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빠져나갈 틈은 없었다. 이미 도윤의 바지까지 손이 닿았던 지아는 원망에 찬 도윤의 두 눈을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도윤은 지아를 덥석 끌어안으며 말했다. “어떻게 보상해줄 거야?” “좀 참아. 다음 기회에 다시 봐.” “그럼 넌 하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던 거야? 정말 조금도?” 그쪽으로 욕구가 크게 강하지 않았던 지아는 도윤이 떠난 뒤로 정말 단 한 번도 사랑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나 방금 도윤의 폭풍키스와 유혹에 지아도 조금은 그런 욕구가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녀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조금?” 지아는 주동적으로 도윤의 볼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먼저 집으로 돌아가 샤워부터 해.” “밤에 다시 올게.” 이에 지아도 입술을 꽉 깨물며 대답했다.“알겠어.” 지아는 자신의 옷을 정리하고 불만스러운 도윤의 눈빛을 뒤로 한 채 방에서 나왔다. 시종은 과연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고 지아를 데리고 부남진에게로 향했다. 이때 부남진은 약간 부은 듯한 그녀의 빨간 입술을 발견했고 이에 지아는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비록 지아는 이미 애까지 여럿 낳은 어른이었지만 부남진 앞에서는 몰래 연애하다 들킨 어린 아이처럼 저도 모르게 변명하기 시작했다. “도윤이 오랜만에 저를 만나 대화가 좀 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부남진은 찻잔을 들며 대답했다. “정말 그냥 대화만 했어?” 부남진은 이미 지아를 꿰뚫은 듯 뭔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얘야, 할아버지한테 솔직하게 말해봐. 도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어?” “할아버지, 사실 전...” 두 사람의 관계는 한 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지아 스스로도 도윤과의 관계를 어떻게 형용해야 할 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얘야, 도윤은 인품은 좋은 아이야. 나도 상관으로서 그 점을 꽤 높이 사고 말이야.”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도윤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선 자격 미달이야. 그 자식이 너에게 저
당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매번 부남진이 환희의 그림이나 사진을 볼 때면 아주 애틋한 표정을 짓곤 했다. 때문에 지아는 부남진이 환희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날은 점점 어두워졌고 미셸이 집으로 돌아왔다.민연주는 평소보다 옷을 두껍게 입은 미셸의 모습에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렇게 많이 입었어?” “감기 걸릴 까봐 그런 거지. 엄마, 보고 싶었어.” 미셸은 민연주의 품에 안긴 채 애교를 부렸다. “얘야, 앞으로는 절대 이 엄마 속상하게 만들지 마. 내가 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엄마, 이제 진짜 알았어.” 민연주는 미셸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참, 무슨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고 하지 않았어? 대체 뭔데 그래?” 민연주는 궁금한 마음에 미셸의 뒤를 살펴보았지만 아무것도 가져온 건 없었다.“좀 있으면 알 게 될 거야.” 미셸은 신비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민연주는 쉬지 않고 계속 미셸에게 당부했다. “이번 교훈은 꼭 기억해야 해. 이제부터 절대 소지아 그 여자 건드리지 말고 알겠지? 요 며칠 네 아빠가 그 여자에 대한 믿음이 더 강해졌어.” “알겠어, 엄마.” 미셸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갑자기 180도 변한 미셸의 모습에 민연주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 화 안 나?”“엄마, 나 이제 확실히 깨달았어. 내가 왜 굳이 그 여자와 열을 내겠어? 필경 그 여자는 남이고 우리 집에서 평생 살 것도 아니잖아?” “언젠가는 이 집에서 사라질 테니 말이야.” 미셸은 그동안 부씨 가문에서 일어난 여러 변화들을 알 지 못했고 이에 민연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비췄다. 이때 미셸은 뒷마당에서 들려오는 공사 소리에 궁금한 듯 물었다. “엄마, 집에서 뭘 공사 중인 거야?” “응.” 미셸은 뒷마당으로 향했는데 아이들의 시소, 미끄럼틀, 그리고 회전목마와 각종 장난감들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설마 아빠가 벌써 뭔가를 눈치 채고 날
대답을 하려던 부방경은 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걸어오는 지아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지아, 이리 와봐.” 순간 어리둥절해진 미셸이 투덜거렸다.“엄마, 오빠가 언제부터 저 여자와 이렇게까지 친해진 거야?” 부장경의 다정한 모습에 미셸은 불쾌한 감정이 들었다. 평소 부장경은 줄곧 무뚝뚝한 성격이었고 특히 여자들과는 더욱 거리를 유지해왔다.때문에 미셸은 지금까지 부장경과 가장 친한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라고 생각했지만 오늘 지아를 대하는 그의 다정한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설마 오빠는 소지아 저 여자가 결혼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계속 좋아하는 거야?’ 지아는 공손한 태도로 민연주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부인, 설아 아가씨.” 민연주는 요 며칠 감히 제멋대로 굴 수 없었기에 상냥한 태도로 지아와 담담히 인사를 나눴다. “소지아 씨, 오셨군요.” 이때 오직 미셸만이 콧방귀를 뀌었는데 비록 지아에게 시비를 걸진 않았지만 친절하게 대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아는 아직 자신의 신분이 공개되지 않았기에 사람들 앞에서 전과 같은 호칭으로 부장경을 불렀다. “부 선생님.” “이리 와서 페인트 색깔 좀 봐. 혹시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전부 다시 해도 돼.” 그런데 아직 지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미셸이 끼어들어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왜 저 여자한테 물어보는 거야? 설마 이 별채가 저 여자를 위해 준비한 건 아니지? 아니, 고작 저딴 외부인한테 이렇게 큰 집을 내줄 필요까지 있어?” 현재 새로 짓고 있는 이 별채는 마당의 면적을 제외하고도 거의 200여 평은 되어 보였는데 미셸의 별채는 고작 50몇 평 밖에 되지 않았다. 때문에 미셸은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저 여자가 우리 아빠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라고 쳐도 우리 집에 평생 눌러 살 건 아니잖아? 아빠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오빠는 아빠를 말리지 않고 뭐 했어? 내가 볼 땐 아빠 정말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아!” 이때 민연주가 얼른 미셸을 말렸
‘설마 소지아와 도윤 저 녀석이 재혼이라고 하려는 건가?’ ‘재혼한다고 쳐도 오늘 같은 부씨 가문의 가족 식사 자리에 저 자식 같은 외부인이 낄 필요는 없을 텐데?’ 하용은 아마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도윤이 부남진에게 상황 회보를 하러 온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면 하용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두 사람은 동시에 차에서 내렸고 비슷한 검은색 코트를 입었으며 기럭지까지 매우 비슷했지만 유독 도윤이 풍기는 기운은 하용보다 더욱 싸늘했다. 다른 사람들이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표면적인 친분조차 유지하려 하지 않았고 냉랭한 얼굴로 서로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동시에 부씨 가문에 발을 들여 놓았고 그들 뒤를 따르던 시종들은 두 사람이 풍기는 분위기가 마치 차가운 날씨보다 더욱 썰렁하게 느껴졌다. “오늘 같은 가족 식사 자리에 네가 얼굴을 비추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웃기지도 않네.” 하용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 그러자 도윤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가족 식사 자리인 걸 알면서 넌 무슨 자격으로 여기 있는 건데? 지난번 일이 쪽팔리지도 않나 봐?” 비록 지아에게 물을 뿌린 건 미셸이었으나 그 뒤에서 모든 걸 조종한 사람은 하용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나서진 않았기에 부남진은 단지 미셸만 집에서 내쫓고 처벌했을 뿐 하용에게 책임을 묻진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판을 짠 사람이 하용임을 뻔히 알고 있었고 부남진 또한 그 일을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 이때 하용이 쌀쌀맞게 대답했다.“설아가 그런 일을 벌인 건 다 각하의 안전을 위한 거였어. 오히려 너와 소지아 그 여자가 뒤에서 농간을 부리고 각하를 속여왔지.” “그러니 분명 각하도 누가 옳고 그른 건지 잘 알고 계실 거야.” 그렇게 두 사람은 동시에 식사 자리로 향했고 하용이 나타난 순간 민연주는 미간을 찌푸렸는데 초대하지 않은 손님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부장경이 다친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속상했지만 한 가족의 어른으로서 절대 그 불쾌한 감정을 대놓고 티 낼 수
달그락- 민연주는 손에 들고 있던 젓가락을 떨어뜨렸는데 미셸이 이런 말을 내뱉을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하용과 결혼한다고? 미친 거 아니야?’ 민연주는 낯빛이 하얗게 질렸고 환각이 생겨 잘못 들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그런데 이때 미셸이 환한 미소를 띄며 말을 이어갔다. “엄마, 아빠, 저 드디어 누가 저에게 가장 진심인지 깨달았어요.” “전에는 제가 사랑할 만한 가치도 없는 사람을 위해 멍청한 짓을 하면서 진짜 저를 사랑해주는 사람은 보지 못했던 거예요.” “저도 이제 나이가 어리지 않으니 앞으로 하용과 잘 살아 보고 싶어요.” 이에 민연주는 심장이 철렁했다. 그리고 깊게 심호흡을 한 뒤 물을 한 잔 마셨고 당장이라도 미셸을 때려죽이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자신을 진정시켰다. 미셸은 민연주의 낯빛이 보기 흉해진 건 발견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표정들은 모두 괴상할 정도로 덤덤했다. 도윤의 얼굴에는 전혀 미셸에게 배신당한 불쾌한 감정이 보이지 않았고 지아는 약간 어색한 듯 물을 한 잔 마셨다.이때 부장경은 안색이 어두워진 채 미간을 찌푸렸지만 오히려 부남진의 표정은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냉담했고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남진은 담담하게 물컵을 내려놓더니 미셸을 바라보며 물었다.“정말 잘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니?”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고 이건 미셸이 예상했던 반응과는 전혀 달랐다. 부남진이 미셸을 바라보는 눈빛은 낯선 이를 바라보는 것 같았고 예상치 못했던 반응에 미셸은 약간 당황하고 말았다.“아빠, 하용은 저에게 아주 잘해줘요. 전 정말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이니 아빠도 허락해줬으면 좋겠어요.”이때 하용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미셸의 손을 잡으며 입을 열었다.“은사님, 사모님, 다들 아시겠지만 전 줄곧 설아를 좋아해왔어요. 그러니 앞으로도 무슨 일이 생기든지 반드시 설아를 아끼겠다고 맹세할게요.” 민연주는 부남진의 절정으로 차오르는 분노를 느꼈는데 미셸에게 너무 실망한
부남진의 눈빛은 순간 싸늘해졌고 손으로 컵을 꽉 쥐었다. 지아는 당장이라도 부남진이 폭발했던 같다는 느낌에 그의 손등을 톡톡 치며 말했다. “각하, 일단 물부터 마시세요.” 방금 그 순간 부남진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미셸의 얼굴에 던진 뻔했다. 그는 차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고 자신을 진정시키며 물었다.“그래서 혼전임신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거야?” “은사님, 탓하시려면 저를...” 쨍그랑- 부남진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하용의 발 밀으로 뿌리며 말했다. “설아는 철이 없다고 쳐도 하용 너까지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내 기를 채우려고 이러는 거니?” “혼전임신이라는 게 외부에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우리 부씨 가문을 어떻게 생각 하겠어?” “아빠, 그 고지식한 생각 좀 버려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는데요! 게다가 저와 하용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요.” “심지어 아빠도 오빠한테 빨리 결혼하고 애를 낳으라고 재촉도 했잖아요. 마침 저에게 애가 생겼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거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러자 부남진이 냉소하며 말했다. “한 달 전만 해도 도윤이 아니면 평생 결혼은 하지 않겠다더니 이젠 또 하용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네 진심이 너무 값 떨어진다는 생각 안 들어?” “전에는 제가 멍청해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했던 것뿐이예요.” “그럼 지금은 멍청하지 않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니?” 부남진의 말에 미셸은 할 말을 잃었고 민연주에게 도움을 바랬다. “엄마, 빨리 나 대신 말 좀 해줘. 내가 임신한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아빠는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거야?” 하지만 민연주도 이번엔 미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너 정말 미쳤구나? 네 아버지가 무슨 신분이고 넌 또 무슨 신분인지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거니?” “이게 만일 소문이라도 나면 네 아빠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그러자 미셸이 투덜댔다. “
하용은 순간 멍해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부남진이 이런 고약한 수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용은 부남진이 정말로 자기 딸을 버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고 단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당연하죠. 제가 사랑하는 건 설아라는 사람이지 신분이 아니니까요.” 미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빠, 무슨 뜻이예요? 그때는 홧김에 한 말 아니었어요? 제 친 아빠면서 어떻게 저를 버리려 할 수 있어요?” 이에 부남진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홧김에 한 말이라고? 내가 너처럼 유치한 줄 알아? 그런 말을 홧김에 내뱉게?” “몇 년 동안 너는 잘난 네 신분과 지위로 줄곧 제멋대로 굴고 다녔지만 만약 그 신분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미셸은 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아빠, 화 다 풀리신 거 아니었어요? 안 그럼 왜 저한테 집에 돌아와 식사하자고 한 건데요?” “너에게 돌아오라고 한 건 내가 모두에게 알릴 중요한 일이 있어서였어. 마침 네 이름도 호적에서 파버릴 겸 말이야.” 이에 미셸은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내가 왜 굳이 이런 거로 농담하겠어?” 부남진의 얼굴은 극도로 싸늘했고 마치 남 보는 듯한 눈길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이에 미셸은 갑자기 민연주의 팔을 잡고 흔들었는데 그제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 빨리 얘기 좀 해줘.” 만약 임신만 아니었어도 민연주는 미셸의 편을 들었겠지만 이런 엄청난 사고를 친 그녀에 민연주도 철저히 실망해 버렸다. 민연주는 알뜰살뜰 키운 자기 딸이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친 건지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난 할 말은 없어.” “오빠!” 미셸은 또 부장경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 “빨리 아빠 좀 말려봐.” 그런데 미셸이 너무 심하게 밀었던 탓에 부장경은 옆에 있던 지아와 부딪쳤고 순간 미셸과 지아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미셸은 모든 화를 지아에게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민연주는 부남진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민연주는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여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자 부남진이 설명했다. “오래 전, 당신을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 있다고 내가 얘기 했었지?”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 나와 헤어지고 난 뒤 그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던 것 같아. 지아는 바로 그 사람과 나의 손녀야.”“아빠, 저 여자가 어떻게 아빠의 손녀야? 저 여자는...” 미셸은 연거푸 고개를 저으며 인정하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부남진은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이미 지아와 난 유전자 검사까지 마쳤어. 우린 확실히 혈연 관계가 있고 앞으로 지아 또한 우리 부씨 가문 사람이야. 그리고 넌...” 부남진은 한 층 더 엄숙해진 태도로 말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난 이제 너 같은 딸은 필요 없어. 그러니 알아서 잘 살도록 해.” 미셸은 그제야 부씨 가문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겐 단 한 장의 카드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뱃속의 아이였다. “아빠, 저 임신했어요! 여기 초음파 사진 좀 보세요. 어떻게 임신한 저를 쫓아내실 수 있어요?” “하용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질 줄 아는 좋은 남자이니 너도 끝까지 책임져줄 거야.” “게다가 이 결혼도 네가 원하던 거 아니냐? 하용과 결혼하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이때 하용도 심장이 철렁했는데 그가 오늘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오직 하용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도윤을 한 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하용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지아가 부남진의 친손녀인 거지? 저 여자는 파산 당한 소씨 가문의 딸 아니었어?’ 비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하용은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미셸을 말렸다.“설아야, 뱃속 아기를 생
시간은 조금씩 흘러가고 있었고, 시월은 왜인지 모르게 더욱 불편해졌다. 분명 이건 소씨 가문의 내부 문제인데도 시월은 더 이상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았다. 반면, 소상현은 시월의 심정을 알 리가 없었는데, 머릿속이 온통 패배의 쓰라림으로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졌구나. 그동안 공들여 준비했는데도 결국 완패하고 말았다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단지 승자의 권리를 누리며 자신들 앞에서 거들먹거리려는 것이라 여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재호와 소윤성이 현장에 도착했는데, 두 사람은 비교적 평온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들은 소상현과 생각이 달랐다.소임호가 설령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 어머니를 둔 이복형이었기에 굳이 소임호를 적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소씨 가문의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했다.“형님, 괜찮으세요?” “무사하시다니 다행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야 부장경에게 눈길을 보냈다.“저분은...”소임호가 설명했다.“이분은 부장경 씨인데, 정체에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지. 오늘 이렇게 모두를 부른 건 우리 소씨 가문의 일을 논의하기 위해서야.” 역시나 소임호는 뛰어난 장악력을 보여주었다.사람들은 모두 부장경이 왜 이곳에 있는지 궁금해했지만, 소임호의 단호한 태도에 중요한 이야기가 있음을 직감하고 모두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최근 소씨 가문엔 많은 일이 있었고, 명담이도 세상을 떠났어. 진심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 소상현이 냉소를 지으며 비웃었다.“이런 자리에서까지 거짓 연민을 보일 필요는 없어!” ‘명담’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소상현의 눈가가 붉어졌다. 그 모습을 본 소재호가 나섰다.“형님, 명담이 일은 큰형님과 아무 관련도 없는 일이잖아요. 왜 그렇게 화를 내세요?” “아직도 저 인간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거야? 저 인간은 애초부터 우리 소씨 가문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봐, 지금 부씨 가문 사람들까지 들이닥쳤잖아!!” 그제야 소재호와 소윤성은 소임호가 부씨
소상현은 소임호의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지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지지하는 몇몇 사람들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 오늘을 위해 소상현은 수년 동안 치밀하게 준비해 왔다.‘이렇게 쉽게 포기할 순 없어!’“후회 안 해.”“그래, 그럼 시작하자꾸나.”주주총회가 정식으로 시작되었다.한쪽에서 시월은 지아의 정체에 대해 생각할 겨를조차 없이 총회에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이번 일에 시월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기에, 단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할 수 없었다. 최근 회사 내 지분 변동이 심해, 사람들은 불안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이 다투는 것은 소영수가 보유했던 20%의 지분에 지나지 않았다. 소영수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고, 재산을 분배할 시간조차 없었으니 말이다. 소상현은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함으로써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려 했다. 하지만 소임호는 손뼉을 가볍게 치며 변호사를 불렀고, 변호사는 밀봉된 서류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그 안에는 소영수가 미리 작성해 둔 유언장이 있었는데, 지분 양도서부터 가문의 재단, 부동산 분배까지 모든 내용이 명확하게 정리된 것이었다. 심지어 회사의 20%의 지분이 소임호의 것이라 명시되어 있기도 했다. 소상현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며 외쳤다.“아니야! 이건 말도 안 돼! 우리 아버지는 울화로 돌아가셨고, 돌아가시기 전에 유언장을 남길 시간조차 없었어! 저 유언장은 가짜라고!” 하지만 소임호는 차분하게 말했다.“이 유언장은 아버지께서 반년 전에 미리 작성해 두신 거야. 믿지 못하겠다면 네 변호사에게 감정을 맡겨도 좋아. 서류 외에도 아버지의 영상, 음성, 그리고 친필 서명이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 소지훈은 끝까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변호사에게 눈짓을 보냈고, 소지훈이 이끄는 변호사단의 수석 변호사가 나와 서류를 철저히 검토했다. 그러고는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진짜입니다. 확실히 어르신께서 생전에 작성하신 유언장이 맞습니다.” 소상현의 마음속에 이루 말할 수
소임호는 손짓하며 비서에게 부장경을 위한 차 한 잔을 내오게 했다. 소임호는 이미 자신의 출생에 대한 충격에서 벗어나 평소처럼 차분한 표정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소임호와 부장경은 좌우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의 이목구비는 묘하게 닮아 있었는데, 비록 한 사람은 비즈니스계, 다른 한 사람은 군에 몸담고 있었지만, 미간에 드러나는 강인한 기개는 아주 비슷했다. 지아는 속으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유전자의 힘이란 정말 신기한 거구나.’ 어머니가 다른 데다가 함께 자라지도 않았는데,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해도 묘한 동질감을 뿜어냈다. 반면, 형제임에도 불구하고 소상현은 소임호가 등장한 순간부터 내내 안절부절못하더니, 부장경까지 나타나자 그 불안은 극에 달했다. 소상현의 얼굴엔 육안으로도 뚜렷이 보일 정도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났고, 그 어디에서도 위엄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이 이런 사람에게 소씨 가문을 맡길 리 없었다. 소임호는 소상현의 불안한 얼굴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둘째야, 정말 나랑 적대하며 회사를 차지할 작정이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마. 지금이라도 그 생각을 바꾼다면, 과거의 일은 모두 없던 일로 해줄게.”소임호의 눈에 소상현은 언제나 동생일 뿐이었다. ‘형으로써 동생을 지켜주는 건 당연지사야.’이는 소영수가 늘 소임호에게 했던 말이었다.“임호야, 상현이는 어리석고 자존심만 높아. 재호는 이쪽 일에 뜻이 없고, 윤성이는 정에 빠져 살지. 우리 소씨 가문을 짊어질 사람은 너 하나뿐이야. 앞으로도 수고 좀 해다오.” 어머니도 생전에 늘 이렇게 말했다.“네가 형이잖아. 형은 동생들을 더 많이 이해해 줘야 해.”비록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도, 소임호는 소영수에게 늘 감사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아버지는 떠돌던 나와 어머니의 삶을 끝내 주었고, 그 험난한 시절에 물질적 풍요를 떠나 안전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셨어.’ 그뿐만 아니라 소영수는 마음 깊이 소임호를 돌봐주고 키워줬으며, 단 한 번도
소상현은 오랜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의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그런 영향을 받아 소지훈 역시 같은 생각을 품게 되었다. 형들보다 뒤처진다는 열등감과 질투심을 마음속 깊이 새기며 말이다. 그래서 소지훈은 연예계로 진출했는데, 스타가 되면 가장 눈부신 존재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이 뜨거운 인기를 얻게 된 배경에 소임호의 존재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알지 못했다. 당시 소지훈은 일부러 자신의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성공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인맥 하나 없는 상태에서 연예계에서 두각을 드러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소임호는 그런 소지훈을 위해 아무 말 없이 훌륭한 매니저를 은밀히 붙여 소지훈이 어떤 부당한 대우나 불합리한 관행에 휘말리지 않도록 철저히 보호했다.게다가 소지훈이 직설적인 성격 탓에 적을 많이 만들어도, 그때마다 소임호가 뒤에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소임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소지훈에게 맞춤형 성공 전략을 만들어 주었으며, 소지훈이 맡을 작품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고르기도 했다.그 결과, 소지훈은 단번에 톱스타로 떠오를 수 있었고, 스캔들 하나 없이 꾸준히 높은 인기를 유지할 수 있었다. 소상현 부자의 성공 뒤에는 늘 소임호가 있었다. 하지만 소상현 가족과 달리, 소영수의 셋째 아들인 소재호 일가는 예술을 사랑하며 재산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소영수의 넷째 아들인 소윤성은 심예지와 파혼한 뒤 소씨 가문을 떠나 해외로 가서 조용히 지냈다. 즉, 이 집안은 소임호가 없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무너졌을 것이었다!소영수가 소임호를 특별히 아낀 이유도 바로 이것이었다. 제멋대로인 다른 아들들에 비해 소임호야말로 소씨 가문을 이끌 적임자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소임호가 소씨 가문을 위해 조용히 헌신해온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심지어 위기가 닥쳤을 때 소상현은 소임호를 도울 생각을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의 아들들을 짓누르며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 했다. 하지만 부장
어릴 때부터 소상현은 모든 면에서 소임호보다 못했고, 태어난 그날부터 소임호의 후광 아래 살았다. 소상현이 소임호를 향해 품은 원망과 분노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었다. ‘비즈니스계의 천재’라는 수식어가 소임호 대신 자신에게 붙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을 수도 없이 해 왔을 정도였다. ‘아버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소임호도 별 거 아니었을 거야.’ 소임호가 소영수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소상현의 마음은 크게 들떴다. 비록 자신의 능력이 소임호를 따라가지 못한다 해도, 신분만큼은 소임호보다 우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이곳에 나타나자, 소상현은 자랑스러웠던 신분마저 산산이 무너지는 듯했다.소상현의 얼굴은 보기 민망할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이미 주위 사람들은 전부 부장경과 소임호에게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소상현 부자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부장경은 지아에 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은 채, 다른 식으로 입을 열었다.“형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부장경이라고 합니다. 아버지께서 특수한 신분인 탓에 직접 오시지 못해, 제가 대신 왔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은 핏줄이지만 어머니가 다른, 형님의 동생입니다.”“아버지, 아버지...”소임호의 눈가가 약간 붉어졌다. 사실 소임호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의식을 갖기 시작했을 무렵, 어머니와 단둘이 지내면서도 ‘아버지는 누구일까?’ 하고 궁금해한 적이 있었다.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마다 다정하게 미소를 지으며 소임호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러다 소영수를 만난 뒤에는 그분이 바로 아버지라고 말해주었고, 실제로 소영수는 소임호를 친아들처럼 다정히 대했다. 물론 소임호는 소영수가 친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진실을 밝히지 않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으며 더 이상 묻지 않았다.게다가 소영수는 친아들 이상으로 소임호를 아껴 주었기에, 소임호는 그저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이렇게 아버지가 먼저
부장경은 국내에서 먼 길을 달려왔는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소씨 가문에 대한 몇몇 영상과 사진을 통해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었다.부장경은 소씨 가문 사람들과는 달랐다.비록 부장경도 소임호의 이복형제이지만, 부장경은 오래전부터 부남진이 젊은 시절에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평생의 후회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만약 그 여인이 부남진에게 아들이나 딸을 남겨줬다면, 부남진의 후회를 조금이라도 덜어줄 수 있었을 것이었다. 부장경은 지난 삶을 미셸을 사랑하며 보냈지만, 미셸은 결국 가짜 여동생에 불과했다. 만약 비즈니스적으로 뛰어난 형이 있다면, 부장경에게 그것은 하늘이 준 기회와도 같을 것이었다.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형제인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와 비즈니스가 결합된다는 점에서 부씨 가문은 더 큰 번영을 가져올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지아가 부남진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을 때, 부씨 가문은 이미 대화를 나누며 준비하던 참이었다. 민연주 역시 그 여인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더 이상 따질 것이 없었다. 어차피 그것은 자신이 등장하기 이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게다가 소임호의 능력은 아주 뛰어났다. 그런 양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부씨 가문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것과 동시에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는 선택이었다. 민연주는 손익을 따져보았고, 무엇보다 부남진이 어렵게 찾은 아들을 반대해도 소용없겠다는 결과에 다다랐다. ‘그래, 오히려 통 크게 받아들이는 게 낫겠어.’부남진은 특수한 신분 탓에 떠날 수 없었기에, 대신 부장경이 부씨 가문을 대표해 소임호와 정식으로 인연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이었다. 부장경은 결단력 있는 기운을 풍기며 빠르게 걸어왔다. 회의실을 아주 넓었는데, 부장경과 그의 일행이 들어오자 그들이 내뿜는 살벌한 기운이 전장을 휩쓸 듯 회의실을 가득 메웠다. 부장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조차 등골이 오싹해졌다. 최근 소씨 가문에는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서, 지아조차 부씨 가문의 이야기를
이 말이 나오자마자,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이 몸을 움츠렸고, 그들 중에는 한때 소임호의 뒤를 따르던 사람도 적지 않았다. 비행기 사고 소식이 전해지며 소씨 가문이 혼란에 빠지자, 그 사람들은 곧장 새로운 선택을 했다.본래 군자는 좋은 벗을 택하는 법이지 않은가? 소임호가 죽었다고 생각한 그들은, 시후가 병으로 쇠약해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라 판단했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도 믿음직하지 못하니, 결국 사람들은 소상현 쪽으로 몰리고 만 것이었다. 하지만 소임호가 죽음을 위장하고, 이렇게 난감한 시점에 돌아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일명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즉각 태도를 바꾸었고, 앞다투어 소임호에게 아부하며 말했다. “대표님, 무사하시다니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는 날마다 대표님을 위해 기도드리며...”소임호가 차갑게 그들의 말을 끊었다.“빨리 극락에 가서 뼈도 남지 않길 바랐다고?” “허허, 여전히 유머러스하시네요.” “저희는 대표님께서 하루빨리 돌아오시길 바랐습니다. 대표님께서 부재중인 동안 회사가 이렇게 큰일을 겪었으니까요.” “이쪽으로 오시죠.”방금까지는 시후를 몰아세우며 목소리를 높이던 한 원로가, 소임호를 보자마자 태도를 바꿔 소지훈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여긴 너 같은 애송이가 앉을 곳이 아니야! 어서 비켜, 대표님께서 오셨다고!”이 세상에서 진정한 힘은 실력뿐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모두 이 회사가 누구의 손에서 태어났는지, 누구의 피와 땀으로 이뤄진 것인지, 누구의 뿌리이자 삶의 전부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본래 소임호가 없다고 생각하고 산 정상에 꽂힌 깃발을 훔치려 했지만, 고지에 닿기도 전에 장군이 병력을 이끌고 역습을 해온 꼴이었다.상황을 지켜보던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들’은 자연스레 소임호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소상현의 편에 서 있었으나, 소임호가 등장하자마자 모든 사람이 소상현에게 등을 보였다. 이 상황에 소상현도 살짝 당황했
소상현과 소임호는 원래 이복형제였지만, 어린 시절의 소상현은 아버지에게서 아주 엄격한 대우를 받았다. 그가 가장 많이 들은 말은...“네 형의 반이라도 닮으렴.”“형은 똑똑하고 재능이 있는데, 넌 왜 그렇게 어리석니?” “이렇게 간단한 보고서도 이해 못 한다니, 네 형이라면...”소상현은 집안의 둘째였기에 형인 소임호와 비교되는 일이 많았다. 소임호의 빛나는 존재감 아래, 소상현은 얼마나 평범해 보였는지 모른다. 소상현은 이미 열심히 노력했지만 노력과 재능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소임호는 단순히 똑똑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노력도 부족함이 없었는데, 천부적인 재능 위에 더해진 노력은 금상첨화라고 할 수 있었다.즉, 소상현은 평생을 다 바쳐도 소임호를 따라잡을 수 없을 터. 소임호는 소상현의 평생의 트라우마였다. 그러던 오늘, 드디어 진실이 밝혀졌다.이번 기회에 소상현은 당당히 소임호와 그의 가족을 몰아내고 자신들의 모든 것을 되찾을 참이었다. “시후야, 너도 똑똑한 사람이니 길게 말하진 않으마. 네가 약간의 지분을 샀다고 해도, 우리 손엔 여전히 아버지의 지분이 있어. 결국 너희는 ‘패배’했단 뜻이지! 뭐 하러 사서 고생을 하니? 결국 사람들한테 비웃음이나 살 텐데.” 시월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그 말은 옳지 않아요! 우리 아빠가 할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한 핏줄로 연결된 가족이에요. 우리 몸에는 할머니의 피도 흐르고 있으니까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그렇게 오랜 세월을 애틋하게 사랑하며 함께 살아오셨는데, 우리한테 상속권이 없다는 게 말이나 돼요?” “게다가 이 회사는 우리 아빠가 맨손으로 일궈낸 거예요. 그런데 이제 와서 이렇게 크게 성장한 회사에 숟가락을 얹겠다니, 세상에 이렇게 구차한 일이 어디 있어요?” 소지훈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아버지, 더는 말싸움할 것도 없어요.” 소지훈은 손뼉을 치며 전문 변호사팀을 불러들였다. 그와 동시에 시후 측의 변호사들도 들어왔는데, 그들은
도윤은 지아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걱정하지 마, 자기야. 이미 사람들을 보내 조사하고 있는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릴 것 같아.” 도윤의 세력은 대부분 A국에 집중되어 있어서 이곳에서는 섣불리 행동하기 쉽지 않았다. 게다가 심세호는 이날을 위해 오랜 세월 동안 계획을 세웠으니, 심세호를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당연히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상황 때문에 소임호는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고, 소임호가 보낸 사람들마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져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도윤은 이틀 동안 무릎을 꿇은 탓에 체력이 바닥나 빗속에서 기절할뻔했지만, 소씨 가문 사람들은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시하가 냉담하게 말했다.“저러다 죽으면 더 좋겠어.” 시언도 맞장구쳤다.“좋은 사람은 오래 못 산다더니, 나쁜 놈은 천년이 가도 안 죽는구나.” 소임호는 그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당장 끌어내. 내 눈앞에서 치워버리라고!”지아는 그들의 태도에 머리가 아팠다.‘아무래도 가족들이 도윤 씨를 받아들이는 건 단기간에 이루어질 일이 아닌 것 같아.’ 지아는 진봉에게 도윤을 방으로 옮겨 정성껏 간호하라고 지시했다. 소씨 가문에서 도윤에 대해 가장 악의가 적은 사람은 시후였는데, 시후가 천천히 지아의 곁으로 다가왔다.“소시월이 자금을 다 모았어.” “그럼 이제 우리가 연극을 시작할 때네요.” 시월이 밤새 달려와 도착하자, 시후는 일부러 얼굴에 화장하고 아주 쇠약한 모습을 연출했다.“콜록콜록... 월아, 왔구나.” “오빠, 이틀 만에 상태가 왜 이렇게 악화된 거예요? 절대 쓰러지시면 안 돼요.” “걱정하지 마, 월아. 오래된 병이라서 그래. 그나저나 돈은 다 모은 거야?” “네, 오빠, 지금 상황은 좀 어때요?” “내가 있는 한, 무슨 일이 있어도 아버지의 재산을 지켜내려 하겠지만...” 시후는 일부러 기침을 몇 번 더 하며 말했다.“월아, 앞으로 우리 소씨 가문은 너한테 달렸어.” “오빠, 괜찮을 거예요.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시월은 겉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