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씨 가문의 저택.“한대경 일행이 오후 3시에 공항에 도착했습니다.”부장경이 보고했다.“시간을 잘 지켰군. 매년 이맘때면 어김없이 제사를 지내러 오지만, 올해는 제사 외에도 나를 직접 방문하겠다고 했다.”부장경은 미간을 찌푸렸다.“설마 지난번 지아가 가져갔던 그 반지 때문에 오는 건 아닐까요?”“어쨌든 한대경도 한 나라의 책임자인데, 증거도 없는 일을 드러내어 말할 처지는 아닐 거다.”부남진은 손에서 구슬을 돌리며 말했다.“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아에게는 잠시 집에 돌아오지 말라고 하고, 한대경과의 만남은 피하는 것이 좋겠어.”“어젯밤 지아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기 집에 있을 겁니다. 제가 확인해 보겠습니다.”부장경은 바로 도윤에게 전화를 걸었다.“지금 지아와 같이 있니?”[지아는 집에 있어요.]“오늘은 지아가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한대경이 우리 집으로 올 예정이니까.”[네, 알겠습니다.]...도윤은 하루 종일 바쁘게 지내다가 달력을 보며, 한대경이 오는 일정을 깜빡 잊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아침에 도윤이 떠날 때 아직 잠들어 있던 지아가 최근 들어 매우 피곤해 보여 오늘은 깨우지 않았다. 어제 지아는 미처 마무리하지 못한 것을 오늘 마무리하겠다고 했었다.지아에게 전화를 걸려던 순간, 갑자기 도윤의 전화가 울렸다. 불길한 예감이 그의 가슴속에 스며들었다. ‘산에서 걸려 온 전화라면 분명히 전효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데!’“무슨 일이야?”[큰일 났습니다, 보스! 전효가 군용차를 훔쳐서 철문을 들이받고 탈출했습니다. 보스께서 전효에게 무력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셔서, 저희도 무기를 쓸 수 없었습니다.]도윤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전효가 겨우 좀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한대경이 이번에 제사를 지내러 온 것을 알고, 전림의 복수를 하려는 생각이야!’도윤 역시 한대경을 없애버리고 싶었지만, 한대경이 이렇게 공개적으로 A 시에 온 이상 무슨 일이 생기면 A 국은 C 국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지아는 굳은 표정으로 한대경의 말을 받아치지 않고 조용히 말했다.“여기는 A 시입니다.”지아의 하얀 얼굴은 차분해 보였지만, 이전에 아버지인 소계훈을 추모하며 울었기에 눈과 코끝이 약간 붉어져 있었다. 검은 눈동자는 촉촉하게 젖어, 마치 작은 하얀 토끼처럼 연민을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그러나 한대경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이 여자는 단순히 작고 귀여운 하얀 토끼가 아닌, 바로 S급 킬러, ‘영지’였다.한대경은 ‘소지아'의 과거를 철저히 조사하고 이 자리에 왔다. 비록 ‘영지'는 킬러였지만, 결코 무고한 사람을 해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영지’가 맡았던 목표물들은 모두 악덕한 자들이었다.‘이 여자는 여전히 인간적이란 말이지.’‘그렇지 않았다면 그 시절 내 곁에 있을 때 나를 암살할 기회가 수도 없이 있었지만 한 번도 실행에 옮기지 않았어.’한대경은 지아에게서 풍겨 나오는 독특한 향기를 맡으며 말했다.“사모님께서 뭐가 두렵습니까? 저는 그저 인사나 하려던 것뿐입니다.”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말했다.“이제 가시죠, 제가 사모님 배웅하겠습니다.”지아는 마치 한대경에게 압송당하는 기분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한대경을 앞서 걸으면서, 뒤에서 뚫어져라 자신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굳이 보지 않아도, 그 시선의 주인이 배이혁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지금 배이혁은 자신이 그때 ‘소수연’을 죽이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소수연’을 살려둔 것은 결국 한대경의 삶을 복잡하게 만든 모든 시작이었기 때문이다.얼마 지나지 않아 산 입구에 도착했다. 지아는 차 키를 꺼내며 한대경에게 말했다.“인제 그만 가보세요.”한대경은 자신의 긴 차량 행렬을 가리켰다.“제가 사모님께 드리고 싶은 말이 있는데, 잠깐 이쪽으로 오시죠.”“미안하지만, 우리가 그 정도로 가깝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지아는 곧장 차에 타려 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탐색하고 있었다. 한대경은 A 시에서 지아의 신분을 아는 상태에서 무리하게 행동할 용
“알겠습니다, 보스.” 배이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한대경은 지아의 손목을 내려놓고 냉랭하게 말했다. “빨리 타라고, 소 선생님.”지아는 주위를 둘러싼 검은 옷의 경호원들을 둘러보았다. 이런 ‘견고한 벽’에 가까운 사람들을 뚫고 이곳을 탈출할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애초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지아는 결국 지아는 억지로 차에 태워졌다.한대경은 몸을 굽혀 지아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아가 경직된 표정을 짓자, 그는 가볍게 비웃으며 말했다. “왜 그러시나,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가?”지아는 최대한 몸을 차 문 쪽으로 붙이며 그와의 간격을 벌리려 했다. 하지만 차 안은 너무나 좁아서 더 이상 도망칠 곳이 없었다.산에 오를 때 입은 옷에는 주머니조차 없어서, 지아에게 남은 것은 차 키 하나뿐이었다. 그녀는 핸드폰을 차 안에 그대로 두고 내린 상태였고, 한대경과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지아는 스스로를 위로했다. ‘나는 부남진의 손녀야. 그리고 여긴 A시고. 한대경도 여기서는 무리한 행동은 하지 못할 거야.’ 그러나 그런 지아의 생각과는 달리, 그녀의 몸은 두려움에 반응했다. 지아는 허리를 곧게 펴고 앞을 똑바로 바라보며 애써 침착한 척했다.“아니.”한대경은 지아의 대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웃으며, 아예 자리를 옮겨 중간 자리에 앉았다. 지아와의 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소 선생님이 그 자리를 그렇게 좋아하신다면, 내가 도와드리죠.”지아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그녀는 차 문에 완전히 밀착된 채, 더 이상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한대경은 지아와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 두 사람의 옷이 자연스럽게 맞닿았고, 지아는 A시의 기온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라카처럼 더운 지역이었다면, 이런 가까운 거리에서 훨씬 더 불편했을 거야.’ 지금 그녀는 빨리 부씨 가문의 저택으로 돌아가 이 불쾌한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소 선생님, 당신과 전남편 사이의 일은 나도 다 알고 있지. 당신의
차 안의 세 사람은 갑작스러운 총격에 모두 놀랐다. 만약 방탄유리가 아니었다면, 조금 전에 지아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조심해!”그 총알은 관통 연소탄이었지만, 유리를 뚫기에는 부족했고, 유리에 박혀 거미줄처럼 중심에서부터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총알이 쏟아졌고, 결국 유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산산조각이 났다.한대경은 첫 번째 총알이 유리에 박히는 순간 재빠르게 지아를 차 발판 쪽으로 끌어 내리며 자기 몸으로 그녀를 덮었다. 연이은 총알들이 창문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쏟아졌고, 차체는 마치 작은 알갱이들이 쟁반 위에 떨어지는 소리처럼 계속해서 총탄에 맞았다.“보스, 조심하세요!” 배신혁이 차체를 안정시키며 외쳤다.한대경은 아래쪽에 있는 지아를 내려다보았다.그는 예상치 못하게 이 상황에서 지아가 두려워할 줄 알았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득했고, 마치 화난 작은 짐승 같았다.“내가 차에 타지 않겠다고 했는데, 네가 억지로 태웠잖아!”지아는 너무나 운이 없었다. 자신이 도대체 얼마나 재수가 없는 사람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예전에 이도윤과 함께 있을 때는 길에서 암살당할 뻔했고, 눈보라 속에서 죽을 뻔한 적도 있었어.’‘할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또다시 암살당했고.’ ‘그리고 이제는 한대경이 강제로 차에 태우더니 또 총에 맞을 뻔하다니!’ ‘내 운명은 어찌 이리도 고달픈가? 고작 며칠 평온하게 살았는데!’지아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가득한 것을 보자, 한대경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재밌는 여자야.”“네 걱정이나 해!”한대경의 눈빛이 부드럽게 변하며 말했다. “너랑 같이 죽는다면, 우리는 불행한 연인이 되는 거지, 뭐.”‘펑!’지아는 그의 이마를 향해 머리를 세게 들이받았다. 두 사람의 이마가 세게 부딪혀 머리가 울렸다.“헛소리하지 마! 누가 너랑 불행한 연인 하고 싶대?”지아는 극도로 화가 치밀었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이놈은 어떻게
밖에서 들리던 총성이 멈추자, 지아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상대는 분명 죽을 각오로 온 사람일 텐데, 방탄유리를 예상 못 했을 리가 없고.’ ‘만약 나라면 사람을 죽이려고 한다면 다음에 어떻게 할까?’지아는 찬바람이 휘몰아치는 창문을 바라보며 단번에 알아챘다. “한대경, 창문을 막아.”지아는 인상을 찌푸리며 경고했지만, 한대경은 태연하게 말했다. “걱정 마. 내 부하들은 허술하지 않아. 저격수였다면 이미 죽었겠지. 누군가 근접할 수 있는 기회는 몇 초밖에 없을 거야.”한대경은 두 쪽으로 깨진 방탄유리를 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아까 그 기회를 이미 썼잖아.” 상대가 다시 폭발성 무기를 던질 틈은 없었다. 도로에 늘어선 한대경의 경호팀 차량이 상대를 방어하고 있었고, 더 이상 총알이 날아오지 않았다.지아는 아직도 자기 위에 엎드려 있는 남자를 발로 걷어차며 일어섰다. 그녀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런 방식을 쓸 정도로 배짱이 큰 걸까?’ ‘효율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방식이었어.’지아가 S급으로 평가받은 이유는 그녀의 무력 때문이 아니었다. 몇 년 정도 무술을 연마한 그녀가 어릴 때부터 훈련받은 자들과 실력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지아의 가장 큰 장점은 뛰어난 위장술과 독을 다루는 능력이었지만, 이 두 가지 모두 뛰어난, 어디서든 살아남을 만한 인물이었다.비록 지아의 체력이나 무술 실력이 최강은 아니지만, 학식이 풍부하고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있어 죽어가는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반대로 눈에 띄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도 있었다. 지아는 매번 임무를 수행할 때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해서 들어가고 탈출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녀는 단순히 효율만을 추구하는 급진파와는 달랐다. 효율만을 좇다가 자칫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지아 보기엔, 킬러마다 상대방을 죽일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긴 하지만, 이번 킬러처럼 이렇게 무모한 방식은 킬러들의 세계에서도 흔하지 않았다. 이 킬러가 죽음을
전효가 마음속으로 이렇게 갈등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한대경을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수류탄을 던지면 지아도 함께 죽을 것이 뻔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지아와 함께했던 수많은 기억이 한꺼번에 스쳤다. ‘지아는 진심으로 나를 오빠처럼 여겼어.’ 그 마음은 전효를 한순간 흔들리게 했다.짧은 망설임의 순간, 한대경의 경호원이 다시 추격해 왔고, 찰나의 정적을 깨며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지아는 눈앞에서 총알이 전효를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고 비명처럼 외쳤다.“안 돼!”그러나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효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몸이 차가운 땅에 쓰러지는 순간, 운전기사가 차를 몰고 도망치는 소리만 들려왔다.차가운 바람이 불어왔고, 지아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그녀는 절망에 빠진 채 생각했다. ‘내가 이 차에 타지 않았다면, 오빠는 이미 한대경을 죽였을 텐데... ‘하지만 나를 본 순간 오빠의 마음이 흔들려 실수를 저질렀고,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 거야.’몇 년 전, 지아가 ‘블랙 X’에 합류하겠다고 했을 때 전효는 경고했었다. “감정에 휘둘리는 건 킬러에게 있어 금기사항이야. 감정에 휘둘리는 킬러는 결국 죽음을 맞게 돼.” 그 경고가 이번에는 전효를 가리키고 있었다.그런데도 전효는 지아 앞에서 망설이고 말았다. 한대경은 지아의 이상한 반응을 보고 비웃었다.“뭐야, 옛 연인이라도 돼?”지아의 눈에 살기가 번뜩였고, 한대경의 얼굴을 향해 강하게 뺨을 날렸다.지아의 공격 속도와 강도에 놀란 한대경은 미처 막아내지 못했다.“죽일 놈, 왜 당신이 아니라 그 사람이 죽어야 해?”지아의 눈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살아오면서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 가족, 친구, 그리고 반려동물까지... 그래서 지아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그만큼 더 소중했다. 전효와 혈연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녀는 이미 전효를 친오빠처럼 여
배신혁은 한껏 속력을 내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한대경은 도윤을 따돌렸고, 지아는 조금 전 도윤이 자신을 본 사실조차 몰랐다. 지아는 온 힘을 다해 한대경을 밀쳐냈다.“한대경, 자제해.”한대경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잡으며 비웃었다. “소 선생님, 분명히 알아둬. 처음에 날 건드린 건 당신이었어. 이제 와서 자제를 요구한다고? 이미 늦었어.”찬바람에 지아의 머리카락이 흩날렸고, 까만 눈동자는 젖어 있었다. 그 모습은 누구라도 동정할 수밖에 없을 만큼 애처로워 보였다. 한대경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려 했다.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날카롭게 한대경을 막아섰다.“내 여자에게서 떨어져.”도윤은 싸늘한 눈빛으로 한대경을 주시하고 있었다.“도윤 씨...” 지아도 결국 도윤을 발견했다.한대경은 얼굴을 찌푸리며 부하에게 명령했다. “따돌려.”도윤 역시 냉정하게 명령했다. “쫓아.”조금 전 전효의 등장도 잠시뿐, 지금 두 사람의 시선은 온전히 지아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배신혁과 진환은 속도를 더욱 높여 차량을 추격했다. 결국 양쪽의 차량 모두 동시에 부씨 가문의 저택 앞에서 멈췄다.부장경은 부하들과 함께 한대경 일행을 맞이하고 있었다. 저택 안으로 난 길은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장애물 하나 없이 뚫려 있었다.수십 대의 검은 차들이 경주하듯 도착했고, 그중에서도 두 대가 유독 빠르게 내달렸다.끼익-바닥에 타이어가 미끄러지면서 마찰하는 급브레이크 소리가 들리며 두 대의 차량이 거의 동시에 멈춰 섰고, 차 문이 열렸다. 도윤과 혼란스러워하는 지아가 나타났다.부장경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 상황을 바라보았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가? 한대경을 암살하려고 한 킬러도 아직 못 찾았는데, 지아가 왜 한대경의 차에서 내린 거지?’“지아, 혹시 한대경이 너한테 무슨 짓이라도 했니?”지아는 가까스로 자유를 되찾고 도윤의 품에 뛰어들며 조용히 물었다. “오빠는...”도윤은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걱정하지 마,
지아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한대경이 지금 이곳에서 함부로 행동하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지아가 조금 전 한대경이 자신에게 보여준 너그러운 행동을 떠올렸다. 과거였다면 이 남자는 진작에 자신을 죽였을지도 모른다. ‘내가 한대경을 때리고, 할퀴고, 심지어 내가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대경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행동했어.’‘정말 이상해. 조금 전 한대경의 모습은 평소 그의 성격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어.’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어렵게 입을 떼었다. “한대경이 정말 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은데.”과거 라카에서 한대경은 그저 ‘소수연’에게 약간의 호감만을 가졌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지아도 자신에 대한 한대경의 애정을 분명하게 느꼈다. 남자가 여자를 얼마나 관대하게 대하는지는 그가 그 여자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졌는지에 달려 있다. 한대경이 지아에게 너무나도 관대했다는 것은 지아에 대한 집착 역시 커졌다는 증거였다.이도윤은 이 같은 사실을 일찍부터 알아챘다. ‘만약 한대경이 지아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지아가 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폭발을 막지도 않았을 거야.’이도윤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지아는 그의 손을 잡고 마치 귀여운 고양이처럼 애교를 부리며 말했다. “내 마음속에는 자기뿐이야...”“당신 마음속에도 내가 있다면...”‘나와 재결합해야지... 그래야 다른 남자가 더는 내 여자를 탐내지 않을 테니까...’하지만 이 말은 아직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지아 사이에 분명한 하나의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만한 명분이 없다면, 이예린을 죽인다고 해도 둘 사이의 상황은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도윤은 나무 아래에서 두 손을 꽉 쥐었다. 이때, 지아가 도윤의 넥타이 끝을 잡아당기며 발끝을 세워 그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지아의 돌발행동에 깜짝 놀란 도윤의 눈이 순간 동그래지면서, 곧 지아의 마음을 충분히 알게 되었다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