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에 거북한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퍼지자, 지아는 순간 뒤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강제로 이곳까지 끌려와서 무척이나 달갑지 않아하는 지아의 모습을 알아차리고 한대경은 지아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안으로 데리고 왔다.“혼자 걸을 수 있다고! 왜 매번 이러는 거야?”한대경은 지아를 자기 침실까지 끌고 왔다.침실은 자그마치 200평 정도 되고 무척이나 넓었다.하얀색으로 된 카펫에 리모델링 전체가 궁전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침실 벽에는 유명한 화가 손에서 나온 그림도 수없이 걸려 있었다.한대경의 성격으로 본다면 절대 그의 손에서 나올만한 것이 아니다.따라서 아마 그 전의 대통령이 남겨 놓은 걸작으로 보였다.한대경은 지아의 손을 풀어주면서 말했다.“어때? 여기 엄청나지? 네가 입고 싶은 대로 입고 먹고 싶은 대로 먹고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렇게 지내면 돼. 넌 내 병만 고쳐주기만 하면 그게 뭐든 다 된다는 말이야.”“알았어.”지아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샤워하고 올 테니 그동안 약 준비해 놓아.”이번 일을 겪은 뒤로 한대경은 지아에 대한 믿음이 좀 강해졌다.이곳은 그의 침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경계하는 모습이 없었으니 말이다.지아도 이곳은 처음이라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행여나 감시 카메라와 같은 무엇인가 있다면 목이 날아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일단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을 내렸다.어렸을 때부터 소계훈은 지아를 유명한 화가한테서 그림 그리기를 배우게 했었다.따라서 그림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는 지아는 그동안 책에서 봐왔던 그림을 지금 한대경의 침실에서 보고 있었다.게다가 모두 원작이었다.지아는 입이 떡벌어지고 말았고 내심 혀를 내둘렀다.‘그림 모으는데 환장했던 분이셨네...’한대경은 나오자마자 흥분에 겨워 마지 못하는 지아를 보게 되었다.그림 하나하나를 천천히 들여다보면서 어떤 스타일로 연필을 휘둘렀는지 유심히 관찰하기도 한 지아를 말이다.“뭘 그렇게까지 들여다보는 거야?”지아의 두 눈에는 빛이 반짝였
지아는 불과 며칠 만에 한대경의 뺨을 무려 두 번이나 때렸다.뺨을 맞고 정신이 번쩍 든 한대경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났다.이윽고 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지아를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소수연! 너 죽고 싶어?”“그러게 왜 함부로 쳐다보고 난리야!”“네가 그렇게 입었잖아!”순간 지아는 화가 치밀어 올라서 그의 셔츠로 몸을 꽁꽁 가렸다.겁도 없이 다시 한대경의 머리를 툭 치고서 말했다.“누워. 또다시 함부로 쳐다보면 그땐 내가 여기저기 침을 막 찌를 거야!”“그러기만 해 봐! 널 죽일 수 있는 방법은 많거든.”분위기는 그렇게 약간 어색해졌고 두 사람은 더 이상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한대경도 서서히 정신이 맑아졌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의문만 들었다.결혼도 하고 아이도 있다고 했는데 유부녀한테 마음이 쏠리고 있으니 말이다.침묵 속에서 지아는 모든 치료를 마쳤고 한대경은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 천천히 목을 돌렸다.“그전까지는 이틀에 한 번씩 머리가 아팠었는데, 네가 침을 놔준 뒤로 한 번도 아프지 않았어. 다른 건 몰라도 실력이 그럭저럭 있는 것 같아.”지아는 그런 한대경을 흘겨보면서 말했다.“내일 처방전도 내줄 테니 약도 같이 먹도록 해. 두 달 정도 먹다 보면 너 완쾌할 수 있을 거야. 그땐 약속한 대로 나 보내줘야 할 거야.”“그래. 그땐 보낼 거야.”한대경은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그럼, 그만 내 방으로 갈게.”지아는 바로 몸을 돌려 그의 침실에서 나왔다.지아가 가고 난 뒤 한대경은 한참이나 큰 침대에서 뒤척였다.요즘 지아 몸에서 나는 약 냄새를 맡으면서 잠들어서인지 갑자기 그 냄새가 사라지니 잠에 들 수 없었다.반면 지아는 바로 잠에 들었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확 차버리는 것이 느껴졌다.한밤중에 이런 짓을 할 사람은 오직 한대경 밖에 없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렸다.지아는 어이가 없었지만 미리 준비한 덕분에 가면을 벗고 있지 않았었다.게슴츠레 눈을 비비면서 잔뜩 화난 얼굴로 한개경을 바라보았다.“왜 또!”한
어느새 넋까지 잃게 된 지아는 머릿속에 온통 도윤뿐이었다.그러던 그때 한대경이 갑자기 나타나서 나지막이 물었다.“왜 그래? 그런 옷 좋아해?”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놀란 토끼처럼 그를 바라보았다.한대경은 살짝 차가운 손가락으로 지아의 턱을 탁 올렸다.이제 막 씻고 나온 그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와 온 이가 뿜어져 나왔다.“얼굴은 평범한데... 눈은 꽤 맑네?”갑작스러운 ‘칭찬’에 지아는 당황하기 그지없었다.가면을 쓰고 있는 지아는 얼굴 전체를 가렸지만 눈만은 절대 가릴 수 없었다.크고 맑고 예쁜 두 눈에 촘촘한 눈초리까지 더해지자 평범한 얼굴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건 사실이었다.하도 가까운 거리라 지아는 다소 긴장한 나머지 그를 밀쳐내려고 했는데, 작은 손은 그대로 탄탄한 그의 가슴 근육에 닿게 되었다.탄탄한 근육을 느끼기도 전에 한대경은 지아의 허리를 감싸안고 그녀를 가두었다.자기와 옷장 사이에 꼭.“뭐 하는 짓이야!”지아는 순간 화가 치밀어 올라 언짢은 얼굴로 한대경을 노려보았다.어젯밤에 코피까지 흘리던 남자가 오늘은 또 무슨 수작을 부릴지 걱정도 되었다.한대경은 지아의 호통에 정신을 차리고 풀어주었다.그렇다, 그는 지아에게 키스를 하려고 했었다.자기도 모르게 아주 충동적이고 본능적으로.지아는 힘껏 한대경을 밀쳐냈고 서서히 침착을 되찾았다.“오늘 어디 가는데? 정장으로 줘? 아니면 뭐?”“정장.”한대경은 지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나지막한 소리로 대답했다.아무리 여자가 그리워도 유부녀는 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한대경은 지아와 안전거리를 유지하였고 지아는 곧 정장 한 벌을 건네주었다.“그럼, 내 방으로 그만 가볼게.”한대경은 지아를 말리지 않았다.요즘 들어 이상한 생각을 하고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건 모두 30년 동안 모태 솔로로 살아온 탓이라고 생각했다.한대경이 침실에서 나서자마자 배신혁이 곧바로 따라왔다.“보스, 오늘 제 형님께서 귀국하십니다.”“그래.”“A 국에서 종전 계약서를 보내왔는데
한대경은 군사 전문가를 긴급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회의는 하루 종일 진행되었고 브레이크 단이 모여서 아무리 모의연습을 해보아도 결과는 똑같았다.어떻게든 지는 것으로 말이다.지금 C 국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단 하나뿐이고 그건 바로 A 국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마성을 향해 진공을 그만하지 않으면 양국에서 C 국을 향해 거침없이 공격할 것이다.한대경은 이러한 결과를 원하지 않는다.며칠 동안 한대경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삐 돌았고 그동안 지아는 서서히 조급해지기 시작했다.움직일 수 있는 범위가 제한되어 있어서 한대경의 사업 중심으로 파고 들어가기 힘들었기 때문이다.반지는 더더욱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한대경은 마치 지아를 잊어버린 것처럼 총통부 도우미들에게 부탁하고서 돌아오지도 않았다.임무는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고 지아는 그대로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그러던 어느 날 지아는 별장 2층의 파이프를 따라서 몰래 내려와서 본격적으로 움직이려고 했었다.그러나 바로 그때 뒤에서 한 남자의 엄한 소리가 들려왔다.“거기 누구야!”갑자기 들려오는 소리에 지아는 그대로 다리가 풀려서 2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다행히도 높이는 그리 높지 않아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무엇보다도 풀밭이 아니라 누군가의 품속으로 쏙 떨어지게 되었다.그렇다, 며칠 동안 보이지 않던 한대경이었다.며칠 만에 본 한대경의 얼굴은 무척이나 초췌했고 힘들어 보였다.“또 도망가려고?”“그냥 바람 좀 쐬려고 나온 거야.”지아는 황급히 설명하였는데, 주위에 정장 차림을 한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원수, 아시는 분입니까? 무척이나 괴상하게 움직이던데요?”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은 바로 조금 전에 소리를 친 사람이다.지아는 소리에 따라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이때 배신혁이 나서서 설명했다.“형, 내가 전에 말했던 신의셔.”“신의?”배이혁은 지아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는데, 아무리 봐도 의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았다.“형
지아는 제법 그럴듯한 모습으로 혼수를 내었다.그렇게 하는 이유도 단지 한대경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기 위함이었다.앞으로 더 이상 주동적으로 기회를 찾아내지 않는다면 임무는 무한으로 연장되고 말 것이니 말이다.“그... 행여나 내가 시름이 놓지 않으면 사람 붙여도 돼.”“그런 거 없어. 나 죽이고 싶으면 사혈로 그 침을 꽂으면 한 방에 끝나는 거잖아.”한대경은 덤덤하게 덧붙였다.“그냥 네가 하는 거로 하자.”이윽고 웃고 있는 지아의 얼굴을 보고서 다시 물었다.“직접 해주고 싶었어?”“당연하지! 넌 내 환자잖아. 네가 하루라도 빨리 완쾌하면 난 하루 더 빨리 이곳을 떠날 수 있는 거잖아.”그 한마디에 한대경은 천국에서 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무척이나 반가워하던 지아의 모습에 설렜는데, 실은 자기를 떠나기 위함이었다니 아팠다.“왜? 남자가 그리워?”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도윤과 헤어질 때의 광경이 떠올랐다.실은 떨어진 지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을 듣고 나니 보고 싶기도 했다.“응, 남편이랑 아이 다 보고 싶어.”그 말을 내뱉고 있는 지아의 모습은 부드럽고 행복해 보였다.수줍어하는 빛도 드러내면서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임에도 불구하고 한대경은 눈동자가 흔들렸다.이윽고 알 수 없는 답답한 감정도 스며 올랐다.“궁금하네. 그 남자 어떤 남자인지.”지아는 한대경에게 잘 보이려고 묻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키도 크고 몸도 좋고 잘생기기까지 했어.”“돈은 없겠네?”한대경이 다소 언짢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지아는 묵인하면서 덧붙였다.“응, 근데 우리 엄청 사랑해. 아이도 넷이나 있어.”“뭐? 요즘 같은 세월에 넷이나 낳았다고? 애국가가 따로 없네.”한대경은 콧방귀를 뀌면서 자기도 모르게 지아의 허리로 시선을 돌리게 되었다.그날 뒤로 지아는 온몸을 꽁꽁 감싸면서 지내고 있었다.오늘 지아는 츄레이닝을 세트로 입었는데 섹시와는 거리가 한없이 멀었다.아이를 넷이나 낳은 여자처럼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
넋을 잃고 있는 지아를 향해 한대경은 손가락을 ‘탁’하고 튕겼다.“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야?”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아무런 핑계로 둘러대기 시작했다.“네 신분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어서. 아주 높은 분이시라고.”“어떻게 알게 된 거야?”“그 사람이 너한테 원수라고 하는 거 들었어. 그리고 마성을 제 집 드나듯이 드나들고 전용기에 이런 곳에서 살고 있는 네가 일반인일 리가 있겠어?”지아는 솔직하게 말했다.바보인 척 콘셉트를 유지하기엔 상대가 이미 너무 많은 걸 보여줬으니 말이다.덤덤한 지아의 모습을 보고서 한대경이 물었다.“내가 누군지 알고도 무섭지 않아? 다른 사람들은 다 나를 무서워하던데?”“그전까지는 무서웠어. 근데 날 죽이고 싶었다면 지금까지 살려주지 않았겠지. 그래서 이제는 무섭지 않아. 하물며 네가 완쾌할 때까지 옆에 있어주고 치료해주면 보상도 준다고 했었잖아.”‘돈 때문이었어?”한대경은 콧방귀를 뀌었다.“돈이 그렇게도 좋아?”“돈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그 돈으로 우리 아이들 편하게 먹여 살릴 수 있는데 좋지 않을 리가 없잖아. 걱정하지 마! 네 병은 내가 꼭 치려해주마!”앞뒤 태도가 확 달라진 지아는 그럴만한 이유를 둘러댔다.한대경에게 있어서 지아는 단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달리고 있는 워킹맘일 뿐이다.“참, 마사지도 해줘? 힘들지 않았어?”한대경은 그런 지아를 흘겨보았다.“갑자기? 전에는 대꾸도 하지 않더니.”지아는 난감한 듯이 한참을 뜸 들이다가 말했다.“그... 결산할 때 조금만 더 챙겨주면 안 돼?”“돈독에 빠졌네 아주!”한대경은 나지막이 중얼거렸지만 이미 마사지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네가 하는 거 봐서.”한대경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온갖 정신을 몰두하고 있던 지아는 한대경 팔의 상처가 이미 괜찮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주저 없이 외투를 벗겨주었다.한대경은 침대 정중앙에 누워있었고 지아는 옷을 벗겨주기 위해 신발까지 벗고 침대로 올라가서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이
정신을 차린 한대경은 지아를 풀어주고 싶지 않았다.차갑기 그지없는 두 눈으로 목소리까지 한껏 내리깔았다.“뭐 하는 짓이야?”지아는 억울하다는 모습으로 침을 줍고서 말했다.“침이 네 손 옆에 떨어졌어.”한대경은 그제야 지아를 풀어주었다.“미안. 조건 반사로 그런 거야. 너 괜찮아?”지아 목의 선명한 손자국을 보고서 한대경은 자책하기 시작했다.‘괜찮을 리가 없을 건데...’“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알아. 앞으로 조심할 테니 얼른 쉬어.”지아는 침을 침구로 넣으면서 말했다.침실 문을 닫는 순간 지아는 그제야 땀이 뚝뚝 떨어지게 되었다.‘죽을 뻔했어... 하마터면 죽을 뻔했어...’반지에 대한 경계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그만 둘 지아도 아니고 내일부터 직접 한대경에게 약을 끓어줄 생각이었다.약에 수면제를 적절하게 넣으면 그가 푹 자는 틈을 타서 손을 쓰면 되니 말이다.지금 지아가 생각해야하는건 반지를 갖고 난 뒤 어떻게 빠져나가는 것이다.며칠 뒤면 A국에서 담당자가 올 것인데, 지아는 그중에 무조건 도윤이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이윽고 계획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되었다.거의 잠에 들었을 때 누군가가 지아 침실로 들어왔는데, 볼 것도 없이 한대경이었다.지아 몸에서 나는 향기만 맡으면 잠을 설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한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따라서 지아는 한대경을 상대하지 않고 침대 밑에서 자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한대경은 여기저기 뒹굴면서 잠에 들려고 했으나 오늘따라 유난히 잠에 들 수 없었다.방이 하도 커서 지아의 냄새가 잘 맡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아주 열심히 맡아야만 은은하게 맡을 수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한대경을 더욱 미치게 했다.지아는 갑자기 화들짝 놀라면서 깨어났다.“뭐 하는 거야?”한대경이 지아를 품속으로 확 끌어당겼기 때문이다.“자, 네 냄새 맡아야 잠에 들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이거 놔! 난 가정이 있는 사람이라고! 병만 치료해 준다고 했지...”그러자 한대경은
“계속 볼 거야!”지아는 베개로 한대경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그 소리에 한대경은 바로 눈길을 돌렸다.“미안! 네가 내 품 안에 있다는 거 깜빡하고 있었어.”“꺼져”한대경은 침대에서 바로 일어났고 안색도 원래대로 바로 돌아왔다.그는 침대 가장자리에 버티고 서서 말했다.“어젯밤에 잘 잤어.”“꺼져!”지아는 화가 나서 칼로 그의 손가락을 잘라 반지를 바로 가지고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그리고 한대경은 오전 내내 멍하니 손가락만 바라보면서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보스, 손에 꿀이라도 있습니까? 오전 내내 손가락만 보고 있었던 거 아십니까?”배신혁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이때 한대경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모두 떨쳐버리고 말했다.“별거 아니야. 여자나 좀 데리고 와.”“여자요? 보스, 마침내 생각이 트이신 거네요!”“남자는 원래 결혼부터 하고 그 뒤에 사업을 시작하는 거예요. 혼기도 이제 가득 차셨고 가정부터 꾸리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결혼은 무슨! 그냥 급한 대로 해결할 만한 여자만 있으면 돼.”“네?”여자를 물불처럼 보던 사람이 스스로 여자를 찾다니 마냥 이상하기만 한 배신혁은 멍하기만 했다.하지만 한대경의 말대로 순순히 할 수밖에 없었다.이윽고 어둠이 내려앉자, 여자들이 줄줄이 한대경의 침실로 들어가게 되었다.여자들은 하나같이 예쁘게 차려입었고 별의별 스타일이 다 있었다.한대경이 들어오자 여자들은 하나같이 수줍은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배신혁이 찾아온 여자는 생김새도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한대경은 그중의 한 명을 향해 손가락을 까닥였다.“이리와.”“옷 벗겨.”한대경은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를 앞으로 불러왔다.청순하게 생긴 그 여자는 한대경의 부름에 웃음꽃이 피고 말았다.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여자들은 눈에 불꽃이 날 정도로 질투심이 불타올랐다.“네.”한대경은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아 다리까지 벌리고 있었다.건방지기 짝이 없는 모습인데 얼굴은 반칙일 정도로 잘생기고 늠름했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