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남진의 눈빛은 순간 싸늘해졌고 손으로 컵을 꽉 쥐었다. 지아는 당장이라도 부남진이 폭발했던 같다는 느낌에 그의 손등을 톡톡 치며 말했다. “각하, 일단 물부터 마시세요.” 방금 그 순간 부남진은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미셸의 얼굴에 던진 뻔했다. 그는 차오르는 분노를 겨우 억누르고 자신을 진정시키며 물었다.“그래서 혼전임신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거야?” “은사님, 탓하시려면 저를...” 쨍그랑- 부남진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하용의 발 밀으로 뿌리며 말했다. “설아는 철이 없다고 쳐도 하용 너까지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일부러 내 기를 채우려고 이러는 거니?” “혼전임신이라는 게 외부에 소문이라도 나면 사람들이 우리 부씨 가문을 어떻게 생각 하겠어?” “아빠, 그 고지식한 생각 좀 버려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혼전임신으로 결혼하는데요! 게다가 저와 하용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요.” “심지어 아빠도 오빠한테 빨리 결혼하고 애를 낳으라고 재촉도 했잖아요. 마침 저에게 애가 생겼고 손자를 품에 안을 수 있게 되었는데 이거 좋은 일 아닌가요?” 그러자 부남진이 냉소하며 말했다. “한 달 전만 해도 도윤이 아니면 평생 결혼은 하지 않겠다더니 이젠 또 하용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네 진심이 너무 값 떨어진다는 생각 안 들어?” “전에는 제가 멍청해서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했던 것뿐이예요.” “그럼 지금은 멍청하지 않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니?” 부남진의 말에 미셸은 할 말을 잃었고 민연주에게 도움을 바랬다. “엄마, 빨리 나 대신 말 좀 해줘. 내가 임신한 게 나쁜 일도 아닌데 아빠는 왜 저렇게까지 화를 내시는 거야?” 하지만 민연주도 이번엔 미셸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너 정말 미쳤구나? 네 아버지가 무슨 신분이고 넌 또 무슨 신분인지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거니?” “이게 만일 소문이라도 나면 네 아빠가 얼굴을 어떻게 들고 다니겠어?” 그러자 미셸이 투덜댔다. “
하용은 순간 멍해졌고 한참이 지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부남진이 이런 고약한 수를 쓸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하용은 부남진이 정말로 자기 딸을 버릴 리는 없다고 생각했고 단지 자신을 시험하려는 것이라고 여겼다. “당연하죠. 제가 사랑하는 건 설아라는 사람이지 신분이 아니니까요.” 미셸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아빠, 무슨 뜻이예요? 그때는 홧김에 한 말 아니었어요? 제 친 아빠면서 어떻게 저를 버리려 할 수 있어요?” 이에 부남진은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홧김에 한 말이라고? 내가 너처럼 유치한 줄 알아? 그런 말을 홧김에 내뱉게?” “몇 년 동안 너는 잘난 네 신분과 지위로 줄곧 제멋대로 굴고 다녔지만 만약 그 신분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미셸은 순간 표정이 굳어 버렸다. “아빠, 화 다 풀리신 거 아니었어요? 안 그럼 왜 저한테 집에 돌아와 식사하자고 한 건데요?” “너에게 돌아오라고 한 건 내가 모두에게 알릴 중요한 일이 있어서였어. 마침 네 이름도 호적에서 파버릴 겸 말이야.” 이에 미셸은 몸이 파르르 떨려왔다. “아빠, 지금 농담하시는 거죠?” “내가 왜 굳이 이런 거로 농담하겠어?” 부남진의 얼굴은 극도로 싸늘했고 마치 남 보는 듯한 눈길로 미셸을 바라보았다. 이에 미셸은 갑자기 민연주의 팔을 잡고 흔들었는데 그제야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엄마, 빨리 얘기 좀 해줘.” 만약 임신만 아니었어도 민연주는 미셸의 편을 들었겠지만 이런 엄청난 사고를 친 그녀에 민연주도 철저히 실망해 버렸다. 민연주는 알뜰살뜰 키운 자기 딸이 어떻게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사고를 친 건지 수치스러울 따름이었다. “난 할 말은 없어.” “오빠!” 미셸은 또 부장경에게로 다가가 그의 팔을 마구 흔들며 말했다. “빨리 아빠 좀 말려봐.” 그런데 미셸이 너무 심하게 밀었던 탓에 부장경은 옆에 있던 지아와 부딪쳤고 순간 미셸과 지아와 두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미셸은 모든 화를 지아에게
이미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민연주는 부남진의 입에서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민연주는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여보,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그러자 부남진이 설명했다. “오래 전, 당신을 만나기 전에 다른 사람을 만난 적 있다고 내가 얘기 했었지?” “당신을 배신한 게 아니라 나와 헤어지고 난 뒤 그 사람에게 아이가 생겼던 것 같아. 지아는 바로 그 사람과 나의 손녀야.”“아빠, 저 여자가 어떻게 아빠의 손녀야? 저 여자는...” 미셸은 연거푸 고개를 저으며 인정하려 이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부남진은 냉랭하게 웃으며 대답할 뿐이었다. “이미 지아와 난 유전자 검사까지 마쳤어. 우린 확실히 혈연 관계가 있고 앞으로 지아 또한 우리 부씨 가문 사람이야. 그리고 넌...” 부남진은 한 층 더 엄숙해진 태도로 말했다.“전에도 말했지만 난 이제 너 같은 딸은 필요 없어. 그러니 알아서 잘 살도록 해.” 미셸은 그제야 부씨 가문에 천지개벽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고 그녀는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그녀에겐 단 한 장의 카드 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건 바로 뱃속의 아이였다. “아빠, 저 임신했어요! 여기 초음파 사진 좀 보세요. 어떻게 임신한 저를 쫓아내실 수 있어요?” “하용은 자신이 한 일에 책임질 줄 아는 좋은 남자이니 너도 끝까지 책임져줄 거야.” “게다가 이 결혼도 네가 원하던 거 아니냐? 하용과 결혼하고 네가 원하는 삶을 살아.” 이때 하용도 심장이 철렁했는데 그가 오늘을 위해 어떤 대가를 치렀는지는 오직 하용 자신만이 알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도윤을 한 번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하용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어떻게 지아가 부남진의 친손녀인 거지? 저 여자는 파산 당한 소씨 가문의 딸 아니었어?’ 비록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지만 하용은 애써 이성의 끈을 부여잡고 미셸을 말렸다.“설아야, 뱃속 아기를 생
도윤은 공짜로 엄청난 드라마 한 편을 본 것 같았는데 지금쯤 하용은 또 계획 실패로 쓴 맛을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약간 깨고소한 느낌이었다. 때문에 도윤은 이 식사자리가 매우 즐거웠고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하지만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뒤 부씨 가문의 몇 사람은 안색이 완전히 어두워졌고 부남진은 밥맛이 뚝 떨어졌다. 이때 지아가 부남진에게 음식을 짚어주며 말했다. “할아버지, 건강을 생각하셔야죠.” 이에 부남진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설아처럼 바보 같은 딸을 나은 걸까?’ 부남진은 자신과 민연주 모두 똑똑한 사람인데 미셸은 도대체 누구를 닮은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오늘 식사 자리는 파토 나진 않았지만 분위기는 미셸로 인해 엉망진창이 되었기에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부남진이 지아에게 말했다. “오늘 밤엔 발 마사지 안 해줘도 돼. 네 할머니와 할 얘기가 있어.” 할머니란 이 호칭에 지아는 약간 움찔했는데 아직 50여 세밖에 되지 않은 민연주가 얼렁뚱땅 할머니가 되어버린 것이다. “알겠어요. 할아버지, 어쨌든 화는 내시지 말아요.” 미셸의 임신 소식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하용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저지른 이번 일은 부남진의 마지노선을 완전히 침범해 버렸다. 부장경도 부남진의 방으로 들어갔고 도윤 혼자 싱글벙글이었다. “지아야, 방까지 데려다 줄게.” 바깥 복도의 불빛은 어두컴컴했고 가로등 아래에는 흰 눈이 깃털처럼 부드럽게 쏟아지고 있는 것이 경치는 매우 아름다웠다. 이때 도윤이 지아의 손을 잡으려 했고 그녀는 두 눈을 부릅 뜨고 말했다. “왜 또 그래?” 하지만 도윤은 지아의 손을 잡아 자신의 옷주머니에 넣었고 다른 사람들 눈에 띌 까봐 걱정되었던 지아가 얼른 손을 빼려 했다. 그러나 도윤은 단단히 지아를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지아, 문득 우리가 연애를 금방 시작했던 때가 떠올라.” 이 순간 지아의 머리속에 한 화면이 떠올랐다. 당시 마침 해외에서 금방 돌아온 도윤은 가장 먼저 지아의
방으로 돌아온 지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도윤, 오늘에 와서 결국 이럴 거면서 그때는 왜 그렇게 모질게 굴었던 거야?’ 지금의 지아는 다시 결혼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는데 그게 그녀의 전 남편이라 할 지라도 말이다. 도윤은 눈 속에서 한참 동안이나 서 있었고 온몸이 눈으로 뒤덮이고 나서야 긴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떴다.도윤은 지금 자기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뼛속 깊이 치르는 중이었다. 서재. 부남진은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민연주는 옆에서 계속 그를 위로하고 있었는데 일단은 먼저 미셸과 선을 그었다. “여보, 이번 일는 나도 정말 몰랐어. 그렇게 보지 마.” “설아가 계속 무슨 서프라이즈를 준비했다고 하길래 이젠 정말 잘못을 뉘우쳤나 했더니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이에 부장경도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이번엔 설아가 확실히 선 넘었어요. 우리 모두 설아가 전에 하용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잖아요.” “하용 그 자식한테 당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임신을 하다니요! 게다가 하용의 아이라니!” “그러니까! 분명 지난 번에 설아가 피임약을 먹는 것까지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는데 절대 임신일 리 없어! 여보, 이제 어쩌면 좋아?” 그러자 부남진이 냉소하며 말했다.“뭘 어떻게 해? 난 이미 말했어.” “그래도 설아는 당신이 가장 아끼던 딸인데 정말 이렇게 버리려는 거야?” “설아가 직접 선택한 길이야. 누구도 억지로 밀어붙인 적 없고 말이야. 이제 와서 뭘 더 어떻게 해?” “사람이 아니라 돼지였어도 이만큼 했으면 말귀는 알아들었을 거야.” “고작 하용의 몇 마디 말에 또 속아 넘어가다니! 내가 봤을 때 설아는 너무 곱게 컸어. 그러니 이번 기회에 고생 좀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부남진은 단번에 결론을 내렸다. “이번 일은 이렇게 정했어. 앞으로 설아는 내 딸이 아니야. 그러니까 경고하는데 너희들도 더는 무의미한 일 벌이지 마.” “아버지, 알겠어요.” 민연주는 부장경을 잡으며 말
원래도 화가 났던 민연주는 이명란의 말에 테이블을 치며 더욱 분노했다.“그 여자가 무슨 자격으로? 그 년이 대체 뭔데! 근본도 없는 잡종 따위가 감히!” “부인의 말씀이 맞아요. 아직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게 잡종이 아니면 뭐겠어요? 저희 설아 아가씨가 이렇게 된 건 다 그 잡종 때문이예요.”“만약 그 여자만 없어지면 각하도 분명 다시 설아 아가씨를 가문으로 데려올 거예요!” 이때 민연주는 갑자기 험상궂은 얼굴로 이명란을 바라보며 말했다.“이 집사는 왜 갑자기 이 일에 그렇게 분노하는 거야?” 그러자 이명란은 갑자기 무릎을 꿇으며 대답했다. “부인, 저는 부인이 아직 처녀일 때부터 부인을 모셔온 사람이예요. 당시 제 애가 사고로 세상을 뜬 뒤 설아 아가씨도 거의 제 손으로 직접 키우다시피 했고요.” “그러니 전 이미 설아 아가씨를 거의 제 친딸이라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런 설아 아가씨가 가문에서 쫓겨나니 저도 마음이 아플 따름입니다.” 그러자 민연주는 이명란의 얼굴을 치켜들며 그녀의 오른쪽 볼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고 순간 이명란은 다시 고개를 숙이더니 자신의 뺨을 때리기 시작했다.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을 꺼냈습니다.” “일어나.” 민연주가 싸늘하게 말했다. “이번 일은 너와 상관없어. 하지만 네 말이 다 맞아.” “소지아 그 천한 년이 우리 집에 온 뒤부터 내 딸이 억울하게 당하고 있으니까 말이야. 절대 용서 못해.” “부인, 설아 아가씨 쪽은 제가 애를 지울 수 있는지 그리고 하용과 헤어지게 할 수 있을 지 잘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필경 네가 설아를 직접 키우다시피 했으니 네 말이라면 설아가 들을 지도 몰라.” 민연주는 자신의 머리를 짚었고 낯빛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는데 요 며칠 미셸 때문에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았다. “부인, 제가 좀 주물러 드리지요.” “그래.” 이날 밤, 민연주는 전혀 잠이 오지 않았고 미셸 일만 생각하면 속상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제일 신경
미셸이 한바탕 휩쓸고 간 뒤 전체 부씨 가문의 분위기는 아주 암울했고 지아도 이 틈에 바깥으로 나와 자신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어젯밤 도윤과 찝찝하게 헤어진 탓에 지아는 먼저 그를 찾으러 가지 않았다. 도윤은 줄곧 재혼을 원했지만 지아는 또 한번 자신에게 같은 족쇄를 채우고 싶진 않았다. 지아는 이번에 외출한 김에 장민호가 얼마나 애가 타 하는지 확인해보려 했다. 장민호는 매일 지아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그녀는 거의 대부분 답장하지 않았고 점점 더 차갑게 대했다. 그러던 오늘, 지아는 특별히 보약을 준비해 고심옥의 집으로 찾아갔는데 지아를 본 고심옥은 매우 기뻐했다. “얘야, 드디어 왔구나! 얼른 내 얼굴 좀 봐. 확실히 변화가 있지?” 비록 아직 흉터가 남아있긴 했지만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전보다는 많이 희미해진 상태였다. 이에 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네, 많이 나아지셨네요. 여기 제가 특별히 준비해온 보약이예요. 지난번에 맥을 짚어보니 몸이 많이 허하신 것 같아서 말이죠. 드시면 몸에 좋을 거예요.” “아이고, 세심하기도 해라.” 고심옥은 원래 받지 않으려 했으나 몸에 좋다는 말에 냉큼 받았다. 고심옥에게 있어 지아는 마치 명의 같은 존재였는데 그녀는 격동된 듯 지아를 잡으며 말했다. “고맙네, 오늘 꼭 남아서 밥이라도 먹고 가. 참, 의사이니 미용에 관한 여러 가지 방법들도 잘 알고 있겠지?” “네,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고심옥은 지아를 끌고 방으로 향했고 시종에게 눈짓을 했다. “소지아 씨에게 좋은 한 끼 대접해드려야 하니 얼른 가서 장 봐와.” “네.” 시종은 대답을 하고서 가장 먼저 장민호에게 연락했다. 이때 지아가 고심옥의 집에 왔다는 소식을 접한 장민호는 부리나케 달려왔다. 지아는 모든 것을 눈치 채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심옥과의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늘 다른 친구의 병도 봐주러 가야 해서 침을 가져왔는데 아주머니께서 괜찮으시다면 제가 시침해드려도 될까요? 침 몇 방이
문밖의 장민호는 긴장한 듯 담배를 한 대 또 한 대 연거푸 피웠다. 그날 밤 지아가 그런 말을 남기도 떠난 뒤로 장민호는 줄곧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이 지아에게 느끼는 특별한 감정이 사랑일 수도 있다는 걸 인식한 뒤로는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사랑할 수 없는 이가 지아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민호는 지아를 조산하게 만든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강미연을 죽인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분명 지아와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마음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점점 커져갔다. 그리고 지아가 냉담하게 굴 때마다 장민호는 마치 누군가 자신의 가슴을 후비는 듯 아파왔는데 그는 다시 한번만 지아를 만날 수 있기를 매일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장민호는 안절부절 못하며 밖에서 지아를 기다렸고 이때 안에서는 시침을 마친 고심옥의 격동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몸이 한결 편해진 것 같아. 얘야, 너 정말 명의구나!” 그러자 지아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명의까진 아니고 단지 의술을 조금 아는 것뿐입니다.” 이때 장민호가 문을 열고 들어왔는데 마침 침들을 정리하고 있던 지아의 우아하고도 부드러운 미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리고 자신의 옷 매무새를 정리하고 있던 고심옥이 이를 보고는 답답한 듯 말했다. “내 아들 성격이 얼마나 급한 지 좀 봐. 얼른 내 아들과 얘기 좀 해봐.” 지아는 몸을 일으키며 의료 상자를 들었고 이에 고심옥과 장민호는 약간 긴장되었다. “왜? 그만 가려고?” “오늘은 저번에 아주머니께 드린 약의 약효를 보고 혈을 짚어드리려고 온 거예요. 겸사겸사 시침도 해드릴 겸 해서 말이죠.” “그리고 이제 치료가 끝났으니 저도 가봐야죠.” “도우미한테 장 봐오라고 시켰는데 밥 먹고 가지.”“아주머니, 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다른 환자도 시침을 기다리고 있어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요.” 이 말에 장민호는 표정이 어두워졌다.“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네.” 엘리베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