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의 말에 배신혁은 그제야 기억이 난 듯 무릎을 탁 치면서 말했다.“맞아요! 제가 깜빡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파란색과 하얀색이 더불어서 있는 꽃도 있지 않았어요? 겨울에만 피는 꽃이라고 하던데.” “묵란, 불면증에 약으로 쓸 수도 있습니다.”지아는 덤덤히 보충하면서 초롱초롱한 두 눈으로 덧붙였다.“물어보고 싶으신 게 무엇이죠? 이렇게 에둘러서 물어볼 필요 없습니다.”자신의 계책을 간파한 지아를 보고서 배신혁은 멋쩍게 코만 만졌다.“그럼, 그냥 묻겠습니다. 찾고 있다는 그 약재가 뭡니까?”“월롱초라고 하는 약제입니다. 밤에만 피어나고 꽃잎이 화려해져서 반딧불을 불러올 수도 있죠.”배신혁은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질문을 했으나 빈틈이 없었다.“선생님, 전에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저희 보스께서 성격이 워낙 좀 불같으십니다. 완쾌하실 때까지 옆에서 치료만 잘해 주신다면 사례금 넉넉히 챙겨 드리겠습니다.”그 말에 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사례금 따위 바라지 않습니다. 놓아주기만 하면 됩니다.”“그리고 대체 정체가 뭡니까?”“선생님, 그냥 협조만 잘 해주시면 됩니다. 절대 선생님 다치게 할 일은 없습니다. 해서는 안 되는 생각 따위 절대 하지 마시고요. 그때가 되면 저희 역시 지켜드린다고 장담할 수 없을 겁니다. 그동안 묵으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배신혁의 인솔하에 지아는 작은 방으로 오게 되었다.“지금 조건으로서 이게 최선입니다. 오늘 많이 놀라셨을 텐데, 푹 쉬시기 바랍니다. 도망가실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받아들이시는 게 좋을 겁니다. 우리 보스 보통 무서운 사람이 아닙니다.”배신혁은 문 앞에 서서 섬뜩하게 웃으면서 말했다.“그럼, 안녕히 주무세요.”문을 닫으면서 배신혁은 웃음을 거두었다.이윽고 옆에 있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이 주소로 가서 한 번 알아봐.”“네, 형님.”지아는 그들이 E시로 밤새 달려가서 조사할 것이라고 이미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미 집을 떠난 지도 오래되었고 사고로 죽었다고 소문이 널리 퍼져
“선생님, 너무 긴장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 보스 치료만 정성껏 해주시면 됩니다. 보스께서 부르십니다.”한대경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그는 이제 막 욕실에서 나오고 있었다.허리춤에 샤워 타일을 두르고서 튼튼한 상체와 튼튼한 종아리를 드러냈다.어젯밤에 응급치료를 마치고 감싸주었던 붕대에서는 피가 약간 보이기도 했다.‘내가 살다 살다 저런 미친놈은 처음이야. 저몸으로 설마 뭐라도 한 거 아니야?’지아는 여러 스타일의 남자와 접촉한 적이 있지만, 한대경처럼 거칠고 막무가내인 남자는 처음이었다.“너 다친 거 몰라?”지아는 한대경의 팔을 가리키면서 물었다.수건으로 머리를 대충 닦고 있던 한대경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그래서 너한테 오라고 한 거잖아. 뭐가 문제라도 되는 거야?”‘저놈의 뇌 구조는 대체 어떻게 생겼을까?’점점 지아의 마지노선을 건드리고 있는 한대경이다.지아는 화가 잔뜩 난 얼굴로 손을 들어 한대경의 머리를 뒤로 밀었다.“너 어디 아프지? 죽고 싶으면 멀리 떨어져서 죽어. 너처럼 이렇게 협조하지 않은 환자는 정말 처음이야. 내가 아니라 구준이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 너 같은 환자는 사릴 수 없어.”한대경은 지아의 손가락을 움켜쥐고 눈에 노기를 띠며 말했다.“네 손가락 지금 바로 부러뜨릴 수 있는데, 어디 한번 해볼래? 까불지 마.”그러자 지아는 그를 흘겨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까불지 마? 네가 나한테 뭐라도 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그리고 그 멘트 너무 구렸어. 지가 무슨 대표라도 되는 줄 아나.”말하면서 지아는 약을 정리하기 시작했다.이때 한대경은 어리둥절한 채로 배신혁에게 물었다.“갑자기 대표라는 게 무슨 말이야?”배신혁은 헛기침을 하면서 대답했다.“옛날 소설이나 드라마에서 종종 나오는 캐릭터인데, 보통 여자 주인공이 가난하고 남자 주인공은 한 회사의 대표님으로 여자 주인공을 흔모하면서 괴롭히기도 하고 강박적으로 자기를 사랑하게 하고 그러죠. 최근에 들어 별로 유행하는 것 같
지아는 한대경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혼자서는 지금 이 국면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오늘 한대경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C 국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A 국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해야 했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상책이 아니었다.한대경이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화를 누르기로 했다.“대체 정체가 뭐야?”“치료만 해주면 돼.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지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너 침대에 엎드려 있어. 이따가 맥부터 짚어줄게. 두통이 심한 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야.”한대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지아는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문부터 잠갔다.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걸 보니 지아에 대한 의심은 접은 것으로 보인다.한대경이 방금 목욕을 마친 것이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조금 전에 보니 손가락에 반지도 없었었다.그럼, 샤워할 때 화장실에 잠시 두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지아는 그가 벗은 옷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뒤졌다.‘반지는?’‘설마 끼고 나온 게 아니었어?’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이윽고 손을 깨끗이 씻고 밖으로 나갔는데, 한대경은 지아의 말대로 순순히 누워있었다.다만 겁 없이 ‘대’자로 누워있었다.샤워 타일이 반쯤 벗겨져 튼튼한 허벅지 안쪽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그의 허벅지 안쪽과 눈이 마주친 지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이윽고 침대 옆에 앉아서 맥박을 짚기 시작했다.반지가 곁에 없다면 지아는 반드시 그를 따라 함께 그의 나라로 가야만 했다.그로써 한대경의 신임을 완전히 받아야 하고 반지도 기회를 빌려 몰래 가지고 나와야한다.지아는 아주 섬세하게 보고서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옮겼다.“선생님, 보스님은 어떠하십니까?”지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머리뿐만 아니라 심맥이 막히는 등 큰 문제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전에 한대경이 지아를 의사라고 소개했을 때까지 배신혁은 믿지 않았
마지막 힘으로 겨우 욕을 퍼부었던 남자는 그대로 한 방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흘러내린 피가 지아의 신발 밑창을 그대로 적시고 말았다.요 몇 년 동안 지아는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왔었다.하지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였을 뿐이고 원칙을 지키면서 손에 피를 묻혔었다.‘포로’라고 잡혀 온 그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면 그냥 자기 국가를 사랑하는 서민으로 보였다.죽기 직전의 남자 모습은 미연처럼 보였고 그녀 역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한 사람이다.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아는 여전히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을 만졌는데, 그때 미연이가 흘렸던 피의 온도와 촉감을 다시 느끼는 것만 같았다.두 눈을 부릅뜬 지아의 모습에 한대경은 무척이나 만족한 모습이었다.천천히 일어나서 죽은 남자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남자의 가슴에 꽂힌 칼을 도로 뽑아버렸다.이윽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칼을 다른 사람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그때 지아가 한대경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소리쳤다.“안 돼!”높이 치켜든 칼에는 남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그리고 그 피는 매끄럽고 차가운 칼날을 타고 지아의 얼굴 위로 미끄러져 떨어졌다.“이제 치료할 수 있겠어?”한대경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나지막이 물었다.지아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대답했다.“그래. 할게.”한대경은 손뼉을 치면서 배신혁에게 남은 포로와 시체를 끌고 나가라고 했다.바닥에 낭자한 피를 보고서 지아는 마치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한대경이 얼마나 독한 사람이고 악질인지 이미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목격하게 되니 공포 그 자체였다.한대경은 티슈로 칼을 깨끗이 닦고 나서 한쪽으로 훅 던지고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시작해.”지아는 침을 들고 그의 목구멍을 노려보았는데, 귓가에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여긴 지옥이 될 거야. 잘 생각하고 결정해.”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차례로 침을 놓았지만 가슴 속의 그
우람진 한대경의 몸집에 가려진 지아는 맹수에게 잡힌 토끼처럼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두 손을 땅에 짚고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 떨고 있는 모습을 실남 나게 연기했다.그렇다, 한밤중에 도망가는 것마저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었다.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처참하고 무고한 죽음 현장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가해자인 남자와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지금 이 상황에서 본다면 탈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순순히 말을 들어야 한대경의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이 또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지아는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도망갈 생각은 없었어!”한대경은 한쪽을 살짝 구부린 채 무척이나 억울한 듯 연기하고 있는 지아를 바라보면서 씩 하고 웃었다.“그래?”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바람 쐬러 나온 거야. 앞으로 사람 좀 죽이지 않으면 안 돼?”“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이유로 남을 죽이겠어. 다만 요즘 밖이 하도 위험해서 밖으로 못 나오게 한 것뿐이야. 널 위해서 말이야.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말하면서 그는 지아를 그대로 어깨에 메고 가려고 했다.손끝이 지아의 몸에 닿자마자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아의 눈빛으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한대경은 지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말만 잘 들으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말하면서 어깨에 짐을 이듯이 지아를 어깨에 툭하고 놓았다.‘보통 인간은 아니야. 안고 갈 수도 있으면서 왜 굳이 이렇게 납치해 가는 것처럼 어깨에 이고 가는 거야!’“놔줘, 혼자 갈 수 있어.”낯선 남자와 살이 맞대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지아였다.비록 상대도 자기한테 그런 감정 따위가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몇 초 동안 몸부림치다가 한대경은 참다못해 지아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조용히 해!”‘미친놈! 내가 언젠가는 너 토막 내고 말 거야!’비록 도윤에게도 상
다행히 바닥에 이불이 두 겹이라 지아는 넘어져도 아프지가 않았다.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러 올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인간 말종 아니야? 어떻게 저딴 남자가 있을 수 있지?’가장 기본적인 도덕도 한대경에게 없는 것만 같았다.한대경은 얼굴이 빨개진 지아를 한 번 힐끗 보고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불 끄고 자.”‘대박이다! 인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아!’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대로 불을 끄러 갔다.캄캄한 밤을 뚫고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꽤 예민하다. 자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두말없이 상대 목부터 비틀 수 있어. 내일 아침에 우리 살아서 만나자.”그 말에 지아는 괴상 야릇하게 대답했다.“어머, 대단하시네요. 그냥 눈 뜨고 자지 그래.”“허허.”지아는 그를 등지고 눕고서 이불까지 덮었다.비록 지금 마음과 같아서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안에 반지가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그러나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고 지아는 자기를 일깨워주었다.어제 밤을 새운 데다 엊그제 내내 달려온 관계로 지아는 꽤 피곤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적어도 지금은 한대경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불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차차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듣고서 한대경은 속으로 웃었다.‘그렇다고 저렇게 속도 없이 자는 거야?’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불빛을 통해 바닥에 누워있는 지아의 모습을 어슴푸레 볼 수 있었다.지아는 지금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있다.그렇게 조용한 밤이 흘러 지나갔다.아침이 밝아오자, 지아는 문뜩 눈을 뜨고 일어났다.그녀가 깨난 것을 느끼고 한대경 역시 침대에서 일어났다.지아가 자고 있는 곳을 밟고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지아는 눈 뜨자마자 한대경의 단단하고 길쭉한 다리와 함께 남자다움이 넘치는 털을 보게 되었다.위로 서서히 시선을 돌려보니 검은색 팬티에 그곳의 윤곽까지 선명하
침실은 크지 않고 공기 중에 옅은 물기가 자욱했다.지아는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너한테 포로로 잡혀 온 뒤로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어. 좀 씻고 싶어.”“씻어.”한대경은 아주 심플하게 대답했다.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갈아입을 옷이 없어.”한대경은 마침내 지아가 꿈에 그리던 서랍장을 열었다.그 속에는 트렁크 하나만 있었고 모두 한대경의 일상복이었다.‘한 나라의 주인이 맞긴 한 거야?”지아는 같은 자리에 있는 부남진을 떠올리게 되었다.다 같은 지위에서 부남진은 무엇이든 최고만 따지고 가장 좋은 것만 쓰고 먹고 하니 말이다.옷도 브랜드 로고가 없지만, 유명 디자이너가 한 땀씩 직접 만든 옷만 입고 다닌다.지아는 한대경 트렁크에 들어 있는 옷을 힐끗 보았는데, 코트 두 벌, 반팔과 바지 몇 벌이 전부였다.그중에서 한대경은 잡히는대로 꾸깃꾸깃한 반팔과 바지를 집어 지아에게 던졌다.“대충 입어.”미치고 팔짝 뛸 지아였다.‘여행하러 온 거야?’‘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근데 왜 남자 기숙사에 들어온 것 같지?’“이걸 내가 어떻게 입어...”이윽고 한대경은 바로 티셔츠를 친히 끼워주었다.“이렇게 입어.”“...”지아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설마 옷 입을 줄 몰라서 물어봤겠어?’“여기 운영하고 있는 매점이 없어. 일단 대충 입고 있어. 신경 쓰이면 여자 옷 몇 벌만 빼앗아 오라고 할게.”도윤이가 무척이나 그리운 지아였다.도윤은 늘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챙겨주는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한대경은 평생을 혼자 보낼 것이 분명해 보였다.지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챙겼다.적어도 알몸으로 있는 것보다 낫고 날씨도 좋고 하니 옷도 바로 마를 수 있을 것 같았다.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지아는 또다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수건은?”“안에 있잖아.”“그건 네 수건이잖아.”“그래서?”검은색 바지로 갈아입은 한대경은 조금 전에 자기가 썼던 수건을 건네주었다.“자.”남은 수건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대경이 성큼성큼 들어와 지아를 향해 손짓했다.“이리와. 네가 나설 시간이야.”지아는 오늘 매우 순종적으로 아침 일찍부터 약을 준비해 놓았었다.“옷 벗어.”“벗겨.”“하여튼 게을러!”지아는 푸념하면서 외투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한대경의 팔에 있는 상처쯤으로 왔을 때, 동작이 보다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졌다.한 손으로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굵고 튼튼한 그의 팔을 가볍게 눌렀다.살짝 그을린 피부에 지아의 하얀 손가락이 닿자, 그토록 선명한 대비를 보일 수가 없었다.‘여자 손은 다 이렇게 작고 하얀 거야?”지아의 손길에 닿자, 한대경은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바로 그때 지아의 엉덩이를 때렸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그때도 역시나 이처럼 말랑말랑했던 것 같았다.지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평소처럼 약을 바꿔줬다.얼마 느끼지도 못했는데 지아는 바로 붕대를 새로 감아 주었다.한대경은 익숙한 듯 엎드려 지아가 머리에 침을 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허리도 아파. 침 다 놓고 마시지 좀 해 봐. 의사니까 혈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지아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그래... 내가 참고 만다...’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어디 한 번 맛 좀 봐!’“밥 안 먹었어? 좀 더 힘 써 봐.”“...”지아는 순간 이곳으로 팔려 온 머슴인지 임무를 수행하러 온 사람인지 헷갈렸다.한대경은 그 작은 손의 온도를 느끼면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사실 힘도 적당했고 모든 혈자리도 정확하게 눌러서 편안하고 좋았다.지아의 작은 손은 매끄럽고 하얀 것이 자기와 정반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실은 전에 약을 바꿔줄 때 몰래 흘겨본 적이 있는데,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부드럽고 희고 매끄러운 감이 단번에 들었었다.한대경 역시 지아의 신분이 불순하다고 의심한 적이 있으나 보통 총을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손에 굳은살이 있다.하지만 지아는 없었다.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