 지나 산꼭대기 쪽으로 달려가는 것이다.김예훈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무신이라는 놈이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지? 공격하는 척하면서 또 도망쳐?’“아마미네 토시로, 그만 도망치지?”김예훈이 차갑게 말했다.“김예훈, 그만 쫓아오지?”아마미네 토시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계속 울창한 숲을 이용해 김예훈을 따돌리려 했다.김예훈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아마미네 토시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전혀 급할 거 없이 10미터 정도의 거리를 유지했다.한 사람은 도망치고, 한 사람은 쫓아가는 것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감을 쫓는 듯했다.곧 두 사람은 산 정상에 가까운 한 공터에 도착하게 되었다.먼저 땅에 발이 닿은 아마미네 토시로의 얼굴에는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다음 순간 그는 땅을 구르더니 미리
야마자키파 검신, 일본 무신, 황실 어의인 아마미네 토시로는 분명 눈치가 있는 놈이었다.오늘 여덟 명의 바람의 아들들까지 불러내면서 만반의 준비를 했는데 한 방에 무너질 줄 몰랐다.이런 상황에서 아마미네 토시로가 정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한 남아서 김예훈과 맞서 싸울 일은 없었다.그래서 상대를 존중하는 척 부하의 뺨까지 때리고, 부하의 시체로 요트 엔진을 고장 내서야 쥐도 새도 모르게 도망친 것이다.게다가 도망치는 경험까지 풍부해서 바다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눈 깜짝할 사이에 바닷가에 도착해 있었다.김예훈은 요트 위에 남아있는 잔병들을 힐끔 쳐다보았다.이들은 하나같이 정신이 혼미해져 마치 어떤 신념이 완전히 무너진 듯했다.이들과 말 섞기도 싫은 김예훈은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고는 곧바로 바다에 뛰어들어 아마미네 토시로가 도망친 방향으로 쫓아갔다.어쨌든 한 시대의 무신이자 검신이었기에 아무리 겁을 먹었다고 해도 실력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김예훈은 오늘로써 한 방에 끝내고 싶었다.아니면 어딘가 숨어서 언제 또 습격할지 몰랐다. 김예훈은 상관없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안전 또한 고려해야 했다.아마미네 토시로도 김예훈이 놔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속도를 내 바닷가의 울창한 숲속으로 뛰어들었다.이 지역은 진주 태산 뒷산으로 진주 상류 인사들이 휴양하는 곳이라 절대 개발이 허락되지 않았다.이곳은 산짐승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데 진주에서 보기 드문 한적한 곳이었다.아쉽게도 지금의 아마미네 토시로는 전혀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온 힘을 다했더니 마침내 절벽 끝에 오래 방치된 정자 하나를 발견했다.그런데 숨을 돌리기도 전에 멀지 않은 숲속에서 김예훈이 뒷짐을 쥔 채 태연하게 걸어 나왔다.“김예훈, 내가 이렇게까지 멀리 왔는데 좀 쉬면 안 돼? 요트에 그 많은 사람의 목숨으로는 부족했어? 왜 하필 나를 따라다니는 거야. 노인을 공경할 줄도 몰라?”아마미네 토시로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