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한대경이 일어났다.지아는 순간 화장실에 널어놓은 빨래가 떠오르면서 바로 달려가서 치우려고 했으나 문은 이미 닫겨 있었다.‘망했어! 분명 봤을 거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난리야!’ 지아는 거칠기 그지없는 한대경이라고 하더라도 남자 앞에서 자기 사적인 물건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화장실로 들어선 한대경은 문을 닫고 돌아서자 선반에 걸려 있는 흰색 레이스 속옷 세트를 보게 되었다.매끄러운 실크 소재에 옅은 레이스를 매치해 부드러움까지 더한 속옷이었다.처음으로 여자의 속옷을 보게 된 한대경이다.별거 아니지만, 머릿속에 순간 속옷 차림으로 서 있는 지아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다.그날 밤 지아의 옷을 잡아당겼을 때도 반쯤 나온 가슴을 봤었다.순간 한대경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몸에서도 즉각 반응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한대경은 바로 샤워기를 열어 찬물에 몸을 적셔 몸을 식혔다.지아의 작은 손이 온몸 여기저기를 마사지해 줄 때의 화면과 촉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죽을 것만 같았다.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지아는 오늘 따위 유난히 샤워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마침내 욕실에서 나온 한대경은 머리만 빼곡 내놓고 온몸을 이불 속에 꽁꽁 숨겨둔 지아를 보게 되었다.한대경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게 되었다.냉정하게 말하자면 지아의 얼굴은 10점 만점에서 5점 정도밖에 안 된다.차분한 이미지만 있을 뿐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조금 전 화장실에서 한 짓을 떠올리면서 한대경은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저런 여자한테 반응이 일어나다니!’지아는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대경을 보고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참다못해 손을 들어 흔들더니 해석하기 시작했다.“그...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화장실에 널어 둔 것뿐이야.”한대경의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지아의 팔이 소매 끝에서 살짝 드러났는데, 그 팔이 유난히 가늘고 하얗게 보였다. 그녀의 피부는
순간 지아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머릿속에는 갖은 해결책들이 번쩍이고 있었다.필사적으로 싸워봤자 승산은 얼마 있을까?설령 이 문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도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체포되지 않을까?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야단치고 싶은 심정이다.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걸 마치고 도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섣불리 움직였던 것이다.‘어떡하지?’지아는 옷 한 벌을 꽉 잡아당기고 말을 다듬어 보려고 했다.‘믿어줄까?’한대경은 문을 열자 그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지아를 보게 되었다.옷은 딱 마침 허벅지까지 중요한 그 부위를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매일 청바지를 입고 있던 지아의 두 다리가 모델 뺨칠 정도로 길고 하얗고 매끈할 줄은 몰랐다.검은 다리털로 뒤덮인 자신의 다리와 달리 발바닥까지 잡색이 없을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으니 한대경은 서서히 넋이 나갔다.그리고 지금 지아는 아무런 이너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순간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한대경은 침을 삼켰다.애매한 분위기와 더불어 야릇한 불꽃까지 방 안 곳곳에서 터지는 것만 같았다.지아는 마음속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며칠 전 한대경이 사람을 마구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지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애써 덤덤한 척하고 말했다.“바지가 아직 안 말라서 그러는데 바지 좀... 너도 없고 그래서 함부로 뒤진 거야... 미안...”이 핑계는 완벽하지만 그가 믿는지 안 믿는지 봐야 한다.한대경은 한 걸음씩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지아는 점점 더 죽을 것만 같아 애꿎은 옷만 꽉 잡고 있었다.어느새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한대경은 어둡기 그지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는데, 저승사자가 따로없었다.이윽고 코 앞까지 다가온 한대경에게서 숨막히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그때 한대경은 갑자기 지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지아는 이미 필사적으로 달려들려고 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두 손
한대경은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을 훑어보았다.정교하고 완벽한 쇄골이 한눈에 들어왔고 가슴의 윤곽까지 또렷하게 드러났다.지아는 그의 눈빛을 느끼고서 바로 밀어냈다.이윽고 재빠르게 침대에 뛰어올라 이불로 몸을 꽁꽁 가렸다.한대경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남아 있는 온기를 느꼈다.지아가 자기 손에서 빠져나간 것이 좀 허전하기도 했다.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지아를 보더니 한대경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그 느낌을 느끼게 되었다.한대경은 바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앞으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두 번 봐주지는 않을 거야.”그 말을 하고서 한대경은 서둘러 떠났고 지아는 정신이 나갔다고 욕했다.그가 정말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지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온몸의 힘도 풀렸다.한대경의 팬티가 자기 손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바로 던져버렸다.서랍장 문도 상자도 모두 열려 있었고 한대경은 모두 그대로 가만히 두고 나갔다.만약 그 반지가 정말 안에 있다면 이렇게 방심할 수 없을 것이다.가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일이 꽤 복잡해졌을 텐데 말이야.지아는 바지를 돌려주는 김에 상자를 다시 뒤져봤다.역시나 개인용품 말고는 중요한 게 없었다.지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역시나 쉬운 임무가 아니었어.”지아는 곧바로 머리를 빠르게 굴러보았는데, 반지가 아지트에도 없고 한대경에게도 없다면 혹시 떠나기 전에 그의 심복에게 맡긴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보아하니 이곳에서는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그뿐만 아니라 이제 곧 교전할 상황인데, 얼마나 더 머물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너무 오래 끌면 할아버지와 도윤이가 걱정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지금으로서는 전쟁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한대경와 같은 강한 성격으로 포기하는 것 불가능하니 도윤과 연락을 닿아 그쪽에서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도윤과 연락하려면 겹겹이 쌓인 포위를 뚫고 그를 찾아야 하
이미 발각된 지아는 그를 멀리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제발 그냥 가게 해줘.”“바보야, 앞으로 가면 A나라 구역인데 죽고 싶어?”도시 전체가 그들 양쪽의 세력에 의해 나뉘었던 것이었다.‘도윤이도 더 빨리 만나고 나한테는 좋은 상황이네.’지아는 마음을 먹더니 땅에서 돌 몇 개를 주었다.“미안해, 근데 나 꼭 가야 해!”이윽고 지아는 드론을 향해 돌을 던졌으며 드론을 조종하는 사람도 얼른 피할 수밖에 없었다.“더 던지면 너 확 죽여버린다!”지아는 몇 개나 던졌지만 모두 마치지 못했다.그때 손에 딱 한 개만 남아 있었는데, 실은 그 역시 연기였다.앞에 던진 돌은 모두 정체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고 마지막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이었다.지아는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힘껏 던졌다.“잘 있어라! 변태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이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꺼졌다.한대경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어디 감히!”“보스, 그냥 그대로 보내주시죠. 처음부터 이상한 여자인 것 같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도 그냥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적군에서 보낸 스파이일 수도 있고요...”“그럼, 앞으로 네가 치료해 줄래?”한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반드시 데리고 와!”“하지만...”지아는 곧 다음 드론이 자기의 위치를 찾으러 올 것이며, 어떤 드론은 사람을 직접 공격하고 폭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서둘러야 한다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살려주세요.”그때 한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지아는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소리에 따라 시선을 돌렸다.도시가 하도 크니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정상이다.하지만 시억이가 말했듯이 그깟 호의는 접어야 하는 게 맞았다.계속 걸음을 재촉하려고 하던 그때 여자의 소리는 더욱 허약하게 들려왔다.골목에 들어서자 배가 크고 온몸이 명품으로 도배된 여자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었다.산모인 것 같았고 바닥에 물자국이 있는 것을 보니 양수가 터진 것
지아는 힘겹게 소피아 왕비를 부축하고 떠났다소피아 왕비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몇 분마다 진통에 자궁이 압축되면서 점점 사색이 되고 말았다.같은 여자로서 지아는 이 느낌을 너무 잘 알고 있다.지난 두 번의 출산 모두 조산이었고, 아이가 빨리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정상적인 출산이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하지만 소피아 왕비 역시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최선을 다해 지아와 함께 떠나려 하고 있다.지아는 어느 한 폭발된 가게를 찾았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방에서 천 두 조각을 뜯어 일단 소피아 왕비 다리 밑에 깔았다.“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돌아올게요.”물자는 없지만 다행히 수원을 찾을 수 있었고 깨끗한 물을 받을 수 있었다.지아는 물을 끓이고 또다시 천을 찾아와서 깨끗하게 씻었다.“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지아는 가능한 한 뜨거운 물로 소피아 왕비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아이가 태어날 때 감염되지 않도록 노력했다.그리고 일부러 책상과 걸상을 찾아 문을 막고 씻은 천을 소피아 왕비의 입에 물려주었다.“소리 내면 안 돼요. 아니면 사람들이 쏠리게 될 거예요.”소피아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협조했다.지아는 때때로 손을 씻고 손가락 넣어 확인했다.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지아는 소피아 왕비에게 눈짓을 건내고 힘겹게 참아냈다.통증은 점점 더 강해졌고 아이가 곧 나올 것만 같았다.“자, 힘주세요! 심호흡하시고요!”온몸이 땀범벅이 된 소피아 왕비는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사색이 되어버린 얼굴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소피아 왕비.그렇다, 출산이라는 건 한번 죽다 살아나는 일이다.지아는 소피아 왕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는 한 두 분 다 안전할 겁니다.”소피아 왕비는 아파서 말도 못하고 입에 물고 있는 천만 더욱 꼭 물었다.지친 두 눈에는 지아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그리고 소피아 왕비는 자기도 모르게 지아의 손을
진환은 진봉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넌 얼른 가서 사람부터 찾아.”“형 조심해.”진봉은 걱정했지만, 그들에게 더 중요한 임무가 있어 몇 마디 당부하고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진령과 배신혁은 외나무다리에서 마난 원수와 같았다.둘 다 무기를 꺼내 들면서 이를 악물었다.“절대 살아서 가지 못할 거야!”“너야말로!”두 형제와 도윤의 병사는 여러 길로 나누어 성안을 샅샅이 뒤졌다.만약 소피아 왕비가 성안에서 죽는다면, 누구의 문제든 V국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원래 시국이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또 사고가 나면 정말 국제적인 혼전이 일어날 것이다.총성이 울리고 한대경은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갔다.그는 갑자기 시체 옆에 물이 있다는 점이 생각났다.어렸을 때 그는 빈민굴에서 여자가 출산하기 전에 양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그래! 양수 흔적만 따라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젠장! 이제서야 생각나다니!’그와 동시에 도윤도 그 시체와 그 옆에 있는 물을 발견했다.그는 몸을 웅크리고 만져보았는데, 양수라고 판단이 들었다.잠시 침묵하더니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아직 살아 계셔. 가자.”출산을 앞둔 임산부가 어떻게 건장한 남자를 해치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장한 남자가 죽었고 그녀는 살아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좋은 결과이다.성안에 1초만 더 있어도 위험하니 도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양수의 흔적을 따라 한 매점 밖에 도착했다.그는 문을 막고 있는 책상과 의자를 보게 되었다.‘분명히 누군가가 안에서 막은 거야.’누군가 아직 대피하지 않았더라도 큰길 옆에 있는 매점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단 한 가지 가능성은 소피아 왕비는 안에 있고 임산부 혼자서 이런 무거운 물건을 옮기기 어렵다.그녀 곁에는 분명 다른 사람이 있다!진실이 밝혀지고, 문득 그 시체 손에는 값비싼 팔찌가 쥐어져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소피아 왕비의 팔찌를 빼앗다가 뒤에서 습격당했고 누군가가 소피아를 구했으며 그들은 지금
도윤은 상대방의 의도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소피아 왕비를 납치하기 위해서라면 이곳으로 데려와 출산하기보다 가장 먼저 사람을 데리고 갔을 것이라고.따라서 상대방은 소피아 왕비를 돕는 목적이 더 강하다면서 어쩌면 자기와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윽고 도윤은 소피아 왕비의 가명을 부르기 시작했다.“푸리 안에 계십니까? 미샤엘에서 올 것입니다.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소피아 왕비는 감격스워 마지 못했고 지아 역시 그러했다.찾아가려던 도윤이가 자기 발로 직접 찾아왔으니 말이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해드리려고 왔습니다.”안에 있던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 책걸상을 치우기 시작했다.그가 다리를 들고 들어가자마자 한 여자가 달려들어 그의 가면을 벗기고 키스까지 했다.도윤은 막 밀어내려고 할 때 넋을 잃게 하는 향기를 맡게 되었다.‘꿈이 아니야!’그날 나무에 매달려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자기를 구해주고 붕대를 감아줬는데, 그때 이 향기를 맡았었다.깨어난 후 지아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지아가 아직 A시에 있다고 자신을 위로했었다.근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입술을 물고 있는 사람이 지아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겠는가...도윤은 지아를 잡아당기며 놀라면서도 기뻐해 마지못한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지아는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여기부터 막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게.”도윤이 입구를 틀어막자 지아는 계속 소피아 왕비를 위로해 주었다.“괜찮아요. 우리 편이에요.”도윤은 지아에게 다가가 등을 돌리고 말했다.“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지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미안해. 아직은 말할 수 없어. 한대경에게 접근해야 할 이유가 있어.”도윤의 등만 봐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로 차 있는지 알 수 있었다.“미쳤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알아. 사람 막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 근데 그 사
지아는 다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그 순간 도윤의 모든 주의력은 온통 지아와 한대경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라든 분쟁이든 더 이상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날 생각을 하게 되니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그게 관건이 아니잖아. 도윤아, 네가 날 좀 도와주면 안 돼? 반지 찾아서 꼭 돌아올게! 내 정체 절대 드러내지 않을 테니 제발 한 번만.”만약 다른 일로 지아가 이렇게 부탁을 했다면 도윤은 열 번이고 들어주었을 것이다.그러나 지아는 지금 한 남자의 존엄을 앞에 두고 부단히 간을 보고 있었다.적어도 도윤이가 생각하기엔 그러한 감정이었다.“안 돼. 더 이상 네가 위험해지는 꼴 볼 수 없어. 한대경은 그냥 미친놈이야! 눈에 뵈는 것 하나 없이 아무나 막 죽이는 놈이라고!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떠나. 널 미끼로 그런 짓 할 수 없어.”“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이야?”지아는 순간 말투가 차가워졌다.“이건 내가 하는 일이고 네가 지지할 수 없다면 우린 더 이상 함께 갈 필요도 없다고 봐.”그 말에 도윤은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지아야, 그 일로 나 협박하지 마.”“도윤아, 3년 전에 네가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 난 그 차디찬 복도에서 널 기다리면서 미셸한테 한 대 맞았었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모든 의료진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는데도 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미셸이 너한테 수혈해 주는 것만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미셸이 나한테 난 그냥 꽃병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너한테 폐만 끼친다고 왜 나 같은 인간이랑 네가 결혼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랬었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넌 안에서 수술을 받고 난 밖에서 그런 소리를 감당해야 했었어. 그 문이! 너랑 나 사이에 절대 넘어갈 수 없는 벽처럼 보였어. 우리가 아무리 다정하고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너랑 난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어. 네가 임무 수행하러 나갈 때마다 난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고, 시월은 왜인지 모르게 더욱 불편해졌다. 분명 이건 소씨 가문의 내부 문제인데도 시월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반면, 소상현은 시월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는데, 머릿속이 온통 패배의 쓰라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졌구나. 그동안 공들여 준비했는데도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단지 승자의 권리를 누리며 자신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려는 것이라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호와 소윤성이 현장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은 비교적 평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소상현과 생각이 달랐다.소임호가 설령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 어머니를 둔 이복형이었기에 굳이 소임호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형님, 괜찮으세요?”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부장경에게 눈길을 보냈다.“저분은...”소임호가 설명했다.“이분은 부장경 씨인데,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오늘 이렇게 모두를 부른 건 우리 소씨 가문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야.” 역시나 소임호는 뛰어난 장악력을 보여주었다.사람들은 모두 부장경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했지만, 소임호의 단호한 태도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하고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최근 소씨 가문엔 많은 일이 있었고, 명담이도 세상을 떠났어.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소상현이 냉소를 지으며 비웃었다.“이런 자리에서까지 거짓 연민을 보일 필요는 없어!” ‘명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상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소재호가 나섰다.“형님, 명담이 일은 큰형님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직도 저 인간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저 인간은 애초부터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 지금 부씨 가문 사람들까지 들이닥쳤잖아!!” 그제야 소재호와 소윤성은 소임호가 부씨
소상현은 소임호의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을 위해 소상현은 수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이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후회 안 해.”“그래, 그럼 시작하자꾸나.”주주총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한쪽에서 시월은 지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총회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번 일에 시월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단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었다. 최근 회사 내 지분 변동이 심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소영수가 보유했던 20%의 지분에 지나지 않았다. 소영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재산을 분배할 시간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소상현은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려 했다. 하지만 소임호는 손뼉을 가볍게 치며 변호사를 불렀고, 변호사는 밀봉된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소영수가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이 있었는데, 지분 양도서부터 가문의 재단, 부동산 분배까지 모든 내용이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심지어 회사의 20%의 지분이 소임호의 것이라 명시되어 있기도 했다. 소상현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우리 아버지는 울화로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남길 시간조차 없었어! 저 유언장은 가짜라고!” 하지만 소임호는 차분하게 말했다.“이 유언장은 아버지께서 반년 전에 미리 작성해 두신 거야. 믿지 못하겠다면 네 변호사에게 감정을 맡겨도 좋아. 서류 외에도 아버지의 영상, 음성, 그리고 친필 서명이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소지훈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호사에게 눈짓을 보냈고, 소지훈이 이끄는 변호사단의 수석 변호사가 나와 서류를 철저히 검토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짜입니다. 확실히 어르신께서 생전에 작성하신 유언장이 맞습니다.” 소상현의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소임호는 손짓하며 비서에게 부장경을 위한 차 한 잔을 내오게 했다. 소임호는 이미 자신의 출생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소임호와 부장경은 좌우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묘하게 닮아 있었는데, 비록 한 사람은 비즈니스계, 다른 한 사람은 군에 몸담고 있었지만, 미간에 드러나는 강인한 기개는 아주 비슷했다. 지아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유전자의 힘이란 정말 신기한 거구나.’ 어머니가 다른 데다가 함께 자라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묘한 동질감을 뿜어냈다. 반면,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등장한 순간부터 내내 안절부절못하더니, 부장경까지 나타나자 그 불안은 극에 달했다. 소상현의 얼굴엔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일 정도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났고, 그 어디에서도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에게 소씨 가문을 맡길 리 없었다. 소임호는 소상현의 불안한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둘째야, 정말 나랑 적대하며 회사를 차지할 작정이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바꾼다면, 과거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해줄게.”소임호의 눈에 소상현은 언제나 동생일 뿐이었다. ‘형으로써 동생을 지켜주는 건 당연지사야.’이는 소영수가 늘 소임호에게 했던 말이었다.“임호야, 상현이는 어리석고 자존심만 높아. 재호는 이쪽 일에 뜻이 없고, 윤성이는 정에 빠져 살지. 우리 소씨 가문을 짊어질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도 수고 좀 해다오.” 어머니도 생전에 늘 이렇게 말했다.“네가 형이잖아. 형은 동생들을 더 많이 이해해 줘야 해.”비록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소임호는 소영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떠돌던 나와 어머니의 삶을 끝내 주었고, 그 험난한 시절에 물질적 풍요를 떠나 안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어.’ 그뿐만 아니라 소영수는 마음 깊이 소임호를 돌봐주고 키워줬으며, 단 한 번도
소상현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아 소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말이다. 그래서 소지훈은 연예계로 진출했는데, 스타가 되면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 소임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소지훈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맥 하나 없는 상태에서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임호는 그런 소지훈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훌륭한 매니저를 은밀히 붙여 소지훈이 어떤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관행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게다가 소지훈이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어도, 그때마다 소임호가 뒤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지훈에게 맞춤형 성공 전략을 만들어 주었으며, 소지훈이 맡을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르기도 했다.그 결과, 소지훈은 단번에 톱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 없이 꾸준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상현 부자의 성공 뒤에는 늘 소임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상현 가족과 달리, 소영수의 셋째 아들인 소재호 일가는 예술을 사랑하며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소영수의 넷째 아들인 소윤성은 심예지와 파혼한 뒤 소씨 가문을 떠나 해외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즉, 이 집안은 소임호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었다!소영수가 소임호를 특별히 아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멋대로인 다른 아들들에 비해 소임호야말로 소씨 가문을 이끌 적임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임호가 소씨 가문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소상현은 소임호를 도울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장
어릴 때부터 소상현은 모든 면에서 소임호보다 못했고, 태어난 그날부터 소임호의 후광 아래 살았다. 소상현이 소임호를 향해 품은 원망과 분노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비즈니스계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소임호 대신 자신에게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 왔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소임호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상현의 마음은 크게 들떴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소임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신분만큼은 소임호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이곳에 나타나자, 소상현은 자랑스러웠던 신분마저 산산이 무너지는 듯했다.소상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은 전부 부장경과 소임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소상현 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장경은 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다른 식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장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특수한 신분인 탓에 직접 오시지 못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님의 동생입니다.”“아버지, 아버지...”소임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사실 소임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임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영수를 만난 뒤에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소영수는 소임호를 친아들처럼 다정히 대했다. 물론 소임호는 소영수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게다가 소영수는 친아들 이상으로 소임호를 아껴 주었기에, 소임호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부장경은 국내에서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씨 가문에 대한 몇몇 영상과 사진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부장경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비록 부장경도 소임호의 이복형제이지만, 부장경은 오래전부터 부남진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아들이나 딸을 남겨줬다면, 부남진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장경은 지난 삶을 미셸을 사랑하며 보냈지만, 미셸은 결국 가짜 여동생에 불과했다. 만약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난 형이 있다면, 부장경에게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을 것이었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비즈니스가 결합된다는 점에서 부씨 가문은 더 큰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아가 부남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부씨 가문은 이미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던 참이었다. 민연주 역시 그 여인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따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임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 민연주는 손익을 따져보았고, 무엇보다 부남진이 어렵게 찾은 아들을 반대해도 소용없겠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그래, 오히려 통 크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어.’부남진은 특수한 신분 탓에 떠날 수 없었기에, 대신 부장경이 부씨 가문을 대표해 소임호와 정식으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장경은 결단력 있는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걸어왔다. 회의실을 아주 넓었는데, 부장경과 그의 일행이 들어오자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전장을 휩쓸 듯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부장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근 소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지아조차 부씨 가문의 이야기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움츠렸고, 그들 중에는 한때 소임호의 뒤를 따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자, 그 사람들은 곧장 새로운 선택을 했다.본래 군자는 좋은 벗을 택하는 법이지 않은가? 소임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시후가 병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은 소상현 쪽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소임호가 죽음을 위장하고, 이렇게 난감한 시점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일명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고, 앞다투어 소임호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대표님,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대표님을 위해 기도드리며...”소임호가 차갑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빨리 극락에 가서 뼈도 남지 않길 바랐다고?” “허허, 여전히 유머러스하시네요.” “저희는 대표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대표님께서 부재중인 동안 회사가 이렇게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방금까지는 시후를 몰아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던 한 원로가, 소임호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소지훈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여긴 너 같은 애송이가 앉을 곳이 아니야! 어서 비켜, 대표님께서 오셨다고!”이 세상에서 진정한 힘은 실력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이 회사가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누구의 뿌리이자 삶의 전부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래 소임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을 훔치려 했지만, 고지에 닿기도 전에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역습을 해온 꼴이었다.상황을 지켜보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자연스레 소임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상현의 편에 서 있었으나, 소임호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소상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 상황에 소상현도 살짝 당황했
소상현과 소임호는 원래 이복형제였지만, 어린 시절의 소상현은 아버지에게서 아주 엄격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네 형의 반이라도 닮으렴.”“형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어리석니?” “이렇게 간단한 보고서도 이해 못 한다니, 네 형이라면...”소상현은 집안의 둘째였기에 형인 소임호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소임호의 빛나는 존재감 아래, 소상현은 얼마나 평범해 보였는지 모른다. 소상현은 이미 열심히 노력했지만 노력과 재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소임호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 위에 더해진 노력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즉, 소상현은 평생을 다 바쳐도 소임호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소임호는 소상현의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던 오늘,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이번 기회에 소상현은 당당히 소임호와 그의 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되찾을 참이었다. “시후야, 너도 똑똑한 사람이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네가 약간의 지분을 샀다고 해도, 우리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지분이 있어. 결국 너희는 ‘패배’했단 뜻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결국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살 텐데.” 시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은 옳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한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에요. 우리 몸에는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함께 살아오셨는데, 우리한테 상속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게다가 이 회사는 우리 아빠가 맨손으로 일궈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크게 성장한 회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니, 세상에 이렇게 구차한 일이 어디 있어요?” 소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더는 말싸움할 것도 없어요.” 소지훈은 손뼉을 치며 전문 변호사팀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 측의 변호사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이미 사람들을 보내 조사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도윤의 세력은 대부분 A국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섣불리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심세호는 이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계획을 세웠으니, 심세호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임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소임호가 보낸 사람들마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윤은 이틀 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체력이 바닥나 빗속에서 기절할뻔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시하가 냉담하게 말했다.“저러다 죽으면 더 좋겠어.” 시언도 맞장구쳤다.“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산다더니, 나쁜 놈은 천년이 가도 안 죽는구나.” 소임호는 그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당장 끌어내.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팠다.‘아무래도 가족들이 도윤 씨를 받아들이는 건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 같아.’ 지아는 진봉에게 도윤을 방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하라고 지시했다. 소씨 가문에서 도윤에 대해 가장 악의가 적은 사람은 시후였는데, 시후가 천천히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소시월이 자금을 다 모았어.” “그럼 이제 우리가 연극을 시작할 때네요.” 시월이 밤새 달려와 도착하자, 시후는 일부러 얼굴에 화장하고 아주 쇠약한 모습을 연출했다.“콜록콜록... 월아, 왔구나.” “오빠, 이틀 만에 상태가 왜 이렇게 악화된 거예요? 절대 쓰러지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월아. 오래된 병이라서 그래. 그나저나 돈은 다 모은 거야?” “네, 오빠, 지금 상황은 좀 어때요?”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재산을 지켜내려 하겠지만...” 시후는 일부러 기침을 몇 번 더 하며 말했다.“월아,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은 너한테 달렸어.” “오빠, 괜찮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시월은 겉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