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은 그제야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부남진은 줄곧 아주 엄격한 아버지였다. 미셸은 어렸을 적 오빠인 부장경이 잘못을 저질렀던 때 부남진이 그를 어떻게 처벌했는지 두 눈으로 생생히 본 적 있었는데 부장경을 알몸으로 눈밭에 내치고 채찍으로 때리던 장면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미셸은 여자 아이였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지 않았기에 부남진은 한 번 또 한 번 그녀를 참아주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던 중 오늘의 사건이 도화선이 되었고 부남진은 철저히 폭발했다.이때 부장경이 모든 손님들을 보내고 급히 달려왔는데 한바탕 소란이 일어나니 모두들 식사할 마음이 사려졌던 것이다. 마침 부장경이 발을 들여놓는 순간 미셸과 민연주의 울음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입니까?” “오빠, 잘 왔어. 평소에 오빠가 날 제일 아껴주는 거 알아. 그러니 제발 아빠 좀 설득해봐. 날 부씨 가문에서 쫓아내고 나와 부녀 간의 연도 끊겠다고 하셔!” 이 말을 들은 부장경은 미간을 찌푸렸고 약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 이번 일은 확실히 설아가 잘못한 건 맞지만 집안에서 쫓아내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설아 같은 여린 여자 혼자 어떻게 살라고 그러는 겁니까?” “쟤가 혼자 못 살아? 그러면 바네사는 집안이 망하고 부모님 두 분 다 세상을 떴는데 어떻게 혼자만의 힘으로 지금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명의가 된 걸까?” 이 말에 부장경은 놀란 듯한 눈길로 부남진을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어떻게 그렇게 자세히 알고 계시는 겁니까?” 전까지 부장경이 지아에 대한 인상은 도윤이 미치도록 사랑하는 전처라는 것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 사이에 지아와 관련된 자료들을 전부 찾아보고 나서야 그녀가 아주 안타까운 과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런데 부남진의 간단한 말 한 마디에 지아의 과거가 주르륵 나오다니, 그는 분명 오늘 처음 바네사가 지아라는 걸 알게 되었는데 말이다. 사실 부남진은 지아에 대해 잘 알 수밖에 없었다. 당시 도윤이 처음 지아를
민연주는 마음이 뒤숭숭했는데 딸이 걱정되기 보다 부남진이 지아에 대한 그 특별한 태도가 더 신경 쓰였다. ‘분명 소지아를 알고 있는 거야!’ 이때 밖에서는 눈꽃이 휘날리고 있었고 부장경이 직접 차를 운전했는데 앞뒤로 차들이 행렬을 이루고 있었다. 부장경은 뒷좌석에 앉은 부남진을 힐끔 쳐다보았는데 그는 엄숙한 표정으로 바깥에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있었고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 소지아 씨를 아시는 겁니까?”그러나 부남진은 나지막하게 한숨만 내쉴 뿐 대답하지 않았고 이 모습에 부장경은 핸들을 꽉 잡고 더욱 긴장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할 것만 같았다. 지아는 집에 돌아온 후 편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도윤은 방에 들어와 그녀를 꽉 안고는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만 해. 밥도 안 먹었을 텐데 배고프지? 내가 가서 간단하게 뭐 좀 만들어 올게. 그러니 얼른 이 손부터 놔.” 그제야 도윤은 마치 대형견처럼 지아의 목에 얼굴을 비비며 말했다. “알았어.” 그러나 지아가 없었던 기간 동안 집 냉장고에 있던 야채들은 이미 완전히 말라 비틀어졌고 어쩔 수 없이 그녀는 간단히 라면 두 그릇을 끓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아는 맛있게 끓여진 라면을 도윤 앞으로 건네며 말했다. “일단 배부터 채워.” 지아 앞에서 도윤의 음산하고 어둡던 분위기는 사라진지 오랬다. 방금까지 축축하게 젖었던 머리가 살짝 마른 도윤의 지금 모습은 평소의 엄숙함은 사라지고 부드러움이 한 스푼 추가되었다. “지아, 사실 내가 바라던 게 바로 이런 생활이었어. 바깥의 폭풍과 비바람이 아무리 거세도 항상 나만을 지켜주는 한 줄기의 작은 빛이 있는 그런 거 말이야.” 도윤은 지아의 손등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은 채 말했다. “과거엔 네가 이렇게 소중한 줄 몰랐어. 지아, 나에게 한 번만 다시 기회를 준다면 반드시 너에게 따뜻한 가족이 되어 줄게.” 도윤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 차 있었는데 지아는 자신이 사라졌던 그동안 도윤이 참 많
지아는 자신과 도윤이 채 먹지 못한 라면을 보더니 눈 앞의 두 사람도 밥을 먹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에 말했다. “아직 식사 안 하셨죠? 제가 간단히 라면이라도 끓여 올까요?” 곧이어 부남진과 부장경 두 사람도 함께 라면을 먹기 시작했고 지아는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집에 남은 식재료가 없어 죄송합니다.” “괜찮다. 가끔 이런 걸 먹는 것도 나쁘지 않아.” 부남진이 아주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집에는 가사 도우미가 없었기에 도윤이 주동적으로 설거지를 도맡아 하려 했고 자연스레 빈 그릇들을 싱크대로 옮겨갔다. 이 모습을 본 부장경이 미간을 찌푸렸는데 분명 이혼까지 한 두 사람이었지만 관계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어 보였으니 말이다. 지아는 부남진과 부장경 두 사람에게 따뜻한 차를 내주었고 자리에 앉은 뒤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으니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날 전 차실에서 우연히 그림 한 폭을 발견했고 그 그림에는 한 여인의 모습이 담겨 있었습니다. 혹시 그 여인의 이름이 환희입니까?” 이 이름을 들은 부남진의 표정은 크게 변했고 격동한 듯 지아의 손을 잡고 물었다. “너 그 여인을 아는 거냐? 너와는 정확히 무슨 사이인 거야?” ‘설마 지금까지의 내 추측이 다 틀렸던 걸까?’ 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사실 저도 그 여인이 누구인지는 모릅니다.” “그럼?” “몇 년 전, 전 우연히 제가 저희 아버지의 친딸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저는 저를 낳아준 부모님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고요.”“그런데 전에 한 노인을 만난 적 있는데 그분께서는 제가 그분이 아는 한 사람과 얼굴이 닮았다는 이야기를 하셨고 그때 환희라는 여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그 다음엔 어떻게 되었느냐?” 부남진은 지아의 손을 잡은 채 아주 조급한 듯 보였다. “누나, 아니 환희 씨는 지금 어디 있느냐?” “하지만 그 노인께서는 이미 연세도 많으셨고 글을 모르는데다 정신도 온전치 않아 제공받은 단서는 아주
부남진은 줄곧 매사에 신중한 사람이었고 아직은 자신과 지아의 신분을 증명할 아무런 증거도 없었다. 때문에 부남진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은 채 부장경에서 빨리 유전자 검사를 해야 한다며 재촉했다. 일단은 직계 친자가 아니었기에 이들은 부계혈통 검사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 지아는 부남진에게서 환희와 친분이 있는 사이인지에 대한 대답을 들으려 했지만 대답 대신 돌아온 것이 유전가 검사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각하께서 설마 저의?” 순간 지아도 머리가 복잡했다. 부남진은 지아가 소계훈의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 빨리 걸 알았다면 당시 이미 그녀를 데리고 유전자 검사를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변진희는 죽기 전 이 진상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고 얼마 후 소계훈도 너무 갑작스레 죽고 말았다. 때문에 외부에서는 줄곧 지아가 소씨 가문의 친딸이라 여겼던 것이다. 부남진은 지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얘야, 일단 아무 것도 묻지 말고 내 말 대로 해줘. 얼른 머리카락을 장경에게 주거라.” 이에 지아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뽑으려 했다. 그러나 전에 자신이 염색을 했다는 것이 떠올랐고 결과가 정확하지 않을 까봐 걱정되어 바로 다른 것을 유전자 검사의 표본으로 내주었다. 부장경이 직접 지아와 부남진의 표본을 가지고 병원으로 향했고 이때 그의 마음은 너무나 복잡하고 무거웠다. 지금까지 부남진은 아내인 민연주를 존중하며 결혼생활을 이어왔고 책임을 질 줄 아는 좋은 아버지이자 아내에게도 매우 다정한 남편이었다. 때문에 부장경은 비록 가끔 그가 자신에게 엄격하게 대할 때도 있지만 절대 관심을 소홀히 한 적 없다는 걸 누구보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부장경은 부남진이 민연주에 대한 감정이 사랑보다는 책임감에 더 가깝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많지 않던 두 사람의 싸움 중에서 아주 오래 전 부남진에게 그가 깊이 사랑했던 한 여인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부장경이 알고 있는 건 단지 이뿐이었고 그 여인이
부남진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괜찮다. 여기서 기다리면 된다. 어차피 할 일도 없는데 네 얘기를 좀 해보거라. 네가 일부러 신분을 숨기고 나에게 접근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필경 넌 바네사라는 신분으로 이미 2년 동안이나 활동했고 네가 2년 후 나에게 발생할 일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던 것도 아닐 테니 말이야.” 역시 사람은 머리를 굴릴 줄 알아야 한다. 게다가 많은 일들은 생각이란 걸 조금만 해도 그 의도가 훤히 보이기 마련이었다. 오직 미셸 같은 멍청한 사람들만 남에게 이용당하고 총알받이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지아는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 둘 부남진에게 말하기 시작했고 도윤과 관련된 부분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는데 부남진이 도윤을 바라보는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네가 신분을 숨기고 있는 건 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거지?” “네, 당시 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 누군지 아직 찾지 못했으니까요.” “요 몇 년 간 저도 은밀히 조사를 해보았지만 그 범인은 너무 교활했고 매번 그 자에 대해 파헤칠 때마다 사람이 죽어나곤 했어요. 때문에 전 아예 그 범인을 잡을 수 없었어요.” 이 말을 들은 부남진은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얘야, 네가 마음 고생이 많았겠구나.” 아마 지아가 20여 년 동안 겪은 사건 사고는 남들이 한평생 경험할 것들보다 더 많았을 것이다. 시간은 일분 일초 지나고 있었고 바깥에는 눈이 점점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부장경이 드디어 폭설의 날씨를 무릅쓰고 도착했고 손에는 서류 봉투가 하나 들려 있었다. “아버지, 결과는 여기 있습니다.” “넌 확인했어?” 부남진이 물었다. 그러자 부장경은 지아는 한번 쳐다보더니 복잡한 마음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부남진은 그 서류 봉투를 건네어 받았는데 손이 바들바들 떨려왔다. 줄곧 차분하던 지아도 이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그러자 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다. “괜찮아, 긴장하지 마.” 지아
이 말을 들은 지아가 깜짝 놀랐다. “오늘 일 때문에요?” “오늘 일뿐만이 아니야. 난 이미 오래전부터 참고 있었어.” “얘야, 네가 내 친 손녀라는 게 이제 밝혀졌으니 더 이상 널 밖에서 지내게 둘 수 없어. 나와 함께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고 말이야.” “할아버지, 전 아직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요.” “생각할 게 뭐가 있어? 우린 처음부터 피가 섞인 가족 아니냐? 난 이미 몇 년 전에 사적으로 소씨 가문에 대해 조사를 한 적 있었어. 하지만 그때는 네가 소지훈의 친딸이라 생각했기에 그냥 넘겼었지.” “이 할아버지가 너와 몇 십 년의 세월을 떨어져 살았는데 너에게 그동안 못해준 걸 전부 채워 줄 기회는 줘야 하지 않겠느냐?” 부남진은 작은 목소리로 지아를 설득하고 있었다. “전에 나와 네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들 알고 싶다고 했지? 나와 부씨 가문으로 돌아가자. 내가 모든 이야기를 들려 줄게.” 부남진은 아예 지아가 거절할 틈을 주지 않았다. “만약 네 할머니가 너 혼자 밖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고생했다는 걸 알면 굉장히 마음 아파하실 거야.” 원래도 가족에 대한 갈망이 컸던 지아는 부남진의 말에 조금도 반박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난 아직 몸도 변변치 않아. 네가 나에게 밤을 새면 안 된다고 그렇게 당부하지 않았어? 시간도 늦었는데 난 지금까지 약도 먹지 못 했어. 계속 이렇게 있다가...” 이때 지아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할아버지가 이겼어요.” 부남진은 거칠고 큰 손으로 지아의 작은 손을 감싸며 말했다. “그래, 얼른 할아버지와 집으로 돌아가자.” 지아는 자신의 손과 맞잡은 부남진의 손을 보면서 순간 눈가가 촉촉해졌다. 전에 그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겠다던 사람은 이미 차디찬 땅 속에 묻혀 버렸으니 말이다. 만약 소지훈이 하늘에서 지아가 진짜 가족을 찾을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분명 아주 기뻐할 것이다. 지아가 떠나려 하자 도윤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남진은 과거 지아가 힘들었던 건
이 순간 지아의 머릿속에는 안하무인으로 굴던 백채원과 미셸의 그 얼굴들이 떠올랐다. 이들이 그렇게 제멋대로 굴 수 있었던 모두 그들을 사랑하는 가족들이 뒤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 주었고 무슨 일을 저지르든 편 들어주고 해결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지아의 곁도 비어 있지 않을 것인데 바로 그녀에게도 가족이 생긴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시간은 이미 늦은 밤이었고 부장경은 지아가 원래 쓰던 방에 데려다 주었다. 부장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커다란 눈송이만 그의 몸 뒤에서 떨어지고 있을 뿐이었다. 지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삼촌,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요?” “이 전에 내가 너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거 있잖아.” 지아는 어둡게 가라앉은 부장경을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알고 있어요.” 이건 절대로 좋은 일이 아니었고 단연코 많지 않은 부장경의 흑역사 중 하나일 것이다. 지아는 이미 부장경이 어색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채고 말했다. “아마 삼촌은 처음부터 저와 혈연관계가 있었기에 호감이 생겼던 것일 수도 있어요. 이해해요. 그건 마치 제가 각하와 알 수 없는 친밀감을 느꼈던 것처럼 말이죠.” 이 말 한마디에 어색하던 부장경의 감정은 눈 녹듯 사라졌는데 미셸 같은 멍청한 동생과 너무 비교가 되었다. “네가 지금까지 얼마나 힘들게 버텨왔는지 알 알아. 이제 부씨 가문에 들어온 이상 누구도 감히 널 괴롭히지 못하게 해줄게.” 이건 부장경이 지아에 대한 약속이었는데 연인이 될 수 없다면 앞으로는 가족이자 연장자의 신분으로 그녀를 지키려 했다. 그리고 지아도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삼촌.” 부장경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얼른 쉬어.” 지아는 방 문을 닫았고 부장경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지아에 대한 호감이 사랑인지 혈육의 정인지는 누구도 알 지 못할 것이다. 어쨌든 부장경은 이런 결과도 썩 나쁜 건 아니라 생각했다. 필경 지아의 신분이 폭로되면서
도윤은 뭔가 의미심장한 눈길로 대답했다. “그게 복일지 불행일지는 아직은 알 수 없어. 영예와 위험은 항상 함께 존재하고 불행과 행복 또한 마찬가지니 말이야.” 그러나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도윤이 지아를 상처받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잠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 중에는 민연주도 있었다. 부남진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던 순간부터 그녀는 부씨 가문에 큰 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불안한 기분이 자꾸 들었다. 민연주가 부남진과 결혼한 수년 동안 그는 줄곧 민연주를 존중하고 아껴주고 감싸주었지만 유독 사랑의 감정만은 주지 않았다. 아주 오래 전, 그런 부남진의 모습에 민연주는 불만을 느꼈고 한바탕 크게 싸웠던 적 도 있는데 부남진은 당시 싸늘한 눈빛으로 민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에게 약을 타 먹이고 내 침대에 올라왔던 그 순간부터 당신은 영원히 내 사랑을 받지 못할 거란 생각은 했어야지?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건 권력과 지위 외에는 아무 것도 없어.” 그 후 민연주도 점차 이런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부남진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다른 여인에게 관심을 보인 적도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동안 모든 일을 자기 뜻대로 이루고 사는 사람이 과연 세상에 몇이나 될까? 민연주는 더 이상 많은 것은 바라지 않았고 오직 자신이 부남진 같은 권위 높은 사람을 만났단 것에 이미 감지덕지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부남진이 마음속에 줄곧 한 여자를 품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부남진은 의식을 잃은 순간에도 그 여자의 이름만 하염없이 부르곤 했으니 말이다. 민연주도 그 여인의 존재를 수소문한 적 있었지만 이미 몇 십 년간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이로 하여 민연주는 그 여인이 진작에 죽은 거라 생각했다. 남자들이란 다들 첫사랑 하나쯤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면서 민연주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밤 부남진이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민연주는 바로 심장이 철렁했다. 하필 그 상황에서 부남진의 첫사랑과 비슷한 얼굴을 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