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소지아가 위암 양성 판정을 받았던 날, 이도윤은 자신의 첫사랑과 함께 그녀의 아들과 아동 병원에 있었다.병원 복도에서 임건우는 검사 보고서를 들고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지아야, 검사 결과 나왔어. 악성 종양 말기야, 수술 성공하면 5년 생존율은 15~30% 정도고.”소지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어깨에 멘 숄더백 끈을 잡아당겼고, 약간 창백한 작은 얼굴에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선배, 수술 안 하면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요?”“6개월에서 1년, 사람마다 다르지. 네 상황은 먼저 약물치료를 두 번 받은 뒤, 수술을 하는 게 좋을 거야. 이렇게 하면 암세포의 확산과 전이의 위험을 막을 수 있거든.”소지아는 입술을 깨물며 힘겹게 말했다.“고마워요, 선배.”“나한테 고맙긴, 바로 입원 수속 밟자.”“됐어요, 치료할 생각이 없어요. 약물 치료 견디기 힘들 거예요.”임건우는 몇 마디 더 설득하고 싶었지만 소지아는 공손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선배, 이건 일단 비밀로 해줘요. 가족들 걱정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소씨 가문 파산 이후로 아버지의 거액의 입원비를 내는 것만으로도 소지아는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차마 가족에게 자신이 암에 걸렸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임건우는 소지아의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한숨을 쉬었다.“걱정 마. 입 꼭 다물고 있을게. 참, 너 결혼했다고 들었는데, 네 남편 쪽은...”“선배, 우리 아빠 잘 부탁할게요, 신경 좀 많이 써주세요. 난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요.”소지아는 더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듯 임건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빨리 떠났다.임건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지아가 대학을 휴학하고 결혼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의학계의 천재로 불리던 소지아는 그렇게 의학계에서 사라져 지금은 만신창이가 되었다.지아의 아버지 소계훈이 치료를 받는 최근 2년 동안, 오직 소지아만이 바쁜 일정을 쪼개 그를 돌보았다. 정작 소지아 자신은 아파서 쓰러졌을 때도 지나가던 행인이 병원으로 데려다 주었고,
어두컴컴한 밤, 소지아는 혼자 욕실로 돌아왔다.수도꼭지를 돌려 뜨거운 물을 틀자 소지아를 둘러싸고 있던 추위가 씻겨나갔다. 빨갛게 부은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한 방으로 들어갔다. 아늑한 분위기의 인테리어를 한 어린이 방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가볍게 벨을 흔들자, 오르골 음악 소리가 방에서 울리기 시작했다. 방의 조명은 무척 따뜻했고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소지아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아마도 이게 내가 받아야 할 벌인가 봐. 뱃속의 아이를 지켜내지 못해서 지금 신이 이제 내 생명까지 빼앗으려는 건가...’소지아는 1.2미터 길이의 어린이 침대에 올라 누워 몸을 웅크렸다. 왼쪽 눈에서 흐르는 눈물이 오른쪽 눈으로 흘러내리며 볼에서 미끄러져 아래에 깔린 담요까지 촉촉하게 적셨다.침대 위에 있던 인형을 꼭 안고 중얼거렸다.“미안해, 아가야, 다 엄마 잘못이야. 엄마가 너를 지켜내지 못 했어. 근데 무서워하지 마. 엄마가 곧 갈게.”아이가 세상을 떠난, 소지아의 정신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마치 아름다운 꽃이 나날이 시들어가는 것 같았다.어둠에 잠긴 바깥 풍경을 보면서 아버지에게 이 돈만 남기면 자신의 아이를 찾아 떠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이튿날 아침, 날이 밝기도 전에 소지아는 이미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고개를 숙여 웨딩드레스를 입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자신의 결혼사진을 바라보았다.눈 깜짝할 사이에 3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그녀는 특별히 위에 좋다는 음식으로 아침을 먹었다. 비록 오래 살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한 좀 더 오래 살아서 아버지를 돌보고 싶었다.소지아는 외출하자마자 병원의 전화를 받았다.“보호자님, 지금 환자분께서 갑자기 심장이 발작을 일으켜서 이미 수술실로 옮겼습니다.”“곧 갈게요!”소지아는 재빨리 병원으로 달려갔고, 수술은 아직 끝나기 전이었다. 수술실 문밖에서 두 손을 모아 기도하며 기다렸다. 이미 모든 것을 잃었고, 이제 유일한 희망은 아버지가 건강하게 회복하여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다
백채원은 하얀 고급 캐시미어 외투를 입고 있었고, 귀에 있는 호주산 진주는 그녀를 부드럽고 기품 있도록 돋보이게 했다.목에 두른 숄만 해도 수백만 원을 호가했고, 점원은 백채원을 알아보고 얼른 맞이했다.“사모님, 오늘은 대표님께서 함께 주얼리 보러 오시지 않으셨네요?”“사모님, 가게에 또 신상이 들어왔는데, 다 사모님과 잘 어울리는 거 같아요.”“사모님, 지난번에 말씀하신 비취가 도착했는데, 이따가 한 번 착용해 보세요. 사모님 피부색과 아주 잘 어울릴 거예요.”점원이 사모님 사모님 하자 백채원은 미소를 지으며 소지아를 쳐다보았고, 득의양양한 눈빛으로 승리에 도취되었다.세상 사람들은 모두 이도윤이 백채원을 무척 아낀다고 알고 있었지만, 소지아가 그의 공식적인 법적 아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소지아는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왜 하필 가장 힘든 순간에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을 만나는 것일까?백채원이 부드럽게 물었다.“이렇게 좋은 재질의 반지를 가지고 와서 돈을 바꾸면, 손해가 상당할 것 같은데요.”소지아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손을 뻗어 반지를 도로 빼앗아왔다.“안 팔래요.”“안 판다고요? 정말 아쉽네요. 이 반지 정말 맘에 드는데, 그래도 아는 사이니까 비싼 값에 사려고 했어요. 소지아 씨는 돈이 필요한 거 아니에요?”소지아의 손은 제자리에 굳어졌다. 그렇다, 그녀는 돈이 필요했다. 아주 간절하게. 백채원은 이 점을 알고 거리낌 없이 그녀를 짓밟았다.옆에 있던 점원이 나서서 얼른 충고했다.“아가씨, 이 분은 이씨 그룹 대표님의 약혼녀인데, 아가씨 반지가 마음에 든다고 하시니 높은 가격을 제시하실 거예요. 이렇게 하면 아가씨도 저희 쪽 절차를 기다리지 않고 돈을 받을 수 있죠.”사모님이란 호칭은 소지아의 귀에 무척 거슬렸다. 분명히 1년 전까지만 해도 절대로 이도윤과 이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맹세하며 백채원이 감히 이도윤의 아내가 되겠다는 꿈도 꾸지 못하게 했었는데.겨우 1년만에, 사람들은 모두 백
변진희는 소지아가 8살 때 떠났다. 그날은 소계훈의 생일이었는데, 집에 돌아와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할 생각으로 신나게 들어왔다. 그러나 들어가자마자 본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합의서였다.소지아는 엄마를 쫓아가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고, 신발이 벗겨져도 모른 채 달렸다. 마침내 붙잡은 변진희의 다리를 안고 끊임없이 울부짖었다.“엄마, 가지 마요!”고귀한 여자는 그녀의 앳된 볼을 쓰다듬었다. “미안.”“엄마, 나 이번에 전교 일등 했는데, 아직 내 시험지 못 봤잖아요. 엄마 사인받아야 한단 말이에요.”“엄마, 가지 마요, 나 말 잘 들을게요, 앞으로 놀이동산에도 안 가고 더 이상 엄마 화나게 하지 않을게요, 말 잘 들을 테니까 제발...”소지아는 당황하여 엄마를 붙잡기 위해 애걸복걸했다. 변진희는 단지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으며, 지금은 진정한 행복을 찾았다고 말했다.소지아는 낯선 아저씨가 그녀를 대신해서 트렁크를 차에 실은 뒤 손을 잡고 떠난 것을 보았다.그리고 맨발로 땅에 넘어질 때까지 수백 미터를 쫓아갔고, 무릎과 발바닥은 모두 상처투성이였으며,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처럼 차가 떠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그때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커서야 엄마가 바람을 피웠다가 아버지에게 들켰다는 것을 알고 아예 이혼을 제기하고 홀몸으로 나가 딸을 포함한 모든 재산을 포기했다는 것을 알았다.십여 년 동안 소지아는 변진희와 연락한 적이 없었고, 평생 다시는 엄마를 만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그러나 운명은 정말 아이러니했다. ‘결국 엄마에게 고개를 숙여야 하다니.’목이 메여오자 소지아는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변진희도 딸의 마음을 알고 일어나서 소지아를 자신의 곁으로 끌어와 앉혔다.“네가 나 미워하는 거 알아. 그때 너는 너무 어렸고, 많은 일들은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어. 엄마는 다 설명할 수 없었어.”변진희는 손을 뻗어 소지아의 얼굴을 어루만졌다.“내 딸 많이 컸네, 엄마가 이번에는 귀국해서 오래 있을
변진희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도윤을 바라보았다. 이도윤이 결혼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이 대표, 우리는 외국에서 생활한 지 오래돼서, 국내 뉴스에 대해 잘 모르는데, 우리 딸이 자네와 무슨 관계지?”이도윤은 담담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관계가 있다 하더라도 지나간 일이에요. 지금 이혼 수속 밟고 있어요.”소지아는 자신의 진심이 결국 그가 과거일 뿐이란 말로 얼버무릴 줄은 몰랐다.‘화를 내야 할까?’당연히 화가 났다.더 큰 감정은 한심하다는 느낌이었다. 정말 눈이 멀어 이런 짐승 같은 인간을 남편으로 삼았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소지아는 다이아몬드 반지 상자를 꺼내 이도윤의 이마에 세게 던졌다.“너 같은 쓰레기는 이제 꺼져. 내가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이 바로 당신과 결혼한 일이야. 내일 9시에 우리 이혼해. 가정법원에 나타나지 않으면 겁쟁이야!”상자가 그의 이마에 부딪혀 빨갛게 멍이 들었다. 땅에 떨어졌고 반지는 발밑으로 떨어졌다. 이번에 소지아는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반지를 밟고 문을 내팽개치고 떠났다.최근 2년 동안 소지아에게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는데, 이 일은 마지막으로 자신을 무너뜨린 것 같았다. 그녀는 멀리까지 뛰지 못하고 길가에서 기절했다.하늘에서 끊임없이 내리는 빗방울은 마치 이 세상이 그녀에 대해 드러내는 적의와 같았다.그냥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았다.음모가 가득한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었다.다시 깨어났을 때, 낯선 방에서 눈을 떴다. 따뜻한 불빛은 어둠을 몰아냈고, 방 안의 보일러는 봄처럼 따뜻했다.“깼어?”소지아는 눈을 뜨자마자 임건우의 부드러운 눈을 보았다.“선배, 날 구한 거예요?”“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네가 길가에 쓰러져 있길래 데려왔어. 그리고 몸이 흠뻑 젖은 것을 보고 하인에게 옷 갈아 입히라고 했고.”남자의 눈빛은 맑고 깨끗하며 조금의 음흉함도 없었다.“고마워요, 선배.”“죽을 끓이고 있으니 물 먼저 마셔.”소지아는 이불을 젖히고 침대에서 내려왔다.“아니
차가운 강바람이 정면으로 불어와 칼처럼 추위는 뼛속 깊이 스며들었고 소지아는 일어나 계속 쫓아갔다.그러나 형편없이 망가진 소지아의 몸은 얼마 뛰지 못하고 심하게 넘어졌다. 차 문이 다시 열리자, 반질반질한 구두 한 켤레가 나타났다.소지아는 남자의 빳빳한 바짓가랑이를 따라 천천히 위로 바라보며 이도윤의 차가운 두 눈을 마주했다.“이...”소지아는 허약하게 입을 열었다.뼈마디가 분명한 두 손이 그녀 위에 떨어졌고, 순간 소지아는 그녀를 반하게 했던 하얀 셔츠의 소년을 본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두 손을 맞잡은 순간, 이도윤은 차갑게 손을 빼서 소지아에게 희망을 주었다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며 소지아의 몸이 재차 바닥으로 떨어졌다.소지아가 넘어지는 순간 마침 바닥의 깨진 유리 파편에 눌려 눈부신 피가 손바닥을 따라 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그의 검은 눈동자는 잠시 놀랐지만 미동도 하지 않았다.소지아는 어렴풋한 기억이 떠올랐다. 전에는 소지아의 손가락에 작은 상처만 나도 한밤중에 병원으로 데려간 이도윤이었다.의사는 또 웃으며 말했다.“일찍 오셨으니 다행이지 좀만 더 늦었으면 상처가 아물어 흉터가 남을 뻔했네요.”기억 속의 사람은 앞에 있는 남자와 겹쳐졌고, 눈매는 여전히 과거와 같지만 달라진 것은 애정 어린 관심이 싸늘함으로 변했다는 사실이다.이도윤은 차갑고 매정하게 말했다.“소지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나는 널 잘 알지. 마라톤 달리면서 공중제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걸음 달렸다고 넘어져?”소지아를 바라보는 이도윤의 눈빛은 마치 차가운 비수를 그녀의 몸에 꽂은 것처럼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소지아는 다소 창백한 입술을 깨물며 해석했다.“아니야, 널 속인 것 없어. 요새 좀 아파서 몸이 좀 약해진 거지...”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키 큰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몸을 숙여 그녀의 턱을 들어 올렸다. 거친 손가락은 소지아의 바싹 마른 입술을 어루만졌다.“역시 그 아버지에 그 딸이군. 넌 너의 그 위선적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