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연주는 자신의 아들딸이 춤 파트너를 찾지 못한 모습에 속이 탔다. 분명 자신의 아들딸을 위해 준비된 자리였건만 둘 중 누구 하나 제대로 민연주의 뜻대로 구는 이가 없었다. 이에 민연주가 직접 나섰다. 음악이 끝난 뒤 도윤은 매우 아쉬워하며 지아를 놔주었고 이때 민연주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번에 우리 집 바깥 사람이 살 수 있었던 건 다 도윤이와 바네사 씨 두 사람 덕분이야. 내가 두 사람에게 한잔 올리지.” “사모님, 이건 제가 응당 했어야 할 일입니다. 은사님의 위해 나서고 고충을 해결하는 건 제 본직이니 말입니다.” “넌 참 너무 겸손해서 탈이야. 이 잔은 둘 다 무조건 마셔야 해.” 민연주는 시종을 향해 손을 흔들자 얼른 세 잔의 술을 가져왔고 민연주가 먼저 한 잔을 들자 도윤과 지아도 어쩔 수 없이 잔을 들었다. “자, 바네사 씨 전에 우리 딸이 예의 없게 굴었던 건 제가 엄마 노릇을 잘 못한 탓이예요.” “평소에 너무 오냐오냐 키웠더니 버릇이 잘못 들어서는, 제가 오늘 이 자리에서 대신 사과를 드리죠. 그리고 우리 바깥 사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사모님,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아는 민연주의 이 말이 분명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대충 맞장구를 쳤다. “그럼 오늘부터 지난 날의 나쁜 기억들은 전부 씻어내는 거로 합시다. 짠!” 도윤과 지아는 서로 눈을 마주치더니 잔 안의 술을 비워냈다. 그리고 멀리서 도윤이 술을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던 미셸은 웃음꽃이 활짝 피었다. “설아 동생, 뭐가 그렇게 기뻐?” 하용이 다가오자 미셸의 미소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별 거 아니야. 오빠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사실 미셸도 하용의 타입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계속 미셸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두 번도 아니고 매번 거절당하는 상황에 하용도 슬슬 화가 났다. “설아 동생, 왜 다른 사람에겐 눈길도 안 주는 거야? 내가 널 좋아한 지도 여러 해가 되었는데 넌 오로지 도윤만 쫓아다니고 있고 말이
도윤은 미셸이 뭘 원하는 지 잘 알고 있었고 방금 민연주가 술을 건넬 때부터 이미 다 눈치를 챘다. 도윤은 속으로 냉소했고 이것이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 있는 방법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미셸 같은 명문가의 딸이 이런 일을 벌인다는 것에 도윤은 약간 한심하게 느껴졌다. 미셸이 자기만의 계획이 있는 것처럼 도윤 또한 그만의 방법이 있었다. 이때 미셸과 함께 걸어가던 도윤은 걸음을 멈췄고 이에 미셸이 물었다. “왜 그래?” “나 핸드폰을 방금 연회장의 소파에 두고 온 것 같아. 먼저 방에 들어가 있어. 좀 있다가 찾으러 갈게.” 미셸은 썩 내키지 않는 듯 말했다. “오빠가 다시 안 오면 어떻게 해?” 그러자 도윤이 되물었다. “네가 지아에 관한 단서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안 가겠어? 그녀는 나에게 있어 전부야.’ 도윤의 이 말을 들은 미셸은 마음이 약간 씁쓸했지만 다시 돌아올 거란 그의 말에 안심을 했다. “그럼 방에서 기다릴게.” “응.” 도윤이 몸을 돌려 떠나려는 순간 그는 온몸이 갑자기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약효과가 올라온 것이다.그렇지만 민연주가 건넨 그 술이 이상하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마신 도윤에겐 그만의 해결방법이 있었다. 이때 미셸은 잠시 후 도윤이 다시 올 거란 생각에 너무 흥분되어 당장이라도 날아갈 것 같았고 얼른 방으로 달려가 섹시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게다가 미셸은 자신의 모습을 본 도윤이 놀라 도망칠 까봐 방 안의 불까지 꺼버렸다. 암흑 속에서 술기운과 약기운이 더해진 도윤이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달려들 것을 상상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일단 내일 날이 밝게 되면 모든 것은 미셸의 원하는 대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이 생각에 미셸은 저절로 웃음이 났다. 드디어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그 날이 온 것이다. 심지어 미셸은 격동한 나머지 약간 눈물까지 나려고 했는데 몇 년에 거친 도윤에 대한 짝사랑이 드디어 결실을 맺을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미셸은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고 도윤이 들어오기
먼저 방으로 돌아온 지아는 몸이 약간 불편하다고 느꼈고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온몸에 맴돌았다. ‘설마 아까 술에 약이라도 탄 걸까?’ 잠시 생각에 잠긴 지아는 방금 민연주가 건넨 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지만 민연주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이 이런 추잡한 수작을 부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정말 미셸을 도윤과 결혼시키기 위해 체면 따윈 다 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아는 욕조에 물을 받았고 반신욕으로 몸 안의 뜨거운 그 기운을 가시려고 했다. 하지만 욕조의 물이 뜨거운 탓인 건지 지아는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을 수록 몸이 점점 더 뜨거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이에 지아는 몸을 일으켜 샤워 가운을 걸쳤고 스스로 주사를 놓아 약효를 가시려 했다. 그리고 도윤과 자신이 동시에 술잔을 받고 민연주가 첫 잔을 가져갔던 장면을 떠올렸다. 분명 민연주가 든 첫 잔은 약을 타지 않았을 것이고 100%의 성공률을 위해 나머지 두 잔에 모두 약을 탄 게 틀림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도윤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괴로울 게 분명했다. 민연주의 목적은 도윤과 미셸을 이어놓기 위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럼 지금 도윤은 어디 있는 거지?” 똑똑똑- 문 밖에서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시죠?” 지아가 경계하듯 물었다. 그래도 손님인 자신에게 민연주가 설마 수작을 부렸을까 하는 마음으로 말이다. “나야.” 익숙한 목소리가 지아의 귀에 꽂혔다. 이 목소리는 의외이면서도 또 그렇지 않았다. 지아가 문을 열며 말했다. “네가 어떻게?” 하지만 지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윤은 그녀를 안아 벽으로 밀쳤고 곧바로 문을 닫아버렸다. 도윤의 숨소리가 지아의 목덜미에 느껴졌는데 그의 숨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거칠었다. 역시 도윤도 방금 민연주가 건넨 술의 약효가 올라온 게 틀림없었다. “지아, 너 냄새 엄청 좋아.” 방금까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는데 냄새가 안 좋을 리가? “너 괜찮아
부장경은 목소리에 아무런 변화도 없이 말했다. “정말 괜찮으신 거 확실하시죠?” “부 선생님, 전 의사예요. 제 몸은 제가 가장 잘 알아요. 걱정 마십시오. 날이 추우니 얼른 돌아가세요.” 그렇게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서야 도윤은 지아의 어깨에 툭 기댄 채 말했다. “부장경이 너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은데?” 지금까지 동료로 함께 해온 도윤은 한 눈에 부장경이 지아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러나 지아는 그럴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 생각했고 단지 부장경이 자신에 대해 너무 신경을 많이 쓴다고만 여겼다. 그리고 그런 행동들이 도대체 이성의 감정인지 아니면 감격의 마음인지 잠시 분간하기 어려웠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도윤은 바로 지아를 번쩍 안아 침대로 향했다. “지아, 넌 아직도 이렇게 순진하네. 이 세상에 아무 이유도 없이 잘해주는 사람이 어디 있어? 특히 남자가 여자에게 잘해주는 건 이성의 감정 말곤 절대 아무것도 없어.” 이때 베개에 곱게 흐트러진 지아의 머리를 보던 도윤은 냉큼 냄새를 맡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넌 내 꺼야. 오직 나 한 사람 것이란 말이지.” 이날 밤은 폭풍이 휘몰아치는 밤이었다. 민연주는 부남진 앞에 물을 떠오더니 지아가 만든 약재들을 넣고 그의 발을 씻겨주기 시작했다. “여보, 날을 계산해보니 우리가 안 지도 수십 년이 다 되어 가네. 몇 년간 그 많은 풍파들을 함께 겪었는데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빨라.” 부남진은 민연주의 턱을 올리며 말했다. “당신은 여전히 아름답지만 난 이젠 늙었어.” 민연주는 원래도 부남진보다 열 몇 살 어렸는데 줄곧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부남진은 근 몇 년간 더욱 빨리 늙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반대로 민여주는 매일 집에서 얼굴을 가꾸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얼굴만 보면 부부보다는 부녀에 더욱 가까워 보였다. 민연주는 부남진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그게 무슨 소리야? 누구나 늙는 건 당연한 일이야. 내가 당신에게 시집온 건 내 평생에서
아직 부남진이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기에 이 충격은 너무 세진 않았다. 하지만 잠시 후 민연주의 얼굴에는 서서히 빨갛게 손바닥 자국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당신이 날 때려? 감히 날? 이 모든 게 다 누구 때문인데? 당신 때문이잖아!” 민연주는 눈물을 흘리며 불쌍하게 말했다. “나도 당신이 줄곧 도윤 그 아이를 좋게 보고 있다는 거 알아. 하지만 당시 그 아이는 너무 강했고 우리 아들은 줄곧 밖에서 돌고 있었으니 당신이 하용이를 채용한 거겠지.” “지금까지 당신이 도윤이에 대한 감정 나도 모르는 거 아니야. 그런데 만약 그를 우리 사위로 삼을 수 있으면 모든 문제는 해결 되잖아.” “그러니 이건 단지 내가 설아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집안과 두 가문을 모두 위한 일이야. 더 나아가서는 우리 후대 자손을 위해서이기도 해.” “하지만 당신, 수단이 너무 비열하잖아. 내일 도윤이가 우릴 어떻게 생각 하겠어?” “어떻게 생각해? 우리 딸을 이미 결혼 한 번 해본 사람에게 주는 것도 아까운데 그가 무슨 자격으로 우릴 마다해?” 부남진은 차를 한 잔 마시며 마음을 진정시키더니 말했다. “그래도 당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여보, 당신이 이런 방법 싫어한다는 거 알아. 확실히 이런 수단이 정당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하지만 이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 “일이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어. 여보, 우리 이젠 같은 배를 탄 사이라고.” 민연주는 부남진의 손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여보, 모든 후폭풍은 내가 책임질 테니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그냥 내 뜻을 인정하고 지지해 주기만 하면 돼.” “난 당신의 이런 수단은 영원히 인정하고 지지할 수 없어.” 부남진은 몸을 일으키더니 싸늘한 눈빛으로 민연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만약 도윤이가 그렇게 간단하게 해결될 아이였으면 내가 이렇게 몇 년을 낭비하지도 않았겠지.” “무슨 뜻이야?” “아무 것도 아니야. 단지 이 일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단순한 문제가 아니
똑똑똑- 시종이 방문을 두드리자마자 안에서는 미셸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악! 너가 왜 여기 있어!” 민연주는 미셸이 아직도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얼른 방 안으로 쳐들어갔다. “설아, 무슨 일이야?” 방 안으로 들어간 순간 미셸은 이불로 몸을 감싸고 있었고 눈물을 머금은 채 이곳에 나타나지 말아야 할 남자를 짚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 너, 너가 왜 여기 있어!” 부장경은 유일하게 모든 내막을 모르는 자였기에 일시에 무슨 일인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이때 부남진은 어두운 얼굴로 원래 도윤이 있어야 할 자리에 나타난 하용을 보면서 예상 밖이기도 또 예상했던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만약 정말 도윤이 그렇게 순순히 속아넘어갔다면 그건 정말 너무 지루한 전개였을 것이다. 민연주는 상의를 입고 있지 않은 하용을 보면서 미셸보다 더욱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너, 너.” 부장경은 곧장 달려들어 하용의 얼굴을 내리쳤다. “네가 어떻게 내 동생 방에 있어!” 그러자 하용이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어젯밤 설아 동생이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오라고 해서 왔는데 방에 들어와보니 불은 꺼져 있었고 설아 동생이 저에게 덮쳤습니다. 저에게 좋아한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당시 저도 술을 많이 마셔 머리가 어지러웠고 더군다나 전 몇 년 동안 설아 동생을 짝사랑해왔던 지라 순간 참지 못했습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미셸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난 널 부른 적 없어. 네가 혼자서 들어온 거잖아!” “설아 동생, 그럼 내가 널 강제로 그랬단 말이야?” “은사님, 사모님, 여긴 부씨 가문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이곳에서 그런 일을 벌이겠습까? 만일 설아 동생이 원한 게 아니었다면 전 절대 털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을 겁니다.” 퍽- 미셸은 하용의 뺨을 때렸다. “헛소리하지 마. 다 네가 계획한 일이면서!” 부장경은 격동했던 감정을 서서히 가라앉혔다. 그리고 땅에 흐트러진 옷과 엉망이 된 방 안을 보면서
미셸은 하용의 몸을 미친 듯이 때렸고 자신이 당했다며 엉엉 울었다. 하용은 미셸의 구타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고 그저 그녀가 계속 때리도록 두었다. 한편 부남진은 안색이 완전히 어두워졌는데 이런 결과를 이미 예상했던 것 같았다. 부남진은 도윤이 이 함정에 당연히 넘어가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는 반면, 하용이 감히 겁도 없이 부씨 가문에서 자신의 딸을 건드릴 거라고 상상도 못했다. 게다가 하필 미셸이 주동적으로 원한 거고 하용은 피동적인 쪽이었으니 말이다. “각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제가 설아 동생을 책임지겠습니다.” 이 말을 들은 미셸은 더욱 미칠 지경이었고 하용에게 버럭 화를 냈다. “뭐라고? 누가 너 책임지래?” “설아 동생, 나 하용은 남자로서 절대 그런 무정한 인간이 아니야.” 미셸은 더욱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고 하용 얼굴을 또 한번 후려쳤다. “그만 해!” 부남진이 참다 못해 소리쳤다. “옷부터 제대로 입고 말해.” 미셸은 눈물 범벅이 되어 고개를 돌렸고 마침 자신을 구경하던 지아를 발견하고는 그녀에게 베개를 던지며 화풀이를 했다. “미친년, 누가 너 구경 하라고 했어. 꺼져!” 이때 팔짱을 끼고 있던 지아는 바로 머리를 왼쪽으로 돌리며 미셸이 뿌린 베개를 피했다. 그리고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설아 아가씨의 울음소리가 들리길래 그런데 무슨 일 났나요? 혹시 제가 도울 건 없어요?” 미셸은 지아의 이 말이 전혀 진심이 아니고 자신의 웃음거리를 대놓고 구경하러 온 거라고 생각했다. “꺼져! 네 도움 따위 필요 없으니까.” 이에 부장경이 미셸을 향해 소리쳤다. “닥쳐!” 부장경은 미안한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집안에 일이 좀 생겼어요. 못 볼 꼴 보이네요.” 지아는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각하, 아직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않았으니 절대 무리하면 안 됩니다.” 이때의 부남진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었다. 부씨 가문에 이런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했고 완전히 하용의 손에 놀아
지아도 부남진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았고 뜨끈한 국수를 먹고 난 뒤 몸은 한결 따뜻해졌다. “지금 기분 좀 나아지셨나요? 아직이시면 한 그릇 더 하셔도 돼요.” 지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에 부남진은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사람 위로하는 방식도 참 특이하구나.” “설아 아가씨도 이런 일이 일어나길 원하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상황이니 할아버지께서 몸이 상하지 않길 바랄 뿐이예요.” 부남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아는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챘다. 역시 지아는 똑똑했다. “얘아, 네 능력은 의술뿐이 아닌 것 같구나. 내 곁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 부남진이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지아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전 여러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더 적성에 맞아요. 할아버지가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전 아마 떠날 거예요.” “참, 전 이제 약 좀 지으러 가볼게요. 밖에 설아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부진남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는 지아를 보면서 그녀를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저 아이 참 인재라니까!’ 일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셸의 두 눈은 새빨개져 있었고 하용의 얼굴에는 미셸이 때린 흔적들이 가득했다. 민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고 부장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장경은 처음부터 하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전에 암살 사건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게 아니었기에 더욱 찜찜한 마음이 컸다.만일 도윤과 하용 중에 한 사람이 범인이라면 부장경은 하용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하용을 자신의 매부로 들이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미셸이 이런 일을 벌였으니 늘 차갑던 부장경은 더더욱 아무 말도 안하고 싸늘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연주 또한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후회되었고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딸을 계획에도 없던 이에게 주게 생겼으니 말이다. 부남진은 찻
지아는 물 한 잔을 건네며 시언에게 진정하라고 말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는데,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스파이가 누구라는 거예요?” “방금 떠난 사람은 소지훈이에요. 지금은 연예계에서 활동 중인 사람인데, 우리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이고, 얼마 전에 죽은 소명담의 동생이기도 하죠.” “그동안 큰형이 다른 사람을 의심하지 않았던 건, 우리가 모두 한 핏줄이고, 소씨 가문의 번영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가족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에요.”“누가 감히 가족이 자기 가문을 망가뜨리려 한다고 생각했겠어요?”“그런데 이젠 확실히 알겠어요. 저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한테 원한을 품고 있었던 거라고요.” 지아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어르신은 왜 편애하셨던 걸까요?” “원래 황제는 장남을 사랑하는 법이잖아요. 우리 아버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첫 번째 아이여서 할아버지는 아버지를 각별히 아끼셨어요. 어쩌면 과도한 애정을 쏟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요.” “그래서 손자들인 저와 형제들에게도 각별히 대해주셨어요. 사촌들과 다툴 때마다 늘 우리 편을 드셨으니까요. 하지만 그 작은 편애가 쌓여 그 사람들의 원한이 된 거예요.” 지아가 시언의 얼굴에서 깊은 슬픔을 읽으며 말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다른 사연이 있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제 생각에는 저 사람이 소씨 가문을 해치려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 “왜죠?”“세상에 자기 이마에 나쁜 사람이라는 글자를 써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게다가 상대는 10년, 20년을 준비했잖아요. 저 사람보다 더 차분하고 계획적인 사람일 거예요. 소지훈 씨 같은 사람이 그런 일을 꾸몄을 리 없어요.”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지아의 표정은 여전히 깊은 뜻을 품고 있었다.“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이미 체스판 위의 말이 된 거예요. 판은 이미 시작되었고요.” 지아의 위로에 시언의 감정도 점차 안정되었다. “대체 우리 큰형과 무슨 계획을 꾸미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시언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둘째 삼촌의 막내아들인 소지훈이 서 있었다.몇 년 사이, 예전의 어린 철부지는 이제 연예계에서 가장 뜨거운 스타로 떠올라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과거 얽힌 사연도 적지 않았다. 어린 시절, 시언은 1년의 세월을 들여 목각으로 ‘행려풍속도’를 복원했다. 하지만 문제가 일어난 것은 방대한 작업을 간신히 완성했을 무렵이었다. 그것은 바로 시언보다 열 살이나 어린 소지훈이 고용인이 없는 틈을 타 정신없이 놀다가 실수로 작품을 망가뜨린 것.이는 대회 출품을 목표로 하던 시언에게 큰 충격이었고, 그는 동생을 가차 없이 혼내며 매질하고 말았다.두 사람 모두 소영수 내외의 후손들이지만, 둘째 집과 셋째 집은 어릴 적부터 소영수가 장남을 더 편애한다고 여겨왔다. 그래서 그들의 자식들까지도 소영수에 눈에 들지 못하고, 늘 냉대를 받으며 자랐다. 가문의 중심인 소영수는 이 일에 분노하며 소지훈의 손바닥을 피가 날 정도로 때린 뒤, 그를 사당에 무릎 꿇게 하며 삼 일 밤낮으로 벌을 주었다. 이 사건은 어린 소지훈의 마음에 깊은 원망의 씨앗을 심었다. 이후 시언이 이성을 되찾고 사과했지만, 소지훈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가문의 둘째와 셋째는 사이가 좋았지만, 유독 첫째인 소임호와는 불화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불운한 이는 넷째였다. 그는 심예지와 청소년기를 함께 보냈지만 버림받았고, 그로 인해 사랑에 상처받아 결혼하지 않고 홀로 지내며 자손마저 두지 못했다. 시언이 소지훈의 눈에 담긴 냉소를 보며 말했다.“할아버지께서 생전에 똑똑히 말씀하셨을 텐데? 소씨 가문은 흥망을 같이해야 한다고. 소씨 가문이 이렇게 어려움에 부닥친 상황에서 웃음이 나오니?” 소지훈은 고개를 숙이고 시언의 옷깃을 잡았다.“그거 알아요? 나는 당신 집안이 너무 싫어요. 항상 체면을 차리려는 모습은 역겨울 정도라고요.”“허, 할아버지한테 대체 무슨 마법을 걸었길래 당신들만 그렇게 아낀 거예요? 우리도 분명 소씨 가문 사람이었는데... 지금이라
도윤은 음윤한 심장후에 비해 훨씬 키가 크고 건장한 체격을 자랑해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을 때는 대비가 확연했다.한 사람은 강인하고 압도적인 기운을 풍기고, 다른 한 사람은 부드럽고 우아한 매력을 가진 극과 극의 존재처럼 보였으니 말이다. 도윤은 시선으로 심장후를 가볍게 스치고 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대신했다. “형님, 제 약혼녀인 소시월입니다.”심장후가 소개했다.“반갑습니다.”도윤의 시선이 닿는 소시월의 얼굴에는 지아와 약간 닮은 점이 있었다. 그 순간, 시월의 눈동자에 긴장이 스쳤고, 그녀는 급히 입을 열었다.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그렇습니까? 저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들으신 거죠?”도윤의 질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했지만, 그 속에는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 특유의 위엄과 탐색이 깃들어 있었다. 게다가 도윤은 소시월보다 훨씬 키가 컸기에, 그녀를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압도적인 아우라가 느껴졌다.소시월은 마음을 다잡고 답했다.“이 대표님께서 비즈니스계에서 쌓으신 명성은 제가 Z국에 있을 때부터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이번 기회를 통해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비즈니스에 있어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이제 한 가족이 될 텐데, 앞으로도 많은 지도와 조언 부탁드리겠습니다.” 소시월의 답변은 빈틈이 없었고, 흠잡을 곳도 없었다.“좋습니다.”도윤은 시선을 돌리고 심규철과 함께 다른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소시월은 극도로 긴장했던 마음을 그제야 풀었지만, 찰나의 눈 맞춤에도 온몸에서 땀이 배어 나오는 듯했다. ‘눈빛이 정말 무서웠어. 한 번이라도 나를 더 쳐다봤다면 숨통이 막혔을 것 같다니까?’‘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차갑고 카리스마 넘쳤어.’“괜찮아?”심장후가 소시월의 안색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었다. 소시월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말했다.“괜찮아, 손님들이 또 많이 온 것 같던데, 나 먼저 가볼게.”“너무 무리하지는 마.” 소영수는 장례식은
지아는 처음부터 심씨 가문의 두 삼촌 얼굴이 어디서 본 듯 낯익다고 느꼈다. 그런데 심규철이 나타난 순간,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한대경이 심규철과 아주 닮았기 때문이었는데, 심지어 다른 두 삼촌의 얼굴에서도 미세하게 비슷한 인상을 느낄 수 있었다.“왜?”“저, 저분... 자녀가 몇 명 있어요?” “한 명뿐이야. 월이랑 약혼했다던 장후, 너도 어제 봤잖아.”“아, 네...”‘세상에는 닮은 사람이 정말 많구나. 소시월도 나랑 닮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니잖아.’ 하지만 지아는 왠지 불안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한대경 역시 어릴 때부터 C국의 빈민가에 버려졌고, 친부모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이 들었다. “심장후 씨가 아버지를 닮지 않은 건,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분은 오래전에 돌아가셔서 나도 기억이 거의 없어.”“그나저나 참 한결같은 분이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재혼하지 않으셨으니까.지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더는 묻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욱 복잡해졌다.반면, 도윤은 심씨 가문과의 재회에 겉으로는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지아는 도윤의 마음을 몇 번이고 헤아릴 수 있었다. ‘가족의 울타리가 그리웠을 거야.’심예지는 눈물을 닦으며 도윤의 손을 잡아 앞으로 이끌었다.“네 셋째 삼촌이셔.” 도윤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삼촌, 안녕하세요.”강춘옥이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이제라도 돌아와서 다행이구나. 이젠 여기가 네 집이니 다 잊고 살으렴.”“그리고 오늘은 소씨 가문 어르신의 장례식이니 더는 지난 이야기를 하지 말자꾸나.”“네, 엄마.”심예지가 나지막이 대답하자 강춘옥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흐느끼듯 대답했다. “그래...”강춘옥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도윤아, 방금 와서 피곤할 텐데 뒤뜰에서 잠시 쉬고 오너라.”“괜찮습니다. 소씨 가문과 심씨 가문은 원래 인연이 깊었으니, 소씨 가
도윤은 향을 올리고 나서 조용히 심예지의 곁을 지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심씨 가문 사람들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 심예지가 여기에 나타난 것을 보고 지아보다 더 놀란 듯했다. 특히 강춘옥이 오랜만에 눈앞에 나타난 딸을 보고 휘청거리며 다가와 날카롭게 쏘아붙였다.“망할 X, 네가 여긴 왜 와?!”심예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머니의 그늘진 얼굴을 마주했고, 세월이 자신의 어머니를 노쇠하게 만든 것에 마음이 아렸다.그 순간, 심예지는 자신이 허망한 세월을 보내며 부모 곁에서 효도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내가... 정말 어리석었구나.’“엄마...”“나를 엄마라고 부르지도 마. 나는 너 같은 딸은 낳은 적 없으니까!” “그만하세요, 엄마. 예지가 지금이라도 돌아왔는데 아직도 화가 나세요?”심예지의 큰오빠가 서둘러 중재에 나섰다.“맞아요, 이제 그만하세요. 예지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둘째 오빠도 거들며 말했다.“그리고... 네가 도윤이니? A국에서 네 소식을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소씨 가문의 장례식었지만, 어느새 심씨 가문의 화해의 장처럼 분위기가 흘러갔다. “작은삼촌, 큰삼촌, 안녕하십니까.”도윤은 비록 말수가 적었지만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두 사람은 도윤이 마음에 드는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참 착하구나. 돌아와 줘서 고맙다. 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께서 널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몰라. 네 어머니와의 일 때문에 나도 별수 없었다만, 이렇게 돌아왔으니 된 거야.” 강춘옥은 여전히 굳은 얼굴로 말했다.“흥, 난 저런 불효녀를 절대 용서할 생각이 없어!” “네 외할머니는 마음이 약하신 분이야. 괜찮으니까 이제 ‘외할머니’라고 부르면 돼.”도윤은 어릴 때부터 사랑이 부족한 환경에서 자란 탓에 혈육의 정을 갈망해 왔다. 게다가 도윤은 심씨 가문과 많은 인연이 없었지만, 심씨 가문이 자신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저 자기 어머니에게 상처받아서 이런
지아는 처음에 그저 시하의 다리 치료를 위해 왔을 뿐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소씨 가문은 정말 끝장나겠구나!’지아의 손끝에 살짝 닿는 감촉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무무가 조심스레 지아의 손끝을 꼭 잡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엄마는 괜찮아.” 하지만 세상은 무심했다.소영수가 생전 Z국의 거물로 이름을 날린 만큼, 그의 장례식은 당연히 떠들썩했다. 불과 하루 밤낮 사이에 수많은 조문객이 줄을 이었으니 말이다.지아는 시하의 휠체어 옆에 서 있었다. 평범한 얼굴 덕분에 모두 지아를 그저 시하를 돌보는 고용인쯤으로 생각했다.소영수는 Z국에서 이름난 인물들이었기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 중에는 거물급 인사도 수두룩했다. 하지만 지아는 이곳에서 도윤과 심예지를 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도윤은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는데, 넥타이조차도 깊은 먹색이었다. 그의 옆에는 검은 우산 모양의 드레스와 반쯤 가린 진주 베일을 쓴 심예지가 함께였다.두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장내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을 향했다. “저 여자가 바로 심씨 가문의 못난 딸이라지? 들었어? 어릴 적 소꿉친구를 마다하고 기어코 이씨 가문에 시집갔다더라? 근데 남편은 저 여자를 눈곱만큼도 사랑하지 않았대.” “남자는 원래 그렇잖아. 아무리 여자의 집안이 좋아도, 밖의 여우 같은 여자가 더 끌리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심예지도 참 멍청하다. 자기 집안에 걸맞은 남자를 얼마든지 만날 수 있었을 텐데, 왜 한 남자한테만 매달린 걸까?” “그러니까! 자살 소동까지 벌였을 때, 심씨 가문 사람들이 찾아와서 그렇게 이혼시키려 했는데, 끝까지 버티면서 이씨 가문에 남겠다고 했대. 그 일로 심씨 가문과도 등을 졌으니, 남은 게 없잖아! 딱히 잘난 것도 없는데 말이지.” “누가 아니래? 시댁에선 좋은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친정과도 연락을 끊었잖아. 바보라고 해야 할지, 순애보라고 해야 할지... 그런데 이제야 돌아왔네? 철이 든 건가? 늦었지만
시월도 소영수의 침상에 엎드린 채 흐느꼈다.“할아버지,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그러셨어요... 저희가 마지막 모습을 뵐 수 있었을 텐데요...” “아가씨,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어르신께서는 너무 갑작스럽게 가셨고,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아마 마음의 상처를 받으신 게 큰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시하가 억지로 눈물을 삼키며 이를 악물었다.“집사님, 소식을 철저히 숨겼는데, 어떻게 할아버지께서 알게 되신 거죠? 대체 누굽니까? 누가 전화를 한 겁니까?”“이미 번호를 추적해 봤는데, 해외에서 걸려 온 가상번호였습니다. 발신자의 신원은커녕 구체적인 IP 주소조차 찾을 수 없었어요. 아무래도 처음부터 철저히 준비한 모양입니다.” 양준철의 두 주먹은 떨리듯 꽉 쥐어졌고, 붉게 충혈된 눈에는 분노가 가득했다.“그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만 하면, 그놈을 가만두지 않을 겁니다. 뼈까지 갈아버려서 죽어서도 편히 잠들지 못하게 할 거라고요!” 40년 전만 해도 양준철의 수법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했다. 양준철은 어릴 때부터 거리에서 생계를 이어갔고, 살아남기 위해 무슨 짓이든 저질렀다. 소영수가 양준철을 부하로 삼은 것도 그의 잔혹함을 높이 샀기 때문이었는데, 사람들은 양준철의 이름만 들어도 겁에 질릴 정도였다.하지만 그런 양준철이 지켜야 할 은인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이는 양준철에게 있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오빠, 지금은 큰 오빠가 없으니까 오빠가 결단을 내려야 해. 할아버지 장례는 어떻게 할 거야?” 시하는 피눈물을 머금은 듯 입술을 깨물며 입을 열었다.“입관하고 조용히 묻어 드리자. 최소한... 할아버지께서 편히 잠들도록 해드려야지. 양 집사님, 장례를 준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시하는 소영수의 시신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할아버지, 평생을 할머니 곁에 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이제야 소원을 이루셨네요.”“하지만 이렇게 급히 떠나시다니... 다 제 잘못입니다.
시월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놀라 황급히 뛰어 들어왔다. “오빠, 괜찮아?” 멀찍이 떨어져 있던 지아가 차분하게 말했다.“아가씨, 멀리 떨어지세요. 감정 상태가 아주 불안정한 것 같아요. 아가씨까지 다칠 수도 있어요.”“우리 오빠가 왜 이렇게까지 된 거예요?” 장덕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방금 어르신의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아직 비행기 사고로 연락이 안 되고, 시언 도련님은 이제 막 수술을 마친 터라, 지금 집안을 돌볼 수 있는 사람은 시하 도련님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소식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할아버지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예요?”시월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할아버지가 왜요?” “집안에 닥친 변고를 들으신 순간 심장 발작으로...” “거짓말! 그 따위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라고!!” 시하는 옆에 있던 신발을 장덕수에게 집어 던졌고, 깜짝 놀란 장덕수는 급히 몸을 움직였다. “다 끝났어요, 시하 도련님도 미쳐버리셨다고요!” 지아가 침착하게 말했다.“두 분은 나가 있으세요. 시하 오빠는 제가 돌볼게요. 지금은 큰 충격을 받아서 안정할 시간이 필요해요.”“안 됩니다, 소 선생님, 그건 너무 위험해요. 도련님이 정신을 잃고 선생님을 다치게 할지도 모릅니다.”“괜찮아요. 시하 오빠의 다리 상태를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저를 해칠 수 없을 거예요.” 지아가 무무를 불러 문을 잠그자, 방 안에는 차가운 공기만이 남았고, 피리 소리가 은은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문밖에서는 장덕수가 안절부절못하며 한숨을 내쉬었다.“이걸 어쩌죠... 도련님께선 원래도 심신이 불안정하셨는데, 이번 일로 완전히 무너지신 모양입니다. 이 와중에 어르신까지...”“본가로 갑시다!”목소리의 주인공은 시언이었다. 모두 고개를 돌리자, 휠체어에 앉은 그의 모습이 보였다.흉터를 감싼 붕대가 여기저기 엉성하게 드러났지만, 시언의 표정만큼은 이전과 다르게 단단하고 결의에 차 있었다. “오빠...”시
그 순간, 지아의 말에 시하의 눈빛이 굳어졌다.“그러니까... 아직 우리 가문에 스파이가 있다는 거야?”“잘 생각해 보세요. 소명담의 부검 결과가 나왔잖아요. 그 사람이 죽은 건 불과 몇 년 전이에요. 즉, 심세호가 그 사람의 신분을 사용한 것도 몇 년 안 되는 일이라는 뜻이죠.”“하지만 소씨 가문의 불행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잖아요. 족히 십여 년은 되었다고요! 내부에서 도와주는 자가 없었다면, 그 사람이 이렇게 순조롭게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어요?”지아의 지적에 시하는 마침내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지아야, 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어.” “물론 오빠를 탓할 수는 없어요. 소씨 가문에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들 때문에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 당사자는 상황을 제대로 살필 수 없는 법이잖아요.”“상대는 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시간을 들여 판을 짰을 거예요. 혼자만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었을 거란 뜻이죠.” 시하의 얼굴에 깊은 걱정이 스쳤다.“그럼 큰형이 더 위험하다는 말이잖아?”조경숙이 끌려간 것도 끝이 아닐 수 있었으며, 어쩌면 그게 시작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 돼, 큰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야 해. 지금 저렇게 나서는 건 누군가의 함정에 빠져드는 것일 뿐이라고!” 시하는 안절부절못하며 목소리를 높였다.“형한테 당장 알려야겠어. 그리고 이 일은 할아버지께 비밀로 해야 해. 요즘 들어 할아버지의 건강이 많이 나빠지셨어. 이 사실을 알게 되시면 그 충격을 이겨내지 못하실 거야.” 지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시하를 달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문밖에서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누구야?!”시하의 얼굴에는 불안이 그대로 드러났는데, 극도의 긴장 속에서 작은 소리조차 불길하게 들리는 듯했다.“도련님, 큰일 났습니다!”또 장덕수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제가 먼저 나가 볼게요.”지아가 시하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