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를 들은 박민정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밥만 먹었다.박민정도 자기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몰랐다. 그녀는 다른 사람의 도움과 호의를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했다. 신세 지는 게 두려운 것 같았다.그래서인지 정수미와 윤소현이 아이를 해친 걸 알면서도 조하랑과 유남준에게 말하지 않았다.유남준은 박민정이 밥을 먹는 소리를 듣고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냉대를 받는 기분이 정말 별로였다. 하여 유남준은 별로 먹지 않았다.식사가 끝나고 박민정이 유남준의 손을 잡았다.“이제 가요.”유남준이 자리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박민정은 넋을 잃었다.“안 가요?”설마 애처럼 심술부리는 건 아니겠지?유남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민정을 꼭 끌어안았다. 너무 꽉 끌어안아서인지 박민정은 숨을 쉬기가 힘들어 유남준의 팔을 두드렸다.“이거 놔요. 시도 때도 없이 왜 안고 그래요?”두 사람이 나가려는데 다른 룸의 문이 열렸다. 이웃 룸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온 윤소현과 유남우가 이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다.유남우의 걸음이 멈칫했다. 윤소현은 혀를 끌끌 찼다.“여기서 아주버님과 형님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결혼한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이렇게 뜨겁대요.”유남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유남준도 끝내는 박민정을 놓아주더니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그러다 유남우와 윤소현을 마주치게 되었다.박민정은 순간 난감해졌다.윤소현은 유남준이 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할까 봐 먼저 입을 열었다.“아주버님, 형님, 밸런타인데이라고 나온 거예요?”유남준이 이를 듣더니 박민정이 선 쪽을 바라봤다. 박민정이 대답했다.“네.”윤소현은 박민정에게 과시라도 하듯 유남우의 팔을 꼭 끌어안았다.“저랑 남우 씨도 그래서 나왔는데.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어요? 같은 레스토랑에서 만나고.”박민정은 차를 타고 조금만 더 나가도 이 두 사람을 마주칠 필요가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예의를 차리며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는 유남준을 데리고 나가려는
박민정이 의아한 눈빛으로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그가 말을 이어가기를 기다렸다.“내가 눈이 안 보이잖아.”여기까지 걸어오는데도 사람들은 이상한 눈빛으로 그들을 쳐다봤다. 유남준은 앞이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박민정이 잠깐 침묵하더니 이렇게 답했다.“눈이 안 보이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에요. 정말 부끄러운 건 그런 사람을 비웃는 사람들이죠.”박민정의 말을 들은 유남준은 전에 박민정과 같이 나갈 때마다 번번이 박민정의 난청을 무시했던 게 떠올랐다.“민정아, 미안해.”박민정이 멈칫했다. 도대체 오늘 그가 왜 이러는지 알 수 없었다.“왜요?”“별거 아니야. 이제 가자.”“그래요.”박민정이 시동을 걸었다.돌아가는 길에 유남준이 그녀에게 물었다.“병보석 건은 어떻게 됐어?”“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뇌 전문가가 증거 찾는 걸 도와주셨어요. 아마 곧 다시 감옥에 돌려보낼 수 있을 것 같아요.”박민정의 대답에 유남준이 살짝 놀랐다.김인우에게 이 일을 몰래 맡겨서 진행하고 있었는데 박민정이 정말 직접 해결한 것이었다.그 뇌 전문가라는 사람을 어떻게 섭외했는지 궁금했다.“그럼 유산 소송은?”“그 일은 아직 더 준비해야 해요. 그렇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시간이 오래 지났고 바움 그룹도 망했으니 유산 소송을 하려면 어려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유남준은 더는 묻지 않았다. 박민정에게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유남준은 다음 순서로 YN그룹의 해외 프로젝트를 뺏어올 생각이었다.YN그룹처럼 기반이 약하고 여자로 돈을 번 회사는 바움 그룹보다 더 상대하기 쉬웠다.유남준은 YN그룹을 인수하고 바움 그룹을 서프라이즈로 박민정에게 선물해 줄 생각이었다....두원 별장.박윤우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자지 않고 기다리면서 유남준을 혼내줄 생각이었다.“아,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도우미는 그가 왜 이렇게 다급해하는지 몰라 이렇게 말했다.“사모님은 약 한 시간 뒤에 오실 거야. 조급해하지 마.”“아저씨 기다리는 거
하지만 유남준이 이를 거절했다.“아니야. 이제 정말 배불러서 못 먹겠어.”이에 박윤우가 떼를 쓰기 시작했다.“안 돼요. 무조건 하나 더 먹어야 해요.”박민정은 그런 부자를 지켜보더니 안으로 들어갔다.“윤우야, 지금 이런 행동 매우 무례한 거 알지?”박윤우는 박민정이 이렇게 꾸짖자 유남준에게 더는 뭔가를 먹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유남준이 가고 내키지 않았던 박윤우가 주먹밥 하나를 들어 작게 베어 물었다가 매워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아, 매워. 너무 매운데?”박윤우가 테이블에 놓인 물을 벌컥벌컥 마시기 시작했다.테이블엔 박윤우가 미리 준비한 뜨거운 물이 놓여 있었다. 원래는 유남준을 위해 끓여둔 것이다. 하지만 그걸 대신 마신 박윤우는 혓바닥이 더 매워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어떻게 이럴 수가...”박윤우는 자기가 유남준에게 속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남준의 연기도 만만치 않게 좋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베어 물었을 뿐인데도 이렇게 참기 힘든데 하나를 통째로 삼키고도 표정 관리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박윤우는 테이블에 놓인 다른 주먹밥을 쓰레기통에 버리려는데 주방으로 들어온 박민정이 그 주먹밥에서 살짝 삐져나온 겨자를 발견했다.“윤우야, 대답해. 이거 뭐야?”이에 박윤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엄마, 나는...”“안에 겨자를 넣었으면서 왜 아저씨한테 먹으라고 한 거야?”박윤우가 손톱을 잡아 뜯더니 이렇게 말했다.“엄마, 내가 잘못했어요. 앞으로 다시는 안 이럴게요.”박민정은 딱히 그를 혼내지는 않았지만 자세를 낮추고 이렇게 물었다.“그냥 왜 아저씨를 괴롭히는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이야.”유남준은 그래도 박윤우의 친부였다. 언젠가 그들도 크면 분명 알게 될 것이다.박민정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싫어하는 걸 원하지 않았다.유남준이 약속을 어기고 그를 회사에 데리고 가지 않아 그런 거라고 말할 엄두가 나지 않은 박윤우라 어쩔 수 없이 핑계를 지어낼 수밖에 없었다.“엄마, 아저씨가 생기니까 엄
몽유했다고?박윤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그럴 리가 없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자다가 돌아다닌 적은 없는데.”유남준은 대답 대신에 이렇게 말했다.“얼른 정리하고 회사 가야지.”“네.”회사로 간다는 말에 박윤우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박민정은 그가 유남준을 따라 회사로 간다는 말에 딱히 막지 않았다. 그저 안전에 조심하고 함부로 뛰어다니지 못 하게 잘 살펴보라고 했다.가는 길, 박윤우는 들뜬 마음으로 창밖을 스치는 풍경을 감상했다.한 시간 뒤, 차는 호화로운 빌딩 앞에 도착했다.IM 그룹을 보며 박윤우는 어딘지 모를 익숙함을 느꼈다. 이거 형 박예찬이 말한 그 회사 아닌가? 최근에 다른 사람의 프로젝트를 많이 가로채 돈을 많이 벌었다는 그 회사였다. 유씨 집안도 IM 그룹의 배후가 누군지 찾고 있었다.“아저씨, 이 회사가 아저씨 회사에요?”“응, 왜?”“완전 크네요.”박윤우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다른 사람은 모르는 비밀을 알아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아빠 회사랑 비기면 어때?”유남준이 물었다. 이에 박윤우가 일부러 이렇게 말했다.“에이, 당연히 아빠 회사가 더 크죠. 아직 아빠랑 비기려면 멀었어요.”유남준은 이를 듣고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리고 박윤우를 데리고 여기저기 돌아다닐 시간이 없어 여자 비서 한 명을 붙여줬다.여비서는 박윤우를 보더니 활짝 웃으며 물었다.“꼬마야. 안녕. 넌 이름이 뭐야?”여자의 몸에서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박윤우는 본능적으로 이 여자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저는 윤우라고 합니다.”박윤우가 무미건조하게 대답하더니 회사를 빙 둘러봤다. 회사 규모가 꽤 컸고 여러 업무를 포함하고 있었다. 앞으로 만약 엄마와 형, 그리고 자기를 먹여 살리기엔 충분한 것 같았다. 하지만 문제는 회사에 예쁜 여비서가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윤우야, 아줌마랑 근처 놀이공원 가서 놀래?”여비서가 박윤우와 친해지려고 힘썼다.아이라면 놀이공원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박윤우가 이를 거절
박윤우의 눈은 웃고 있었지만 속으로는 여비서를 무시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의 새엄마가 되어주고 싶어 한다니 교훈을 줄 수밖에 없었다.여비서의 몸이 티 나게 굳어지더니 아리송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만 해도 괜찮던 아이가 왜 갑자기 표정이 삭 바뀐 거지?서다희는 그제야 여비서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여비서를 쏘아보더니 박윤우를 데리고 몸을 돌렸다.일단 대표이사 비서실의 풍기를 잘 다스려야겠다고 생각했다.퇴근 후 박윤우는 유남준과 함께 기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박윤우가 유남준을 떠보기 시작했다.“아저씨, 회사에 예쁜 이모들이 많던데. 왜 우리 엄마를 좋아하게 된 거예요?”이를 들은 유남준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몰라.”유남준도 왜 박민정을 좋아하게 됐는지 알았다면 지금처럼 답답하게 속수무책은 아닐 것이다.박윤우가 말문이 막혔다. 뭔가 더 말하고 싶었지만 앞에 앉은 기사가 이렇게 말했다.“대표님, 누군가 우리를 미행하고 있습니다.”IM이 두각을 드러내면서부터 많은 회사가 그 배후가 누군지 조사하고 있었기에 유남준은 이미 이런 상황에 적응했다.“피해서 다른 길로 바꿔.”“네.”기사가 바로 다른 길로 바꿨다. 하지만 오늘 그들에게 붙은 차는 조사만을 위해서 따라붙은 건 아닌 것 같았다. 뒤에서 따라오던 차가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창이 깨지고 말았다.유남준은 본능적으로 박윤우를 품에 꼭 감싸더니 갑자기 날아온 비수를 막아냈다.귓가에 불어치는 차가운 바람에 박윤우는 넋을 잃은 채 유남준의 품에서 꼼짝달싹하지 않았다.기사는 이런 장면이 익숙한지 별로 놀라지 않은 듯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뒤따라오던 차가 몰래 유남준의 차량을 보호하던 차들로 둘러싸였다.사태가 진정되긴 했지만 유남준은 아까 날아든 비수에 의해 얼굴이 살짝 찢어졌다.“대표님, 괜찮으세요?”“난 괜찮아.”유남준이 이렇게 말하더니 품에 안은 아기를 다독였다.“나랑 회사로 나와보니 어때?”박윤우는 너무 놀란
박윤우는 한번 고집을 피우면 끝이 없었다. 문제는 지금 정말 아파서 몸이 불편했다.박민정은 꾹 참고 아이를 달래주었다.그러나 박윤우는 포기하지 않았다.“엄마, 아저씨가 와서 우리랑 같이 있어 줬으면 좋겠어.”“알았어. 그럼 아저씨 보고 오라고 할게. 그러니까 그만해.”박민정은 어쩔 수 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유남준은 아직 잠들지 않았고 서재에서 일을 보고 있었다.박민정은 살짝 미안한 듯 문을 두드렸다.유남준은 보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문 쪽을 쳐다봤다.“아직 안 끝났어요?”“거의 다 됐어. 왜?”유남준이 묻자 박민정은 용기를 내서 말했다.“이따가 일 다 끝나면 우리랑 같이 자요.”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는 당장이라도 하던 일을 멈추고 뛰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애써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그래.”그제야 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서 박윤우에게 유남준이 이따가 곧 올 거라고 했다.원래는 적어도 30분 정도 걸릴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하고 몇 분 만에 유남준이 잠옷으로 갈아입고 온 것이다.박윤우는 유남준을 보자마자 소리쳤다.“아저씨, 제가 자면서도 막 걸어 다닌다면서요? 오늘 밤에 제가 돌아다니지 못하게 안아줘요.”유남준은 긴 다리를 앞으로 내디디면서 침대로 가 누웠다.박윤우는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박민정에게 말했다.“엄마, 엄마도 나 안고 자. 되지?”“그래.”박민정은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그렇게 박윤우는 두 사람 사이에서 잤고 박민정과 유남준은 박윤우를 안아주다가 손이 닿았다.박윤우는 지금처럼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없다.엄마와 아빠가 양쪽에서 자신을 안아주자 박윤우는 곧 잠들었다.박민정은 아직 자지 않았고 어두운 불빛을 통해 유남준의 상처 있는 얼굴을 보고는 만지려고 손을 막 들었다.그런데 유남준은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박민정의 손을 잡으면서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아직 안 잤어?”박민정은 흠칫했지만 손을 빼지 않고 말했다.“네.”유남준은 박민정의 손을 놓고 박윤우를 안아서 자신의 옆으
박예찬은 박윤우더러 일의 경과를 말해 보라고 했다.몇 분 후 자초지종을 다 들은 박예찬은 한참 동안 침묵했다.“가끔 보면 나쁜 것 같지는 않아.”“그렇지? 형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박윤우의 큰 눈동자에 기대가 가득했다.박예찬은 동의했다.“그래. 그런데 그게 뭘 의미하는데? 아저씨는 사람을 보내서 나를 구한 적도 있어.”그러자 박윤우는 살짝 실망했다.“그러니까 형은 아직 아빠를 받아주기 싫어?”박예찬은 또 한 번 침묵하다가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엄마가 용서하면 나도 용서할 거야.”엄마가 고생하면서 그들을 키웠는데 유남준이 조금 좋은 모습을 보였다고 엄마가 외국에서 혼자 겪었던 고생을 잊으면 안 된다.“그럼 그렇게 약속한 거다?”박윤우는 엄마가 다시 아빠를 사랑할 수 있도록 아빠를 천천히 도와주기로 마음먹었다.박예찬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는 눈을 감고 좀 더 잤다. 그런데 김인우가 문을 열고 들어와 큰 책가방 하나를 던졌다.“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 어린이집 가야지.”또 어린이집에 가야 한다니...박예찬은 하마터면 자신이 유치원생이라는 사실을 잊을 뻔했다. 비몽사몽 일어나 옷을 입었다.김인우는 그런 박예찬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어른들이 말을 안 해도 혼자서 잘 일어나서 어린이집 갈 준비를 했던 박예찬이 이런 모습도 있다니.“어제 뭐 하러 갔길래 아직도 잠이 안 깬 거야?”박예찬은 당연히 그에게 사실대로 말하지 않았다.“별거 안 했어요.”박예찬이 그렇게 말할수록 김인우는 더 궁금했다.김인우는 직접 박예찬을 어린이집까지 데려다주고 전과 같은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 근처에 많은 경호원까지 배치해 두었다.드디어 어린이집 문 앞에 도착했고 박예찬은 차에서 내리기 전에 멀리서 유지훈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봤다.박예찬이 차에서 내리자 유지훈이 즉시 뛰어와 훑어보더니 의심하면서 물었다.“네가 박예찬이야?”“내가 아니면 누군데?”박예찬은 어이가 없었다.이때 조동민도 다가와 말했다.“
집에 혼자 있던 박윤우는 심심해서 나갔다가 집 앞에서 유지훈과 다른 두 아이와 마주쳤다.유지훈은 유남준의 집 안으로 들어가지 못해서 박윤우를 보자마자 다급히 말했다.“박윤우, 너 할 수 있으면 나와 봐.”박윤우는 유지훈의 뒤에 있는 다른 두 아이를 보고 그들이 절대 자신과 얘기를 나누려고 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박윤우는 멍청하지 않았다. 몸이 좋지 않은 박윤우는 세 명은 말할 것도 없고 유지훈과 단둘이 붙어도 이기지 못할 것이다.“지금 나한테 말하는 거야?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해?”박윤우는 유지훈에게 눈을 흘기며 말했다.그러자 유지훈은 더욱 화가 났다.“너 이 새X, 감히 그런 눈으로 나를 봐?”그 말을 듣자 박윤우의 눈빛이 싸늘해졌다.오늘 반드시 이 아이들을 혼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유지훈, 너 혼자 들어올 용기는 있어?”유지훈은 그 말을 듣고 눈앞에 있는 박윤우는 박예찬과 외모가 닮기만 했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에 자신이 무조건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없을 리가 있나?”유지훈은 뒤에 있는 두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하고는 돌아서서 유남준의 집으로 들어갔다.경비원은 유지훈이 박윤우와 아는 사이인 것 같아 들여보내 주었다.들어가자마자 유지훈은 주먹을 꽉 쥐고 박윤우를 향해 휘둘렀다.그러나 박윤우가 피하며 말했다.“여기는 보는 사람이 있으니까 싸우기 불편해. 우리 사람 없는 곳으로 가자.”유지훈은 그 말에 동의했다. 만약 경비원이 자신이 박윤우를 때리는 것을 보면 무조건 박윤우를 도와줄 것이기 때문이다.유지훈은 박윤우를 따라 정원에 있는 조산으로 걸어갔다.조산은 크기가 커서 네다섯 살짜리 아이 두 명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곧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박윤우는 유지훈이 이렇게 속이기 쉬운 줄 몰랐다. 그는 속도를 높여 계속 주위를 돌았다.얼마 지나지 않아 유지훈은 머리가 어지러웠고 어느새 앞에 있던 박윤우가 보이지 않았다.“어디 갔어? 박윤우?”유지훈이 소리쳐 물었지만 조산 안의 소리만 들려왔다.유지훈은 여기저기
아침이 밝자 의사가 집에 방문해 박민정에게 여러 가지 검사를 진행한 뒤 약을 처방했다.의사는 약을 꼭 정해진 시간에 맞춰 복용하라고 당부했고 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네, 감사합니다.”의사가 떠난 뒤 유남우는 그를 배웅하며 차 안에서 물었다.“1년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예전 일을 꿈에 꾸는 거죠?”의사는 차분히 대답했다.“그건 정상입니다. 어떤 최면이라도 환자가 과거를 완전히 잊게 만들 수는 없습니다.”그리고 덧붙였다.“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그녀의 상태는 안정될 겁니다. 그때부터는 매달 치료를 받을 필요도 없어질 겁니다.”유남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네요.”그러나 의사는 다시 한번 신신당부했다.“하지만 주의해야 합니다. 환자분이 예전에 알던 사람이나 익숙한 물건을 접하면 기억이 자극받아 최면이 무효가 될 수 있습니다.”“알겠습니다.” 유남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의사를 배웅한 후 그는 방으로 돌아와 박민정이 약을 다 복용하는 것을 확인했다.약을 먹은 박민정은 졸음을 느꼈지만 일자리 지원을 잊지 않았다.그녀가 고른 회사는 현지에 위치한 곳으로, 출장도 필요하지 않아 유남우는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그는 박민정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전화가 계속 걸려왔다.그는 짜증 섞인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야?”수화기 너머로 윤소현의 다소 애교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남우 씨, 오늘 새해잖아요. 왜 아직도 안 와요? 집에는 나랑 다혜밖에 없는데, 우리랑 시간을 안 보내줄 거예요?”그녀의 말에도 유남우는 조금의 동요도 없었다.“소현아, 너도 알잖아. 나 지금 호산 그룹에서의 기반이 불안정해. 나도 다혜와 더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어.”하지만 윤소현은 물러서지 않았다.“대체 어떤 일이기에 꼭 외국에 있어야 하는 건데요? 그리고 언제쯤 돌아올 건데요?”그는 잠들어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며칠 후에.”“안 돼요! 늦어도 내일
박민정은 유남우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고 그의 뜨거운 숨결이 느껴졌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저, 이제 자러 갈게요.”“그래.”유남우는 천천히 그녀를 놓아주었다.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박민정은 방으로 돌아가 침대에 다시 누웠다.그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박민정은 누워 있어도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옆방 욕실에서 들려오는 물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스스로에게 물었다.“대체 왜 이러지?”박민정은 스스로에게 질문했지만 답을 알 수 없었다.최근 들어 유남우와의 관계에서 이유 모를 거리감이 느껴졌다.1년 전 깨어난 뒤로 박민정은 자신이 많은 기억을 잃었다고 느꼈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유남우와 관련된 몇 가지 일들뿐이었다.그는 그녀에게 과거에 큰 교통사고를 당해 일부 기억을 잃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외에서 치료를 받으며 회복 중이라고 했다.새벽이 되어서야 박민정은 겨우 잠들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악몽에 시달렸다.꿈속에는 유남우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나타났는데 그 남자는 성격이 매우 거칠었다.박민정은 그에게 다가가 물었다.“당신 누구예요?”남자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날 잊은 거야?”그의 말에 박민정은 혼란스러웠다.갑자기 남자가 그녀를 끌어안으며 말했다.“너를 찾느라 얼마나 오래 걸렸는지 알아?”그러더니 강제로 무언가를 하려 했다.박민정은 몸부림치며 외쳤다.“놔요! 제발 놔요!”그 순간, 그녀는 깨어났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왜 이런 꿈을 꾸는 거지?”여전히 가슴이 뛰는 것을 느끼며 박민정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러나 다시 잠들 용기가 나지 않았다.그녀는 방의 등을 켜고 핸드폰을 들어 인터넷을 보며 시간을 보냈다.스크롤을 내리던 중 여러 구인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박민정은 자신이 예전에 외국어에 능숙했던 기억은 있지만 무슨 일을 했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그녀는 비서직이나 번역 관련 공고를 보며 흥미를 느꼈다.그때 문
“무슨 일이야?”유남우가 묻자 박민정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저, 밖에 나가서 일하고 싶어요.”지난 1년 동안 그녀는 유남우의 돈으로 생활하며 치료를 받아왔다.하지만 이제 몸이 많이 회복된 만큼 스스로 자립하고 싶었다.모든 걸 그에게만 의지하며 그의 어깨에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박민정은 그가 기꺼이 허락할 거라 생각했지만 잠시 침묵을 지킨 유남우는 뜻밖의 대답을 내놓았다.“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했어? 혹시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 내가 다 해결할게.”“아니에요.”박민정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오빠가 준 돈도 다 쓰지도 못해요. 그냥 내 힘으로 해보고 싶어서 그래요. 오빠한테 계속 의지하는 것도 싫고요.”“그게 왜 의지야? 난 너를 부담스럽다고 생각한 적 없어.”그는 말을 마치며 대화를 끝내려는 듯 덧붙였다.“알겠지? 자, 이제 밥 먹자. 일 얘기는 나중에 하고.”그의 단호한 태도에 박민정은 더 이상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저녁을 먹은 뒤 박민정은 소파에 앉아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냈다.요즘 그녀는 집안일을 하고 나면 독서나 TV 시청으로 하루를 때웠는데 그런 단조로운 일상이 너무 지루하다고 느껴졌다.어느새 유남우가 그녀의 등 뒤에 다가왔다.“민정아.”“응?”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맑은 그녀의 눈을 마주한 유남우는 순간 목울대가 꿈틀거렸다.그는 천천히 손을 들어 박민정의 옆얼굴에 닿았다.“왜 그래요?”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박민정은 얼어붙은 듯 물었다.하지만 유남우는 아무런 대답 없이 손끝으로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곧이어 몸을 기울이며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그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박민정은 긴장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당황한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그를 보지 못했다.그리고 그의 입술이 닿으려는 순간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그 결과 그의 입맞춤은 그녀의 옆얼
여느 때처럼 박예찬은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화면을 응시하며 무언가를 검색하고 있었다.옆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려던 박윤우가 한마디를 던졌다.“두 녀석이 이제 겨우 한 살 좀 넘었잖아. 뭘 안다고 그래?”박윤우는 한숨을 쉬며 다시 문을 닫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했다.“아휴, 저 애들 꼴값 떠는 거 정말 못 봐주겠어.”그는 투덜거리면서 박예찬 옆으로 다가가 함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화면에는 어딘가의 거리 CCTV 영상이 떠 있었다.1년 전부터 여전히 엄마의 흔적을 찾지 못한 박예찬은 세계 곳곳의 CCTV 영상을 끌어모으며 단서를 찾고 있었다.시간이 날 때마다 두 아이는 거리 CCTV를 뒤져 엄마의 모습을 찾으려 애썼다.“뭔가 찾았어?”“아니... 아직 없어.”박예찬의 목소리엔 실망감이 묻어났다.그는 다른 지역의 영상을 다시 띄우며 끈질기게 화면을 지켜보았다.그렇게 두 아이는 꼼짝하지 않고 화면 앞에서 모든 영상을 체크하고 있었다.한편, 집 안은 시끌벅적했다.정수미는 두 외손자들과 놀며 한껏 즐거워하고 있었다.그 모습을 본 윤소현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는 자기 딸이 소외되는 것이 못마땅해 아이를 안고 내려왔다.“엄마, 요즘 다혜를 너무 안 챙기시는 것 같아요.”박민정 사건 이후로 정수미는 윤소현에게 좋은 감정이 없었다.그래도 겉으로는 치우치지 않으려 유다혜를 받아 안으며 말했다.“다혜야, 외할머니가 너한테도 선물 사왔단다.”하지만 아직 몇 개월밖에 안 된 유다혜에게 줄 만한 건 옷 몇 벌뿐이었다.윤소현은 자기 딸에게 주어진 옷 몇 벌과 박민정의 네 아이에게 보내진 고가의 선물들을 비교하며 질투심이 치밀었다.“엄마, 어릴 때부터 늘 딸이 최고라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편애하시면 안 되죠. 예찬이랑 윤우에겐 개인 비행기를 사주시면서 우리 다혜는 옷 몇 벌이 다예요?”정수미는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다혜는 아직 어려서 그래. 나중에 크면 당연히 비행기도 사줄 거야.”정수미는 윤소현의 이런 불만이
고영란은 투박하기 그지없는 윤소현의 말투를 들으며 왜 이런 여자가 유씨 가문에 시집 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혀 상류층의 여인 다운 기품이 없었다.“그럼 남준이는? 아직도 안 왔어요?”잠시 망설이던 집사가 대답했다.“큰 도련님은 지금 두원 별장에 계십니다. 설날엔 안 오실 거라고 하셨어요.“박민정을 찾지 못한 유남준이 아직도 우울에 빠져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고영란은 더 묻지 않았다.“알겠어요. 이제 음식 준비 부탁해요.”“네.”집사는 곧바로 사람들에게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고영란은 두 아이를 베이비 시터에게 맡기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윤소현, 박윤우, 박예찬 그리고 고영란 이렇게 네 명뿐이었다. 오늘따라 식탁이 아주 썰렁하게만 느껴졌다.“고기 많이 먹어.”고영란은 두 아이에게 음식을 덜어주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윤소현은 두 아이에게 지나친 애정을 쏟는 고영란을 바라보며 질투심으로 불편한 마음을 안고 음식을 먹었다.그때, 식탁으로 다가온 집사가 말했다.“사모님, 정 대표님이 오셨는데요.”정수미는 박민정이 자신의 친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후, 박민정의 행방을 찾는 동시에 네 명의 외손자들을 자주 찾아왔다.그녀는 이제라도 박민정에게 미안했던 마음을 조금이라도 보상하기 위해 외손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을 쏟아붓고 있었다.“고마워요.”고영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미를 맞이하러 갔다. 그리고 윤소현도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고영란의 뒤를 따라나섰다.하지만 박윤우와 박예찬은 식사에만 집중하며 정수미의 등장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아이들 역시 이제는 정수미가 엄마의 친엄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복잡했다.“엄마, 저녁 식사 중이었는데, 같이 드실래요?”윤소현은 웃는 얼굴로 정수미에게 말했다.하지만 정수미의 반응은 냉담하기 그지없었다.“이미 먹고 왔어. 이번에는 그냥 아이들 보러 온 거야. 거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게.”“네.”윤소현은 정수미의 냉한 태도를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
1년 후, 설날.해외의 어느 한 소도시.박민정은 직접 송편을 빚으며 설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다.그녀는 유남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남우 오빠, 언제 도착해?”유남우는 이미 공항에 도착한 상태였다.“아마 저녁 9시쯤 도착할 거야.”“알겠어. 기다리고 있을게.”박민정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유남우 역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래, 그래도 배고프면 먼저 먹고 있어. 알겠지?”“알겠어, 나도 바보 아니거든.”박민정이 웃으며 대꾸했다.곧 비행기를 타야 했던 유남우는 아쉬운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비행기에 올라탄 그는 잠시 눈을 감았다.지난 1년 동안 그는 박민정을 여러 장소로 옮기며 정기적으로 그녀에게 최면을 걸어왔다.그로 인해 박민정은 많은 것을 잊어버렸고 이제는 유남우와 유남우가 만들어준 기억만을 간직하고 있었다.유남우는 가족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해외에 자주 나가지는 않았다. 해외로 나간다고 해도 그저 일 때문이라고만 둘러댔다.오늘은 가족들과 함께 설날을 보낼 예정이었지만 마침 걸려온 박민정의 전화에 마음이 바뀌었다. 그는 올해 설 만큼은 박민정과 함께하고 싶었다.그 시각, 유씨 가문의 집.윤소현은 방 안에서 쉴 새 없이 울고 있는 아이를 바라보며 짜증 내고 있었다.“왜 이렇게 울기만 하는 거야?”베이비 시터가 다가와 말했다.“배가 고픈 모양이네요. 제가 데리고 나가서 우유 먹일게요.”“얼른 데리고 가, 얘 정말 짜증 나 죽겠네.”윤소현은 아들이라고 믿었던 자신의 아이가 딸이라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돌이 지난 두 남자아이와 함께 있던 고영란의 모습을 보자마자 질투심이 밀려왔다.“어머님, 편애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니에요? 다혜 울고 있는 건 들리지도 않으세요? 손자들 돌봐주실 시간은 있으시면서 손녀는 신경도 안 쓰시네요?”고영란은 그녀의 불평에 눈살을 찌푸렸다.고영란은 손녀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다혜에게는 이상하게 정이 가지 않았다.윤소현이 낳은 딸은
“정말 실망이다.”정수미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갔다.윤소현은 힘겹게 일어나 그녀를 쫓아가며 말했다.“엄마, 함미현 일 기억 안 나세요? 저도 그때처럼 될까 봐 두려워서 그랬어요. 엄마도 아시잖아요.”정수미는 함미현 얘기가 나오자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네가 생각하는 대로, 내가 정말 함미현한테 진실을 안 물어봤을 것 같니?”그 말에 윤소현의 말문이 막혀버리고 말았다.설마 정수미가 이런 식으로 철저하게 조사를 마쳤을 줄은 몰랐다.“함미현 일은 제가 다 말씀드렸잖아요. 엄마가 어렵게 찾은 딸을 잃게 될까 봐, 혹시라도 진실을 알게 되면 상처 받으실까 봐 그랬던 거예요.”정수미는 그 말에 차가운 냉소를 흘렸다.“내가 상처받을까 봐 그랬다고? 그런데 미현이는 네가 박민정이 친딸이라는 걸 알고 그랬다고 하던데. 내가 평생 친딸을 못 찾게 하려고 미현이한테 연기시킨 거라더라.”윤소현이 변명해 보려고 했지만 정수미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이제 거짓말 좀 그만해. 너 계속 이럴 거면 나도 더는 너 내 딸로 인정 못 해.”그 말에 윤소현의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정수미가 떠나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윤소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진짜 딸을 찾았다고 이제는 날 버리겠다는 거야? 박민정을 원한다는 거야? 하지만 이걸 어째. 박민정한테는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윤소현이 중얼거렸다.밖으로 나온 정수미는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비서의 기척을 느꼈다. 비서는 애써 정수미를 위로해주며 말했다.“아가씨께서는 아무 문제 없으실 겁니다.”정수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난 정말 실패한 엄마야. 친딸이 바로 옆에 있었는데, 바로 옆에 내 딸을 두고도 못 알아봤어. 그런 주제에 양딸이 그렇게나 버릇없이 굴었는데도 난 계속 감싸기만 하다가 내 친딸을 해칠 뻔했어. 아마 민정이는 지금 나를 원망하고 있겠지.”비서를 통해 알아본 박민정은 마지막으로 정수미를 만났던 날, 심각한 모욕을 당하고 조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그 소식
박예찬은 연락이 닿는 순간, 박윤우가 서둘러 물었다.“형, 엄마 어떻게 됐어?”박예찬 역시 박윤우가 실종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금방 수술을 마치고 나온 동생을 위해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무슨 소리야, 그게? 엄마 잘 계셔.”박윤우는 형마저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에 불만스럽게 이마를 찌푸렸다.“형까지 나를 세 살 먹은 어린아이로 생각하는 거야? 이렇게 오랫동안 엄마가 날 보러 안 왔다는 건, 분명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거잖아. 그리고 요즘 아빠도 거의 매일 밖에만 있고, 정민기 아저씨도 요즘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들었어. 엄마 실종된 거 맞지?”박예찬은 동생이 이 정도로 많이 알고 있을 줄 몰랐다.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더는 숨기지 않았다.“맞아, 엄마 실종됐어. 그리고 아직도 못 찾았고.”“어떻게 그럴 수 있어?”박윤우는 확신 어린 소식을 듣는 순간, 밀려오는 걱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엄마 납치당한 거 아니야?”“그럴 가능성도 있지.”박예찬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넌 이제 막 수술을 끝냈으니까 잘 쉬어야 해. 절대 다른 사람들 걱정시키지 말고, 엄마 돌아오실 때까지 건강하게 있어야 해. 그래야 엄마도 기뻐하실 거야.”박윤우는 자신이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알겠어.”전화를 끊은 아이는 다시 병상에 누웠다.최근 며칠 동안 정수미도 손자들의 동향을 지켜보고 있었다.지금 그녀는 밀려오는 후회를 멈출 수 없었다. 만약 박민정을 조금만 더 일찍 찾았더라면, 이런 상황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가질 않았다....그날, 윤소현은 풀려났다.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곧장 정수미에게 달려가 울음을 터뜨리며 하소연했다.“엄마, 저는 다시는 못 돌아오는 줄 알고 얼마나 무서웠다고요. 그 나쁜 놈이, 유남준이 저를 가둬놨어요. 너무 어둡고, 너무 조용해서 미치는 줄 알았단 말이에요. 임산부를 그런 곳에 가둬놨어요!”정수미는 그런 윤소현의 불쌍한 표정
유남준의 수염은 덥수룩하게 자라있었고 정돈되지 못한 모습이 전반적으로 초췌해 보였다.“이지원 조사하고 왔는데, 민정이의 실종과는 아무 관련도 없던데요. 나한테 뭘 숨기고 있는 거예요?”만약 윤소현이 임신 중인 아이가 유씨 가문의 아이만 아니었다면, 그녀가 정수미의 양녀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당장이라도 윤소현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윤소현의 수려한 얼굴은 멍한 표정이 되었다.“그럴 리 없어요, 이지원이 분명 저한테 그랬다고요. 박민정이랑 그 두 아이들 처리해준다고...”윤소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유남준은 천천히 윤소현의 앞으로 다가갔다.“말할 거예요, 안 할 거예요?”“정말로 이지원이었어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고요.”윤소현이 다시 대답했다.유남준은 바닥나버린 인내심에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윤소현은 다시 어둠과 침묵 속에 갇혀 버렸다.“남준 씨, 얼른 저 내보내 주세요. 거기 누구 없어요? 제발 나 좀 꺼내달라니까!”그제야 윤소현은 자신이 유남준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밖으로 나온 유남준은 휴대폰부터 확인했다. 부재중 전화가 몇 통이나 찍혀있었지만 그중 일부는 정수미에게서 온 것들이었고, 다른 몇 통은 고영란에게서 온 것이었다.그는 제일 먼저 정수미에게 전화를 걸었다.“무슨 일이시죠?”“유 대표, 민정이 소식은 있나요?”정수미가 조심스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아직 없습니다.”유남준이 대답했다.정수미는 그 대답을 듣는 순간, 더욱 절망스러워졌다.“그럼... 소현이는 어떻게 됐나요?”윤소현은 어릴 때부터 정수미가 직접 지켜봐 왔던 아이였고, 그 아이와 깊은 정이 쌓여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현재 임신 중이었다.“소현 씨도 아무 일 없습니다.”“그럼, 소현이 좀 풀어줄 수 있을까요? 내가 직접 물어볼게요.”정수미가 다시 물었다.정수미는 어렸을 때부터 온갖 호사만 누리며 살아온 윤소현이 그런 감금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정수미 본인 역시 윤소현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