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대경은 군사 전문가를 긴급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회의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고 브레이크 단이 모여서 아무리 모의연습을 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어떻게든 지는 것으로 말이다.지금 C 국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고 그건 바로 A 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성을 향해 진공을 그만하지 않으면 양국에서 C 국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할 것이다.한대경은 이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며칠 동안 한대경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았고 그동안 지아는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한대경의 사업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반지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한대경은 마치 지아를 잊어버린 것처럼 총통부 도우미들에게 부탁하고서 돌아오지도 않았다.임무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고 지아는 그대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지아는 별장 2층의 파이프를 따라서 몰래 내려와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했었다.그러나 바로 그때 뒤에서 한 남자의 엄한 소리가 들려왔다.“거기 누구야!”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지아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서 2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다행히도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무엇보다도 풀밭이 아니라 누군가의 품속으로 쏙 떨어지게 되었다.그렇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한대경이었다.며칠 만에 본 한대경의 얼굴은 무척이나 초췌했고 힘들어 보였다.“또 도망가려고?”“그냥 바람 좀 쐬려고 나온 거야.”지아는 황급히 설명하였는데, 주위에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원수, 아시는 분입니까? 무척이나 괴상하게 움직이던데요?”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소리를 친 사람이다.지아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이때 배신혁이 나서서 설명했다.“형, 내가 전에 말했던 신의셔.”“신의?”배이혁은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형
지아는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혼수를 내었다.그렇게 하는 이유도 단지 한대경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함이었다.앞으로 더 이상 주동적으로 기회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임무는 무한으로 연장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그... 행여나 내가 시름이 놓지 않으면 사람 붙여도 돼.”“그런 거 없어. 나 죽이고 싶으면 사혈로 그 침을 꽂으면 한 방에 끝나는 거잖아.”한대경은 덤덤하게 덧붙였다.“그냥 네가 하는 거로 하자.”이윽고 웃고 있는 지아의 얼굴을 보고서 다시 물었다.“직접 해주고 싶었어?”“당연하지! 넌 내 환자잖아. 네가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면 난 하루 더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거잖아.”그 한마디에 한대경은 천국에서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무척이나 반가워하던 지아의 모습에 설렜는데, 실은 자기를 떠나기 위함이었다니 아팠다.“왜? 남자가 그리워?”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과 헤어질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실은 떨어진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을 듣고 나니 보고 싶기도 했다.“응, 남편이랑 아이 다 보고 싶어.”그 말을 내뱉고 있는 지아의 모습은 부드럽고 행복해 보였다.수줍어하는 빛도 드러내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한대경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이윽고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도 스며 올랐다.“궁금하네. 그 남자 어떤 남자인지.”지아는 한대경에게 잘 보이려고 묻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했어.”“돈은 없겠네?”한대경이 다소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지아는 묵인하면서 덧붙였다.“응, 근데 우리 엄청 사랑해. 아이도 넷이나 있어.”“뭐? 요즘 같은 세월에 넷이나 낳았다고? 애국가가 따로 없네.”한대경은 콧방귀를 뀌면서 자기도 모르게 지아의 허리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그날 뒤로 지아는 온몸을 꽁꽁 감싸면서 지내고 있었다.오늘 지아는 츄레이닝을 세트로 입었는데 섹시와는 거리가 한없이 멀었다.아이를 넷이나 낳은 여자처럼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
넋을 잃고 있는 지아를 향해 한대경은 손가락을 ‘탁’하고 튕겼다.“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아무런 핑계로 둘러대기 시작했다.“네 신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 아주 높은 분이시라고.”“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사람이 너한테 원수라고 하는 거 들었어. 그리고 마성을 제 집 드나듯이 드나들고 전용기에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네가 일반인일 리가 있겠어?”지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바보인 척 콘셉트를 유지하기엔 상대가 이미 너무 많은 걸 보여줬으니 말이다.덤덤한 지아의 모습을 보고서 한대경이 물었다.“내가 누군지 알고도 무섭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무서워하던데?”“그전까지는 무서웠어. 근데 날 죽이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살려주지 않았겠지. 그래서 이제는 무섭지 않아. 하물며 네가 완쾌할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치료해주면 보상도 준다고 했었잖아.”‘돈 때문이었어?”한대경은 콧방귀를 뀌었다.“돈이 그렇게도 좋아?”“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돈으로 우리 아이들 편하게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네 병은 내가 꼭 치려해주마!”앞뒤 태도가 확 달라진 지아는 그럴만한 이유를 둘러댔다.한대경에게 있어서 지아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워킹맘일 뿐이다.“참, 마사지도 해줘? 힘들지 않았어?”한대경은 그런 지아를 흘겨보았다.“갑자기? 전에는 대꾸도 하지 않더니.”지아는 난감한 듯이 한참을 뜸 들이다가 말했다.“그... 결산할 때 조금만 더 챙겨주면 안 돼?”“돈독에 빠졌네 아주!”한대경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이미 마사지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네가 하는 거 봐서.”한대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정신을 몰두하고 있던 지아는 한대경 팔의 상처가 이미 괜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외투를 벗겨주었다.한대경은 침대 정중앙에 누워있었고 지아는 옷을 벗겨주기 위해 신발까지 벗고 침대로 올라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이
정신을 차린 한대경은 지아를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목소리까지 한껏 내리깔았다.“뭐 하는 짓이야?”지아는 억울하다는 모습으로 침을 줍고서 말했다.“침이 네 손 옆에 떨어졌어.”한대경은 그제야 지아를 풀어주었다.“미안. 조건 반사로 그런 거야. 너 괜찮아?”지아 목의 선명한 손자국을 보고서 한대경은 자책하기 시작했다.‘괜찮을 리가 없을 건데...’“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앞으로 조심할 테니 얼른 쉬어.”지아는 침을 침구로 넣으면서 말했다.침실 문을 닫는 순간 지아는 그제야 땀이 뚝뚝 떨어지게 되었다.‘죽을 뻔했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반지에 대한 경계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만 둘 지아도 아니고 내일부터 직접 한대경에게 약을 끓어줄 생각이었다.약에 수면제를 적절하게 넣으면 그가 푹 자는 틈을 타서 손을 쓰면 되니 말이다.지금 지아가 생각해야하는건 반지를 갖고 난 뒤 어떻게 빠져나가는 것이다.며칠 뒤면 A국에서 담당자가 올 것인데, 지아는 그중에 무조건 도윤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윽고 계획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다.거의 잠에 들었을 때 누군가가 지아 침실로 들어왔는데, 볼 것도 없이 한대경이었다.지아 몸에서 나는 향기만 맡으면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따라서 지아는 한대경을 상대하지 않고 침대 밑에서 자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한대경은 여기저기 뒹굴면서 잠에 들려고 했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잠에 들 수 없었다.방이 하도 커서 지아의 냄새가 잘 맡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아주 열심히 맡아야만 은은하게 맡을 수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한대경을 더욱 미치게 했다.지아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깨어났다.“뭐 하는 거야?”한대경이 지아를 품속으로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자, 네 냄새 맡아야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이거 놔! 난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병만 치료해 준다고 했지...”그러자 한대경은
“계속 볼 거야!”지아는 베개로 한대경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그 소리에 한대경은 바로 눈길을 돌렸다.“미안! 네가 내 품 안에 있다는 거 깜빡하고 있었어.”“꺼져”한대경은 침대에서 바로 일어났고 안색도 원래대로 바로 돌아왔다.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어젯밤에 잘 잤어.”“꺼져!”지아는 화가 나서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라 반지를 바로 가지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리고 한대경은 오전 내내 멍하니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보스, 손에 꿀이라도 있습니까? 오전 내내 손가락만 보고 있었던 거 아십니까?”배신혁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이때 한대경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모두 떨쳐버리고 말했다.“별거 아니야. 여자나 좀 데리고 와.”“여자요? 보스, 마침내 생각이 트이신 거네요!”“남자는 원래 결혼부터 하고 그 뒤에 사업을 시작하는 거예요. 혼기도 이제 가득 차셨고 가정부터 꾸리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결혼은 무슨! 그냥 급한 대로 해결할 만한 여자만 있으면 돼.”“네?”여자를 물불처럼 보던 사람이 스스로 여자를 찾다니 마냥 이상하기만 한 배신혁은 멍하기만 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대로 순순히 할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어둠이 내려앉자, 여자들이 줄줄이 한대경의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다.여자들은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입었고 별의별 스타일이 다 있었다.한대경이 들어오자 여자들은 하나같이 수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배신혁이 찾아온 여자는 생김새도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한대경은 그중의 한 명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이리와.”“옷 벗겨.”한대경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앞으로 불러왔다.청순하게 생긴 그 여자는 한대경의 부름에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자들은 눈에 불꽃이 날 정도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네.”한대경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까지 벌리고 있었다.건방지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얼굴은 반칙일 정도로 잘생기고 늠름했다
배이혁은 안색이 차갑다 못해 파래질 정도였다.“아무튼 방심하지 마.”“알았어.”배이혁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덧붙였다.“원수 요즘 기분 별로일 거야. 아프지 않게 네가 옆에서 잘 보살펴 드려.”“알았어.”담배 한 대도 채 피우지 못했는데 마지막 여자마저 쫓겨나왔다.배이혁은 담배를 끄고 배신혁과 눈을 맞추었다.“벌써 끝난 거야?”두 사람은 부하에게 모든 여자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이윽고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옷깃이 활짝 열려 있는 한대경의 가슴팍에는 립스틱 자국이 가득했다.하지만 얼굴은 더없이 어두워 보였다.“대체 어디서 데리고 온 여자들이야! 제대로 찾아온 거 맞아?”아무런 느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징그러웠으니 말이다.“보스, 도대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세요? 정확히 말씀해 주시면 저희도 쉽게 찾아드릴 수 있어요.”“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은 사람으로!”순간 배신혁은 어이가 없었다.“혹시 의술도 훌륭해야 하는 겁니까?”“있으면 더 좋고.”지아의 이름만 나오지 않았을 뿐이었다.배신혁은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말했다.“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걔는 어디에 있어?”“오늘 하루 국립 병원에 있었을 겁니다. 지금도 그곳에 있을 겁니다.”“찾게 되면 나 불러.”한대경은 그 말 한마디만 남겨두고 가버렸다.배이혁은 어깨를 들썩이면서 말했다.“내가 뭐라고 했어? 그냥 찾지 마. 전 세계를 뒤진다고 하더라도 너 절대 못 찾아. 원수가 원하는 여자는 그 의사거든.”오랫동안 한대경의 곁을 지킨 배신혁과 배이혁은 지금껏 이런 한대경의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지아가 처음이었고 일단 한대경의 마음에 든 이상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근데 소수연 선생님 이미 결혼했잖아.”“아직 이성을 붙잡고 있는 거지. 대체품이라도 찾아달라고 하는 거잖아. 이성을 잃게 되면 소수연 선생님 괜찮을 거 같아? 집안 파탄 내고 자기 것으로 만들지 않겠어?”다른 사람이 할 수 없
아침에 있었던 일로 지아는 무의식적으로 한대경의 품에서 튀어나와 거리를 두었다.“나한테서 떨어져.”그 행동에 한대경은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나한테 무슨 전염병이라도 있어?”지아는 코를 쥐고 핑계를 대며 안전거리를 유지했다.“향수냄새! 너무 싫어!”한대경은 자신의 셔츠에 묻은 립스틱 자국을 내려다보았다.방금 너무 급하게 나온 바람에 옷 갈아입는 것을 깜빡하고 말았던 것이었다.하지만 지아는 오히려 기뻐했다.욕구불만을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기 시작하면 자기한테 그런 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라고.이윽고 지아는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며 비아냥거렸다.“적당히 풀어주는 건 괜찮지만 너무 화려하게 놀지 마. 과도한 욕구로 인해 신장 결핍과 만성 전립선염에 걸릴 수도 있다는 건 상식이고.”그 말에 한대경은 부서질 듯 이를 악물며 물었다.“욕구가 과하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지금 네 몸에 있는 립스틱 자국을 보면 세 가지 브랜드에 세 가지 색상이나 있어. 그럼, 넌 오늘 적어도 3명 이상의 여자를 만났다는 거야. 근데 한 번으로 해결할 수 있겠어?”그런 이야기를 부끄러움도 없이 하는 여자를 보며 한대경은 눈살을 찌푸렸다.“어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어?”“내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나한테 아이가 넷이라고! 그리고 나 의사야. 그쪽으로는 너보다 내가 아는 게 더 많아. 하물며 정상적인 현상이고 적당히 하면 스트레스도 풀고 신체에도 좋은 일인데 부끄러워할 게 뭐가 있다고 그래?”지아는 말하면서 계속 약재를 가지려고 했다.약재마다 정확하게 파악하고 지아가 잡았다 하면 정확한 양이었다.바로 그때 한대경은 갑자기 지아의 뒤에 서서 차갑게 입을 열었다.“그럼 넌? 어떤 동작을 선호하는 편이야?”갑작스러운 19금 대화에 지아는 멈칫거렸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누구와 하느냐가 중요해.”지아는 마지막 약재까지 손에 넣고서 먼지를 탈탈 털면 모든 약재를 다른 사람에게 넘겼다.“하룻밤 샘물에 담그는 것 잊지
눈 깜짝할 사이에 그 모든 동작을 마쳤다.지아가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한대경의 몸 아래쪽에 누워 있었다.지아를 바라보는 한대경의 눈빛은 너무 노골적이고 욕망이 샅샅이 드러나 있었다.‘쟤 왜 저래? 이미 하고 온 거 아니야?’지아는 마음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입을 열려고 애썼다.“왜 그래?”손을 움직였지만 한대경은 조금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심지어 손에 힘을 더하면서 반지끝은 지아의 부드러운 피부를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내가 얼마든지 부르는 대로 줄 테니 하나만 들어줘.”“뭔데?”지아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직감이 팍 들었다.한대경은 입술을 핥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나랑 하룻밤만 자자.”“꿈도 꾸지 마!”지아는 바로 그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미친놈이!”하지만 그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고 또다시 ‘감금’되고 말았다.“화내지 마.” 한대경은 안색이 무척이나 어두웠다.“오늘 여자 만난 건 사실이야.”“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아무리 집적거려도 징그럽기만 하고 느낌이 없었어. 어렸을 때 자극받은 적이 있어서 여자한테 손도 대지 못했었는데... 넌...”한대경은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덧붙였다“넌 달라... 너한테 난 반응이 생겼거든. 그래서 치료하는 김에 이것도 같이 치료해줘. 의사잖아!”가면 아래에 있는 지아의 얼굴은 거의 익어갈 지경이었다.아무리 아이를 4명이나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충격적이었다.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병을 치료해 준 적이 없는 지아이다.“안 돼! 내 전공과 맞지도 않고 그쪽 주치의를 찾아가.”“너만큼 프로페셔널한 의사는 없어. 네가 가장 적합해. 나한테는...”한대경은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몇 번이나 반응이 일어났었다.그 말인즉슨, 꼭 지아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모처럼 욕망을 불러일으킨 지아인데, 이대로 흘려보내기에 무척이나 아쉬웠고 더는 나타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지아는 한대경을 자격하고 싶지 않아 가능한 한 침착한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