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다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그 순간 도윤의 모든 주의력은 온통 지아와 한대경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라든 분쟁이든 더 이상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날 생각을 하게 되니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그게 관건이 아니잖아. 도윤아, 네가 날 좀 도와주면 안 돼? 반지 찾아서 꼭 돌아올게! 내 정체 절대 드러내지 않을 테니 제발 한 번만.”만약 다른 일로 지아가 이렇게 부탁을 했다면 도윤은 열 번이고 들어주었을 것이다.그러나 지아는 지금 한 남자의 존엄을 앞에 두고 부단히 간을 보고 있었다.적어도 도윤이가 생각하기엔 그러한 감정이었다.“안 돼. 더 이상 네가 위험해지는 꼴 볼 수 없어. 한대경은 그냥 미친놈이야! 눈에 뵈는 것 하나 없이 아무나 막 죽이는 놈이라고!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떠나. 널 미끼로 그런 짓 할 수 없어.”“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이야?”지아는 순간 말투가 차가워졌다.“이건 내가 하는 일이고 네가 지지할 수 없다면 우린 더 이상 함께 갈 필요도 없다고 봐.”그 말에 도윤은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지아야, 그 일로 나 협박하지 마.”“도윤아, 3년 전에 네가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 난 그 차디찬 복도에서 널 기다리면서 미셸한테 한 대 맞았었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모든 의료진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는데도 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미셸이 너한테 수혈해 주는 것만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미셸이 나한테 난 그냥 꽃병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너한테 폐만 끼친다고 왜 나 같은 인간이랑 네가 결혼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랬었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넌 안에서 수술을 받고 난 밖에서 그런 소리를 감당해야 했었어. 그 문이! 너랑 나 사이에 절대 넘어갈 수 없는 벽처럼 보였어. 우리가 아무리 다정하고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너랑 난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어. 네가 임무 수행하러 나갈 때마다 난
지아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일단 흙으로 땅에 흘린 양수부터 덮어버렸다.양수의 흔적은 마지막 갈림길에서 끊기고 말았다.한대경이 흔적을 찾아 달려왔을 때, 딱 그 갈림길에서 멈춰 서게 되었었다.눈살을 찌푸린 채 다른 단서를 찾아내려고 했으나 바로 그때 골목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권총을 손에 꼭 쥐고서 천천히 다가갔는데, 초점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쓰레기통 뒤에 숨어 있는 지아가 보였다.지아는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오지 마!”이윽고 지아는 한대경을 향해 돌을 매섭게 던졌는데, 그는 바로 깔끔하게 피해 갔다.그 동작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고 멋있었다.지아 곁으로 다가온 한대경은 지아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드디어 찾았다!”익숙한 목소리에 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너... 너!”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한대경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지아는 또다시 예전 그 모습대로 한대경의 어깨에 대롱대롱 걸려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이거 놔! 나 돌아가기 싫단 말이야!”“움직이지 마! 확 죽여버리기 전에!”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도윤은 주먹을 잡아당기고 말았다.이를 악물고 있는 도윤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지아를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그렇게 하게 된다면 지아에게 미움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한편, 소피아 왕비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차 한 대가 와서 소피아 왕비 모자를 데리고 갔다.도윤 역시 일단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한대경의 등에 얹혀 임시 거처로 돌아온 지아는 그가 확 던지는 바람에 그대로 정원에 있는 흙밭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다행히도 시멘트 땅이 아니라 고통은 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살이 찌푸려졌다.“어디 한 번 도망가 봐! 더해봐!”그때 한대경 곁에 있던 누군가가 방망이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방망이를 어깨에 얹고 있는 한대경의 모습은 건달이 따로 없었다.“내가 오늘 네
지아가 뭐라고 하든 한대경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더없이 터프한 모습으로 비행기까지 어깨고 메고 갔다.차가운 목소리로 협박까지 더하고 있는 한대경이다.“입 다물어! 확 던져버리기 전에!”“...”지아는 바로 입을 꾹 다물었다.비행기는 곧 이륙했고 지아는 아직 무슨 일인지 잘 모르나 도윤이가 성공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한대경은 무척 화가 나 있는 모습을 보였다.한 마디만 잘못해도 바로 터질 것처럼 시한폭탄처럼 말이다.이런 상황일수록 피하고 안전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한 지아였다.지아는 가능한 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얼굴을 무릎에 파묻고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했다.한대경은 그런 지아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멍투성이인 몸엔 흙까지 군데군데 묻어 있어서 낭패하기 그지없었다.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오자, 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이때 한대경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서 지아에게 걸쳐주었고 지아는 마침내 포근한 느낌을 받게 되었다.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 비행기는 곧 C국의 수도인 라카에 착륙하게 되었다.따스하고 눈 부신 햇살이 창문을 뚫고 들어오자 지아는 완전히 깨어나게 되었다.“여긴 어디야?”“라카.”한대경은 하룻밤 내내 화를 삼킨 덕분에 지금은 덤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왜 나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거야?”“여긴 내가 사는 곳이야.”딱 거기까지 설명하고 나서 비행기가 착륙하고 문이 열리자 더없이 화려한 환영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다행이도 기자들은 없었다.한대경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고 지아는 얼굴을 반쯤 외투에 숨긴 채 부랴부랴 차에 따라 올랐다.차는 그대로 총통부로 향했다.임시 은신처에 비하면 총통부는 그야말로 무릉도원이었다.백 년이나 되는 건물에 여러 가지 꽃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니 말이다.기후도 적절한 것이 적지 않은 수조들이 호숫가에서 여유롭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뿐만 아니라 드넓은 풀밭에 물을 주면서 춤을 추고 있는 분수도 보였다.한대경과 같은 상남자가 이런 곳에서 생활하고 있
듣기에 거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지아는 순간 뒤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강제로 이곳까지 끌려와서 무척이나 달갑지 않아하는 지아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한대경은 지아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안으로 데리고 왔다.“혼자 걸을 수 있다고! 왜 매번 이러는 거야?”한대경은 지아를 자기 침실까지 끌고 왔다.침실은 자그마치 200평 정도 되고 무척이나 넓었다.하얀색으로 된 카펫에 리모델링 전체가 궁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침실 벽에는 유명한 화가 손에서 나온 그림도 수없이 걸려 있었다.한대경의 성격으로 본다면 절대 그의 손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다.따라서 아마 그 전의 대통령이 남겨 놓은 걸작으로 보였다.한대경은 지아의 손을 풀어주면서 말했다.“어때? 여기 엄청나지? 네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렇게 지내면 돼. 넌 내 병만 고쳐주기만 하면 그게 뭐든 다 된다는 말이야.”“알았어.”지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샤워하고 올 테니 그동안 약 준비해 놓아.”이번 일을 겪은 뒤로 한대경은 지아에 대한 믿음이 좀 강해졌다.이곳은 그의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경계하는 모습이 없었으니 말이다.지아도 이곳은 처음이라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행여나 감시 카메라와 같은 무엇인가 있다면 목이 날아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렸다.어렸을 때부터 소계훈은 지아를 유명한 화가한테서 그림 그리기를 배우게 했었다.따라서 그림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지아는 그동안 책에서 봐왔던 그림을 지금 한대경의 침실에서 보고 있었다.게다가 모두 원작이었다.지아는 입이 떡벌어지고 말았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그림 모으는데 환장했던 분이셨네...’한대경은 나오자마자 흥분에 겨워 마지 못하는 지아를 보게 되었다.그림 하나하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어떤 스타일로 연필을 휘둘렀는지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 지아를 말이다.“뭘 그렇게까지 들여다보는 거야?”지아의 두 눈에는 빛이 반짝였
지아는 불과 며칠 만에 한대경의 뺨을 무려 두 번이나 때렸다.뺨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든 한대경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이윽고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지아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소수연! 너 죽고 싶어?”“그러게 왜 함부로 쳐다보고 난리야!”“네가 그렇게 입었잖아!”순간 지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의 셔츠로 몸을 꽁꽁 가렸다.겁도 없이 다시 한대경의 머리를 툭 치고서 말했다.“누워. 또다시 함부로 쳐다보면 그땐 내가 여기저기 침을 막 찌를 거야!”“그러기만 해 봐! 널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거든.”분위기는 그렇게 약간 어색해졌고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한대경도 서서히 정신이 맑아졌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의문만 들었다.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다고 했는데 유부녀한테 마음이 쏠리고 있으니 말이다.침묵 속에서 지아는 모든 치료를 마쳤고 한대경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천천히 목을 돌렸다.“그전까지는 이틀에 한 번씩 머리가 아팠었는데, 네가 침을 놔준 뒤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어.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이 그럭저럭 있는 것 같아.”지아는 그런 한대경을 흘겨보면서 말했다.“내일 처방전도 내줄 테니 약도 같이 먹도록 해. 두 달 정도 먹다 보면 너 완쾌할 수 있을 거야. 그땐 약속한 대로 나 보내줘야 할 거야.”“그래. 그땐 보낼 거야.”한대경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그럼, 그만 내 방으로 갈게.”지아는 바로 몸을 돌려 그의 침실에서 나왔다.지아가 가고 난 뒤 한대경은 한참이나 큰 침대에서 뒤척였다.요즘 지아 몸에서 나는 약 냄새를 맡으면서 잠들어서인지 갑자기 그 냄새가 사라지니 잠에 들 수 없었다.반면 지아는 바로 잠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확 차버리는 것이 느껴졌다.한밤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오직 한대경 밖에 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지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미리 준비한 덕분에 가면을 벗고 있지 않았었다.게슴츠레 눈을 비비면서 잔뜩 화난 얼굴로 한개경을 바라보았다.“왜 또!”한
어느새 넋까지 잃게 된 지아는 머릿속에 온통 도윤뿐이었다.그러던 그때 한대경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지막이 물었다.“왜 그래? 그런 옷 좋아해?”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놀란 토끼처럼 그를 바라보았다.한대경은 살짝 차가운 손가락으로 지아의 턱을 탁 올렸다.이제 막 씻고 나온 그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와 온 이가 뿜어져 나왔다.“얼굴은 평범한데... 눈은 꽤 맑네?”갑작스러운 ‘칭찬’에 지아는 당황하기 그지없었다.가면을 쓰고 있는 지아는 얼굴 전체를 가렸지만 눈만은 절대 가릴 수 없었다.크고 맑고 예쁜 두 눈에 촘촘한 눈초리까지 더해지자 평범한 얼굴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하도 가까운 거리라 지아는 다소 긴장한 나머지 그를 밀쳐내려고 했는데, 작은 손은 그대로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에 닿게 되었다.탄탄한 근육을 느끼기도 전에 한대경은 지아의 허리를 감싸안고 그녀를 가두었다.자기와 옷장 사이에 꼭.“뭐 하는 짓이야!”지아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언짢은 얼굴로 한대경을 노려보았다.어젯밤에 코피까지 흘리던 남자가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걱정도 되었다.한대경은 지아의 호통에 정신을 차리고 풀어주었다.그렇다, 그는 지아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었다.자기도 모르게 아주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지아는 힘껏 한대경을 밀쳐냈고 서서히 침착을 되찾았다.“오늘 어디 가는데? 정장으로 줘? 아니면 뭐?”“정장.”한대경은 지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아무리 여자가 그리워도 유부녀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한대경은 지아와 안전거리를 유지하였고 지아는 곧 정장 한 벌을 건네주었다.“그럼, 내 방으로 그만 가볼게.”한대경은 지아를 말리지 않았다.요즘 들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모두 30년 동안 모태 솔로로 살아온 탓이라고 생각했다.한대경이 침실에서 나서자마자 배신혁이 곧바로 따라왔다.“보스, 오늘 제 형님께서 귀국하십니다.”“그래.”“A 국에서 종전 계약서를 보내왔는데
한대경은 군사 전문가를 긴급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회의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고 브레이크 단이 모여서 아무리 모의연습을 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어떻게든 지는 것으로 말이다.지금 C 국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고 그건 바로 A 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성을 향해 진공을 그만하지 않으면 양국에서 C 국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할 것이다.한대경은 이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며칠 동안 한대경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았고 그동안 지아는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한대경의 사업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반지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한대경은 마치 지아를 잊어버린 것처럼 총통부 도우미들에게 부탁하고서 돌아오지도 않았다.임무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고 지아는 그대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지아는 별장 2층의 파이프를 따라서 몰래 내려와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했었다.그러나 바로 그때 뒤에서 한 남자의 엄한 소리가 들려왔다.“거기 누구야!”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지아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서 2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다행히도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무엇보다도 풀밭이 아니라 누군가의 품속으로 쏙 떨어지게 되었다.그렇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한대경이었다.며칠 만에 본 한대경의 얼굴은 무척이나 초췌했고 힘들어 보였다.“또 도망가려고?”“그냥 바람 좀 쐬려고 나온 거야.”지아는 황급히 설명하였는데, 주위에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원수, 아시는 분입니까? 무척이나 괴상하게 움직이던데요?”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소리를 친 사람이다.지아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이때 배신혁이 나서서 설명했다.“형, 내가 전에 말했던 신의셔.”“신의?”배이혁은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형
지아는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혼수를 내었다.그렇게 하는 이유도 단지 한대경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함이었다.앞으로 더 이상 주동적으로 기회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임무는 무한으로 연장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그... 행여나 내가 시름이 놓지 않으면 사람 붙여도 돼.”“그런 거 없어. 나 죽이고 싶으면 사혈로 그 침을 꽂으면 한 방에 끝나는 거잖아.”한대경은 덤덤하게 덧붙였다.“그냥 네가 하는 거로 하자.”이윽고 웃고 있는 지아의 얼굴을 보고서 다시 물었다.“직접 해주고 싶었어?”“당연하지! 넌 내 환자잖아. 네가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면 난 하루 더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거잖아.”그 한마디에 한대경은 천국에서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무척이나 반가워하던 지아의 모습에 설렜는데, 실은 자기를 떠나기 위함이었다니 아팠다.“왜? 남자가 그리워?”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과 헤어질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실은 떨어진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을 듣고 나니 보고 싶기도 했다.“응, 남편이랑 아이 다 보고 싶어.”그 말을 내뱉고 있는 지아의 모습은 부드럽고 행복해 보였다.수줍어하는 빛도 드러내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한대경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이윽고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도 스며 올랐다.“궁금하네. 그 남자 어떤 남자인지.”지아는 한대경에게 잘 보이려고 묻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했어.”“돈은 없겠네?”한대경이 다소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지아는 묵인하면서 덧붙였다.“응, 근데 우리 엄청 사랑해. 아이도 넷이나 있어.”“뭐? 요즘 같은 세월에 넷이나 낳았다고? 애국가가 따로 없네.”한대경은 콧방귀를 뀌면서 자기도 모르게 지아의 허리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그날 뒤로 지아는 온몸을 꽁꽁 감싸면서 지내고 있었다.오늘 지아는 츄레이닝을 세트로 입었는데 섹시와는 거리가 한없이 멀었다.아이를 넷이나 낳은 여자처럼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