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전체가 옷으로 뒤덮여 있어 지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하지만 한대경이 머리 위로 몸을 숙인 채 말하는 것이 분명히 느껴졌다.“내가 너라면 입 아프게 그런 쓸데없는 말들 하지 않았을 거야. 나에게는 도덕도 법도 없단다. 그 말인즉슨, 그 누구도 날 어떻게 할 수 없단 뜻이야.”“...”‘그래! 내가 반지를 위해서라도 참는다!’언젠가는 한대경의 머리를 공으로 삼아 멀리 차 버릴 것이라고 다짐까지 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차는 이리저리 꺾다가 지아가 거의 토하기 일보 직전일 때 멈춰 섰다.그러나 숨을 돌리기도 전에 또 다른 누군가가 지아를 어깨로 들어 올렸다.지아는 곧 차가운 바닥에 ‘쿵’하고 버려졌는데, 하마터면 온몸에 골절상을 입게 될 뻔했다.단번에 화가 치밀어 오른 지아는 머리 위의 옷을 내팽개쳤다.이곳으로 오기 전까지 가만히 있었던 이유는 어떠한 기밀을 목격하여 한대경에게 바로 말살을 당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이었다.지아는 바로 먼지를 툭툭 털면서 일어났다.이윽고 한대경에게 삿개질하면서 소리를 치기 시작했다.“너 뭐야! 변태야? 사이코패스야? 도적이야? 대체 정체가 뭐냐고!”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한대경은 지금 조각 같은 몸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다.조명의 힘으로 근육은 더욱더 탄탄해 보였고 팔을 칭칭 감고 있는 붕대는 퇴폐미까지 더 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다.누구나 한 번쯤은 시선을 머물법한 몸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그때 누군가가 들어와서 지아를 훑어보더니 지아의 가방을 땅에 내려놓았다.“보스, 확인해 보았습니다. 가방 안에는 일상용품과 약품밖에 없었습니다.”그러자 한대경은 다시 시선을 지아에게 옮겼다.“너, 옷 벗어.”순간 지아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뭐라고?”“옷... 벗으라고.”옆에 서 있던 부하 역시 다짜고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옷부터 벗으라고 하는 한대경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부하로서 눈치 빠르게 나서서 지아에게 대신 설명해 주었다.“오해하지 마십시오. 위험한 물건을 가졌는지 확인만
몇 년 전에 지아는 여러모로 고생은 좀 했었지만, 이런 모욕은 처음이었다.상대방의 신분을 돌볼 겨를도 없이 한대경이 넋을 잃고 있는 틈을 타서 지아는 뺨을후려쳐 버렸다.탁-맑은소리가 방 전체에 울려 퍼졌다.한대경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면서 화나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지아의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상의를 벗은 상황에서 이러한 동작을 하게 되니 야릇하기 그지없었다.부하는 입을 살짝 가린 채 헛기침을 하면서 어색함을 숨겼다.화가 잔뜩 난 모습으로 한대경은 이를 갈며 소리쳤다.“네가 감히 날 때려!”“그래! 내가 감히 널 때렸다! 어쩔래!”“변태만도 못한 놈!”지아는 말을 하면서 벌떡 일어서더니 머리로 그의 머리를 세게 내리쳤다.두 손이 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펑’하는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동시에 머리가 윙윙거렸다.공격이 먹혔는지 한대경은 멍하니 지아를 바라보기만 했다.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야만적인 여자를 처음 본 듯한 얼굴이었다.독이 잔뜩 오른 지아는 그의 가슴을 향해 마구잡이로 할퀴기 시작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가슴에도 혈흔이 가득해졌다.“파렴치한 놈! 어떻게 생명의 은인에게 이럴 수 있어! 고마운 줄도 모르고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하다니! 죽여버릴 거야!”그때 부하가 달려와서 말리기 시작했다.“진정 좀 하세요.”지아는 한대경이 아직 반격하지 않은 틈을 타서 부하에게 끌려갈 때 그의 얼굴을 발로 확 차버렸다.지금 한대경은 처참하기 그지없는 자신의 모습을 훑어보고 있다.입에서 피까지 한 모금 토해내고 말이다.‘재밌고 대단한 여자였어.’한대경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우람한 몸매가 모든 조명을 가리는 것만 같았다.어둡고 거대한 그림자가 지아를 그 속에 가두었다.“여자라고 내가 때리지 않을 것 같아?”지아도 어느새 눈치를 차리고 있었다.사람을 죽이나 절대 여자한테 손을 대지 않은 남자라는 것을.아니면 첫 공격을 가 했을 때 충분히 반격할 수 있었다.“갈래.”“말도 안 돼.”한대경은 지아
지아의 말에 배신혁은 그제야 기억이 난 듯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맞아요! 제가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란색과 하얀색이 더불어서 있는 꽃도 있지 않았어요? 겨울에만 피는 꽃이라고 하던데.” “묵란, 불면증에 약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지아는 덤덤히 보충하면서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덧붙였다.“물어보고 싶으신 게 무엇이죠? 이렇게 에둘러서 물어볼 필요 없습니다.”자신의 계책을 간파한 지아를 보고서 배신혁은 멋쩍게 코만 만졌다.“그럼, 그냥 묻겠습니다. 찾고 있다는 그 약재가 뭡니까?”“월롱초라고 하는 약제입니다. 밤에만 피어나고 꽃잎이 화려해져서 반딧불을 불러올 수도 있죠.”배신혁은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으나 빈틈이 없었다.“선생님,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 보스께서 성격이 워낙 좀 불같으십니다. 완쾌하실 때까지 옆에서 치료만 잘해 주신다면 사례금 넉넉히 챙겨 드리겠습니다.”그 말에 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사례금 따위 바라지 않습니다. 놓아주기만 하면 됩니다.”“그리고 대체 정체가 뭡니까?”“선생님, 그냥 협조만 잘 해주시면 됩니다. 절대 선생님 다치게 할 일은 없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생각 따위 절대 하지 마시고요. 그때가 되면 저희 역시 지켜드린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동안 묵으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배신혁의 인솔하에 지아는 작은 방으로 오게 되었다.“지금 조건으로서 이게 최선입니다.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푹 쉬시기 바랍니다. 도망가실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보스 보통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배신혁은 문 앞에 서서 섬뜩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안녕히 주무세요.”문을 닫으면서 배신혁은 웃음을 거두었다.이윽고 옆에 있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이 주소로 가서 한 번 알아봐.”“네, 형님.”지아는 그들이 E시로 밤새 달려가서 조사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집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고 사고로 죽었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
“선생님, 너무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보스 치료만 정성껏 해주시면 됩니다. 보스께서 부르십니다.”한대경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허리춤에 샤워 타일을 두르고서 튼튼한 상체와 튼튼한 종아리를 드러냈다.어젯밤에 응급치료를 마치고 감싸주었던 붕대에서는 피가 약간 보이기도 했다.‘내가 살다 살다 저런 미친놈은 처음이야. 저몸으로 설마 뭐라도 한 거 아니야?’지아는 여러 스타일의 남자와 접촉한 적이 있지만, 한대경처럼 거칠고 막무가내인 남자는 처음이었다.“너 다친 거 몰라?”지아는 한대경의 팔을 가리키면서 물었다.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고 있던 한대경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서 너한테 오라고 한 거잖아. 뭐가 문제라도 되는 거야?”‘저놈의 뇌 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점점 지아의 마지노선을 건드리고 있는 한대경이다.지아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손을 들어 한대경의 머리를 뒤로 밀었다.“너 어디 아프지? 죽고 싶으면 멀리 떨어져서 죽어. 너처럼 이렇게 협조하지 않은 환자는 정말 처음이야. 내가 아니라 구준이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 너 같은 환자는 사릴 수 없어.”한대경은 지아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눈에 노기를 띠며 말했다.“네 손가락 지금 바로 부러뜨릴 수 있는데, 어디 한번 해볼래? 까불지 마.”그러자 지아는 그를 흘겨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까불지 마? 네가 나한테 뭐라도 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 멘트 너무 구렸어. 지가 무슨 대표라도 되는 줄 아나.”말하면서 지아는 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때 한대경은 어리둥절한 채로 배신혁에게 물었다.“갑자기 대표라는 게 무슨 말이야?”배신혁은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옛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캐릭터인데, 보통 여자 주인공이 가난하고 남자 주인공은 한 회사의 대표님으로 여자 주인공을 흔모하면서 괴롭히기도 하고 강박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게 하고 그러죠. 최근에 들어 별로 유행하는 것 같
지아는 한대경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혼자서는 지금 이 국면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오늘 한대경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C 국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A 국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해야 했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상책이 아니었다.한대경이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화를 누르기로 했다.“대체 정체가 뭐야?”“치료만 해주면 돼.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지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너 침대에 엎드려 있어. 이따가 맥부터 짚어줄게. 두통이 심한 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야.”한대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지아는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문부터 잠갔다.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걸 보니 지아에 대한 의심은 접은 것으로 보인다.한대경이 방금 목욕을 마친 것이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조금 전에 보니 손가락에 반지도 없었었다.그럼, 샤워할 때 화장실에 잠시 두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지아는 그가 벗은 옷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뒤졌다.‘반지는?’‘설마 끼고 나온 게 아니었어?’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이윽고 손을 깨끗이 씻고 밖으로 나갔는데, 한대경은 지아의 말대로 순순히 누워있었다.다만 겁 없이 ‘대’자로 누워있었다.샤워 타일이 반쯤 벗겨져 튼튼한 허벅지 안쪽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그의 허벅지 안쪽과 눈이 마주친 지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이윽고 침대 옆에 앉아서 맥박을 짚기 시작했다.반지가 곁에 없다면 지아는 반드시 그를 따라 함께 그의 나라로 가야만 했다.그로써 한대경의 신임을 완전히 받아야 하고 반지도 기회를 빌려 몰래 가지고 나와야한다.지아는 아주 섬세하게 보고서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옮겼다.“선생님, 보스님은 어떠하십니까?”지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머리뿐만 아니라 심맥이 막히는 등 큰 문제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전에 한대경이 지아를 의사라고 소개했을 때까지 배신혁은 믿지 않았
마지막 힘으로 겨우 욕을 퍼부었던 남자는 그대로 한 방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흘러내린 피가 지아의 신발 밑창을 그대로 적시고 말았다.요 몇 년 동안 지아는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왔었다.하지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였을 뿐이고 원칙을 지키면서 손에 피를 묻혔었다.‘포로’라고 잡혀 온 그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면 그냥 자기 국가를 사랑하는 서민으로 보였다.죽기 직전의 남자 모습은 미연처럼 보였고 그녀 역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한 사람이다.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아는 여전히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을 만졌는데, 그때 미연이가 흘렸던 피의 온도와 촉감을 다시 느끼는 것만 같았다.두 눈을 부릅뜬 지아의 모습에 한대경은 무척이나 만족한 모습이었다.천천히 일어나서 죽은 남자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남자의 가슴에 꽂힌 칼을 도로 뽑아버렸다.이윽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칼을 다른 사람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그때 지아가 한대경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소리쳤다.“안 돼!”높이 치켜든 칼에는 남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그리고 그 피는 매끄럽고 차가운 칼날을 타고 지아의 얼굴 위로 미끄러져 떨어졌다.“이제 치료할 수 있겠어?”한대경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나지막이 물었다.지아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대답했다.“그래. 할게.”한대경은 손뼉을 치면서 배신혁에게 남은 포로와 시체를 끌고 나가라고 했다.바닥에 낭자한 피를 보고서 지아는 마치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한대경이 얼마나 독한 사람이고 악질인지 이미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목격하게 되니 공포 그 자체였다.한대경은 티슈로 칼을 깨끗이 닦고 나서 한쪽으로 훅 던지고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시작해.”지아는 침을 들고 그의 목구멍을 노려보았는데, 귓가에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여긴 지옥이 될 거야. 잘 생각하고 결정해.”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차례로 침을 놓았지만 가슴 속의 그
우람진 한대경의 몸집에 가려진 지아는 맹수에게 잡힌 토끼처럼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두 손을 땅에 짚고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 떨고 있는 모습을 실남 나게 연기했다.그렇다, 한밤중에 도망가는 것마저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었다.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처참하고 무고한 죽음 현장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가해자인 남자와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지금 이 상황에서 본다면 탈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순순히 말을 들어야 한대경의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이 또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지아는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도망갈 생각은 없었어!”한대경은 한쪽을 살짝 구부린 채 무척이나 억울한 듯 연기하고 있는 지아를 바라보면서 씩 하고 웃었다.“그래?”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바람 쐬러 나온 거야. 앞으로 사람 좀 죽이지 않으면 안 돼?”“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이유로 남을 죽이겠어. 다만 요즘 밖이 하도 위험해서 밖으로 못 나오게 한 것뿐이야. 널 위해서 말이야.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말하면서 그는 지아를 그대로 어깨에 메고 가려고 했다.손끝이 지아의 몸에 닿자마자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아의 눈빛으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한대경은 지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말만 잘 들으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말하면서 어깨에 짐을 이듯이 지아를 어깨에 툭하고 놓았다.‘보통 인간은 아니야. 안고 갈 수도 있으면서 왜 굳이 이렇게 납치해 가는 것처럼 어깨에 이고 가는 거야!’“놔줘, 혼자 갈 수 있어.”낯선 남자와 살이 맞대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지아였다.비록 상대도 자기한테 그런 감정 따위가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몇 초 동안 몸부림치다가 한대경은 참다못해 지아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조용히 해!”‘미친놈! 내가 언젠가는 너 토막 내고 말 거야!’비록 도윤에게도 상
다행히 바닥에 이불이 두 겹이라 지아는 넘어져도 아프지가 않았다.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러 올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인간 말종 아니야? 어떻게 저딴 남자가 있을 수 있지?’가장 기본적인 도덕도 한대경에게 없는 것만 같았다.한대경은 얼굴이 빨개진 지아를 한 번 힐끗 보고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불 끄고 자.”‘대박이다! 인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아!’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대로 불을 끄러 갔다.캄캄한 밤을 뚫고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꽤 예민하다. 자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두말없이 상대 목부터 비틀 수 있어. 내일 아침에 우리 살아서 만나자.”그 말에 지아는 괴상 야릇하게 대답했다.“어머, 대단하시네요. 그냥 눈 뜨고 자지 그래.”“허허.”지아는 그를 등지고 눕고서 이불까지 덮었다.비록 지금 마음과 같아서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안에 반지가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그러나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고 지아는 자기를 일깨워주었다.어제 밤을 새운 데다 엊그제 내내 달려온 관계로 지아는 꽤 피곤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적어도 지금은 한대경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불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차차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듣고서 한대경은 속으로 웃었다.‘그렇다고 저렇게 속도 없이 자는 거야?’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불빛을 통해 바닥에 누워있는 지아의 모습을 어슴푸레 볼 수 있었다.지아는 지금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있다.그렇게 조용한 밤이 흘러 지나갔다.아침이 밝아오자, 지아는 문뜩 눈을 뜨고 일어났다.그녀가 깨난 것을 느끼고 한대경 역시 침대에서 일어났다.지아가 자고 있는 곳을 밟고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지아는 눈 뜨자마자 한대경의 단단하고 길쭉한 다리와 함께 남자다움이 넘치는 털을 보게 되었다.위로 서서히 시선을 돌려보니 검은색 팬티에 그곳의 윤곽까지 선명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