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는 자신과 도윤이 채 먹지 못한 라면을 보더니 눈 앞의 두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말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제가 간단히 라면이라도 끓여 올까요?” 곧이어 부남진과 부장경 두 사람도 함께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지아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에 남은 식재료가 없어 죄송합니다.” “괜찮다. 가끔 이런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아.” 부남진이 아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는 가사 도우미가 없었기에 도윤이 주동적으로 설거지를 도맡아 하려 했고 자연스레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겨갔다. 이 모습을 본 부장경이 미간을 찌푸렸는데 분명 이혼까지 한 두 사람이었지만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지아는 부남진과 부장경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었고 자리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전 차실에서 우연히 그림 한 폭을 발견했고 그 그림에는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혹시 그 여인의 이름이 환희입니까?” 이 이름을 들은 부남진의 표정은 크게 변했고 격동한 듯 지아의 손을 잡고 물었다. “너 그 여인을 아는 거냐? 너와는 정확히 무슨 사이인 거야?” ‘설마 지금까지의 내 추측이 다 틀렸던 걸까?’ 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사실 저도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럼?” “몇 년 전, 전 우연히 제가 저희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는 저를 낳아준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고요.”“그런데 전에 한 노인을 만난 적 있는데 그분께서는 제가 그분이 아는 한 사람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그때 환희라는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느냐?” 부남진은 지아의 손을 잡은 채 아주 조급한 듯 보였다. “누나, 아니 환희 씨는 지금 어디 있느냐?” “하지만 그 노인께서는 이미 연세도 많으셨고 글을 모르는데다 정신도 온전치 않아 제공받은 단서는 아주
부남진은 줄곧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고 아직은 자신과 지아의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때문에 부남진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부장경에서 빨리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한다며 재촉했다. 일단은 직계 친자가 아니었기에 이들은 부계혈통 검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지아는 부남진에게서 환희와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 했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이 유전가 검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각하께서 설마 저의?” 순간 지아도 머리가 복잡했다. 부남진은 지아가 소계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빨리 걸 알았다면 당시 이미 그녀를 데리고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진희는 죽기 전 이 진상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고 얼마 후 소계훈도 너무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때문에 외부에서는 줄곧 지아가 소씨 가문의 친딸이라 여겼던 것이다. 부남진은 지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얘야, 일단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내 말 대로 해줘. 얼른 머리카락을 장경에게 주거라.” 이에 지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전에 자신이 염색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을 까봐 걱정되어 바로 다른 것을 유전자 검사의 표본으로 내주었다. 부장경이 직접 지아와 부남진의 표본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고 이때 그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무거웠다. 지금까지 부남진은 아내인 민연주를 존중하며 결혼생활을 이어왔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좋은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도 매우 다정한 남편이었다. 때문에 부장경은 비록 가끔 그가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할 때도 있지만 절대 관심을 소홀히 한 적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경은 부남진이 민연주에 대한 감정이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더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많지 않던 두 사람의 싸움 중에서 아주 오래 전 부남진에게 그가 깊이 사랑했던 한 여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알고 있는 건 단지 이뿐이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괜찮다.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네 얘기를 좀 해보거라. 네가 일부러 신분을 숨기고 나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필경 넌 바네사라는 신분으로 이미 2년 동안이나 활동했고 네가 2년 후 나에게 발생할 일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닐 테니 말이야.”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많은 일들은 생각이란 걸 조금만 해도 그 의도가 훤히 보이기 마련이었다. 오직 미셸 같은 멍청한 사람들만 남에게 이용당하고 총알받이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지아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부남진에게 말하기 시작했고 도윤과 관련된 부분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는데 부남진이 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건 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지?” “네, 당시 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요.” “요 몇 년 간 저도 은밀히 조사를 해보았지만 그 범인은 너무 교활했고 매번 그 자에 대해 파헤칠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곤 했어요. 때문에 전 아예 그 범인을 잡을 수 없었어요.” 이 말을 들은 부남진은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네가 마음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마 지아가 20여 년 동안 겪은 사건 사고는 남들이 한평생 경험할 것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시간은 일분 일초 지나고 있었고 바깥에는 눈이 점점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부장경이 드디어 폭설의 날씨를 무릅쓰고 도착했고 손에는 서류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버지,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넌 확인했어?” 부남진이 물었다. 그러자 부장경은 지아는 한번 쳐다보더니 복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부남진은 그 서류 봉투를 건네어 받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줄곧 차분하던 지아도 이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자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긴장하지 마.” 지아
이 말을 들은 지아가 깜짝 놀랐다. “오늘 일 때문에요?” “오늘 일뿐만이 아니야. 난 이미 오래전부터 참고 있었어.” “얘야, 네가 내 친 손녀라는 게 이제 밝혀졌으니 더 이상 널 밖에서 지내게 둘 수 없어. 나와 함께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고 말이야.” “할아버지, 전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우린 처음부터 피가 섞인 가족 아니냐? 난 이미 몇 년 전에 사적으로 소씨 가문에 대해 조사를 한 적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네가 소지훈의 친딸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넘겼었지.” “이 할아버지가 너와 몇 십 년의 세월을 떨어져 살았는데 너에게 그동안 못해준 걸 전부 채워 줄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느냐?” 부남진은 작은 목소리로 지아를 설득하고 있었다. “전에 나와 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알고 싶다고 했지? 나와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줄게.” 부남진은 아예 지아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네 할머니가 너 혼자 밖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걸 알면 굉장히 마음 아파하실 거야.” 원래도 가족에 대한 갈망이 컸던 지아는 부남진의 말에 조금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아직 몸도 변변치 않아. 네가 나에게 밤을 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어? 시간도 늦었는데 난 지금까지 약도 먹지 못 했어. 계속 이렇게 있다가...” 이때 지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이겼어요.” 부남진은 거칠고 큰 손으로 지아의 작은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래, 얼른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자.” 지아는 자신의 손과 맞잡은 부남진의 손을 보면서 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전에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사람은 이미 차디찬 땅 속에 묻혀 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소지훈이 하늘에서 지아가 진짜 가족을 찾을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분명 아주 기뻐할 것이다. 지아가 떠나려 하자 도윤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남진은 과거 지아가 힘들었던 건
이 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안하무인으로 굴던 백채원과 미셸의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모두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들이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무슨 일을 저지르든 편 들어주고 해결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아의 곁도 비어 있지 않을 것인데 바로 그녀에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늦은 밤이었고 부장경은 지아가 원래 쓰던 방에 데려다 주었다. 부장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커다란 눈송이만 그의 몸 뒤에서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이 전에 내가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 있잖아.” 지아는 어둡게 가라앉은 부장경을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알고 있어요.” 이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고 단연코 많지 않은 부장경의 흑역사 중 하나일 것이다. 지아는 이미 부장경이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말했다. “아마 삼촌은 처음부터 저와 혈연관계가 있었기에 호감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어요. 이해해요. 그건 마치 제가 각하와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죠.” 이 말 한마디에 어색하던 부장경의 감정은 눈 녹듯 사라졌는데 미셸 같은 멍청한 동생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는지 알 알아. 이제 부씨 가문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 이건 부장경이 지아에 대한 약속이었는데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앞으로는 가족이자 연장자의 신분으로 그녀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지아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삼촌.” 부장경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른 쉬어.” 지아는 방 문을 닫았고 부장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아에 대한 호감이 사랑인지 혈육의 정인지는 누구도 알 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부장경은 이런 결과도 썩 나쁜 건 아니라 생각했다. 필경 지아의 신분이 폭로되면서
도윤은 뭔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대답했다. “그게 복일지 불행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어. 영예와 위험은 항상 함께 존재하고 불행과 행복 또한 마찬가지니 말이야.” 그러나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윤이 지아를 상처받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민연주도 있었다. 부남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순간부터 그녀는 부씨 가문에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민연주가 부남진과 결혼한 수년 동안 그는 줄곧 민연주를 존중하고 아껴주고 감싸주었지만 유독 사랑의 감정만은 주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그런 부남진의 모습에 민연주는 불만을 느꼈고 한바탕 크게 싸웠던 적 도 있는데 부남진은 당시 싸늘한 눈빛으로 민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에게 약을 타 먹이고 내 침대에 올라왔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영원히 내 사랑을 받지 못할 거란 생각은 했어야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권력과 지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 후 민연주도 점차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부남진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이루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민연주는 더 이상 많은 것은 바라지 않았고 오직 자신이 부남진 같은 권위 높은 사람을 만났단 것에 이미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부남진이 마음속에 줄곧 한 여자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남진은 의식을 잃은 순간에도 그 여자의 이름만 하염없이 부르곤 했으니 말이다. 민연주도 그 여인의 존재를 수소문한 적 있었지만 이미 몇 십 년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이로 하여 민연주는 그 여인이 진작에 죽은 거라 생각했다. 남자들이란 다들 첫사랑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민연주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부남진이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민연주는 바로 심장이 철렁했다. 하필 그 상황에서 부남진의 첫사랑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
하용은 뒤에서 미셸을 와락 끌어안았다.“도윤이 벌인 모든 일들은 전부 그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야. 전에는 백씨 가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본처를 버리고 백채원과 결혼도 하려고 했으니 말이야.” “도윤 그 자식은 단지 염치없고 뻔뻔한 비열한 인간일 뿐이야.” “이상한데?” 미셸이 갑자기 반응했다. “만약 도윤 오빠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라면 왜 날 이용하지 않은 건데? 설마 우리 부씨 가문이 백씨 가문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걸까?” 이 말에 하용은 순간 움찔했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널 이용하지 않은 건 또다른 음모가 있을 거야. 설아, 지금까지 도윤이 저지른 일들을 잘 생각해봐. 그 자식은 단지 배은망덕한 놈일 뿐이라고.”“한 번 두 번 끝도 없이 일부러 너를 망신당하게 했고 이젠 그 자식 때문에 네가 집에서도 쫓겨 났잖아.” 억울한 듯 눈물을 흘리고 있는 미셸의 모습에 하용은 얼른 다가가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고 다정하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 무슨 일이 있어도 난 영원히 네 곁에 있을 거야. 설아, 나야말로 이 세상에서 널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야.” 이 말을 들은 미셸은 고개를 들고 하용의 다정한 눈을 바라보았고 순간 그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너 정말로 날 사랑하는 거야?” “당연하지. 설아야, 이렇게 오랫동안 널 짝사랑해왔는데 아직도 내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거야?” 하용은 갑자기 한숨을 쉬더니 말을 이어갔다. “그랬다면 내 잘못이야. 내가 표현을 너무 적게 했나 보네. 앞으로는 더 많이 아끼고 사랑해 줄게.” 몇 년 간 줄곧 도윤의 뒤꽁무니만 졸졸 따라다녔던 미셸은 모두가 그녀를 포기한 이 순간 누군가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자 마음이 사르르 녹기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면 비록 도윤만큼 잘나진 않았지만 하용도 꽤 잘생긴 얼굴이긴 했고 평소 성격도 아주 시원시원 했다.게다가 우월한 기럭지까지 갖추었는데 이런 하용의 품에 안긴 미셸은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눈이 내리는 이
미셸은 눈만 깜빡였고 이 순간 마음이 아주 복잡했다. 이때 하용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는데 미셸은 그가 자신에게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눈을 찔끔 감았다. 그러나 하용은 단지 미셸을 품에 안을 뿐이었는데 자신의 온기로 그녀를 따뜻하게 감쌌고 흩날리는 눈보라를 막아주었다.“이제 안 춥지?” 미셸은 이전까지 자신이 남자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았지만 지금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고 있음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순간 미셸은 처음 주동적으로 하용을 안았고 그의 품에 기댄 채 쿵쾅거리는 심장소리를 들었는데 묘하게 안정감이 들었다. 오랜 시간 도윤에 대한 짝사랑으로 미셸도 이미 지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도윤을 내려놓고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기로 한 순간, 지금까지 느껴본 적 없는 엄청난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이제 보니 다른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도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었구나.’ 이날 밤, 하용은 별장에서 미셸과 함께했는데 알콜의 힘과 약물의 작용이 없어도 모든 것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이번에 미셸은 더 이상 도윤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고 그의 눈엔 온통 하용뿐이었다. “하용, 정말 나에게 잘해줄 자신 있어?” 하용은 그녀의 허리를 감싼 채 귓가에 속삭였다. “설아, 넌 내가 아주 어렵게 붙잡은 여인이야. 그런데 내가 너에게 잘해주지 않으면 누구에게 잘해주겠어?” 이 말에 미셸은 심장이 콩닥거렸고 곧바로 하용에게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이때 하용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 오늘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아서 이제 그만 가봐야 해.” 이런 경험이 처음인 미셸은 매우 당황스러웠는데 사실 그녀는 하용과 조금 더 붙어있고 싶었다. “왜 그렇게 바쁜 거야? 내가 아빠에게 일 좀 줄여달라고 말씀드릴까? 그럼 더 많은 시간을 나와 함께 할 수 있잖아.” 하용은 가벼운 미소를 지었고 손가락으로 미셸의 코끝을 톡 치더니 말했다. “내가 안 바쁘면 널 어떻게 먹여 살리겠어? 난 다른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