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괴로운 듯한 표정으로 장민호를 밀어내며 말했다.“저,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지아는 곧장 차에 올라탔지만 장민호는 차문을 못 닫게 막았다. “안 가면 안 돼요?” “저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어요. 만약 민호 씨가 여기 있는 줄 알았다면 오늘 오지 않았을 거예요. 지금은 마음이 심란하니, 일단 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럼 문자에 꼭 답장해줘야 해요.” “네.” 그제야 장민호는 차문에서 손을 뗐고 지아는 시동을 걸기 전 일부러 눈물을 흘릴 것만 같은 마음 아픈 표정을 지었다. 장민호 같은 사람을 상대할 때 가장 좋은 방법은 밀당이었는데 그 혼자서 여러 가지를 고민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단계는 장민호가 자신을 애절한 역할에 대입하는 것인데 스스로 자신의 절절한 감정에 잠겨 있을 때 비로소 지아는 다음 계획을 실행할 수 있었다. 36계중 사람의 마음을 건드리는 것만큼 좋은 수는 없었다. 오늘 지아는 백채원에게도 시침을 해줘야 했고 앞으로의 치료계획을 위해 그녀를 병원에 보내 CT를 찍어보게 했다. 병원 앞에 도착한 지아는 미리 차 안에서 다시 가면을 쓰고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그런데 지아가 병원 로비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윤화연이 그녀 앞에서 픽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 눈치가 빨랐던 지아가 얼른 달려가 윤화연을 안았기에 다행히 바닥에 쓰러지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지아가 팔로 윤화연의 허리를 감쌌는데 그녀의 몸은 아주 왜소했고 허리도 가냘프기 그지없었다. ‘설마 또 예쁨을 위해 과도하게 다이어트를 한 사람인 건가? 아니면 큰 병이라도 걸린 걸까?’ 윤화연은 마치 당시 항암치료를 받던 지아처럼 매우 말라 있었다. 사실 일반인은 연예인처럼 화면에 얼굴이 작아 보일 필요는 없기에 몸을 이 정도로 혹사 시키지 않아도 됐다. 윤화연은 지아의 품에 기대 있었는데 지아가 그녀의 머리를 넘겨보니 백옥 같은 피부와 얇은 목선이 드러났고 그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보였다.‘엄청 가냘픈 여인이네.’
비록 서로 모르는 사이긴 하지만, 지아는 의사로서 걱정이 앞섰다. 지금의 몸 상태로는 임신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만약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결과는 두 가지뿐이다. 첫째는 아기가 일정 시점에 도달하면 자연 유산되는 것이고, 둘째는 산모와 아이가 모두 위험에 처하는 경우다. 첫 번째가 그나마 최선의 결과다.여성으로서 그리고 엄마로서 지아는 이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곧장 뒤따라갔는데, 상대방이 임신 중이라 걸음이 느렸기 때문에 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다.“잠깐만요.” 지아는 윤화연을 멈춰 세웠다.정순영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지아 앞을 가로막았다. “또 무슨 일이신가요?” 그녀의 눈에는 마치 도둑이라도 만난 듯한 경계심이 가득했다.윤화연은 서둘러 정순영을 밀어내며 말했다. “순영 아주머니, 이분은 좋은 분이니 괜찮아요.”지아는 윤화연이 심성이 착한 사람임을 느낄 수 있었고, 특히 그녀의 눈은 너무도 깨끗해서 오염되지 않은 설산의 초목처럼 순수했다. 이런 사람에게 지아는 항상 자비로웠다.윤화연은 두 걸음 앞으로 나와 지아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지아는 정순영이 경계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상대방의 몸 상태에 대해 직접 말하기 곤란해 핑계를 대며 말했다. “옆에 아침 식사할 수 있는 곳이 있어요. 혹시 또 쓰러질까 봐 걱정돼서요.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윤화연은 원래도 약간 배가 고팠기 때문에 정순영을 바라보며 묻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아주머니, 저...”“아가씨, 밖에서 파는 음식은 깨끗하지 않아요. 집에 가서 먹자고요.” 정순영이 말했다.그러자 지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임산부는 영양을 즉시 보충해야 하는 거 아세요? 만약 다시 쓰러져서 태아에게 해가 가면 어떻게 책임 지실 거죠?”정순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떻게 우리 아가씨가 임신한 걸 아신 거죠?”윤화연도 눈을 반짝이며 신기해했다. “맞아요, 맞아요.”“방금 당신 손목을 잡았을 때 맥박을 느
병을 치료하거나 사람을 구하는 일은 항상 지아의 기분에 달려 있었다. 특히 그녀는 노약자나 병약자들에게 유독 인내심을 가지고 임했다. 지아는 결코 거만하지 않았으며, 가난한 환자를 만나면 무료로 진료를 해주기도 했다.그녀는 언제나 스승의 말씀을 마음에 새겼다. “병을 치료하고 사람을 구하는 것은 결코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의사는 천하를 함께 구제해야 한다.”정순영은 지아가 무엇을 하려는지는 몰랐지만, 그녀가 윤화연의 병을 한눈에 알아차린 것을 보고 긴장해 경호원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곧 몇 명의 검은 옷을 입은 경호원들이 도착했다.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그들은 근처의 죽집으로 갔다.“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예요? 말해두지만, 저희 아가씨는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이상한 짓을 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정순영이 말했다.지아는 정순영의 말을 무시하고, 죽 두 그릇을 주문한 뒤 윤화연에게 손을 다시 내밀라고 했다. 방금 너무 급해서 맥을 잘못 짚었을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윤화연은 서둘러 손을 내밀었고, 지아는 다시 그녀의 맥을 짚었다. 지아가 손을 떼자마자 정순영이 물었다. “어떻습니까?”“태아는 잘 자라고 있어요.” 지아가 대답했다. 이 점은 이미 초음파 검사에서 확인한 바 있었다.“그건 말 안 해도 알아요. 아가씨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정순영은 더 자세한 답을 원했다.정순영이 윤화연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에, 지아는 그녀의 무례함을 너그럽게 넘어갔다.“아이는 문제가 없지만, 출산은 어려울 겁니다.”“당신은 돈을 뜯어내려는 사기꾼이겠죠!” 정순영이 소리쳤다. 사실 병원 밖에는 장애인 구걸이나 점술가처럼 환자의 절박한 심리를 이용해 돈을 뜯어내려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윤화연의 창백한 얼굴이 더욱 하얘졌다. “무슨 말씀이시죠?” 그녀는 지아를 바라보았다. 지아의 외모는 평범해 보였고, 입고 있는 옷도 단순한 디자인이었지만 모두 고급 브랜드였으며, 그녀에게서 풍기는 분위기 또한
지아는 아직 윤화연의 가정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지금 모든 것을 말하면 오히려 화를 부를 수 있을까 봐 조심스러웠다.“당신의 체질은 천천히 조절해야 합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의사입니다.” 지아는 자신의 침술 가방을 꺼내 보였다. “하지만 오늘 다른 환자도 봐야 해서, 당신의 몸 상태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주소를 남겨주세요. 제가 일과를 마친 후에 찾아가 자세히 상담해 드리겠습니다.”정순영은 조금 망설였다. 지아에게 주소를 알려주는 것이 탐탁지 않았다.“당신이 다니는 병원의 주소를 알려주시면, 나중에 아가씨를 모시고 찾아가겠습니다.”“저는 병원에서 근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당신 아가씨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함부로 외출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아까 말했듯이 유산 위험이 큽니다. 초기 3개월은 반드시 안정이 필요하니, 제가 방문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지아는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네요. 아가씨는 식사를 마치고 가시도록 하세요. 저혈당이 있으니 아침은 꼭 챙겨 드셔야 합니다. 이것은 제 전화번호입니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 주세요.”윤화연은 지아의 손목에 차고 있는 수억이 넘는 명품 시계를 보고, 그녀가 돈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아가씨, 저희는 서로 모르는 사이인데 왜 저를 도와주시려는 거죠?” 윤화연이 물었다.지아는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도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이에요. 한때 저도 아이를 잃을 뻔했던 경험이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그 말을 남기고 지아는 계산을 하고, 검은 펜으로 영수증에 전화번호를 적은 후 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이미 윤화연에게 기회를 주었다. 이제 선택은 그들의 몫이었다.윤화연은 정순영을 바라보며 간절한 눈빛을 보였다. “순영 아주머니, 저 사람은 사기꾼이 아닌 것 같아요.”“아가씨, 사기꾼이라고 얼굴에 써 놓는 사람은 없어요.”“하지만 저분은 돈이 필요한 사람이 아닌 것 같아요. 게다가
백채원은 예전과 달리 지아를 매우 신뢰하는 모습이었다. “요즘 다리가 많이 좋아진 걸 느낄 수 있어요. 어제는 목발을 짚고 몇 초 동안 서 있을 수 있었어요. 잠시 후 결과가 나오면 좀 봐주세요. 수술을 빨리하면 안 될까요?”지아는 담담하게 말했다. “서두르지 마세요. 먼저 누우시면 제가 침을 놓아드릴게요.”“알겠어요.”백채원은 지아를 매우 신뢰하며, 하루빨리 회복되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이제는 아픔도 두렵지 않았다.“너무 어리신 것 같은데, 의술이 꽤 뛰어나시네요.” 백채원은 기분이 좋아져서 그녀와 대화를 나눴다.“그저 그렇습니다.”“겸손하시네요. 만약 저를 치료해 주시면 꼭 크게 보답할게요.”백채원은 통증을 참고 다시 물었다. “언제쯤이면 다시 설 수 있을까요?”“곧 설 수 있을 겁니다.”지아는 침을 능숙하게 놓고는 백채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빨리 일어나고 싶으신가요?”“당연하죠. 눈이 먼 사람이 평생 동안 빛을 쫓는 것처럼, 누가 평생을 휠체어에 갇혀 있고 싶겠어요? 당신은 다친 적이 없어서 제 기분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어쩌면 바깥의 빛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어요.” 지아는 의미심장하게 말했다.백채원은 지아의 말속에 뭔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았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가 자신을 치료해 주기만 하면 됐다.백호가 보고서를 가져왔다. 지아는 그가 하용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보는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하용은 이미 그녀가 지아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지아는 그가 이 사실을 백호에게 전달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바네사 씨, 이건 채원 씨의 골격 회복 보고서예요. 한 번 보시죠.”백호는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이는 하용이 그녀의 정체를 누설하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어쩌면 지아는 그들의 대화 주제가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이 일은 부남진이 특별히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한 것이었고, 하용은 현재 부씨 가문에게 잘
이곳은 한 저택의 별장이었고, 비록 겨울이지만 정원이 잘 관리된 것이 눈에 띄었다. 사계절 내내 꽃이 피어 있는 이곳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정순영은 여전히 경계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말해두지만, 당신은 아가씨의 몸만 돌보면 돼요. 다른 건 보지도 묻지도 마세요.”지아는 그녀의 태도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주머니, 솔직히 말해서 저한테 진료를 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꽤 많아요. 당신 아가씨 한 명이 없어도 전 손해 보지 않습니다. 만약 같은 여자라는 점을 감안하지 않았다면, 제가 굳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겁니다.”정순영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이렇게 젊은 분이 얼마나 높은 의술을 가졌겠어요? 심지어 병원에도 소속되지 않으셨잖아요. 그저 우리 아가씨가 마음이 약해서 쉽게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거겠죠.”“마음대로 생각하세요.”지아는 방으로 들어섰고, 따뜻한 공기가 그녀를 맞이했다. 윤화연이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신의님, 오셨군요.”“죄송해요. 제가 몸이 안 좋아서 나가서 맞이하지 못했어요.”“괜찮아요. 이해합니다.”지아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명의 아주머니들만 보였을 뿐 다른 사람은 없었다.“이 큰 별장에 혼자 사세요?”“저...”윤화연이 대답하려는 순간, 정순영이 재빨리 가로막았다. “물어서는 안 되는 건 묻지 마세요. 당신은 아가씨의 병만 돌보면 됩니다.”지아는 정순영을 내보내고 싶었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자리를 지키며 거의 한 발짝도 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지아는 그녀와 대화할 수 없었다.“신의님, 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말씀 좀 해주세요?”지아는 윤화연의 몸 상태를 잘 모르기 때문에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공기 중의 약 냄새를 맡으며 화제를 바꿨다. “약을 드시고 계시나요?”“신의님, 정말 대단하세요! 제 몸이 약해서 한의사분이 처방해 주신 약을 먹고 있어요. 방금 약을 다 마시고 아주머니께서 약 찌꺼기를 버렸어요.”“약
하용은 지아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내 침착해졌다. 손이 이미 나갔으니, 갑자기 거두는 건 오히려 더 수상해 보일 터였다. 그는 즉시 마음을 가다듬고, 자연스럽게 손을 윤화연의 어깨에 올렸다.“화연아, 이분이 바네사 선생님이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의술이 뛰어나지.”윤화연은 눈을 반짝이며 정순영을 바라보았다. “제가 뭐라고 했죠? 이분은 정말 신의님이세요!”하용은 자연스럽게 지아에게 말했다. “바네사 씨, 여긴 제 여동생 윤화연 씨입니다. 제 동생이 말하는 신의가 바네사 씨일 줄은 몰랐어요.”윤화연도 사람들 앞에서는 하용과 연인 관계로 불리는 것이 그에게 불편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빠, 신의님이랑 아는 사이였어요?”“응.”지아는 놀라움을 감추고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하용 씨, 정말 인연이네요.”지아는 자신이 병원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하용의 여동생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씨 가문이 양녀를 입양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녀가 드물게 외출한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하용은 오히려 지아가 일부러 윤화연에게 접근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밖이 추우니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해요.”“좋아요.”지아는 윤화연의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윤화연의 체질은 차가운 편이라 체온이 보통 사람보다 낮았다. 이런 날씨에 잠시만 있어도 그녀의 손은 금세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같은 여자로서 지아는 그녀에게 연민을 느꼈고, 하용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태도를 바꾸지는 않았다.윤화연은 정순영에게 차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며 매우 친절하게 대했다. 그녀는 하용과 지아 사이의 갈등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용과 지아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로의 과거를 언급하지 않았다.방에 들어서자, 하용은 윤화연의 외투를 벗겨 옷걸이에 걸고, 따뜻한 손난로를 그녀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가볍게 타박했다.“밖이 춥니 앞으로는 되도록 나가지
“제 여동생은 체질이 좋지 않고, 조용한 걸 좋아해서 이 별장에서 요양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대부분 아주머니들이 이곳에서 제 여동생을 돌보며, 제가 가끔씩 여동생의 상태를 보러 옵니다. 오늘 신의님이 진료하러 오신다는 얘기를 듣고, 혹시나 사기를 당할까 봐 직접 온 것입니다.” 하용이 설명했다.“이해합니다.”하용은 지아의 표정을 통해 그녀의 생각을 읽어 내려 했지만, 그녀는 얼굴에 얇은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하용은 점점 더 불안해졌고, 혹시나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지시로 이루어진 것일까 의심했다.“왜요? 이것도 제 여동생의 병과 관련이 있나요?” 하용의 눈에는 조롱이 서려 있었다. 분명 지아가 진료를 핑계 삼고 있다고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맞습니다.” 지아는 숨김없이 대답했다.“전 화연이가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가 임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신의님께서 잘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네요.”윤화연은 눈을 크게 뜨며, 하용이 자신에게 약간의 적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왜 그럴까? 분명 나는 좋은 사람인데?’“화연 씨께서 어떻게 임신하게 되었는지 알고 있나요?”하용은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 정도로 꽉 쥐고 있었다. ‘역시나, 눈치챈 게 분명해.’ 하용은 쉽게 인정하지 않을 생각이었다.“임신 원인에 대해서는 제가 설명할 필요는 없겠죠? 바네사 씨는 의사로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거잖아요.”지아는 하용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난 분명 그런 뜻이 아닌데.’“제가 말하는 건 임신의 원리가 아니라, 화연 씨가 임신하기 전에 몸 상태를 알고 있느냐는 겁니다.”“화연의 체질은 매우 약합니다.”“화연 씨의 체질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나쁠 겁니다. 사실 화연 씨는 원래 임신이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하용은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화연이가 임신할 수 있는지 없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지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렇죠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