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불과 며칠 만에 한대경의 뺨을 무려 두 번이나 때렸다.뺨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든 한대경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이윽고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지아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소수연! 너 죽고 싶어?”“그러게 왜 함부로 쳐다보고 난리야!”“네가 그렇게 입었잖아!”순간 지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의 셔츠로 몸을 꽁꽁 가렸다.겁도 없이 다시 한대경의 머리를 툭 치고서 말했다.“누워. 또다시 함부로 쳐다보면 그땐 내가 여기저기 침을 막 찌를 거야!”“그러기만 해 봐! 널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거든.”분위기는 그렇게 약간 어색해졌고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한대경도 서서히 정신이 맑아졌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의문만 들었다.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다고 했는데 유부녀한테 마음이 쏠리고 있으니 말이다.침묵 속에서 지아는 모든 치료를 마쳤고 한대경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천천히 목을 돌렸다.“그전까지는 이틀에 한 번씩 머리가 아팠었는데, 네가 침을 놔준 뒤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어.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이 그럭저럭 있는 것 같아.”지아는 그런 한대경을 흘겨보면서 말했다.“내일 처방전도 내줄 테니 약도 같이 먹도록 해. 두 달 정도 먹다 보면 너 완쾌할 수 있을 거야. 그땐 약속한 대로 나 보내줘야 할 거야.”“그래. 그땐 보낼 거야.”한대경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그럼, 그만 내 방으로 갈게.”지아는 바로 몸을 돌려 그의 침실에서 나왔다.지아가 가고 난 뒤 한대경은 한참이나 큰 침대에서 뒤척였다.요즘 지아 몸에서 나는 약 냄새를 맡으면서 잠들어서인지 갑자기 그 냄새가 사라지니 잠에 들 수 없었다.반면 지아는 바로 잠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확 차버리는 것이 느껴졌다.한밤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오직 한대경 밖에 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지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미리 준비한 덕분에 가면을 벗고 있지 않았었다.게슴츠레 눈을 비비면서 잔뜩 화난 얼굴로 한개경을 바라보았다.“왜 또!”한
어느새 넋까지 잃게 된 지아는 머릿속에 온통 도윤뿐이었다.그러던 그때 한대경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지막이 물었다.“왜 그래? 그런 옷 좋아해?”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놀란 토끼처럼 그를 바라보았다.한대경은 살짝 차가운 손가락으로 지아의 턱을 탁 올렸다.이제 막 씻고 나온 그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와 온 이가 뿜어져 나왔다.“얼굴은 평범한데... 눈은 꽤 맑네?”갑작스러운 ‘칭찬’에 지아는 당황하기 그지없었다.가면을 쓰고 있는 지아는 얼굴 전체를 가렸지만 눈만은 절대 가릴 수 없었다.크고 맑고 예쁜 두 눈에 촘촘한 눈초리까지 더해지자 평범한 얼굴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하도 가까운 거리라 지아는 다소 긴장한 나머지 그를 밀쳐내려고 했는데, 작은 손은 그대로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에 닿게 되었다.탄탄한 근육을 느끼기도 전에 한대경은 지아의 허리를 감싸안고 그녀를 가두었다.자기와 옷장 사이에 꼭.“뭐 하는 짓이야!”지아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언짢은 얼굴로 한대경을 노려보았다.어젯밤에 코피까지 흘리던 남자가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걱정도 되었다.한대경은 지아의 호통에 정신을 차리고 풀어주었다.그렇다, 그는 지아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었다.자기도 모르게 아주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지아는 힘껏 한대경을 밀쳐냈고 서서히 침착을 되찾았다.“오늘 어디 가는데? 정장으로 줘? 아니면 뭐?”“정장.”한대경은 지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아무리 여자가 그리워도 유부녀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한대경은 지아와 안전거리를 유지하였고 지아는 곧 정장 한 벌을 건네주었다.“그럼, 내 방으로 그만 가볼게.”한대경은 지아를 말리지 않았다.요즘 들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모두 30년 동안 모태 솔로로 살아온 탓이라고 생각했다.한대경이 침실에서 나서자마자 배신혁이 곧바로 따라왔다.“보스, 오늘 제 형님께서 귀국하십니다.”“그래.”“A 국에서 종전 계약서를 보내왔는데
한대경은 군사 전문가를 긴급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회의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고 브레이크 단이 모여서 아무리 모의연습을 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어떻게든 지는 것으로 말이다.지금 C 국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고 그건 바로 A 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성을 향해 진공을 그만하지 않으면 양국에서 C 국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할 것이다.한대경은 이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며칠 동안 한대경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았고 그동안 지아는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한대경의 사업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반지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한대경은 마치 지아를 잊어버린 것처럼 총통부 도우미들에게 부탁하고서 돌아오지도 않았다.임무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고 지아는 그대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지아는 별장 2층의 파이프를 따라서 몰래 내려와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했었다.그러나 바로 그때 뒤에서 한 남자의 엄한 소리가 들려왔다.“거기 누구야!”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지아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서 2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다행히도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무엇보다도 풀밭이 아니라 누군가의 품속으로 쏙 떨어지게 되었다.그렇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한대경이었다.며칠 만에 본 한대경의 얼굴은 무척이나 초췌했고 힘들어 보였다.“또 도망가려고?”“그냥 바람 좀 쐬려고 나온 거야.”지아는 황급히 설명하였는데, 주위에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원수, 아시는 분입니까? 무척이나 괴상하게 움직이던데요?”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소리를 친 사람이다.지아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이때 배신혁이 나서서 설명했다.“형, 내가 전에 말했던 신의셔.”“신의?”배이혁은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형
지아는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혼수를 내었다.그렇게 하는 이유도 단지 한대경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함이었다.앞으로 더 이상 주동적으로 기회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임무는 무한으로 연장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그... 행여나 내가 시름이 놓지 않으면 사람 붙여도 돼.”“그런 거 없어. 나 죽이고 싶으면 사혈로 그 침을 꽂으면 한 방에 끝나는 거잖아.”한대경은 덤덤하게 덧붙였다.“그냥 네가 하는 거로 하자.”이윽고 웃고 있는 지아의 얼굴을 보고서 다시 물었다.“직접 해주고 싶었어?”“당연하지! 넌 내 환자잖아. 네가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면 난 하루 더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거잖아.”그 한마디에 한대경은 천국에서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무척이나 반가워하던 지아의 모습에 설렜는데, 실은 자기를 떠나기 위함이었다니 아팠다.“왜? 남자가 그리워?”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과 헤어질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실은 떨어진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을 듣고 나니 보고 싶기도 했다.“응, 남편이랑 아이 다 보고 싶어.”그 말을 내뱉고 있는 지아의 모습은 부드럽고 행복해 보였다.수줍어하는 빛도 드러내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한대경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이윽고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도 스며 올랐다.“궁금하네. 그 남자 어떤 남자인지.”지아는 한대경에게 잘 보이려고 묻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했어.”“돈은 없겠네?”한대경이 다소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지아는 묵인하면서 덧붙였다.“응, 근데 우리 엄청 사랑해. 아이도 넷이나 있어.”“뭐? 요즘 같은 세월에 넷이나 낳았다고? 애국가가 따로 없네.”한대경은 콧방귀를 뀌면서 자기도 모르게 지아의 허리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그날 뒤로 지아는 온몸을 꽁꽁 감싸면서 지내고 있었다.오늘 지아는 츄레이닝을 세트로 입었는데 섹시와는 거리가 한없이 멀었다.아이를 넷이나 낳은 여자처럼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
넋을 잃고 있는 지아를 향해 한대경은 손가락을 ‘탁’하고 튕겼다.“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아무런 핑계로 둘러대기 시작했다.“네 신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 아주 높은 분이시라고.”“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사람이 너한테 원수라고 하는 거 들었어. 그리고 마성을 제 집 드나듯이 드나들고 전용기에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네가 일반인일 리가 있겠어?”지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바보인 척 콘셉트를 유지하기엔 상대가 이미 너무 많은 걸 보여줬으니 말이다.덤덤한 지아의 모습을 보고서 한대경이 물었다.“내가 누군지 알고도 무섭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무서워하던데?”“그전까지는 무서웠어. 근데 날 죽이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살려주지 않았겠지. 그래서 이제는 무섭지 않아. 하물며 네가 완쾌할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치료해주면 보상도 준다고 했었잖아.”‘돈 때문이었어?”한대경은 콧방귀를 뀌었다.“돈이 그렇게도 좋아?”“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돈으로 우리 아이들 편하게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네 병은 내가 꼭 치려해주마!”앞뒤 태도가 확 달라진 지아는 그럴만한 이유를 둘러댔다.한대경에게 있어서 지아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워킹맘일 뿐이다.“참, 마사지도 해줘? 힘들지 않았어?”한대경은 그런 지아를 흘겨보았다.“갑자기? 전에는 대꾸도 하지 않더니.”지아는 난감한 듯이 한참을 뜸 들이다가 말했다.“그... 결산할 때 조금만 더 챙겨주면 안 돼?”“돈독에 빠졌네 아주!”한대경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이미 마사지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네가 하는 거 봐서.”한대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정신을 몰두하고 있던 지아는 한대경 팔의 상처가 이미 괜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외투를 벗겨주었다.한대경은 침대 정중앙에 누워있었고 지아는 옷을 벗겨주기 위해 신발까지 벗고 침대로 올라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이
정신을 차린 한대경은 지아를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목소리까지 한껏 내리깔았다.“뭐 하는 짓이야?”지아는 억울하다는 모습으로 침을 줍고서 말했다.“침이 네 손 옆에 떨어졌어.”한대경은 그제야 지아를 풀어주었다.“미안. 조건 반사로 그런 거야. 너 괜찮아?”지아 목의 선명한 손자국을 보고서 한대경은 자책하기 시작했다.‘괜찮을 리가 없을 건데...’“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앞으로 조심할 테니 얼른 쉬어.”지아는 침을 침구로 넣으면서 말했다.침실 문을 닫는 순간 지아는 그제야 땀이 뚝뚝 떨어지게 되었다.‘죽을 뻔했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반지에 대한 경계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만 둘 지아도 아니고 내일부터 직접 한대경에게 약을 끓어줄 생각이었다.약에 수면제를 적절하게 넣으면 그가 푹 자는 틈을 타서 손을 쓰면 되니 말이다.지금 지아가 생각해야하는건 반지를 갖고 난 뒤 어떻게 빠져나가는 것이다.며칠 뒤면 A국에서 담당자가 올 것인데, 지아는 그중에 무조건 도윤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윽고 계획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다.거의 잠에 들었을 때 누군가가 지아 침실로 들어왔는데, 볼 것도 없이 한대경이었다.지아 몸에서 나는 향기만 맡으면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따라서 지아는 한대경을 상대하지 않고 침대 밑에서 자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한대경은 여기저기 뒹굴면서 잠에 들려고 했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잠에 들 수 없었다.방이 하도 커서 지아의 냄새가 잘 맡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아주 열심히 맡아야만 은은하게 맡을 수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한대경을 더욱 미치게 했다.지아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깨어났다.“뭐 하는 거야?”한대경이 지아를 품속으로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자, 네 냄새 맡아야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이거 놔! 난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병만 치료해 준다고 했지...”그러자 한대경은
“계속 볼 거야!”지아는 베개로 한대경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그 소리에 한대경은 바로 눈길을 돌렸다.“미안! 네가 내 품 안에 있다는 거 깜빡하고 있었어.”“꺼져”한대경은 침대에서 바로 일어났고 안색도 원래대로 바로 돌아왔다.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어젯밤에 잘 잤어.”“꺼져!”지아는 화가 나서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라 반지를 바로 가지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리고 한대경은 오전 내내 멍하니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보스, 손에 꿀이라도 있습니까? 오전 내내 손가락만 보고 있었던 거 아십니까?”배신혁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이때 한대경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모두 떨쳐버리고 말했다.“별거 아니야. 여자나 좀 데리고 와.”“여자요? 보스, 마침내 생각이 트이신 거네요!”“남자는 원래 결혼부터 하고 그 뒤에 사업을 시작하는 거예요. 혼기도 이제 가득 차셨고 가정부터 꾸리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결혼은 무슨! 그냥 급한 대로 해결할 만한 여자만 있으면 돼.”“네?”여자를 물불처럼 보던 사람이 스스로 여자를 찾다니 마냥 이상하기만 한 배신혁은 멍하기만 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대로 순순히 할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어둠이 내려앉자, 여자들이 줄줄이 한대경의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다.여자들은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입었고 별의별 스타일이 다 있었다.한대경이 들어오자 여자들은 하나같이 수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배신혁이 찾아온 여자는 생김새도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한대경은 그중의 한 명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이리와.”“옷 벗겨.”한대경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앞으로 불러왔다.청순하게 생긴 그 여자는 한대경의 부름에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자들은 눈에 불꽃이 날 정도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네.”한대경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까지 벌리고 있었다.건방지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얼굴은 반칙일 정도로 잘생기고 늠름했다
배이혁은 안색이 차갑다 못해 파래질 정도였다.“아무튼 방심하지 마.”“알았어.”배이혁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덧붙였다.“원수 요즘 기분 별로일 거야. 아프지 않게 네가 옆에서 잘 보살펴 드려.”“알았어.”담배 한 대도 채 피우지 못했는데 마지막 여자마저 쫓겨나왔다.배이혁은 담배를 끄고 배신혁과 눈을 맞추었다.“벌써 끝난 거야?”두 사람은 부하에게 모든 여자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이윽고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옷깃이 활짝 열려 있는 한대경의 가슴팍에는 립스틱 자국이 가득했다.하지만 얼굴은 더없이 어두워 보였다.“대체 어디서 데리고 온 여자들이야! 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아무런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징그러웠으니 말이다.“보스, 도대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저희도 쉽게 찾아드릴 수 있어요.”“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은 사람으로!”순간 배신혁은 어이가 없었다.“혹시 의술도 훌륭해야 하는 겁니까?”“있으면 더 좋고.”지아의 이름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배신혁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말했다.“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걔는 어디에 있어?”“오늘 하루 국립 병원에 있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찾게 되면 나 불러.”한대경은 그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가버렸다.배이혁은 어깨를 들썩이면서 말했다.“내가 뭐라고 했어? 그냥 찾지 마. 전 세계를 뒤진다고 하더라도 너 절대 못 찾아. 원수가 원하는 여자는 그 의사거든.”오랫동안 한대경의 곁을 지킨 배신혁과 배이혁은 지금껏 이런 한대경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지아가 처음이었고 일단 한대경의 마음에 든 이상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근데 소수연 선생님 이미 결혼했잖아.”“아직 이성을 붙잡고 있는 거지. 대체품이라도 찾아달라고 하는 거잖아. 이성을 잃게 되면 소수연 선생님 괜찮을 거 같아? 집안 파탄 내고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겠어?”다른 사람이 할 수 없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고, 시월은 왜인지 모르게 더욱 불편해졌다. 분명 이건 소씨 가문의 내부 문제인데도 시월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반면, 소상현은 시월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는데, 머릿속이 온통 패배의 쓰라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졌구나. 그동안 공들여 준비했는데도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단지 승자의 권리를 누리며 자신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려는 것이라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호와 소윤성이 현장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은 비교적 평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소상현과 생각이 달랐다.소임호가 설령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 어머니를 둔 이복형이었기에 굳이 소임호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형님, 괜찮으세요?”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부장경에게 눈길을 보냈다.“저분은...”소임호가 설명했다.“이분은 부장경 씨인데,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오늘 이렇게 모두를 부른 건 우리 소씨 가문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야.” 역시나 소임호는 뛰어난 장악력을 보여주었다.사람들은 모두 부장경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했지만, 소임호의 단호한 태도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하고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최근 소씨 가문엔 많은 일이 있었고, 명담이도 세상을 떠났어.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소상현이 냉소를 지으며 비웃었다.“이런 자리에서까지 거짓 연민을 보일 필요는 없어!” ‘명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상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소재호가 나섰다.“형님, 명담이 일은 큰형님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직도 저 인간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저 인간은 애초부터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 지금 부씨 가문 사람들까지 들이닥쳤잖아!!” 그제야 소재호와 소윤성은 소임호가 부씨
소상현은 소임호의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을 위해 소상현은 수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이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후회 안 해.”“그래, 그럼 시작하자꾸나.”주주총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한쪽에서 시월은 지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총회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번 일에 시월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단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었다. 최근 회사 내 지분 변동이 심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소영수가 보유했던 20%의 지분에 지나지 않았다. 소영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재산을 분배할 시간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소상현은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려 했다. 하지만 소임호는 손뼉을 가볍게 치며 변호사를 불렀고, 변호사는 밀봉된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소영수가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이 있었는데, 지분 양도서부터 가문의 재단, 부동산 분배까지 모든 내용이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심지어 회사의 20%의 지분이 소임호의 것이라 명시되어 있기도 했다. 소상현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우리 아버지는 울화로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남길 시간조차 없었어! 저 유언장은 가짜라고!” 하지만 소임호는 차분하게 말했다.“이 유언장은 아버지께서 반년 전에 미리 작성해 두신 거야. 믿지 못하겠다면 네 변호사에게 감정을 맡겨도 좋아. 서류 외에도 아버지의 영상, 음성, 그리고 친필 서명이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소지훈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호사에게 눈짓을 보냈고, 소지훈이 이끄는 변호사단의 수석 변호사가 나와 서류를 철저히 검토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짜입니다. 확실히 어르신께서 생전에 작성하신 유언장이 맞습니다.” 소상현의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소임호는 손짓하며 비서에게 부장경을 위한 차 한 잔을 내오게 했다. 소임호는 이미 자신의 출생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소임호와 부장경은 좌우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묘하게 닮아 있었는데, 비록 한 사람은 비즈니스계, 다른 한 사람은 군에 몸담고 있었지만, 미간에 드러나는 강인한 기개는 아주 비슷했다. 지아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유전자의 힘이란 정말 신기한 거구나.’ 어머니가 다른 데다가 함께 자라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묘한 동질감을 뿜어냈다. 반면,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등장한 순간부터 내내 안절부절못하더니, 부장경까지 나타나자 그 불안은 극에 달했다. 소상현의 얼굴엔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일 정도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났고, 그 어디에서도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에게 소씨 가문을 맡길 리 없었다. 소임호는 소상현의 불안한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둘째야, 정말 나랑 적대하며 회사를 차지할 작정이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바꾼다면, 과거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해줄게.”소임호의 눈에 소상현은 언제나 동생일 뿐이었다. ‘형으로써 동생을 지켜주는 건 당연지사야.’이는 소영수가 늘 소임호에게 했던 말이었다.“임호야, 상현이는 어리석고 자존심만 높아. 재호는 이쪽 일에 뜻이 없고, 윤성이는 정에 빠져 살지. 우리 소씨 가문을 짊어질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도 수고 좀 해다오.” 어머니도 생전에 늘 이렇게 말했다.“네가 형이잖아. 형은 동생들을 더 많이 이해해 줘야 해.”비록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소임호는 소영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떠돌던 나와 어머니의 삶을 끝내 주었고, 그 험난한 시절에 물질적 풍요를 떠나 안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어.’ 그뿐만 아니라 소영수는 마음 깊이 소임호를 돌봐주고 키워줬으며, 단 한 번도
소상현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아 소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말이다. 그래서 소지훈은 연예계로 진출했는데, 스타가 되면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 소임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소지훈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맥 하나 없는 상태에서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임호는 그런 소지훈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훌륭한 매니저를 은밀히 붙여 소지훈이 어떤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관행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게다가 소지훈이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어도, 그때마다 소임호가 뒤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지훈에게 맞춤형 성공 전략을 만들어 주었으며, 소지훈이 맡을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르기도 했다.그 결과, 소지훈은 단번에 톱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 없이 꾸준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상현 부자의 성공 뒤에는 늘 소임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상현 가족과 달리, 소영수의 셋째 아들인 소재호 일가는 예술을 사랑하며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소영수의 넷째 아들인 소윤성은 심예지와 파혼한 뒤 소씨 가문을 떠나 해외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즉, 이 집안은 소임호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었다!소영수가 소임호를 특별히 아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멋대로인 다른 아들들에 비해 소임호야말로 소씨 가문을 이끌 적임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임호가 소씨 가문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소상현은 소임호를 도울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장
어릴 때부터 소상현은 모든 면에서 소임호보다 못했고, 태어난 그날부터 소임호의 후광 아래 살았다. 소상현이 소임호를 향해 품은 원망과 분노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비즈니스계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소임호 대신 자신에게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 왔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소임호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상현의 마음은 크게 들떴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소임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신분만큼은 소임호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이곳에 나타나자, 소상현은 자랑스러웠던 신분마저 산산이 무너지는 듯했다.소상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은 전부 부장경과 소임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소상현 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장경은 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다른 식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장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특수한 신분인 탓에 직접 오시지 못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님의 동생입니다.”“아버지, 아버지...”소임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사실 소임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임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영수를 만난 뒤에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소영수는 소임호를 친아들처럼 다정히 대했다. 물론 소임호는 소영수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게다가 소영수는 친아들 이상으로 소임호를 아껴 주었기에, 소임호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부장경은 국내에서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씨 가문에 대한 몇몇 영상과 사진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부장경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비록 부장경도 소임호의 이복형제이지만, 부장경은 오래전부터 부남진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아들이나 딸을 남겨줬다면, 부남진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장경은 지난 삶을 미셸을 사랑하며 보냈지만, 미셸은 결국 가짜 여동생에 불과했다. 만약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난 형이 있다면, 부장경에게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을 것이었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비즈니스가 결합된다는 점에서 부씨 가문은 더 큰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아가 부남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부씨 가문은 이미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던 참이었다. 민연주 역시 그 여인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따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임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 민연주는 손익을 따져보았고, 무엇보다 부남진이 어렵게 찾은 아들을 반대해도 소용없겠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그래, 오히려 통 크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어.’부남진은 특수한 신분 탓에 떠날 수 없었기에, 대신 부장경이 부씨 가문을 대표해 소임호와 정식으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장경은 결단력 있는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걸어왔다. 회의실을 아주 넓었는데, 부장경과 그의 일행이 들어오자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전장을 휩쓸 듯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부장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근 소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지아조차 부씨 가문의 이야기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움츠렸고, 그들 중에는 한때 소임호의 뒤를 따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자, 그 사람들은 곧장 새로운 선택을 했다.본래 군자는 좋은 벗을 택하는 법이지 않은가? 소임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시후가 병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은 소상현 쪽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소임호가 죽음을 위장하고, 이렇게 난감한 시점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일명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고, 앞다투어 소임호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대표님,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대표님을 위해 기도드리며...”소임호가 차갑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빨리 극락에 가서 뼈도 남지 않길 바랐다고?” “허허, 여전히 유머러스하시네요.” “저희는 대표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대표님께서 부재중인 동안 회사가 이렇게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방금까지는 시후를 몰아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던 한 원로가, 소임호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소지훈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여긴 너 같은 애송이가 앉을 곳이 아니야! 어서 비켜, 대표님께서 오셨다고!”이 세상에서 진정한 힘은 실력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이 회사가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누구의 뿌리이자 삶의 전부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래 소임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을 훔치려 했지만, 고지에 닿기도 전에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역습을 해온 꼴이었다.상황을 지켜보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자연스레 소임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상현의 편에 서 있었으나, 소임호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소상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 상황에 소상현도 살짝 당황했
소상현과 소임호는 원래 이복형제였지만, 어린 시절의 소상현은 아버지에게서 아주 엄격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네 형의 반이라도 닮으렴.”“형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어리석니?” “이렇게 간단한 보고서도 이해 못 한다니, 네 형이라면...”소상현은 집안의 둘째였기에 형인 소임호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소임호의 빛나는 존재감 아래, 소상현은 얼마나 평범해 보였는지 모른다. 소상현은 이미 열심히 노력했지만 노력과 재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소임호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 위에 더해진 노력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즉, 소상현은 평생을 다 바쳐도 소임호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소임호는 소상현의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던 오늘,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이번 기회에 소상현은 당당히 소임호와 그의 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되찾을 참이었다. “시후야, 너도 똑똑한 사람이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네가 약간의 지분을 샀다고 해도, 우리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지분이 있어. 결국 너희는 ‘패배’했단 뜻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결국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살 텐데.” 시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은 옳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한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에요. 우리 몸에는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함께 살아오셨는데, 우리한테 상속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게다가 이 회사는 우리 아빠가 맨손으로 일궈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크게 성장한 회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니, 세상에 이렇게 구차한 일이 어디 있어요?” 소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더는 말싸움할 것도 없어요.” 소지훈은 손뼉을 치며 전문 변호사팀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 측의 변호사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이미 사람들을 보내 조사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도윤의 세력은 대부분 A국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섣불리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심세호는 이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계획을 세웠으니, 심세호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임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소임호가 보낸 사람들마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윤은 이틀 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체력이 바닥나 빗속에서 기절할뻔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시하가 냉담하게 말했다.“저러다 죽으면 더 좋겠어.” 시언도 맞장구쳤다.“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산다더니, 나쁜 놈은 천년이 가도 안 죽는구나.” 소임호는 그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당장 끌어내.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팠다.‘아무래도 가족들이 도윤 씨를 받아들이는 건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 같아.’ 지아는 진봉에게 도윤을 방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하라고 지시했다. 소씨 가문에서 도윤에 대해 가장 악의가 적은 사람은 시후였는데, 시후가 천천히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소시월이 자금을 다 모았어.” “그럼 이제 우리가 연극을 시작할 때네요.” 시월이 밤새 달려와 도착하자, 시후는 일부러 얼굴에 화장하고 아주 쇠약한 모습을 연출했다.“콜록콜록... 월아, 왔구나.” “오빠, 이틀 만에 상태가 왜 이렇게 악화된 거예요? 절대 쓰러지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월아. 오래된 병이라서 그래. 그나저나 돈은 다 모은 거야?” “네, 오빠, 지금 상황은 좀 어때요?”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재산을 지켜내려 하겠지만...” 시후는 일부러 기침을 몇 번 더 하며 말했다.“월아,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은 너한테 달렸어.” “오빠, 괜찮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시월은 겉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