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지아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머릿속에는 갖은 해결책들이 번쩍이고 있었다.필사적으로 싸워봤자 승산은 얼마 있을까?설령 이 문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도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체포되지 않을까?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야단치고 싶은 심정이다.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걸 마치고 도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섣불리 움직였던 것이다.‘어떡하지?’지아는 옷 한 벌을 꽉 잡아당기고 말을 다듬어 보려고 했다.‘믿어줄까?’한대경은 문을 열자 그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지아를 보게 되었다.옷은 딱 마침 허벅지까지 중요한 그 부위를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매일 청바지를 입고 있던 지아의 두 다리가 모델 뺨칠 정도로 길고 하얗고 매끈할 줄은 몰랐다.검은 다리털로 뒤덮인 자신의 다리와 달리 발바닥까지 잡색이 없을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으니 한대경은 서서히 넋이 나갔다.그리고 지금 지아는 아무런 이너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순간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한대경은 침을 삼켰다.애매한 분위기와 더불어 야릇한 불꽃까지 방 안 곳곳에서 터지는 것만 같았다.지아는 마음속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며칠 전 한대경이 사람을 마구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지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애써 덤덤한 척하고 말했다.“바지가 아직 안 말라서 그러는데 바지 좀... 너도 없고 그래서 함부로 뒤진 거야... 미안...”이 핑계는 완벽하지만 그가 믿는지 안 믿는지 봐야 한다.한대경은 한 걸음씩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지아는 점점 더 죽을 것만 같아 애꿎은 옷만 꽉 잡고 있었다.어느새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한대경은 어둡기 그지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는데, 저승사자가 따로없었다.이윽고 코 앞까지 다가온 한대경에게서 숨막히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그때 한대경은 갑자기 지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지아는 이미 필사적으로 달려들려고 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두 손
한대경은 품에 안겨 있는 여인을 훑어보았다.정교하고 완벽한 쇄골이 한눈에 들어왔고 가슴의 윤곽까지 또렷하게 드러났다.지아는 그의 눈빛을 느끼고서 바로 밀어냈다.이윽고 재빠르게 침대에 뛰어올라 이불로 몸을 꽁꽁 가렸다.한대경은 순간 눈빛이 어두워졌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남아 있는 온기를 느꼈다.지아가 자기 손에서 빠져나간 것이 좀 허전하기도 했다.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는 지아를 보더니 한대경은 또다시 알 수 없는 그 느낌을 느끼게 되었다.한대경은 바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 앞으로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 마.”“두 번 봐주지는 않을 거야.”그 말을 하고서 한대경은 서둘러 떠났고 지아는 정신이 나갔다고 욕했다.그가 정말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지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온몸의 힘도 풀렸다.한대경의 팬티가 자기 손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바로 던져버렸다.서랍장 문도 상자도 모두 열려 있었고 한대경은 모두 그대로 가만히 두고 나갔다.만약 그 반지가 정말 안에 있다면 이렇게 방심할 수 없을 것이다.가지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일이 꽤 복잡해졌을 텐데 말이야.지아는 바지를 돌려주는 김에 상자를 다시 뒤져봤다.역시나 개인용품 말고는 중요한 게 없었다.지아는 한숨을 내쉬면서 중얼거렸다.“역시나 쉬운 임무가 아니었어.”지아는 곧바로 머리를 빠르게 굴러보았는데, 반지가 아지트에도 없고 한대경에게도 없다면 혹시 떠나기 전에 그의 심복에게 맡긴 건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보아하니 이곳에서는 찾아낼 수 없을 것 같았다.그뿐만 아니라 이제 곧 교전할 상황인데, 얼마나 더 머물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너무 오래 끌면 할아버지와 도윤이가 걱정해할 수도 있는데 말이다.지금으로서는 전쟁을 멈추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한대경와 같은 강한 성격으로 포기하는 것 불가능하니 도윤과 연락을 닿아 그쪽에서 멈추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핸드폰을 잃어버려서 도윤과 연락하려면 겹겹이 쌓인 포위를 뚫고 그를 찾아야 하
이미 발각된 지아는 그를 멀리하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제발 그냥 가게 해줘.”“바보야, 앞으로 가면 A나라 구역인데 죽고 싶어?”도시 전체가 그들 양쪽의 세력에 의해 나뉘었던 것이었다.‘도윤이도 더 빨리 만나고 나한테는 좋은 상황이네.’지아는 마음을 먹더니 땅에서 돌 몇 개를 주었다.“미안해, 근데 나 꼭 가야 해!”이윽고 지아는 드론을 향해 돌을 던졌으며 드론을 조종하는 사람도 얼른 피할 수밖에 없었다.“더 던지면 너 확 죽여버린다!”지아는 몇 개나 던졌지만 모두 마치지 못했다.그때 손에 딱 한 개만 남아 있었는데, 실은 그 역시 연기였다.앞에 던진 돌은 모두 정체를 숨기기 위한 것이었고 마지막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실력이었다.지아는 입가에 차가운 웃음을 지으면서 힘껏 던졌다.“잘 있어라! 변태야!”‘펑’ 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이 땅에 떨어지고 화면이 꺼졌다.한대경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욕설을 퍼부었다.“어디 감히!”“보스, 그냥 그대로 보내주시죠. 처음부터 이상한 여자인 것 같았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도 그냥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적군에서 보낸 스파이일 수도 있고요...”“그럼, 앞으로 네가 치료해 줄래?”한대경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소리쳤다.“반드시 데리고 와!”“하지만...”지아는 곧 다음 드론이 자기의 위치를 찾으러 올 것이며, 어떤 드론은 사람을 직접 공격하고 폭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서둘러야 한다는 마음에 걸음을 재촉했다.“살려주세요.”그때 한 여인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지아는 발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소리에 따라 시선을 돌렸다.도시가 하도 크니 대피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정상이다.하지만 시억이가 말했듯이 그깟 호의는 접어야 하는 게 맞았다.계속 걸음을 재촉하려고 하던 그때 여자의 소리는 더욱 허약하게 들려왔다.골목에 들어서자 배가 크고 온몸이 명품으로 도배된 여자가 벽에 기대어 주저앉아 있었다.산모인 것 같았고 바닥에 물자국이 있는 것을 보니 양수가 터진 것
지아는 힘겹게 소피아 왕비를 부축하고 떠났다소피아 왕비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몇 분마다 진통에 자궁이 압축되면서 점점 사색이 되고 말았다.같은 여자로서 지아는 이 느낌을 너무 잘 알고 있다.지난 두 번의 출산 모두 조산이었고, 아이가 빨리 나와서 고생을 많이 했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정상적인 출산이라고 하더라도 그 고통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이다.하지만 소피아 왕비 역시 현재 상황을 잘 알고 있기에 최선을 다해 지아와 함께 떠나려 하고 있다.지아는 어느 한 폭발된 가게를 찾았는데,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방에서 천 두 조각을 뜯어 일단 소피아 왕비 다리 밑에 깔았다.“여기서 기다려요. 금방 돌아올게요.”물자는 없지만 다행히 수원을 찾을 수 있었고 깨끗한 물을 받을 수 있었다.지아는 물을 끓이고 또다시 천을 찾아와서 깨끗하게 씻었다.“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입니다. 조금만 참아주세요.”지아는 가능한 한 뜨거운 물로 소피아 왕비를 깨끗하게 닦아주고 아이가 태어날 때 감염되지 않도록 노력했다.그리고 일부러 책상과 걸상을 찾아 문을 막고 씻은 천을 소피아 왕비의 입에 물려주었다.“소리 내면 안 돼요. 아니면 사람들이 쏠리게 될 거예요.”소피아 왕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협조했다.지아는 때때로 손을 씻고 손가락 넣어 확인했다.밖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자, 지아는 소피아 왕비에게 눈짓을 건내고 힘겹게 참아냈다.통증은 점점 더 강해졌고 아이가 곧 나올 것만 같았다.“자, 힘주세요! 심호흡하시고요!”온몸이 땀범벅이 된 소피아 왕비는 최선을 다해 협조했다.사색이 되어버린 얼굴과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소피아 왕비.그렇다, 출산이라는 건 한번 죽다 살아나는 일이다.지아는 소피아 왕비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있는 한 두 분 다 안전할 겁니다.”소피아 왕비는 아파서 말도 못하고 입에 물고 있는 천만 더욱 꼭 물었다.지친 두 눈에는 지아에 대한 고마움이 가득했다.그리고 소피아 왕비는 자기도 모르게 지아의 손을
진환은 진봉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는 나한테 맡기고, 넌 얼른 가서 사람부터 찾아.”“형 조심해.”진봉은 걱정했지만, 그들에게 더 중요한 임무가 있어 몇 마디 당부하고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진령과 배신혁은 외나무다리에서 마난 원수와 같았다.둘 다 무기를 꺼내 들면서 이를 악물었다.“절대 살아서 가지 못할 거야!”“너야말로!”두 형제와 도윤의 병사는 여러 길로 나누어 성안을 샅샅이 뒤졌다.만약 소피아 왕비가 성안에서 죽는다면, 누구의 문제든 V국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원래 시국이 이렇게 혼란스러운데 또 사고가 나면 정말 국제적인 혼전이 일어날 것이다.총성이 울리고 한대경은 다시 원래의 길로 돌아갔다.그는 갑자기 시체 옆에 물이 있다는 점이 생각났다.어렸을 때 그는 빈민굴에서 여자가 출산하기 전에 양수가 흘러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그래! 양수 흔적만 따라가면 찾을 수 있을 거야!’‘젠장! 이제서야 생각나다니!’그와 동시에 도윤도 그 시체와 그 옆에 있는 물을 발견했다.그는 몸을 웅크리고 만져보았는데, 양수라고 판단이 들었다.잠시 침묵하더니 어두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아직 살아 계셔. 가자.”출산을 앞둔 임산부가 어떻게 건장한 남자를 해치웠는지는 모르겠지만, 건장한 남자가 죽었고 그녀는 살아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좋은 결과이다.성안에 1초만 더 있어도 위험하니 도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양수의 흔적을 따라 한 매점 밖에 도착했다.그는 문을 막고 있는 책상과 의자를 보게 되었다.‘분명히 누군가가 안에서 막은 거야.’누군가 아직 대피하지 않았더라도 큰길 옆에 있는 매점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단 한 가지 가능성은 소피아 왕비는 안에 있고 임산부 혼자서 이런 무거운 물건을 옮기기 어렵다.그녀 곁에는 분명 다른 사람이 있다!진실이 밝혀지고, 문득 그 시체 손에는 값비싼 팔찌가 쥐어져 있었다는 것이 떠올랐다.소피아 왕비의 팔찌를 빼앗다가 뒤에서 습격당했고 누군가가 소피아를 구했으며 그들은 지금
도윤은 상대방의 의도를 냉정하게 분석했다. 소피아 왕비를 납치하기 위해서라면 이곳으로 데려와 출산하기보다 가장 먼저 사람을 데리고 갔을 것이라고.따라서 상대방은 소피아 왕비를 돕는 목적이 더 강하다면서 어쩌면 자기와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윽고 도윤은 소피아 왕비의 가명을 부르기 시작했다.“푸리 안에 계십니까? 미샤엘에서 올 것입니다.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소피아 왕비는 감격스워 마지 못했고 지아 역시 그러했다.찾아가려던 도윤이가 자기 발로 직접 찾아왔으니 말이다.“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구해드리려고 왔습니다.”안에 있던 사람은 그의 말을 듣고 책걸상을 치우기 시작했다.그가 다리를 들고 들어가자마자 한 여자가 달려들어 그의 가면을 벗기고 키스까지 했다.도윤은 막 밀어내려고 할 때 넋을 잃게 하는 향기를 맡게 되었다.‘꿈이 아니야!’그날 나무에 매달려 있었을 때 어떤 사람이 자기를 구해주고 붕대를 감아줬는데, 그때 이 향기를 맡았었다.깨어난 후 지아를 만나지 못했지만, 그는 지아가 아직 A시에 있다고 자신을 위로했었다.근데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지금 이 순간 자신의 입술을 물고 있는 사람이 지아가 아니라면 또 누가 있겠는가...도윤은 지아를 잡아당기며 놀라면서도 기뻐해 마지못한 눈빛으로 지아를 바라보았다.“지아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지아는 그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지금 설명할 시간 없어. 빨리 여기부터 막아.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할게.”도윤이 입구를 틀어막자 지아는 계속 소피아 왕비를 위로해 주었다.“괜찮아요. 우리 편이에요.”도윤은 지아에게 다가가 등을 돌리고 말했다.“어떻게 된 일인지 말해.”지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미안해. 아직은 말할 수 없어. 한대경에게 접근해야 할 이유가 있어.”도윤의 등만 봐도 그가 지금 얼마나 분노로 차 있는지 알 수 있었다.“미쳤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알아. 사람 막 죽이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는 사람이라는 거. 근데 그 사
지아는 다소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그 순간 도윤의 모든 주의력은 온통 지아와 한대경 두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나라든 분쟁이든 더 이상 눈에 들어오는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떠날 생각을 하게 되니 미치고 팔짝 뛸 것만 같았다.“그게 관건이 아니잖아. 도윤아, 네가 날 좀 도와주면 안 돼? 반지 찾아서 꼭 돌아올게! 내 정체 절대 드러내지 않을 테니 제발 한 번만.”만약 다른 일로 지아가 이렇게 부탁을 했다면 도윤은 열 번이고 들어주었을 것이다.그러나 지아는 지금 한 남자의 존엄을 앞에 두고 부단히 간을 보고 있었다.적어도 도윤이가 생각하기엔 그러한 감정이었다.“안 돼. 더 이상 네가 위험해지는 꼴 볼 수 없어. 한대경은 그냥 미친놈이야! 눈에 뵈는 것 하나 없이 아무나 막 죽이는 놈이라고! 지금 당장 나랑 같이 떠나. 널 미끼로 그런 짓 할 수 없어.”“내가 아무리 부탁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말이야?”지아는 순간 말투가 차가워졌다.“이건 내가 하는 일이고 네가 지지할 수 없다면 우린 더 이상 함께 갈 필요도 없다고 봐.”그 말에 도윤은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지아야, 그 일로 나 협박하지 마.”“도윤아, 3년 전에 네가 응급실로 실려 갔을 때, 난 그 차디찬 복도에서 널 기다리면서 미셸한테 한 대 맞았었어. 그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아?”“모든 의료진이 나를 흘겨보고 있었는데도 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미셸이 너한테 수혈해 주는 것만 빤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고. 미셸이 나한테 난 그냥 꽃병이라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고 너한테 폐만 끼친다고 왜 나 같은 인간이랑 네가 결혼을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고 그랬었어.”“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넌 안에서 수술을 받고 난 밖에서 그런 소리를 감당해야 했었어. 그 문이! 너랑 나 사이에 절대 넘어갈 수 없는 벽처럼 보였어. 우리가 아무리 다정하고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너랑 난 같은 세상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았어. 네가 임무 수행하러 나갈 때마다 난
지아는 밖으로 나가자마자 일단 흙으로 땅에 흘린 양수부터 덮어버렸다.양수의 흔적은 마지막 갈림길에서 끊기고 말았다.한대경이 흔적을 찾아 달려왔을 때, 딱 그 갈림길에서 멈춰 서게 되었었다.눈살을 찌푸린 채 다른 단서를 찾아내려고 했으나 바로 그때 골목에서 나지막한 소리가 들려왔다.권총을 손에 꼭 쥐고서 천천히 다가갔는데, 초점 잃은 두 눈으로 멍하니 쓰레기통 뒤에 숨어 있는 지아가 보였다.지아는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오지 마!”이윽고 지아는 한대경을 향해 돌을 매섭게 던졌는데, 그는 바로 깔끔하게 피해 갔다.그 동작은 물 흐르듯이 자연스러웠고 멋있었다.지아 곁으로 다가온 한대경은 지아를 내려다보면서 이를 악물었다.“드디어 찾았다!”익숙한 목소리에 지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너... 너!”자기도 모르게 본능적으로 도망가려고 했으나 한대경에게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다.지아는 또다시 예전 그 모습대로 한대경의 어깨에 대롱대롱 걸려서 자리를 떠나게 되었다.“이거 놔! 나 돌아가기 싫단 말이야!”“움직이지 마! 확 죽여버리기 전에!”멀리서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도윤은 주먹을 잡아당기고 말았다.이를 악물고 있는 도윤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가서 지아를 데려오고 싶은 심정이었다.하지만 그렇게 하게 된다면 지아에게 미움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한편, 소피아 왕비에 관한 소식이 전해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차 한 대가 와서 소피아 왕비 모자를 데리고 갔다.도윤 역시 일단은 떠날 수밖에 없었다.한대경의 등에 얹혀 임시 거처로 돌아온 지아는 그가 확 던지는 바람에 그대로 정원에 있는 흙밭에 쿵 하고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다행히도 시멘트 땅이 아니라 고통은 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살이 찌푸려졌다.“어디 한 번 도망가 봐! 더해봐!”그때 한대경 곁에 있던 누군가가 방망이 하나를 건네주었는데, 방망이를 어깨에 얹고 있는 한대경의 모습은 건달이 따로 없었다.“내가 오늘 네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