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람진 한대경의 몸집에 가려진 지아는 맹수에게 잡힌 토끼처럼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두 손을 땅에 짚고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 떨고 있는 모습을 실남 나게 연기했다.그렇다, 한밤중에 도망가는 것마저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었다.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처참하고 무고한 죽음 현장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가해자인 남자와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지금 이 상황에서 본다면 탈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순순히 말을 들어야 한대경의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이 또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지아는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도망갈 생각은 없었어!”한대경은 한쪽을 살짝 구부린 채 무척이나 억울한 듯 연기하고 있는 지아를 바라보면서 씩 하고 웃었다.“그래?”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바람 쐬러 나온 거야. 앞으로 사람 좀 죽이지 않으면 안 돼?”“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이유로 남을 죽이겠어. 다만 요즘 밖이 하도 위험해서 밖으로 못 나오게 한 것뿐이야. 널 위해서 말이야.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말하면서 그는 지아를 그대로 어깨에 메고 가려고 했다.손끝이 지아의 몸에 닿자마자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아의 눈빛으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한대경은 지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말만 잘 들으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말하면서 어깨에 짐을 이듯이 지아를 어깨에 툭하고 놓았다.‘보통 인간은 아니야. 안고 갈 수도 있으면서 왜 굳이 이렇게 납치해 가는 것처럼 어깨에 이고 가는 거야!’“놔줘, 혼자 갈 수 있어.”낯선 남자와 살이 맞대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지아였다.비록 상대도 자기한테 그런 감정 따위가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몇 초 동안 몸부림치다가 한대경은 참다못해 지아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조용히 해!”‘미친놈! 내가 언젠가는 너 토막 내고 말 거야!’비록 도윤에게도 상
다행히 바닥에 이불이 두 겹이라 지아는 넘어져도 아프지가 않았다.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러 올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인간 말종 아니야? 어떻게 저딴 남자가 있을 수 있지?’가장 기본적인 도덕도 한대경에게 없는 것만 같았다.한대경은 얼굴이 빨개진 지아를 한 번 힐끗 보고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불 끄고 자.”‘대박이다! 인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아!’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대로 불을 끄러 갔다.캄캄한 밤을 뚫고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꽤 예민하다. 자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두말없이 상대 목부터 비틀 수 있어. 내일 아침에 우리 살아서 만나자.”그 말에 지아는 괴상 야릇하게 대답했다.“어머, 대단하시네요. 그냥 눈 뜨고 자지 그래.”“허허.”지아는 그를 등지고 눕고서 이불까지 덮었다.비록 지금 마음과 같아서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안에 반지가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그러나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고 지아는 자기를 일깨워주었다.어제 밤을 새운 데다 엊그제 내내 달려온 관계로 지아는 꽤 피곤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적어도 지금은 한대경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불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차차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듣고서 한대경은 속으로 웃었다.‘그렇다고 저렇게 속도 없이 자는 거야?’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불빛을 통해 바닥에 누워있는 지아의 모습을 어슴푸레 볼 수 있었다.지아는 지금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있다.그렇게 조용한 밤이 흘러 지나갔다.아침이 밝아오자, 지아는 문뜩 눈을 뜨고 일어났다.그녀가 깨난 것을 느끼고 한대경 역시 침대에서 일어났다.지아가 자고 있는 곳을 밟고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지아는 눈 뜨자마자 한대경의 단단하고 길쭉한 다리와 함께 남자다움이 넘치는 털을 보게 되었다.위로 서서히 시선을 돌려보니 검은색 팬티에 그곳의 윤곽까지 선명하
침실은 크지 않고 공기 중에 옅은 물기가 자욱했다.지아는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너한테 포로로 잡혀 온 뒤로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어. 좀 씻고 싶어.”“씻어.”한대경은 아주 심플하게 대답했다.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갈아입을 옷이 없어.”한대경은 마침내 지아가 꿈에 그리던 서랍장을 열었다.그 속에는 트렁크 하나만 있었고 모두 한대경의 일상복이었다.‘한 나라의 주인이 맞긴 한 거야?”지아는 같은 자리에 있는 부남진을 떠올리게 되었다.다 같은 지위에서 부남진은 무엇이든 최고만 따지고 가장 좋은 것만 쓰고 먹고 하니 말이다.옷도 브랜드 로고가 없지만, 유명 디자이너가 한 땀씩 직접 만든 옷만 입고 다닌다.지아는 한대경 트렁크에 들어 있는 옷을 힐끗 보았는데, 코트 두 벌, 반팔과 바지 몇 벌이 전부였다.그중에서 한대경은 잡히는대로 꾸깃꾸깃한 반팔과 바지를 집어 지아에게 던졌다.“대충 입어.”미치고 팔짝 뛸 지아였다.‘여행하러 온 거야?’‘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근데 왜 남자 기숙사에 들어온 것 같지?’“이걸 내가 어떻게 입어...”이윽고 한대경은 바로 티셔츠를 친히 끼워주었다.“이렇게 입어.”“...”지아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설마 옷 입을 줄 몰라서 물어봤겠어?’“여기 운영하고 있는 매점이 없어. 일단 대충 입고 있어. 신경 쓰이면 여자 옷 몇 벌만 빼앗아 오라고 할게.”도윤이가 무척이나 그리운 지아였다.도윤은 늘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챙겨주는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한대경은 평생을 혼자 보낼 것이 분명해 보였다.지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챙겼다.적어도 알몸으로 있는 것보다 낫고 날씨도 좋고 하니 옷도 바로 마를 수 있을 것 같았다.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지아는 또다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수건은?”“안에 있잖아.”“그건 네 수건이잖아.”“그래서?”검은색 바지로 갈아입은 한대경은 조금 전에 자기가 썼던 수건을 건네주었다.“자.”남은 수건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대경이 성큼성큼 들어와 지아를 향해 손짓했다.“이리와. 네가 나설 시간이야.”지아는 오늘 매우 순종적으로 아침 일찍부터 약을 준비해 놓았었다.“옷 벗어.”“벗겨.”“하여튼 게을러!”지아는 푸념하면서 외투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한대경의 팔에 있는 상처쯤으로 왔을 때, 동작이 보다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졌다.한 손으로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굵고 튼튼한 그의 팔을 가볍게 눌렀다.살짝 그을린 피부에 지아의 하얀 손가락이 닿자, 그토록 선명한 대비를 보일 수가 없었다.‘여자 손은 다 이렇게 작고 하얀 거야?”지아의 손길에 닿자, 한대경은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바로 그때 지아의 엉덩이를 때렸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그때도 역시나 이처럼 말랑말랑했던 것 같았다.지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평소처럼 약을 바꿔줬다.얼마 느끼지도 못했는데 지아는 바로 붕대를 새로 감아 주었다.한대경은 익숙한 듯 엎드려 지아가 머리에 침을 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허리도 아파. 침 다 놓고 마시지 좀 해 봐. 의사니까 혈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지아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그래... 내가 참고 만다...’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어디 한 번 맛 좀 봐!’“밥 안 먹었어? 좀 더 힘 써 봐.”“...”지아는 순간 이곳으로 팔려 온 머슴인지 임무를 수행하러 온 사람인지 헷갈렸다.한대경은 그 작은 손의 온도를 느끼면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사실 힘도 적당했고 모든 혈자리도 정확하게 눌러서 편안하고 좋았다.지아의 작은 손은 매끄럽고 하얀 것이 자기와 정반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실은 전에 약을 바꿔줄 때 몰래 흘겨본 적이 있는데,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부드럽고 희고 매끄러운 감이 단번에 들었었다.한대경 역시 지아의 신분이 불순하다고 의심한 적이 있으나 보통 총을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손에 굳은살이 있다.하지만 지아는 없었다.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한대경이 일어났다.지아는 순간 화장실에 널어놓은 빨래가 떠오르면서 바로 달려가서 치우려고 했으나 문은 이미 닫겨 있었다.‘망했어! 분명 봤을 거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난리야!’ 지아는 거칠기 그지없는 한대경이라고 하더라도 남자 앞에서 자기 사적인 물건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화장실로 들어선 한대경은 문을 닫고 돌아서자 선반에 걸려 있는 흰색 레이스 속옷 세트를 보게 되었다.매끄러운 실크 소재에 옅은 레이스를 매치해 부드러움까지 더한 속옷이었다.처음으로 여자의 속옷을 보게 된 한대경이다.별거 아니지만, 머릿속에 순간 속옷 차림으로 서 있는 지아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다.그날 밤 지아의 옷을 잡아당겼을 때도 반쯤 나온 가슴을 봤었다.순간 한대경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몸에서도 즉각 반응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한대경은 바로 샤워기를 열어 찬물에 몸을 적셔 몸을 식혔다.지아의 작은 손이 온몸 여기저기를 마사지해 줄 때의 화면과 촉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죽을 것만 같았다.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지아는 오늘 따위 유난히 샤워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마침내 욕실에서 나온 한대경은 머리만 빼곡 내놓고 온몸을 이불 속에 꽁꽁 숨겨둔 지아를 보게 되었다.한대경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게 되었다.냉정하게 말하자면 지아의 얼굴은 10점 만점에서 5점 정도밖에 안 된다.차분한 이미지만 있을 뿐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조금 전 화장실에서 한 짓을 떠올리면서 한대경은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저런 여자한테 반응이 일어나다니!’지아는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대경을 보고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참다못해 손을 들어 흔들더니 해석하기 시작했다.“그...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화장실에 널어 둔 것뿐이야.”한대경의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지아의 팔이 소매 끝에서 살짝 드러났는데, 그 팔이 유난히 가늘고 하얗게 보였다. 그녀의 피부는
소지아가 위암 양성 판정을 받았던 날, 이도윤은 자신의 첫사랑과 함께 그녀의 아들과 아동 병원에 있었다.병원 복도에서 임건우는 검사 보고서를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지아야, 검사 결과 나왔어. 악성 종양 말기야, 수술 성공하면 5년 생존율은 15~30% 정도고.”소지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깨에 멘 숄더백 끈을 잡아당겼고, 약간 창백한 작은 얼굴에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선배, 수술 안 하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6개월에서 1년, 사람마다 다르지. 네 상황은 먼저 약물치료를 두 번 받은 뒤,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 하면 암세포의 확산과 전이의 위험을 막을 수 있거든.”소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했다.“고마워요, 선배.”“나한테 고맙긴, 바로 입원 수속 밟자.”“됐어요, 치료할 생각이 없어요. 약물 치료 견디기 힘들 거예요.”임건우는 몇 마디 더 설득하고 싶었지만 소지아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선배, 이건 일단 비밀로 해줘요. 가족들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소씨 가문 파산 이후로 아버지의 거액의 입원비를 내는 것만으로도 소지아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차마 가족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임건우는 소지아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었다.“걱정 마. 입 꼭 다물고 있을게. 참, 너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네 남편 쪽은...”“선배, 우리 아빠 잘 부탁할게요,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소지아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임건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떠났다.임건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지아가 대학을 휴학하고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학계의 천재로 불리던 소지아는 그렇게 의학계에서 사라져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었다.지아의 아버지 소계훈이 치료를 받는 최근 2년 동안, 오직 소지아만이 바쁜 일정을 쪼개 그를 돌보았다. 정작 소지아 자신은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지나가던 행인이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고,
어두컴컴한 밤, 소지아는 혼자 욕실로 돌아왔다.수도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을 틀자 소지아를 둘러싸고 있던 추위가 씻겨나갔다. 빨갛게 부은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한 어린이 방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가볍게 벨을 흔들자, 오르골 음악 소리가 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방의 조명은 무척 따뜻했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소지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이게 내가 받아야 할 벌인가 봐. 뱃속의 아이를 지켜내지 못해서 지금 신이 이제 내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건가...’소지아는 1.2미터 길이의 어린이 침대에 올라 누워 몸을 웅크렸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오른쪽 눈으로 흘러내리며 볼에서 미끄러져 아래에 깔린 담요까지 촉촉하게 적셨다.침대 위에 있던 인형을 꼭 안고 중얼거렸다.“미안해, 아가야, 다 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너를 지켜내지 못 했어. 근데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곧 갈게.”아이가 세상을 떠난, 소지아의 정신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아름다운 꽃이 나날이 시들어가는 것 같았다.어둠에 잠긴 바깥 풍경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이 돈만 남기면 자신의 아이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이튿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소지아는 이미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고개를 숙여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결혼사진을 바라보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그녀는 특별히 위에 좋다는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한 좀 더 오래 살아서 아버지를 돌보고 싶었다.소지아는 외출하자마자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보호자님, 지금 환자분께서 갑자기 심장이 발작을 일으켜서 이미 수술실로 옮겼습니다.”“곧 갈게요!”소지아는 재빨리 병원으로 달려갔고, 수술은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수술실 문밖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기다렸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이제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건강하게 회복하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백채원은 하얀 고급 캐시미어 외투를 입고 있었고, 귀에 있는 호주산 진주는 그녀를 부드럽고 기품 있도록 돋보이게 했다.목에 두른 숄만 해도 수백만 원을 호가했고, 점원은 백채원을 알아보고 얼른 맞이했다.“사모님, 오늘은 대표님께서 함께 주얼리 보러 오시지 않으셨네요?”“사모님, 가게에 또 신상이 들어왔는데, 다 사모님과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사모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비취가 도착했는데, 이따가 한 번 착용해 보세요. 사모님 피부색과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점원이 사모님 사모님 하자 백채원은 미소를 지으며 소지아를 쳐다보았고,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승리에 도취되었다.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도윤이 백채원을 무척 아낀다고 알고 있었지만, 소지아가 그의 공식적인 법적 아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소지아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왜 하필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일까?백채원이 부드럽게 물었다.“이렇게 좋은 재질의 반지를 가지고 와서 돈을 바꾸면, 손해가 상당할 것 같은데요.”소지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어 반지를 도로 빼앗아왔다.“안 팔래요.”“안 판다고요? 정말 아쉽네요. 이 반지 정말 맘에 드는데, 그래도 아는 사이니까 비싼 값에 사려고 했어요. 소지아 씨는 돈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소지아의 손은 제자리에 굳어졌다. 그렇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아주 간절하게. 백채원은 이 점을 알고 거리낌 없이 그녀를 짓밟았다.옆에 있던 점원이 나서서 얼른 충고했다.“아가씨, 이 분은 이씨 그룹 대표님의 약혼녀인데, 아가씨 반지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니 높은 가격을 제시하실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아가씨도 저희 쪽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죠.”사모님이란 호칭은 소지아의 귀에 무척 거슬렸다. 분명히 1년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이도윤과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며 백채원이 감히 이도윤의 아내가 되겠다는 꿈도 꾸지 못하게 했었는데.겨우 1년만에, 사람들은 모두 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