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에 안 가면 어떡해요? 당신... 읍..."박민정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입으로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행동이 약 효과 때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남준 씨, 그러지 마..."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박민정은 거절하고 도망치려고 했다.그럴 때마다 유남준은 그녀를 도망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입에서 피비린내가 나는 것을 발견했다."당신 입에서...""주체하지 못할 것 같아서 혀를 깨물었어."그는 목이 메었다.박민정이 멍해 있을 때, 그는 그녀를 안아 올렸다.몸에 걸쳤던 가운이 벗겨졌다. 그녀도 찬물로 샤워를 한 탓에 그의 몸이 시뻘겋게 언 것을 보았다.그녀는 잠시 멍해졌다.유남준은 그 틈을 타서 그녀를 자기의 아래에 눕혔다. 하룻밤이 지난 후 천천히 눈을 뜨자 바닥에 흐트러진 옷이 보였다. 그녀는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채 유남준의 품에 안겼다.어젯밤 그는 그녀가 아무리 거절해도 듣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처럼 말이다.한참을 뒤척였지만 다행히 아이는 다치지 않았다.박민정이 잠에서 깬 것을 눈치챈 유남준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비록 그녀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가 자기와 많이 가까워졌다고 느꼈다."민정아, 민정아..."그는 목젖을 굴리며 그녀의 이름을 몇 번이고 불렀다.그녀는 어제 있었던 일, 그리고 유남우가 한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당신, 지금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기억... 이미 회복된 거 맞죠?""그리고 또 무슨 빚이 많다고 했던 건 다 거짓말인가요?"유남준이 멍해졌다."누가 그래?""누가 알려줬든 상관하지 말고 먼저 말하세요, 맞죠?"이제 와서 계속 거짓말을 할 정도로 그는 어리숙하지 않았다."응, 맞아."박민정이 순간적으로 화를 냈다.원래 그녀는 어젯밤에 유남준의 모습을 보고, 또 유남우가 이지원을 데려왔다는 걸 듣고 유남우가 자기를 속인 줄 알았는데 유남준이 속인 게 사실 일 줄 몰랐다."왜 거짓말 했어
유남우는 그 문자를 보며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그는 이지원이 실패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그가 호텔 밖을 지키라고 보낸 사람들은 모두 서다희가 데리고 간 사람들에 의해 처리되었고 기자들은 하나같이 호텔로 가지 않았다.그는 휴대전화를 내려놓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둘째 도련님, 의사를 불러올까요?"부하가 물었다.유남우가 고개를 가로저었다.말을 마친 그는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 박민정의 연락처를 열었다가 한참 지나서 다시 닫았다.한편, 유남준의 말을 들은 박민정은 어젯밤 모든 것이 다 유남우가 시킨 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그녀는 믿지 않았다. 어젯밤에 유남우가 특별히 사람을 보내 유남준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유남우가 보여준 사진이 없었더라면 그를 찾을 수 없었을 것이었다."이지원을 만나고 싶어요.""그래."이지원은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서 마음이 불안했다.이번에는 누가 그녀를 구하러 올 수 있겠는가.갑자기 지하실 문이 밖에서 열리면서 빛이 들어왔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빛을 막았다. 강렬한 빛에 한참을 적응하던 이지원의 시선은 박민정을 향했다.그녀는 멍해졌다.박민정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낭패한 모습으로 지저분한 곳에 버려진 그녀를 바라보며 조금의 연민의 감정도 없었다."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그녀가 입을 열었다.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박민정은 아버지를 따라 보육원에 후원하러 갔었고 그녀는 누더기 차림으로 고아들 틈에 서 있어 부잣집 아가씨인 그녀와 비교가 되었다.이지원은 자기가 이젠 신데렐라가 아니라고, 이젠 바뀌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것이 처음대로 돌아갔다.하느님은 너무 불공평했다.이지원의 눈에는 질투와 한이 서려 있었다."왜? 왜 당신은 여전히 그렇게 높은 곳에 있는 거죠?"그녀의 달갑지 않은 말을 들으면서도 박민정은 여전히 평온했다."제가 여기에 온 건 어젯밤 일을 물어보기 위해서예요. 정말 유남우가 계획한 것이 맞나요?"이 말을 들은 이지원은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남준
이지원은 유남우가 유남준의 시중을 들게 했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자세한 과정을 알려주지는 않았다.그녀는 마음이 좀 차가워졌다. 유남우가 이런 수법을 쓸 줄은 몰랐다.그녀는 약속대로 이지원을 풀어주었다.궁지에 몰린 채 지하실에서 나가 밖으로 나왔다. 나오자마자 그녀는 도성진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예매했다.지금 가지 않으면 김인우도, 유남우도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걸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유남준은 그녀가 사람을 풀어준 것을 알았지만 추궁하지 않았다.이지원 같은 사람은 그를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남우와 권씨 가문의 사람들과 손을 잡고 판을 짜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낄 수도 없었다.박민정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지원이 가장 잘하는 건 말로 남을 해치는 것이었다.이런 사람은 결국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할 것이었다. 자기 손을 더럽혀 범죄에 연루되게 할 필요가 없었다.밖에서는 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박민정이 지하실에서 나왔다."다 물어봤어?"유남준이 입을 열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네.""휴대전화 줘."유남준이 말했다.박민정은 좀 의심스러웠지만 그래도 휴대전화를 건넸다.휴대전화를 손에 넣은 유남준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면서 말했다."유남우 연락처를 삭제해.""네?"박민정은 그가 왜 이런 요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나를 쫓아다니는 여자가 있다고 치자. 널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게 하고 그걸 찍어서 전 세계에 공개하려고 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어야 돼?"유남준은 기억을 잃고 박민정과 그렇게 몇 달을 지내면서 그녀와 대화할 때는 명령을 하는 게 아니라 이유를 분명히 말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박민정도 듣고 바로 이해했다.하지만 그녀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만약 우리가 다시 시작한다면 그 사람의 연락처를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하지만 우리는 아직 다시 시작하지 않았어요. 연락처를 가지고 있는 건 정상이라고 생각해요."이젠 그들 모두 어
유남우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유남준의 가슴을 찔렀다.유남준은 침묵하고 유남우는 더욱더 기세등등해졌다.“형, 민정이가 진심으로 형을 사랑한다고 생각해? 민정이는 나에 대한 사랑을 형에게로 옮겼을 뿐이야. 내가 아니었으면 민정이가 형이랑 만나는 일 따위는 없었다고. 그거 알아? 예전에 민정이는 늘 내 팔을 잡으면서 앞으로 나랑 꼭 붙어 있고 싶다고 했었어.”유남준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박민정은 유남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유남준은 어두운 표정으로 한참 있다가 휴대폰을 박민정에게 돌려주었다.“둘이 무슨 얘기 했어요?”박민정이 의아해했다.유남준은 팔을 들어 박민정을 자신의 품에 껴안으며 살짝 쉰 목소리로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러자 박민정은 유남준을 밀쳐냈다.“이거 놔요.”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이기도 했고 이미 유남준에게 그냥 이렇게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고 시간이 필요하다가 말했었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유남준은 신경 쓰지 않았다.옆에 있는 경호원들은 일제히 뒤로 돌아섰다.유남준이 진지하게 말했다.“민정아, 예전에 네가 나한테 썼던 편지들, 그거 다 진심이었어?”박민정은 유남준에게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고 사람을 헷갈렸을 뿐이라고 편지를 쓴 적 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고 얼어붙었다.갑자기 유남준이 왜 편지에 대해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의 질문에 부정하지는 않았다.“네.”“그럼 어제저녁엔 왜?...”“남준 씨 약 먹은 거 아니었어요?”박민정이 되물었다.유남준이 실수로 약을 먹지 않았다면 절대 그런 상황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유남준은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그럼 민정이 너 해외에서 돌아온 후 왜 매번...”“내가 말했었잖아요. 3년 동안 당신을 가진 적이 없어서 가져보고 싶은 마음에 그랬다고요.”박민정이 대답했다.이제 유남준의 기억도 돌아왔으니 박민정은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두 사람은 원래 인연이 아니다.“이제 내 마음을 가졌으니 떠나겠다는 거야? 내
그 말을 들은 박민정은 갑자기 눈빛이 흔들리고 몸이 긴장했다.“뭐라고요? 당신 누구예요?”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조롱하듯 한 마디만 남기고 바로 전화를 끊었다.“아들이 밤새 사라졌는데도 모르다니, 담도 크셔라.”‘아들이 밤새 사라졌다고?’박민정은 본능적으로 박윤우를 떠올리고 별장에 전화를 걸었다.두원 별장에서, 박윤우는 도우미가 한 아침밥을 막 다 먹고 엄마의 전화를 받으면서 호기심에 물었다.“엄마, 아저씨 찾았어?”엄마라는 단어를 듣자 긴장되었던 박민정의 신경은 한순간에 풀렸다.박민정은 조금 전 낯선 남자가 말한 아이가 박윤우가 아니라 김씨 가문에 있는 박예찬이라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했다.“윤우야, 집에 별일 없지?”“아무 일도 없는데, 왜 그래?”박윤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아니야. 네가 별일 없으면 돼. 절대 함부로 밖에 나가지 말고 이모랑 집에 잘 있어.”박민정이 당부했다.조금 전의 전화가 그냥 스팸인 줄 알고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한 공장 안에서.박예찬은 깨어난 후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버려진 폐공장이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고 대문 앞에만 몇 명이 왔다 갔다 하면서 순찰하고 있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박예찬은 누군가가 박민정에게 전화를 거는 것도 들었다.그제야 박예찬은 지금 자신이 납치를 당했고 어제 일과는 무관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그는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소리쳤다.“화장실 가고 싶어요!”밖에 있던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들었고 그 중 얼굴에 흉터가 있는 한 남자가 문을 열고 걸어들어왔다.“소리는 왜 쳐? 그냥 바지에 싸면 되잖아.”얼굴에 흉터가 난 남자가 짜증을 내며 말했다.박예찬은 목소리를 듣고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바지에 싸면 더럽잖아요. 게다가 지금 날씨가 이렇게 추운데 바지에 쌌다가 얼어 죽겠어요. 내가 죽으면 돈은 어떻게 가지려고요?”박예찬은 이들이 왜 자신을 납치했는지 이유를 떠보려고 했다.어린 아이의 말이라 그런지 남자는
얼굴에 흉터가 난 남자는 박예찬의 말을 듣고 바로 거절했다.“내 휴대폰으로 경찰에게 신고하려고 그러지? 꼬맹아, 너 똑똑하네.”“아저씨, 전 그냥 휴대폰 게임하고 싶어서 그래요. 어디도 전화 안 할게요.”박예찬은 진심 가득한 눈빛을 드러냈지만 남자는 믿지 않았다.“조용히 해. 계속 말하면 네 입을 꿰매겠어.”박예찬을 할 수 없이 주위를 둘러보며 도망칠 기회를 찾았다.하지만...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어린아이가 혼자서 성인 남자와 맞서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심지어 남자 옆에는 다른 사람들도 많았다.이제 유일한 방법은 그가 있는 위치를 김인우에게 알려주는 것뿐이었다. 어젯밤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김인우는 아직도 박예찬을 찾고 있을 것이다.하지만 흉터 있는 남자는 절대 박예찬에게 통신 장치를 주려고 하지 않아서 다른 몇 사람에게서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오늘 김씨 가문에서는 난리가 났다. 김훈은 박예찬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된 후 진주시를 뒤집어서라도 박예찬을 찾으라는 엄령을 내렸다.“도대체 누가 감히 우리 김씨 가문과 대적할 수 있단 말이냐? 내가 알아내면 반드시 그놈 가죽을 벗기겠어.”김훈의 눈빛은 독기가 가득 찼다.그러고는 김인우를 꾸짖었다.“아이가 두 시간 동안 화장실에 갔는데 찾으러 가지도 않다니, 너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김인우의 마음도 지금 무척 혼란스러웠다. 박예찬과 정이 든 것은 둘째 치고, 그 아이는 유남준의 아들이다.유남준이 자기 아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면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제가 부주의한 탓이에요.”김인우는 눈살을 찌푸렸다.“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어요. 아이를 납치하는 건 돈 때문이 아닌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왜 아이를 데려가고는 전화를 한 통도 안 할까요?”“설마 그들 아니야?”김훈이 물었다.김인우가 건드린 집안은 유남준보다 더 많았다... 김인우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만약 그가 건드린 원수 집안에서 박예찬을 납치해 간 것이면 아이는 이미 죽었
유남준은 김인우와 통화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사람을 시켜 조금 전 박민정에게 걸려 온 전화번호에 대해 조사해 보라고 했다.그리고 김인우가 보낸 동영상을 받은 후 어제 그 화장실에 들어간 검은 복장의 사람들도 알아보라고 했다.김인우가 말했다.“남준아, 어제 윤우도 화장실에 들어갔었어. 그놈들은 윤우가 들어간 뒤에 따라 들어간 거야.”“그 말은 그놈들이 원래 윤우를 노렸었는데 잘못 납치했다는 거야?”“확실하지는 않아. 만약 그놈들이 우리 원수 집안에서 보낸 사람들이라면 지금쯤 예찬이 일에 대해 말해야 하는데 연락하는 곳이 하나도 없어.”유남준은 오전에 누군가가 박민정에게 전화했던 것을 떠올렸다.“알았어.”박민정은 오늘 왠지 이상하게 마음이 불안했다.조금 전에 걸려 온 전화를 생각하면서 옆에 있는 윤우를 보자 그제야 예찬이가 생각났다.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치면서 말했다.“임신한 뒤로 머리도 멍청해진 것 같아.”박민정은 곧바로 조하랑에게 전화했다.“하랑아, 예찬이 지금 거기 있어?”김인우는 조하랑에게 아직은 박민정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박민정은 임신한 상태라 그 소식을 들으면 충격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그래서 조하랑은 박민정을 속일 수밖에 없었다.“응, 여기 있어. 왜 그래?”“예찬이 지금 뭐 하고 있어? 전화 바꿔줄래?”박민정이 물었다.“지금은 전화 받기 좀 그래. 할아버지랑 바둑 두고 있거든.”조하랑이 답했다.“그래, 알겠어.”그제야 박민정은 안심하면서 전화를 끊었다....폐공장에서 얼굴에 흉터 있는 남자는 박민정가 다시 전화하지 않자 더는 기다릴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일어나 정수미에게 전화했다.“사모님, 박민정 그 여자 자기 아들이 죽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은데요. 어젯밤에 저희가 그 여자 아들을 데려왔는데 그 여자는 찾지도 않고 오히려...”“오히려 뭐?”“오히려 김씨 가문 사람들이 아이를 찾고 있어요.”남자는 누군가 자신들이 있는 폐공장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곧바로 부하들에게 말했다.“
박민정은 몸집이 작은 박예찬이 끈에 묶여서 다리에 걸려 있는 것을 보자 당장 강에 빠질까 봐 걱정되었다.순간 그녀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박민정 씨, 저희 주인님께서 민정 씨가 진주시를 바로 떠나면 아이를 풀어주겠다고 하셨어요. 만약 민정 씨가 여기 계속 있으면 아이는 죽어요.”박민정은 고민도 하지 않고 바로 말했다.“지금 당장 떠날게요. 그러니까 아이를 풀어주세요.”하지만 남자는 박예찬을 풀어주지 않고 윤소현이 말한 대로 했다.“말만 하면 안 되죠.”박민정은 차를 몰고 다리 쪽으로 가면서 말했다.“그럼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지금 옆에 칼 있어요?”박민정은 주변을 둘러보았다.“없어요.”“그럼 뾰족한 물건을 찾아서 본인 얼굴을 긁어요.”남자는 반 평생 정수미를 따르면서 아이를 이용하여 여자 보고 얼굴을 망치라고 한 것은 처음이다.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박민정이 쉽게 동의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곧이어 수화기에서 비명을 들었다.박민정은 귀걸이를 빼고 뾰족한 부분으로 오른쪽 얼굴을 긁자 새빨간 피가 흘러내렸다.“해... 했어요. 빨리 내 아들 내려줘요! 제발요!”박민정은 상대방이 자신과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는지 몰랐지만 지금은 박예찬을 구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얼굴은 말할 필요도 없고 아이를 구할 수만 있다면 목숨도 내놓을 수 있었다.이게 바로 엄마의 본능이다.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무서울 게 없었다.“당신이 정말 긁었는지 아니면 긁는 척 만 했는지 어떻게 알아요. 동영상 찍어서 보내요.”박민정은 차를 운전하면서 동영상을 찍어서 남자에게 보냈다.남자는 동영상을 보고는 박민정의 실행력에 탄복했다.그는 당장 동영상을 윤소현에게 보냈다.윤소현은 동영상을 보더니 한없이 기뻐했다.“엄마, 이제 박민정 얼굴에 흉터가 생겼는데 어떻게 유남우를 꼬시는지 보자고요.”정수미는 담담하게 흘끗 보더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이런 상황을 자신도 예전에 겪은 적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됐어. 소현아, 이쯤에
방성원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설인하 앞에 섰고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은정아, 아빠한테 와.”방은정은 방성원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작은 두 눈 가득 망설임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설인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쪽 문이 쾅 하고 닫혔고 설인하는 당황해 외쳤다.“방성원, 당장 문 열어! 날 내보내!”방성원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겨우 이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만약 내가 안 열어주면?”설인하는 한 손으로 방은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나 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챘다.아직 어린 방은정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단순한 놀이로 착각하고 까르르 웃었다.설인하의 품이 텅 비자 그녀는 휴대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성원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방성원은 한 손으로 설인하를 가볍게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방으로 데려가요.”“네”보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감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설인하는 방성원에게 억눌린 채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방성원, 이 개자식아! 은정이를 돌려줘! 은정이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키운 내 딸이야! 넌 고작... 고작 삼 초면 끝났잖아! 대체 무슨 권리로 내 아이를 빼앗는 거냐고!”방성원은 그녀의 새로운 욕설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밖에서 안 좋은 것들만 배워온 모양이군.’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좋아, 이제 말발이 꽤나 늘었네?”그는 설인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어딜 데려가는 거야? 놓으라고!”설인하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어딜 가겠어. 네 정신 좀 차리게 하려는 거지.”방성원은 그녀를 과거 함께 지냈던 방으
박민정이 보낸 사진은 곧바로 단짝 친구들 단톡방에 반응을 불러왔다.민수아가 먼저 메시지를 남겼다.[부럽다, 여긴 어디야? 풍경 진짜 멋지다!]조하랑도 금세 답장을 보냈다.[아마 민정이랑 예찬이랑 캠핑 간 곳일걸?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살아있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안 간 것 같아.]진서연 역시 대화를 이어갔다.[저 회사 가기 싫어요... 휴가 때 우리도 꼭 놀러 가요. 진짜 오랜만에 나들이하고 싶어요.]친구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띄웠고 설인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모티콘 몇 개로 답장을 남겼다. 그러고는 곧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일에 매달렸고 잠시 한가해지기만 하면 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지금 방은정은 방성원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설인하는 이미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곧 양육권을 반드시 되찾아올 생각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고개를 들자 연지석이 어느새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연지석이 물었다.“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요?”설인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네? 무슨 말씀이시죠?”연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몇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이 서류들, 전부 오류가 있어요. 확인해봐요.”설인하가 서류를 펼쳐보니 숫자들이 엉망으로 기재돼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었다.“아...”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하지만 연지석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수정은 필요 없고 그냥 오늘은 집에 가서 쉬세요.”설인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그 말이 혹시 해고 통보는 아닐까 싶어 다급히 말했다.“부사장님,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 안 할게요.”절박함이 담긴 목소리와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
최현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눈빛 속으로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다 큰 어른이면서 내 말뜻을 모르겠어?”그녀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건가?”박민정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부끄러울 게 뭐가 있죠? 저랑 남우 씨는 줄곧 친구였을 뿐이에요.”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래? 참 신기하네. 난 아직까지 남녀 사이에 그런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유남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남준 씨, 그냥 하는 말이에요. 두 사람이야 부부니까 잘 지내면 그만이죠. 제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이 당연히 진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마음을 한층 더 편안하게 했다.“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형수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랑 민정이는 잘 지낼 거니까요.”유남준은 그렇게 답하며 오히려 최현아에게 은근히 감사함을 느꼈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해줘서.최현아의 입가가 씁쓸하게 일그러지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사라지자 박민정의 얼굴에도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귀국한 뒤로 아무도 그녀와 유남우 사이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니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다.박민정은 조용히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나를... 믿어요?”남녀가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기란 솔직히 쉽지 않을 것이다.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괜찮아요. 대답 안 해도 돼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유남준은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물론 널 믿지.”유남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 네가 그때 날 기억하지 못했던 걸
“옆모습이요?” 박민정이 조용히 물었다.“그건 내가 어렸을 때 우연히 찍은 사진이야. 예뻐 보여서 그냥 간직했지.”유남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러다 어느 날 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깨달았어. 그 사진 속 소녀가 바로 어린 시절의 너라는 걸.”박민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에요?”“당연하지.”유남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가 그 사실을 알아챘던 건 해외에 있을 때였다.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하지만 그날, 그는 박민정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녀가 나직이 말하자 유남준도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진을 오랫동안 간직해왔지만 정작 그 속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생각해 보면 박민정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첫눈에 반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의 어색함을 조금씩 지워갔다.잠시 후, 유남준이 물었다.“해외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던 거야?”박민정이 사라졌던 그 1년, 유남준은 매일같이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며 지낼까.박민정은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유남우 씨랑 해외에 있으면서 치료도 받고 최면 치료도 했어요. 그 외에는 혼자 별장에 머물렀죠.”그녀는 덤덤히 말했다.“낯선 곳에서 밖에 나가도 늘 혼자였어요.”유남준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이 밀려왔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이 짙게 스며들었다.“미안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남준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내가 무슨 고생을 한 것도 아닌걸요.”유남우가 비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의사는 존중했고 필요한 건 다 채워주었다.둘은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멀리서 최현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남준 씨, 드디어 왔네요.“민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급하게 말했다.“어머, 또 비가 오네. 우리 우산 안 가져왔잖아요.”산에 오르기 전, 날씨 예보를 확인했을 때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유남준은 서둘러 배낭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괜찮아. 비가 그치면 다시 올라가면 돼.”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예찬이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데...”“세 살짜리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박예찬은 세 살은 아니지만 겨우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마침 그녀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박민정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아이는 이미 우비를 입고 있었다.“엄마, 지금 어디예요? 비가 오고 있어요.”박민정은 주위를 비춰주며 말했다.“우린 아직 여기 정자에서 쉬고 있어. 너희는 산 정상에 도착했어?”박예찬은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박민정이 있는 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네, 저희는 도착했어요. 선생님이 비옷 나눠 주셨어요. 근데 엄마, 우산은 챙겼어요?”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거짓말을 했다.“그럼, 챙겼지.”“다행이네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요.”박예찬의 다정한 당부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조심할게.”이렇게 보니 정작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건 박예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괜히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가요. 천천히 가면 돼요.”“좋아.”유남준이 일어섰다.박민정도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지만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유남준의 넓은 품속으로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일어나서 약간
박민정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소리쳤다.“정말 괜찮아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갑작스러운 공중부양에 박민정은 깜짝 놀라 그의 옷깃을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빨리, 빨리 내려놔요!”두 사람의 다소 소란스러운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여기저기서 부러운 듯한, 혹은 질투 어린 시선이 쏟아졌고 몇몇은 빈정거리는 말도 던졌다.“정말 유난이네. 겨우 산 중턱인데 남편한테 안겨 가겠다니.”그 말을 들은 어떤 여자는 남편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나도 못 걷겠어. 나도 좀 업어주든가, 안아주든가 해.”남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자기 체중이나 생각 좀 해봐. 내가 어떻게 안아?”하지만 그런 말에도 아내를 번쩍 안아 올린 남편도 있었고 애써 힘을 내던 그는 이내 체력이 바닥나 금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뜻밖의 분위기로 웃음과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최현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유남준의 품에 안겨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박민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제발 내려놔요. 이러니까 더 불편하단 말이에요.”유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가 불편한데?”“그냥 불편해요.”박민정은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유남준은 그제야 조용히 그녀를 내려주었다.“너무 높이 올라와서 숨이 차서 그런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부모와 아이들 앞에서 한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정말 창피하기 그지없었다.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흥미를 보였는데 작은 여자아이가 옆의 남자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나중에 우리 결혼하고 내가 힘들다고 하면 너도 나 안아줘야 해.”남자아이는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다.“걱정 마!”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이 어린애들이 벌써 결혼 이야기를 하다니.’유남준은 그녀가 말없이 있는 걸 보
조민혁은 아내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좁게 생각했어. 당신이랑 동민이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네.”한가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어요. 나도, 동민이도 다 이해해요.”부부는 이렇게 화해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어제의 일이 조동민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를.조동민은 유지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지훈은 이것저것 지시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라고 했고 조동민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랐다.둘이 가파른 언덕에 이르렀을 때 조동민의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고 그는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지훈아, 저기 좀 봐.”“뭐가 있는데?”유지훈이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피자 조동민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웠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마치 유지훈을 밀어버리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동민아, 유지훈! 선생님이 산에 올라가자고 하셔!”박예찬이었다.조동민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으나 속으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조금만 더 빨랐더라면...’유지훈은 돌아서며 말했다.“알겠어, 가자.”그는 앞장서 걸었고 조동민은 묵묵히 뒤따랐다.박예찬은 그들이 출발하자 조동민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아까... 유지훈을 밀려고 했지?”조동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예찬아, 제발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마.”박예찬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내가 그런 고자질쟁이로 보여?”조동민은 고개를 저은 뒤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냥...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한 번쯤은 혼쭐을 내주고 싶었어.”박예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야.”“왜? 밀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조동민은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박예찬은 침착하게 설명했다.“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유지훈이 다치면 누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까? 당연히 그 옆에 있던 너야.
박예찬은 조동민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그래, 알겠어.”“고마워, 예찬아!”조동민은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지훈은 조동민의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조동민, 너 또 까부는 거야?”조동민은 젓가락을 꼭 쥐었지만 박예찬이 나서기 직전 먼저 웃으며 말했다.“지훈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화풀어, 응?”유지훈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이 녀석,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분명 전엔 자신의 심부름꾼 노릇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는데.조동민은 이제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다. 괜한 고집은 소용없다는 걸, 자신은 멋대로 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진짜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유지훈이 묻자 조동민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른 애들은 지훈이 너랑 안 놀아줘도 난 같이 놀아줄게.”박예찬은 이렇게 급변하는 조동민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환경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법이다.유지훈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다.“그럼 밥 그만 먹고 나랑 놀러 가.”“응!”조동민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이따가 다시 올게.”“어딜 가? 가지 마!”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소리치자 조동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갈게.”그렇게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최현아가 식당으로 들어왔고 유지훈과 조동민이 화해한 모습을 보고 조동민의 부모에게 팔짱을 낀 채 비웃듯 말했다.“보셨죠? 우리 지훈이가 얼마나 속이 넓은지. 당신 아들이랑 다시 잘 지내잖아요.”하지만 조동민의 부모는 이제 최현아에게 굳이 좋은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이제는 그들 뒤에 김씨 집안이 버티고 있으니.조동민의 어머니, 한가영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근데요, 아까 보니까 다른 애들은 지훈이랑 안 놀려고 하던데요? 결국 우리 동민이만 지훈이를 마음 넓게 받아주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