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경도 지아의 몸이 굳었다는 것을 느끼고 곧바로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방금 곁에 사람이 너무 많아 보여서요.” 지아는 한 걸음 물러나며 부장경과 거리를 뒀다. “네, 알고 있어요. 부장경 선생님도 얼른 다른 손님들 뵈러 가보세요. 저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그럼 혼자 조심하세요. 무슨 일 있으시면 저 찾아오시고요.” 부장경은 지아를 빤히 쳐다보더니 자리를 떴다. 그리고 부장경은 자신의 손가락을 만지며 방금 자신의 손에 닿았던 지아의 부드러운 피부를 다시 되새겨보았다. 순간 이상한 감정이 부장경의 마음속에서 솟구쳤다. 마치 한순간 타오르는 알 수 없는 불꽃처럼 말이다. 모두들 슬슬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오늘 이곳에 모인 사람은 약 30여 명 정도 되었는데 전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다를 매우 예의와 격식을 차리고 있었다. 이 중에는 부남진과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는 사람들도 있었다. 민연주는 부남진의 팔짱을 끼고 시종일관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았는데 밖에서 그녀는 영원히 인자하고 따뜻한 모습을 유지했다. 만일 오 집사 일만 아니었다면 지아도 민연주의 진짜 모습을 알진 못했을 것이다. 이때 부장경이 지아를 향해 손을 흔들며 자신과 같은 테이블에 앉으라고 했다. “바네사 씨, 이쪽에 앉으세요.” 다른 테이블로 가 앉으려던 지아는 그대로 부장경에게 불려갔다. 삽시간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지아에게 주목되었는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전부 대단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었기에 지아의 부담감은 매우 컸다. “각하, 이 분이 바로 명의 바네사 씨이죠?” 그러자 부남진이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여기 이 분은 절대 나이가 적다고 얕보면 안 됩니다. 이 자의 의술은 윤씨 어르신과 원씨 어르신도 전부 인정했답니다.” “전에 기사에서만 이름을 봐왔는데 오늘 드디어 실물을 영접하네요.” “이렇게 젊은 분이 그런 대단한 의술을 가졌다니, 참 놀랍습니다.” “여러분, 과찬입니다. 단지
도윤은 억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네사 씨가 전에 저를 치료해 줄 때 잠깐 가깝게 지냈었습니다. 그러니 이 분의 습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도윤의 이 대답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부장경은 ‘가깝게’라는 말에 꽂혀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도윤은 말을 끝낸 후 지아에게서 눈을 뗐고 마치 처음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듯했다. 지아 또한 다른 사람들의 주의를 불러올 까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필경 국연은 큰 행사였기에 식사 자리는 매우 조용했고 들리는 건 오로지 각종 악기소리 뿐이었다. 지아는 마치 예술품 같은 각종 요리들을 쳐다보았는데 메인 요리 옆의 장식조차 꽃으로 빚어 놓았다. 저녁 만찬이 끝난 뒤 부남진은 젊은 사람들까지 시간을 보내라며 먼저 자리를 떴다.오늘 이 자리에서 민연주는 부장경에게 어울릴 만한 여자를 찾아주려 했다. 이 연회에 참석한 여인들을 전부 명문가의 귀한 자제들이었기에 전부 고급지고 학력 또한 높았다.이 자리에 참석한 여인들은 집안 배경이든 학벌이든 뭐 하나 빠지지 않았기에 오히려 외모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민연주는 부장경을 한쪽으로 끌며 말했다. “어쩌다 집에 돌아와 있는데 이 시기를 빌어 결혼까지 해결해 버리면 좀 좋아? 몇 명 좀 둘러봐.” 부장경은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썩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니, 나 아직 결혼할 생각 없어요.” “너도 벌써 30이 넘었는데 아직도 생각이 없으면 어떻게 해? 저기 도윤이 좀 봐. 애가 커서 벌써 임무도 나갔어. 그런데 너만 아직도 짝이 없잖아. 어찌됐든 여자들과 조금씩 알아봐야 하지 않겠어?” “여자들 귀찮아요.” “뭐가 귀찮아? 얼른 가봐. 오늘 이 자리에 명문가의 예쁜 자제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래? 성격이고 학벌이고 다 너와 어울리는 애들이고 말이야.” “기억해. 이건 네 아버지의 명이야. 좀 있다가 반드시 함께 춤 줄 파트너 데려와야 돼.” 이에 부장경은 물고 있던 담배를 던지며 말
지아는 미간을 약간 찌푸리고 왜 저러냐는 표정으로 도윤을 쳐다보았다. 도윤은 별 말 하지 않고 지아의 옆에 앉았다. 이때 미셸이 다가왔고 기대에 찬 얼굴로 도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오빠, 좀 있다가 내 춤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있어?” “아니, 난 이미 파트너를 찾았어.” 도윤은 지아를 가리켰다. 이에 미셸은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이 여자 말이야?” “왜 그러는데?” 도윤은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바네사 씨, 저희 춤 추러 가시죠.” “그래요.” 도윤은 몸을 일으켜 아주 신사적으로 지아에게 손을 건네며 요청했다. 그러자 지아 또한 손끝을 가볍게 도윤의 손바닥에 댔고 도윤의 커다란 손은 마치 꽃 한 송이를 잡는 것처럼 지아의 손을 움켜잡았다. 가면 아래의 지아는 볼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랐다. 이건 아마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춤 추는 것일 것이다. 도윤은 당당하게 지아의 허리를 감쌌고 지아 또한 가볍게 도윤의 가슴에 기댔다. 분명 두 사람은 몇 명의 아이를 둔 부모였지만 이 순간 마치 막 연애를 시작한 연인 같았고 도윤의 손에는 땀이 흥건했다. 도윤과 함께 춤 추려던 미셸의 계획이 물거품이 된 후 하용이 다가왔다. “설아 동생, 내 춤 파트너가 되어 줄 수 있을까?” “싫어.” 미셸은 어릴 때부터 모든 것을 제멋대로 하면서 자라왔기에 그녀가 원하는 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고 절대 물러나는 일이 없었다. 그녀는 항상 가장 좋은 것만 추구했다. 때문에 비록 도윤에게 거절당했어도 절대 하용과 춤 파트너를 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부장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많은 여자들이 부장경에게 함께 춤을 출 것을 요청했지만 전부 다 거절했고 결국 미셸에게 손을 내밀었다. 미셸은 약간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오빠, 이제 나이도 적지 않게 먹었으면서 춤 파트너 하나도 제대로 못 찾아? 쪽 팔려, 정말.” 이에 부장경이 웃으며 말했다. “파트너 못 찾은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야?” “그건 내가 원하지 않은 것
민연주는 자신의 아들딸이 춤 파트너를 찾지 못한 모습에 속이 탔다. 분명 자신의 아들딸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건만 둘 중 누구 하나 제대로 민연주의 뜻대로 구는 이가 없었다. 이에 민연주가 직접 나섰다. 음악이 끝난 뒤 도윤은 매우 아쉬워하며 지아를 놔주었고 이때 민연주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번에 우리 집 바깥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다 도윤이와 바네사 씨 두 사람 덕분이야. 내가 두 사람에게 한잔 올리지.” “사모님, 이건 제가 응당 했어야 할 일입니다. 은사님의 위해 나서고 고충을 해결하는 건 제 본직이니 말입니다.” “넌 참 너무 겸손해서 탈이야. 이 잔은 둘 다 무조건 마셔야 해.” 민연주는 시종을 향해 손을 흔들자 얼른 세 잔의 술을 가져왔고 민연주가 먼저 한 잔을 들자 도윤과 지아도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자, 바네사 씨 전에 우리 딸이 예의 없게 굴었던 건 제가 엄마 노릇을 잘 못한 탓이예요.” “평소에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버릇이 잘못 들어서는,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대신 사과를 드리죠. 그리고 우리 바깥 사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사모님,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아는 민연주의 이 말이 분명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럼 오늘부터 지난 날의 나쁜 기억들은 전부 씻어내는 거로 합시다. 짠!” 도윤과 지아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잔 안의 술을 비워냈다. 그리고 멀리서 도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셸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설아 동생, 뭐가 그렇게 기뻐?” 하용이 다가오자 미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별 거 아니야. 오빠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사실 미셸도 하용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계속 미셸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거절당하는 상황에 하용도 슬슬 화가 났다. “설아 동생, 왜 다른 사람에겐 눈길도 안 주는 거야? 내가 널 좋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는데 넌 오로지 도윤만 쫓아다니고 있고 말이
도윤은 미셸이 뭘 원하는 지 잘 알고 있었고 방금 민연주가 술을 건넬 때부터 이미 다 눈치를 챘다. 도윤은 속으로 냉소했고 이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 있는 방법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미셸 같은 명문가의 딸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에 도윤은 약간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셸이 자기만의 계획이 있는 것처럼 도윤 또한 그만의 방법이 있었다. 이때 미셸과 함께 걸어가던 도윤은 걸음을 멈췄고 이에 미셸이 물었다. “왜 그래?” “나 핸드폰을 방금 연회장의 소파에 두고 온 것 같아.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 좀 있다가 찾으러 갈게.” 미셸은 썩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오빠가 다시 안 오면 어떻게 해?” 그러자 도윤이 되물었다. “네가 지아에 관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 가겠어? 그녀는 나에게 있어 전부야.’ 도윤의 이 말을 들은 미셸은 마음이 약간 씁쓸했지만 다시 돌아올 거란 그의 말에 안심을 했다. “그럼 방에서 기다릴게.” “응.” 도윤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그는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약효과가 올라온 것이다.그렇지만 민연주가 건넨 그 술이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마신 도윤에겐 그만의 해결방법이 있었다. 이때 미셸은 잠시 후 도윤이 다시 올 거란 생각에 너무 흥분되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고 얼른 방으로 달려가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게다가 미셸은 자신의 모습을 본 도윤이 놀라 도망칠 까봐 방 안의 불까지 꺼버렸다. 암흑 속에서 술기운과 약기운이 더해진 도윤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달려들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일단 내일 날이 밝게 되면 모든 것은 미셸의 원하는 대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생각에 미셸은 저절로 웃음이 났다. 드디어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날이 온 것이다. 심지어 미셸은 격동한 나머지 약간 눈물까지 나려고 했는데 몇 년에 거친 도윤에 대한 짝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을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미셸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고 도윤이 들어오기
먼저 방으로 돌아온 지아는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느꼈고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맴돌았다. ‘설마 아까 술에 약이라도 탄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긴 지아는 방금 민연주가 건넨 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민연주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이런 추잡한 수작을 부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정말 미셸을 도윤과 결혼시키기 위해 체면 따윈 다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아는 욕조에 물을 받았고 반신욕으로 몸 안의 뜨거운 그 기운을 가시려고 했다. 하지만 욕조의 물이 뜨거운 탓인 건지 지아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수록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지아는 몸을 일으켜 샤워 가운을 걸쳤고 스스로 주사를 놓아 약효를 가시려 했다. 그리고 도윤과 자신이 동시에 술잔을 받고 민연주가 첫 잔을 가져갔던 장면을 떠올렸다. 분명 민연주가 든 첫 잔은 약을 타지 않았을 것이고 100%의 성공률을 위해 나머지 두 잔에 모두 약을 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괴로울 게 분명했다. 민연주의 목적은 도윤과 미셸을 이어놓기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럼 지금 도윤은 어디 있는 거지?” 똑똑똑-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지아가 경계하듯 물었다. 그래도 손님인 자신에게 민연주가 설마 수작을 부렸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나야.” 익숙한 목소리가 지아의 귀에 꽂혔다. 이 목소리는 의외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았다. 지아가 문을 열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하지만 지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윤은 그녀를 안아 벽으로 밀쳤고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도윤의 숨소리가 지아의 목덜미에 느껴졌는데 그의 숨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거칠었다. 역시 도윤도 방금 민연주가 건넨 술의 약효가 올라온 게 틀림없었다. “지아, 너 냄새 엄청 좋아.” 방금까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냄새가 안 좋을 리가? “너 괜찮아
부장경은 목소리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말했다. “정말 괜찮으신 거 확실하시죠?” “부 선생님, 전 의사예요. 제 몸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걱정 마십시오. 날이 추우니 얼른 돌아가세요.” 그렇게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도윤은 지아의 어깨에 툭 기댄 채 말했다. “부장경이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동료로 함께 해온 도윤은 한 눈에 부장경이 지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지아는 그럴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 생각했고 단지 부장경이 자신에 대해 너무 신경을 많이 쓴다고만 여겼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도대체 이성의 감정인지 아니면 감격의 마음인지 잠시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도윤은 바로 지아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 “지아, 넌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네. 이 세상에 아무 이유도 없이 잘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주는 건 이성의 감정 말곤 절대 아무것도 없어.” 이때 베개에 곱게 흐트러진 지아의 머리를 보던 도윤은 냉큼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넌 내 꺼야. 오직 나 한 사람 것이란 말이지.” 이날 밤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었다. 민연주는 부남진 앞에 물을 떠오더니 지아가 만든 약재들을 넣고 그의 발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여보, 날을 계산해보니 우리가 안 지도 수십 년이 다 되어 가네. 몇 년간 그 많은 풍파들을 함께 겪었는데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빨라.” 부남진은 민연주의 턱을 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난 이젠 늙었어.” 민연주는 원래도 부남진보다 열 몇 살 어렸는데 줄곧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부남진은 근 몇 년간 더욱 빨리 늙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반대로 민여주는 매일 집에서 얼굴을 가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만 보면 부부보다는 부녀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민연주는 부남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야? 누구나 늙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내가 당신에게 시집온 건 내 평생에서
아직 부남진이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기에 이 충격은 너무 세진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민연주의 얼굴에는 서서히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신이 날 때려? 감히 날? 이 모든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당신 때문이잖아!” 민연주는 눈물을 흘리며 불쌍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이 줄곧 도윤 그 아이를 좋게 보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시 그 아이는 너무 강했고 우리 아들은 줄곧 밖에서 돌고 있었으니 당신이 하용이를 채용한 거겠지.” “지금까지 당신이 도윤이에 대한 감정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런데 만약 그를 우리 사위로 삼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 되잖아.” “그러니 이건 단지 내가 설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안과 두 가문을 모두 위한 일이야. 더 나아가서는 우리 후대 자손을 위해서이기도 해.” “하지만 당신, 수단이 너무 비열하잖아. 내일 도윤이가 우릴 어떻게 생각 하겠어?” “어떻게 생각해? 우리 딸을 이미 결혼 한 번 해본 사람에게 주는 것도 아까운데 그가 무슨 자격으로 우릴 마다해?” 부남진은 차를 한 잔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말했다. “그래도 당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여보, 당신이 이런 방법 싫어한다는 거 알아. 확실히 이런 수단이 정당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 “일이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여보, 우리 이젠 같은 배를 탄 사이라고.” 민연주는 부남진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보, 모든 후폭풍은 내가 책임질 테니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내 뜻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기만 하면 돼.” “난 당신의 이런 수단은 영원히 인정하고 지지할 수 없어.” 부남진은 몸을 일으키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민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도윤이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아이였으면 내가 이렇게 몇 년을 낭비하지도 않았겠지.” “무슨 뜻이야?” “아무 것도 아니야. 단지 이 일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
지아를 바라보는 장민호의 창백한 얼굴에 갈망이 스쳤다.“지아 씨, 나랑 함께했던 지난 2년 동안, 단 한 순간이라도 저를 좋아한 적 있었나요?” 차갑게 장민호를 응시하는 지아의 눈빛에는 얼음처럼 냉랭한 혐오감이 담겨 있었다. “아니요, 늘 당신의 죽음만을 바랐어요.” 장민호가 쓸쓸히 웃었다. “그랬군요.” 모든 일은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법이었다. 탕!놀란 새들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붉은 선혈이 땅에 흩뿌려졌다. 장민호는 무덤의 차가운 사진을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또렷하게 말했다.“미연아, 너한테 빚진 건 전부 갚았어...” 지아는 눈앞에서 연이어 죽어간 사람들을 보며 가슴속 깊은 곳이 조여오는 고통을 느꼈고, 천천히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미연아, 우리의 복수가 이렇게 끝이 나네. 이젠 너도 편히 쉬어.” 지아는 이날을 너무도 오래 기다려왔지만, 복수를 끝낸 후에는 마음이 텅 빈 듯 허전하기만 했다.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지금, 따뜻한 봄바람 속에서 해경의 뒤를 쫓는 무무의 발목에서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가 경쾌하게 울려 퍼졌다. 해경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외쳤다.“어서 잡아봐!” 멀리서 꽃으로 화환을 엮던 소망이 지윤을 향해 손짓하며 말했다.“허리 좀 숙여봐.” 지윤은 순순히 허리를 숙였고, 소망은 지윤에게 화환을 씌워주었다.“와, 정말 잘 어울린다! 아빠랑 똑같이 생겼어!” 지아는 어린 시절의 도윤을 보듯 따스한 눈길로 지윤을 바라보았다. “자기야.”바로 그때, 지아의 귓가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아가 고개를 돌리자, 한쪽 무릎을 꿇은 도윤의 모습이 보였다.도윤이 한 손에 다이아몬드 반지를 든 채 말했다.“나랑 다시 결혼해 줄래?” 아이들이 옆에서 환호하며 소리쳤다.“결혼해요! 결혼해요!” 지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도윤 씨...”도윤은 진지한 표정으로 지아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며 말했다.“지아야, 다시는 너한테 상처 주지 않겠다고 맹세할게.” 소망이 꽃으로 만든
사랑에 미친 장민호는 이 모든 것이 지아가 2년에 걸쳐 설계한 함정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고, 지아가 도윤의 품에 안기는 것을 본 순간에야 자신의 정체가 이미 드러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 끝났구나...’비록 소씨 가문 사람들이 이겼다고는 하지만, 그동안 심세호와 조경선, 그리고 소시월이 힘을 합쳐 저지른 일들로 많은 이들이 다치거나 목숨을 잃었으니, 소씨 가문 사람들이 완전히 이긴 것은 아닌 셈이었다. 심지어 소시영 또한 그들의 희생자가 되었고, 젊은 나이에 영면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지아가 시영의 무덤 앞에서 향을 올리며 말했다.“언니, 다음 생엔 꼭 행복하게 살자. 이번 생에는 내가 가족들을 잘 돌볼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바로 그때, 산들바람이 불어오며 나뭇잎 한 장이 지아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마치 시영이 지아의 말에 응답하는 것 같은 순간이었다.소영수는 소씨 가문 사람들과 함께 강렬한 기세로 돌아왔고, 환희 역시 마침내 안식의 땅에 묻혔다. 환희의 장례식은 비밀리에 치러졌지만, 부남진은 몰래 그곳을 찾았다. 부남진과 소영수는 무덤 앞에서 서로를 마주했는데, 생전 환희에게 가장 중요했던 두 남자가 환희가 죽고 나서야 얼굴을 마주한 것이었다. 아침 햇살이 희미하게 비추는 가운데, 눈가가 붉어진 부남진은 가지에서 가장 어린 복숭아꽃 한 송이를 꺾어 무덤 앞에 내려놓았다.“미안해, 내가 너무 늦었지...?”그 순간, 지아의 눈에 노인이 아닌 아침 햇살 속에서 자신의 첫사랑을 찾아낸 젊고 잘생긴 소년의 모습이 비쳤다. 서서히 시력을 잃어가던 조경숙의 눈도 치료하면 회복할 수 있는 상태였기에, 지아는 장민호와 소시월을 데리고 다시 고국으로 돌아갔다. 산속은 한창 따듯한 봄이었다. 산꽃들이 만발한 가운데, 강미연의 무덤 앞에는 형형색색의 작은 꽃들이 피어 있었다. 소시월은 숨이 가쁜 상태로 강미연의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고, 장민호는 무덤에 새겨진 이름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이런 날이 올 줄
“오빠, 대체 무슨 일이에요?”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지아는 루이스에게 함부로 다가갈 수 없었기에, 지아가 이 상황에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시후뿐이었다. “지아야, 가까이 오지 마. 여긴 너무 위험해!”시후의 얼굴에 걱정이 가득해지자, 루이스가 고개를 돌려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내 실험은 곧 성공할 거야. 저 아이는 환희의 후손이라, 몸속에 환희와 같은 피가 지니고 있을 테니까.” 그 순간, 지아의 얼굴빛이 달려졌다.‘스승님이 나한테 유독 신경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아.’ 예전의 지아는 그것이 자기 몸과 재능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루이스는 처음부터 지아의 정체를 알고 있던 것이었다. 루이스가 말한 ‘생체 개조 계획’도 사실은 환희를 되살리기 위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저 사람...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할머니를 부활시키려고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다니!’ ‘하마터면 개조 계획이라는 거짓말에 깜빡 속을 뻔했어!’ 백발이 성성한 소영수가 아주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루이스, 그만둬! 환희는 이미 죽은 지 오래야. 환희의 혼도 이미 윤회에 들었을 텐데 부활이라니, 그건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는 일이야!” “네가 그동안 저질러온 실험으로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되었는지 알아? 아, 그걸로도 부족하다는 건가?” “네 과거 실험 데이터를 살펴봤는데, 하나도 빠짐없이 실패했더군. 그런데도 네가 저 아이를 건드리지 못한 이유는...”소영수가 지아를 가리키며 말했다.“저 아이가 환희의 핏줄이고, 환희와 닮은 얼굴을 가졌기 때문이었어. 혹시라도 실험에 실패할까 봐 저 아이를 건들 수 없었던 거야, 그렇지?” 지아는 그제야 모든 것을 이해했고, 환희에게 감사해야 한다고 느꼈다.‘할머니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미 몇 년 전에 목숨을 잃었을 거야.’ 루이스는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내 최고의 실험 대상이야. 어서 스승인 나를 도와주렴.” 시후와 도윤이 동시에 지아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섬에 도착한 지아는 섬의 분위기가 어딘가 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풍경은 여전히 그대로였지만, 섬 곳곳에 있던 로봇들은 사라진 듯했는데, 원래라면 섬에 내리자마자 로봇들이 눈에 띄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섬 가장자리에 밀집한 수많은 군함이 눈에 띄었고, 그것들은 대부분 외국 민간 무장 단체와 용병들이 사용하는 군함 같았다. ‘대규모 인원이 섬에 상륙한 모양인데...’ ‘대체 무슨 일이지?’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가 지아를 인체 개조 대상으로 삼으려 했음에도 지아는 루이스가 살아남길 바랐는데, 루이스처럼 뛰어난 과학자가 유명을 달리한다면 큰 손실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스승님!”“자기야, 진정해. 이 섬에 많은 사람이 들어오긴 했지만, 현재로서는 큰 문제가 없어 보여.”도윤은 지아를 재빨리 진정시켰다. 이렇게 많은 군함이라면 분명 강력한 무기를 많이 실었을 테지만, 섬의 꽃과 나무, 건물들은 여전히 온전했다. “아니야, 이 섬에는 원래 사람이 많지 않았어. 대부분 로봇이었단 말이야! 그나저나 우리 오빠는 어디 있는 거지?” 지아는 며칠 전 시후가 치료를 계속하기 위해 여기에 왔던 것을 떠올린 후,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섬 안쪽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잠시 후, 지아는 겨우 작동하고 있는 한 로봇을 마주했는데, 로봇에서는 전기 스파크가 튀고 있었고, 몸체에서는 쇠약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루이스 스승님은 어디 있어?” 지아가 다급히 물었지만, 이미 언어 기능을 상실한 로봇은 전자 화면에 두 글자를 표시할 뿐이었다. [뒷산.]‘뒷산이라니!’뒷산은 루이스가 지아에게 접근을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였다. ‘거기엔 거대한 비밀이 숨겨져 있을 거야!’ 지아는 미친 듯이 뒷산으로 달려갔다.그곳에는 수많은 로봇과 인간들이 쓰러져 있었고, 원래 뒷산 입구를 막고 있던 기계 문도 강제로 파괴된 상태였다.‘큰일이네. 루이스 스승님은 괜찮으신 걸까?’ 루이스의 로봇도 많은 수를 자랑했는데, 상대는 그보다
그날, 부남진과 소임호는 단둘이 오랜 이야기를 나눴지만,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물론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았으며, 단지 가족이 하나 더 늘었다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하지만 민연주는 조금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갑자기 이렇게 많은 자손이 생기다니, 만약 저 사람들이 모두 부씨 가문 사람이 된다면, 내 아들과 딸에게 돌아갈 재산이 줄어들진 않을까?’ 사람은 누구나 이기적인 법이다. 정말 이런 상황에 닥친다면, 그 누가 자기 이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하지만 소임호와 부남진이 이야기한 결과는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그것은 바로... 소씨 가문 사람들이 소임호의 신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소임호는 부씨 성으로 바꿀 생각이 없다는 것!즉, 소임호의 어머니가 소영수와 결혼한 이상, 소임호를 비롯한 그 자손의 생에는 소씨 가문 사람들에 속했기에, 부씨 가문과는 친척 관계로 왕래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부남진은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소영수가 자기 자손들을 잘 대해준 것을 생각하며 동의할 수밖에 없었고, 소임호의 자손들에게 잠시 부씨 가문에 머무르며 상처를 치료해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 지아는 돌아온 이튿날 아이들을 데리고 묘지로 갔는데, 도윤과 함께 환희와 소계훈을 찾아뵙기 위해서였다. 묘지는 산속에 있었고, 산에는 복숭아나무와 배나무가 활짝 꽃을 피워 푸른 신록이 빛나고 있었다. 소계훈의 묘 앞에는 이끼가 조금 늘어나 있었는데, 지아는 꽃다발을 내려놓고 무릎을 꿇은 채 오랫동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아빠, 드디어 제 가족을 찾았고, 배후의 손도 밝혀냈어요.” “유일하게 아쉬운 건... 그 여자를 데리고 와 아빠의 묘비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도록 하지 못한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아빠. 저는 이제 성장했고, 다른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도윤은 지아의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계훈의 묘비 앞에 담배 한 개비를 놓았다. “기대를 저버려서 정말 죄
지아 일행은 다시 소씨 가문으로 돌아왔다.시후가 관리 중인 소씨 가문은 이미 정상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며, 시하의 다리도 많이 회복되어 이제는 더 시아 장애를 가장할 필요도 없이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다. 시언의 건강은 단기간에 완전히 회복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띄게 좋아졌고, 소임호 역시 지아가 떠나기 전보단 훨씬 건강해 보였다. 소시월이라는 사람 때문에 소씨 가문은 거의 전멸할 뻔했지만, 지금은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지아가 돌아오자 소임호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지아야, 시후한테 네 몸에 독벌레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거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젠 다 나았으니까요. 그런데... 소시월은 아마 바닷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 같아요.” 소임호가 지아를 단단히 껴안으며 말했다.“괜찮다, 괜찮아. 난 그저 너희들만 무사하면 그만이야.” 짧디짧은 시간에도 몇 살은 더 늙어버린 듯한 소임호의 모습을 보며 지아의 마음은 더욱 아팠다. “엄마 쪽 소식은 없는 거예요?”“시후가 몇 가지 단서를 찾아냈는데, 아직 추적 중이란다. 참, 부씨 가문에서 우리가 한 번 왔으면 좋겠다고 하더구나.” 최근 부남진은 신분상 모습을 드러내기 어려운 상황이라, 소씨 가문 사람들이 본국으로 가야만 했다. 마침 지아도 다른 아이들이 그립던 터였다.“좋아요. 아이들이 외할아버지와 외삼촌의 존재를 알게 된다면 분명히 기뻐할 거예요.” 그렇게 가족들은 전용기를 타고 본국으로 향했다. 본국은 이미 초봄의 시기로 접어들어, 추운 겨울을 지난 후 생기가 넘치는 대지를 뽐내고 있었다. 나뭇가지엔 새싹이 돋았고, 벚꽃이 활짝 피는 계절이었으니 말이다. 지아는 가벼운 봄옷으로 갈아입었고, 무무는 연한 초록색 원피스를 입고 지아의 곁을 따랐다. 도윤도 모처럼 정장을 입지 않고 모녀와 함께 커플룩을 맞춘 듯한 연한 초록색 줄무늬 셔츠와 흰 바지를 입고 있었다. 도윤은 차 문을 열고 무무를 안아 내렸다. 세 사람은 등장하자마자 사람들의 눈길을
배신혁은 태연하게 말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심규철은 말 그대로 충격에 휩싸였고, 머릿속엔 온통 한대경이 과거에 어떤 삶을 살았을지에 대한 상상이 가득했다. ‘낡은 민간 보호시설에서 삼류, 사류 사람들과 부대끼며 자란 걸로도 모자라, 그 무엇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잃는 것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이영화가 세상을 떠난 이후, 심규철은 심장후에 대해 그다지 마음을 쏟지 않았지만 물질적인 부분만큼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친아들을 찾은 지금, 심규철은 가슴 한편이 아려져 왔다. ‘그 결혼이 아들의 유일한 소망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주고 싶어.’ 한편, 지아는 바닷가에 서서 멀리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시월은 이미 바다 밑에 잠겼을 테지만, 지아의 마음은 조금도 평온하지 않았다. ‘죄의 근원이 사라지면 무슨 소용이야? 우리 소씨 가문은 이미 산산조각이 났고, 엄마는 아직 행방불명 상태인데.’ 지아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아직 젊은데,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언제 다가왔는지 모를 한대경이 물었다. 지아의 옆에 털썩 앉은 한대경은 바닥의 모래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한대경은 옆자리를 툭툭 치며 말했다.“앉아봐. 별건 아니고, 그냥 얘기나 좀 하자고.” 지아는 한대경을 한 번 흘긋 보고, 무의식적으로 몇 걸음 물러난 뒤에야 자리에 앉았다. “아니, 조선시대도 아니고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거야, 뭐야?”한대경은 지아가 자신을 뱀 보듯 피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듯 말했지만, 지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대경, 우리가 친구로 지낼 순 있어도 그 이상은 불가능해.” 그 순간, 갑자기 다가온 한대경이 짙은 남성미로 지아를 압도했다. “소지아, 진짜 날 피하고 싶었다면, 애초에 나한테 희망을 주지도 말았어야지!” “정말 미안해, 한대경.” 지아는 그 임무에 한대경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절대 동의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도도 해볼 수 없다는 거야? 단 한 번이라도?”한대경
심규철은 약간 지친 듯했다.‘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상황에 부닥치게 된 거지?’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를 찾은 것 같군.’ ‘이 세상에 30년 동안 얼굴도 못 본 아들이 만나자마자 가족 걱정은커녕 결혼하겠다고 소리치는 경우가 또 있을까?’ ‘그리고 평범한 여자라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상대는 이미 이혼한 데다 아이를 넷이나 데리고 있는 여자잖아!’ ‘그것도 그렇지만 가장 골치 아픈 건, 소지아의 전남편이 내 여동생의 친아들이라는 사실이야. 게다가 두 사람의 관계도 아직 완전히 끝난 게 아니잖아?’ ‘손바닥도 손등도 모두 살인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심규철은 매우 절망스러웠다. 하지만 한대경은 심규철의 곤란한 표정을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 한 개비를 건넸다.“나는 끊었단다.”심규철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한대경은 혼자 담배를 피우며 땅바닥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 모습은 공사장의 현장 소장과 같았는데, 도무지 한 나라의 군주다운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심규철은 이마를 짚으며 생각했다.‘대체 그동안 어떻게 자란 거지?’ “되는지 안 되는지 확답이나 주시죠.”한대경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말하자, 심규철은 아들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했다.“쉽지 않을 거라면 어쩔 셈이지? 그건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야. 물론 두 집안의 사정을 따지는 건 아니란다.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했다면, 거지가 상대라 해도 바로 혼약을 허락해 줬을 거야. 하지만 상대는 소씨 가문 사람이라고.” “넌 모를 수도 있겠지만, 요즘 소씨 가문에 문제가 좀 생겼어. 그 집안은 이미 진정한 소씨 가문과 관계가 끊긴 상태인 데다, 완전히 난장판이 되었단 말이지... 이 결혼은 정말 쉽지 않을 거야.”한대경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그럼 안된다는 겁니까? 아버지라는 호칭을 쓴 게 아까울 지경이군요.” 한대경은 기분이 상한 듯 몸을 돌려 떠났고, 심규철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뭐야, 왜 저렇게 쉽게 포기
시름시름 앓던 심규철은 지금까지 자신이 낳은 친아들이 오랜 세월 동안 외지에 버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아들이 수많은 겪었음에도 거대한 나무처럼 성장했다는 사실에 아주 놀랐는데, 거대한 나무는 맞지만, 어쩐지 그 나무는 조금 삐딱하게 자란 것 같았다. 부자지간임에도 피는 물보다 진하지 않은 것 같았으니 말이다. 이렇게 오랜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났다면, 두 사람은 서로 부둥켜안고 감동적이 이야기를 나눠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대경은 아버지를 만난 기쁨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심씨 가문의 큰아들이라는 신분과 소씨 가문의 여섯째와의 혼약에 훨씬 더 관심을 보이는 했다. “지금은 상황이 조금 복잡하니, 천천히 논의해 보자꾸나...”“제가 친아들이라면서요?”한대경은 성격이 급하고 불같았으며, 그의 어머니와 똑같이 누군가의 설득 따윈 듣지 않았다. 한대경은 이미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관계를 철저히 파악했기에, 혼약의 존재를 알아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하마터면 혼약이라는 걸 전혀 몰랐을 뻔했잖아?’“그럼, 당연하지. 이미 친자 확인 결과도 나왔으니 말이야... 하지만 지금 소씨 가문 상황이 조금 복잡해서 지금은...”“어쨌든 저랑 결혼할 사람은 소씨 가문의 여섯째인 거죠?” “그래.”“그 혼약은 심씨 가문과 소씨 가문의 어른들이 정한 거고요?” “그래.”“그럼 됐으니, 어서 결혼부터 준비해 주세요. 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심규철은 아들이 아주 성급하다는 것을 느꼈다.‘기다리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잖아? 만약 이 상황이 올림픽이었다면 쟤는 분명히 부정 출발로 탈락했을 정도야.’ “결혼 같은 중대한 일보다는 네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더 궁금하지 않니? 그토록 오래 떨어져 지냈는데, 네 아버지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고 싶지 않냐는 말이야.” 한대경은 냉담하게 말했다.“전혀요, 아버지는 이미 반쯤 땅에 묻혀가는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에 대해 제가 뭘 궁금해해야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