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부남진이 암살 시도 사건에 대해 도윤에게 물은 적이 있었다. 도윤은 대충 얼버무리며 이야기했지만, 사실 지아도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도윤이 하는 일은 그 본질이 비밀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부남진과 부장경이 중요 인물이었던 것처럼, 지아 역시 도윤에게 기밀을 함부로 묻지 않는 것이 상황에 맞는 행동이었다. 어른이 되면, 아이와는 달리 반드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알기 마련이니까.지아가 이런 조사를 하는 이유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녀도 부씨 가문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문제에 휘말리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했다. 백호와 하씨 가문이 손을 잡은 것을 본 지아는 어렴풋이 부남진 암살미수 사건에 백호가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백호 역시 집안의 비주류였지만 승승장구하며 백중권조차 감탄하게 할 만큼, 그의 능력은 전혀 범상치 않았다.지아는 채원을 이용해 백호와 거래를 하는 것이 꽤 괜찮은 계획이라고 여겼다. 한편으로 백호는 지아와의 관계를 무시하지 못할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채원을 지렛대로 삼아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들을 막아둘 수 있었기에, 이 계획은 일거양득이었다.지아는 전효의 부상이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게 물든 장미밭을 바라보며, 그녀는 전림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전림으로 인해 얽힌 수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자 마음이 복잡해졌다.“미안해, 우리 형 때문에 너에게 큰 피해를 줬어.” 전효는 지아의 생각을 어림짐작하며 사과했다. “괜찮아요.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게다가 그분이 아니었다면, 도윤 씨도 진작에 죽었을 거고, 나도 다른 아이도 없었을 테고, 오빠와 만날 일도 없었겠죠. 이게 다 운명이겠죠. 오빠, 앞으로 무슨 계획 있어요?” 전효는 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채나를 데려가고 싶어. 백채원과 함께 있으면 채나도 절대 행복하지 않을 거야.” “나는 괜찮아.” 도윤은 전효와 채원 중 누가 채나에게 더 나은 선택인지
이날 밤, 세 사람은 오랜 시간 혀가 꼬부라질 때까지 술을 마시며 진탕 취했다. 도윤은 친구로서 지아의 곁을 지키며 그녀가 만취할 때까지 함께 마셨고, 지아는 작은 손으로 한쪽은 도윤을, 다른 쪽은 전효를 붙잡고 셋이 의형제를 맺자고 고집을 부렸다. “형님, 동생, 우리 같은 날에 태어나지 않더라도, 같은 날에 죽... 으음...” 도윤은 끝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말을 쏟아내는 지아의 입을 막아버렸다. 이날 밤의 솔직한 대화 덕분에 도윤은 전효와 완전히 오해를 풀게 되었다. 사실 전효도 알고 있었다, 전림이 목숨 걸고 지키고자 했던 사람이 도윤이었다는 것을. 자신이 정말로 도윤을 죽였다면, 형 전림이 저승에서 알게 되었을 때 자신을 무척 원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전효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형의 죽음을 모두 도윤의 탓으로 돌리고 도윤과 한 하늘 아래에서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셋은 지아의 집으로 돌아왔다. 이곳에 전효만의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도윤은 지아를 품에 안고 그녀의 방으로 데려갔다. 전효는 비록 취했지만, 정신은 여전히 멀쩡했다. “지아에게 잘해줘. 지아가 정말 네 생각 많이 하더라고.” 도윤이 발걸음을 잠시 멈췄다. “만약 내가 또다시 지아를 아프게 하면, 형님이 언제든 와서 저를 혼내셔도 됩니다.” 방 문을 닫고, 도윤은 지아를 침대에 눕혔다. 지난 7년 동안 지아는 한 번도 이렇게 속 시원히 마셔본 적이 없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7년 전에도 이렇게 마신 적은 없었다. 도윤도 지아가 이렇게 취한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녀는 침대에서 펄쩍 일어나서 외쳤다.“동생! 술은 어디 갔어? 좋은 술 가져와! 오늘 형님이 기분이 좋으시다!”도윤은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우리 지아가 대체 무슨 배역인 거야?’ “술은 다 마셨어. 내일 마시자.” 지아는 계속 얌전히 자려고 하지 않았다. “안 돼! 내가 네 형님이야! 내 돈을 가져와. 오늘은 내가 좋은 술로 한턱낸다!” 도윤은 어이가 없었
지아는 밤새도록 난리 친 덕분에 술기운을 빌려 한잠 푹 자고 일어나자 시간은 이미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도윤은 지아의 핸드폰으로 걸려 오는 수십 통의 전화들을 보고는 아예 전화기의 전원을 꺼버렸다. 지아가 깨어났을 때, 도윤은 이미 점심 식사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부드럽게 끓인 소박한 쌀죽과 가벼운 밑반찬들이 놓여 있었다. 도윤은 계단 입구에 서서 엄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앞으로 밖에서 술 마시는 거 금지야!” 지아는 술이 깨자마자 어젯밤 필름이 끊겼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몸 구석구석이 쑤시고 아팠다. 그 아픔은 도윤에게 괴롭힘을 당해서가 아니라, 마치 어딘가에서 심하게 넘어진 것 같았다. “저기... 내 팔이랑 다리에 멍이 들었는데, 혹시 자기 때문이야?” 도윤은 이마를 짚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스스로 잘 감상해 봐.” 어젯밤 그녀의 귀여운 모습을 놓치기 싫어서 도윤은 일부러 동영상을 찍어두었다. 영상 속 지아는 혼자서 스승님을 구출하는 연극을 마친 것에 그치지 않고, 몸에 이불을 두른 채 책상 위로 뛰어오르더니 두 팔을 펼쳐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백성들아! 지금 한대경의 대군이 다가오고 있다! 너희는 과연 나와 함께 전쟁에 나설 각오가 되어 있느냐?”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도윤을 딱 짚어 가리키며 물었다. “너, 대답해! 너, 함께 갈 거야, 말 거야?” 다행히 방 안에 둘만 있었기 때문에 도윤은 그녀의 연극에 맞춰야만 했다. 지아가 테이블에서 뛰어내리다가 의자에 발을 부딪치며 넘어져서 멍이 든 것이었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도윤은 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이 장면을 보며 지아는 손이 오그라들고 얼굴이 화끈거려 죽을 것 같았다. 땅을 파고 속으로 들어가 숨고 싶어질 정도였다! 지아가 영상을 삭제하려던 찰나, 도윤이 웃으며 말했다. “이미 늦었어. 내가 클라우드에 올려놨거든. 자기의 이렇게 귀여운 모습을 두고두고 감상할 거야.”
지아는 이웃 나라의 섬에 도착하자마자 아이들을 철저히 숨겨두었다.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섬의 위치는 여러 곳으로 중계 이동할 수 있는 교통의 요지였다. 그날 밤, 도윤과 지아는 해변에 앉아 샴페인을 마시며, 파도가 암초를 부딪치는 소리를 들었다. “한대경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아주 매력적인 조건을 내걸었어.” 도윤의 표정은 어둠 속에 가려져 알아볼 수 없었다. 지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할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어?” 비록 지아가 부남진과 함께 지낸 시간은 길지 않았지만, 부남진은 지아에게 굉장히 친절하게 대했다. 또한 쉽게 물질적 조건에 휘둘릴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은 알 수 없는 법이라, 확신할 수는 없었다. “걱정하지 마, 할아버지가 단칼에 거절하셨어. 그 모습을 자기도 직접 봤으면 좋았을 텐데.” 도윤의 말은 어딘가 남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뉘앙스가 있었다. 그는 한대경과 평생을 다투며 살아왔으니, 이번에 부남진의 선택은 도윤의 복수를 대신해 준 셈이었다.“한대경 성격상 쉽게 물러서진 않을 거야.” “자기야, 네가 싫다고 하면 이 세상 그 누구도 자기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없어.” 도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았지만, 지아가 마음을 바꾸는 것은 두려웠다. 섬의 일출의 아름다움은 장관이었다. 지아는 도윤보다 일찍 일어났지만, 여유로운 모습으로 마치 떠날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반면에 도윤은 정장을 차려입고 깔끔하게 단장한 모습이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이들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다. 그는 몸을 숙여 지아의 뺨에 입맞춤을 남기며 말했다. “얌전히 기다려. 금방 돌아올게.” 시원한 박하 향이 풍기자, 지아는 도윤의 넥타이를 잡아 그의 고개를 당겨 내려 입 맞췄다. 그 순간, 떠오르는 해가 주황빛으로 두 사람의 얼굴을 물들이며, 지아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여명의 빛이 물들었다. 짧은 입맞춤을 끝내고, 지아가 조용히 말했다. “응.”
비행기가 착륙하고, 도윤은 몇 번의 경유 끝에 안개마을에 도착했다. 지금은 마침 가을이었다. 작은 마을은 설산 아래 자리 잡고 있었고, 마을의 모든 나무가 황금빛으로 물들어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가을을 듬뿍 담은 마을의 모습은 환상적이며 너무나 아름다웠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평화롭게 살고 있었고, 각자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으며 행복지수도 매우 높았다.이 마을에는 아주 유명한 사립학교가 있었는데, 학생을 선발하는 기준이 무척 까다로웠다. 한 번 선발되면 곧바로 기숙사에 들어가 교육을 받아야 했다. 매년 학비가 수천만 원에 달할 뿐만 아니라, 수업 방식도 매우 독특했으며 학생들의 출신에 대해서도 모두 비밀에 부쳤다. 이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정도의 학생들은 돈과 권력을 가진 것은 기본이었고, 서로의 가정 배경은 공개되지 않았다. 게다가 졸업률이 매우 낮았지만, 만약 졸업한다면 장래가 매우 촉망받는 인물이 될 것이 틀림없었다. 이곳의 비밀 유지가 너무나 철저해서 도윤도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도윤은 손목시계를 한 번 보았다. 아이들은 아직 수업 중이었다. 그는 큰아들 지윤도 한 번도 학교까지 데리러 간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학교로 직접 아이들을 데리러 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긴장과 기대가 교차했다.지난번 무무와 짧게 만나고 헤어진 이후로 도윤은 아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무무는 말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혹시 학교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하는 ㅎ도 들었다.도윤은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학교 안을 둘러보았다. 유치원 아이들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소화를 돕기 위해 가벼운 체육활동 중이었다. 그의 시선이 무무에게 닿았다. 아이는 이전의 옷차림과는 달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교복을 입은 무무는,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아이들 사이에서 초록빛의 눈동자가 그다지 이질적으로 보이지 않았다.무무의 손목에는 다섯 가지 색실로 엮인 작은 방울이 달려 있어서 말을 할 수 없지만, 방울
사립학교 캠퍼스는 넓어서 유치원에서 초등학교까지 걸어가려면 20분 이상 소요될 정도였다. 도윤은 무무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딸과 함께 산책할 수 있는 시간 자체가 그에겐 소중한 순간이었다. 아직 초등학교에 도착하기도 전에, 귀엽고 아이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개미야, 오늘은 누가 우리를 데리러 올까? 내가 묻고 있는데 왜 대답을 안 해?” 한 여자아이가 나무 아래 쭈그리고 앉아, 손에 작은 나뭇가지를 들고 개미집을 찔러대고 있었다. “자, 너희들 일자로 줄을 서고, 다시 사람 모양으로 줄을 서.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다 같이 행진해!” “멍청한 애야, 또 무무 따라 하려고? 포기해, 우리는 동물을 조종할 능력이 없어.” 그녀의 머리 위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작은 남자아이가 입에 나뭇가지를 물고, 작은 발을 이리저리 흔들며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는 두 손을 허리에 얹고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오빠는 바보야, 그렇게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내가 안 받아줄 거야.” “내 몸놀림이 얼마나 빠른데! 물구나무서기도 보여줄 수 있어.” 남자아이는 멋지게 묘기를 부리려고 하다가 그만 손이 미끄러져 나무에서 떨어졌다. “오빠!” 소망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큰일 났다.” 해경은 절망에 빠져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오늘만큼은 잘난 척하지 말걸. 이제 엉덩이가 두 쪽 나겠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의 품에 부드럽게 안겼다. ‘어? 하나도 안 아프네?’해경은 살짝 실눈을 떴다. 단단한 남자의 가슴이 보였다. 아직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소망이 이미 울먹이며 말했다. “혹시...” 소망은 입을 벌렸지만, 그 호칭을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고, 눈에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소망도 수년간 아빠와 엄마가 함께 하기를 바랐다. 엄마와 아빠가 복잡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기에, 아이들이 한 사람만 선택해야 한다면 무조건 지아를 선택할 수밖에
도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아가, 아빠라고 불러.”해경의 커다란 두 눈은 놀라움으로 가득 찼다.“정말 그래도 돼요? 엄마가 알면...” “안심해, 오늘은 엄마가 널 데리러 가라고 했어. 엄마는 우리가 함께 돌아가서 식사하기를 기다리고 있고.” 소망은 조심스럽게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아빠.” “착하네.”도윤의 눈시울은 다소 촉촉해졌다. 어릴 때부터 곁에 두고 키우지 못한 이 아이들을 바라보자, 마음속에 수많은 감정이 밀려왔다. 그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가장 어린 무무를 품에 안았는데, 그 아이는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앞으로 우리 가족은 다시는 헤어지지 않을 거야.”“좋아요.”해경이 깡충깡충 앞서 걸었다. 해경은 성격이 아주 밝고 활발해서 수다쟁이처럼 자신의 학교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도윤은 참을성 있게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시로 정성스레 반응했다. “아빠, 사격술이 좋다고 들었는데, 언제 저한테도 보여주시면 안 돼요?” “A시에 돌아가면 널 데리고 사격장에 갈게. 그때 네가 알고 싶은 걸 전부 가르쳐 줄게.” 도윤은 둘째 아들에 대해 아주 너그럽게 대했다. 이씨 가문의 임무는 이미 장남에게 맡겨졌으니, 다른 자녀들의 미래는 그들 스스로 결정해야 했다. 그래서 도윤은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았다. “맞다, 아빠, 저한테 큰오빠가 한 명 더 있다면서요?”소망은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부녀간의 타고난 혈연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자연스레 서로 가까워지고 싶게 하는 법이었다. “응, 곧 큰오빠의 아홉 번째 생일이야.” “큰오빠는 분명히 어른스럽고 듬직할 거예요. 작은오빠처럼 멍청해서 매일 망신당하지는 않을 거고요.” 해경은 손을 들어 가볍게 소망을 치며 말했다.“팔이 왜 밖으로 굽어? 우리는 어쨌든 같은 배에서 나왔잖아!” 소망은 해경을 향해 혀를 내밀며 말했다.“생각해 보면 큰오빠도 똑같잖아. 똑같은 부모님 밑에서 태어났지만, 큰오빠는 우리보다 훨씬 불쌍해. 적어도 우리는 엄마 곁에
도윤이 무무를 내려놓고 말했다.“주방에도 없나?” 어젯밤 지아는 메뉴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입맛은 각기 달라서, 몇 가지 요리를 정성껏 준비하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없어요.”소망은 위층에서 내려왔다.“위층에도 없어요.”무무는 야외 정원을 훑어보았지만 지아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무는 팔을 벌리며 없다고 표시했다. 도윤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서 힐끗 보았다. 오븐은 예약한 시간이 지나 ‘삐삐’ 거리며 알림 소리를 냈다.그는 오븐을 열고 작은 팬케이크를 꺼냈다.옆에는 아직 구워지지 않은 케이크 조각과 준비된 과일, 그리고 크림이 있었다. 이 모든 일을 끝내려면 지아는 온종일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녀는 반만 하고 멈춘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오늘은 가족이 모이는 날이지 않은가. 지아는 중도에 포기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도윤은 핸드폰을 꺼내 지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순간 조리대 위에 놓인 핸드폰 벨소리가 크게 울렸다. 지아의 핸드폰은 여기 있지만, 사람만 사라진 것이었다. 무무는 감자 한 알을 들고 부엌 앞에 서 있었는데, 반밖에 깎이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녀는 감자를 주운 위치를 가리켰다.그곳은 문가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떠난 후 어떤 사람이 왔고, 지아는 절반쯤 깎은 감자를 들고 문을 열었던 거야. 어쩌면 그 낯선 사람이 지아를 데려갔을지도 몰라.’ 방안은 아주 가지런했고, 싸운 기척이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을 아는 게 분명해.’ ‘만약 지아가 반항하려고 했다면, 자발적으로 떠나지 않으려 했다면, 방 안에 아무런 흔적이 없을 수가 없어.’ 또 다른 문제가 떠올랐다.‘만약 지아가 일이 있어서 떠났다면, 핸드폰을 두고 가지 않았을 거고, 나한테 메시지라도 남겼을 거야.’ 도윤과 지아의 이번 일정은 비밀이었고, 도윤은 진봉만 데리고 왔다. 마침 진봉도 도윤과 함께 사람을 데리러 갔는데, 이때 사고가 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도윤은 즉시 사람을 시켜 CCTV를 확인해 보았고,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