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해가 지나자 눈은 더욱 두껍게 쌓였다. 한 월셋집 안에서 바깥 형형색색의 불빛을 바라보던 이지원은 유난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분명히 그녀도 화려하게 빛나며 사람들 속에 서 있을 수 있었는데, 모두 박민정의 탓이었다. 기사와 실시간 검색어가 사라진 것을 보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예전처럼 무명이 되어 일반인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이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발신인은 유남우였다. 그녀는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남우 씨.”“사진과 실시간 검색어도 줬는데 언제 박민정을 찾아갈 거예요?”유남우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남우 씨, 제가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두려워요.”“뭐가 두려워요?”“김인우가 자주 유남준을 찾아가는 걸 봤거든요. 김인우가 저를 볼까 봐 무서워요...”이지원은 사실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후원자가 필요했다. 유남우가 그녀를 도시의 구석진 곳에 숨어 죽은 사람처럼 살게 하는 방식에 그녀는 이미 진저리가 났다.처음에는 유남우가 왜 자기를 시켜 박민정과 유남준의 사이를 파괴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유남우가 박민정을 좋아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그렇다면 당연히 유남우를 제대로 이용해야 했다.그러나 유남우는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이지원의 뜻을 알았다.“걱정하지 마요. 내가 있는 한 김인우가 지원 씨를 봐도 어떻게 하진 못할 거예요.”“좋아요. 내일부터 계획해 볼게요.”“네.”유남우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에 앉아 홍주영에게 뜨거운 물을 따라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갑자기 자신이 홍주영에게 며칠 휴가 줬던 것이 떠올랐다.그래서 다른 비서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뜨거운 물을 유남우 앞에 내려놓았다. 잔을 들고 있는 손은 예쁜 네일을 하고 있었다.유남우는 고개를 들자 윤소현의 예쁜 얼굴을 마주했다.“여긴 왜 왔어?”“아줌마한테 남우 씨가 회사에 출근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
정수미는 윤소현을 달랜 뒤에야 떠났다.보육원장은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정 대표님, 지난 수십 년간 후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 대표님께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에요.”정수미는 그 말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모르죠.”원장이 그녀를 위로했다.“아직 찾지 못했지만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예요. 절대 낙담하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소식이 있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정수미가 떠난 뒤 원장 옆에 있던 선생님이 입을 뗐다.“정 대표님 따님 찾으신 지 20년도 넘으셨죠? 어쩌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대요?”원장은 탄식했다.“정 대표님이 예전에 굉장히 힘드셨거든. 그때는 지금과 달리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어. 정 대표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데려가서 한겨울에 우리 보육원 문 앞에 버리고 떠났었어. 내가 그때 그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일찌감치 얼어 죽었을 거야.”선생님은 의아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찾을 수 없는 걸까요?”“아이가 입양을 갔는데 입양한 사람이 가짜 정보를 줬어. 아마도 친부모가 찾을까 봐 두려웠나 보지.”원장이 말했다.“그렇군요.”정수미는 당시 딸을 낳고서 출혈이 심해 더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그녀는 힘들게 정씨 일가에서 도망쳐 나왔고 성형한 뒤 해외에서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씨 일가를 삼켰다.그녀를 모함한 사람들은 다들 처참하게 죽었다.정수미는 차에 앉아 윤소현이 보낸 사진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윤소현은 비록 그녀의 친딸은 아니지만, 정수미는 그녀를 친딸처럼 여겼다.윤소현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누군가 그녀의 딸을 괴롭게 한다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우선 부하에게 연락했다.“유씨 일가와의 모든 협력을 중지해.”유남우는 유씨 일가에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녀의 딸을 힘들게 했다.명령을 내린 뒤 정소미는 어떻게 박민정을 상대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박
작곡을 마치고 박윤우의 방으로 들어간 박민정은 이불 커버가 바뀐 걸 발견했다.“윤우야, 침대 시트랑 이불 커버 네가 바꾼 거야?”“아저씨가 도와줬어.”“그러면 더러워진 이불 커버는?”“아저씨가 더러워진 이불 커버는 버려도 된다고 했어.”“...”박민정은 허리를 숙이고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앞으로 이불 커버가 더러워지면 엄마한테 얘기해. 엄마가 바꿔줄게. 더러워져도 버리지는 마. 깨끗이 씻으면 계속 쓸 수 있으니까. 이 세상에는 이불 커버조차 없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까 말이야.”“나도 아저씨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박윤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더니 유남준과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비벽이 심한 그의 모습이 박윤우에게 영향을 줄까 봐 걱정되었다.“그래, 알겠어. 일찍 쉬어.”박민정은 박윤우의 이마에 뽀뽀했다.떠나기 직전 박윤우는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아저씨는 좋은 마음으로 나 도와주려고 이불 커버 바꿔준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엄마. 아저씨를 혼내면 안 돼.”박윤우는 유남준을 팔았다는 사실에 조금 찔려서 처음으로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방에서 나간 뒤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그녀는 박윤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은 도와주려고 그런 것일 테니 그를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세수를 마친 뒤 방으로 돌아가서 쉬려는데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민정 씨, 인터넷에서 떠도는 사진들 다 봤죠? 남준 오빠 나한테 언제 돌려줄 거예요? 남준 오빠는 민정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기억을 되찾는다면 절대 민정 씨랑 계속 만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지원이었다.박민정은 대답하지 않았고 곧 이지원에게서 또 문자가 도착했다.[민정 씨한테 아이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이혼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민정 씨가 나보다 더 더럽지 않아요? 오빠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절대 민정 씨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차갑게 웃으며 답장을 보
박민정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팔뚝을 콱 깨물었다.별로 힘을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팠다. 유남준은 그녀의 등을 살살 토닥였다.“내가 꿈속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박민정은 천천히 입에 힘을 풀었다. 조금 목이 메었다.“아이를 지우라고 했어요.”“바보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비록 박민정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 아이가 그의 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자신의 아이라고 확신했다.그런데 어떻게 박민정에게 그들의 아이를 지우라고 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유남준 씨, 지금 나랑 약속해요. 기억을 되찾아도 절대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요. 예찬이랑 윤우도 포함이에요.”“그래, 약속할게. 절대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게.”유남준은 이미 기억을 되찾았다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렇게 얘기했다가 박민정이 떠나겠다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박민정은 기억을 잃고 시력을 잃은 그를 애잔하게 여겨서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유남준의 약속을 얻어낸 박민정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여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다시 잠이 들었다....반대로 이지원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박민정이 보낸 답장을 보면서 술로 헛헛한 속을 달랬다.그녀의 친구 하예솔이 그녀를 찾아왔다. 바닥을 가득 채운 술병을 본 그녀는 걱정스레 말했다.“지원아,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이지원은 하예솔이 찾아오자 곧바로 그녀를 안았다.“예솔아, 나 어떡해? 남준 오빠 이제 나 안 좋아해. 아무도 날 안 좋아해.”유남준과 김인우는 그녀를 무시했다. 그리고 유남우는 너무 위험했다. 그녀는 반드시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새로운 남자를 찾아야 했다.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유남준도 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갈지도 모른다고 한 유남우의 말 때문이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에게 초대장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유남우는 초대장조차 얻지 못하는 그녀에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하예솔은 마
사업 제국을 재건하고 싶었던 유남준은 다른 사업가들과 교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비즈니스 파티는 단순히 술만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네, 그럼 제가 더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함께 동행하겠습니다.”서다희가 말했다.권씨 가문 어르신들은 과거 유남준에게 손을 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유남우를 유남준으로 착각했었다.유남준은 원래도 몸이 약했던 데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후 치료를 위해 해외로 보내졌다.이후 유남준은 유앤케이 그룹을 점차 확장했고, 권씨 가문의 윗세대들은 그에 의해 하나둘씩 제거돼 이제 남은 것은 무능한 사람들뿐이었다.권해신은 살기 위해 유남준에게 무릎까지 꿇은 적이 있었다.유남준이 모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진주의 다른 가문에서도 두려움에 똘똘 뭉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옛말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았나.“그래.” 유남준이 대답하자 뭔가 떠오른 서다희가 다시 물었다.“다들 여자 파트너가 있는데 사모님 모셔 올까요?”그는 과거 박민정이 외부 행사에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 유남준에게 화를 냈던 게 떠올랐다.지금이 바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적기였다.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도 침묵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어.”서다희는 조금 당황했다.“왜요, 지금이 사모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은데요.”“내가 지금 파티에 나타나면 상류층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유남준의 질문에 서다희는 멈칫했다. 유남준이 이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간과했다.“분명 수군거릴 거야. 민정이 데려가면 같이 그 이상한 시선을 받겠지.”유남준이 말했다.지금껏 서다희는 앞을 못 보는데도 침착하고 차분한 상사의 모습에 그가 자신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가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잘 살아갈 뿐이었다.“맞습니다. 제가 미처 그 생각
시즌 호텔에서 진행된 파티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김인우가 박예찬을 데리고 나온 건 아이에게 일찌감치 사업가들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는 김훈의 말 때문이었다.김인우는 자신의 다리 보다도 짧은 꼬맹이를 바라보았다.“자식, 이따가 아빠라고 불러 알았어? 삼촌이라고 하지 말고.”박예찬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뭐라고 부르라고요?”“아빠.”“오냐.”“...”유남준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바라보며 그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꼬맹이, 아직 어릴 때 때려야지.왠지 모르겠지만 예찬이를 때리는 순간 동년을 되찾은 기분이었다.어렸을 때 툭하면 유남준에게 맞았었는데…엉덩이를 맞은 박예찬은 얼굴을 붉히며 곧바로 김인우를 외면했다.김인우는 아이를 데리고 대충 사람들에게 인사시킨 후 구석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는 이런 가식이 넘쳐나는 자리가 싫었다.그에게 잘 보이려고 다가온 사람들도 짜증스럽게 쫓아냈다.어린 예찬이는 그를 따라다니다가 문득 가녀린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건 이지원, 그 나쁜 아줌마인데?“삼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혼자 가.” 김인우가 말하자 박예찬은 눈을 흘겼다.이 남자가 애를 어떻게 챙기는 거야. 난 이제 겨우 네 살인데 납치라도 되면 어쩌려고?박예찬은 혼자 나갔고 김인우는 걱정하지 않았다.예찬이는 똑똑했기에 잃어버릴 일이 없었으니까.하지만 그는 잠깐의 방심이 곧 엄청난 후회를 몰고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파티에 막 도착한 이지원은 김인우를 발견했고, 유남우가 장담했음에도 여전히 겁에 질려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었다.하예솔의 약혼자이자 권씨 가의 셋째 아들 권유진은 이지원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이지원은 권유진을 보자 여린 모습으로 매혹적인 눈빛을 보냈다.“권유진 씨, 오랜만이네요.”눈앞에 있는 남자가 친구의 약혼자라는 사실도 있었나.여자에 대해 잘 아는 권유진은 이지원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대화를 나눴다
파티에는 유남우도 있었고, 그의 옆에는 정수미가 서 있었다.“남우야, 협업은 잠시 보류하자. 넌 아직 어려서 미처 생각지 못할 수도 있어. 조금 더 경험을 쌓으면 그때 다시 협업해.”정수미의 의도는 분명했다. 생각지 못한 부분이란 그녀의 딸인 윤소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유남우도 말뜻을 알아차리고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정수미를 배웅했다.그때 권해신이 그에게 다가왔다.“남우야, 정말 좋은 사돈을 만났네. 윤씨 집안이 평범하긴 해도 윤소현 어머니는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지.”유남우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두 사람이 이쪽에서 얘기를 나누자 반대편에 있던 서다희가 이를 알아차리고 유남준에게 조용히 알렸다.“대표님, 둘째 도련님과 권해신이 함께 있습니다.”유씨 가문과 권씨 가문은 숙명의 라이벌이고 권해신은 유남준을 무척 증오했다.어쩐지 요즘 들어 유남우의 움직임이 수상했다.“사람 보내 지켜보게 해.”“네.”유남준은 전에 협력했던 사람들 중 누가 진심이고 누가 가식이었는지 구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예전에 그가 챙겨주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여전히 유남우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이지원은 이미 유남준을 발견했고 그를 보자마자 유남우가 지시한 걸 떠올리며 손에 든 와인잔을 꽉 쥐었다.동시에 유남우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은 당신한테 달렸어요.”“좋아요.”유남우는 전화를 끊은 후 권해신에게 말했다.“유남준 옆에 있는 서다희 보통 사람 아니니까 잘 지켜봐.”권해신은 피식 웃었다.“걱정 마. 연회 음식에 한 번이라도 손이 닿았으면 꼼짝없이 걸린 거니까. 게다가 우린 다른 것도 준비하지 않았어?”권해신은 이런 수작에 도가 텄다.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모든 이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배짱이 부족해 이렇듯 비열한 수작만 부리는 것이었다.권해신은 의아했다. “남우야, 그냥 바로 죽이면 유씨 가문은 네 것이 되잖아.”그도 자신의 둘째 동생을 죽였다.유남우의 얼굴이
아이가 남의 손에 있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정수미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윤우를 데리고 화장실로 향한 박민정은 아이를 남자 화장실 문 앞까지 데려다준 뒤 밖에서 기다렸다.얼마 지나지 않아 키 큰 남자 몇 명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마침 화장실 안에 있던 박예찬도 시간이 지나자 중년 남자도 갔을 거라 생각하며 밖으로 나오는데 남자 세 명과 딱 마주쳤다.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한 명이 약에 젖은 천으로 입과 코를 막았다.박예찬은 도움을 청하지도 못하고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남자들은 검은 외투를 벗어 그를 감싸안은 채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은 다음 나오려던 윤우는 예찬이를 데리러 온 김인우에게 붙잡혔다.“이 자식아, 무슨 화장실에 한 시간 넘게 있어. 빠진 줄 알았잖아.”그는 박윤우가 입은 평범한 옷을 보고 이상한 듯 물었다.“왜 옷까지 갈아입었어? “이 옷은 어디서 난 거야, 너무 유치한데.”박윤우는 눈앞에 다소 취한 듯 멍청한 아저씨를 바라보았다.“사람 잘못 보셨어요.”김인우는 당황했다.“뭐?”“전 윤우예요, 예찬이가 아니라.”박윤우는 눈을 흘길 뻔했다. 자신과 형이 얼마나 다른데, 그것도 알아보지 못하다니.“내 옷 안 놔주면 소리 지를 거예요.”박윤우는 그가 손을 놓지 않자 계속해서 말했다.김인우가 자세히 보니 예찬이와 꼭 닮은 외모였지만 애늙은이처럼 행동하지는 않았다.그는 놓아주지 않고 화가 나서 붉어진 윤우의 얼굴을 꼬집으며 물었다.“예찬이는 어딨어?”박윤우는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자신의 얼굴을 만지는 게 싫었고, 눈빛에는 혐오감이 가득했다.“어디 있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전화하면 되잖아요. 쳇, 이거 놔요. 진짜 소리 질러요.”김인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눈앞에 있는 윤우가 예찬이보다 더 재밌는 것 같았다.“안 놔주면 어떻게 소리를 지를 건데?”“엄마!!!”박윤우가 소리치자 남자 화장실에서 들려오는 윤우의 비명소리에 박민정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달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