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도 제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는데 도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걸까? 도윤은 이번 일로 미셸을 더욱 미워하게 됐을 것이다. 부남진은 현장에서 미셸을 대놓고 꾸짖지는 않았다. 그러나 떠나는 순간 자신을 쳐다보던 싸늘한 눈빛에 미셸은 심장이 철렁했다. 미셸 기억 속의 부남진은 매일 아주 바쁜 아버지였는데 일 년에 한 두 번 얼굴 보기도 바쁠 정도였다. 비록 부남진은 미셸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좋은 물건이 있을 때면 항상 첫번째로 그녀에게 보내주곤 했고 이에 미셸도 아버지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미셸의 유년시절은 매우 행복했고 부남진의 지위가 높아진 뒤 그녀는 더욱 공주님 같은 존재였는데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그녀를 떠받들어 주곤 했다. 그런데 미셸은 오늘 또 사고를 쳤고 아버지인 부남진은 이미 그녀를 혐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연주는 곧장 부남진을 따라가며 그를 위로했다. “여보, 주방에 아직 남은 음식들이 있을 텐데 내가 사람 시켜 가져오라고 할까? 몸이 채 낫지도 않았는데 잘 챙겨 먹어야지.” 부남진은 손에 염주를 들고 그 염주알을 하나씩 넘기고 있었는데 표면은 이미 아주 매끌매끌하게 변해 있었다.매번 분노하는 일이 있을 때마다 부남진은 바로 이 방법으로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곤 했다. 이때 부남진의 상태는 당장 폭발할 것 같은 화산이었고 마지막 조금 남은 인내심으로 겨우 버티고 있었다. “배 안 고프니 당신도 저리 가.” 부남진은 가족에게 분노를 쏟아낼 까봐 억지로 참으며 혼자서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런데 하필 민연주가 눈치도 없이 부남진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도윤 그 애도 참! 전처가 병을 봐주는 게 무슨 부끄러울 일이라고 숨겨서 이 사단을 만드는지, 안 그래?” “설아도 혹시 누군가 신분을 속이고 당신을 해치려 할까 봐 걱정돼서 그런 거 아니겠어? 결과가 어찌 됐든 시작은 좋은 마음이었으니 말이야.” 순간 부남진은 더 이상 억누르던 감정을 참을 수 없었다. 미셸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괜찮았을 것을
미셸은 순간 머리가 띵했고 안색이 완전히 굳어버렸다. ‘아빠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잘못 들었나?’ “아빠, 이게 그렇게까지 할 일이예요? 제가 그 여자에게 물을 부었단 이유만으로 부녀 간의 연을 끊는다고요?” 부남진은 의자에 앉은 채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방금 그의 목소리는 분명 크지 않았지만 엄청난 위압감을 주었는데 미셸과 민연주는 그를 직시할 수조차 없었다. “당시 내 목숨을 노리는 자들이 너무 많아 곁에 있으면 혹시 너에게 피해가 갈까 네 엄마와 함께 너를 먼 시골로 보냈어.” “그 후에는 일이 바쁘고 시간이 나질 않아 널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더니 어떻게 이런 못난 아이로 커버린 거야? 설마 진짜 네가 여태껏 저질러온 일들을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부남진이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다.“학생 때 성적은 엉망이었고 그 때문에 공부는 때려 치고 군에 입대를 하겠다고 했지? 뭐, 나라에 보답한다는 같잖은 이유로 말이야. 난 네가 도윤이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걸 다 알고 있었어.” “그래도 혹시 부대에 들어가서 지내면 네가 철이 조금은 들겠지 싶어서 허락했더니 입대한 뒤 넌 어떻게 했어?” “매일 게으름만 피우면서 다른 사람의 공은 네가 다 뺏아갔었지? 네가 출신이 남다르고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다들 네 비위를 맞춰 줬으니 말이야.” “7년 전에는 너의 그 멍청함 때문에 특수 부대 하나가 통째로 날아갔어. 국가에서 그런 인재들을 한 번 양성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 지 알기나 해?” “또 그 군인들 뒤에는 얼마나 많은 가족들과 식구들이 있는 지 생각해봤어? 고작 너 같은 멍청한 사람 한 명 구하느라 말이야!” 부남진은 인재를 아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었기에 분통한 듯 손으로 가슴을 치며 말했다. “넌 다른 사람의 목숨을 길바닥의 잡초인양 너무 쉽게 보고 있어. 하지만 당시 넌 나이가 어렸으니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았어.” “그런데 너를 다시 데려오고 난 뒤에는 또 어떻게 했어? 단지 한 간호사
미셸은 그제야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부남진은 줄곧 아주 엄격한 아버지였다. 미셸은 어렸을 적 오빠인 부장경이 잘못을 저질렀던 때 부남진이 그를 어떻게 처벌했는지 두 눈으로 생생히 본 적 있었는데 부장경을 알몸으로 눈밭에 내치고 채찍으로 때리던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미셸은 여자 아이였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았기에 부남진은 한 번 또 한 번 그녀를 참아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오늘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고 부남진은 철저히 폭발했다.이때 부장경이 모든 손님들을 보내고 급히 달려왔는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니 모두들 식사할 마음이 사려졌던 것이다. 마침 부장경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미셸과 민연주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오빠, 잘 왔어. 평소에 오빠가 날 제일 아껴주는 거 알아. 그러니 제발 아빠 좀 설득해봐. 날 부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나와 부녀 간의 연도 끊겠다고 하셔!” 이 말을 들은 부장경은 미간을 찌푸렸고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번 일은 확실히 설아가 잘못한 건 맞지만 집안에서 쫓아내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설아 같은 여린 여자 혼자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겁니까?” “쟤가 혼자 못 살아? 그러면 바네사는 집안이 망하고 부모님 두 분 다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혼자만의 힘으로 지금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의가 된 걸까?” 이 말에 부장경은 놀란 듯한 눈길로 부남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겁니까?” 전까지 부장경이 지아에 대한 인상은 도윤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전처라는 것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에 지아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부 찾아보고 나서야 그녀가 아주 안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부남진의 간단한 말 한 마디에 지아의 과거가 주르륵 나오다니, 그는 분명 오늘 처음 바네사가 지아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 사실 부남진은 지아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윤이 처음 지아를
민연주는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딸이 걱정되기 보다 부남진이 지아에 대한 그 특별한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분명 소지아를 알고 있는 거야!’ 이때 밖에서는 눈꽃이 휘날리고 있었고 부장경이 직접 차를 운전했는데 앞뒤로 차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부장경은 뒷좌석에 앉은 부남진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바깥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소지아 씨를 아시는 겁니까?”그러나 부남진은 나지막하게 한숨만 내쉴 뿐 대답하지 않았고 이 모습에 부장경은 핸들을 꽉 잡고 더욱 긴장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할 것만 같았다. 지아는 집에 돌아온 후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도윤은 방에 들어와 그녀를 꽉 안고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만 해. 밥도 안 먹었을 텐데 배고프지? 내가 가서 간단하게 뭐 좀 만들어 올게. 그러니 얼른 이 손부터 놔.” 그제야 도윤은 마치 대형견처럼 지아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알았어.” 그러나 지아가 없었던 기간 동안 집 냉장고에 있던 야채들은 이미 완전히 말라 비틀어졌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간단히 라면 두 그릇을 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아는 맛있게 끓여진 라면을 도윤 앞으로 건네며 말했다. “일단 배부터 채워.” 지아 앞에서 도윤의 음산하고 어둡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랬다. 방금까지 축축하게 젖었던 머리가 살짝 마른 도윤의 지금 모습은 평소의 엄숙함은 사라지고 부드러움이 한 스푼 추가되었다. “지아, 사실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생활이었어. 바깥의 폭풍과 비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항상 나만을 지켜주는 한 줄기의 작은 빛이 있는 그런 거 말이야.” 도윤은 지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 “과거엔 네가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어. 지아, 나에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너에게 따뜻한 가족이 되어 줄게.” 도윤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 차 있었는데 지아는 자신이 사라졌던 그동안 도윤이 참 많
지아는 자신과 도윤이 채 먹지 못한 라면을 보더니 눈 앞의 두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말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제가 간단히 라면이라도 끓여 올까요?” 곧이어 부남진과 부장경 두 사람도 함께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지아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에 남은 식재료가 없어 죄송합니다.” “괜찮다. 가끔 이런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아.” 부남진이 아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는 가사 도우미가 없었기에 도윤이 주동적으로 설거지를 도맡아 하려 했고 자연스레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겨갔다. 이 모습을 본 부장경이 미간을 찌푸렸는데 분명 이혼까지 한 두 사람이었지만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지아는 부남진과 부장경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었고 자리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전 차실에서 우연히 그림 한 폭을 발견했고 그 그림에는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혹시 그 여인의 이름이 환희입니까?” 이 이름을 들은 부남진의 표정은 크게 변했고 격동한 듯 지아의 손을 잡고 물었다. “너 그 여인을 아는 거냐? 너와는 정확히 무슨 사이인 거야?” ‘설마 지금까지의 내 추측이 다 틀렸던 걸까?’ 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사실 저도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럼?” “몇 년 전, 전 우연히 제가 저희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는 저를 낳아준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고요.”“그런데 전에 한 노인을 만난 적 있는데 그분께서는 제가 그분이 아는 한 사람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그때 환희라는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느냐?” 부남진은 지아의 손을 잡은 채 아주 조급한 듯 보였다. “누나, 아니 환희 씨는 지금 어디 있느냐?” “하지만 그 노인께서는 이미 연세도 많으셨고 글을 모르는데다 정신도 온전치 않아 제공받은 단서는 아주
부남진은 줄곧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고 아직은 자신과 지아의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때문에 부남진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부장경에서 빨리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한다며 재촉했다. 일단은 직계 친자가 아니었기에 이들은 부계혈통 검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지아는 부남진에게서 환희와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 했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이 유전가 검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각하께서 설마 저의?” 순간 지아도 머리가 복잡했다. 부남진은 지아가 소계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빨리 걸 알았다면 당시 이미 그녀를 데리고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진희는 죽기 전 이 진상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고 얼마 후 소계훈도 너무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때문에 외부에서는 줄곧 지아가 소씨 가문의 친딸이라 여겼던 것이다. 부남진은 지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얘야, 일단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내 말 대로 해줘. 얼른 머리카락을 장경에게 주거라.” 이에 지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전에 자신이 염색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을 까봐 걱정되어 바로 다른 것을 유전자 검사의 표본으로 내주었다. 부장경이 직접 지아와 부남진의 표본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고 이때 그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무거웠다. 지금까지 부남진은 아내인 민연주를 존중하며 결혼생활을 이어왔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좋은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도 매우 다정한 남편이었다. 때문에 부장경은 비록 가끔 그가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할 때도 있지만 절대 관심을 소홀히 한 적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경은 부남진이 민연주에 대한 감정이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더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많지 않던 두 사람의 싸움 중에서 아주 오래 전 부남진에게 그가 깊이 사랑했던 한 여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알고 있는 건 단지 이뿐이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괜찮다.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네 얘기를 좀 해보거라. 네가 일부러 신분을 숨기고 나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필경 넌 바네사라는 신분으로 이미 2년 동안이나 활동했고 네가 2년 후 나에게 발생할 일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닐 테니 말이야.”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많은 일들은 생각이란 걸 조금만 해도 그 의도가 훤히 보이기 마련이었다. 오직 미셸 같은 멍청한 사람들만 남에게 이용당하고 총알받이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지아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부남진에게 말하기 시작했고 도윤과 관련된 부분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는데 부남진이 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건 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지?” “네, 당시 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요.” “요 몇 년 간 저도 은밀히 조사를 해보았지만 그 범인은 너무 교활했고 매번 그 자에 대해 파헤칠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곤 했어요. 때문에 전 아예 그 범인을 잡을 수 없었어요.” 이 말을 들은 부남진은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네가 마음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마 지아가 20여 년 동안 겪은 사건 사고는 남들이 한평생 경험할 것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시간은 일분 일초 지나고 있었고 바깥에는 눈이 점점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부장경이 드디어 폭설의 날씨를 무릅쓰고 도착했고 손에는 서류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버지,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넌 확인했어?” 부남진이 물었다. 그러자 부장경은 지아는 한번 쳐다보더니 복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부남진은 그 서류 봉투를 건네어 받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줄곧 차분하던 지아도 이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자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긴장하지 마.” 지아
이 말을 들은 지아가 깜짝 놀랐다. “오늘 일 때문에요?” “오늘 일뿐만이 아니야. 난 이미 오래전부터 참고 있었어.” “얘야, 네가 내 친 손녀라는 게 이제 밝혀졌으니 더 이상 널 밖에서 지내게 둘 수 없어. 나와 함께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고 말이야.” “할아버지, 전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우린 처음부터 피가 섞인 가족 아니냐? 난 이미 몇 년 전에 사적으로 소씨 가문에 대해 조사를 한 적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네가 소지훈의 친딸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넘겼었지.” “이 할아버지가 너와 몇 십 년의 세월을 떨어져 살았는데 너에게 그동안 못해준 걸 전부 채워 줄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느냐?” 부남진은 작은 목소리로 지아를 설득하고 있었다. “전에 나와 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알고 싶다고 했지? 나와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줄게.” 부남진은 아예 지아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네 할머니가 너 혼자 밖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걸 알면 굉장히 마음 아파하실 거야.” 원래도 가족에 대한 갈망이 컸던 지아는 부남진의 말에 조금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아직 몸도 변변치 않아. 네가 나에게 밤을 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어? 시간도 늦었는데 난 지금까지 약도 먹지 못 했어. 계속 이렇게 있다가...” 이때 지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이겼어요.” 부남진은 거칠고 큰 손으로 지아의 작은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래, 얼른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자.” 지아는 자신의 손과 맞잡은 부남진의 손을 보면서 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전에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사람은 이미 차디찬 땅 속에 묻혀 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소지훈이 하늘에서 지아가 진짜 가족을 찾을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분명 아주 기뻐할 것이다. 지아가 떠나려 하자 도윤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남진은 과거 지아가 힘들었던 건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