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깜짝할 사이에 그 모든 동작을 마쳤다.지아가 정신이 들었을 때 그녀는 이미 한대경의 몸 아래쪽에 누워 있었다.지아를 바라보는 한대경의 눈빛은 너무 노골적이고 욕망이 샅샅이 드러나 있었다.‘쟤 왜 저래? 이미 하고 온 거 아니야?’지아는 마음을 추스르며 침착하게 입을 열려고 애썼다.“왜 그래?”손을 움직였지만 한대경은 조금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다.심지어 손에 힘을 더하면서 반지끝은 지아의 부드러운 피부를 파고 들어갈 것만 같았다.“내가 얼마든지 부르는 대로 줄 테니 하나만 들어줘.”“뭔데?”지아는 좋은 일이 아니라고 직감이 팍 들었다.한대경은 입술을 핥더니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속삭였다.“나랑 하룻밤만 자자.”“꿈도 꾸지 마!”지아는 바로 그의 얼굴을 후려치려고 했다.“미친놈이!”하지만 그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고 또다시 ‘감금’되고 말았다.“화내지 마.” 한대경은 안색이 무척이나 어두웠다.“오늘 여자 만난 건 사실이야.”“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아무리 집적거려도 징그럽기만 하고 느낌이 없었어. 어렸을 때 자극받은 적이 있어서 여자한테 손도 대지 못했었는데... 넌...”한대경은 제법 진지한 모습으로 덧붙였다“넌 달라... 너한테 난 반응이 생겼거든. 그래서 치료하는 김에 이것도 같이 치료해줘. 의사잖아!”가면 아래에 있는 지아의 얼굴은 거의 익어갈 지경이었다.아무리 아이를 4명이나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건 좀 충격적이었다.게다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병을 치료해 준 적이 없는 지아이다.“안 돼! 내 전공과 맞지도 않고 그쪽 주치의를 찾아가.”“너만큼 프로페셔널한 의사는 없어. 네가 가장 적합해. 나한테는...”한대경은 그녀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몇 번이나 반응이 일어났었다.그 말인즉슨, 꼭 지아여야만 한다는 것이다.모처럼 욕망을 불러일으킨 지아인데, 이대로 흘려보내기에 무척이나 아쉬웠고 더는 나타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지아는 한대경을 자격하고 싶지 않아 가능한 한 침착한
지아는 일이 이미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하지만 한대경이 막무가내로 나가게 둘 지아도 아니었다.한대경의 손길이 피부에 닿기 직전, 지아는 무릎으로 남자의 아랫배를 내리쳤다.이윽고 지아는 그가 아등바등하는 동안 바로 차버리고서 침대에서 도망쳐 내려왔다.급한 대로 와인 한 병을 집어 들었다.지금 지아는 이 와인이 언제 생산되는지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즉시 와인을 탁자에 세게 두드렸고 와인은 땅에 흘러내렸고 지아는 유리 파편을 손에 들고서 자기 목에 겨누었다.“오지 마!”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지아의 성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던 한대경이다.“진정해.”“다가가지 않을 테니 그거 내려놔.”지아는 열이 잔뜩 오른 남자가 하는 말을 믿지 않았다.차가운 목소리로 지아가 경고했다.“나한테 손끝 하나라도 댄다면 네 앞에서 죽어버릴 거야!”“너한테 아이가 있는데, 나 때문에 죽기야 하겠어?”“그런다고 한들 난 절대 너한테 이렇게 당해도 되는 사람이 아니야. 난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앞으로 나 자극하지 마. 이보다 더한 것도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지아는 말을 뱉고 난 뒤 미친 듯이 방에서 뛰어나왔다.그때 마침 정면으로 오고 있던 배신혁을 마주치게 되었다.배신혁은 지아가 손에 유리 파편을 들고서 미친 듯이 달려 나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지아에 대한 배신혁의 태도는 그럭저럭 공손한 편이었다.“선생님, 괜찮으세요?”지아는 그를 매섭게 째려보았다.“보스 좀 잘 챙기시죠!”말을 마치고서 지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버렸다.어리둥절한 채로 배이혁에게 물었다.“형, 선생님 왜 저러셔?”그때 침실 입구에 상반신을 드러내고 머리에 침을 꽂은 남자가 나타났다.“억지로 하려다가 뒤죽박죽됐나 보네.”“설마...”지퍼가 잔뜩 내려간 채로 도망 나온 지아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두 사람은 서서히 확신하게 되었다.“보스, 대체 뭘 하신 겁니까? 지나가던 개까지 죽일 셈
어젯밤 지아의 반응이 너무 격했는지 한대경은 하루 종일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지아는 국립병원에서 의료진들에게 침법을 가르쳐 주었다.날이 어두워지자 한대경은 지아가 침을 놓아주러 오기를 기다리면서 어떻게 사과할지생각했다.발소리가 들려오는 것을 듣고, 이유 없이 심장이 조여왔다.그는 등 돌리고 손을 등 뒤에 지고 서 있었지만, 긴장함을 숨기려고 흉악한 말투로 말했다.“어젯밤 일은 내가 잘못했어, 오해하지 마, 너 좋아해서 그런 거 아니야. 난 그냥 유부녀를 좋아하는 것뿐이야.”지아를 안심 시켜주려고, 그는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더럽힐 계획까지 세웠다.유부녀를 좋아한다는 건 그냥 핑계일 뿐이었다.지아의 대답을 듣지 못하자 한대경은 귀밑이 벌겋게 달아올랐고 계속 흉악하게 소리쳤다.“그러니까 안심해. 다시는 너한테 손대지 않을 테니! 전에 약속했던 것도 그대로 지킬게.”“왜 말이 없어? 내가 다 사과했는데, 또 뭐를 원하는데...”그는 화가 나서 돌아섰지만, 주름진 공효신의 얼굴과 억지로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 보였다.‘젠장! 이런 개망신을 하다니!’“원장님이 여긴 왜...”공효신은 느릿느릿하게 걸어오면서 입을 열었다.“원수, 제가 귀가 멀어서 원수의 말은 제대로 정말로 듣지 못했습니다.”한대경의 얼굴은 어두워졌다.“무슨 이이에요?”공효신은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일일히 내려놓으며 말했다. “침을 놓아드리려고 온 겁니다. 수연 씨한테 이미 배우고 왔으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한대경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이내 기다리고 있던 지아가 이런 방법을 쓸 줄은 몰랐다면서.“너 같은 늙은이한테 그딴 걸 받고 싶지 않아! 꺼져!”지금까지 다친 한대경을 모두 공효신이 직접 봐줬었다.공효신의 마음속에서 한대경은 그의 손자와 다를 바 없었다.그는 한대경의 성격을 잘 알고 있으므로 단 한 번도 따지지 않았다.“네, 어차피 국립 병원 의료진 전체가 할 줄 아는 일이니 원하시는 대로 의사 보내겠습니다.”“...”한대경은 어쩔 수 없어져 두
“잠이 안 올 때 수면제를 처방해 주려고.”지아는 마음속으로 꿍꿍이를 세우고 있었다.“네가 가서 준비해봐. 3일 후에 움직이면 여기에 홍인을 놓고 임무가 취소되면 목련 한 송이를 놓을게.”“좋은 소식 기다릴게.”두 사람은 잠시 만나고 난 뒤 자리를 떴고 지아는 방으로 돌아가 쉬었다.한대경이 왔는지 자고는 있는지 전혀 모른 채.이튿날 그녀는 평상시대로 국립병원으로 갔다.요 며칠 동안 지아는 모든 사람들과 잘 지냈고 다들 ‘수연 씨’에서 그를 ‘수연 선생님’이라고 존칭하기도 했다.한대경은 틈틈이 들렸다가 몸을 기울이며 의술을 가르치는 지아를 보았었다.인내심 있게 두 가지의 비슷한 약재를 비교하면서 ‘강의’하는 지아를 우러러보면 젊은 의사들이 한 둘이가 아니었다.왜 외모가 출중하지도 않은 여자를 좋아할까? 아마도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박력과 부러움을 사는 의술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지아가 침을 놓을 때마다 몸에 필터가 씌워진 것처럼 왠지 모르게 한대경을 설레게 하는 것만 같았다.지아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못 본 척하고 몸을 돌렸다.여자의 직감으로 한대경은 자기한테 더 이상 욕구가 아니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단순한 욕망이라면 아무리 발버둥 치다고 하더라고 어떻게든 침대로 끌고 갔을 것이다.하지만 요 며칠 동안 많이 조용해진거 보니 그녀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이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정이다.최악인 상황이기도 했다. 지아는 누군가에게 신세를 지는 것을 제일 싫어하는 성격이니 말이다.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성을 잃게 만들고 앞으로 반지를 가져가는 일은 더욱 번거로워질 것이다.하지만 지아는 A국 사람이 미리 온 것을 생각지 못했고 국립병원까지 바빠졌다.그들은 언제든지 돌발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지아가 약에 수면제를 넣기 시작했을 때 공효신은 약간 어리둥절했다.“갑자기 왜 약을 더 넣는 거예요?”“원수께서 요 며칠 잠을 잘 못 주무셨다고 해서요. 수면제를 넣어 효과를 보고 안 좋으면 양을 늘리려
지아는 다른 이유를 찾아서 도윤의 소식을 알아보려고 했는데, 뜻밖에도 먼저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요즘 지아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아의 의술이 자신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을 알기에 공효신은 그대로 그녀에게 맡겼다.상대가 워낙 존귀한 사람이라 혹시라도 차질이 생길까 봐 작은 소리로 물었다. “어때요?”지아는 도윤의 맥박을 만지고 있던 손을 떼고 덤덤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아요. 과로와 저혈당으로 갑자기 쓰러진 거예요.”모두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오늘 온 사람은 A국의 정해신침 같은 인물이다. 항상 얼굴에 마스크를 쓰고 좀처럼 남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말이다.만약 그가 여기에서 사고가 난다면, 그것은 곧 새드 엔딩을 의미한다.지아는 침을 꺼내 도윤의 팔맥 교회혈, 양측 내관혈, 도랑혈 등 13개 혈에 침을 놓고 자극을 주자 도윤은 유유히 깨어났다.연기 대상을 줘야 할 정도였다.“무슨 일이야...”“보스, 방금 기절하셨는데 다행히 이분이 한방에 구해주셨어요. 이분 꽤 젊어 보이는데, 의술이 아주 그냥 무서울 따름이에요.”지아는 진봉의 칭찬을 듣고 머리가 켜지는 것만 같았다.‘갑자기 칭찬?’지아는 웃음을 참으며 분부했다 “이 분 혹시 아무것도 먹지 못한 거 아니예요?”“네, 이틀 동안 너무 바빠서 며칠 밤을 새우고 열 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늘 아침도 못 먹었어요.”“저혈당이 있으니, 앞으로 아침 꼭 챙겨 먹고 정 안되면 사탕이라도 준비하고 다니세요.”도윤은 아직도 지아 품에 안겨 겸허하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고마워요, 선생님. 꼭 명심하겠습니다.” 모두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다행히 큰일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도윤이가 말머리를 돌렸다. “요즘 머리가 아프고 마음이 뒤숭숭해요. 이따가 다시 봐주세요.”“네.”지아는 그를 부축시키고 난 뒤 한대경에게 말했다. “예상치 못한 일이니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다시 봐 드릴 거예요.”한대경은 마냥 이상하기만 했다.도
오혁은 머리까지 기울이고 흥분한 채로 물었다.“선생님, 무슨 과제를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저도 참가해도 될까요?” “선생님께서 지난번에 말한 설람화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배울 게 너무 많아요.”지아는 더 난처해졌고 지금 지아가 생각하고 있는 어린 오혁에게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오혁에게 자신이 도윤의 옷을 어떻게 풀어 헤치고 어떻게 키스해서 그리움을 풀 계획인지 말해줄 수 없으니 말이다.“나중에 얘기해요.”지아는 황급히 밥을 두 숟갈 먹고 한대경의 약을 달였다.작은 부채로 불을 올리면서 도윤을 기다렸다.그의 신분으로 봐서는 지금 한대경와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비록 두 사람 모두 다 서로를 칼로 찔러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지만 어쩔 수 없이 함께 식사하고 수다를 떨고 악수와 가소로운 웃음까지 짓어야 할 것이다.그리고 식사한 뒤에도 여러 절차도 있을 것이다.과연 지아 생각대로 모든 것이 흘러갔고 도윤과 한대경은 모두 마음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오시느라 고생 많으셨는데 대접에 소홀했던 점 양해해 주십시오.”“아닙니다. 숭어 맛도 좋았고 오랜만에 향수를 느낀 것만 같았습니다.”“괜찮으시면 며칠 더 머물어도 좋습니다.”두 사람은 한참 동안 앞뒤가 맞지 않은 대화를 주고받았다.한대경과 도윤의 입도 계속 억지로 웃어서 굳었다.날이 어두워지자 도윤은 연회장에 진찰을 받으러 온 사람이 와서 진료해달라고 했다.아랫사람들도 태만하지 못하고 서둘러 지아를 찾았다.“선생님, 이분은 우리 C국의 귀한 손님이니, 반드시 조심해서 진료를 봐 드려야 해요”배신혁은 신신당부했다.지아는 약상자를 들고 잔소리 때문에 귀에 못이 박힐 것 같았다. “알겠어요. 그쪽 보스 약을 다 달여놨어요. 오늘 밤 약에 수면제를 좀 넣었으니, 잊지 말고 꼭 마시라고 하고요.”“네, 고맙습니다만...”배신혁은 요 며칠 성질이 점점 거칠어지는 한대경을 생각했다.밤에 잠을 자지 못해 형제 둘을 끌어당겨 주먹질을 하고 말이다.피곤해야 죽을 것
지아도 가식 없이 도윤의 목에 두 손을 올리고 리듬을 맞춰줬다.하도 격렬하게 서로를 느끼다 보니 숨이 끊어질 뻔했다.힘없이 그의 품에 엎드려 지아는 도윤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도윤아, 보고 싶었어.” 지아는 그의 품에 엎드려 환하게 웃었다.도윤의 성난 얼굴도 그제야 좀 풀리는 것만 같았다. “네가 요즘 뭘 했는지 알기나 해. 내가 너 생각하면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기나 해?”지아는 고양이처럼 그의 뺨을 문질렀다.“미안해.”“그 얼굴로 이러고 있으니깐 내가 무슨 바람이라도 난 것 같아.”도윤은 미간을 찌푸리고 지아가 남의 얼굴로 그와 친하게 지내는 것을 싫어했다.손을 뻗어 가면을 떼어주려고 하자 지아는 손을 들어 그 손을 제지했다. “안 돼, 망가뜨리면 이곳에 고칠 재료가 없어.”도윤은 그녀를 소파로 앉히며 물었다.“이제 똑똑히 말해줘야지, 왜 꼭 그 반지를 가져야 하는 거야?”지아는 다시 그의 품에 안겼다.“오랜만에 만났는데 보고 싶지 않았어?”“말 돌리지 마, 지아야.”도윤은 그녀의 영혼 깊은 곳까지 보려는듯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려줘.”“이미 약속했잖아. 이건 내 일이야. ”“위험한 일이잖아! 내가 어떻게 걱정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윤은 그녀를 안고 덧붙였다.“지아야, 너한테 잘못했던 거, 너한테 상처 줬던 거 반성하고 있어. 네가 떠난 이후로 내가 요즘 어떻게 지내왔는지 알아? 매일 조마조마하고 잠들어도 악몽을 꿔. 오늘 네가 나타나지 않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데?”지아도 그를 안았다.“알고 있어. 나도 그동안 밤낮으로 그렇게 살아왔어. 너와 연락이 끊긴 날들 나는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도윤의 얼굴은 어느새 굳어져버렸다“지아야, 난...”좀 이해할 것 같았다.도윤 역시 똑같은 경험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지아는 그의 허리에 다리를 걸치고 앉아 목을 껴안고 키스를 했다. “그래서 결혼하기 싫어. 속박당하기 싫어. 지금 이런 관계가 제일 좋아. 도윤아, 나 좀 안아주고
도윤은 자신과 지아의 감정이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갑작스럽게 깨달았다. 예전에는 지아를 좋아하긴 했지만, 그 감정은 마치 집에서 키우는 애완 고양이나 강아지에 대한 애정에 가까웠다.그녀는 자신에게 동반자와 감정적인 위안을 제공해 주었고, 그는 지아에게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 역할이었다. 그러나 도윤은 한 번도 지아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이제 지아가 자신을 떠난 후, 그녀는 더 자신감 있고 자유로워졌다.또한 그런 모습의 지아는 더 훌륭했으며 그를 더욱 설레게도, 동시에 두렵게도 했다.둘의 관계에서 도윤은 이제 을의 위치에 서 있는 비천한 자가 되었다.도윤은 한쪽 무릎을 소파에 꿇고, 지아의 목을 따라 손을 천천히 내리며 속삭였다.“지아야, 나를 조금 더 사랑해 줄 수 없을까.”지아는 마치 구원자처럼 손을 들어 도윤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얌전하게 굴어.”며칠 만에 다시 만난 두 사람은 조금 편해졌고, 서로의 그리움을 몸으로 표현했다.그때 문이 두드려졌고, 진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보스, 한대경이 곧 도착해요.”도윤은 눈살을 찌푸리며 지아의 신발을 신겨주면서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여기에 왜 오는 거야? 지아야, 그 남자가...”지아는 숨기지 않고 말했다.“도윤아, 그 사람이 나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지아야.”도윤이 화를 내는 틈을 타 지아는 몸을 숙여 그의 입술을 단단히 붙잡았다.“도윤아, 내 마음에는 너밖에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두 사람의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도윤의 눈동자는 욕망으로 가득 찼다.“지아야, 넌 나의 숨통을 틀어막고 싶은 거야?”“도윤아, 나를 데려가 줘.”지아는 그를 다정하게 바라보며 말했다.이에 도윤은 지아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대답했다.“그래.”한대경은 문밖에서 진봉에 의해 가로막혀 있었고, 진봉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죄송합니다. 저희 보스께서 치료 중이셔서 외부인을 만날 수 없으세요.”“외부인?”한대경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