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한대경의 신분을 분명히 알고 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혼자서는 지금 이 국면을 바꿀 능력이 없었다.오늘 한대경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C 국의 공격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A 국은 어쩔 수 없이 응전해야 했고 전쟁을 멈추는 것이 상책이 아니었다.한대경이 어떻게 그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일단은화를 누르기로 했다.“대체 정체가 뭐야?”“치료만 해주면 돼. 다른 건 신경 쓰지 마.”지아는 어두운 표정으로 이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가고 싶지 않았다.“화장실 좀... 너 침대에 엎드려 있어. 이따가 맥부터 짚어줄게. 두통이 심한 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거야.”한대경은 고개를 끄덕였고 지아는 화장실로 들어서자마자 문부터 잠갔다.어젯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걸 보니 지아에 대한 의심은 접은 것으로 보인다.한대경이 방금 목욕을 마친 것이 가장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조금 전에 보니 손가락에 반지도 없었었다.그럼, 샤워할 때 화장실에 잠시 두었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지아는 그가 벗은 옷을 조심스럽게 샅샅이 뒤졌다.‘반지는?’‘설마 끼고 나온 게 아니었어?’지아는 눈살을 찌푸렸다.이윽고 손을 깨끗이 씻고 밖으로 나갔는데, 한대경은 지아의 말대로 순순히 누워있었다.다만 겁 없이 ‘대’자로 누워있었다.샤워 타일이 반쯤 벗겨져 튼튼한 허벅지 안쪽까지 훤히 보일 정도였다.그의 허벅지 안쪽과 눈이 마주친 지아는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이윽고 침대 옆에 앉아서 맥박을 짚기 시작했다.반지가 곁에 없다면 지아는 반드시 그를 따라 함께 그의 나라로 가야만 했다.그로써 한대경의 신임을 완전히 받아야 하고 반지도 기회를 빌려 몰래 가지고 나와야한다.지아는 아주 섬세하게 보고서 천천히 그의 손가락을 옮겼다.“선생님, 보스님은 어떠하십니까?”지아는 콧방귀를 뀌면서 대답했다.“머리뿐만 아니라 심맥이 막히는 등 큰 문제가 여기저기 있습니다.” 전에 한대경이 지아를 의사라고 소개했을 때까지 배신혁은 믿지 않았
마지막 힘으로 겨우 욕을 퍼부었던 남자는 그대로 한 방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흘러내린 피가 지아의 신발 밑창을 그대로 적시고 말았다.요 몇 년 동안 지아는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혀왔었다.하지만 마땅히 죽여야 할 사람만 죽였을 뿐이고 원칙을 지키면서 손에 피를 묻혔었다.‘포로’라고 잡혀 온 그 사람들의 옷차림으로 보면 그냥 자기 국가를 사랑하는 서민으로 보였다.죽기 직전의 남자 모습은 미연처럼 보였고 그녀 역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한 사람이다.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지아는 여전히 이런 상황에 적응할 수 없었다.지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기 얼굴을 만졌는데, 그때 미연이가 흘렸던 피의 온도와 촉감을 다시 느끼는 것만 같았다.두 눈을 부릅뜬 지아의 모습에 한대경은 무척이나 만족한 모습이었다.천천히 일어나서 죽은 남자 쪽으로 서서히 다가가더니 허리를 굽혀 남자의 가슴에 꽂힌 칼을 도로 뽑아버렸다.이윽고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바로 칼을 다른 사람 가슴을 향해 내던졌다.그때 지아가 한대경의 손을 덥석 잡으면서 소리쳤다.“안 돼!”높이 치켜든 칼에는 남자의 피가 묻어 있었다.그리고 그 피는 매끄럽고 차가운 칼날을 타고 지아의 얼굴 위로 미끄러져 떨어졌다.“이제 치료할 수 있겠어?”한대경은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나지막이 물었다.지아는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면서 대답했다.“그래. 할게.”한대경은 손뼉을 치면서 배신혁에게 남은 포로와 시체를 끌고 나가라고 했다.바닥에 낭자한 피를 보고서 지아는 마치 악몽을 꾼 것만 같았다.한대경이 얼마나 독한 사람이고 악질인지 이미 자료를 통해 알고 있었으나 직접 목격하게 되니 공포 그 자체였다.한대경은 티슈로 칼을 깨끗이 닦고 나서 한쪽으로 훅 던지고 다시 침대에 엎드렸다.“시작해.”지아는 침을 들고 그의 목구멍을 노려보았는데, 귓가에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나한테 문제가 생기면 여긴 지옥이 될 거야. 잘 생각하고 결정해.”지아는 정신을 차리고 차례로 침을 놓았지만 가슴 속의 그
우람진 한대경의 몸집에 가려진 지아는 맹수에게 잡힌 토끼처럼 보였다.자기도 모르게 몸을 파르르 떨면서 두 손을 땅에 짚고 뒤로 계속 물러나면서 떨고 있는 모습을 실남 나게 연기했다.그렇다, 한밤중에 도망가는 것마저 시나리오의 한 장면이었다.보통 여자들은 그렇게 처참하고 무고한 죽음 현장을 보고 나서 가장 먼저 가해자인 남자와 멀어지려고 할 것이다.지금 이 상황에서 본다면 탈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순순히 말을 들어야 한대경의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이 또한 두 사람의 신경전이라고 볼 수 있다.지아는 파르르 떠는 목소리로 말했다.“그냥 바람 쐬러 나왔어. 도망갈 생각은 없었어!”한대경은 한쪽을 살짝 구부린 채 무척이나 억울한 듯 연기하고 있는 지아를 바라보면서 씩 하고 웃었다.“그래?”지아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바람 쐬러 나온 거야. 앞으로 사람 좀 죽이지 않으면 안 돼?”“도망가려고 한 게 아니었다면, 내가 무슨 이유로 남을 죽이겠어. 다만 요즘 밖이 하도 위험해서 밖으로 못 나오게 한 것뿐이야. 널 위해서 말이야. 이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어.”말하면서 그는 지아를 그대로 어깨에 메고 가려고 했다.손끝이 지아의 몸에 닿자마자 벌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내가 그렇게 무서워?”입으로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지아의 눈빛으로 그 답을 알 수 있었다.한대경은 지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면서 말했다.“걱정하지 마. 말만 잘 들으면 절대 섭섭지 않게 해줄게.”말하면서 어깨에 짐을 이듯이 지아를 어깨에 툭하고 놓았다.‘보통 인간은 아니야. 안고 갈 수도 있으면서 왜 굳이 이렇게 납치해 가는 것처럼 어깨에 이고 가는 거야!’“놔줘, 혼자 갈 수 있어.”낯선 남자와 살이 맞대는 것이 무척이나 싫은 지아였다.비록 상대도 자기한테 그런 감정 따위가 없지만 그래도 싫었다.몇 초 동안 몸부림치다가 한대경은 참다못해 지아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조용히 해!”‘미친놈! 내가 언젠가는 너 토막 내고 말 거야!’비록 도윤에게도 상
다행히 바닥에 이불이 두 겹이라 지아는 넘어져도 아프지가 않았다.하지만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러 올라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인간 말종 아니야? 어떻게 저딴 남자가 있을 수 있지?’가장 기본적인 도덕도 한대경에게 없는 것만 같았다.한대경은 얼굴이 빨개진 지아를 한 번 힐끗 보고서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불 끄고 자.”‘대박이다! 인간이라고 표현하고 싶지도 않아!’화가 치밀어 오르긴 했지만, 그대로 불을 끄러 갔다.캄캄한 밤을 뚫고 한대경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나 꽤 예민하다. 자고 있어도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바로 두말없이 상대 목부터 비틀 수 있어. 내일 아침에 우리 살아서 만나자.”그 말에 지아는 괴상 야릇하게 대답했다.“어머, 대단하시네요. 그냥 눈 뜨고 자지 그래.”“허허.”지아는 그를 등지고 눕고서 이불까지 덮었다.비록 지금 마음과 같아서는 침대 머리맡에 있는 서랍장을 열어 보고 싶은 심정이다.안에 반지가 들어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그러나 절대 방심하면 안 된다고 지아는 자기를 일깨워주었다.어제 밤을 새운 데다 엊그제 내내 달려온 관계로 지아는 꽤 피곤해서 바로 잠에 들었다.적어도 지금은 한대경이 그녀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그렇지 않고서야 굳이 이불까지 준비해 줄 필요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차차 평온하게 숨을 내쉬는 것을 듣고서 한대경은 속으로 웃었다.‘그렇다고 저렇게 속도 없이 자는 거야?’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불빛을 통해 바닥에 누워있는 지아의 모습을 어슴푸레 볼 수 있었다.지아는 지금 마치 작은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있다.그렇게 조용한 밤이 흘러 지나갔다.아침이 밝아오자, 지아는 문뜩 눈을 뜨고 일어났다.그녀가 깨난 것을 느끼고 한대경 역시 침대에서 일어났다.지아가 자고 있는 곳을 밟고서 옷을 입기 시작했다.지아는 눈 뜨자마자 한대경의 단단하고 길쭉한 다리와 함께 남자다움이 넘치는 털을 보게 되었다.위로 서서히 시선을 돌려보니 검은색 팬티에 그곳의 윤곽까지 선명하
침실은 크지 않고 공기 중에 옅은 물기가 자욱했다.지아는 눈길을 돌리고 말했다.“너한테 포로로 잡혀 온 뒤로 며칠 동안 씻지도 못했어. 좀 씻고 싶어.”“씻어.”한대경은 아주 심플하게 대답했다.지아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말했다.“갈아입을 옷이 없어.”한대경은 마침내 지아가 꿈에 그리던 서랍장을 열었다.그 속에는 트렁크 하나만 있었고 모두 한대경의 일상복이었다.‘한 나라의 주인이 맞긴 한 거야?”지아는 같은 자리에 있는 부남진을 떠올리게 되었다.다 같은 지위에서 부남진은 무엇이든 최고만 따지고 가장 좋은 것만 쓰고 먹고 하니 말이다.옷도 브랜드 로고가 없지만, 유명 디자이너가 한 땀씩 직접 만든 옷만 입고 다닌다.지아는 한대경 트렁크에 들어 있는 옷을 힐끗 보았는데, 코트 두 벌, 반팔과 바지 몇 벌이 전부였다.그중에서 한대경은 잡히는대로 꾸깃꾸깃한 반팔과 바지를 집어 지아에게 던졌다.“대충 입어.”미치고 팔짝 뛸 지아였다.‘여행하러 온 거야?’‘엄청 대단한 사람이라면서... 근데 왜 남자 기숙사에 들어온 것 같지?’“이걸 내가 어떻게 입어...”이윽고 한대경은 바로 티셔츠를 친히 끼워주었다.“이렇게 입어.”“...”지아는 어이가 없었다.‘내가 설마 옷 입을 줄 몰라서 물어봤겠어?’“여기 운영하고 있는 매점이 없어. 일단 대충 입고 있어. 신경 쓰이면 여자 옷 몇 벌만 빼앗아 오라고 할게.”도윤이가 무척이나 그리운 지아였다.도윤은 늘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챙겨주는 남자였으니 말이다.그리고 지금 눈앞에 있는 한대경은 평생을 혼자 보낼 것이 분명해 보였다.지아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푹 숙이고 옷을 챙겼다.적어도 알몸으로 있는 것보다 낫고 날씨도 좋고 하니 옷도 바로 마를 수 있을 것 같았다.욕실로 들어가자마자 지아는 또다시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수건은?”“안에 있잖아.”“그건 네 수건이잖아.”“그래서?”검은색 바지로 갈아입은 한대경은 조금 전에 자기가 썼던 수건을 건네주었다.“자.”남은 수건까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대경이 성큼성큼 들어와 지아를 향해 손짓했다.“이리와. 네가 나설 시간이야.”지아는 오늘 매우 순종적으로 아침 일찍부터 약을 준비해 놓았었다.“옷 벗어.”“벗겨.”“하여튼 게을러!”지아는 푸념하면서 외투 지퍼를 내리기 시작했다.한대경의 팔에 있는 상처쯤으로 왔을 때, 동작이 보다 느려지고 조심스러워졌다.한 손으로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고 다른 한 손으로 굵고 튼튼한 그의 팔을 가볍게 눌렀다.살짝 그을린 피부에 지아의 하얀 손가락이 닿자, 그토록 선명한 대비를 보일 수가 없었다.‘여자 손은 다 이렇게 작고 하얀 거야?”지아의 손길에 닿자, 한대경은 말랑말랑한 느낌이 들었다.이윽고 바로 그때 지아의 엉덩이를 때렸을 때의 촉감이 떠올랐다.그때도 역시나 이처럼 말랑말랑했던 것 같았다.지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 채 평소처럼 약을 바꿔줬다.얼마 느끼지도 못했는데 지아는 바로 붕대를 새로 감아 주었다.한대경은 익숙한 듯 엎드려 지아가 머리에 침을 놓기를 기다리고 있었다.“허리도 아파. 침 다 놓고 마시지 좀 해 봐. 의사니까 혈자리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거 아니야.”지아는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그래... 내가 참고 만다...’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어디 한 번 맛 좀 봐!’“밥 안 먹었어? 좀 더 힘 써 봐.”“...”지아는 순간 이곳으로 팔려 온 머슴인지 임무를 수행하러 온 사람인지 헷갈렸다.한대경은 그 작은 손의 온도를 느끼면서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사실 힘도 적당했고 모든 혈자리도 정확하게 눌러서 편안하고 좋았다.지아의 작은 손은 매끄럽고 하얀 것이 자기와 정반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실은 전에 약을 바꿔줄 때 몰래 흘겨본 적이 있는데, 껍질을 벗긴 달걀처럼 부드럽고 희고 매끄러운 감이 단번에 들었었다.한대경 역시 지아의 신분이 불순하다고 의심한 적이 있으나 보통 총을 드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손에 굳은살이 있다.하지만 지아는 없었다.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한대경이 일어났다.지아는 순간 화장실에 널어놓은 빨래가 떠오르면서 바로 달려가서 치우려고 했으나 문은 이미 닫겨 있었다.‘망했어! 분명 봤을 거야!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고 난리야!’ 지아는 거칠기 그지없는 한대경이라고 하더라도 남자 앞에서 자기 사적인 물건을 내놓고 싶지 않았다.화장실로 들어선 한대경은 문을 닫고 돌아서자 선반에 걸려 있는 흰색 레이스 속옷 세트를 보게 되었다.매끄러운 실크 소재에 옅은 레이스를 매치해 부드러움까지 더한 속옷이었다.처음으로 여자의 속옷을 보게 된 한대경이다.별거 아니지만, 머릿속에 순간 속옷 차림으로 서 있는 지아의 모습이 떠오르게 되었다.그날 밤 지아의 옷을 잡아당겼을 때도 반쯤 나온 가슴을 봤었다.순간 한대경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고 온몸에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이윽고 몸에서도 즉각 반응이 왔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한대경은 바로 샤워기를 열어 찬물에 몸을 적셔 몸을 식혔다.지아의 작은 손이 온몸 여기저기를 마사지해 줄 때의 화면과 촉감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죽을 것만 같았다.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던 지아는 오늘 따위 유난히 샤워 시간이 길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마침내 욕실에서 나온 한대경은 머리만 빼곡 내놓고 온몸을 이불 속에 꽁꽁 숨겨둔 지아를 보게 되었다.한대경의 시선은 그녀의 얼굴에 떨어지게 되었다.냉정하게 말하자면 지아의 얼굴은 10점 만점에서 5점 정도밖에 안 된다.차분한 이미지만 있을 뿐 미인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조금 전 화장실에서 한 짓을 떠올리면서 한대경은 속으로 자신을 욕했다.‘저런 여자한테 반응이 일어나다니!’지아는 자기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한대경을 보고서 도통 영문을 알 수 없었다.참다못해 손을 들어 흔들더니 해석하기 시작했다.“그... 갈아입을 옷이 없어서 화장실에 널어 둔 것뿐이야.”한대경의 흰색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는 지아의 팔이 소매 끝에서 살짝 드러났는데, 그 팔이 유난히 가늘고 하얗게 보였다. 그녀의 피부는
순간 지아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머릿속에는 갖은 해결책들이 번쩍이고 있었다.필사적으로 싸워봤자 승산은 얼마 있을까?설령 이 문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해도 밖에 있는 사람들한테 체포되지 않을까?자신이 너무 성급했다고 야단치고 싶은 심정이다.대전이 시작되기 전에 모든 걸 마치고 도윤 곁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 섣불리 움직였던 것이다.‘어떡하지?’지아는 옷 한 벌을 꽉 잡아당기고 말을 다듬어 보려고 했다.‘믿어줄까?’한대경은 문을 열자 그의 반팔 티셔츠를 입은 지아를 보게 되었다.옷은 딱 마침 허벅지까지 중요한 그 부위를 가릴 수 있을 정도였다.매일 청바지를 입고 있던 지아의 두 다리가 모델 뺨칠 정도로 길고 하얗고 매끈할 줄은 몰랐다.검은 다리털로 뒤덮인 자신의 다리와 달리 발바닥까지 잡색이 없을 정도로 하얀 피부를 자랑하고 있으니 한대경은 서서히 넋이 나갔다.그리고 지금 지아는 아무런 이너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순간 온몸이 불타오르면서 한대경은 침을 삼켰다.애매한 분위기와 더불어 야릇한 불꽃까지 방 안 곳곳에서 터지는 것만 같았다.지아는 마음속으로는 무서워 죽을 것만 같았다.며칠 전 한대경이 사람을 마구 찔러 죽이는 장면이 자꾸 떠올랐다.지아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애써 덤덤한 척하고 말했다.“바지가 아직 안 말라서 그러는데 바지 좀... 너도 없고 그래서 함부로 뒤진 거야... 미안...”이 핑계는 완벽하지만 그가 믿는지 안 믿는지 봐야 한다.한대경은 한 걸음씩 지아를 향해 걸어왔다.지아는 점점 더 죽을 것만 같아 애꿎은 옷만 꽉 잡고 있었다.어느새 등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한대경은 어둡기 그지없는 얼굴로 천천히 다가왔는데, 저승사자가 따로없었다.이윽고 코 앞까지 다가온 한대경에게서 숨막히는 기운이 느껴졌다.그러나 그때 한대경은 갑자기 지아의 허리를 한 손으로 잡고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지아는 이미 필사적으로 달려들려고 했으나 갑작스러운 상황에 어리둥절하기만 했다.두 손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