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아도 부남진과 한 식탁에 마주 앉았고 뜨끈한 국수를 먹고 난 뒤 몸은 한결 따뜻해졌다. “지금 기분 좀 나아지셨나요? 아직이시면 한 그릇 더 하셔도 돼요.” 지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에 부남진은 지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네가 사람 위로하는 방식도 참 특이하구나.” “설아 아가씨도 이런 일이 일어나길 원하진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진 상황이니 할아버지께서 몸이 상하지 않길 바랄 뿐이예요.” 부남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아는 이미 어떻게 된 일인지 눈치를 챘다. 역시 지아는 똑똑했다. “얘아, 네 능력은 의술뿐이 아닌 것 같구나. 내 곁에서 일해볼 생각 없어?” 부남진이 아주 진지하게 물었다. 그러자 지아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했다. “전 여러 곳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게 더 적성에 맞아요. 할아버지가 몸이 완전히 회복되면 전 아마 떠날 거예요.” “참, 전 이제 약 좀 지으러 가볼게요. 밖에 설아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부진남은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는 지아를 보면서 그녀를 곁에 두고 싶다는 마음이 더욱 커졌다. ‘저 아이 참 인재라니까!’ 일행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미셸의 두 눈은 새빨개져 있었고 하용의 얼굴에는 미셸이 때린 흔적들이 가득했다. 민연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싸늘한 표정을 지었고 부장경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장경은 처음부터 하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전에 암살 사건 또한 명확하게 밝혀진 게 아니었기에 더욱 찜찜한 마음이 컸다.만일 도윤과 하용 중에 한 사람이 범인이라면 부장경은 하용이 한 짓이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때문에 하용을 자신의 매부로 들이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필 미셸이 이런 일을 벌였으니 늘 차갑던 부장경은 더더욱 아무 말도 안하고 싸늘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민연주 또한 마음속으로 미친 듯이 후회되었고 이런 결과를 낳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자신의 딸을 계획에도 없던 이에게 주게 생겼으니 말이다. 부남진은 찻
민연주는 이를 악물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녀석에게 이런 식으로 당하다니, 이번 일은 아마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용은 처음부터 자신이 꾸민 일임에도 전부 다 실수였던 척 미안한 표정을 지었고 미셸은 옆에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부남진과 부장경은 비록 모든 것이 다 하용의 꾀임을 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그가 집안 어른들까지 끌어 들인 이상 절대 쉽게 넘어갈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게 분명했다. 만일 오늘 부남진이 혼사를 거절하면 이 일은 널리 소문날 게 분명했고 그러면 미셸의 명예조차 완전히 망가지는 것이었다. 미셸의 명예를 둘째 치고 더 중요한 부씨 가문의 명예까지 말이다. 때문에 하용의 짠 이 판에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응접실로 가자. 손님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순 없잖아.” 부남진이 몸을 일으켰고 하용이 뒤따랐다.미셸은 부장경의 손을 잡은 채 애원했다. “오빠, 살려줘. 제발 살려줘. 이제 날 살려줄 사람은 오빠밖에 없어!” “네가 널 살려? 어젯밤 일은 어떻게 해명할 건데? 너 저 자식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왜 아무런 거부도 하지 않았는데?” 이건 부장경이 가장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미셸이 원했던 게 아니고 강제로 당한 것임을 걸 증명할 수만 있어도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 말이다. 그러자 미셸이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니까.” “너 계속 이런 식으로 꾸물대면 내가 도대체 널 어떻게 도와?” 이에 미셸은 부장경의 귓가에 대고 어젯밤 일의 자초지종을 전부 설명했고 듣고 난 부장경의 안색은 크게 어두워졌다. “너 정말! 어떻게 그런 방법을 쓸 수 있어? 도윤이 대체 어떤 사람인 지 아직도 몰라?” “약을 타는 것도 너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한테나 먹히는 거야. 너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그는 절대 널 다칠 리 없는 거고 말이야.” “오빠, 이제 잘못한 거 알아. 그런데 일이 이 지경까지 됐으니 나 이제 어떻게 해?” 부장경은 긴 한숨을 내쉬며
미셸은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필경 그녀가 어젯밤 도윤에게 하려던 짓이 들통나면 자신을 가만 놔두지 않을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윤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설마 너희 무슨 사고라도 쳤어?” “난, 난 당시 그인 줄 몰랐어. 오빠가 온 줄 알았다고!” 미셸은 눈을 딱 감고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만일 내가 어젯밤 갔다면 오늘 이 상황의 주인공은 나겠네?” 미셸은 순간 뭐라고 대답해야 할 지 몰랐고 침묵했다. 이때 도윤이 냉랭하게 말했다. “어쩐지 어제 내 몸이 약간 이상하더니, 게다가 넌 지아의 소식으로 날 유혹했고 말이야. 설마 어제 그 술에 약이라도 탔던 거야?” “도윤 오빠, 이건 다 내가 오빠를 너무 사랑해서야. 그런데 오빠가 계속 날 받아주지 않으니 나도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네 오늘이 바로 다행히 발생하지 않은 내 미래였네. 이제 만족해?” 미셸은 그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듯 말했다. “나도 알아. 전부 내 잘못이야.” “하용도 아마 너에게 사과를 했겠지? 그런데 소용 있었어?” 도윤이 냉소했다. “만일 소용 있었다면 네가 울면서 나에게 전화를 하는 일은 없었겠지. 부설아, 이 세상엔 자신이 하기 싫은 건 남에게도 강요하면 안 된다는 말이 있어.” “네가 날 속이려 할 때 그게 나에게 불공평하다는 건 생각 안 해봤어?” 미셸은 너무 운 나머지 숨이 찰 지경이었다. “나 지금 미치도록 후회해. 그러니까 도윤 오빠 나 좀 살려줘.” “부설아, 네가 벌인 일은 네가 알아서 처리해. 게다가 내가 미쳤어? 내가 멍청한 것도 아니고 날 속으려던 사람을 내가 왜 도와야 하는데?” 도윤의 싸늘한 목소리가 미셸의 귓가에 꽂혔다. “너희들 결혼식에 선물은 섭섭치 않게 할게. 미리 결혼 축하해.” 그렇게 전화는 끊겼고 미셸의 울음소리만 들려왔다.“안 돼!” 미셸은 뼈 속 깊이 후회가 되었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도윤의 품 속에 있던 지아가 물었다. “너 하용이 손을 쓸 거라는
도윤은 지아의 어깨에 머리를 파묻은 채 말았다. “지아,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이씨 가문의 재력은 몇 대가 놀고먹어도 충분해. 그리고 권력이라면 난 저 머리 위의 하늘만 아니라면 아무것도 두려울 없어. 하용이 애를 쓰며 탐 내는 것들이 나에겐 아무런 매력도 없다는 말이야.” “나에게 권력은 오로지 이씨 가문과 널 지키기 위한 것일 뿐이니까. 미셸이 아니어도 나에겐 다른 방법은 많아. 그리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건 너 하나뿐이야.” 도윤은 지아의 귓가에 한번 또 한번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니까 지아, 날 더 이상 쫓아내지 마. 넌 내 전부야.” 이에 지아는 도윤의 딱밤을 가볍게 치며 말했다. “아이고, 제발 진정 좀 해. 여긴 부씨 가문이야. 네가 내 방에 있는 게 다른 사람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 “네가 지금 날 쫓아내면 그건 바로 내가 어젯밤 부씨 가문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걸 모두에게 알리는 셈인 거야.” 지아가 말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 “밤이 어두워지면 내가 감시 카메라 사각지대를 통해 알아서 나갈게.” “밖에 경호원들이 지키고 있는데?” “나에게 방법이 있어.” 지아는 어리둥절했다. “그런데 지아, 나 지금 배가 무지 고파.” “뭐 좀 먹을래? 내가 주방 가서 만들어 올게.” 이때 도윤은 지아를 소파에 눕히며 말했다.“그럴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해결해.” 응접실 안. 하용의 전화 한 통으로 올해 85세인 하씨 가문의 큰 어르신까지 이곳에 모습을 드러냈고 주위에는 하용의 둘째 삼촌, 셋째 삼촌을 포함한 많은 어른들이 수두룩했다. 하씨 가문은 원래도 정계 쪽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특히 하용의 할아버지는 부남진의 전 상사이기도 했다. 부남진은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그게 다른 누구였을 지라도 절대 남이 짠 판에 속수무책으로 질질 끌려가는 기분은 아주 별로였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 부남진은 억지 미소를 유지해야만 하는 상황이었고 그를 본 하씨 큰 어르신은 바로 몸을 일으키며
하용은 민연주의 모든 계획을 망쳤고 이에 그녀는 하용이 뼛속 깊이 아주 증오스러웠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그들의 뻔히 보이는 연기에 맞장구를 치자니 정말 역겨울 따름이었다. “하씨 부인, 그런 말씀 마세요. 이번 일은 부인과는 상관없어요. 이건 자식들 간의 일이니 일단 앉아서 어떻게 할 지 잘 이야기해봐요.” “부인 말씀이 도리가 있네요. 여보 그만 때려.” 하씨 부인은 민연주의 만류를 덥석 낚아챘고 계속 눈물을 흘리는 척하며 말했다. “아버님, 이 일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하씨 가문 큰 어른은 아직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하용을 보더니 냉랭하게 말했다. “이 망할 놈이 아주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감히 겁도 없이 부씨 가문의 귀한 따님을 건드렸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 놈이 이번 일에 대한 책임을 지는 방법은 부설아 아가씨와 결혼하는 것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각하, 비록 우리 손자가 아직 철이 덜 들긴 했지만 그래도 비교적 성숙하고 진중한 편입니다. 부씨 가문 아가씨를 짝사랑해온 지도 오래니 아마 결혼을 하게 되면 아주 아껴줄 겁니다.” “맞습니다, 각하. 이 아이에게 잘못을 만회할 기회를 주십시오. 평생을 들여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때 부남진은 민연주를 힐끔 쳐다보았고 그녀의 눈빛은 부남진이 알아서 제대로 처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어 민연주는 순간 눈빛이 변하더니 아주 너그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씨 어르신도 너무 하용이를 탓하지 마세요. 이번 일은 우리 설아도 잘못이 있으니까요. 어젯밤 술을 좀 많이 마시는 것 같더니 이런 일이 발생했네요.” “저도 하용이가 크는 걸 봐온 사람으로서 이 아이가 착한 아이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러자 하씨 부인이 재빨리 말했다. “그럼?” “저희도 당연히 하용이가 마음에 들죠. 하지만 이제 세대가 달라져 우리 부모님 때의 그 수가 먹히지 않더라고요.” “게다가 우리 딸도 어릴 때부터 너무 애지중지 키웠던 지라 이 결혼은
하씨 가문은 오늘 목표를 우리기 전엔 절대로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았고 하씨 큰 어른 역시 협박을 입 밖으로 꺼내지만 않았지 부남진은 그 뜻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이 혼사를 거절하게 되면 미셸과 부씨 가문의 명예는 완전히 바닥으로 내려앉을 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씨 가문과 사돈을 맺게 되는 것도 안 될 노릇이었다. 미셸이 사랑하는 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를 봐주지 않았지만 그녀가 전혀 관심이 없는 자는 미친 듯이 결혼하자고 달려드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하씨 어르신, 저도 하씨 가문의 성의는 너무 감사하지만 제 생각도 부인과 같습니다. 하용이 좋은 아이라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저에겐 제 딸도 너무 소중합니다.” “특히 저희 집안에서 결혼과 같은 큰 일은 무조건 자원의 원칙을 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저희 혼사는 잠시 미루도록 하고 일단 두 아이에게 시간을 주어 함께 지내보게 하는 건 어떻습니까?” 이에 민연주는 곧바로 웃음꽃이 피었다. 하용은 속으로 늙어 빠진 여우라며 부남진을 욕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말했다. “각하의 뜻은?” “알단 3개월 간 시간을 가지고 두 사람이 남녀 간의 감정을 키우도록 둡시다. 만약 감정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면 그때 다시 혼사에 대해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테니까요.” 부남진이 하씨 큰 어른을 보며 말했다. “하씨 어르신, 전 이 방법이 두 아이에게도 다 좋은 건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각하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저도 당연히 찬성합니다. 이 놈, 지금부터 네 예비 신부에게 잘해야 돼, 알겠지?” 하씨 큰 어른이 말했다. 그러자 하용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아버지, 각하, 부인, 그리고 어머니, 아버지, 여러 어르신들 걱정 마세요. 저 하용 하늘에 맹세할게요.” “이 시간부로 반드시 설아 동생을 아끼고 절대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이 맹세를 어길 시 천벌을 받을 겁니다.” “설아, 너도 이제부터 하용이랑 잘 지내
이 일은 이렇게 일단락되었고 민연주가 미셸을 조용한 곳으로 불러내 말했다. “네 아빠가 겨우 시간을 벌어줬으니 너 더 이상 제멋대로 굴면 안 돼. 이 3개월 간 하용과 정상적으로 지내고 그 후엔 이성적 감정이 생기지 않는다는 이유로 헤어지면 돼.” “기억해. 절대 하씨 가문에 트집 잡힐 일은 벌이면 안 돼!” 미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 알았어.” “내가 제일 걱정인 건 너의 그 욱하는 성격이야. 기억해, 3개월만 잘 참고 버텨. 부씨 가문과 네 명예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끝까지 연기해야 해.” 민연주는 속상한 듯 미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딸, 아직 인생은 길어. 이제 도윤은 확실히 가능성이 없으니 너도 한 나무에만 너무 목매지 말고 마음 열고 다른 사람도 받아들이는 연습 좀 해.” “그렇다고 하용을 받아들이란 말은 아니야. 그 아이는 교활하고 꾀가 많은 것이 너와 어울리지 않아. 절대 그와 사랑에 빠지면 안 돼.” 민연주가 사람을 보는 눈은 항상 아주 정확했다. 만일 오늘 정말 다른 수가 없었던 것만 아니라면 절대 자신의 딸을 하용과 접촉하도록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도윤과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미셸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 눈밭을 적셨다. “정말, 이제 정말 불가능한 거야?”“딸, 이제 현실 좀 인정해. 전에 네가 이런 일이 없었을 때도 도윤은 널 받아주지 않았으니 지금은 더욱 말할 것 없지 않겠어? 너와 그의 인연은 여기까지 인거야.” “전엔 도윤이 다시 장가를 가지 않았으니 너에게 기회가 있겠지 하여 네가 하자는 대로 해줬던 거야. 그런데 이제 너도 나이가 있으니 포기하고 다른 사람도 좀 봐.” “하지만, 엄마 난 도윤 오빠만 좋단 말이야.” 민연주는 미셸을 안으며 말했다. “이 세상에 원래 원해도 얻지 못하는 것도 많아. 특히 사랑은 더더욱 그래. 돈이나 권력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더군다나 이씨 가문은 그런 게 부족한 집안도 아니니까 말이지.” 미셸은 마치 어린 아이처럼 울음을 그칠 줄
도윤은 여기가 부씨 가문이라는 것도 잊은 채 지아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친 듯이 물고 빨았다. 이에 지아는 침대에서 내려오는 것은커녕 손 하나 까딱하는 것조차 뼈가 부서질 듯했다. “오늘 각하는 온종일 하씨 가문과 시간을 보낼 테니 넌 나와 함께 있어주면 돼.” 지아는 도윤의 품에 기댄 채 방금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숨을 헐떡였다. “전에 내가 기억하는 넌 뭘 하든 자제했던 것 같은데 지금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그때의 도윤은 금욕의 기질이 넘쳐 흘렀고 집에서 지아를 보는 눈빛조차 차가웠다. 하지만 지금은 지아가 그를 한눈이라도 더 보기만 해도 마치 주인을 며칠 만에 본 강아지처럼 달려들곤 했고 이 열정에 지아는 벅찰 지경이었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이게 이렇게 고플 줄 몰랐었던 거지.” 도윤은 지아의 볼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아, 이렇게 많은 일을 겪고도 다시 너를 품에 안을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알아?” 사람은 꼭 틀린 길을 돌고 돌아서야 자신이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발견하나 보다. 도윤은 젊었을 때 항상 많은 것들의 속박을 받았고 그 속에서 진정으로 소중했던 지아를 잃고 나서야 매일 밤을 후회 속에서 지새웠다. 그리고 무수한 밤을 지새운 끝에 도윤은 겨우 다시 그녀라는 한 줄기의 빛을 손에 잡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도윤은 절대 그 암흑 속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도윤은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떠났다. 이 한바탕 난리가 지난 뒤 지아는 하룻밤을 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오늘 지아는 백채원에게 시침하러 가는 날이었다. 그녀는 특별히 일찍부터 부남진에게 대접할 아침 준비를 마쳤다. 부남진은 아마 어젯밤 제대로 잠에 들지 못한 듯 정신이 많이 초췌해 보였고 손으로 자신의 태양혈을 짚고 있었다. “할아버지, 어젯밤 또 밤 새신 거예요?” “나이를 먹으니 잠이 잘 안 오는구나.” 원래 준비한 아침을 놓고 가려던 지아는 부남진의 이 모습을 보고 한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