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한대경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혼자서는 지금 이 국면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오늘 한대경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C 국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A 국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해야 했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상책이 아니었다.한대경이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화를 누르기로 했다.“대체 정체가 뭐야?”“치료만 해주면 돼.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지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너 침대에 엎드려 있어. 이따가 맥부터 짚어줄게. 두통이 심한 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야.”한대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지아는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문부터 잠갔다.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걸 보니 지아에 대한 의심은 접은 것으로 보인다.한대경이 방금 목욕을 마친 것이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조금 전에 보니 손가락에 반지도 없었었다.그럼, 샤워할 때 화장실에 잠시 두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지아는 그가 벗은 옷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뒤졌다.‘반지는?’‘설마 끼고 나온 게 아니었어?’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이윽고 손을 깨끗이 씻고 밖으로 나갔는데, 한대경은 지아의 말대로 순순히 누워있었다.다만 겁 없이 ‘대’자로 누워있었다.샤워 타일이 반쯤 벗겨져 튼튼한 허벅지 안쪽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그의 허벅지 안쪽과 눈이 마주친 지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이윽고 침대 옆에 앉아서 맥박을 짚기 시작했다.반지가 곁에 없다면 지아는 반드시 그를 따라 함께 그의 나라로 가야만 했다.그로써 한대경의 신임을 완전히 받아야 하고 반지도 기회를 빌려 몰래 가지고 나와야한다.지아는 아주 섬세하게 보고서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옮겼다.“선생님, 보스님은 어떠하십니까?”지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머리뿐만 아니라 심맥이 막히는 등 큰 문제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전에 한대경이 지아를 의사라고 소개했을 때까지 배신혁은 믿지 않았
마지막 힘으로 겨우 욕을 퍼부었던 남자는 그대로 한 방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흘러내린 피가 지아의 신발 밑창을 그대로 적시고 말았다.요 몇 년 동안 지아는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왔었다.하지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였을 뿐이고 원칙을 지키면서 손에 피를 묻혔었다.‘포로’라고 잡혀 온 그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면 그냥 자기 국가를 사랑하는 서민으로 보였다.죽기 직전의 남자 모습은 미연처럼 보였고 그녀 역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한 사람이다.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아는 여전히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을 만졌는데, 그때 미연이가 흘렸던 피의 온도와 촉감을 다시 느끼는 것만 같았다.두 눈을 부릅뜬 지아의 모습에 한대경은 무척이나 만족한 모습이었다.천천히 일어나서 죽은 남자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남자의 가슴에 꽂힌 칼을 도로 뽑아버렸다.이윽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칼을 다른 사람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그때 지아가 한대경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소리쳤다.“안 돼!”높이 치켜든 칼에는 남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그리고 그 피는 매끄럽고 차가운 칼날을 타고 지아의 얼굴 위로 미끄러져 떨어졌다.“이제 치료할 수 있겠어?”한대경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나지막이 물었다.지아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대답했다.“그래. 할게.”한대경은 손뼉을 치면서 배신혁에게 남은 포로와 시체를 끌고 나가라고 했다.바닥에 낭자한 피를 보고서 지아는 마치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한대경이 얼마나 독한 사람이고 악질인지 이미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목격하게 되니 공포 그 자체였다.한대경은 티슈로 칼을 깨끗이 닦고 나서 한쪽으로 훅 던지고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시작해.”지아는 침을 들고 그의 목구멍을 노려보았는데, 귓가에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여긴 지옥이 될 거야. 잘 생각하고 결정해.”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차례로 침을 놓았지만 가슴 속의 그
우람진 한대경의 몸집에 가려진 지아는 맹수에게 잡힌 토끼처럼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두 손을 땅에 짚고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 떨고 있는 모습을 실남 나게 연기했다.그렇다, 한밤중에 도망가는 것마저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었다.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처참하고 무고한 죽음 현장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가해자인 남자와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지금 이 상황에서 본다면 탈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순순히 말을 들어야 한대경의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이 또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지아는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도망갈 생각은 없었어!”한대경은 한쪽을 살짝 구부린 채 무척이나 억울한 듯 연기하고 있는 지아를 바라보면서 씩 하고 웃었다.“그래?”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바람 쐬러 나온 거야. 앞으로 사람 좀 죽이지 않으면 안 돼?”“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이유로 남을 죽이겠어. 다만 요즘 밖이 하도 위험해서 밖으로 못 나오게 한 것뿐이야. 널 위해서 말이야.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말하면서 그는 지아를 그대로 어깨에 메고 가려고 했다.손끝이 지아의 몸에 닿자마자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아의 눈빛으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한대경은 지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말만 잘 들으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말하면서 어깨에 짐을 이듯이 지아를 어깨에 툭하고 놓았다.‘보통 인간은 아니야. 안고 갈 수도 있으면서 왜 굳이 이렇게 납치해 가는 것처럼 어깨에 이고 가는 거야!’“놔줘, 혼자 갈 수 있어.”낯선 남자와 살이 맞대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지아였다.비록 상대도 자기한테 그런 감정 따위가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몇 초 동안 몸부림치다가 한대경은 참다못해 지아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조용히 해!”‘미친놈! 내가 언젠가는 너 토막 내고 말 거야!’비록 도윤에게도 상
다행히 바닥에 이불이 두 겹이라 지아는 넘어져도 아프지가 않았다.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러 올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인간 말종 아니야? 어떻게 저딴 남자가 있을 수 있지?’가장 기본적인 도덕도 한대경에게 없는 것만 같았다.한대경은 얼굴이 빨개진 지아를 한 번 힐끗 보고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불 끄고 자.”‘대박이다! 인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아!’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대로 불을 끄러 갔다.캄캄한 밤을 뚫고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꽤 예민하다. 자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두말없이 상대 목부터 비틀 수 있어. 내일 아침에 우리 살아서 만나자.”그 말에 지아는 괴상 야릇하게 대답했다.“어머, 대단하시네요. 그냥 눈 뜨고 자지 그래.”“허허.”지아는 그를 등지고 눕고서 이불까지 덮었다.비록 지금 마음과 같아서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안에 반지가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그러나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고 지아는 자기를 일깨워주었다.어제 밤을 새운 데다 엊그제 내내 달려온 관계로 지아는 꽤 피곤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적어도 지금은 한대경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불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차차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듣고서 한대경은 속으로 웃었다.‘그렇다고 저렇게 속도 없이 자는 거야?’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불빛을 통해 바닥에 누워있는 지아의 모습을 어슴푸레 볼 수 있었다.지아는 지금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있다.그렇게 조용한 밤이 흘러 지나갔다.아침이 밝아오자, 지아는 문뜩 눈을 뜨고 일어났다.그녀가 깨난 것을 느끼고 한대경 역시 침대에서 일어났다.지아가 자고 있는 곳을 밟고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지아는 눈 뜨자마자 한대경의 단단하고 길쭉한 다리와 함께 남자다움이 넘치는 털을 보게 되었다.위로 서서히 시선을 돌려보니 검은색 팬티에 그곳의 윤곽까지 선명하
침실은 크지 않고 공기 중에 옅은 물기가 자욱했다.지아는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너한테 포로로 잡혀 온 뒤로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어. 좀 씻고 싶어.”“씻어.”한대경은 아주 심플하게 대답했다.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갈아입을 옷이 없어.”한대경은 마침내 지아가 꿈에 그리던 서랍장을 열었다.그 속에는 트렁크 하나만 있었고 모두 한대경의 일상복이었다.‘한 나라의 주인이 맞긴 한 거야?”지아는 같은 자리에 있는 부남진을 떠올리게 되었다.다 같은 지위에서 부남진은 무엇이든 최고만 따지고 가장 좋은 것만 쓰고 먹고 하니 말이다.옷도 브랜드 로고가 없지만, 유명 디자이너가 한 땀씩 직접 만든 옷만 입고 다닌다.지아는 한대경 트렁크에 들어 있는 옷을 힐끗 보았는데, 코트 두 벌, 반팔과 바지 몇 벌이 전부였다.그중에서 한대경은 잡히는대로 꾸깃꾸깃한 반팔과 바지를 집어 지아에게 던졌다.“대충 입어.”미치고 팔짝 뛸 지아였다.‘여행하러 온 거야?’‘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근데 왜 남자 기숙사에 들어온 것 같지?’“이걸 내가 어떻게 입어...”이윽고 한대경은 바로 티셔츠를 친히 끼워주었다.“이렇게 입어.”“...”지아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설마 옷 입을 줄 몰라서 물어봤겠어?’“여기 운영하고 있는 매점이 없어. 일단 대충 입고 있어. 신경 쓰이면 여자 옷 몇 벌만 빼앗아 오라고 할게.”도윤이가 무척이나 그리운 지아였다.도윤은 늘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챙겨주는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한대경은 평생을 혼자 보낼 것이 분명해 보였다.지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챙겼다.적어도 알몸으로 있는 것보다 낫고 날씨도 좋고 하니 옷도 바로 마를 수 있을 것 같았다.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지아는 또다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수건은?”“안에 있잖아.”“그건 네 수건이잖아.”“그래서?”검은색 바지로 갈아입은 한대경은 조금 전에 자기가 썼던 수건을 건네주었다.“자.”남은 수건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대경이 성큼성큼 들어와 지아를 향해 손짓했다.“이리와. 네가 나설 시간이야.”지아는 오늘 매우 순종적으로 아침 일찍부터 약을 준비해 놓았었다.“옷 벗어.”“벗겨.”“하여튼 게을러!”지아는 푸념하면서 외투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한대경의 팔에 있는 상처쯤으로 왔을 때, 동작이 보다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졌다.한 손으로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굵고 튼튼한 그의 팔을 가볍게 눌렀다.살짝 그을린 피부에 지아의 하얀 손가락이 닿자, 그토록 선명한 대비를 보일 수가 없었다.‘여자 손은 다 이렇게 작고 하얀 거야?”지아의 손길에 닿자, 한대경은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바로 그때 지아의 엉덩이를 때렸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그때도 역시나 이처럼 말랑말랑했던 것 같았다.지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평소처럼 약을 바꿔줬다.얼마 느끼지도 못했는데 지아는 바로 붕대를 새로 감아 주었다.한대경은 익숙한 듯 엎드려 지아가 머리에 침을 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허리도 아파. 침 다 놓고 마시지 좀 해 봐. 의사니까 혈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지아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그래... 내가 참고 만다...’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어디 한 번 맛 좀 봐!’“밥 안 먹었어? 좀 더 힘 써 봐.”“...”지아는 순간 이곳으로 팔려 온 머슴인지 임무를 수행하러 온 사람인지 헷갈렸다.한대경은 그 작은 손의 온도를 느끼면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사실 힘도 적당했고 모든 혈자리도 정확하게 눌러서 편안하고 좋았다.지아의 작은 손은 매끄럽고 하얀 것이 자기와 정반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실은 전에 약을 바꿔줄 때 몰래 흘겨본 적이 있는데,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부드럽고 희고 매끄러운 감이 단번에 들었었다.한대경 역시 지아의 신분이 불순하다고 의심한 적이 있으나 보통 총을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손에 굳은살이 있다.하지만 지아는 없었다.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한대경이 일어났다.지아는 순간 화장실에 널어놓은 빨래가 떠오르면서 바로 달려가서 치우려고 했으나 문은 이미 닫겨 있었다.‘망했어! 분명 봤을 거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난리야!’ 지아는 거칠기 그지없는 한대경이라고 하더라도 남자 앞에서 자기 사적인 물건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화장실로 들어선 한대경은 문을 닫고 돌아서자 선반에 걸려 있는 흰색 레이스 속옷 세트를 보게 되었다.매끄러운 실크 소재에 옅은 레이스를 매치해 부드러움까지 더한 속옷이었다.처음으로 여자의 속옷을 보게 된 한대경이다.별거 아니지만, 머릿속에 순간 속옷 차림으로 서 있는 지아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다.그날 밤 지아의 옷을 잡아당겼을 때도 반쯤 나온 가슴을 봤었다.순간 한대경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몸에서도 즉각 반응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한대경은 바로 샤워기를 열어 찬물에 몸을 적셔 몸을 식혔다.지아의 작은 손이 온몸 여기저기를 마사지해 줄 때의 화면과 촉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죽을 것만 같았다.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지아는 오늘 따위 유난히 샤워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마침내 욕실에서 나온 한대경은 머리만 빼곡 내놓고 온몸을 이불 속에 꽁꽁 숨겨둔 지아를 보게 되었다.한대경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게 되었다.냉정하게 말하자면 지아의 얼굴은 10점 만점에서 5점 정도밖에 안 된다.차분한 이미지만 있을 뿐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조금 전 화장실에서 한 짓을 떠올리면서 한대경은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저런 여자한테 반응이 일어나다니!’지아는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대경을 보고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참다못해 손을 들어 흔들더니 해석하기 시작했다.“그...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화장실에 널어 둔 것뿐이야.”한대경의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지아의 팔이 소매 끝에서 살짝 드러났는데, 그 팔이 유난히 가늘고 하얗게 보였다. 그녀의 피부는
순간 지아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머릿속에는 갖은 해결책들이 번쩍이고 있었다.필사적으로 싸워봤자 승산은 얼마 있을까?설령 이 문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도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체포되지 않을까?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야단치고 싶은 심정이다.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걸 마치고 도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섣불리 움직였던 것이다.‘어떡하지?’지아는 옷 한 벌을 꽉 잡아당기고 말을 다듬어 보려고 했다.‘믿어줄까?’한대경은 문을 열자 그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지아를 보게 되었다.옷은 딱 마침 허벅지까지 중요한 그 부위를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매일 청바지를 입고 있던 지아의 두 다리가 모델 뺨칠 정도로 길고 하얗고 매끈할 줄은 몰랐다.검은 다리털로 뒤덮인 자신의 다리와 달리 발바닥까지 잡색이 없을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으니 한대경은 서서히 넋이 나갔다.그리고 지금 지아는 아무런 이너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순간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한대경은 침을 삼켰다.애매한 분위기와 더불어 야릇한 불꽃까지 방 안 곳곳에서 터지는 것만 같았다.지아는 마음속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며칠 전 한대경이 사람을 마구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지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애써 덤덤한 척하고 말했다.“바지가 아직 안 말라서 그러는데 바지 좀... 너도 없고 그래서 함부로 뒤진 거야... 미안...”이 핑계는 완벽하지만 그가 믿는지 안 믿는지 봐야 한다.한대경은 한 걸음씩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지아는 점점 더 죽을 것만 같아 애꿎은 옷만 꽉 잡고 있었다.어느새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한대경은 어둡기 그지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는데, 저승사자가 따로없었다.이윽고 코 앞까지 다가온 한대경에게서 숨막히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그때 한대경은 갑자기 지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지아는 이미 필사적으로 달려들려고 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두 손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