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부터 도윤이 뭔가 걱정이 있는 듯 보였다. 차에 타자마자 그의 이마에 드리운 주름을 본 지아는 살짝 다가가 도윤의 뺨에 입맞춤했다.“왜 이렇게 계속 우울한 표정이야?”도윤은 무슨 말을 하려다 망설였다.“아무것도 아니야.”이에 지아는 장난스레 말했다.“말 안 하면 계속 입맞춤할 거야.”“정말, 이 여우 같으니라고.” 도윤은 입맞춤을 깊게 하다가 자칫 더 진전될 뻔해 지아가 그를 밀어냈다.지아는 도윤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손가락을 지아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끼워 넣으며 속삭였다.“비록 우리 사이에 법적으로 맺어진 관계는 없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이후로 아이들 말고는 당신이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대체 뭘 그렇게 고민하는 거야?”도윤은 지아의 손을 꽉 잡고, 그녀의 눈을 깊숙이 응시했다.“너 정말 지아 맞아? 아니면 영지인가?”그 말에 지아의 몸이 순간 굳었다.“이미 다 알고 있었구나?”“블랙X의 최신 S급 임무가 바로 그 반지를 노리는 거였고, 그 임무를 맡은 사람이 영지라는 것도 말이야. 사실 난 이미 너를 조사하고 있었어. 그날 금상어를 죽인 것도 너지?”도윤이 중독된 후, 도망간 금상어를 처리한 사람은 지아였고, 그것도 도윤이 즐겨 쓰는 방식으로 머리를 잘라내어 다크 웹에 올렸다.그 말에 지아는 부정하지 않았다.“그래, 나야. 난 그때 날 죽이려 했던 사람을 끝까지 찾으려고 해. 아무 소식이 없더라도, 내가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그런 곳에 있어야 내가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 수 있잖아.”“지아야, 내가 네 복수를 도와주겠다고 말했잖아. 왜 날 믿지 않고,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나서는 거야?”“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들이 다시는 우리 관계에 영향을 주지 않길 바랐어. 만약 그 사람이 당신에게 중요한 친척이라면, 예를 들어 이예린 같은 존재 말이야, 아무리 당신이 나를 아끼더라도 결국에는 나를 겨냥할 거 아니야.”지아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런 고통을 또다시 겪고 싶지 않아.
그렇게 시크했던 남자는 지금 더없이 비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남자인 건 맞지만, 남자라고 하여 안전감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나한테있어서 결혼이 바로 그 안전감이야.”지아는 중얼거리며 말했다.“하지만 나에게 결혼은 안전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족쇄일 뿐이야.”목적지에 도착하자 지아는 손을 들어 그의 얇은 입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지우고는 빙긋 웃었다. “지금처럼 지내는 것만으로도 난 충분히 행복해.”핸드백에서 립스틱을 꺼내 그의 손에 쥐여주며 지아가 덧붙였다. “네가 발라 줘.”각국의 외빈들은 모두 멈춰 섰고 우두머리인 한대경과 몇 마디 주고받았다.차에서 내린 그 부부를 아직 못한 채로 말이다.그는 배이혁에게 사람을 데리고 먼저 가라고 하고 자신은 도윤의 차 앞으로 갔다.진환을 비롯한 경호원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차 옆에 서 있었다.한대경은 참다못해 화를 내며 문을 잡아당겨 열었는데 그러한 장면을 보게 되었다.평소 그와 독을 품고 있던 도윤과는 달리 손끝으로 지아의 턱을 살짝 움켜쥐고, 자상하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열심히 립스틱을 발라주고 있었다.도윤의 눈빛과 동작은 지극히 경건하여 마치 지아가 그의 삶이자 목숨인 것처럼 보였다.지아는 입을 오므리고 그를 향해 활짝 웃었다. “도윤아, 나 예뻐?”그런 웃음이 자칫 한대경의 영혼마저 앗아갈 뻔했다.그는 이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웃음이 있을 줄이라고 상상하지도 못했다.분명 요염한 얼굴이었지만 눈은 보석처럼 순수하고 깨끗했으니 말이다.“우리 지아가 세상에서 제일 예뻐.”지아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한대경을 바라보며 확연히 멀어진 공손한 태도를 그를 마주했다.“립스틱이 좀 지워져서요... 미안해요.”“괜찮아요.”한대경은 시선을 거두면서 대답했다.이 여자 앞에만 오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모든 성질이 죽어버리고 만다.그 이유가 도대체 무엇 때문인지 그조차도 알 수 없었다.도윤은 긴 다리로 차에서 내려 지아에게 팔을 건네주었고, 지아는 그제야 그의 팔을 잡고
자기를 떠 보고 있는 배신혁의 의도를 지아는 분명히 낚아챘다.따라서 지아는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웃으며 대답했다.“만약 제가 속임을 당했다고 한다면 그 교훈을 기억하고 다시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끔 주의할 거예요. 다음에는 사람을 쉽게 믿지도 않을 것 같고요.”배신혁은 그녀의 빈틈없는 언행에서 그 어떠한 실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하는 수 없이 숨을 죽이고 이곳 건축이나 풍경에 대해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국립병원과 가까워지자 그 앞에는 약초가 심어져 있었는데 마침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다.“이 꽂은 우리나라 국화 상직이라고 합니다. 꽃잎을 말리면 약재로 쓰일 수 있고 그 열매와 꽃줄기는 직접 먹을 수도 있습니다.”그때 지아기 입을 열었다.“네. 60년 전 C국에서 큰 재난을 겪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천지가 바하고 군벌이 도처에 널려 있고 그뿐만 아니라 가뭄까지 닥치면서 수확 하나 못했다고 했었어요.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산을 타서 산나물을 캐게 된 거죠.”“상직과 같은 초본식물은 생명력이 강하고 일 년 자랄 수 있고 꽃잎부터 뿌리줄기까지 먹을 수 있어 그 가뭄을 이겨낼 수 있도록 많은 사람을 도와줬었죠. 그래서 그 재난 이후로 상직은 국화로 된 거라고 들었어요.”“정확합니다. 사모님께서 박학다식하시네요. 생활이 좋아진 오늘날에 젊은이들은 그유래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감탄하면서 말하다가 배신혁은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여기가 바로 국립병원입니다. 사모님께서 의학을 공부하셨다고 들은 바가 있는데, 들어가셔서 직접 둘러보시지 않겠습니까? 많은 약초들이 심어져 있습니다.”지아는 그가 이렇게 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따라서 만약 지금 바로 거절하면 너무 의도적인 것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일단은 동의하기로 한 지아였다.“의학에 대해서 배운 건 사실이나 개인적인 일로 학업을 중단했어요. 외과를 전공했던 저라 한의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요.”“괜찮아요. 국립병원에는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한의사가
“빨리 가지 않고 뭐 하시는 거죠? 사모님께서 지금 한창 둘러보고 계셨거든요.”배신혁은 매서운 눈빛으로 오혁에게 경고를 주었다.오혁은 그제서야 정신을 차렸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지금 바로 자리 비켜드릴게요.”“참, 수연 선생님은 어디에 계시나요? 출근하지 않은 거예요?”국립병원 사람들은 아직도 어젯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지아는 마음속으로 죄책감을 느꼈고 자기를 친구로 삼은 그 사람들에게 미안했다.“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가요!”배신혁은 지아의 행방을 묻는 오혁을 재촉했다.오혁이 멀리 간 뒤에야 배신혁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사과했다.“죄송합니다 사모님. 잠시 헤프닝이 있었네요.”“괜찮아요. 닮은 사람이라면 착각할 수도 있는 법이죠.”지아는 당당하게 계속 그를 따라서 돌아다녔고 배신혁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갖은 방법으로 계속 떠봤지만 지아한테 이상한 점은 없었다.공기 중의 그 강한 향수 냄새를 맡으면서 배신혁은 소수연의 몸에서 나는 냄새는 은은한 약의 향기라는 것을 떠올렸다.지아에게서는 꽃향기가 나오 있었으므로 배신혁은 점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향으로 온전히 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어처구니가 없지만, 향수를 뿌리는 여자들도 많으니 배신혁은 단지 냄새로만 지아를 부정할 수 없었다.지아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공효신은 직접 접견하면서 지아에게 국립병원을 소개해 주었다.지아가 음료수를 마시고 있는 동안 배신혁은 공효신을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원장님, 알 것 같으세요? 저 여자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는 것 같나요?”“몇 가지 꽃향기와 박달나무에서 추출한 냄새인 것 같은데 강하고 독한 데다 난 향수를 잘 모릅니다.”“약재 냄새가 나나요?”“아니요.”공효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근데 수연 선생님은 왜 아직도 출근하지 않은 거예요? 대체 어디로 데리고 간 거예요?”배신혁은 아직 그 여자가 사기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서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그 여자는 그저 사기꾼일 뿐이고 앞으로
도윤은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은 아니다.지아가 팔꿈치로 그를 쿡쿡 찍으며 그의 귓가에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 무서워?”도윤은 손이 닿는 대로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무섭고 저렇게 말하는 것도 좋아.”그는 사람들 앞에서 지아과 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조금도 꺼려 하지 않았다.지아는 부끄러워 얼굴이 붉어졌지만 도윤은 오히려 개의치 않았다.주위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은 채 도윤은 뼈마디가 뚜렷한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당겼다.“어린애도 아닌데 왜 이렇게 수줍음이 많아?”지아는 줄곧 이쪽 면에서 낯가죽이 얇은 편이었다.예전에 두 사람이 함께 있을 때 몰래 사랑을 했었다.지금처럼 이렇게 대놓고 애정행각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몸에 베인 듯이 익숙하지 않았다.한대경은 나오자마자 달콤하게 귓속말을 하고 있는 부부를 보게 되었다.그뿐만 아니라 도윤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지아는 이내 수줍어하는 모습이었다.한대경은 잠자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사람들과 거리를 두었다.이때 배신혁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떠봤는데, 소수연 씨가 아니었습니다.”한대경은 담배를 입에 물고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확실해?”“네, 제가 여러 방면으로 떠봤지만 이상한 점이 없었습니다.”배신혁은 한숨을 쉬었다.“저도 맞았으면 하는데, 정말로 소수연 씨가 아닙니다.”라이터 소리가 나고 한대경은 담배를 두 모금 빨고 니코틴이 폐관을 따라 한 바퀴 굴리도록 내버려둔 후 천천히 내뱉었다.“그럼, 그 여자는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소수연은 마치 나비가 되어 날아간 ‘향비’처럼 어젯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반드시 찾아내고 말 거야! 이미 온천을 봉쇄하라고 시켰어.”한대경은 손에 쥔 담배를 버리고 연회장으로 향했다.오늘에는 지아에게도 자리가 마련되었고 그 자리는 바로 도윤의 옆자리였다.점심은 별다른 행사 없이 자유롭게 식사했기에 분위기는 평소처럼 엄숙하지 않았다.도윤은 누구에게나 쌀쌀맞게 대했다.그래서
그의 동작은 너무 거칠어서 창문을 닫을 겨를조차 없었다.멀리 옥상에 있는 한대경은 쓸데없이 시력이 너무 좋았다.도윤과 벽 사이에 꼭 갇힌 채 서서히 눈초리가 풀리고 있는 지아의 모습을 그대로 보게 되었으니 말이다.도윤은 지아의 두 손을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 위에 꽉 잡고 있었다.아리따운 얼굴에는 어느새 어여쁜 분홍색 꽃이 피어 있었고 터프하기 그지없는 도윤의 행동에 지아는 고개를 들기조차 어려웠다.이윽고 도윤은 지아를 침실로 안고 갔고 19금인 사랑이 펼쳐지기 시작했다.한대경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도윤이 생각보다 이 여자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연기는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으니 지아를 바라보고 있는 도윤의 눈빛은 그토록 사랑이 가득했으니 말이다.뜨거운 사랑을 나누고서 다시 일어나 보니 어느새 오후 3시였다.땅바닥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옷을 보고서 도윤의 터프함을 가히 짐작할 수 있었다.지아는 그 아찔한 광경을 보고서 그만 눈살을 찌푸렸다. “내 치마...”방금 세수를 마친 도윤은 민트향을 풍기면서 다가왔다. “이따가 사줄게. 네가 원하는 만큼.”“진짜?”“앞으로 내 시간은 모두 네 것이야. 자, 라카까지 왔는데 구경이라도 좀 해야 하지 않겠어?”두 사람은 개인 맞춤으로 만들어진 옷을 벗고 평범한 커플템으로 갈아입었다.도윤도 가면을 벗고 지아와 손을 잡고 이국땅을 걷기 시작했다.막무가내로 걷다보니 개인 맞춤 웨딩드레스숍이 보였다.지아는 진열장에 걸려 있는 웨딩드레스를 잠시 동안 넋 놓고 보았다.도윤은 그녀의 마음속의 유감이 있는 것을 알고 있다.그렇다, 도윤은 지아에게 결혼식 하나를 빚지고 있다.“지아야.”지아는 곧 정신을 차렸다, “오해하지 마. 나 결혼하고 싶지 않아. 그냥 저 여자를 보고 있었어.”창문 넘어 젊은 신혼부부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여자는 하얀 웨딩드레스에 부케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화장을 마친 남자에게 신성하게 다가갔다.그 어느 한쪽이든 잘 어울리고 달콤해 보였다.“부러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었던 사기꾼 소수연은 그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진심으로 한대경의 병을 치료해 주고자 약까지 준비해 놓고 떠났다.좀 더 모질게 굴었다면 한대경은 이렇게 망설일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눈만 감으면 지아의 얼굴이 떠오르게 된 한대경은 점점 이성을 놓아가고 있었다.‘빌어먹을! 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그날 밤, 지아는 캄캄한 하늘을 보면서 초조해졌다.내일 무슨 일이 생겨 떠나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도윤은 지아의 그러한 생각을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이윽고 도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지아를 안심시켜 주었다. “지아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하늘이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난 너 데리고 갈 거야. 무조건.”그 어떠한 19금 장면도 없이 도윤은 지아를 꼭 끌어안았다.온몸이 포근해지자 지아는 서서히 졸음이 밀려와 눈을 감고 잠들었다.날이 밝기도 전에 지아는 도윤의 볼 뽀뽀에 게슴츠레 눈을 떴다.“지아야, 일어나. 같이 집으로 가자.”“집?”지아는 눈을 번쩍 뜨더니 순간 졸음이 사라지면서 펄쩍펄쩍 뛰었다.“자, 집에 가자.”도윤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면서 덧붙였다.“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내 손 꼭 잡고 가기만 하면 돼. 진환이가 모든 걸준비해 놓았거든.”지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재빨리 씻고 준비하고 나서 도윤과 함께 떠났다.집을 나섰을 때 마침 동쪽 해안선을 타고 해가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지아는 서둘러 차에 올라 공항으로 향했다.하지만 마음은 이내 불안했고 눈꺼풀마저 자꾸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지아는 불안하게 도윤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도윤아, 나 무서워.”“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도윤은 불안해하는 지아를 품으로 끌어안았다.따뜻한 몸으로 불안해하는 지아를 녹여주고 싶었던 마음이었다.“그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넌 꼭 날 믿어야 해. 조금 더 자면 공항에 도착할거야.”지아는 눈을 감았고 귀청을 찢을 듯한 폭발음이 또다시 머릿속에
순간 지아는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그러한 지아의 미세한 변화를 느낀 도윤은 지아의 손가락을 살짝 쥐었다.“친구라고요? 라카에 제 아내 친구가 있을 리가 없는데요.”도윤은 냉담하게 대답했다.어느새 지아도 어느 정도 사로가 정연해졌다.‘시억이가 잡혀있는 것 같아.’킬러로 일하면서 가장 꺼리는 것은 조직을 배신하는 것이다.하급 컬러는 협박하에 말할 수 있지만 시억은 S급 킬러임으로 절대 한대경에게 지아의 신분을 밝힐 수 없을 것이란 말이다.하물며 지아는 그동안 항상 신중했고 지금까지 시억의 정체를 본 적이 없으며 시억 역시 지아의 신분을 모르고 있다.두 사람이 함께 수행한 임무는 두 번이 전부였고 친구라고 할 수 있는 사이도 아니다.지아와 도윤 사이를 시억이가 알 수 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따라서 지아는 한대경이 그녀를 속이고 있다고 것으로 단정할 수 있었다.지아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자신이 갑자기 나타난 것도 의심스러웠으니 자기를 의심하고 있다고 생각했다.하물며 만약 이대로 지아가 비행기에 올라 귀국하게 되면 한대경은 더 이상 찾고 싶어도 그러할 기회가 없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그렇다면, 지금 한대경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 마지막 기회를 잡으려는 것이다.지아는 바로 깨달았다.“혹시 배신혁 씨를 가리키시는 겁니까? 라카에 처음 온 저와 반나절 동안 같이 있어줘서 고마운 건 사실입니다.”한대경은 그녀 얼굴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하지만 흠잡을 데가 전혀 없었다.“아니요. 친구분 코드명이 시억이던데요. 직업은 킬러이고요.”한대경은 차가운 목소리로 덧붙였다.“사모님과 같은 편이라고 친구분이 직접 밝혔습니다.”“같은 편이라고요?”도윤은 차갑기 그지없게 웃었다.“제 아내가 무슨 일을 했다고 감히 그렇게 모함하고 있는 거죠? 분명히 말씀하시는게 좋을 겁니다. 아니면 정전 협의든 뭐든 서명할 수 있는 반면 한쪽이 먼저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두 사람은 키가 비슷하지만, 도윤은 계단에 서 있기에 한대경보다 머리 절반 정도 크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