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윤은 한대경의 반응을 살피며 생각에 잠겼다. 그들은 오랫동안 알고 지내왔고, 한대경의 성격은 매우 거칠고 충동적이었다.지금의 그의 위치가 어떻든 상관없이,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도 이런 대우를 참아내지 않았을 것이다.한때 한대경을 헐뜯었던 사람들의 무덤에는 이미 잡초가 무성했다.하지만 지아가 한대경을 욕한 후에도,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분노도 보이지 않았다.한대경의 뒤에 있던 두 사람 역시 태연하게 서 있었으니, 이는 지아가 처음으로 언성을 높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그렇다는 건 한대경은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를 넘어선 것이 틀림없었다.남자는 남자를 잘 안다.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이상 어찌 한 여자가 자기 머리 위에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이 들자, 도윤은 바지에 얹은 손가락을 꼭 움켜쥐었다.도윤은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고 하루빨리 지아를 데리고 나가야 했다.진봉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그 미친 한대경이 지아의 말을 이렇게까지 듣다니?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진봉의 눈에 비친 한대경은 마치 고등학교 시절의 문제아 같았고, 선생님 말은 절대 듣지 않는 그런 학생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얌전해진 이유가 대체 뭘까?진환의 시선은 지아와 한대경을 오가며 무언가 짐작하는 눈치였고, 상황은 최악의 결과를 향해 가고 있었다.지아의 고함에 모두가 침묵했고, 아무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한대경은 지아가 침을 놓고 있는 그녀의 손목을 응시했다. 그 손목은 가늘고 하얗고, 침을 놓는 동작은 간결하고 깔끔한 것이,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멋진 모습이었다.그저 평범한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 대체 왜 이렇게 그를 끌어당기는 걸까?한대경은 지아가 겁을 먹고 도망칠까 봐 자신의 성격을 억누르고 있었다.“콜록, 나중에 저 사람 다 치료하고 나면 나도 침 좀 놔줘.”한대경은 이틀 동안이나 지아에게 말을 건네지 못했고,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는 약간 냉랭해졌다.그가 이 말을 꺼내자마자, 도윤의 기운이
두 사람의 팽팽한 긴장감은 지아를 숨 막히게 했다. 그녀는 차가운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그만하고 나가. 내 진료를 방해하지 말고.”한대경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내가?”“그러면 누군데? 내가 신경 쓸 건 그 사람이 귀한 손님이든 아니든, 여기서는 내 환자일 뿐이야. 당신들이 무슨 원한이 있든 치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려. 그러니까 당장 나가!”지아는 문 쪽을 가리켰고, 한대경은 그녀를 몇 번 노려보더니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진봉과 다른 사람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저기 의사 선생님, 당신 직업이 의사가 아니라 조련사 아닙니까? 그 미친 개가 당신 말을 그렇게 잘 듣다니, 대단하시네요!”지아는 차가운 눈빛으로 진봉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나가.”“알겠어요.”진봉은 풀이 죽은 채 대답했고, 진환은 이도윤을 보며 문 쪽으로 걸어가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문을 지키고 있을 테니, 하지만 한대경이 계속 기다릴 것 같으니 너무 오래 걸리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의심을 살 수 있으니까요.”사람들이 떠난 후, 지아는 도윤의 치료에 집중했다. 지아는 도윤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두통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오랜만에 마사지를 해줄게.”“그 사람한테도 해준 적 있어?”도윤은 지아의 손을 꽉 잡으며 차가운 눈빛으로 물었다.“응.”지아는 숨기지 않았다.“그 남자가 너한테 뭐 했어?”“아무것도 안 했어. 도윤아, 나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드리게 두지 않을 거야.”지아는 그의 품에 안기며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이제 화 풀어줄래?”도윤은 그녀의 애교에 전혀 저항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강하게 지아를 끌어안으며 말했다.“지아야, 널 어쩌면 좋겠어.”지아는 두 시간 넘게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의 머리를 마사지해 주고, 안정 효과가 있는 향을 피워 주었다. 그리고 도윤이 잠들자 지아는 천천히 방을 나섰다.문 옆에 기대어 있던 진환은 지아가 나오자 몸을 곧추세웠다.“잠들었으
만약 한대경이 평소처럼 거만하게 굴었다면 지아는 그렇게까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원래의 임무 때문에 그에게 아주 중요한 무언가를 빼앗으려 하고 있었다.그래서 지아는 그게 의문스러웠다.“왜 갑자기 사람이 달라졌지?”“며칠 동안 많은 생각을 했어. 네 의술은 정말 대단해. 국립병원의 의사들도 너를 칭찬해 마지않더군. 만약 관심이 있다면 국립병원에 취직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그리고 네 남편과 아이들도 여기로 데려와서 최고의 교육을 받게 할 수 있어. 남편에게도 좋은 일자리를 줄 수 있지.”한대경은 한 걸음 물러서며 지아와 거리를 두었다.“내가 너에게 약간의 호감이 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어. 너는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야. 나는 너를 이곳에 남기고 싶어. 조건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도 좋아.”“고민해 볼게. 늦었으니 이제 돌아가 쉬어.”지아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 ‘왜 한대경이 갑자기 이렇게 변한 걸까?’그날 밤, 지아는 불안한 잠을 잤다. 악몽이 반복되었고, 꿈속에서 늘 한대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왜 날 속였어? 왜!”동이 트자, 지아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은 더 복잡해질 것이었다. 지아는 여전히 약속된 장소에 꽃을 두었고, 임무는 계속 진행되었다.오늘은 한대경이 매우 바빴는데, 도윤이 일찍 도착함에 따라 몇 개국 회담이 앞당겨졌기 때문이다.한대경은 물론, 도윤조차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의사 선생님, 당귀를 왜 강황에 넣었어요? 무슨 생각 중이었어요?”며칠 사이 지아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린 오혁이 다가왔다.그 말에 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얼른 약재를 분리했다.“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집이 좀 그리워서요.”“보스가 당신을 직접 여기로 끌고 왔다고 들었어요. 집이 그리운 건 당연하죠. 우리 보스는 겉보기엔 나쁜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사람들한텐 참 잘해요.”오혁은 지아에게 커피 한 잔을 건네며, 함께 화단 옆에 앉
날이 점점 어두워지고, 지아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이 찾아왔다. 역시나 플로럴 온천이라 그런지 공기 중에는 부드러운 꽃향기가 퍼져 있었고, 지아에게는 따로 작은 온천이 배정되었다.‘혹시 한대경이 정말 양심에 찔려 변한 걸까?’비록 아름다운 경치가 펼쳐져 있었지만, 지아는 온천에 몸을 담글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멀리서 삼엄하게 지켜보는 경비들을 보고, 한대경이 지금 손님을 맞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오늘 밤 지아는 성공할 수 있을까?한 시간이 넘게 지나자, 지아는 정원에 앉아 하늘의 수많은 별을 바라보며, 귓가에는 벌레 우는 소리와 함께 벚꽃이 살랑살랑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꽃잎이 온천물 위에 떨어져 더욱 아름답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이떄, 문밖에서 누군가가 노크했다.“의사 선생님, 다 끝내셨나요?”이에 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문을 열어젖히고는 물었다.“네. 무슨 일이죠?”“저를 따라오시죠.”그는 지아를 다른 길로 안내했다. 청석판으로 포장된 길 양옆에는 나무들이 심겨 있었고, 은은한 조명 아래서 몹시도 아름다워 보였다.몇 분 걸어가자, 지아는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녀 앞에는 커다란 달풀꽃밭이 펼쳐져 있었다.달풀꽃은 꽃잎이 닫혀 있을 때는 백합 모양의 종 모양을 하고 있으며, 달이 뜨는 밤이면 노란 꽃잎이 소녀의 드레스처럼 펼쳐지며 피어나는 꽃이었다.이렇게 넓은 달풀꽃밭이라니!조명과 달빛 아래 더욱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그 황홀한 광경을 본 지아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이건...”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네가 찾던 달풀꽃이야.”지아가 돌아서자, 한대경이 다가오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달리 C국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고, 넉넉한 로브가 허리끈으로만 묶여 있었다. 그 덕분에 그의 탄탄한 허리와 어깨가 강조되었다.날카로운 한대경의 이목구비가 나무 사이에서 어둠에 살짝 가려져 있어,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이 정도면 충분히 너에게 갚을 수 있겠지?”“충분해, 충분해.
지아는 평온한 얼굴로 방을 나섰고, 복도에서 눈을 감고 있던 배이혁과 마주쳤다. 지아가 나오자 배이혁이 눈을 떴다.“의사 선생님.”배이혁은 섬세한 성격이었고, 특히 그 한기 어린 검은 눈은 언제나 지아를 경계하고 있는 듯했다.지아는 속으로 불안했지만, 표정은 침착하게 유지하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잠들었어요. 가능하면 좀 더 쉬게 해주세요.”“알겠어요, 의사 선생님. 그런데 제 허리가 하루 종일 아픈데, 한 번 봐주실 수 있나요?”이번 출장에 다른 의사들이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아는 당장 떠나고 싶었지만 그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혹시라도 무언가 의심할까 봐서 말이다.“그래요. 옷을 올리시면 잘 살펴볼게요.”“여기서는 부적절하니, 다른 장소로 가시죠. 혹시 외국 사절들이 보면 좋지 않으니까요.”배이혁은 지아를 향해 말을 마치자마자 먼저 걸음을 옮겼다.그리고 지아는 빨리 진료를 마치고 떠나려는 생각뿐이었다.비록 약물을 더 강하게 사용했지만, 한대경의 의지력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얼마나 더 오래 잠들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배이혁을 따라 복잡한 길을 지나 작은 방에 들어서자, 문이 지아의 뒤에서 닫혔다.문이 닫히는 순간, 지아는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다.방 안은 싸늘하게 고요했지만, 희미한 향이 퍼지고 있었다. 지아는 그 향의 성분을 즉시 알아챌 수 있었다.이 향은 환각을 일으키고 깊은 잠에 빠지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그녀가 한대경에게 사용한 것보다 더 강했다.하지만 지아는 이미 약물에 내성이 생긴 상태였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약물은 전혀 듣지 않았다.지아는 배이혁이 등을 돌리고 있음에도 그에게서 느껴지는 살기를 분명히 감지했다.“맞다, 생각난 일이 있는데 내일 다시 봐 드릴게요.”지아는 서둘러 문을 열고 나가려 했지만 배이혁이 그녀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배이혁은 키가 크고, 한 손을 문에 대며 지아의 도망을 막았다.그의 기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의사 선생님, 진료는 아직 시작도
그러나 지아는 약을 받지 않았다.“제가 의사인데, 남이 건넨 약을 함부로 먹겠어요? 저는 원래 떠나고 싶었어요. 당신이 저를 데리고 갈 수 있다면 감사할 일이죠. 억지로 약을 먹일 필요는 없죠.”지아의 반항에 배이혁의 얼굴은 더욱 어두워졌다.“그건 당신 마음대로 되지 않아요.”그러고는 지아에게 강제로 약을 먹이려 했다.“난 약한 여자라고 봐주지 않아요. 그러니 의사 선생님이 알아서 순순히 먹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래야 덜 고생하시죠.”배이혁은 지아의 턱을 세게 잡고 억지로 약을 먹이려 했고, 지아는 필사적으로 저항했다.그때, 문밖에서 배신혁의 목소리가 들렸다.“형, 거기 있어요?”배이혁은 급히 지아의 입을 막으며 그녀가 소리를 내지 못하게 했다.“응, 무슨 일이야?”지아는 무기를 지니고 있었지만, 최후의 수단이 아니면 사용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지금은 오히려 약한 척하는 게 더 안전했다. 배이혁의 계획이 드러나면 오늘 밤 탈출은 물 건너가기 때문이었다.분명 배신혁은 배이혁의 계획을 모르는 것 같았다. 배이혁은 그저 몰래 지아를 제거하려고 했던 것이다.또한, 지아는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그녀는 배이혁의 손가락을 세게 물었고, 배이혁의 손가락에서는 피가 났지만 그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았다.“오늘 피곤해서 좀 쉬려 해. 네가 가서 잘 지켜봐. 여기 모인 정계와 상업계 인사 중에서 실수가 있어선 안 돼.”“저기,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알았어. 잘 쉬어.”배신혁이 돌아서려 하자, 지아는 발로 작은 탁자를 세게 차서 과일과 컵을 바닥에 떨어뜨렸다.뭔가 깨지는 듯한 소리에 배신혁은 돌아서서 물었다.“형,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 생겼어요?”배이혁은 지아를 노려보며 더욱더 그녀의 목을 세게 졸랐다. 배이혁이 처음부터 지아를 살려서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확실해졌고, 그 약은 소리 소문 없이 그녀를 죽이려는 것이었다. 그 후 한대경이 무슨 말을 하든 다른 이유로 설명할 것이고, 아무도 배이혁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배신혁과 배이혁은 마치 빛과 어둠 같았다. 배신혁이 태양이라면, 배이혁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이었다. 그의 손은 더럽혀져 있었고, 밤에만 모습을 드러냈다.배신혁은 당연히 자신의 형이 무고한 사람을 함부로 죽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형, 의사 선생님에게 문제가 있다는 증거가 없잖아. 말해봐, 어떤 스파이가 병원장마저도 감탄할 만큼 뛰어난 의술을 가질 수 있겠어?”“형도 알다시피, 보스가 의사 선생님을 데려온 건 보스의 고집 때문이었고, 소 의사님은 여러 차례 도망쳤지만 결국 다시 잡혔잖아.” “그런데도 증거도 없이 죽이려 하다니, 만약 보스가 깨어나면 얼마나 화를 낼지 생각해 봤어?”“보스가 화내고 날 처벌할 거란 걸 알아. 그래도 나는 어떤 위험도 남기지 않을 거야. 그 월롱초가 어떻게 왔는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너는 잘 알잖아.”이에 지아가 배신혁을 향해 물었다.“월롱초가 뭐가 문제죠?”“우리 나라의 토양에서는 자라지 않아요. 보스가 마성에서 직접 가져와 이곳에서 키우게 한 거예요. 그 때문에 많은 자원이 낭비됐죠.”한대경은 이런 얘기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또한 지아는 오늘 밤 온 신경을 반지에만 쏟고 있었기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그러나 이제 배신혁의 말을 듣고 나서야 깨달았다.“자랑스럽겠지. 당신 하나 때문에 이 세상을 뒤지고 거금을 들여서라고 찾아내 당신에게 이식하려고 했으니.”그 말에 지아는 차갑게 대답했다.“나는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부담스러워요. 나를 좋아하는 건 나에게는 짐일 뿐이에요. 나는 전혀 좋아하지 않아서 해줄 대답도 없고요. 그냥 여기서 떠나고 싶을 뿐이고 그게 전부예요.”“떠나고 싶었다? 웃기지 마. 내가 몰랐을 거 같아? 당신 같은 여자들은 다 똑같아. 원하는 건 모두 잡고, 다 계획된 거잖아. 하지만 당신이 살아 있는 한, 보스는 계속 찾아낼 거야.”“그렇지도 않을 거예요. 내가 떠나면, 절대 나를 찾지 못할 거야. 신혁 씨, 제발 저를 여기서 나가게 해주세요. 당신 형이 미쳐서 날 죽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한대경은 갑자기 정신을 차렸으나 머리는 여전히 어지러웠다.머리에 꽂혀 있던 침은 이미 제거되어 있었고, 방 안에 피워놓은 향은 막 꺼졌지만, 그 강한 냄새가 한대경을 매우 불편하게 만들었다. 한대경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들어오자 향 냄새가 흩어졌고, 그제야 조금 나아진 것 같았다.그럼에도 여전히 머리가 조금 띵했다. 그는 하품하며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이미 지아의 흔적은 없었다.‘역시나 또 도망갔네.’한대경은 손으로 콧등을 움켜잡고 있었다가, 손가락에 있던 반지가 사라진 것을 발견했다.그 순간 그는 정신이 반쯤 차려졌다. 또한 책상 위에는 한 장의 쪽지가 놓여 있는 글씨가 한대경의 눈에 들어왔다.[한대경 씨, 앞으로는 여자를 너무 쉽게 믿지 마세요. 대가는 이미 받았으니.]한대경은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을 떠올렸고, 그는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을 좀처럼 믿지 못했다.쪽지를 쥔 손가락은 하얗게 질려 있었고, 그의 눈은 차갑고 음산한 빛을 띠었다.그때 배신혁이 갑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또한, 한대경의 표정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하고 물었다.“보스, 의사 선생님은 어디 있죠?”한대경의 손에서 쪽지가 가볍게 떨어졌고, 그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평온했다.“그 여자가 내 반지를 훔쳐 갔어.”“뭐라고요!”배신혁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아무도 이렇게 대담할 수는 없었다. 이는 마치 호랑이의 꼬리를 자르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정원의 나뭇가지에 떨어지는 빗소리는 투두둑 소리를 냈다. 그 소리는 마치 한대경의 마음에 내리는 비와도 같았다.“멀리 가지 못했으니 즉시 모든 출입구를 봉쇄해!”배이혁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역시 그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 여자는 정체가 불분명했다.배신혁은 조금 전 지아를 위해 형에게 맞서 싸웠던 자신을 떠올리며 분노가 치밀었다. 지아의 행동은 그를 뺨이라도 때리듯 통렬한 배신이었다.“빌어먹을, 그 여자가 우리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
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빠, 절대 오빠를 실망하게 하지 않을게요. 그러니까 오빠도 건강을 잘 챙겨야 해요.” “그래.”시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나는 아버지 일부터 정리할게. 월아, 집안을 부탁해.” “오빠, 걱정하지 마세요. 집안일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떠나기 전, 시후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덧붙였다.“그리고 월아, 소 선생님도 우리 사람이야. 무슨 일이든 소 선생님께 털어놓고 도움을 받도록 해.” “네, 알겠어요.”사람들 앞에서의 시월은 언제나 순종적이고 단아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시월의 얼굴은 감출 수 없는 분노로 가득해졌다. “죽일 X! 그 X이 뭔데 나랑 같이 소씨 가문을 관리한다는 거야?” 심장후는 그런 시월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됐어, 우리 계획은 이미 반이나 성공했잖아. 이제 소씨 가문은 더 이상 힘을 쓰지 못할 거야. 이미 도마 위에 올라간 생선이나 다름없으니, 더 이상 발버둥칠 여력도 없을 거라고.” “그래도 분하단 말이야. 지금이야말로 소씨 가문을 접수하기 가장 좋은 기회인데...” “소시후도 너를 걱정해서 그러는 걸 거야. 네가 혼란에 휩싸일까 봐 두려운 거지. 여태 기다렸는데, 이제 와서 조급해할 거 없어. 조금만 진정해 봐.” 시월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다리를 꼬며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심장후는 서둘러 그녀에게 불을 붙여 주었다. 빨간 입술 사이로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시월의 얼굴은 어느새 차분함을 되찾았다. “소씨 가문의 인간들 따위는 두렵지 않아. 이제 남은 건 그 노친네 하나뿐이야. 그 인간만 죽으면 소씨 가문은 완전히 끝장날 거라고. 한 명은 팔 하나를 잃었고, 하나는 절름발이가 됐잖아? 이제 별거 아닌 잡것들만 남았어.”“하지만 그 노친네는 만만치 않은 상대잖아.” “그래봤자 그 노친네의 시대는 가고, 우리의 시대가 왔어. 늙은 데다가 병까지 든 노친네가 무슨 힘을 쓰겠어? 내가 불쏘시개 하나만 더 던지면, 불길은
시후도 맞장구쳤다.“역시 우리 월이가 생각이 깊구나.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야.” “왜요, 오빠?”“상대의 목표는 우리 부모님뿐만이 아니야. 우리는 연이어 위기에 처했고, 이제 남은 건 너 하나뿐이야. 그 사람은 널 가만두지 않을 거야. 월아, 앞으로는 외출할 때 늘 경호원을 대동하고, 출발 전에 차량도 철저히 점거해야 해. 그리고 당분간은 모든 공개 활동을 중단하도록 해.” 시월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큰오빠, 저는 우리 소씨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우리 가문은 대대로 이어져 왔고, 아빠도 많은 걸 바치셨잖아요. 아빠가 심혈을 기울인 모든 게 물거품이 되는 건 싫어요. 지금은 저만이 가문을 책임질 수 있는데, 저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복잡해질까 봐 걱정된다고요!”“네 마음은 잘 알겠어. 하지만 지금 상황은 결코 낙관적이지 않아. 월아, 넌 우리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야. 오빠들이 너를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잖아. 게다가 아버지도 떠나시기 전에 시간을 벌 수 있는 준비를 해두셨을 테니까, 당분간은 집에만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어디든 나가면 안 돼, 알겠지?” 시후가 시월의 어깨를 두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너 자신을 꼭 돌봐야 해. 오빠들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아.” “형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월이를 꼭 지킬 겁니다.” “그래.”시후가 고개를 돌려 심장후를 바라보았다.“장후야, 우리가 이 사건과 연관 있는 심세호라는 사람을 찾아냈는데, 혹시 심씨 가문의 사람일까?” 심장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형님께서 말씀하시는 심세호가 저희 할아버지의 사생아인지는 모르겠네요. 저희 아버지에게 큰아버지 이전에 사생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사람은 할아버지를 무대에서나 볼 수 있는 하찮은 술집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어요.”“하지만 그 술집 여자와 사생아 모두 우리 심씨 가문에서는 인정받지 못했죠. 제 아버지조차 그 사람과 왕래가 거의 없었으니, 우리 같은 후손들은 더 말할 것도 없죠.
지아는 새로 등장한 인물이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소시월과의 관계는 아주 가까워 보였다. 지아의 의문을 눈치챘는지, 시후가 차분히 설명했다.“심씨 가문의 장남, 심장후예요. 월이의 약혼자이기도 하죠.” ‘심씨 가문?’지아는 순간 이 세상이 참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돌고 돌아 같은 곳으로 되돌아온 셈이었으니 말이다. 도윤의 어머니인 심예지 역시 심씨 가문의 사람이었으나, 과거의 그녀는 사랑을 택하며 심씨 가문과의 인연을 끊었다. 그런 심씨 가문의 후계자가 소시월의 약혼녀라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자, 심장후가 자연스럽게 지아를 바라보았다. “이분은...?”시월이 눈물을 훔치며 소개했다.“내가 얘기했던 뛰어난 의술을 갖춘 소 선생님이셔. 우리 시하 오빠가 마음에 두고 있는 분이기도 하지.” 지아가 심장후의 손을 잡아끌며 지아 쪽으로 향했다.“소 선생님, 제 약혼자예요.” “안녕하세요.”지아가 무심한 듯 담담하게 인사했다. “소 선생님, 반갑습니다. 젊은 나이에 그렇게 뛰어난 의술을 가졌다니, 정말 존경스럽습니다.”지아는 고개를 끄덕일 뿐, 더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장후 역시 지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시후에게 걱정스러운 눈길을 돌렸다.“소 대표님께서는...” 지아의 눈빛이 경계심으로 살짝 굳어지자, 시월이 급히 설명했다.“미안해, 오빠, 내가 이야기했어. 장후 오빠랑 전화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바람에...” 시후는 이런 일을 외부에 알리고 싶지 않았지만, 시월과 장후의 사이를 알기에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원래 올해 두 가문이 결혼 문제를 상의할 계획이었으나, 지금 같은 상황에선 모든 것이 미뤄질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장후도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인 셈이니까.” 이미 온 사람을 돌려보낼 수도 없었으니, 시후는 애써 평정심을 유지했다.하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손끝은 마음속의 혼란을 드러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께서 타신 비행기가 폭발했어.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