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정은 순간 움찔하며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뭐 하는 거야?”유남준은 대답하지 않고 곧바로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온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박민정은 유남준의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듯 여전히 멈추지 않았다. 박민정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시울은 분노로 붉어지고 입안에서는 피비린내가 났다.“싫어?”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잡은 유남준은 손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여러 번 문질렀다. 박민정은 그의 손길을 피했다.“내가 다른 사람이랑 잔 사진을 보면 어떻게 할 거예요?”이미 난리를 치고도 남았을 거다. 아니나 다를까 유남준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침묵하자 박민정은 그의 어깨를 깨물었다. 지난번에 그녀가 물었던 자국이 아직도 어깨에 남아있었다.“왜 대답하지 않아요?”박민정이 물었다. 유남준은 다시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그 자식을 죽여버릴 거야.”박민정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난 어떻게 할 건데요?”유남준은 흠칫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말했다.“널 가둬두고 다리를 확 부러뜨릴 버릴 거야.”박민정은 그가 농담하는 줄 알았고 더 이상 이 문제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일어날래요.”그녀는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았다. 유남준은 그제야 몸을 비키고 진지하게 물었다.“박민호는 왜 널 찾아온 거야?”“아무것도 아니에요. 한수민이 꾀병을 핑계로 삼아 보석으로 풀려났다는 말만 했어요.”박민정은 간결하게 말했다. 한수민이 나이가 많지 않았더라면 임신을 통해 보석 출소했을지도 모른다.“요즘은 가짜 병력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텐데 밝혀내기도 어렵겠지.”유남준은 천천히 말했다.“김인우더러 알아보라고 할게.””그럴 필요 없어요.”박민정은 얼른 거절했다.“인우 씨한테 신세를 지고 싶지 않아요.” “인우가 너한테 목숨을 빚진 거잖아. 이런 작은 일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해야지.”“다른 방법을 생각 중이에요.”박민정은 김인우의 도움을
진주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해가 지나자 눈은 더욱 두껍게 쌓였다. 한 월셋집 안에서 바깥 형형색색의 불빛을 바라보던 이지원은 유난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분명히 그녀도 화려하게 빛나며 사람들 속에 서 있을 수 있었는데, 모두 박민정의 탓이었다. 기사와 실시간 검색어가 사라진 것을 보며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정말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다시 예전처럼 무명이 되어 일반인으로 살아야 하는 거야?”이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발신인은 유남우였다. 그녀는 긴장하며 전화를 받았다.“남우 씨.”“사진과 실시간 검색어도 줬는데 언제 박민정을 찾아갈 거예요?”유남우는 기다릴 수가 없었다.“남우 씨, 제가 박민정을 찾아가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정말 두려워요.”“뭐가 두려워요?”“김인우가 자주 유남준을 찾아가는 걸 봤거든요. 김인우가 저를 볼까 봐 무서워요...”이지원은 사실 자신을 안전하게 보호해 줄 후원자가 필요했다. 유남우가 그녀를 도시의 구석진 곳에 숨어 죽은 사람처럼 살게 하는 방식에 그녀는 이미 진저리가 났다.처음에는 유남우가 왜 자기를 시켜 박민정과 유남준의 사이를 파괴하려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녀는 유남우가 박민정을 좋아해서 그랬다는 것을 알았다.그렇다면 당연히 유남우를 제대로 이용해야 했다.그러나 유남우는 멍청하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이지원의 뜻을 알았다.“걱정하지 마요. 내가 있는 한 김인우가 지원 씨를 봐도 어떻게 하진 못할 거예요.”“좋아요. 내일부터 계획해 볼게요.”“네.”유남우는 전화를 끊고 사무실에 앉아 홍주영에게 뜨거운 물을 따라 달라고 부탁하려 했는데 갑자기 자신이 홍주영에게 며칠 휴가 줬던 것이 떠올랐다.그래서 다른 비서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비서가 뜨거운 물을 유남우 앞에 내려놓았다. 잔을 들고 있는 손은 예쁜 네일을 하고 있었다.유남우는 고개를 들자 윤소현의 예쁜 얼굴을 마주했다.“여긴 왜 왔어?”“아줌마한테 남우 씨가 회사에 출근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보
정수미는 윤소현을 달랜 뒤에야 떠났다.보육원장은 자애로운 얼굴로 말했다.“정 대표님, 지난 수십 년간 후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정 대표님께 도움이 되지 못해 죄송할 따름이에요.”정수미는 그 말에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어쩌면 이미 오래전에 죽었을지도 모르죠.”원장이 그녀를 위로했다.“아직 찾지 못했지만 분명 어딘가에 살아있을 거예요. 절대 낙담하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소식이 있다면 바로 연락드릴게요.”정수미는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요.”정수미가 떠난 뒤 원장 옆에 있던 선생님이 입을 뗐다.“정 대표님 따님 찾으신 지 20년도 넘으셨죠? 어쩌다가 아이를 잃어버렸대요?”원장은 탄식했다.“정 대표님이 예전에 굉장히 힘드셨거든. 그때는 지금과 달리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어. 정 대표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다른 사람이 데려가서 한겨울에 우리 보육원 문 앞에 버리고 떠났었어. 내가 그때 그 아이를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일찌감치 얼어 죽었을 거야.”선생님은 의아했다.“그런데 지금은 왜 찾을 수 없는 걸까요?”“아이가 입양을 갔는데 입양한 사람이 가짜 정보를 줬어. 아마도 친부모가 찾을까 봐 두려웠나 보지.”원장이 말했다.“그렇군요.”정수미는 당시 딸을 낳고서 출혈이 심해 더는 아이를 가질 수가 없었다.그녀는 힘들게 정씨 일가에서 도망쳐 나왔고 성형한 뒤 해외에서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씨 일가를 삼켰다.그녀를 모함한 사람들은 다들 처참하게 죽었다.정수미는 차에 앉아 윤소현이 보낸 사진을 바라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윤소현은 비록 그녀의 친딸은 아니지만, 정수미는 그녀를 친딸처럼 여겼다.윤소현은 그녀에게 전부였다. 누군가 그녀의 딸을 괴롭게 한다면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할 생각이었다.그녀는 우선 부하에게 연락했다.“유씨 일가와의 모든 협력을 중지해.”유남우는 유씨 일가에서 자리를 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녀의 딸을 힘들게 했다.명령을 내린 뒤 정소미는 어떻게 박민정을 상대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박
작곡을 마치고 박윤우의 방으로 들어간 박민정은 이불 커버가 바뀐 걸 발견했다.“윤우야, 침대 시트랑 이불 커버 네가 바꾼 거야?”“아저씨가 도와줬어.”“그러면 더러워진 이불 커버는?”“아저씨가 더러워진 이불 커버는 버려도 된다고 했어.”“...”박민정은 허리를 숙이고 참을성 있게 설명했다.“앞으로 이불 커버가 더러워지면 엄마한테 얘기해. 엄마가 바꿔줄게. 더러워져도 버리지는 마. 깨끗이 씻으면 계속 쓸 수 있으니까. 이 세상에는 이불 커버조차 없는 사람이 아주 많으니까 말이야.”“나도 아저씨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박윤우는 진지하게 대답했다.박민정은 그 말을 듣더니 유남준과 대화를 나눠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낭비벽이 심한 그의 모습이 박윤우에게 영향을 줄까 봐 걱정되었다.“그래, 알겠어. 일찍 쉬어.”박민정은 박윤우의 이마에 뽀뽀했다.떠나기 직전 박윤우는 박민정의 손을 잡았다.“아저씨는 좋은 마음으로 나 도와주려고 이불 커버 바꿔준 거야. 그러니까 화내지 마, 엄마. 아저씨를 혼내면 안 돼.”박윤우는 유남준을 팔았다는 사실에 조금 찔려서 처음으로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박민정은 고개를 끄덕였다.“응, 알겠어.”방에서 나간 뒤 박민정은 조심스럽게 문을 닫았다.그녀는 박윤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유남준은 도와주려고 그런 것일 테니 그를 책망할 생각은 없었다.세수를 마친 뒤 방으로 돌아가서 쉬려는데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민정 씨, 인터넷에서 떠도는 사진들 다 봤죠? 남준 오빠 나한테 언제 돌려줄 거예요? 남준 오빠는 민정 씨를 사랑하지 않아요. 기억을 되찾는다면 절대 민정 씨랑 계속 만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이지원이었다.박민정은 대답하지 않았고 곧 이지원에게서 또 문자가 도착했다.[민정 씨한테 아이가 있다는 거 알고 있어요. 이혼하지도 않았으면서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진 민정 씨가 나보다 더 더럽지 않아요? 오빠가 기억을 되찾는다면 절대 민정 씨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박민정은 차갑게 웃으며 답장을 보
박민정은 사양하지 않고 그의 팔뚝을 콱 깨물었다.별로 힘을 쓰지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은 아팠다. 유남준은 그녀의 등을 살살 토닥였다.“내가 꿈속에서 무슨 짓을 한 거야?”박민정은 천천히 입에 힘을 풀었다. 조금 목이 메었다.“아이를 지우라고 했어요.”“바보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비록 박민정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두 아이가 그의 아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았지만, 유남준은 자신의 아이라고 확신했다.그런데 어떻게 박민정에게 그들의 아이를 지우라고 할 수 있겠는가?박민정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유남준 씨, 지금 나랑 약속해요. 기억을 되찾아도 절대 아이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고요. 예찬이랑 윤우도 포함이에요.”“그래, 약속할게. 절대 아이들을 다치게 하지 않을게.”유남준은 이미 기억을 되찾았다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그러나 그렇게 얘기했다가 박민정이 떠나겠다고 하면 어쩐단 말인가?박민정은 기억을 잃고 시력을 잃은 그를 애잔하게 여겨서 이곳에 남아있는 것일 텐데 말이다.유남준의 약속을 얻어낸 박민정은 그제야 조금 마음이 놓여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다시 잠이 들었다....반대로 이지원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녀는 박민정이 보낸 답장을 보면서 술로 헛헛한 속을 달랬다.그녀의 친구 하예솔이 그녀를 찾아왔다. 바닥을 가득 채운 술병을 본 그녀는 걱정스레 말했다.“지원아, 술을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이지원은 하예솔이 찾아오자 곧바로 그녀를 안았다.“예솔아, 나 어떡해? 남준 오빠 이제 나 안 좋아해. 아무도 날 안 좋아해.”유남준과 김인우는 그녀를 무시했다. 그리고 유남우는 너무 위험했다. 그녀는 반드시 돈도 많고 권력도 있는 새로운 남자를 찾아야 했다.그리고 또 다른 이유는 유남준도 파티에 초대를 받아서 갈지도 모른다고 한 유남우의 말 때문이었다.그러나 유남우는 그녀에게 초대장을 주지 않고 그녀에게 알아서 하라고 했다.유남우는 초대장조차 얻지 못하는 그녀에게 시간을 허비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하예솔은 마
사업 제국을 재건하고 싶었던 유남준은 다른 사업가들과 교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비즈니스 파티는 단순히 술만 마시는 자리가 아니었다.“네, 그럼 제가 더 많은 사람들을 보내고 함께 동행하겠습니다.”서다희가 말했다.권씨 가문 어르신들은 과거 유남준에게 손을 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유남우를 유남준으로 착각했었다.유남준은 원래도 몸이 약했던 데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후 치료를 위해 해외로 보내졌다.이후 유남준은 유앤케이 그룹을 점차 확장했고, 권씨 가문의 윗세대들은 그에 의해 하나둘씩 제거돼 이제 남은 것은 무능한 사람들뿐이었다.권해신은 살기 위해 유남준에게 무릎까지 꿇은 적이 있었다.유남준이 모두를 죽이지 않은 것은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진주의 다른 가문에서도 두려움에 똘똘 뭉칠까 봐 걱정되었던 것이다.옛말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하지 않았나.“그래.” 유남준이 대답하자 뭔가 떠오른 서다희가 다시 물었다.“다들 여자 파트너가 있는데 사모님 모셔 올까요?”그는 과거 박민정이 외부 행사에 자신을 데려가지 않는 유남준에게 화를 냈던 게 떠올랐다.지금이 바로 그것을 만회할 수 있는 적기였다.유남준은 그 말을 듣고도 침묵하다가 이윽고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어.”서다희는 조금 당황했다.“왜요, 지금이 사모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은데요.”“내가 지금 파티에 나타나면 상류층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 같아?”유남준의 질문에 서다희는 멈칫했다. 유남준이 이제 앞을 볼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라는 것을 간과했다.“분명 수군거릴 거야. 민정이 데려가면 같이 그 이상한 시선을 받겠지.”유남준이 말했다.지금껏 서다희는 앞을 못 보는데도 침착하고 차분한 상사의 모습에 그가 자신의 눈을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그런데 그가 자신이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무척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다만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빠르게 이성을 되찾고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잘 살아갈 뿐이었다.“맞습니다. 제가 미처 그 생각
시즌 호텔에서 진행된 파티에는 낯익은 얼굴들이 꽤나 많이 보였다.김인우가 박예찬을 데리고 나온 건 아이에게 일찌감치 사업가들을 만나게 해줘야 한다는 김훈의 말 때문이었다.김인우는 자신의 다리 보다도 짧은 꼬맹이를 바라보았다.“자식, 이따가 아빠라고 불러 알았어? 삼촌이라고 하지 말고.”박예찬은 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뭐라고 부르라고요?”“아빠.”“오냐.”“...”유남준을 쏙 빼닮은 박예찬을 바라보며 그는 아이의 엉덩이를 때렸다.꼬맹이, 아직 어릴 때 때려야지.왠지 모르겠지만 예찬이를 때리는 순간 동년을 되찾은 기분이었다.어렸을 때 툭하면 유남준에게 맞았었는데…엉덩이를 맞은 박예찬은 얼굴을 붉히며 곧바로 김인우를 외면했다.김인우는 아이를 데리고 대충 사람들에게 인사시킨 후 구석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는 이런 가식이 넘쳐나는 자리가 싫었다.그에게 잘 보이려고 다가온 사람들도 짜증스럽게 쫓아냈다.어린 예찬이는 그를 따라다니다가 문득 가녀린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건 이지원, 그 나쁜 아줌마인데?“삼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혼자 가.” 김인우가 말하자 박예찬은 눈을 흘겼다.이 남자가 애를 어떻게 챙기는 거야. 난 이제 겨우 네 살인데 납치라도 되면 어쩌려고?박예찬은 혼자 나갔고 김인우는 걱정하지 않았다.예찬이는 똑똑했기에 잃어버릴 일이 없었으니까.하지만 그는 잠깐의 방심이 곧 엄청난 후회를 몰고 올 거라 예상하지 못했다.파티에 막 도착한 이지원은 김인우를 발견했고, 유남우가 장담했음에도 여전히 겁에 질려 일부러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었다.하예솔의 약혼자이자 권씨 가의 셋째 아들 권유진은 이지원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이지원 씨, 오랜만이네요.”이지원은 권유진을 보자 여린 모습으로 매혹적인 눈빛을 보냈다.“권유진 씨, 오랜만이네요.”눈앞에 있는 남자가 친구의 약혼자라는 사실도 있었나.여자에 대해 잘 아는 권유진은 이지원이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리고 대화를 나눴다
파티에는 유남우도 있었고, 그의 옆에는 정수미가 서 있었다.“남우야, 협업은 잠시 보류하자. 넌 아직 어려서 미처 생각지 못할 수도 있어. 조금 더 경험을 쌓으면 그때 다시 협업해.”정수미의 의도는 분명했다. 생각지 못한 부분이란 그녀의 딸인 윤소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유남우도 말뜻을 알아차리고 여전히 온화한 표정으로 정수미를 배웅했다.그때 권해신이 그에게 다가왔다.“남우야, 정말 좋은 사돈을 만났네. 윤씨 집안이 평범하긴 해도 윤소현 어머니는 보이는 것처럼 단순하지 않지.”유남우는 미소만 지을 뿐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두 사람이 이쪽에서 얘기를 나누자 반대편에 있던 서다희가 이를 알아차리고 유남준에게 조용히 알렸다.“대표님, 둘째 도련님과 권해신이 함께 있습니다.”유씨 가문과 권씨 가문은 숙명의 라이벌이고 권해신은 유남준을 무척 증오했다.어쩐지 요즘 들어 유남우의 움직임이 수상했다.“사람 보내 지켜보게 해.”“네.”유남준은 전에 협력했던 사람들 중 누가 진심이고 누가 가식이었는지 구분하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이었다.예전에 그가 챙겨주었던 사람들 중 일부는 여전히 유남우의 눈치를 보지 않고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이지원은 이미 유남준을 발견했고 그를 보자마자 유남우가 지시한 걸 떠올리며 손에 든 와인잔을 꽉 쥐었다.동시에 유남우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밤은 당신한테 달렸어요.”“좋아요.”유남우는 전화를 끊은 후 권해신에게 말했다.“유남준 옆에 있는 서다희 보통 사람 아니니까 잘 지켜봐.”권해신은 피식 웃었다.“걱정 마. 연회 음식에 한 번이라도 손이 닿았으면 꼼짝없이 걸린 거니까. 게다가 우린 다른 것도 준비하지 않았어?”권해신은 이런 수작에 도가 텄다.그는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모든 이들을 죽여버리고 싶었다.하지만 배짱이 부족해 이렇듯 비열한 수작만 부리는 것이었다.권해신은 의아했다. “남우야, 그냥 바로 죽이면 유씨 가문은 네 것이 되잖아.”그도 자신의 둘째 동생을 죽였다.유남우의 얼굴이
방성원이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일이었다.그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설인하 앞에 섰고 차가운 눈빛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은정아, 아빠한테 와.”방은정은 방성원의 손길을 멍하니 바라보며 어쩔 줄 몰라 했는데 작은 두 눈 가득 망설임과 혼란이 서려 있었다.설인하는 본능적으로 아이를 더 꽉 끌어안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뒤쪽 문이 쾅 하고 닫혔고 설인하는 당황해 외쳤다.“방성원, 당장 문 열어! 날 내보내!”방성원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다.겨우 이 안으로 끌어들였는데 다시 나가게 해달라고?“만약 내가 안 열어주면?”설인하는 한 손으로 방은정을 안고 다른 손으로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그러나 방성원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품에서 아이를 낚아챘다.아직 어린 방은정은 무슨 상황인지도 모른 채 단순한 놀이로 착각하고 까르르 웃었다.설인하의 품이 텅 비자 그녀는 휴대폰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방성원의 팔에서 아이를 빼앗으려 달려들었다. 하지만 한 여자가 성인 남성을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방성원은 한 손으로 설인하를 가볍게 제압한 채 다른 손으로 아이를 보모에게 넘겼다.“방으로 데려가요.”“네”보모는 아이를 품에 안고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고 감히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설인하는 방성원에게 억눌린 채 그 광경을 눈앞에서 지켜봐야 했다.그녀는 분노에 치를 떨며 외쳤다.“방성원, 이 개자식아! 은정이를 돌려줘! 은정이는 내가 열 달 동안 품어 키운 내 딸이야! 넌 고작... 고작 삼 초면 끝났잖아! 대체 무슨 권리로 내 아이를 빼앗는 거냐고!”방성원은 그녀의 새로운 욕설에 어이없다는 듯 웃음이 새어 나왔다.‘밖에서 안 좋은 것들만 배워온 모양이군.’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좋아, 이제 말발이 꽤나 늘었네?”그는 설인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어딜 데려가는 거야? 놓으라고!”설인하는 버둥거리며 저항했지만 소용없었다.“어딜 가겠어. 네 정신 좀 차리게 하려는 거지.”방성원은 그녀를 과거 함께 지냈던 방으
박민정이 보낸 사진은 곧바로 단짝 친구들 단톡방에 반응을 불러왔다.민수아가 먼저 메시지를 남겼다.[부럽다, 여긴 어디야? 풍경 진짜 멋지다!]조하랑도 금세 답장을 보냈다.[아마 민정이랑 예찬이랑 캠핑 간 곳일걸? 자연 그대로의 느낌이 살아있네. 아직 사람들이 많이 안 간 것 같아.]진서연 역시 대화를 이어갔다.[저 회사 가기 싫어요... 휴가 때 우리도 꼭 놀러 가요. 진짜 오랜만에 나들이하고 싶어요.]친구들은 서로 한마디씩 주고받으며 분위기를 띄웠고 설인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이모티콘 몇 개로 답장을 남겼다. 그러고는 곧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하지만 최근 들어 그녀의 일상은 순탄치 않았다. 제대로 된 휴식 없이 일에 매달렸고 잠시 한가해지기만 하면 딸 생각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지금 방은정은 방성원과 함께 지내고 있는데 그녀는 아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설인하는 이미 이혼 소송을 진행 중이었는데 곧 양육권을 반드시 되찾아올 생각이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문득 고개를 들자 연지석이 어느새 그녀 앞에 서 있었다.그녀의 멍한 표정을 보며 연지석이 물었다.“요즘 집에 무슨 일 있어요?”설인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네? 무슨 말씀이시죠?”연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몇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이 서류들, 전부 오류가 있어요. 확인해봐요.”설인하가 서류를 펼쳐보니 숫자들이 엉망으로 기재돼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실수에 깨달음을 얻었다.“아...”머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죄송합니다. 바로 수정하겠습니다.”하지만 연지석은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수정은 필요 없고 그냥 오늘은 집에 가서 쉬세요.”설인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그 말이 혹시 해고 통보는 아닐까 싶어 다급히 말했다.“부사장님, 죄송해요. 정말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제발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세요. 두 번 다시 이런 실수 안 할게요.”절박함이 담긴 목소리와 곧 울음이 터질 듯한 표정
최현아는 잠시 말문이 막히더니 눈빛 속으로 차가운 기색이 스쳤다.“다 큰 어른이면서 내 말뜻을 모르겠어?”그녀는 비꼬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아니면...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건가?”박민정은 흔들림 없는 표정으로 대답했다.“부끄러울 게 뭐가 있죠? 저랑 남우 씨는 줄곧 친구였을 뿐이에요.”최현아는 그 말을 듣고도 전혀 믿지 않는 눈치였다.“그래? 참 신기하네. 난 아직까지 남녀 사이에 그런 순수한 우정이 존재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그녀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유남준을 바라보며 말을 덧붙였다.“남준 씨, 그냥 하는 말이에요. 두 사람이야 부부니까 잘 지내면 그만이죠. 제 말은 신경 쓸 필요 없어요.”유남준은 박민정의 말이 당연히 진심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의 마음을 한층 더 편안하게 했다.“걱정해줘서 고맙습니다, 형수님.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저랑 민정이는 잘 지낼 거니까요.”유남준은 그렇게 답하며 오히려 최현아에게 은근히 감사함을 느꼈다. 차마 묻지 못했던 질문을 대신해줘서.최현아의 입가가 씁쓸하게 일그러지더니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그녀가 사라지자 박민정의 얼굴에도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졌다.귀국한 뒤로 아무도 그녀와 유남우 사이의 일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그 이야기를 꺼낼 필요가 없었지만 이렇게 노골적인 질문을 받으니 마음 한켠이 불편해졌다.박민정은 조용히 유남준을 바라보았다.“나를... 믿어요?”남녀가 1년이라는 시간을 함께 지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걸 믿기란 솔직히 쉽지 않을 것이다.유남준이 대답하기도 전에 박민정은 서둘러 말을 이었다.“괜찮아요. 대답 안 해도 돼요. 당신이 믿든 안 믿든, 난 다 받아들일 수 있어요.”그녀는 고개를 떨구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유남준은 재빨리 그녀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물론 널 믿지.”유남준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그리고... 만약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신경 쓰지 않아. 네가 그때 날 기억하지 못했던 걸
“옆모습이요?” 박민정이 조용히 물었다.“그건 내가 어렸을 때 우연히 찍은 사진이야. 예뻐 보여서 그냥 간직했지.”유남준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그러다 어느 날 네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깨달았어. 그 사진 속 소녀가 바로 어린 시절의 너라는 걸.”박민정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정말이에요?”“당연하지.”유남준의 목소리는 단호했다.그가 그 사실을 알아챘던 건 해외에 있을 때였다. 만개한 벚꽃 아래에서 우연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하지만 그날, 그는 박민정에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박민정은 그의 말을 듣고 나니 괜히 마음이 간질거렸다.“정말 신기한 우연이네요.” 그녀가 나직이 말하자 유남준도 고개를 끄덕였다.그 사진을 오랫동안 간직해왔지만 정작 그 속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 있는 줄은 몰랐으니.생각해 보면 박민정이야말로 그에게 있어 첫눈에 반한 사람이었을지도 몰랐다.둘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처음의 어색함을 조금씩 지워갔다.잠시 후, 유남준이 물었다.“해외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어? 하루하루 어떻게 지냈던 거야?”박민정이 사라졌던 그 1년, 유남준은 매일같이 그녀를 생각했다. 그녀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무엇을 하며 지낼까.박민정은 그의 질문에 잠시 생각하다 답했다.“유남우 씨랑 해외에 있으면서 치료도 받고 최면 치료도 했어요. 그 외에는 혼자 별장에 머물렀죠.”그녀는 덤덤히 말했다.“낯선 곳에서 밖에 나가도 늘 혼자였어요.”유남준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죄책감이 밀려왔고 그녀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마음이 짙게 스며들었다.“미안해.”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박민정은 고개를 저었다.“남준 씨가 사과할 일은 아니에요. 내가 무슨 고생을 한 것도 아닌걸요.”유남우가 비록 끔찍한 짓을 저질렀지만 그녀의 의사는 존중했고 필요한 건 다 채워주었다.둘은 그렇게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느새 목적지가 가까워졌다.멀리서 최현아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남준 씨, 드디어 왔네요.“민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하자 박민정은 급하게 말했다.“어머, 또 비가 오네. 우리 우산 안 가져왔잖아요.”산에 오르기 전, 날씨 예보를 확인했을 때는 비 소식이 없었는데...유남준은 서둘러 배낭을 열어 확인했지만 역시 우산은 보이지 않았다.“괜찮아. 비가 그치면 다시 올라가면 돼.”유남준이 담담하게 말했지만 박민정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근데 예찬이는 괜찮을까요? 혼자 있는데...”“세 살짜리도 아니잖아. 걱정하지 마.”유남준의 말에 박민정은 입을 다물었다. 물론 박예찬은 세 살은 아니지만 겨우 다섯, 여섯 살밖에 안 된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마침 그녀가 박예찬에게 전화를 걸어 물어보려던 참이었는데 뜻밖에도 먼저 전화가 걸려왔다.박민정은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휴대폰 화면을 보니 아이는 이미 우비를 입고 있었다.“엄마, 지금 어디예요? 비가 오고 있어요.”박민정은 주위를 비춰주며 말했다.“우린 아직 여기 정자에서 쉬고 있어. 너희는 산 정상에 도착했어?”박예찬은 대충 거리를 가늠해 보더니, 박민정이 있는 곳에서 정상까지는 아직 한 시간은 더 걸릴 거라 생각했다.“네, 저희는 도착했어요. 선생님이 비옷 나눠 주셨어요. 근데 엄마, 우산은 챙겼어요?”아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박민정은 거짓말을 했다.“그럼, 챙겼지.”“다행이네요. 그럼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올라와요. 길이 미끄러우니까 조심하고요.”박예찬의 다정한 당부에 박민정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알겠어, 조심할게.”이렇게 보니 정작 걱정할 필요가 있는 건 박예찬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괜히 아이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전화를 끊은 후, 그녀는 유남준을 향해 말했다.“우리 가요. 천천히 가면 돼요.”“좋아.”유남준이 일어섰다.박민정도 기둥을 붙잡고 천천히 일어섰지만 갑자기 몸의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면서 그대로 유남준의 넓은 품속으로 쓰러지듯 안겨 버렸다.박민정은 순간 당황했다.“죄송해요. 그냥 갑자기 일어나서 약간
박민정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소리쳤다.“정말 괜찮아요!”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은 벌떡 일어나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갑작스러운 공중부양에 박민정은 깜짝 놀라 그의 옷깃을 본능적으로 움켜쥐었다.“빨리, 빨리 내려놔요!”두 사람의 다소 소란스러운 모습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여기저기서 부러운 듯한, 혹은 질투 어린 시선이 쏟아졌고 몇몇은 빈정거리는 말도 던졌다.“정말 유난이네. 겨우 산 중턱인데 남편한테 안겨 가겠다니.”그 말을 들은 어떤 여자는 남편을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여보, 나도 못 걷겠어. 나도 좀 업어주든가, 안아주든가 해.”남편은 한숨을 푹 내쉬며 대꾸했다.“자기 체중이나 생각 좀 해봐. 내가 어떻게 안아?”하지만 그런 말에도 아내를 번쩍 안아 올린 남편도 있었고 애써 힘을 내던 그는 이내 체력이 바닥나 금세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그렇게 뜻밖의 분위기로 웃음과 농담이 오가는 가운데 최현아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유남준의 품에 안겨 있는 박민정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박민정은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제발 내려놔요. 이러니까 더 불편하단 말이에요.”유남준은 그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뭐가 불편한데?”“그냥 불편해요.”박민정은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유남준은 그제야 조용히 그녀를 내려주었다.“너무 높이 올라와서 숨이 차서 그런 거야?”박민정은 고개를 숙여 그의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이렇게 많은 부모와 아이들 앞에서 한 회사의 대표가 이렇게 유치한 짓을 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정말 창피하기 그지없었다.게다가 어린아이들까지 흥미를 보였는데 작은 여자아이가 옆의 남자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나중에 우리 결혼하고 내가 힘들다고 하면 너도 나 안아줘야 해.”남자아이는 당당하게 가슴을 두드렸다.“걱정 마!”박민정은 어처구니가 없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이 어린애들이 벌써 결혼 이야기를 하다니.’유남준은 그녀가 말없이 있는 걸 보
조민혁은 아내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당신 말이 맞아. 내가 너무 좁게 생각했어. 당신이랑 동민이에게 괜한 고생을 시켰네.”한가영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당신이 이제라도 깨달았으니 됐어요. 나도, 동민이도 다 이해해요.”부부는 이렇게 화해했지만 그들은 모른다. 어제의 일이 조동민에게 얼마나 큰 변화를 가져왔는지를.조동민은 유지훈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유지훈은 이것저것 지시하며 이리저리 움직이라고 했고 조동민은 아무 말 없이 순순히 따랐다.둘이 가파른 언덕에 이르렀을 때 조동민의 머릿속에 문득 불길한 생각이 스쳤고 그는 언덕 아래를 가리키며 말했다.“지훈아, 저기 좀 봐.”“뭐가 있는데?”유지훈이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살피자 조동민은 그의 등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을 드리웠다. 그는 천천히 두 손을 들어 마치 유지훈을 밀어버리려는 듯한 동작을 취했다.그 순간,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동민아, 유지훈! 선생님이 산에 올라가자고 하셔!”박예찬이었다.조동민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으나 속으로는 아쉬움이 밀려왔다.‘조금만 더 빨랐더라면...’유지훈은 돌아서며 말했다.“알겠어, 가자.”그는 앞장서 걸었고 조동민은 묵묵히 뒤따랐다.박예찬은 그들이 출발하자 조동민 곁으로 다가와 조용히 물었다.“아까... 유지훈을 밀려고 했지?”조동민의 얼굴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예찬아, 제발 이 얘기 아무한테도 하지 마.”박예찬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되물었다.“내가 그런 고자질쟁이로 보여?”조동민은 고개를 저은 뒤 머뭇거리며 말했다.“그냥...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한 번쯤은 혼쭐을 내주고 싶었어.”박예찬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야.”“왜? 밀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조동민은 이해하지 못한 채 되물었다.박예찬은 침착하게 설명했다.“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어. 유지훈이 다치면 누가 제일 먼저 의심받을까? 당연히 그 옆에 있던 너야.
박예찬은 조동민의 단호한 모습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그래, 알겠어.”“고마워, 예찬아!”조동민은 금세 얼굴이 환해졌다.멀리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유지훈은 조동민의 웃음이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 느껴졌다. 분노를 참지 못한 그는 성큼성큼 다가오며 소리쳤다.“조동민, 너 또 까부는 거야?”조동민은 젓가락을 꼭 쥐었지만 박예찬이 나서기 직전 먼저 웃으며 말했다.“지훈아, 내가 감히 어떻게 그러겠어. 어제는 내가 잘못했어. 화풀어, 응?”유지훈은 순간 어리둥절했다.‘이 녀석, 왜 갑자기 태도가 바뀐 거지?’분명 전엔 자신의 심부름꾼 노릇하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는데.조동민은 이제 상황을 파악할 줄 알았다. 괜한 고집은 소용없다는 걸, 자신은 멋대로 굴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진짜지?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 아니지?”유지훈이 묻자 조동민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다른 애들은 지훈이 너랑 안 놀아줘도 난 같이 놀아줄게.”박예찬은 이렇게 급변하는 조동민의 모습에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환경은 정말 사람을 바꾸는 법이다.유지훈은 그제야 기분이 풀렸다.“그럼 밥 그만 먹고 나랑 놀러 가.”“응!”조동민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박예찬에게 말했다.“예찬아, 이따가 다시 올게.”“어딜 가? 가지 마!”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소리치자 조동민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응, 안 갈게.”그렇게 둘은 함께 밖으로 나갔다.잠시 후, 최현아가 식당으로 들어왔고 유지훈과 조동민이 화해한 모습을 보고 조동민의 부모에게 팔짱을 낀 채 비웃듯 말했다.“보셨죠? 우리 지훈이가 얼마나 속이 넓은지. 당신 아들이랑 다시 잘 지내잖아요.”하지만 조동민의 부모는 이제 최현아에게 굳이 좋은 태도를 보여줄 필요가 없었다.이제는 그들 뒤에 김씨 집안이 버티고 있으니.조동민의 어머니, 한가영이 냉소를 띠며 말했다.“근데요, 아까 보니까 다른 애들은 지훈이랑 안 놀려고 하던데요? 결국 우리 동민이만 지훈이를 마음 넓게 받아주
민박집 안, 모두가 아침 식사를 하며 여전히 아찔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자칫하면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으니.유남준은 대충 식사를 마친 뒤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누가 한 짓인지 밝혀냈어?”그가 물었다.전화기 너머, 서다희는 무릎 꿇고 있는 무리들을 바라보며 대답했다.“밤에 돌을 캐러 갔을 뿐, 사람을 해치려던 건 아니라고 잡아떼고 있습니다.”한밤중에 돌을 캐러 갔다고?이게 말이 되는 소린가?하지만 이들이 진실을 말하지 않으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대표님, 전 개인적으로 유석진 쪽이 의심됩니다.” 서다희가 덧붙였다.굳이 조사하지 않아도 유남준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표정은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그래. 이놈들은 전부 경찰서로 넘겨.”“알겠습니다.”전화를 끊고 돌아서던 유남준의 시야에 최현아와 그녀의 아들이 탄 차가 들어왔다.최현아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바깥에 서 있는 키가 훤칠하고 냉정한 인상의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남준 씨.”그녀는 조심스레 불렀는데 심장이 쿵쾅거렸다.“남준 씨, 왜 혼자 밖에 있어요? 민정이랑 애들은요?”“안에서 밥 먹고 있습니다.”유남준은 냉담하게 답했다.최현아는 어색한 공기를 지우려는 듯 운전기사에게 자신이 호텔에서 포장해 온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아직 제대로 못 먹었을 것 같아서요. 여기 좀 싸 왔어요.”“괜찮습니다. 이런 건 형수님께서 드시죠.”유남준은 말만 남기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고 최현아는 묘한 허전함을 느꼈다.이때 곁에 있던 아들, 유지훈이 못마땅한 듯 물었다.“엄마, 제가 가져온 음식을 왜 삼촌한테 주려 해요?”최현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좋은 건 나눠야 하잖니.”하지만 유지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집에 있을 때 그는 엄마가 아빠에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빠가 밥을 챙겨 먹었는지도 신경 쓰지 않았는데.“엄마, 전 엄마가 이러는 거 싫어요. 앞으로 예찬이 아빠한테 이렇게 잘해주지 마세요. 전 삼촌이 싫