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남진의 눈빛은 순간 싸늘해졌고 손으로 컵을 꽉 쥐었다. 지아는 당장이라도 부남진이 폭발했던 같다는 느낌에 그의 손등을 톡톡 치며 말했다. “각하, 일단 물부터 마시세요.” 방금 그 순간 부남진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미셸의 얼굴에 던진 뻔했다. 그는 차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고 자신을 진정시키며 물었다.“그래서 혼전임신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거야?” “은사님, 탓하시려면 저를...” 쨍그랑- 부남진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하용의 발 밀으로 뿌리며 말했다. “설아는 철이 없다고 쳐도 하용 너까지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내 기를 채우려고 이러는 거니?” “혼전임신이라는 게 외부에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우리 부씨 가문을 어떻게 생각 하겠어?” “아빠, 그 고지식한 생각 좀 버려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는데요! 게다가 저와 하용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요.” “심지어 아빠도 오빠한테 빨리 결혼하고 애를 낳으라고 재촉도 했잖아요. 마침 저에게 애가 생겼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거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러자 부남진이 냉소하며 말했다. “한 달 전만 해도 도윤이 아니면 평생 결혼은 하지 않겠다더니 이젠 또 하용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네 진심이 너무 값 떨어진다는 생각 안 들어?” “전에는 제가 멍청해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했던 것뿐이예요.” “그럼 지금은 멍청하지 않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니?” 부남진의 말에 미셸은 할 말을 잃었고 민연주에게 도움을 바랬다. “엄마, 빨리 나 대신 말 좀 해줘. 내가 임신한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아빠는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거야?” 하지만 민연주도 이번엔 미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너 정말 미쳤구나? 네 아버지가 무슨 신분이고 넌 또 무슨 신분인지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거니?” “이게 만일 소문이라도 나면 네 아빠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그러자 미셸이 투덜댔다. “
하용은 순간 멍해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부남진이 이런 고약한 수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용은 부남진이 정말로 자기 딸을 버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고 단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당연하죠. 제가 사랑하는 건 설아라는 사람이지 신분이 아니니까요.” 미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빠, 무슨 뜻이예요? 그때는 홧김에 한 말 아니었어요? 제 친 아빠면서 어떻게 저를 버리려 할 수 있어요?” 이에 부남진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홧김에 한 말이라고? 내가 너처럼 유치한 줄 알아? 그런 말을 홧김에 내뱉게?” “몇 년 동안 너는 잘난 네 신분과 지위로 줄곧 제멋대로 굴고 다녔지만 만약 그 신분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미셸은 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아빠, 화 다 풀리신 거 아니었어요? 안 그럼 왜 저한테 집에 돌아와 식사하자고 한 건데요?” “너에게 돌아오라고 한 건 내가 모두에게 알릴 중요한 일이 있어서였어. 마침 네 이름도 호적에서 파버릴 겸 말이야.” 이에 미셸은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내가 왜 굳이 이런 거로 농담하겠어?” 부남진의 얼굴은 극도로 싸늘했고 마치 남 보는 듯한 눈길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이에 미셸은 갑자기 민연주의 팔을 잡고 흔들었는데 그제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 빨리 얘기 좀 해줘.” 만약 임신만 아니었어도 민연주는 미셸의 편을 들었겠지만 이런 엄청난 사고를 친 그녀에 민연주도 철저히 실망해 버렸다. 민연주는 알뜰살뜰 키운 자기 딸이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친 건지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난 할 말은 없어.” “오빠!” 미셸은 또 부장경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 “빨리 아빠 좀 말려봐.” 그런데 미셸이 너무 심하게 밀었던 탓에 부장경은 옆에 있던 지아와 부딪쳤고 순간 미셸과 지아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미셸은 모든 화를 지아에게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민연주는 부남진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민연주는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여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자 부남진이 설명했다. “오래 전, 당신을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 있다고 내가 얘기 했었지?”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 나와 헤어지고 난 뒤 그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던 것 같아. 지아는 바로 그 사람과 나의 손녀야.”“아빠, 저 여자가 어떻게 아빠의 손녀야? 저 여자는...” 미셸은 연거푸 고개를 저으며 인정하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부남진은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이미 지아와 난 유전자 검사까지 마쳤어. 우린 확실히 혈연 관계가 있고 앞으로 지아 또한 우리 부씨 가문 사람이야. 그리고 넌...” 부남진은 한 층 더 엄숙해진 태도로 말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난 이제 너 같은 딸은 필요 없어. 그러니 알아서 잘 살도록 해.” 미셸은 그제야 부씨 가문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겐 단 한 장의 카드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뱃속의 아이였다. “아빠, 저 임신했어요! 여기 초음파 사진 좀 보세요. 어떻게 임신한 저를 쫓아내실 수 있어요?” “하용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질 줄 아는 좋은 남자이니 너도 끝까지 책임져줄 거야.” “게다가 이 결혼도 네가 원하던 거 아니냐? 하용과 결혼하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이때 하용도 심장이 철렁했는데 그가 오늘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오직 하용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도윤을 한 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하용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지아가 부남진의 친손녀인 거지? 저 여자는 파산 당한 소씨 가문의 딸 아니었어?’ 비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하용은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미셸을 말렸다.“설아야, 뱃속 아기를 생
도윤은 공짜로 엄청난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았는데 지금쯤 하용은 또 계획 실패로 쓴 맛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약간 깨고소한 느낌이었다. 때문에 도윤은 이 식사자리가 매우 즐거웠고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하지만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부씨 가문의 몇 사람은 안색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부남진은 밥맛이 뚝 떨어졌다. 이때 지아가 부남진에게 음식을 짚어주며 말했다. “할아버지,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이에 부남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설아처럼 바보 같은 딸을 나은 걸까?’ 부남진은 자신과 민연주 모두 똑똑한 사람인데 미셸은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식사 자리는 파토 나진 않았지만 분위기는 미셸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부남진이 지아에게 말했다. “오늘 밤엔 발 마사지 안 해줘도 돼. 네 할머니와 할 얘기가 있어.” 할머니란 이 호칭에 지아는 약간 움찔했는데 아직 50여 세밖에 되지 않은 민연주가 얼렁뚱땅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이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어쨌든 화는 내시지 말아요.” 미셸의 임신 소식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하용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저지른 이번 일은 부남진의 마지노선을 완전히 침범해 버렸다. 부장경도 부남진의 방으로 들어갔고 도윤 혼자 싱글벙글이었다. “지아야, 방까지 데려다 줄게.” 바깥 복도의 불빛은 어두컴컴했고 가로등 아래에는 흰 눈이 깃털처럼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 이때 도윤이 지아의 손을 잡으려 했고 그녀는 두 눈을 부릅 뜨고 말했다. “왜 또 그래?” 하지만 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옷주머니에 넣었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띌 까봐 걱정되었던 지아가 얼른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도윤은 단단히 지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아, 문득 우리가 연애를 금방 시작했던 때가 떠올라.” 이 순간 지아의 머리속에 한 화면이 떠올랐다. 당시 마침 해외에서 금방 돌아온 도윤은 가장 먼저 지아의
방으로 돌아온 지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윤, 오늘에 와서 결국 이럴 거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거야?’ 지금의 지아는 다시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는데 그게 그녀의 전 남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도윤은 눈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고 온몸이 눈으로 뒤덮이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도윤은 지금 자기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뼛속 깊이 치르는 중이었다. 서재. 부남진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민연주는 옆에서 계속 그를 위로하고 있었는데 일단은 먼저 미셸과 선을 그었다. “여보, 이번 일는 나도 정말 몰랐어. 그렇게 보지 마.” “설아가 계속 무슨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고 하길래 이젠 정말 잘못을 뉘우쳤나 했더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에 부장경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번엔 설아가 확실히 선 넘었어요. 우리 모두 설아가 전에 하용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잖아요.” “하용 그 자식한테 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임신을 하다니요! 게다가 하용의 아이라니!” “그러니까! 분명 지난 번에 설아가 피임약을 먹는 것까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데 절대 임신일 리 없어! 여보, 이제 어쩌면 좋아?” 그러자 부남진이 냉소하며 말했다.“뭘 어떻게 해? 난 이미 말했어.” “그래도 설아는 당신이 가장 아끼던 딸인데 정말 이렇게 버리려는 거야?” “설아가 직접 선택한 길이야. 누구도 억지로 밀어붙인 적 없고 말이야. 이제 와서 뭘 더 어떻게 해?” “사람이 아니라 돼지였어도 이만큼 했으면 말귀는 알아들었을 거야.” “고작 하용의 몇 마디 말에 또 속아 넘어가다니! 내가 봤을 때 설아는 너무 곱게 컸어. 그러니 이번 기회에 고생 좀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부남진은 단번에 결론을 내렸다. “이번 일은 이렇게 정했어. 앞으로 설아는 내 딸이 아니야. 그러니까 경고하는데 너희들도 더는 무의미한 일 벌이지 마.” “아버지, 알겠어요.” 민연주는 부장경을 잡으며 말
원래도 화가 났던 민연주는 이명란의 말에 테이블을 치며 더욱 분노했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그 년이 대체 뭔데! 근본도 없는 잡종 따위가 감히!” “부인의 말씀이 맞아요. 아직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게 잡종이 아니면 뭐겠어요? 저희 설아 아가씨가 이렇게 된 건 다 그 잡종 때문이예요.”“만약 그 여자만 없어지면 각하도 분명 다시 설아 아가씨를 가문으로 데려올 거예요!” 이때 민연주는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로 이명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집사는 왜 갑자기 이 일에 그렇게 분노하는 거야?” 그러자 이명란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부인, 저는 부인이 아직 처녀일 때부터 부인을 모셔온 사람이예요. 당시 제 애가 사고로 세상을 뜬 뒤 설아 아가씨도 거의 제 손으로 직접 키우다시피 했고요.” “그러니 전 이미 설아 아가씨를 거의 제 친딸이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아 아가씨가 가문에서 쫓겨나니 저도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그러자 민연주는 이명란의 얼굴을 치켜들며 그녀의 오른쪽 볼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고 순간 이명란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습니다.” “일어나.” 민연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너와 상관없어. 하지만 네 말이 다 맞아.” “소지아 그 천한 년이 우리 집에 온 뒤부터 내 딸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절대 용서 못해.” “부인, 설아 아가씨 쪽은 제가 애를 지울 수 있는지 그리고 하용과 헤어지게 할 수 있을 지 잘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필경 네가 설아를 직접 키우다시피 했으니 네 말이라면 설아가 들을 지도 몰라.” 민연주는 자신의 머리를 짚었고 낯빛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는데 요 며칠 미셸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부인, 제가 좀 주물러 드리지요.” “그래.” 이날 밤, 민연주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았고 미셸 일만 생각하면 속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일 신경
미셸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 전체 부씨 가문의 분위기는 아주 암울했고 지아도 이 틈에 바깥으로 나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젯밤 도윤과 찝찝하게 헤어진 탓에 지아는 먼저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도윤은 줄곧 재혼을 원했지만 지아는 또 한번 자신에게 같은 족쇄를 채우고 싶진 않았다. 지아는 이번에 외출한 김에 장민호가 얼마나 애가 타 하는지 확인해보려 했다. 장민호는 매일 지아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거의 대부분 답장하지 않았고 점점 더 차갑게 대했다. 그러던 오늘, 지아는 특별히 보약을 준비해 고심옥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지아를 본 고심옥은 매우 기뻐했다. “얘야, 드디어 왔구나! 얼른 내 얼굴 좀 봐. 확실히 변화가 있지?” 비록 아직 흉터가 남아있긴 했지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전보다는 많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이에 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많이 나아지셨네요. 여기 제가 특별히 준비해온 보약이예요. 지난번에 맥을 짚어보니 몸이 많이 허하신 것 같아서 말이죠. 드시면 몸에 좋을 거예요.” “아이고, 세심하기도 해라.” 고심옥은 원래 받지 않으려 했으나 몸에 좋다는 말에 냉큼 받았다. 고심옥에게 있어 지아는 마치 명의 같은 존재였는데 그녀는 격동된 듯 지아를 잡으며 말했다. “고맙네, 오늘 꼭 남아서 밥이라도 먹고 가. 참, 의사이니 미용에 관한 여러 가지 방법들도 잘 알고 있겠지?” “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고심옥은 지아를 끌고 방으로 향했고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소지아 씨에게 좋은 한 끼 대접해드려야 하니 얼른 가서 장 봐와.” “네.” 시종은 대답을 하고서 가장 먼저 장민호에게 연락했다. 이때 지아가 고심옥의 집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장민호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지아는 모든 것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심옥과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다른 친구의 병도 봐주러 가야 해서 침을 가져왔는데 아주머니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시침해드려도 될까요? 침 몇 방이
문밖의 장민호는 긴장한 듯 담배를 한 대 또 한 대 연거푸 피웠다. 그날 밤 지아가 그런 말을 남기도 떠난 뒤로 장민호는 줄곧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아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한 뒤로는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이가 지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민호는 지아를 조산하게 만든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강미연을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지아와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지아가 냉담하게 굴 때마다 장민호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후비는 듯 아파왔는데 그는 다시 한번만 지아를 만날 수 있기를 매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장민호는 안절부절 못하며 밖에서 지아를 기다렸고 이때 안에서는 시침을 마친 고심옥의 격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아. 얘야, 너 정말 명의구나!” 그러자 지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명의까진 아니고 단지 의술을 조금 아는 것뿐입니다.” 이때 장민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마침 침들을 정리하고 있던 지아의 우아하고도 부드러운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고심옥이 이를 보고는 답답한 듯 말했다. “내 아들 성격이 얼마나 급한 지 좀 봐. 얼른 내 아들과 얘기 좀 해봐.” 지아는 몸을 일으키며 의료 상자를 들었고 이에 고심옥과 장민호는 약간 긴장되었다. “왜? 그만 가려고?” “오늘은 저번에 아주머니께 드린 약의 약효를 보고 혈을 짚어드리려고 온 거예요. 겸사겸사 시침도 해드릴 겸 해서 말이죠.” “그리고 이제 치료가 끝났으니 저도 가봐야죠.” “도우미한테 장 봐오라고 시켰는데 밥 먹고 가지.”“아주머니, 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다른 환자도 시침을 기다리고 있어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에 장민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네.” 엘리베이터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